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김창환(金昌煥: 1854-1930)
나주군 삼도면(현 광주시 광산구 대산동) 출신으로 이날치, 박
기홍과 이종간이며, 근세 명창 임방울의 외삼촌이다. 정창업의
제자로, 계면조를 중심으로 한 서편제 창법에 뛰어났다. 김창환
은‘의관’이라는 벼슬을 받았는데, 1906년 7월 10일 자「황성신
문」기사에 김창환이 군부대신 집에 불려가 소리를 하고, 가자를
받았다는 내용이 있어, 김창환이 벼슬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김창환의 공적은 뭐니뭐니 해도 협률사와 관련되어 있다. 때로
김창환이 원각사의 주석을 맡았다는 사람도 있지만, 원각사는 협
률사가 혁파(1906)된 뒤에 1908년에 관리 주체가 바뀌면서 붙여
진 이름이다. 그런데 1906년에 이미“협률사 중 제일 유명한 광
대 김창환”이라는 신문기사가 보이기 때문에, 김창환은 일찍이
1902년부터 협률사에 관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다
시피 협률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창극을 공연한 곳이다. 따라서
창극의 발생은 김창환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김창환은 1908년 원각사에서 공연된 최초의 창작 창극
「최병도(두) 타령」에서 주인공 최병도 역을 맡았다. 박황에 의하면 이「최병도 타령」은 대단한 인기가
있어서, 주인공 최병도가 억울하게 죽어서 나오는 장면에서는 손님들이 달려와서 김창환의 목에 엽전
꾸러미를 걸어주는 광경이 연출되기도 했다고 한다.
협률사와 원각사 등 극장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던 김창환은 낙향한 후 자체적으로‘협률사’를 조직
하여 공연에 나섰다. 그 시점이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김창환이 조직하여 공연에 나섰다는 협률
사가 우리나라 최초의 협률사가 된다. 1910년 무렵에 시작되어 판소리가 몰락하던 1960년대까지 이어
졌던 협률사 공연 방식은 김창환으로부터 출발되었던 것이다.
김창환은「흥보가」를 잘하였으며, 더늠으로는‘제비 노정기’가 있다. 이‘제비 노정기’는 현재 부르
는 모든「흥보가」에 들어 있다. 김창환의「흥보가」는 아들인 김봉학과 오수암, 정광수 등에게 이어졌으
나, 현재 활발하게 불려지지는 못하고 있다.
김창환은 음반 녹음에도 참여하여 여러 장의 음반을 남겼다.
② 김채만(金采萬: 1865- ? )
김채만은 전남 화순군 능주에서 출생하였다. 그러나 곧 광주로 이사하여 속골(광주시 효덕동 구암촌)
에서 살았다. 김채만을‘속골 명창’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날치에게 박창섭과 같이 소리를 배웠으나 항상 박창섭에게 뒤졌는데, 스승에게 어찌하면 잘 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소리를 수만독하면 자연히 이치를 알아 잘 된다’고 해서 열심히 노력해서 일가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라감영에 초청되어 송만갑과 같이 소리를 하다가, 감사에게 무안을 당한 뒤
속골로 돌아와 보통 목침보다 두 배나 큰 대추나무 목침 세 개가 닳아지도록 연습을 해서 대성을 하였
다고 한다. 그의 목소리는 수리성에 양성이 섞여 있어 별로 좋은 목은 아니었으나, 오랜 수련 끝에 명창
이 되었기 때문에 탁월한 기교가 있었다고 한다. 김정문이 그가 소리하는 것을 듣고 감탄하여, 김채만
에게 공부한 뒤 명창이 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김채만의 서울 활동 시절에는 박영효가 특히 김채만의 소리를 좋아하여 자기 사랑에 두고 소리를 시
켰다고 한다. 김채만은 이 은혜를 생각하여, 박영효가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는 제주도까지 가
서 기거를 같이 하였다고 한다.
박황에 의하면, 김채만은 1912년 광주에서 협률사를 조직하여 순회 공연에 나섰다고 하였다. 그 시
기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김정문과의 일화를 통해서 보더라도 그가 일찍부터 협률사를 조직하여 공
연을 한 것만은 틀림없다고 하겠다. 김채만은 김창환과 더불어 지방 협률사 공연의 개척자라고 할 만
하다.
김채만은「심청가」를 잘하였으며, 「심청가」첫머리가 그의 더늠이다. 김채만의 소리는 박동실, 공창
식, 박종원 등에게 이어져 서편제 소리를 대표하는 소리가 되었다. 이들의 소리는 김소희, 김동준, 한승
호, 한애순, 장월중선 등에게 이어져, 지금도「적벽가」(한승호),「 심청가」(김소희, 한승호, 한애순, 장월
중선)의 경우 전승이 되고 있다. 이들의 소리는 해방 직후까지는 박동실을 중심으로 해서 대단한 세력
을 형성했었으나, 6.25 때 박동실, 공기남(공창식의 아들) 등이 월북함으로써 세력이 많이 약해졌다.
월북한 인사 중에서 박동실은 인민배우, 공기남은 공훈배우가 되었다.
첫댓글 매일 매일 공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