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레지오 창설과 한국 레지오 발전사 -레지오마리애의 한국도입
세계 레지오 창설과 한국 레지오 발전사
1. 세계 레지오 마리애 창설자
◆프랭크 더프(FRANK DUFF)의 사상과 생애
레지오 교본을 개혁하려는 시도에 저항하여 꾸준히 싸워야 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시도 중에서 실현된 그룹들은 즉시 없어지거나 아니면 얼마 안 가서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프랭크 더프의 회고에서-
<1> 어린 시절
레지오 마리애 창설자인 프랭크 더프는 1889년 6월 7일 성령강림 대축일 아일랜드 수도인 더블린에서 북쪽으로 40Km쯤 떨어진 아담한 도시 트림에서 국가 공무원인 부모 사이에서 4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가정의 분위기에서 태어난 그는 탄생 이틀 후에 프란시스 마이클이란 세례명을 받았으며 부모의 두터운 신심생활을 본받으며 성장하였다. 학교 교육은 초등학교부터 수녀가 경영하는 데임즈 학교를 졸업하고 명문인 블랙록크 켈레쥐 중등학교를 졸업하는 동안 학업 성적이 대단히 우수하고 봉사 정신이 강했으며 튼튼한 체격을 단련하는 구기 운동을 즐겼다. 또한 영국 식민지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자기 민족의 자유를 위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고유의 언어 활성화에 깊게 참여하였다. 그는 19세에 블랙록크 켈레쥐를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국가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됨으로써 봉사의 정신을 발휘하고자 하는, 마음에 드는 직장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놀랄 만한 정력과 강한 의지를 소유한, 주위에서 모두들 촉망하는 늠름한 청년으로 총애를 받았다.
아일랜드는 그 당시 영국의 식민지 치하에서 벗어나 국가의 건설 작업에 한창 분주하였다. 프랭크는 아주 젊은 나이지만 주요 업부를 담당할 수 있는 재원이기에 농림부에 발탁되어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에 착수하였다. 특히 수리가 빠른 두뇌의 소유자인 프랭크는 다시 재무부로 발탁되어 열심히 능력을 발휘하여 정부 초창기에 기강이 없고 질서가 문란해 있는 조국의 정부조직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큰 공로를 세웠다. 그는 무슨 일이나 성실한 생활로 그 일에 몰두하여 책임을 완수하는 습관이 있었고 항상 그에게는 어떤 큰 신념이 꿈틀거리는 듯 보였다. 가끔 먼 하늘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는 모습은 하느님과 대화하는 시간이었다. 주어진 계획과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항상 밤늦게까지 직장에서나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명감이 강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학창시절에 뛰어난 재능으로 우수한 성적을 획득한 것만 보아도 그의 성실성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일에나 소홀함이 없는 차분한 자세로 친구와 이웃에 좋은 인간관계를 가졌고 그와 친교를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친근감이 있는 다정다감한 사나이로서 특히 시간과 약속을 잘 지키는 이상과 희망에 가득 찬 진취적인 사람으로 칭송을 받았다.
<2> 신심 생활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는 콩이 나고 팥 심은 데는 팥이 난다고 했듯이 두터운 신심의 성가정에서 태어난 프랭크는 유년시절부터 부모의 손을 잡고 교회에 다니는 신앙생활이 이젠 몸에 익어 성인이 된 후에는 매일 영성체를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사실 영성체는 영적인 영양분이기에 우리들이 음식을 먹어야 육체를 지탱할 수 있듯이 영성생활로 하기 위해서는 성체를 모시는 일이 가장 중요한 신심생활이라 믿는다. 일상생활이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온종일 교회를 떠나서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 것이다. 더군다나 그가 24세 되는 해부터는 사제들이 매일 바치는 성무일도를 매일 바치기로 결심한 후 일생 동안 하루도 결하지 않는 신심생활을 영위하면서 기도생활을 하였으니 그의 열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당시 성무일도는 라틴어로 된 내용뿐이기 때문에 기도문마저도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을 소요했었다. 그는 친근한 친구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큰 은총을 받는 것 또한 한 번도 성무일도를 결하지 않은 데서 온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그가 저술한 교본에서도 높은 등급의 단원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성모소일과(성무일도의 레지오 축약판)를 바치도록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영성생활을 하면서 유의해야 할 것은 누구나 하기 힘든 겸손한 자세인데 프랭크는 모든 공로를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돌렸다. 레지오가 전세계적으로 조직이 확산되어 세계 각지의 주교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을 때에도 그는 모두에게 그 기쁨과 공로를 돌리곤 하였다. 그는 세계 모든 레지오 지도자와 단원들과의 서신에서도 언제나 겸손한 인사와 내용으로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부드러운 손길만이 레지오의 큰 칼을 휘두를 수 있고 그칠 새 없이 샘솟는 정열은 고요한 생각과 두려움에서 나온다고 강조하였다.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미천하면서도 비세속적인 특징을 지닌 재로부터 솟아나는데 그 속에는 겸손의 덕이 있으나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산다. 그럼에도 이 겸손의 덕은 고귀하고 굳세며 그것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존엄성과 힘을 베풀어준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레지오를 창설한 후 겸손한 생활을 하라고 단원들에게 강조하였다. 단원 활동 중에서 대인관계가 대부분인데 겸손치 못한 행동을 한다면 이는 레지오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겸손하라고 바라시는 것과 같이 프랭크도 타고난 덕성과 갈고 닦은 신덕으로 평신도 사도직의 창설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의 겉과 속이 겸손이란 미덕으로 녹여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마도 성모님의 겸손을 본받았을 것이 확실하다. 성모님은 비할 데 없는 지성을 통하여 당신이 누구보다도 많은 은혜를 받으셨기에 당신만큼 하느님 앞에 많은 빚을 진 피조물이 따로 없다고 깨달았기 때문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성모님의 몸에 밴 우아한 겸손의 태도를 본받아야 하며 성모님의 겸손으로 단원생활을 하자고 강조하였다.
프랭크 더프는 세계 각지에 파견된 단원들과 산하 각 평의회 간부 및 단원들과의 서신 연락에 있어 충분한 시간을 아쉬워하던 중 일생에 다시 복귀할 수 없는 직장을 포기하였다.
그는 직장에서도 아주 성실히 생활했기에 재무부장관까지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레지오 사도직에 보다 더 풍부한 봉사를 하기 위해서 사표를 내고 말았다.
친구들의 위로에 그는 직장을 그만 두는 것에 대하여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공언하였다.
그는 온종일 레지오의 확산에 전념하며 밤늦게까지 봉사하고 완전히 기진맥진하여 한밤 중에 귀가하여 등의자에 기대고 잠들다가도 두세 시간 뒤에 일어나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성무일도를 바치곤 하였다. 직장까지 포기하려는 프랭크 더프의 신념에 그의 고해신부는 부당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오직 성모님의 착한 아들로서 레지오 사도직 수행만이 일생의 과업임을 확고하게 다지며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3> 개척자회의 활동
프랭크 더프의 조국인 아일랜드는 수십 년 동안 영국의 식민지 통치하에 많은 수난을 당한 국가이다. 식민치하의 여러 가지 비도덕적인 행위가 누적되는 가운데 국민들은 생활고마저 겹쳐 주정뱅이가 늘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조국의 타락상을 보고 애국애족의 젊은 청장년들이 설립한 모임이 개척자회이다. 개척자회의 목적은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주벽으로 인한 아일랜드의 전국적인 폐습에 대한 보속 정신으로 술종류에 속한 모든 술을 일평생 절제키로 약속하고 실천하는 데 있다. 이러한 숭고한 목적으로 조직된 개척회원들은 주기적인 모임을 통하여 서로 생활 나누기를 하며 봉사할 일들을 토론하여 결정하고서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그는 개척자회에 가입토록 권유를 받아 기꺼이 입회하고서 열심히 활동하였다. 그가 입회한 후 첫번째 한 활동은 변절자 만들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프로테스탄트의 공세를 물리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어느 날 그는 친구의 소개로 가벳트란 조그마한 구두방 주인을 소개받았다. 그와 프랭크 더프는 배가 고픈 가톨릭신자들을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이 주일마다 길목에 서서 음식을 대접하면서 개종하기를 권유한 사실을 직접 목격하고서 큰 충격을 받았다. 배가 고파서 눈치를 보며 프로테스탄트 교도의 식당으로 가는 교우들을 막기 위해서는 간이 식당을 운영하기로 하고 가벳트와 그 일에 착수하였다. 프랭크 더프가 시도한 간이 식당 운영은 6년 반만에 이용자가 적기에 폐문하였다. 그러나 뜻있는 다른 분들이 매주 문을 열어 19년이나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개척자 회원들이 모두 남성으로 구성되었으나 봉사정신이 강한 엘리사벳 커완이란 중년부인이 참여한 뒤 처녀들과 여성 협력자들이 적극 참여함으로써 써클의 구성이 필요하게 되었다. 매주 모임이 있는 이 개척자회는 남성들은 대부분 빈첸시오회 봉사를 하고 여성들은 교리교육을 주로 담당하였다. 개척자회는 원래 알코올성 음료를 보속정신으로 절대 멀리한다는 목적으로 출발한 모임이지만 건전한 정신과 굳은 신앙으로 무장된 청장년과 여성으로 하여금 큰 보람과 봉사정신을 발휘하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개척자회는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으며 그동안 많은 봉사활동을 하여 국가 발전에 공헌하였으며 가톨릭의 단체로서 평화를 누리고 있다. 그리고 평신도 사도직의 특수한 신심단체인 레지오의 모체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4> 레지오 마리애 창설과 발전
프랭크 더프는 독서를 좋아했다. 어느 날 헌책점에서 그리뇽이 쓴 「마리아께 대한 참된 신심」이란 책을 구입했는데 언젠가 소개받은 책명이어서 한 번 읽어 보았으나 별 흥미가 없었다. 평소에 프랭크 더프가 존경하는 톰 활론이 「마리아께 대한 참된 신심」이란 책을 읽도록 적극 권유하였다. 거절할 수 없는 처지이기에 반복해서 여섯 번 정도 정독하니 그는 비할 수 없는 큰 깨달음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에게 독서를 권유했던 톰 활론은 사제서품을 받았다. 프랭크 더프는 얼마 뒤에 어느 수사 신부가 소개해 준 「마리아께 대한 참된 신심」란 책을 정독한 후 아주 큰 감동을 받았으며 이 책에서 성모님께서 생생하게 당신에게 말씀하신 내용과 의미를 깨닫고 감사하게 생각했다.
레지오 마리애는 더블린의 프란시스 가에 있는 마이러 하우스에서 시작되었다.
마이러 하우스는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회 소유였다. 그 전에 이 건물은 아이버그 경의 오락장이었다. 그러다가 현재 불 로드에 있는 거대한 오락장이 완공되자 건물이 비었다. 원래는 베이컨 공장이었던 이 건물이 오락장 이전으로 비게 되자,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회의 프란시스 사 협회에서 소유주 도넬리 부인으로부터 무상으로 인수받았다. 당시에 회장직에 있던 프랑크 스위니 씨의 공이었다.
이 건물을 인수받음으로 해서 부지불식간에 레지오 마리애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인간적인 생각이지만, 만일 회합 장소가 없었더라면 레지오는 결코 발생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인수되기 전에는 이 마이러 하우스는 사실상 방치된 상태로 있었다. 방 하나는 그 동안 남자들의 지부 클럽에서 사용해 왔었다. 그리고 넓은 홀은 일요일이면 빈첸시오 회에서 아이들에게 무료 아침 식사를 제공하는 데 빌려 썼었다. 이 집은 프랑크 스위니 수사와 몇몇 사람들의 등장으로 크게 변모되었다.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회원들이 무더기로 몰려들었다. 원래의 협회가 둘로 나누어져, 성 바드리시오란 이름으로 두번째 협회가 탄생되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시내 남부에 위치한 파이오니어 회 지부 하나가 여기에 가세하였다. 토허 신부가 성 바드리시오 회와 파이오니어 회 양쪽의 영적지도를 담당했다. 파이오니어 회는 마이러 하우스 사업에 여성들을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레지오 설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당연히 일요일 아침 무료식사 준비에 참여하여 음식을 장만하고 아이들에게 배분해 주는 일을 도왔다. 수사들 중에 하나가 아침식사에 오는 아이들을 면담한 결과 그들 중에 많은 아이들이 실제로 무료식사를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어느 날 아침에 무료식사에 온 아이들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서 부활절 월요일에 그들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방문을 끝내고 나서 내린 결론은 그들 가운데 무료식사를 필요로 한 아이는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부모들은 모두 직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무료식사에 가면 아이들을 적절하게 보살펴 주고 미사에 참여하게 해주기 때문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을 알고나서 결국 무료 아침식사 제도를 폐지시켰다. 부인네들은 이제 마이러 하우스에 갈 명목이 없어지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들 크게 실망하였다. 그러나 죽은 것들은 없고 사는 것이 있을 뿐이니….
