하충희씨는 내가 다닌 전주 서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던 선생님이었다 .그분은 내가 영생고교로 진학한 이후 교직에서 떠나 방송작가겸 작사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하충희씨는 박종대PD의 소개로 찾아왔다는 나를 무척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는 평범한 학생이었던 나를 잊지 않고 알아보았다. 그는 가수가 되기위해 상경했다는 나를 격려하며 유훈군PD에게 소개했고 유훈군씨는 나를 오아시스레코드사로 보냈다. 지금은 방송국을 떠났지만 유훈군씨는 나중에 가수 김상희씨의 부군이 된 가요 쇼PD였다.
당시 오아시스레코드사의 사무실은 충무로 수도악기사 2충에 있었다. 그곳에 도착하니 역시 가수 지망생이었던 나훈아가 이틀전에 왔다고 했고 이영숙이 아카시아 이별이란 노래로 데뷔했다고 했다. 박건도 두글자란 곡을 부르며 막 데뷔할 무렵이었다. 당시엔 성재희씨가 오아시스레코드사의 간판급 가수로 보슬비 오는 거리를 히트시키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사무실에 쪼그리고 앉아 있으려니 화려하고 멋지게 차려입은 선배가수들이 연이어 들어오는 바람에 기가 팍 죽고 말았다. 나훈아와 나만 촌티가 주르르 흘렀다. 창피해서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나훈아는 자신의 외모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태연한 모습에 다소나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땟국물이 흐르는 경상도 촌놈과 전라도 촌놈이 앉아 있던 모습을 생각해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나훈아와 나는자타가 공인하는 촌놈들이었지만 박건 조미미 김부자 등과 함께 오아시스레코드사의 유망주러 뽑혔다. 나는 무엇보다도 잠자리를 해결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회사에서 잠을 잘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밤이면 사무실에서 잠자소 낮에는 작곡가 김학송씨에게 노래를 배웠다. 남들은 사사료를 내고 배우는데 난 그분 댁에서 밥도 얻어먹으며 공짜로 배울 수 있었다. 회사측의 각별한 배려 덕택이었다.
나는 그해 가을 김학송씨의 작곡의 석양에 타는 노을 이란 노래를 취입하며 깔곡 가수로 데뷔했다. 깔곡 가수란 간판급 가수들이 취입하는 앨범에 함께 취입해 부수적으로 수록할 노래를 부르는 가수를 뜻한다. 음반의 A면과 B면 머리곡들은 간판급 작곡가가 만든 간판급 가수의 노래들을 싣고 A면의 4번째나 5번째 즉 아래에 깔린 노래를 만든 작곡가를 깔곡 작곡가,노래한 가수를 깔곡 가수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 무렵에는 선배가수 최희준씨가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었다. 나는 취입할 기회가 생길떄마다 최희준씨의 창법을 흉내를 냈다. 내가 그의 창법을 모방할 때마다 김학송씨등 주위의 작곡가들은 네 목소리거 좋은데 왜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느냐?며 호통을 쳤다.
유명한 가수를 좋아한 나머지 그의 창법까지 모방했으나 직업가수라면 남의 흉내만 내 가지고선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겨우 깨달았다. 뚝배기 깨지는 소리라도 자기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히트곡이 하나도 없느데 개성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누구도 닮지 않은 목소리, 누구도 닮지않은 창법이라야 성공할수 있다는 논리는 곧 증명되었다.
나처럼 깔곡 가수로 빌빌대던 동료 나훈아의 출세가 바로 그것이다.
1967년 말경이었다. 나훈아는 내가 석양에 타는 노을을 취입한 비슷한 시기에 천리길을 발표해 좋은 반응을 얻었으나 이 노래가 표절시비에 휘말리는 바람에 스타가 될 기회를 놓친 쓰라린 경험을 있었다. 그런던 어느날 갑자기 이 친구가 취입한 신곡이 라디오에서 나오는가 싶더니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곡이었다. 얘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히트하자 강촌에 살고 싶네 너와 나의 사랑 낙엽이 가는 길등 어떤 노래라도 나훈아가 불렀다하면 무조건 히트였다.
나훈아는 누구도 닮지 않은 목소리에 누구의 흉내도 내지 않는 특이한 창법으로 하루아침에 가요계 최고의 스타로 부상한 것이다. 그의 가창력이 뛰어난 덕택이었지만 그 친구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각광을 받은 것은 그만의 창법을 개발했기 떄문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빌빌대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유명해지는 걸 옆에서 지켜보는 심정은 정말 착찹하다. 친구가 출세했으니 기뻐해야 할텐데 속으로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던 것이다. 친구의 출세가 처량하고한심스런 내 신세를 확인해준 셈이기 떄문이다.
애타는 내 마음을 울린 것은 나훈아의 벼락출세만이 아니었다.
