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종교법인 한민도전 "hanminworld"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지┃ 역사 스크랩 내가 겪은 1946년부터 6.25 전쟁 (제1부 밤손님과 반란군)
백금소 추천 0 조회 55 10.05.11 12: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내가 겪은 1946년부터 6.25 전쟁       

           제1부. 밤손님과 반란군         순 담

 올해는 6.25전쟁 6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광복 후 1946년부터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를 되돌아보면서 이데올로기와 전쟁으로 겪었던 일을 내 나름대로 기술해 보고자 자판을 두들기게 되었다. 나는 광복 후 일본에서 나와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금성리 앞 삼거리와 노루목 그리고 강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원치 않게 빨치산 교육을 받았고 활동도 같이 했었다.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에 있는 가지산-보림사는 인도와 중국에 있는 가지산-보림사와 더불어 세계 삼보림(三寶林)으로 일컬어지는 천년의 고찰이다. 통일신라 말기인 860년경에 세워진 보림사는 산세가 깊고 물이 맑은 탐진강 상류로 냇물에는 쏘가리와 향긋한 은어가 많고 주변엔 비자나무가 무성했다. 보림사를 끼고 있는 가지산 자락의 봉덕리에서 위쪽으로 더 올라가면 죽동과 연결된 암천리가 나온다. 이곳은 6.25 후 한동안 지리산 다음으로 가는 빨치산부대의 전진기지로 전라남도사령부가 자리 잡고 있던 해방구였다.


 이 지역에 전해오는 이야기로 절터가 될 깊은 소에 살았던 용이 쫓겨 내려가면서 앞을 가리고 있는 산자락을 꼬리로 쳐서 생긴 용소(龍沼)라는 깊은 소가 있다. 이 소에서 용이 피를 흘리며 넘어갔다는 피재와 보림사로 들어가는 삼거리에는 안쪽으로 금성리 마을이 있고 소 옆으로는 우리 외갓집이 지역의 부호로 동학난을 겪다가 떠난 용문리가 있다. 영암-영보가 고향이신 아버지는 일본에서 귀국하여 외갓집에 왔다가 보림사를 구경하시고 나오시다  경치가 좋은 용소 앞 여관집을 사들인 바람에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암천리와 봉덕리 앞을 흘러내려 금성리와 용문리 앞을 지나고 다른 한쪽으로는 조양리와 덕산리 앞으로 흘러내려 면소재지 장터 앞에서 합쳐진 탐진강은 금사리와 단산리 앞으로 흐른다. 영암군 금정면 세류리 궁성산 범바위골 성터샘에서 시작한 탐진강 물줄기는 유치면을 양 갈래로 적시면서 부산면 앞들과 장흥읍내을 거쳐 강진군 군동면 삼신리 삼각점에 이르러 강진만으로 들어간다. 근래에는 유치면과 부산면 사이를 막아 장흥다목적댐이 생긴 후 유치면의 낮은 지역은 물에 잠겨 큰 호수가 되어버렸다. 유치면소재지는 조양리로 옮겨지고 인구가 줄어들면서 남은 산간지역이 더 깊숙한 곳이 되어 발길이 닿지 않은 것 같고, 6.25때 소실되었다가 다시 중건한 보림사의 역사와 더불어 이데올로기와 전쟁의 아픈 흔적들은 곳곳에 묻혀 있다.


 이러한 유치면은 산세가 험하고 깊은 골짜기와 분지가 있어 40년대 초반까지도 금성리 옆 아흔아홉 골짜기라는 엉골에 호랑이와 곰 늑대가 살았다고 한다. 이후에도 여우는 한낮에도 산마루나 고갯길도처에서 보였고 오소리, 멧돼지 그리고 노루와 꿩이 많았다. 이런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동학란 난을 겪고, 6.25전후로는 지역 좌익분자들이 모여들고 특히 여수14연대 반란군 잔당들이 이곳 밤손님들과 합쳐지면서 게릴라활동이 더 심해져 갔다.