파이오니어 회가 일을 시작하고 회원들을 구하러 나섰다. 수사들 중에 한 사람이 매일같이 메리온 광장에 있는 기도원에 나가는 별로 젊지는 않은 부인 한 분을 생각해 냈다. 가끔 앞치마를 두른 채 들리는 것을 보면 그 근처 어디에선가 일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 수사는 그녀의 태도와 신심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용기를 내어 어느 날 그녀를 찾아가서 요즈음 말하는 가톨릭 액션에 몸담고 일하고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ꡐ죤 골목회ꡑ 회원으로 있다고 했다. 그리고 파이오니 회 회원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기꺼이 승락하였다. 그녀가 바로 레지오 마리애의 초대 단장인 엘리사벳 커완 여사로 우리들과 함께 기쁘게 생활하고 있었는데 커완 부인은 그 후 선종했다. 일주일에 한 번 본부를 개방하여 회원 신청서들을 접수하였다. 그리고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자리를 마련하여 규칙 설명과 회원의 특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성심께 의지하는 일이 회원의 진정한 바람이 됨을 특히 강조하였다.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회의를 이끌어갈 파이오니회 회원들을 통솔할 평의회가 구성되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회 수사들 여럿과 다수의 부인들, 도넬리 양, 무료 아침식사 위원회 회원 몇 사람, 커완 부인, 그 밖에 몇몇이 파이오니어 회에 들어와 있었다. 이들 여자들은 마이러 하우스 사업에 지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모든 일에 도움을 주었으며 특히 여자들의 봉사가 필요한 일들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물론 파이오니 회 덕분에 레지오 마리애가 탄생되었다고 하면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회에 대한 공정한 처사가 못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상으로도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레지오 마리애에 실질적으로 책임을 맡은 것은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회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파이오니어 평의회를 매개체로 해서 일에 착수할 여성들을 끌어들였다.
파이오니어 평의회는 처음부터 회의 형태를 명확히 갖추고, 특정한 기도들을 정하고, 사업에 대한 깊은 관심을 계속 유지 시키기 위해서 보고 체계를 확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결국 이런 조건들이 마련되었다. 개회기도는 로사리오 다섯 단에다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회 기도문에서 몇 가지 기도를 따오고, 거기다가 영적 독서를 가미하기로 했다.
다음에 지난번 회의 때 기록한 회의록을 낭독하여 서명하고 회의 안건으로 들어가기로 되었다. 정해진 의사일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규 파이오니어 회 안건들은 얼른 처리하고 참석한 남녀들이 종사하고 있는 몇 가지 사도직 사업에 관한 보고를 들었다. 이제 마이러 하우스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활동들이 평의회에서 서로 교류되게 되었다. 남자들은 가정이나 병원을 방문하여 사람들을 만났고, 여자들은 특수한 일에 종사하거나, 교리문답 혹은 다른 공부반을 가르쳤다. 하느님의 섭리가 레지오 마리애의 기반을 닦고 전체적인 토대를 형성시켜 왔음을 생각할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때의 기도들은 미구에 레지오가 바치는 기도들을 예시해 주었다. 다음 이 회합들과 까떼나의 시간 규정에 관한 레지오의 뜻을 어떤 식으로 제시해 주고 있는지 살펴보자.
평의회 회합은 오후 4시 30분에 열렸다. 6시에 삼종을 알리는 성당의 종소리가 길 건너서 들려오면 진행하던 일이 어떻게 되어 있든지 간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삼종경을 바치고 회의를 끝냈다. 회원들이 다시 자리에 앉으면 부인들이 차를 준비하였다. 그 동안 개별적으로 활동과제와 방법상의 문제를 놓고 비공식적인 토의를 벌였다. 이런 식으로 세월이 흘러갔다. … 1918, 1919, 1920, 1921년.
제반 문제들이 이들 회합석상에서 논의되었다. 토허 신부는 항상 참석하였고 물론 커완 부인과 머레이 양(현재 고난회 수녀로 있는)과 성모 승천회 수녀로 있는 릴리 코우프 양, 후에 커완 부인에게서 쁘레시디움 단장직을 물려받게 된 로즈도넬리 양과 그밖에 열한 명도 자리를 지켰다. 이 열한 사람의 명단은 레지오의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자주 토론되던 주제들 가운데 하나는 그리뇽 드 몽포르의 A참된 성모 신심 B이었다. 그 내용은 그때 아주 희귀한 것이어서 사실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 신심을 도모하는 출중한 사람들마저 그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모두들 이에 대한 관심이 너무나도 커서 그 문제를 토의하고 그 뜻을 파악하기 위하여 특별한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 관계했던 사람 하나는 이런 말을 했다. ꡒ나는 가끔 이 특별한 일에 참석하려고 약 한 달 전부터 애썼다. 이 일은 레지오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 그러니까 약 한 달 전에 있었던 일이다. 마치 전기를 통하게 하여 뭔가 일어나도록 만드는 일 같았다. 우리는 이 신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저녁을 보냈다.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온전하게 이해하였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열렬히 공감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신심을 실천에 옮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리하여 이내 레지오가 시작되었던 것이다.ꡓ
이 보잘것없는 레지오 마리애의 회합이 최고의 속력으로 내닫고 있었다. 어느 일요일, 평상시 대로 열린 평의회에서 회원들은 자신이 한 작은 일들을 이야기해 나갔다. 그러다가 현재(1938년) 아이러 하우스의 관리자로 있는 머트 머래이 차례가 되자 그는 다른 형제 한 사람과 바로 그날 아침 더블린 유니온을 방문했다고 말했다. 묘하게도 여자들 병원을 찾았다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무척 바쁘게 움직여 오셨을 것이다. 이 간단한 보고는 상상하기 어려웠고, 그러면서도 듣는 이들에게 특별한 효과를 내는 아주 감명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회의가 계속되고 있을 때 삼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도 세상을 뒤흔들어 놓을 중대한 일들이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삼종기도를 바치고 나서 모두들 보통대로 차 대접을 받았다. 차를 돌리던 중에 그 자리에 왔던 여자 두 사람이 자기네 실무자들 몇 사람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ꡒ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회에서 매 일요일 아침마다 유니온을 방문하는데, 우리도 그런 비슷한 일을 할 수 없을까요?ꡓ
대답이 있었다. ꡒ도움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두 분 외에 사람들이 더 있습니까?ꡓ
그들은 물러가더니 조금 있다가 찻잔들을 덜그럭거리며 돌아와 말했다. ꡒ몇 사람에게 물어 보았는데 희망자가 벌써 여섯 사람은 돼요.ꡓ
ꡒ그래요. 여섯이면 대단한 숫잡니다. 시작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ꡓ
여섯 사람이 함께 모여 그 문제를 논의하였다. 회합은 오는 수요일 저녁에 건물 뒷쪽 방에서 갖기로 하였다. 시간은 편의상 여덟시로 정했다. 모두가 지원을 얻고자 자기 친구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고 다녔다.
마침내 수요일 저녁이 되어 회의가 소집되었다. 토허 신부와 프랭크 더프 등 15명이 자리에 나왔다.(그들은 그들이 이름을 높이 받들어 모시려는 바로 그분이 앞에 계시는 것을 알고 무척 놀랐다.) 그들은 그분의 깃발 아래 그분의 수호를 받으며 병사로서 일하려는 마음가짐으로 회의에 나왔는데 이상적인 군대의 경우 모두가 다 그렇듯이, 사령관이 먼저 나와 그들의 입회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을 때 평상시에는 쓸쓸하게 놓여 있던 탁자가 오늘날 쁘레시디움 회합 때처럼 장식되어 있었다. 탁자에는 하얀 보가 씌워져 있었고 그 밖에도 무염시태 성모상과 꽃이 꽂힌 화병 두 개와 불이 켜진 촛대 두 개가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흔히 쓰는 레지오 제대도 있었다. ꡒ여왕께서 당신 병정들을 기다리고 계셨다.ꡓ
누가 그렇게 장식해 놓았는지는 몰랐었다.(후에 안 일이지만 최초의 쁘레시디움 단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제대 준비를 해 두었다. 그녀는 후에 수녀원에 들어가 카나다에서 선종하였다.) 그렇게 하라는 지시도 없었다. 기적처럼 이루어진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누군가가 그런 영감을 받은 것만은 틀림 없었다. 회의가 시작되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회 기도문을 사용했다. 성령께 간구하는 기도를 바치고 이어 로사리오 다섯 단을 바친 다음에 갑자기 목청을 높힌 외침이 나왔다.
ꡒ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티없이 깨끗하신 마리아 성심이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성 요셉,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ꡓ
이 기도들은 그 후 오랜 세월동안 레지오 단원들의 입을 통해 바쳐져 왔다. 마지막 기도는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회 마지막 기도로 끝났다. 이 기도는 우리 스스로 기도문을 마련할 때까지 계속 쓰였다. 개회기도가 끝나자 영적 독서가 있었다. 그런 다음에 참석자들은 모두 자리에 앉아 자신들도 모르는 가운데 레지오 마리애를 이루는, 세계의 위대한 역사적 사건 속에 몸을 담았다.
첫째 문제로 장차 수행하려는 사업에 대한 후원이 거론되었다. 그에 대한 즉각적인 대답은 그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은 복되신 성모님께 봉사하기 위한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그것으로써 다음 일이 분명해졌다. 매주 회의를 갖고 한 주일 단위로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무엇이 그 회합의 골격이 되기로 되었던가? 그리고 기도는 어떠했던가? 그들이 이미 바쳤던 것들 이외에 무엇이 있었겠는가?
그들은 무슨 사업을 하기로 되었던가? 더블린 유니온 병원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들을 결속시켜 주었다. 그 사업은 바로 첫번째 사업이 될테지만 그러나 유일한 사업은 아닐 것이다. 행동 범위에 있어 물질적 도움을 베푸는 것 이외에 무엇이든 실질적인 활동을 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물질적인 도움은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회에서 올바른 정신으로 잘 해내고 있었다. 따라서 그 분야에 위험스럽게 손댈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당분간 다른 일들은 제쳐두었다. 우선 적절하게 잘 해내야 할 일은 더블린 유니온 병원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첫번 회합 때 서기 한 사람이 선임되었다. 그녀는 아주 훌륭한 사람으로서, 장래 서기직을 맡은 자들에게 하나의 귀감이 되었다. 방문은 짝수로 가기로 하고 각 병동마다 두 사람씩 배정되었다. 그러나 암병동에 이르자 서로들간에 언쟁이 일어났다. 서로 자기네가 맡겠다는 것이었다.
현재로서는 레지오가 궂은 일에 단련되어 있어서, 오늘날 같으면 그런 방문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그런 일은 아주 드물었다. 그리고 암병동은 곧 공포의 대명사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미리 치료를 받으려고 힘쓰지 못한 까닭에 병자들의 상태가 하나같이 중태였다. 그런데 이 새 레지오 단원들은 공포와 싸우며 그 일을 해내려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이 그 일을 맡았지만 모두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기로 하였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들은 상당한 시간에 걸쳐 작업에 임하는 정신 문제를 논의하였다. 말하자면 자신들이 방문하는 사람들 하나하나 속에서 우리 주님을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태오 복음 25장이 봉독되고 해설이 따랐다. 이어서 그 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레지오에 영향을 끼친 규율과 방법상의 문제들이 논의되었다. 다음 회의는 다음 주 같은 날 저녁에 같은 시간에 열기로 했다. 그 전에 모든 방문을 끝내고 제각기 보고서를 마련키로 하였다.
누군가 자비의 수녀회로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그들의 협조를 구하기로 했다. 수녀들은 방문자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겠다면서, 그들을 위해서 다음 일요일에 전체 공동체가 미사와 영성체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맨 처음 레지오 마리애에 단 명칭은 ꡐ자비의 모후ꡑ로 명명되었다. 방문을 앞둔 병원을 경영하는 수녀회가 까리따스회(자비회)라는 데서 비롯된 명칭이었다. 거기다가 묘하게도 그 달 24일이 자비의 성모 축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상한 사실이 있었다. 레지오 단원들은 그들이 처음 모임을 가진 날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여러 해가 흐른 뒤에 이런 일들을 서류에 기재할 필요가 있게 되었는데, 그 때는 아무도 그 날을 기억하지 못했다. 무슨 요일인지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오래된 회의록을 뒤져가며 날짜를 찾아내었다. 찾고 보니 9월 7일이었다. 모두들 크게 실망하였다. 회의 날짜를 성모 탄생 축일인 8일로 맞추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그렇게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레지오가 성모와 함께 탄생하여 성장하고 그분과 더불어 성공하고 그분과 더불어 자기네가 상대한 사람들의 영혼들 안에 우리 주님을 나시게 만들었다면 얼마나 멋있겠는가!