나보다 먼저 데뷔했지만 함께 깔곡 가수로 활동하던 박건, 조미미, 김부자 등이 차례로 스타덤에 오른 것이다. 더욱약이 오르는 것은 당시 신인발굴의 귀재로 불리던 오아시스레코드사의 손진석사장이 수많은 깔곡가수들중 내게 가장 기대를 걸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나를 보면 네가 제일 먼저 출세할 것이라며 격려하곤 했는데 그의 예상이 여지없이 빗나간 것이다.
나훈아 등 동료가수들의 출세로 내 신세가 한층 초라해졌지만 좋은 점도 많았다. 개구리 올챙이 적생각못한다고 했지만 나훈아와 조미미는 올챙이 시절을 잊지 않은 의리의 가수들이었다. 나훈아가 스타덤에 오른 1969년초 오아시스레코드사는 충무로에서 청계천5가로 사무실을 이전했다. 스타가 된 나훈아와 조미미는 사무실에 들렀다하면 별볼일 없는 우리 무명가수들에게 한턱을 내곤 했다. 이들이 나타나면 무명가수들의 잔칫날이 되는 것이다. 이들은 때로는 함께 또는 따로따로 나타나선 언제나 배가 고픈 우리들을 오아시스레코드사 아래층에 있던 중국집으로 몰고가 포식을 시키곤 했다.
없는 집안 큰아들 출세하면 온 식구들이 빈대노릇을 하는 형국이었다. 그렇게 아귀처럼 얻어먹으며 빈대노릇을 톡톡이 하면서도 어쩌다가 바쁜일 때문에 그냥 가버리기라도 하면 출세하니 사람 변했다며 씹는 것이 배고프고 할일 없는 우리 무명가수들의 일과였다.
내가 씹기도 많이 씹었지만 나훈아는 정말 의리로 뭉쳐진 친구였다. 그는 성격이 두껍고 우직하며 강인한 일면을 갖고있다. 그는 출세한 이후 자신의 무대에 오른다는 조건을 제시하며 끈끈한 우정을 보이곤 했다. 특히 지방극장 쇼에선 언제나 나훈아와 송대관이 함께 출연했기 때문에 지방팬들은 나훈아 하면 송대관을 함께 생각할 정도가 됐다.
요즘은 먼발치에서 그를 바라보지만 나훈아는 의리만은 가요계 최고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는 요즘 모든것에서 최고라는 지나친 자부심 때문에 주위에세 경원당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있다. 내가 콩 놓아라 팥 놓아라 할 입장은 아니지만 이친구가 너무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다.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그 정도 자존심을 내세울만도 하지만 …. 부산공연에서 생긴 일이다. 극장분장실에서 막이 오르길 기다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험상궃게 생긴 청년들 대여섯명이 몰려왔다. 그들은 나훈아를 보더니 말하는 것이었다. 야 깜상 ! 너 오랜만이다 나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소도둑놈처럼 생겼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깜상이라는 소리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나훈아도 그 건달끼가 보이는 친구들을 무척 반기는 표정이었다. 나는 나중에 궁금해서 물었다. 너도 예전에 주먹좀 썼냐? 네가 어떻게 건달 노릇을 했니? 그의 얘기가 들어보니 그는 가수가 되기위해 무작정 상경하기 전 부산에서 유명한 주먹쟁이였단다. 그는 부산에서 깜상이란 별명으로 불렸다고 했다. 내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자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발놀림이 손을 놀리듯 자유자재였다. 나는 그 모습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선 혼자 중얼거렸다. 깜상이 갖출 건 다 갖췄구나… 나훈아가 그렇게 도와주려고 애썼지만 몇 년이 지나도 나는 여전히 깔곡 가수의 신세였다. 그 사이에 많은 후배가수들이 연이어 히트곡을 내고 인기가수의 대열에 들어섰다. 까까머리 고교생이었던 배성이란 가수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데뷔할 무렵 내게 넓죽 엎드려 절을 할 정도로 공손한 가수였느데 사랑의 블루스란 노래가 히트하자 태도가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나를 보고 인사는 커녕 아는척도 안했다. 그 모습에 배알이 뒤틀렸다. 똥밟은 표정을 짖고 앉아 있는데 나훈아와 작곡가 박성규가 나를 보더니 왜 그러냐?며 물었다. 그들은 내 설명을 듣더니 배성을 잡아다가 두드려 팼다.
나훈아와 작곡가 박성규가 후배가수 배성의 버릇을 고쳐준답시고 그를 데려다가 폭력을 휘두른 것이 잘했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수년동안 무명가수로 전전하며 사기가 떨어진 나를 위로하기 위한 의리의 표시로 그런 행동을 한것이다. 나훈아는 나중에 자신의 친구가 후배한테 무시당하는 꼴은 죽어도 보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내 모습이 얼마나 딱했으면 후배를 두드려 팼을까 하고 생각하니 코가 시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