 


 일본에서 나온 지 두어 달 밖에 되지 않아 모든 것이 생소한데 해가 바뀌어 1946년 이른 봄, 바람이 심하게도 물던 날이다. 낮에 숯을 실려 왔던 목탄차가 내려앉은 목조다리 옆으로 난 도랑 길 언덕을 못 오르고 부릉거리다 멈춰선 것을 동네사람들이 밀고 당겨서 겨우 나간 후 날이 저물었다. 인적이 끊기고 호롱불마저 꺼진 적막한 밤중인데 금성리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 집 앞 냇가 길로 누가 쫒기고 떼를 지어 달려가는 소리가 들려와 온 식구가 두려움에 떨며 밤을 지새웠다.

 

  일제 때부터 금성리에서 구장을 하는 자그맣고 당당한 체구의 박채동영감과 그의 큰아들 유치지서 박노호순경이 간밤에 들이닥친 괴한들에게 변을 당한 것이다. 가지산에서 내려온 것으로 추측된 십여 명의 괴한들은 동네의 터주 대감 노릇을 하며 세도를 부리고 사는 박영감을 마당으로 끌어내어 몽둥이로 패고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이 때 옆방에 있던 박순경은 재빠르게 뒷문으로 빠져나갔고 임시 순경이 된 둘째 아들 박병찬은 미쳐 빠져나가지 못하고 헛간으로 들어가 섯가래를 붙잡고 천정에 붙어있는 통에 화를 면했다. 맨몸으로 나와 마을을 빠져나온 박순경은 우리 집 뒤 용소 쪽으로 뛰다가 송들 앞 냇가 요강沼 앞에서 추격해 온 그들에게 잡혀 살해됐다.


  정부가 수립되는 과도기를 혼란케 하기위해 준동하기 시작한 자익분자들은 가지산 일대를 아지트로 밤에만 나타나 우익인사와 감정이 있는 사람을 해치기 시작했다. 순박한 주민들은 혹 누가 밀고하여 화를 당할 까 두려워하면서 그 사람들이 이번에는 어디로 누구 집에 와서 이러고저러고 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눈치를 보아 밤손님이라고 우대해 불렀다. 금성리에 나타났던 밤손님들은 또 인근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경찰관을 살해하고 주로 우익성향이 짙은 유력인사들을 회유협박하고 납치해 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유치면에는 1922년 송정리에 개교한 본교인 유치국민학교 (현 초등학교)외에도 조양리와 대리 그리고 암천리에 분교가 있었는데 본교 교감으로 학교관사에 사는 문여익 교감이 밤손님들에게 납치돼 갔다. 유치면은 외가 집안 문 씨들의 세가 있는 고장이라 면장도 문씨요 암천리 분교장도 먼 외할아버지 벌 되는 분이셨다. 한편 왜정 때부터 순천경찰서 요직에 있던 외할아버지의 집안 동생 벌 되신 문창호씨가 8.15후 지역좌익의 두목이 되어 입산했다. 문씨는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친 조카인 문교감을 찾아와 입산을 몇 차례 권유했으나 듣지 않자 어느 날 밤 부하들을 시켜 강제로 끌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본 외가 집은 큰 외숙이 장흥재판소에서 유일하게 사법대서소를 하고 계셨고 암천리 분교장인 먼 외할아버지의 큰아들은 육군 소위가 되어 있는 관계로 우리 집은 반동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또 해가 바뀐 1947년 봄, 시국이 불안하고 정당한 일이 없어 방황하는 아버지를 외할아버지께서 유치면 호적서기로 주선해 주셨다. 우리 집은 여관집을 팔고 엉골 입구 문씨들의 제각이 있는 노루목으로 잠시 옮겨 살다가 송정리 물가에 있는 강동마을로 이사를 했다. 이 때 강동마을 앞 냇물 건너 공수평에서는 국방경비대에 입대한 장진철 고종 형님이 사지군복에 정모를 쓰고 나타났는데 여수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킨 시점이었다. 고종형님은 반란군에서 도망해와 숨어 지내다 육군에 재 입대하여 1951년 육군일등중사로 최전방에서 인민군과 싸우다 머리에 총상을 맞고 의병제대를 하셨다.  