그런게 그것을 미처 생각 못하고 단 하루 차이로 축일과 엇갈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내 생각이 달라졌다. 만일 그렇게 생각해서 날짜를 맞추었더라면 모든 것을 망칠뻔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즉 8일에 모임을 가졌더라면 만나는 시간이 8시였을텐데, 그 때는 축일이 끝나는 때였고, 사실 그들이 모임을 가진 바로 그 시간에 교회에서는 첫번째 축일 저녁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그러니 레지오는 이 축일의 첫 향기 속에 탄생한 셈이었다. ꡒ우리는 성모와 함께 탄생했던 것이다.ꡓ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고, 이런 이상한 일들은 레지오 생활을 통해서 항상 이루어져 왔다. 레지오는 교회의 다른 커다란 단체들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지만, 특히 다른 단체들의 특징을 이루는 명백히 기적적인 표징들이나, 환영들, 불가사의한 일들, 하늘에서 유래된 선언같은 것들이 발단이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레지오 마리애에 이런 일들이 없었고 기적은 레지오 마리애의 놀라운 성장, 흥미있는 일치, 감동적인 성과에서 보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모든 것이 인간적인 유대들을 통해 실현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기쁨을 찾게 된다. 레지오의 조직이나 그 현저한 결실들 때문에 놀라면서 레지오 마리애가 정녕 어떤 뚜렷한 선언이나 기적의 개입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이들 모두에게 레지오 마리애는 그런 경우와는 다르다고 못박아 두고 싶다. 레지오 마리애는 방금 설명했듯이 단순하면서도 경이로운 방식으로 이룩되었다. 레지오 마리애는 최초의 회합이 현재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다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몇 가지 있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당시는 레지오 마리애란 명칭이 없었고 기준도 없었으며 순수한 레지오의 기도문들도 없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후에 와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체계나 장치, 헌신적인 안목, 정신, 분위기, 이 모든 것들은 레지오가 첫번째 회합 때부터 완전히 성숙된 면모를 갖추고 있었으며, 오늘날의 레지오와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들이다.
다음 수요일에 일행은 다시 모임을 가졌고, 모든 일이 시계바늘처럼 진행되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기도들을 바치고 나면 각 단원들이 각각 활동보고를 하게 되어 있다. 영적 지도는 토허 신부가 맡고 있었다. 단장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커완 부인이었다. 그녀는 여러 가지 유익한 일들 중에서 회의에 가난이라는 특징을 부각시켰다. 그녀가 그 자리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다. 커완 부인은 첫번째 회합 석상에서부터 진정한 레지오의 특징, 즉 회원간에 온갖 사회적 세속적 차별 일소를 강조하였다.
커완부인은 훌륭한 단장이었다. 회의장에서 유일한 연장자였지만, 주위에 모여 있는 젊은 여자들을 사랑하고 신뢰하였다. 그녀는 레지오를 아주 엄하게 다스렸다. 어느 정도 기간이 경과한 후 그녀는, 오늘날 회합 때 낭독하는 상훈(常訓)과 대충 비슷한 네 가지 조목을 회합 석상에서 월례적으로 낭독하도록 조처하였다.
그 당시로서는 이러한 행사가 레지오 시스템의 일부임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레지오가 성장함에 따라서 단장들이 선임되어 다른 지역으로 파견되었는데, 그들은 새로운 직책을 맡으러 파견되기에 앞서 커완 부인 집에 소집되었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지침들을 시달하고 여러 가지 훈화를 베풀었는데, 그 중 하나는 그들에게 십자가를 내밀면서 ꡒ빛을 간직하고 성령께 기도하라ꡓ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레지오가 성장하고 가지에서 가지로 뻗어나감에 따라 어려운 일들도 발생하였다. 초심자들에게 사업과 단원직의 골자들을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사항들을 항상 염두에 두게끔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오늘날 상훈으로 알려진 문장이 작성되어 매월 첫째 주간에 낭독하도록 시달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이것이 일종의 혁신이 아니냐는 생각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원래 하던 행사를 다시 시작한 것뿐이었다. 이 상훈 낭독은 자비의 모후회에서 직접 파생된 쁘레시디움에서 여전히 실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몇몇 사람들이 혁신이라고 생각했던 사항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알로꾸시오였다. 그러나 이 알로꾸시오는 여러 해 동안 모든 레지오 회합의 정식 행사가 되어 왔었다. 크리돈 신부와 토허 신부는 둘이서 다년간 모든 레지오 회합들을 관장했고, 이 두 분의 훈화 말씀은 각 회합의 일부이자 한 몫을 담당했었다. 그러나 레지오가 확대되어 감에 따라서 이분들이 참석하지도 못하고 다른 지도 신부도 없는 상태에서 회합들이 열리게 되었는데 이 특정한 회합들의 경우에는 알로꾸시오가 빠지게 된 것이었다.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알로꾸시오가 빠지게 된 사실을 유의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누군가가 반드시 -사실 초창기였기 때문에- 알로꾸시오를 폐회기도 직전인 회합 끝머리에 가서 실시하기로 규정되어 있었다.
이것이 변경되게 된 경위는 이렇다. 내가 오브라이언 몬시뇰과 함께 로마에 간 적이 있는데, 그분은 자신의 회합 이야기를 하면서 줄곧 알로꾸시오를 까떼나에 바친 직후에 실시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교본에 규정된 바와는 다르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분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분에게 그런 내 생각을 말씀드렸더니 실제로 변칙적인 운용 방식을 시인하면서도, 자신의 방식이 두 가지 점에서 효과적임을 강조하였다. 첫째로 단원들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까떼나 직후가 더 좋다는 것이며, 둘째는 알로꾸시오를 맨 끝에 실시할 경우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폐회규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꼰칠리움에서 세부적인 검토를 거쳐서 일단락 되었는데, 그 결과는 몬시뇰의 생각이 옳았으며, 알로꾸시오는 까떼나 이후가 가장 이상적인 순서라는 판단이 나와 그렇게 정하기로 된 것이다.
<5> 그리스도를 위한 순례
레지오 마리애의 특성은 온 세계 어디에서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건전한 신자라면 이 성스러운 대열에 참여할 수 있다. 같은 회의석상에 흑인과 백인이 국경과 민족을 초월해서 함께 대열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각 나라에서 레지오 마리애의 정신은 대부분 환영하지만 교본 내용에 있어서 아일랜드 교본 내용을 어떻게 자기 나라에서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반발이 대단히 거세어서 세계 각지로 발전하기에 큰 장애 요소가 되었다.
1932년에 호주에 한 개의 쁘레시디움이 창설되었고, 남아프리카의 3개국이 시작하였다. 1933년에는 미국에서 태동이 되었다. 캐나다에서도 시작되었다.
세계 각지에서 레지오 사절을 청해 옴으로써 열성적인 단원들을 몇 개월씩 파견시켰다. 1933년 프랭크 더프는 장관까지 할 수 있는 자기 직장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 해외에 나가 레지오 선교를 하다 첫 순교자가 된 에델 퀸의 복자 시복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녀는 허약한 몸이지만 레지오 사도직을 수행하기 위해 동부 아프리카에 파견되어 8년 동안 레지오 조직과 활동에 큰 기적을 남기고 순교하였다. 그녀가 순교한 지 12년 뒤에 복자품 심사가 전개되었는데 그녀가 시성되도록 전세계 단원들은 기도를 바치고 있다.
1950년 봄에 알퐁소 람브란 청년은 레지오 마리애의 수도회적인 이상과 가치에 감동되어 입단하였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로 파견되어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에 전파하다가 암에 걸려 27세의 젊은 나이로 선종하였다. 그의 시복 절차도 준비 중에 있다.
A그리스도를 위한 외지 순방 활동 B 운동은 좀더 빠르고 효과있게 전개되었는데 지원자가 늘어가고 프랭크 더프를 초청하는 곳에는 일년에 한두 번 정도는 다녀왔었다. 어떤 단원은 휴가를 얻어 가까운 곳에 파견하여 신앙 선포에 충실하였고 어떤 단원은 자유 시간 전체를 외국에 나가 신앙 선포에 충실하였다.
그리스도를 위한 순례자들이 증가되고 해가 거듭됨에 따라 더블린에서 꼰칠리움의 주최로 매년 10월 마지막 주일에 순례자들이 모여 그들의 귀한 체험을 발표하여 서로 위안과 격려를 받았다. 한국에도 5년 전에 꼰칠리움의 서기를 비롯해서 7명의 단원들이 광주에까지 순례의 활동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교본에 보면 제40장 8항에 그리스도를 위한 외지 순방활동(P.P.C)이란 제목으로 자세하게 소개되었는데 프랭크 더프는 초창기에 외국에 레지오 마리애를 소개하고 조직을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음이 증명되는 것이다. 모든 영혼과 접촉하려면 우선 가까운 사람부터 접촉해야 하지만 또한 일반생활의 범위를 훨씬 초월한 높은 이상적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그리스도를 위한 외지 순방(Peregrinatio pro christo)을 해야 한다는 레지오의 운동이다. 이 명칭은 몽따장베르가 쓴 고전작품 A서방의 수도자들 B이라는 선교적 서사시에서 유래한 것이다.
프랭크 더프는 합숙소를 경영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에 봉착했었으나 그 때마다 성모님께 의탁하며 한 번도 후회함이 없이 강력한 의지로 추진하였다. 합숙소를 경영하면서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창녀는 거의 희망이 없다고 결론 지었을 때 그녀는 바로 같은 날 회심하고 새 출발을 하였다. 어떤 창녀는 합숙소를 오기로 약속했는데 절대 거절하니까 같이 있던 프로테스탄트 신자 창녀가 갑자기 자기가 입소하겠다고 하여 입소한 후 자기 본가로 돌아갔다. 정말로 더블린 시에 평화의 일손을 누가 솔선 수범하여 봉사하겠는가? 프랭크 더프의 신념을 누가 중단시킬 수 있었겠는가? 그는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전단원으로 구성한 기도단을 조직하고 이웃들도 참여토록 권유하였다. 프랭크는 창녀집의 포주들로 하여금 그 집들을 폐쇠토록 권유한 결과 창녀의 집들은 하나 둘 점차 문을 닫았다. 이리하여 경찰이 150년간이나 그 도시의 부분을 정화하려고 노력했으나 큰 성과가 없었으나 프랭크 더프를 비롯하여 몇 명의 단원의 힘으로 성공리에 그 일을 해결하였다. 이것은 바로 사랑과 기도의 힘으로 성취되었다고 확신한다. 이것은 성모님을 따르는 성모군만이 해낼 수 있는 기적인 것이다.
프랭크 더프는 이 어려운 일들이 기적적으로 해결될 때마다 그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신념과 추진력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 사실 성모님은 당신의 뜻에 합당히 따르려는 착한 자녀들에게, 당신의 신심에 감화되어 봉헌을 선서한 단원들에게 한 번도 실망을 주시지 않았다.
네 개의 팀마다 명칭이 결정되었다. 첫팀은 A자비의 모후 B라 불렀고 둘째팀은 A무염시태 B라 불렀으며 셋째팀은 A천주의 모친 B이라 했으며 넷째팀은 A죄인의 의탁 B이라 불렀다. 이렇게 네 팀의 모든 관리운영을 통괄하기 위하여 중앙 평의회가 설립되어야 함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첫팀인 A자비의 모후 B가 창설된 지 4년이 지난 1925년 11월에 A레지오 마리애 B라고 중앙 평의회를 부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A레지오 마리애 B는 프랭크 더프가 9일 기도 후 제안하여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즉 레지오는 로마군대의 명칭이었다. 로마군단은 로마 제국의 공동목표를 위하여 지휘관과 또한 동료 병사들과 결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치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움직였던 것이다. 어깨와 어깨를 나란히 이 용사들은 세계를 활보하였고 이들이 나타나는 곳마다 로마의 위엄과 로마의 법률이 들어올려졌다. 그 충성 앞에는 그들과 맞설 적이 없었으며 그들의 불굴의 용기와 완강한 인내 앞에서 적들은 지쳐 항복하거나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로마군단의 정신을 요약하면 권위에 대한 복종심, 변치 않는 의무감, 인내심, 고난을 이겨내는 지구력, 사소한 의무라도 소홀히 하지 않는 충성심이다.
벡실리움(군기) 제작에 있어서도 많은 연구를 거쳐 결정하였다. 로마 군단에서 사용했던 패를 모델로 참고하여 레지오의 정신에 일치하도록 제작하는 데 성공하였다.
레지오 마리애는 특수 사도직이기 때문에 영성이 깊어야 하고 표양이 좋아야 자격이 부여되기 때문에 3개월간이라는 수련기간을 지나서 선서 여부를 결정하게 된 것이다.
레지오 선서문은 너무나 감격적이며 고무적인 내용이다. 교황 바오로 6세 성하께서는 A수천 명의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로 하여금 치명할 용기를 갖게 하는 것은 선서문 B이라고 격려하셨다.
레지오 마리애 기도문도 아주 성스럽게 작성을 한 뒤 기도의 카드를 장식할 그림을 고안하는 데 여러 가지로 연구하였다. 이 그림은 교회 전문 미술가인 멕골드릭이 제작했는데 십자가와 묵주를 들고 세상의 마귀들과 용감하게 싸우는 성모 군대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이젠 온 세상을 정복하여 하느님 나라 건설의 준비가 다 끝났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성스럽고 강한 신념으로 조직된 성모 군대는 그가 갖추어야 할 무기와 도구를 완비하게 된 것이다.
