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악리(華岳里)는 높은 산 깊은 계곡으로 둘러싸인 경기도 최고
봉 화악산(華岳山 1568m) 아래 위치해 있다. 이 화악산을 비롯
한 촉대봉, 몽덕산등 해발 1,OOOm가 넘는 산이 즐비하고, 계곡
깊숙히에는 지금도 천연림으로 둘러싸인 숲과 옥류가 줄기차게
흘러내린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역사적인 인물들이 이곳을 찾아
들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바 있다.
멀리 1421년(世宗 3)에는 한산이씨의 시조 목은 이색(李穡)의 손
자인 이맹균이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에 다녀오다가 이곳에 이르
러 시를 지어 찬양한바 있고, 1676년(肅宗3)에는 우의정이던 허
목(許穆)이 이곳에 찾아와 구름에 휩싸인 산야를 바라보며 무릎
을 쳤다는 고사가 그가 지은 유산록(遊山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밖에도 숱한 시인과 묵객들이 찾아 들며 자연의 아름다
움을 글로써 노래하고, 운무에 어우러진 산수를 그려 가며 풍월
과 더불어 노닐던 그네들의 모습을 일일이 기록하지 못하고 그
저 잠시 스쳐볼 뿐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자취가 서려 있는 화악리는 자연부락으로 신당
리(新塘里), 홍적리(紅績里), 유동(柳洞), 중간촌(中間村), 중봉
동(中峰洞)등이 있다. 신당리란 말은 새버덩이의 한자어 화한 이
름으로서 홍적천과 광악천의 합류 지점인 넓은 들녘을 새버덩,
새버들, 새메기라하였듯이 새로 개간한 들녘이란 뜻의 이름이
다. 현재의 화악국민학교가 있는 지역의 소지명이다. 홍적리는
붉은 덕이 또는 높은 언덕이란 뜻으로 언덕의 덕자가 세월이 흐
르는 동안 적자로 어원이 변한 것이다.
예를 든다면 홍적리의 동쪽 산들이 모두 덕자로 되어 있다. 몽덕
산(蒙德山), 가덕산(加德山)이 그 예이다. 그러므로 붉은 덕이
→ 紅德 → 홍직이 → 紅績里 → 이렇게 변해음을 알 수 있다.
홍적리에서 북쪽으로 홍직이 고개를 넘으면 강원도 화천땅 지암
리에 이르고 동쪽으로 봉숭골 고개를 넘으면 오월리 남실로 간
다 하여 남실고개라 부른다. 큰홍적, 작은홍적 그 이름도 새로운
데 이곳에는 인간의 정서가 가득한 소지명들이 즐비하다. 바위
밑에 모셔 놓은 신주(神主)를 뫼시러 갔다가 신주골 입구에서 처
음 만난 남여가 연애를 걸었던지 연애골이 옛날 그대로 아늑하
고, 그래서 바람이 났는지 바람골은 무삼일까? 어쩌다 비라도 내
리면 작은 홍직이 곰에 굴에 들어가 비를 피하며 사랑을 속삭였
을 시 분명하다.
그러다가 도깨비라도 나타나는 날이면 아가리(입)를 딱 벌려야
했다는 도깨비소와 아갈소가 그렇게도 정겨울 수 없구나. 유동
은 안새댕이를 지나 돌아가는 지역인데 지금은 버들아치라 부르
고 일명 새말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6.25사변 후에 새로 생긴 마
을이란 뜻이다. 중간촌은 광악국교 윗마을로 새말과 건들내 중간
이란 뜻이다. 건들내(건드래)는 마른 내의 준말로서 계곡이 맑
고 아름답다가도 한해의 한두번씩 정도는 가뭄이 들어 물이 없다
는 뜻의 소지명이며, 화악리 종점 말이다.
중봉동은 화악산 중턱에 놓여 있는 마을로서 화전민이 철거하지
않던 시절에는 수십호의 인가가 산을 개간하여 생활하였지만 지
금은 한두 집이 외롭게 그 시절을 지켜 가고 있다. 화악산에는
예로부터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지내던 기우제 터와 산신제 터가
있는데 영주암바위가 있는 지역이다.
이곳에서 조금더 오르면 절터가 한곳 나타나는데 이 절이 용천사
(龍泉寺)였다고 가평읍지에 기록된 것이 보인다. 애기골에 관하
여는 도대리의 이야기를 더듬어 주기 바라며, 이곳 화악리에는
특별히 멀리 금강산까지 이어져 있는 줄바위에 관한 설화가 전해
지기에 몇자 적는다. 이 줄바위는 산 능선을 따라 뻗어 있는 관
계로 이곳 주민들은 아이를 업고 있는 모습이라 하여 애업은 산
이라 부른다.
아주 먼 옛날에 지리산(智理山) 산삼(山蔘)의 총각이 금강산(金
剛山) 산삼의 처녀와 혼인을 하기 위하여 찾아가다가 이곳 화악
산에 이르러 하룻밤 묵게 되었는데, 그 날밤 꿈에 산신령이 나타
나서 이르기를 사람들의 눈에 띄이면 금강산을 가지 못하게 될
것이니 혹시 사람이 나타나거든 금강산을 세번만 부르라하고 어
데론가 살아졌는데 께어보니 새벽이었다. 지리산 산삼총각은 꿈
도 잊은 채 금강산으로 향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어데선가 산
삼을 찾아 나선 심마니가 나타나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산삼총각은 금강산을 부르란 말을 생각지 못하고 아리
따운 산삼낭자만 눈에 어리어 " 산삼낭자" 를 세번이나 불렀단
다. 이때 금강산에서 이 소리를 들은 산삼낭자가 어른들의 만류
를 뿌리치고 산능선을 따라 이곳에 이르니 지리산 산삼총각은 벌
써 몽덕산에 들어가 숨어 있었으므로 서로 만나지 못하여 금강
산 산삼낭자는 화악산 중봉에 들어가 지금까지 살고 있단다.
그리하여 그후부터 이 산삼총각과 낭자삼을 찾기 의하여 심마니
들의 발길이 끝일 날이 없었지만 오늘날까지도 찾은 이 없다고
전해 온다. 무당이 굿을 하는 듯 둥당대는 무당소에 목욕하고 신
선봉골짜기 호통골을 지나 다시 중이 지나가던 중소 개울을 건너
면 찾을 수 있을는지, 내일 아침해가 뜨면 또다시 찾아 들고 싶
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