  대한민국 국방경비대로 출발한 여수14연대는 좌익분자인 지창수상사 등 40여명이 주동이 되어 47년 10월 19일 국군장교 20명과 하사관 43명을 살해하고 연대를 장악한 후 여수와 순천 벌교와 광양을 점령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반군을 우선적으로 진압하고 군에 엄명을 내렸다. 진압작전에 돌입한 국군에게 수적으로 열세한 반란군들은 쫓기고 소멸되면서 살아남은 자들이 지리산으로 들어가고 그 일부가 가지산 밤손님들과 합류하여 세를 화장한 그들을 통칭하여 반란군이라고 했다. 무기가 열약한 밤손님은 반란군들은 휴대한 성능 좋은 미제 M1소총을 가지고 한낮에도 전선줄을 끓고 지서를 습격했다. 야간정보활동은 밤손님출신들이 담당하면서 본격적으로 식량을 거둬가고 젊은이 들을 회유하면서 끌어가고 있었다.


  또 한해가 가고 48년이 되었다. 여섯 살 위의 형이 졸업하고 네 살 위의 누나가 4학년이 될 때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말이 서툴고 우체부처럼 가방을 매고 다닌다고 놀림을 당해 학교를 겨우겨우 다니고 있을 때다. 조양리 쪽에서 경찰관이 또 살해되어 지서장과 면장 그리고 경찰관들이 3/4톤 스리쿼터를 타고 장례식을 하려 금정면 상가를 향해 신풍리에서 덤재를 넘다가 반란군의 기습을 받았다. 무장을 했지만 전원이 살해되고 차량과 함께 불태워진 끔직한 사건이 대낮에 발생하자 광주에 있던 20연대의 2개 중대가 내려와 주둔하면서 토벌작전에 나섰지만 초기에는 당하기가 일쑤였다.  


 유치면은 이웃 부산(夫山)면과 장동(長東)면을 합친 것 보다 더 넓은 지역으로 영암군 금정면, 강진군 옴천면, 화순군 도화면, 그리고 장흥군 부산면, 장평면, 장동면으로 둘러싸여 골짜기가 많은 분지를 이루고 있었다. 면 전체에 전기시설이 없는 때라 자갈길 신작로 버스와 일반차량이 장흥읍에서 부산면과 유치면의 경계인 빈재를 넘고, 신풍리에서는 덤재를 넘어 다녔다. 그리고 송정리의 학교 앞에서 우측으로 꺾어진 길은 내가 살던 강동 앞에서 냇물을 건너 보림사와 피재 방향인데 피재는 산적이 있다고도 하여 차량통행은 물론 사람들도 잘 다니지 않았다. 소구루마(소달구지)가 다니고 운전석 적재함 한쪽에 보일러 통을 장착하고 숯불을 피우면서 다니는 일제 목탄차가 엉골과 일대에서 구어 낸 숯과 장작을 실어 나르려 다니는 게 고작이었다.


 회상해보면 빨치산들 때문에 피해가 많았지만 마을 주변 산이나 계곡에는 밤, 상수리와 도토리는 물론 어름, 다래, 야생복숭아, 산딸기, 보리딸기, 먹딸기 등 딸기종류도 다양하여 자연산 먹 거리가 흔했다. 또 취나물 고사리 더덕 도라지가 많고 산짐승들과 냇가에는 메기 뱀장어 피라미는 물론 향기가 날 정도로 깨끗하고 맛있는 은어, 쏘가리, 모래무지, 징거미를 잡고 냇가에 갈려 있는 누리끼리한 고동(다슬기) 건져다가 된장국에 끓여 탱자나무 가기로 쏙쏙 빼먹던 시절이 아름답게 회상된다.  


                                                (2010년 3월 26일)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