교본이 필요했다. 레지오가 확산되고 특히 외국에 전파하기 위해서는 교본이 있어야 했다. 사실 그동안 레지오 마리애는 7년간이나 성문화된 교본이 없이 영감과 경험에 의해서 관리 운영을 해왔었다. 프랭크 더프는 교본 제작에 있어서 레지오 마리애의 목적과 영성에 관해서 요약하였으며 관리 운영에 대해서는 지난 7년 동안 경험과 활동해 온 업적들을 정리하여 한 권의 교본을 출판하게 되었다. 당시 교본은 조그마한 작은 책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훌륭한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었다. 내용에 있어서 성서나 신학 저서에서 인용된 것 외에는 모두가 프랭크 더프의 기교에 의한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가 번창하다 보니 교본도 필요하고 또한 교본 수정의 요청이 여기 저기에서 계속되었으나 쉽게 교회 당국의 승인이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곤욕을 치르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언젠가는 모든 것은 끝나기 마련이다. 교회의 인가가 나오게 되어서 인쇄에 착수할 수 있었다. 이 교본은 오늘날까지 세계 60개 국어로 번역되었으며 수백만의 판수를 냈다고 볼 수 있다. 그때마다 발행의 진행은 빠르지가 않았다.
항상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있게 마련이다. 한국의 교본은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한 후 세 번의 개정판이 1986년도에 출판되었는데 세계 본부인 꼰칠리움에서 개정판이 1985년도에 출판되어 있다. 그 개정판을 가지고 새 번역을 하였다.
<6> 단원들의 순교
성모님은 사업은 평화시나 전쟁시나 계속 되었음이 증명되었다. 세계 제2차 대전 중에 영국에서 있었던 레지오 관리 운영에 대하여 알아보자. 영국에 쁘레시디움이 창설된 것은 1929년이다. 그 뒤 계속 발전되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했는데 무서운 공습이 가열되는 데도 주회는 계속되었다. 공습을 피하기 위해 방공호 속에서 주회를 계속했는데 선서할 때 공습을 받으면 선서문 몇 줄을 읽다가 책상 밑으로 숨었다가 우선하면 다시 서서 계속해서 선서를 하곤 했는데 지금 상상해 보면 눈에 선하게 열심한 모습이 보인다. 항상 방공호에서도 기도하며 특히 소년 단원까지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굳은 신념과 투철한 사명감 그리고 용맹스런 성모군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단원의 수가 증가되는가 하면 쁘레시디움도 증설되었으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하느님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또한 지중해의 말타 섬(영국에 속함)에서도 계속된 공습과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독일․이태리 공군도 이 섬을 점령하지 못하였다. 전체의 섬주민들의 일치된 투쟁력이 있었지만 전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의 굳은 신심과 용맹스런 활동과 일치된 단결력의 영향력이 컸었다.
프랑스의 경우 전쟁의 비극 속에서도 쁘레시디움은 계속해서 창설되었다. 독일군의 침략으로 프랑스 북부의 피난민은 독일군의 저공 공습을 맹렬히 받으면서 남부의 네베르 지방까지 피난의 대열이 이어졌다. 이 피난민의 대열 속에는 더블린에서 파견된 베로니카 오브라이언이란 여성 단원이 끼어 있었다. 그는 꼰칠리움에서 파견된 단원으로 임무는 프랑스에 쁘레시시디움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피난민 대열에 끼여 전쟁의 공포와 굶주림에 지친 그녀는 그의 사명을 다했다. 그는 얼마 안 되어 더블린 꼰칠리움 7개의 쁘레시디움을 설립하였다고 보고해 왔다. 치열한 전쟁 속에서도 레지오 마리애가 계속 번창하였던 것은 레지오의 정신으로 활동하는 것은 한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독일에서도 레지오는 계속 발전되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전쟁 포로 수용소에서 18명의 단원으로 첫 쁘레시디움이 창설되었다. 이 쁘레시디움의 창설은 오스트레일리아 레지오 단원이 수용소에 수감될 때 속주머니에 교본을 넣어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동료 포로들이 레지오 정신을 가지게 하는데 쉽게 성공하였다.
이 쁘레시디움은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해체되었지만 프랑스 강제 노동자들에 의해 창설된 또 하나의 쁘레시디움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으니 정말로 놀라운 하느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다.
이태리에서도 쁘레시디움이 창설되었다. 영국군대는 안찌오와 네뚜노에 상륙한 후 군부대 내에 쁘레시디움을 창설하여 매주 아빼닌 반도를 진격하면서 주회를 실시하였다. 얼마 지난 후에 교황 비오 12세 성하께서 이 소식을 접하시고 알고자 했다. 그들은 교황 성하를 알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교황 성하께서는 그들에게 소망이 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로마에 레지오마리애를 도입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자 많은 나라에서 파견자를 프랭크에게 요구하였다. 그 때마다 헙력자가 나타나는 행운이 있었다.
독일을 위해서는 비엔나에서 온 한 여성 단원이 희망해 왔는데 그녀는 히틀러를 피해 온 피난민으로서 전쟁중에 영국에서 지내며 그 곳에서 레지오를 알게 되었었다. 이태리 파견자는 이태리어를 잘하는 한 아일랜드 여성이었는데 많은 쁘레시디움을 창설하고 귀국하였다.
남아프리카의 파견에는 필리핀의 마닐라 대학 교수인 요아키나와 루카스가 모든 직위와 관록을 포기하고 20여 년 간 많은 나라에 레지오 마리애를 위해 봉헌하였다. 그런데 스페인의 경우는 독특하다. 필리핀의 마닐라 출신인 빠치따싼 또스란 여자 변호사가 변호사의 일을 멈추고 스페인에 가서 레지오를 심으려고 무척 노력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레지오 도입이 늦추어지고 있으니 우리들의 기도가 더욱 필요하다.
인도네시아에 파견된 중국의 여성 단원인 데레사 수녀는 그 곳에 몇 년간 레지오 창설에 많은 헌신을 다하였다. 소련의 한 젊은이가 포로로 독일에 있으면서 레지오 마리애 정신을 잘 파악하고자 입단하여 이름난 명장이 되었다. 그는 독일 뮌쉔글라드바흐 본당의 사제에게 소련 자기 나라에 레지오를 전파해야 할 의무 때문에 귀국하겠다고 설명하였다. 본당 신부는 감동하면서 귀환자에게 보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5년간 세뇌교육을 위해 시베리아로 끌려갑니다. 그러나 저는 젊고 힘이 있습니다. 5년간은 기다릴 수 있습니다. 저는 치명을 당하든가 아니면 레지오 마리애를 창설하든가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귀국해서 언젠가 그림엽서 한 장을 신부님께 보내면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하시고 기도를 잘 부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소련 자기 나라에 귀국 후 6년 동안이나 소식이 없어 대단히 궁금하였다. 어느 날 본당 신부에게 소련 시베리아 한 수용소에서 그림엽서가 한 장 왔다. 이어서 봉함 편지로 사업보고와 더불어 안부 편지가 왔다. 이 편지를 접한 본당 신부와 프랭크 더프는 퍽이나 감동하였고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 젊은이는 어느 서신의 끝에서 ‘우리는 로서아에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로서아에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로서아에 들어가야 한다’라고 거듭 결의를 전해 왔다.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성인 신부는 1943년 독일 나치스 악당에 의해 순교하시기 직전 예언하였다. ‘머지않아 모스코바 크레믈린 궁 지붕 위에 높이 서 있는 깃대에 성모님의 깃발이 나부낄 날이 올 것이니 모두 회개하고 기도하라’는 내용을 이 세상에 예언하였다.
프랭크 더프는 자신이 그랬고 그러한 강한 의지력과 두터운 신심으로 불타 있듯이 다른 파견자(P.P.C)들에게도 주어진 사명감을 끝까지 수행하라고 거듭 강조하였다. 목숨을 걸고 파견되는 국가나 지역이 많았다. 그 때마다 프랭크는 불같은 용기로 성모님의 사업을 추진하자고 재다짐하고 했었다. 그런 강한 정신이 없는 자는 어떤 일이고 중간에서 포기하고 성취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파견자든 레지오 사도직에 임한 단원이든 소명의식에 의해 생명까지도 봉헌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입단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각종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굳은 결의에 찬 단원들이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중도에서 포기한다는 것은 졸렬한 행위임에 틀림없다. 성모님께 선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 바칠 수 있다는 나의 선서가 아닌가?
‘파견과 생명! 특별한 경우지만 어떤 단원이 파견과 생명 중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할 때 파견을 선택해야 할 정도로 확고 부동한 자기 사명에 항상 불타 있어야 한다’라고 프랭크는 의미있는 활동강령을 주었다.
순교한 단원들이 가장 많은 중국에 대하여 알아보자.
중국에 레지오 마리애를 먼저 전파한 사람은 프랭크 더프가 처음으로, 비오 11세 교황성하를 알현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준 안또니오 리베리 대주교이다. 그는 젊은 시절 더불린 교황대사관의 비서로 있다가 동아프리카의 교황대사로 임명되었는데 그 곳에서 레지오의 개척자이며 성인 시복 운동의 대상자인 에델 퀸의 레지오 증설에 따른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였다. 즉 자기 지역의 주교들에게 친서를 보내 레지오 마리애를 지원해서 빨리 보급해 달라고 강조하였다. 그가 가기 전에 이미 에델 퀸의 업적을 보고 감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디에서나 ‘레지오 마리애는 현대의 하나의 기적이다’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종결되자 교황청은 안또니오 리베리 대주교를 중국의 교황대사로 전보 발령을 했다. 그는 모택공의 공산군이 북쪽에서 남으로 밀고 올 현실을 감안하여 주교들에게 레지오 마리애를 창설하여 공산주의자들의 박해를 막아야 한다고 권고하였다. 그리고 아일랜드 골롬바노회 맥그라드신부에게 레지오 마리애 보급을 위임하였다. 몇 해 전에 북경에 레지오가 들어가 있었으나 활성화가 못 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우연히 북경 후엔 대학 청년들에 의해서 쁘레시디움 몇개가 한 주일 내에 설립되어 점차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었다. 리베리 대주교는 레지오의 활성화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교황청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모택동 공산정권이 온 중국을 휩쓸 때 수난의 시기가 닥쳐왔음을 예고한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처음에 레지오 단원들을 그들 편으로 끌어들여 소위 그들이 말하는 국가 교회를 세우는 데 이용하려 했었다. 그들의 공작은 오히려 그 반대의 경향이 나타났다. 레지오 마리애가 건재하는 지방 교회에서는 국가 교회 신자들을 상대로 계몽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기 때문이다. 주회도 비밀리에 계속되었고 공개적인 투쟁도 시도되었다.
1952년은 중국의 레지오에 대한 불행스런 해이다. 공산정권은 소위 전국 일원에 레지오 활동을 금지한다고 선포하였다. 중국내에 레지오 마리애 모든 성모 군대는 모두 경찰서에 출두하여 등록하라고 명령하였다. 레지오 각급 간부들이 투옥되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체포된 간부는 북경 세나뚜스 영적지도자 벨기에 인 반 코일리 수사 신부였다. 그리고 각급 레지오 조직 영적지도 신부는 특별조사를 받아야 했다. 고문이 가해지고 몸에 무거운 쇠고랑을 채워 고통을 주었다. 공산당원들은 레지오를 ‘비밀 발신기, 무기와 간첩단’이라 했는데 이것은 레지오의 단결력과 죽도록 충성하는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무슨 큰 비밀을 발견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지만 교본과 초와 성모상만 밝혀냈던 것이다.
중국 공산당에서는 큰 거리마다 현수막을 걸었다. 그 내용은 레지오 마리애는 ‘공적(公敵)제1호’란 것이다. 즉 레지오를 바티칸의 반동 간첩단이라고 맹렬히 비방하였다.
레지오 단원들은 2만명 가량 투옥 당하여 심한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당했으며 그 중 2천명 정도가 순교당했다. 그 이외 단원들은 매일 경찰서에 출두해야 했고 세뇌교육을 받아야 했다. 공산당은 레지오를 탈단하면 무죄로 인정하였으나 대부분의 단원들은 차라리 순교할 각오를 가졌다. 이 비극적인 소식을 접한 교황 비오 12세 성하께서는 친필 서한을 중국 가톨릭 교우들과 레지오 단원들에게 보내 격려와 위로를 주셨다. 1969년 5월 23일 꼰칠리움 레지오 사절단으로 한국에 온 맥그라드 신부는 1950년대 초에 중국에서 레지오 사목을 하면서 고통을 당한 지도신부인데 그 당시 체험담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레지오의 발생지인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성장했고, 사제 서품 이후 중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었습니다. 나는 성당도, 수녀와 회장도 없고 레지오 단원도 없는 시골 본당에서 우선 레지오를 설립하였습니다. 나는 쁘레시디움을 설립한 후 많은 기적적인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그 많은 공소를 돌볼 때 본당 신부도 없는 성당을 단원들이 훌륭하게 돌보았으며 소년 단원들은 어린이들의 주일학교 교리를 지도해 주었습니다. 얼마 후 일본군의 진주로 나는 억압에 의한 강제 추방을 당했는데 그 2년 동안의 공백 기간에 단원들이 교회를 지키고 관리 운영해 왔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단장들이 총살당하기도 했었습니다. 단원들은 사제가 없는 어려운 시기에 십자가를 쥐고 교회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치하여 기도하며 신자 확보와 교회를 지켰던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중국 교황대사인 리베리 대주교는 중국이 공산화 될 것을 예견하고 사제와 수도자가 없는 중국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나에게 레지오 마리애 조직을 하명하였습니다. 나는 주로 젊은이를 상대로 2년 동안 활동을 전개하여 쁘레시디움을 2천 개 정도 설립하였습니다. 그 당시 공산군들은 중국에 있는 6천 5백여 신부와 수도자들만 제거하면 가톨릭 교회가 제거될 것으로 간주하였으나 젊은 단원들의 활동 때문에 커다란 장벽에 부딪치게 되자 이제부터 레지오를 그들의 최대의 공적으로 삼고 최대의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상해의 한 쁘레시디움 단장은 15년 옥고 끝에 순교하였고 그 당시 젊은 단원들이 약 2천명 정도 순교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단원들이 옥고와 고통 중에 시달렸습니다. 이런 사실은 한국 200년 교회사가 그랬고 전쟁 속에서나 공산치하를 겪은 한국 교우들은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사실인 줄 압니다. 이렇듯 중국 치하에서는 레지오가 아직도 교회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어느 공산군 장교는 레지오 단원 1명은 공산군 1개 중대 병력과 맞먹는 영력(영적인 힘)을 지녔다고 혀를 내두른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단원 여러분은 단장과 그 외 간부들을 중심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첫째로, 전례를 중심으로 레지오 정신을 심화시켜야 하며 제대를 중심으로 성체를 모시고 기도의 생활이 이룩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성인 루도비꼬 몽포르의 헌신의 정신, 즉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로 일치하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셋째로, 천주 성삼께 대한 공경과 도우심을 간구하는 태도입니다.
끝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레지오 마리애는 평신도 단체입니다. 교회의 권위하에 속하는 하나의 활동 단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성직자가 교회에 하는 봉사의 일부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나가기 위해 단장을 중심으로 모든 간부와 단원들의 능동적인 참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7> 역대 교황 성하의 격려
사실 평신도로서 프랭크 더프만큼 은총을 받은 사람은 없다. 그는 역대 교황 성하를 알현할 수 있는 큰 영광을 받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교황 성하를 알현하고 싶은 희망은 다 같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퍽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1933년 5월 더블린 교황 대사의 주선으로 그는 희망에 넘친 그리고 마음속으로 갈망했던 교황 비오 11세 성하를 알현하기 위하여 로마의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처음있는 알현이라 과연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성모님께 간구하면서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비오 11세 성하께서는 가톨릭 액손 교황으로 역사에 기록된 교황이다. 평신도의 사명과 사도직의 필요성을 가장 강하게 선포하시고 마음으로 기원한 교황으로서 평신도들에게 매우 고무적인 격려를 해주셨다. 성하께서는 A사제직업, 가톨릭 학교나 기타 관심사보다도 본당마다 평신도 사도직 수행자 열 명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 B고 이미 밝힌 바 있다.
프랭크 더프는 교황 비오 11세 성하의 알현에서 레지오 마리애의 목적과 정신 그리고 관리 운영의 전반적인 것을 요약해서 설명하였다. 교황 성하의 대단한 관심있는 모습에 그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명이 끝난 뒤 얼마간의 침묵이 있었다. 이어 교황 성하께서는 일어나 프랭크 더프를 껴안아 주시며 ‘이 일은 하느님의 일이요’하며 감격적인 말씀으로 격려하셨는데 프랭크 더프는 감사의 눈물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성하께서는 레지오 마리애 운동이 자기가 교회 내의 액숀의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과 합치되며 레지오 마리애의 모든 것이 합당하다고 격려를 주셨다. 성하께서는 성모님의 사업에 헌신한 프랭크 더프를 따뜻하게 대해 주셨으며 앞으로 굳세게 추진해야 할 그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셨다. 교황 비오 11세 성하께서는 그가 알현한지 얼마 안 되어서 다음과 같이 프랭크 더프에게 친서를 보내시어 격려해 주셨다.
나는 이 아름답고 거룩한 사업, 레지오 미리애에 대하여 특별한 축복을 베풉니다. 레지오 마리애란 이름이 바로 모든 것을 설명해 줍니다. 그 단기에 새겨진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의 표상은 높고 거룩한 것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구세주의 어머니시며,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십니다. 동정녀께서는 우리의 구원에 협력하십니다. 바로 십자가 아래서 우리의 어머니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금년에 우리는 성모님이 구원의 협력자이시며 모든 사람의 어머니가 되심을 선포한 지 100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착수한 그 기도와 활동의 사도직을 더욱더 성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이 사도직을 성실히 수행하면 하느님께서는 여러분도 또한 구원의 협력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구세주께 감사를 드리는 가장 훌륭한 방법입니다.
다음은 교황 비오 12세 성하의 알현의 영광을 그는 또 받았다. 1953년 7월 바티칸 성청으로부터 정식으로 초청하는 공문이 왔다. 프랭크 더프가 1920년에 평신도 사도직의 헌신 관계로 교황 성하의 알현의 영광을 받은 후 20년이 지났다. 두번째 여행은 12년간 미국에 파견되어 12년 동안 레지오 순례자로 활동했고 꼰칠리움의 부단장인 존 메레이와 동행하였다.
교황 비오 12세 성하께서는 그에게 개인 알현의 시간을 주었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따뜻한 사랑으로 맞이해 주시어 다시 한 번 큰 감명과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교황 성하께서는 ‘나는 레지오 마리애가 교회에 보여 준 커다란 봉사에 매우 감사하고 있습니다’하시고 전세계 레지오 단원들에게 특별 강복을 주셨다.
프랭크 더프는 17일간의 로마 체류 기간 동안 적어도 13번의 강의를 했다. 바티칸 방송을 통하여 25개 국어로 중계된 강의를 했으며 여러 학생단체를 상대로 강의는 계속되었다. 또한 띠세랑 성성 장관들, 고위 성직자들을 알현하여 레지오 마리애의 이해와 협조를 얻었다. 정교회에서도 쁘레시디움을 창설해 주었으니 얼마나 큰 발전이겠는가?
또한 무게가 있는 ‘오세르바도레 로마노’지(誌)도 레지오에 대한 논설을 게재하여 크게 격려를 하였다.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프랭크 더프 일행이 바티칸을 떠나기 직전 교황청 국무장관 몬티니 추기경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서한을 레지오 마리애에게 주셨다.
친애하는 프랭크 더프 씨,
교황 성하의 분부를 받들어 약 30년 전에 가톨릭의 옥토인 아일랜드에서 창설된 레지오 마리애에 축하와 격려의 말씀을 전하게 됨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성하께서는 레지오가 오늘날 온 세계에서 악의 세력과 싸우는 충성스럽고 강력한 마리아의 군대를 이루도록 발전해 온 것을 여러 해 동안 자부적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셨으며 이제 지구 위 어느 곳에나 레지오의 깃발이 꽂힌 것을 보시고 귀하와 더불어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마리아의 레지오 단원들이 이룬 훌륭한 공적에 대하여 치하의 말씀을 하시며 아울러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모든 사람을 인도하는 성스러운 사명을 지닌 교회에 단원들이 이미 바친 그 아낌없는 협조를 앞으로도 더욱 열성으로 지속하라고 격려의 말씀을 하심은 마땅한 일입니다.
이 사도직에 대한 레지오 단원들의 공적은 주로 그들의 건전한 영성 수련의 정도에 따라 평가될 것입니다. 곧 영적 지도자의 현명한 지도로 그들 안에 참된 사도직 정신을 확실하게 길러 주고 또한 그들의 모든 활동에서 교황의 지도에 항시 순종하고 그들이 받드는 교구장에게 충성스럽게 복종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 참된 평신도 사도직의 초자연적 특성을 풍부히 지니게 되면 거룩한 용기를 가지고 나아갈 것이며 어둠의 세력과 영신적인 싸움을 하는 교회의 힘찬 협력자로서 구실을 계속할 것입니다.
성하께서는 온 세계 레지오 단원들을 위하여 성모님의 전구를 기원하시면서 귀하와 영적 지도자, 모든 행동 단원과 협조 단원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표시하는 교황 강복을 전달하도록 분부하셨습니다.
경의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교황청 국무장관 서리
J. B. 몬티니
1960년 3월에는 교황 요한 23세 성하의 알현의 기쁨을 가졌다. 이태리 레지오의 영적 지도신부로 있으면서 프랭크 더프와 친교를 맺었던 몬시뇰 꼬라도 바필레를 교황 성하께서는 자기 비서로 임명하였다. 레지오에 대단한 관심을 가진 몬시뇰 꼬라도 바필레는 몇 년 뒤에 서독 교황대사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꼰칠리움 간부들을 특별 초청하였다. 몬시뇰의 주교 성성식에는 이태리의 레지오 단원 수백 명이 참석하여 축하하였다.
그 다음 날 교황 성하께서는 몬시뇰과 레지오 간부들을 초청하였다. 성하께서는 전세계 각지에서 로마로 오는 훌륭한 조직이라는 증명 때문이라고 하며 레지오를 칭찬하였다. 그 자리에서 성하께서는 프랭크 더프에게 친히 서명한 사진을 주셨는데 ‘전세계 레지오 단원들에게 진심으로 강복을 내립니다’란 내용이었다.
교황 요한 23세께서 전세계 레지오 단원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주셨다.
온 세계 레지오 마리애 간부들과 단원들에게, 교부적 사랑을 표시하고, 또한 여러분들이 수행하는 값진 사업이 더욱 풍성한 영신적 열매를 거두도록,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특별한 교황 강복을 베풉니다. 바티칸에서 1960년 3월 19일
또한 프랑스 레지오 단원들에게 주신 격려의 말씀은 아래와 같다.
‘레지오 마리애는 가톨릭 교회의 참된 모습을 보여 줍니다.’
프랑스 레지오 단원들에게
1960년 7월 13일
다음은 교황 바오로 6세 성하를 알현하게 된 기쁨을 얻었다. 초창기 레지오 시대부터 영적으로 잘 지도해 온 쉬넨스 추기경의 특별한 배려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1964년 9월 로마 세나뚜스 산하 단원들의 뜨거운 환영 속에 로마에 도착한 프랭크는 이어서 며칠 간의 시찰 여행을 가졌다.
공의회에 참석한 프랭크 더프는 히넌 추기경의 소개로 자발적인 박수 갈채를 받았다. 그는 공의회 중에 있었던 로마 세나뚜스 회의에 세 번이나 참석하여 격려하였다. 영어권의 주교 백 여 명을 상대해서 모임을 가져 강의도 하였다. 12월 11일에는 교황 바오로 6세 성하를 개인적으로 알현하였다. 성하께서는 그를 두 손으로 맞이하여 A방문해 주셔서 기쁩니다. 교회에 대한 봉사에 감사하고 싶었고 레지오 마리애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칭찬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B라고 격려하셨다.
1965년 1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께서 레지오 마리애의 서한을 보내 격려해 주셨습니다.
친애하는 프랭크 더프 씨.
교황 성하께서는 귀하가 최근에 올린 충성어린 서한을 보시고 대단히 기뻐하고 만족스럽게 여기셨습니다. 성하께서는 신비로운 풍토 속에서 창설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매우 유익한 사업을 온 세계에 펼친 레지오 마리애에 대하여 치하와 격려의 말씀을 보내고자 하십니다.
성하께서는 레지오가 이 같은 치하를 받기에 합당하다고 여기십니다. 그 이유는 레지오가 신심 깊은 목적을 가지고 많은 사업을 매우 슬기롭게 창안하고 발전시켜 가톨릭 사도직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이로써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는 데 놀라운 힘을 지닌 기구라는 것이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성하께서는 전에 국무성에 근무하실 때 귀하와 만났던 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십니다. 특히 그때 귀하와 나누신 대화를 통하여 레지오 운동에 생명력과 활력을 주는 비결인 레지오 정신에 대하여 완전히 이해할 수 있으셨습니다. 레지오 마리애의 정신은 단원들의 강한 내적 생활에서, 그리고 그 규율과 이웃의 구원을 위한 헌신적 노력 및 교회에 대한 확고한 충성에서, 풍부한 영양분을 알맞게 섭취합니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이 레지오 정신은 복되신 동정녀의 임무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또한 뚜렷한 특징입니다. 레지오 마리애는 성모님께서 단원들의 모범이시고, 인도자이시고, 기쁨이시며, 후원자이심을 알고 그 갖가지 훌륭한 활동을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레지오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해주셨고 구원사업에서 그리스도께 그토록 긴밀하게 협력하셨던 성모님으로부터 사도직이 얼마나 많은 격려와 감화를 받아야 하는가를 깨닫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성하께서는 세계 곳곳에서 특히 신앙이 침해 당하고 박해 받는 곳에서 이미 많은 열성적인 사도들과 영웅적인 그리스도의 증거자들을 길러낸 이 레지오 정신을 크게 신뢰하고 계십니다. 이미 이룩한 성과로 보아 모든 레지오 단원들의 정열과 사도적 노력은 줄지 않고 꾸준히 늘어갈 것임을 확신하시고 성하께서는 귀하와 귀하의 동료들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나타내십니다. 아울러 성하께서는 여러분 모두가 항상 교회에 대하여 변함없는 사랑을 가지고 사도직을 수행하기 바라시며 특히 주교들의 뜻을 따르고 다른 가톨릭 단체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정신을 가지도록 간곡히 당부하십니다. 성하께서는 레지오의 수많은 각급 단원들을 복되신 성모님의 자모적 보호에 맡기시면서 귀하와 모든 레지오 단원과 영적 지도자들과 레지오의 모든 활동에 특별한 자부적 교황 강복을 베푸십니다.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프랭크 더프는 로마로부터 또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 그를 알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는 일생 동안 자전거를 애용하였다. 레지오 활동을 비롯해서 교통 수단으로 자전거를 이용하였다. 한국 농촌에서 볼 수 있는 우체부 모습과 비슷한 자세로 항시 자전거 짐발이 위에는 조그마한 문서 가방을 싣고 다녔는데 그 가방 속에는 레지오 조직과 교육에 관한 것들이 들어 있었다. 그 날도 프랭크는 며칠 간의 순례를 다녀왔는데 교황 성하의 하명을 받고 뛰는 가슴을 억제할 수 없었다. 1979년 5월 10일 당시의 꼰칠리움 엔다 던리블리와 간부들을 대동하고 바티칸으로 향하였다. 그의 나이는 90세의 생일을 맞이했었다.
프랭크의 마음 속에는 레지오의 천사인 에델 퀸이 죽은 12년 만에 시복 운동이 전개된 후 지금까지 잘 진행되도록 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이 일에 대하여 기쁜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알현을 갈망했던 그 날 일행은 교황 성하의 개인 성당으로 인도되어 미사를 봉헌했고 직접 성하의 손으로 성체를 모실 수 있었다. 이어서 아침 식사에 초대되었다. 교황은 따뜻하게 맞이해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이제 당신은 교황의 부엌에 계십니다’ 하였다. 한 시간 동안 계속되는 대화에서 프랭크는 세계에 조직이 확대되는 현황을 소개하면서, 그러나 레지오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저항을 받고 있는 현실도 보고하였다. ‘그것은 마치 군부대가 작전 진행에 대하여 참모장에게 보고하는 것과 같았다.’ 이 말은 프랭크 더프 씨 소감의 표현이었다.
교황 성하께서는 접견 간부들과 이별하는 끝 말씀에서 ‘레지오 마리애 단원의 모든 생각, 모든 말과, 모든 행동의 승리는 마리아를 통해서 점철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간부들을 일일이 껴안아 주시는 교황의 사랑에 한없는 감격의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교황 성하는 세계의 단원들이 당신께 충성하는 그 충성을 감지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사랑하시는 것 같다.
역대의 교황 성하께서 레지오 마리애의 창시자인 프랭크 더프씨를 알현토록 은총을 주신 것은 레지오 마리애의 특수한 사도직 수행에서 그들은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 나라 건설에 헌신하기 때문이다. 특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는 성모신심이 아주 두터우신 분으로 성모님이 발현하신 곳을 안 가보신 곳이 없을 정도로 순례를 하셨다.
몇 년 전에 선포한 ‘성모 성년’과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에게 베풀어주신 전대사의 특은은 우리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감사와 은총의 선물인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 1982년 10월 30일 이태리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에게 아래와 같이 격려해 주셨다.
나는 여기 로마에 오신 레지오 마리애 형제 자매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반가운 인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은 단장 및 전국 기구의 지도자와 함께 베드로의 후계자를 만나서 격려와 축복의 말씀을 듣고자 오셨습니다.
나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나는 우선 이태리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단원 여러분들이 지난 60년 동안 온 세계에 걸쳐 급속도로 발전된 저 거대한 사도직 운동 단체의 일부라는 저을 생각할 때 한층 더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단체는 그 창설자 프랭크 더프 씨가 작고한 지 2년이 되는 오늘날 온 세계 교회의 수 많은 교구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비오 11세를 비롯한 나의 선임자들께서는 레지오 마리애에 감사의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나 자신도 1979년 5월 10일 여러분의 첫번째 대표자들을 맞이하였을 때, 내가 과거에 레지오와 접촉하게 되었던 일들을 즐겁게 회상하며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파리, 벨지움, 폴란드에서 레지오 마리애를 접촉해 본 바 있으며 로마의 주교가 된 뒤에도 이 도시의 본당들을 방문하는 길에 레지오 단원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나는 이 단체의 이태리 지역 순례자 여러분을 맞이하면서 교회 안에서 여러분의 영성과 생활 방식이 지니는 본질적 요소에 관해서 강조하고자 합니다.
누룩이 되라는 소명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개인 성화를 이루기 위해서 여러분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열망하는 평신도 단체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고귀하고 어려운 이상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오늘날 공의회를 통하여 모든 가톨릭 평신도들이 이 이상을 목표로 삼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곧 평신도들이 거룩한 생활의 증거와 극기와 행동적 사랑으로써 그리스도의 왕다운 사제직에 참여하기를 교회는 바라고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을 가지고 마치 영혼이 육체에 존재하듯이 세상에 머물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평신도로서의 소명 곧 하느님 백성 안에 누룩이 되고 현대 세계에서 그리스도교적 이상을 불어 넣으며, 사제를 사람들에게 모셔가라는 소명은 뚜렷한 교역자적인 임무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모든 평신도들이 주님과 더욱더 친밀히 결합하도록 요구하는 부르심을 항상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권장합니다. 하느님의 것인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것처럼 여기면서 교회의 구원 사업에 참여함으로써 교회의 살아 있는 연장이 될 것을 간곡히 바랍니다. 오늘날 평신도 사도직의 분야는 참으로 널리 확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특별한 소명에서 오는 임무는 더욱더 절실하게 요구되며 마땅히 활성화 되어야 하겠습니다. 평신도가 활성화 되었다는 것은 곧 교회 자체가 활성화 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러 레지오 단원의 임무는 더욱더 중요성을 띠게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정신과 염원을 지닌 단체
여러분의 단체는 뚜렷한 마리아의 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레지오가 마리아의 이름을 그 선명한 깃발로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레지오는 그 명성과 사도직의 조직을 마리아와의 결합이라는 강력한 원칙 위에 두고, 또한 마리아께서 구원의 사업에 깊이 관여하신다는 진리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모상인 모든 사람에 대하여 마리아의 정신과 정성을 가지고 봉사를 바치고자 합니다.
우리의 유일한 중재자는 공의회에서 선언하셨듯이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곧 사람들에게 대한 마리아의 모성적 역할은 그리스도의 유일 중재성을 흐리게 하거나 감소시키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것을 더욱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공의회 문헌 교회헌장 60항) 선언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변호사’ ‘협조자’ ‘영원한 도움’ ‘교회의 어머니’ 등의 칭호 밑에 동정 성모께 빌고 있습니다.
이 사도직 활동의 태어남과 성장은 성인으로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하신 마리아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계시는 곳에는 또한 그 성자가 계십니다.
우리가 마리아로부터 떠날 때는 조만간 성자로부터도 멀어지고 맙니다. 오늘날 세속 사회의 많은 분야에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데, 이는 동정 성모께 대한 신심이 저하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레지오는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보급하고 부흥시킴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전파하고 심어 주기 위해서 각자가 사명감을 가지고 임무를 수행하는 단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성모께 대한 사랑을 통하여 모든 이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성자를 더욱더 널리 알리고 더욱 많은 사랑을 받게 하는 일을 가장 효과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과 사랑의 관점에서 나는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교황 강복을 베풉니다.
<8> 창설자의 유언
일생을 레지오 마리애의 세계 확장에 전념해 온 프랭크 더프는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헌신하였다. 그러나 레지오 사도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기쁨과 더불어 슬픈 일들이 세계 여기저기서 발생하였다. 그 때마다 그는 끈질긴 인내와 성령의 지혜로 대처해 나감으로써 시간이 다소 지연 되었을지라도 온전히 실패한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실망이 있을 때 성모님께서는 그에게 굳은 용기를 주었다. 또한 그 역시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좌절이 있을 수 없다고 확신했었다.
1940년에 도입된 프랑스에서는 막강한 주교가 전적으로 반대하고 심지어 레지오 조직을 조사해서 엉뚱하게 비항하고 비웃는 소책자까지 제작하였다. 프랭크는 레지오가 수난을 당하고 있다고 보고를 받을 때마다 그들과 마음으로 동참하며 성모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한 여성 파견자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이다.
‘당신은 당신 능력의 마지막 단계까지는 견디어야 합니다. 당신이 지고 있는 짐을 통해서 시험을 당하고, 당신의 각오 여하에 따라 성공이 주어질 것입니다. 당신이 가 계시는 나라의 애로 사항 전체를 당신 어깨에 짊어질 수 있는 날, 바로 그 날 당신은 나라 전체를 얻게 됩니다.’
자신이 없는 듯 어떤 계획에 대하여 주저하는 단원들에게 그는 어떤 일이나 굳은 신념을 가지고 추진하라고 당부하였다.
‘여러분은 일을 할 때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십시오. 실패는 없는 것이며 인간만이 있는 것입니다.’
프랭크 더프는 교본의 서두에 지침을 다음과 같이 주지시켰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규칙대로 충실히 운영하는 레지오 기관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레지오는 어느 한 부분이라도 빠뜨리거나 변경하면 균형이 깨뜨려져서 무너질 수 있는 조직이다.
한오라기의 실을 뽑아 보라.
온 필베가 흠가리라.
숱한 키 가운데 하나만 부숴 보라.
귀 거스르는 소리 내내 울리리.
그러므로 교본에 기록된 대로 정확하게 운영할 태세를 갖추지 않았으면, 아예 레지오를 시작하지 말아주기 바란다.
이 점에 관하여는 제20장 ‘레지오 조직과 규율은 바꿀 수 없다’를 주의 깊게 읽으리라.
그는 마지막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천주의 모친은 지름까지 레지오를 당신 손에 붙들고 계셨습니다. 나는 내가 더 이상 없더라도 그 분이 레지오를 떨쳐 버리리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그는 활동을 생명과 비유하는 강한 표현을 하였다. 단원은 두터운 신덕으로 강철같은 사명감을 가지고 소명받았다는 자세로 활동에 대한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활동과 생명 중에서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한다면 활동을 선택한다는 강한 신념으로 항상 불타는 상태에서 활동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당시 중국의 리베리 대주교는 감옥살이를 하다가 추방당하였다. 그는 홍콩에 도착하여 프랭크 더프에게 전보를 보냈다.
‘중국에서 마지막 사제와 선교사가 죽거나 갇힌다 하더라도 레지오 마리애가 중국의 신앙을 구해낼 것이라 확신합니다.’
리베리 대주교께서 벌써 앞을 보시고 예언하신 것이다. 중국은 1980년도 부터 종교정책이 다소 변하게 된 것이다. 이젠 많은 활성화가 되어, 신자수가 증가되고 있는 현실이나 교황청과는 단교를 하고 있다. 이번 부활절에 신문지상에 묵주를 든 중국의 신자 모습을 보고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 아닌가 하며 많은 관심거리가 되었다. 지금쯤은 중국에서도 단원들이 살아 있을 것으로 확신해 본다. 순교의 피가 아직도 생생하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성모군이 온 세계를 점령할 시기가 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면서 성모님께 간구한다.
레지오 사도직을 위해 전 생애를 온전히 봉헌한 그는 1980년 11월 7일 레지오의 놀라운 기적을 남기고 91세로 귀천하였다.
프랭크 더프 복자 시복 운동 전개 꼰칠리움(레지오 마리애 세계 본부)에서는 레지오 마리애 창설자인 프랭크 더프에 대한 복자 시복 운동을 발의하면서 전세계 레지오 마리애에 통고해 왔다. 1921년 창설된 고유 사도직 단체인 레지오 마리애는 전세계 2,800 교구에 조직을 가지고 있다. 꼰칠리움에서는 프랭크 더프의 복자시복 운동을 발의함에 따라 다음과 같은 물건을 소유하고 있거나 참고가 될 자료가 있으면 연락을 바라고 있다.
① 프랭크 더프의 서한
② 프랭크 더프에 관계된 테이프나 비디오
③ 프랭크 더프에 대한 출판물
④ 유년 때부터 성인 때까지 일생을 잘 아시는 분
⑤ 프랭크 더프를 통해 기도를 하는 분
2. 한국의 레지오 마리애 발전사
1. 한국에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한 현 하롤드 대주교
ꡒ여기 동방으로 뛰어들고자 했던 이 잠들다.ꡓ
이 말은 어느 날 현 대주교님이 공동 묘지 어느 곳에 있을 당신의 묘비를 상상하며 떠올린 문구이다. 현재 제주시 가톨릭 묘지에 있는 그분의 묘소에는 이러한 비문은 없지만, 그분이 바로 동방으로 뛰어들어 밝은 빛이 되신 하롤드 헨리(Harold Henry) 현 대주교님이다.
현 대주교님은 미국 미네소타 주 노스필드에서 1907년 7월 11일, 프로테스탄트 신자인 아버지 프랭크 헨리와 어머니 미네바 쉐스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나 모라비아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잦은 전직으로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던 그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종교에 접하게 되었으며, 6년 동안에 국민학교를 무려 일곱 차례나 옮겨 다녀야만 했다. 열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께서 가톨릭 신자인 여성과 재혼하기까지 일 년여 정도를 친척 집에 얹혀 지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하롤드가 자주 옮겨 다니는 것을 본 이복 누이 이사벨이 그에게 가톨릭 재단인 성 스테파노 학교에 입학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는 가톨릭 신자가 되지 않아도 좋다는 학교의 승인을 받고 그 학교에 입학했는데, 사실 그때 그는 가톨릭의 사제란 사악한 힘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 힘으로 자신을 꼼짝 못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입학한 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한 신부님으로부터 ꡒ성체 안에 계시는 주님ꡓ에 관한 강의를 듣고서 가톨릭 교회란 성모 마리아만을 흠숭한다고 여겼던 종래 자신의 생각이 그릇되었음을 깨닫고, 가톨릭에 심취하게 되어 드디어 1922년 5월 12일 세례를 받았다.
그 무렵, ‘동방’이라는 잡지를 통해서 선교사의 삶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중국 선교에 대한 강한 열망를 키우기 시작하여, 1918년 설립된 성 골롬반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영세한 지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과 부모님의 결혼 문제로 약간의 어려움을 겪었고, 그곳 오마하에서 일 년을 지낸 후 실버 크리크로 옮겨 학업을 마치고, 1926년부터 1931년까지 아일랜드의 성 세넌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만일 아일랜드에 가지 않았더라면 성직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여길 만큼 그곳에서의 생활을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성 세넌 대학에서 학업을 마친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10년간의 신학교 생활을 마치고 1932년 오마하의 성 골롬반 성당에서 주님의 백성의 목자인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그토록 열망하던 중국 선교를 위한 머나면 항해에 오르게 되었는데.…… 하느님께서는 그를 위해 전혀 다른 곳에 자리를 마련하셨다. 중국 사회가 혼란하여 항해 중에 갑자기 중국 대신 한국 선교로 소임이 바뀌어, 항해의 목적지는 중국이 아닌 더욱 낯선 동방의 나라 한국이 되었던 것이다.
1933년 일곱 명의 동료와 함께 한국에 입국한 후 대구에서 언어 수업을 받았다. 아일랜드의 신학교에서 달필로 유명했던 그로서도 한국어를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 했으며, 더구나 일본 식민지 치하라 일본어까지 배워야 한다는 이중의 부담을 가졌다. 그러나 자신이 배운 바를 전파하고자 하는 열의에 가득찬 젊은 선교사로서 ꡒ한국말 모릅니다ꡓ고 말해야만 하는 고통을 통해서 아주 자연스럽게 겸손을 익히게 되었고,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많은 부분을 자신의 첫 부임지인 노안 본당에서 신자들과 접촉하면서 터득하였다.
이방인들에게 이 언어 문제와 병행하는 것이 다름아닌 음식 문제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언어나 음식에 따르는 문제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으니, 정말로 그가 도전해야 할 문제는 본당 신자들이 그를 낯선 외국인으로 바라보는 시각, 그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이방인이어서는 안된다고 판단하고 우리 한국인들과 동고 동락하며 완전히 하나가 되기 위하여, 즉 완전 적응을 하기 위하여 우리의 고유한 문화와 관습을 이해하고자 각종 풍속에 참여하면서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 후 나주로 부임하여 교세 확장과 더불어 새 성전을 건립하고,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의해 교육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배움의 터전을 마련해 주는 등 날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오랫동안 현 대주교님을 감시해 오던 일본 경찰들의 압력은 더욱 거세어져만 갔다. 1941년 6월부터는 아예 스물네 시간 내내 감시하더니, 진주만 사건이 터지자 휴가를 요청하여 목포로 내려가 있던 그를 연행하여 단지 미국인이라는 죄명으로 급기야 나주 감옥에 감금시켰다. 다시 광주 사제관으로 이송되어 연금되었다가 1942년 본국으로 강제 송환 당한 이후로는 미국 종군 신부로서 활약하여 동성 훈장을 수장하였다. 이는 그분이 사제로서 군인 세계에 완전 적응했음을 보여 주는 단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그곳 골롬반 신학교의 강의를 맡았는데, 이 시기는 그분의 생애 중 가장 평탄했던 시절로서 그분은 그다지 흡족치 못하게 여겼다. 그것은 당신 마음속 깊이 한국이라는 나라가 크게 자리했기 때문이었다.
1947년, 주교 대리로 임명된 후 한국에 다시 온 그는 이제 일본군의 감시가 사라진 대신 새롭게 부딪쳐 오는 문제가 있었으니, 이는 공산주의에 의한 국토의 양분과 사회 혼란이었다.
미국 델라웨어 주에 있는 웰밍톤 다리는 현 대주교에게 있어서 행운의 다리이다. 동란 이후 광주교구의 재건을 위한 모금을 위해 순회하시다가 그 다리에서 몬시뇰의 임명 소식을 전해 받았으며, 후에 다시 그 다리를 건너다가 대주교가 된다는 소식을 접한 다리이기 때문이다.
6․25동란 후, 재건 사업과 예비자 교육, 의식주 해결 등의 문제로 동분서주 여유가 없는 가운데서도 그는 다시금 병원과 진료소의 필요를 절감하고 수도회의 도움을 받아 의료사업을 시작하였다. 또한 나환자의 자립을 위해 -나환자들이 존경의 뜻으로 헨리를 한글로 ꡐ현ꡑ이라 명명한- 현애원, 호혜원 그리고 영암 등 세 군데에 자활촌을 마련하였고, 소록도에 미감아를 위한 육아원을 설립했다.
이처럼 육체는 병원에서 그리고 영혼은 교회에서 돌본다지만, 정신을 위해서는 아직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낀 그는 한국인들의 교육열에 힘입어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 대건신학교(지금의 광주가톨릭대학)의 설립만큼 그의 시간과 정력을 소모케 한 것은 없었다. 신학교 설립을 위한 자금 마련에 애쓰다가 심장병이 더욱 악화되기도 했다.
까리따스 수녀회. 골롬반 수녀회, 과달루페 선교회, 글라라 관상 수녀회, 사랑의 씨튼 수녀회, 천주의 성 요한 의료 봉사 수도회, 예수 고난회 등 여러 수도회의 진출과 사회 복지 기관의 도움으로 본당과 공소 건립, 병원과 진료소, 중․고등학교, 신학교, 피정센타, 유치원 등을 건립하고, 평신도 사도직 활동으로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하는 등 노약자나 신체 장애자, 그리고 고아나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이처럼 혼신의 힘을 쏟을 수 있었던 것을 그는, 당시 공산당에 의해 처참히 죽어간 몬시뇰 브렌난을 비롯한 많은 신앙인들의 피 흘림에 대한 대가라고 여겼다.
미국에 다녀오는 길에 일본에서 레지오 주회를 하는 것을 보고 감격하고서 바로 꼰칠리움에 연락하여 1953년 5월 31일 목포에서 레지오를 창단하였다.
광주대교구에서 회갑을 지낸 현 대주교는 장성한 딸을 부모가 사위에게 내주듯이 한공렬 주교에게 광주대교구를 인계하신 후 1971년 제주교구장으로 부임하였다.
죽음이 임박해 오면서 그가 겪은 커다란 변화는 점차 신비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인간의 의지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여겼으나, 이 신비의 영역에 접하면서부터는 자신이 하느님의 도구로서 어떤 역할을 부여받았음을 하느님께 감사드리게 되었다.
현 대주교는 1976년 3월 1일 월요일 아침, 향년 66세로 미사 준비 기도 중에 선종하셨다. 장례식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그분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ꡒ고인의 일생은 선교 자체였습니다. 고인의 생활 태도는 우리 모두가 우리의 형제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도록 하는 메시지였습니다.ꡓ
위의 조사는 바로 그분의 삶을 요약해 설명해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2. 한국 레지오의 도입과 발전
[1] 도입과정
한국에 레지오 마리애가 도입된 것은 1953년 5월 31일 당시 광주교구장이신 현 하롤드 대주교의 지도로 목포시 산정동 본당에 ‘치명자의 모후’ 쁘레시디움과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 그리고 경동 본당에 ‘죄인의 의탁’ 쁘레시디움이 설립되었다. 이어서 광주, 청주, 춘천, 원주, 전주, 서울, 제주 지역의 각 본당에 확산되어 각 교구에 확장 되었다.
초창기 각 쁘레시디움은 아일랜드 더블린의 꼰칠리움 직속 쁘레시디움으로서 꼰칠리움의 지시를 직접 받았고, 사업보고를 하였다.
1955년 10월 9일에는 한국 최초의 꾸리아가 창단되었는데 산정동 3개 쁘세시디움(치명자의 모후 쁘레시디움,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 동신자의 모후 쁘레시디움)과 경동 죄인의 의탁 쁘레시디움 및 함평 전교의 모후 쁘레시디움 등 5개의 쁘레시디움으로 ‘목포 매괴의 모후’꾸리아가 탄생되었다.
1956년 8월 7일에는 광주시 북동 본당 산하 8개 쁘레시디움으로 ‘중재자이신 마리아’ 꾸리아(CURIA MEDIATRICS)가 설립되었으며 1956년 12월 6일에는 ‘중재자이신 마리아’ 꼬미씨움(COMITIUMMEDIATRICS)으로 승격되었다.
1957년 3월 3일 한국 최초의 소년 꾸리아인 ‘목포 천지의 모후 꾸리아’가 창설되었다. 이어서 1957년 6월 10일에는 ‘광주 바다의 별 꾸리아’가 설립되었다.
레지오 사도직의 소개가 잘 되어감으로 인하여 교구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모든 본당마다 앞을 다투어 쁘레시디움 설립이 가속화 되었다. 사제와 수도자의 손과 발의 역할을 하며 정성을 다하여 봉사하고 자신들의 성화에 소홀함이 없이 모범적인 신심생활을 하였다. 특히 광주대교구는 한국 본산지답게 레지오 사도직에 참여도가 높았으며 교본 규칙에 따라 전국을 지도하며 착실히 성장해 나감으로써 좋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1957년 5월 7일에는 세계 본부인 꼰칠리움으로 부터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지도적 역할을 광주 중재자이신 마리아 꼬미씨움에 의뢰한다는 승인서를 받게 되었다.
이듬해 1958년 7월에는 세계 본부인 꼰칠리움에서 한국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뚜스(SENATUS MEDIATRICS․국가평의회)를 승인하였다.
한국에 레지오 마리애가 도입된지 5년만에 전국적인 조직을 완료하여 국가평의회를 운영하게 된 것이다. 각 교구에 레지오 마리애가 아래와 같이 전파되어 활성화 되었다.
□한국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뚜스
1953년 5월 31일 산정동 치명자의 모후 쁘레시디움
평화의 무후 쁘레시디움
경동의 죄인의 의탁 쁘레시디움 설립.
1955년 10월 9일 매괴의 모후 꾸리아 창단(목포 산정동 성당)
1956년 8월 7일 중재자이신 마리아 꾸리아 설립
1956년 12월 6일 중재자이신 마리아 꼬미씨움 승격
1958년 7월 13일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뚜스 승격
□부산교구
1956년 1월 3일 서대신동 영원한 도움이신 성모 쁘레시디움 설립
1956년 11월 2일 임마꿀라따 꾸리아 설립
1957년 3월 10일 임마꿀라따 꼬미씨움 승격
1978년 11월 10일 바다의 별 레지아 승격
□대구대교구
1957년 1월 13일 왜관 종도의 모후 쁘레시디움 설립
1957년 2월 3일 계산 다윗의 적루 쁘레시디움 설립
1957년 8월 22일 왜관 천주의 성모 꾸리아 설립
1958년 1월 12일 의덕의 거울 꾸리아 설립
1959년 1월 22일 의덕의 거울 꼬미씨움 승격
1959년 2월 15일 왜관 천주의 성모 꼬미씨움 승격
1971년 6월 13일 김천 평화의 모후 꼬미씨움 승격
1986년 5월 1일 의덕의 거울 레지아 승격
1999년 1월 1일 꼰칠리움 직속
□전주교구
1955년 5월 5일 전동 치명자의 모후 쁘레시디움 설립
1957년 7월 17일 파티마의 모후 꾸리아 설립
1960년 9월 11일 파티마의 모후 꼬미씨움 승격
1986년 5월 1일 파티마의 모후 레지아 승격
□마산교구
1956년 7월 10일 진해 중앙, 하늘의 문 쁘레시디움 설립
1957년 2월 17일 진해 그리스도의 모친 꾸리아 설립
1959년 9월 30일 치명자의 모후 꾸리아 설립
1961년 7월 16일 치명자의 모후 꼬미씨움 승격
1988년 3월 1일 치명자의 모후 레지아 승격
□안동교구
1957년 10월 25일 상주 서문동 그리스도의 모친 쁘레시디움 설립
1958년 8월 10일 함창 천상의 모후 쁘레시디움 설립
1959년 9월 27일 함창 구세주의 모친 꾸리아 설립
1962년 3월 25일 상주 남성동 죄인의 의탁 꾸리아 설립
1975년 8월 15일 안동 사도들의 모후 꼬미씨움 승격
2000년 5월 31일 안동 사도들의 모후 레지아 승격
□제주교구
1955년 12월 22일 중앙 천주의 성모 쁘레시디움 설립
1957년 8월 28일 치명자의 모후 꾸리아 설립
1980년 5월 11일 치명자의 모후 꼬미시디움 설립
1981년 8월 2일 치명자의 모후 꼬미시디움 승격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1955년 8월 19일 명수대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
1957년 1월 29일 혜화동 상지의 좌 꾸리아
1958년 6월 8일 혜화동 상지의 좌 꼬미씨움
─ 서울 꼬미씨움으로 지칭
1959년 3월 15일 명수대 평화의 모후 꾸리아
1960년 3월 30일 명 동 무염시태 꼬미씨움 설립
1960년 5월 8일 명 동 무염시태 꼬미씨움 승격
1974년 9월 25일 명 동 무염시태 레지아 승격
1978년 12월 23일 명 동 무염시태 세나뚜스 승격
□수원교구
1958년 8월 21일 양지 매괴의 모후 쁘레시디움 설립
1960년 1월 17일 천지의 모후 꾸리아 설립
1964년 1월 19일 천지의 모후 꼬미씨움 승격
1981년 3월 19일 천지의 모후 레지아 승격
□인천교구
1957년 9월 22일 답동 매괴의 모후 쁘레시디움 설립
1958년 4월 8일 바다의 별 꾸리아 설립
1958년 6월 8일 바다의 별 꾸리아 승인
1965년 7월 18일 바다의 별 꼬미씨움 승격
1986년 3월 30일 바다의 별 레지아 승격
□원주교구
1955년 3월 20일 원동 천주 성총의 모친 쁘레시디움 설립
1957년 5월 5일 치명자의 모후 꾸리아 설립
1966년 6월 12일 치명자의 모후 꼬미씨움 승격
□대전교구
1957년 3월 3일 논산 부창동 천지의 모후 쁘레시디움 설립
1959년 3월 12일 논산 부창동 루르드의 성모 꾸리아 설립
1961년 7월 9일 대흥동 다윗의 적루 꼬미시움 승격
1987년 8월 30일 대흥동 평화의 모후 레지아 승격
□청주교구
1954년 2월 15일 북문로 하자없으신 모후 쁘레시디움 설립
1956년 8월 20일 구세주의 모친 꾸리아 설립
1957년 10월 7일 구세주의 모친 꼬미씨움 승격
1987년 6월 28일 구세주의 모친 레지아 승격
□춘천교구
1954년 11월 홍천 무염시태 쁘레시디움 설립
1955년 11월 5일 소양로 종도의 모후 쁘레시디움 설립
1956년 9월 2일 소양로 평화의 모후 꾸리아 설립
1957년 5월 5일 소양로 평화의 모후 꼬미씨움 승격
[2] 활성화에 따른 발전
평신도의 특수 사도직은 레지오 마리애 신심단체가 전국의 모든 교회에 소개되자 사제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선행되는 가운데 서로 앞다투어 평신도들에게 권장하면서 쁘레시디움을 설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일들이 그러하듯이 레지오 마리애의 도입 과정도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다.
그 예를 들어본다면 첫째, 교본의 내용이 한국 실정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교본 규칙을 무시하고 적절한 편법으로 운영하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둘째, 지도자의 편리에 의해 조직되고 운영되다 보니 결코 바람직스런 방법이 아님을 늦게나마 발견하게 된 것이다.
어떤 평의회에서는 심지어 묵주기도를 5단이 아닌 1단만 바치자고 했던 경우가 있는가 하면 또한 교본에 조직, 운영에 따른 규칙이 자세히 나열되고 있지만 번역이 어렵게 되어 이해하는데 곤란했던 일 등 여러 가지 시행착오가 있었으니,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기도하며 연구해서 원만히 운영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대군단의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이다.
본 신심단체의 고유한 특성은 첫째 자기자신의 성화요, 둘째는 하느님 말씀의 전파이다. 신심단체이기 때문에 두터운 신심으로 영성생활이 앞서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단원들이 증가됨에 따라 약간의 혼선이 있었으니 영적 지도자들이 정성어린 지도로 이제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 세나뚜스는 아일랜드 출신의 지도 신부님을 맞아 바로 더블린에서 하고 있는 그대로 정통성 있는 레지오를 전수받아 전국의 레지오 지도에 임함으로써 레지오 운영의 본보기가 되었다. 어느 지역에서나 레지오 지도가 잘못 되어가면 광주 세나뚜스에서 직접 방문하고 지도하며 서신으로 질문에 응답하는 것은 물론 매월 월보를 통하여 운영과 관리에 대하여 교육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은 전국 어느 곳에서나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광주 세나뚜스에 질의해 오고 있다.
서울 지역의 레지오는 1955년 8월 19일 광주대교구 현 하롤드 대주교님의 주선으로 당시 서울 성의중․고등학교장으로 계셨던 김성환 신부의 지도를 받아 명수대 본당에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이 설립된 후로 모든 본당에 확산되었다. 1956년 9월 25일 혜화동 본당에 치명자의 모후 뿌레시디움이 설립되었고, 1957년 1월 29일 혜화동 본당에 상지의 좌 꾸리아가 설립되었고, 1958년 6월 8일에는 꼬미씨움으로 승격되었으며, 이후 상지의 좌 꼬미씨움은 서울 꼬미씨움으로 지칭되었다. 1959년에는 명수대 본당에 평화의 모후 꾸리아가 설립되었다.
초대교회, 조상들의 강한 신심이 우리들의 심금을 울려주듯 초창기의 선배 단원들은 매우 열심히 레지오의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매달마다 단원들은 매우 열심히 레지오의 대열에 참여하게 되였다. 매달마다 증설되는 쁘레시디움과 평의회는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거대한 군단을 형성할 수 있었다.
1960년 3월 30일에는 명동 대성당에 본부를 둔 무염시태 꼬미씨움이 설립되었고 같은 해 5월 8일에는 무염시태 꼬미씨움으로 승격시켜 수도권 레지오를 관리 운영해 오다가 날로 확장되는 레지오 조직의 관리를 위해 1974년 9월 25일 무염시태 꼬미씨움을 레지아로 승격시켰다.
한국 세나뚜스는 전국을 관리 운영하면서 이제까지 큰 고충은 없었으나 계속 레지오 조직이 확산됨에 따라 지역적인 관계 때문에 불편을 느끼게 되었다. 즉, 매월 세나뚜스 월례회를 개최하는데 각 교구 평의회에서는 광주까지 와서 종합보고를 해야하고 방문도 가야 하며 합동회의 때도 광주까지 와야하는 등 지리적인 여건관계로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고 레지오의 효율적인 관리 운영을 위해 서울 지역에 세나뚜스 설립을 서두르게 되어 마침내 세나뚜스로 승격시켜 줄 것을 꼰칠리움에 상신하여 1978년 12월 23일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로 인준을 받았다.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는 서울 지역의 인천, 수원, 춘천, 원주, 대전, 청주 교구의 레지오 조직의 관리 운영을 담당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로써 한국 세나뚜스는 이에 광주, 대구, 부산, 전주, 마산, 제주, 안동 교구의 레지오 관리와 운영만을 전담하게 되었다. 광주와 서울의 양 세나뚜스는 성모님께 일치하는 모습으로 굳게 뭉쳐 오늘도 하느님 나라 건설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 한국에 레지오 마리애가 도입된 이후 평신도 사도직의 신성한 의무를 정성껏 수행하며 한국 교회 발전에 봉사해 왔다. 그 동안 전국적인 큰 행사도 치루었는데 그 중에서 기억할 만한 행사는 아래와 같다.
1978년 5월 5일 한국세나뚜스 주최로 한국 레지오 마리애 도입 25주년 행사를 광주 무등경기장에서 전국의 단원들과 영적 지도자들을 모시고 성대히 개최하였다. 그리고 1979년 7월 16~17일 양일간에는 서울 상지회관에서 천주교 한국선교 200주년에 즈음한 교세 200만 신자 확보를 위한 전국 꼬미씨움 단장, 지도신부 회의를 개최하고 민족 복음화 활동 5개년 계획안을 확정하였다. 또한 1984년에는 한국 200주년을 맞이할 때까지 200만 신자 선교를 위한 각종 행사를 서울과 광주의 양 세나뚜스에서 선교의 과학적인 계획을 세우고 각 교구마다 행사를 거행하여 선교에 대한 사명감을 고취시키며 레지오의 일치를 재다짐하였다. 1984년 5월 6일에는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거행되었던 성인 103위 시성식 및 한국 선교 200주년 경축행사 대행사에 적극 참여하였다. 1986년 10월 25~26일에는 광주 명상의 집에서 전국 꼬미씨움 단장, 지도신부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3세기를 향한 민족 복음화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그 내용은 1990년까지 300만 신자화 선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 하자는 다짐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성하께서 역사상으로 두 번째인 성모성년(1987년 6월 7일~1988년 8월 15일)을 윤허함에 따라 성모군단인 한국 레지오에서는 전국의 각 꾸리아 단위로 성모성년 개막에 따른 경축행사를 성대히 가졌다.
1988년 4월 5일에는 레지오 마리애 한국 도입 35주년을 맞이하여 맨 처음 쁘레시디움을 설립하였던 목포 산정동 본당의 정원에 기념비를 건립하여 한국 세나뚜스 총재이신 윤공희 대주교의 주례로 기념비 제막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는데 각 지역에서 6천여 단원들이 축하 행사에 참여하였다. 한국 레지오 성지로 조성되어야 할 선정동 본당에 레지오 첫 기념 사업으로 기념비가 건립되었음은 보람있는 일이며 앞으로 기념관과 기념탑 등을 건립하여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성지 조성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1988년 5월 15일에는 한국 세나뚜스 주최로 성모성년 전국 대회를 청주 공설운동장에서 8만 5천여명의 단원들이 모여 성대히 개최하였다. 이 시대의 징표를 올바로 파악하고 민족 복음화를 향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그 동안 베풀어 주신 성모님의 은총에 감사드리는 이번 큰 행사는 5월 성모성월을 더욱 찬란히 장식하였다. 이 경축행사에 꼰칠리움 극동지역 담당 맥그라쓰 신부도 참석하여 식장을 더욱 빛내 주었다. 이 외에도 많은 행사들이 있었는데 특히 단원들의 영성생활을 지도하고 성모님과 일치하며 충성스런 성모군대의 정예 군대화를 위하여 전국 각 교구 단원들을 대상을 기사교육을 일년에 몇 차례 실시하여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또한 여러 가지 모습으로 교육과 피정을 실시하여 평신도 사도직의 활성화에 정성을 다하고 있으며 레지오의 목적과 정신이 몸에 배도록 인내와 기도로 꾸준한 수련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의 양 세나뚜스는 단원들의 신심을 두텁게 연마하고 영웅적인 활동성을 소개하여 레지오의 발전을 기하고 성모군대의 일치된 모습으로 민족 복음화를 성취시키기 위해서 '레지오 마리애’란 월간지를 창간하게 되었다.
‘레지오 마리애’란 이름으로 1988년 8월 1일에 발간된 레지오 영성지는 한국 레지오의 길잡이가 되고 장지기가 될 것이며, 조직에 순종하는 레지오 정신을 발휘하는데 활력소의 역할을 다할 것은 물론 민족 복음화에도 크게 기여하리라 굳게 믿는다.
1991년은 세계 레지오 창설 제 70주년이 되는 축복된 해이다. 한국 세나뚜스에서는 경축행사를 각 교구 평의회별로 실시토록 하였는데 예정대로 모두 실시하였으며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뚜스에서는 4월 5일 광주 가톨릭 대학 운동장에서 윤공희 대주교님을 모시고 8천여 단원들과 제 70주년 기념 행사를 성대히 거행하였다.
1993년 5월 5일에는 한국 레지오 마리애 도입 제 4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뚜스 주최로 광주대교구 산하 레지오 단원 약 8천명과 영적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경축미사와 경축식을 성대히 실시했으며 이를 시작으로 서울Se., 대구Re., 부산Re., 전주Re., 마산Re.에서도 각각 레지오 도입 제 40주년 행사를 실시하였다. 또한 한국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뚜스에서는 산하 교구를 대상으로 중견 간부 양성을 위한 레지오 제 1, 2, 3단계 기사교육을 매년 2회 이상 2박 3일 일정으로 실시하여 내실을 다지고 있으며, 각종 교육과 봉쇄 피정을 통하여 평신도 특수 사도직의 수련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1998년 5월 23일에는 레지오 마리애의 최초 도입지인 목포 산정동 성당 구내에 A한국 레지오 마리애 기념관 B을 건립하여 한국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뚜스 총재 윤공희(빅토리노)대주교님의 주례로 축성 미사를 봉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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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교를 사랑하는 분들" |
첫댓글 새로운 자료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