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인도하시는 대로 동원된 삶
신철원 구은지 가정
출생과 가정환경
나(구은지)는 경북 청도군 이서면 고철리, 시골 작은 동네에서 완고하신 아버지와 인자하신 어머니 사이에 3남 4녀 중 3녀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는 그리 넉넉지도 그렇다고 어렵지도 않은 평범한 가정이었다. 아버지가 호랑이처럼 무섭고 심한 잔소리 때문에 온 가족이 늘 긴장되고 불안한 가운데서 숨죽이며 생활했다. 언제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라 가족 모두가 마음 조이며 살고 있는 가운데서, 나는 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더 이상 집에서 살기 싫어서 고민하다가 가출하기로 마음먹었다.
같은 마을에 바로 1년 위 선배가 중학교 시험에 떨어져서 창피하다고 집 밖에도 못나오고 방에서만 지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보다는 공부도 잘했고 똑똑한 언니였는데도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것을 보고는 나는 아예 시험에 응시할 용기를 못 내고 포기했다. 시험을 봐서 떨어지면 당장 아버지한테 야단맞을 생각에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언니처럼 나도 창피해서 문밖에도 못나올 것을 생각하니 차라리 중학교 시험도 치기 전에 빨리 가출하자는 계획이었다. 서울에 사는 친구와 연락해서 서울역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아무도 모르게 서울행 열차를 타고 말았다. 그리고 도착한 후 친구의 소개로 만리동에 있는 약국 점원으로 일단 취직을 했다.
그러나 1년도 안 되어 오빠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언니가 같은 마을 청년과 산에서 동반자살을 했다는 비보를 듣고는 어렵게 간 서울을 떠나 올 수밖에 없었다. 마을청년과 사귀는 것을 아버지가 아시면 아버지에게 맞아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언니는 아마 죽음을 선택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렇게 무서운 아버지! 잔소리가 너무 심하신 아버지만 없으면 우리 집이 평화스러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착한 언니가 죽고 말았던 것이다.
무서운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대조적으로 면내에서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어질고 선한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착한 분이셨다. 오빠가 마을의 이장을 하고 계셨기에 면사무소 직원들이 우리집을 방문할 때마다 엄마에 대한 소문이 면내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온순하시고 인자하시기가 천성적으로 타고 나셨던 분이셨다. 내 기억으로는 엄마에게 한 번도 야단맞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잔소리도 안 하셨고 집안일도 안 시켰다. 크면 다 알아서 잘 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계신 어머니셨다.
아버지께서는 교회 나가시기 전에는 술, 담배를 하셨으며 도박까지 하셔서 1년 지은 농사를 겨울에 도박으로 다 날리시는 분이셨다. 경찰에 쫓겨 다니면서도 이웃동네까지 젊은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시며 수많은 재산을 탕진했다.
돈을 많이 잃고 오신 날은 식사를 하시면서 손을 많이 떠셨다. 보기에 너무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도박으로 돈을 모두 잃은 날은 잠도 못 주무신 채 밤을 세우셨다. 그러나 맥이 다 풀린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산에 나무하러 가셨다. 자식들에게는 절대 약한 모습이나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자식들에게 만큼은 본 된 모습을 보이려고 무던히도 애쓰시는 모습이 생각난다.
내가 약혼 후 임지에 나갔을 때였다. 동생 정분이가 경북교구에서 헌신 중에 있을 때 아버지를 7일 교구 수련을 받으시게 했다. 이후부터 아버지는 음주와 흡연, 도박까지 일체 끊으시고 그 무섭던 성격도 무척 온순해 지셨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자녀들의 훈육을 전혀 안 하시니 상대적으로 아버지가 어머니 몫까지 그렇게 많은 잔소리를 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잔소리가 많은 아버지가 조금 이해되기도 했다.
아버지께서는 남동생이 교통사고를 당해 나온 보상금으로 면단위 교회 부지를 구입할 때 거액을 헌금하셨다. 하늘 앞에 무엇이라도 기쁜 마음으로 헌금하시기를 즐겨하셨다. 30리길을 걸어 가셔야 교회 예배 참석할 수 있었는데 버스비를 아껴서 한 푼이라도 더 헌금하시려고 걸어 다니시던 아버지셨다. 어릴 때는 철없이 아버지가 죽기를 바랐지만, 그 아버지가 계셨기에 내가 태어날 수 있었고 또 그 아버지 때문에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종교를 찾았으니 아버지 때문에 지금 천보가정으로 살 수 있는 것에 감사한다.
아버지 종족메시아 선포 후 성화
아버지께서는 6500가정 기성 축복을 받으셨다. 축복비도 당신이 직접 마련하시고 고령임에도 3일 행사도 정식으로 치르셨다.
1994년 82세의 일기로 성화하시기 몇 달 전 아버지 생신 때에 자녀들과 친척 그리고 동네 주민 앞에서 종족메시아 선포식을 하셨다. 아버지가 성화하실 때 청도 교역장님께서 꿈을 꾸셨는데, 영계의 조상들이 3층천 기와집에서 대단한 분이 오신다고 대청소가 벌어져서 난리가 났다는 것이었다. 또한 살아생전 노아 할아버지와 같은 절대 믿음의 신앙을 하셨다고 증거해 주셨다. 성화 후 교역장의 꿈에 아버지를 만났을 때 “구 집사님 영계에서 무슨 일을 하시냐?”고 물었더니 영계에서 “종족메시아로서 조상들의 자리를 앉히는 인사권 업무를 보신다.”라고 하셨단다.
입교동기
어느 날 집안에서 흑백전단지 한 장을 발견했다. “조국이 나아갈 길이 여기 있다.” 그 전단지는 통일교회에서 배포한 것이었다. 나는 우리 집에서 도보로 30분 거리에 있는 양원동 교회를 찾아갔다. 물어 찾아간 교회는 어느 가정집이었는데, 그곳에서 개척전도사를 만나게 되었다.
내가 첫 질문을 한 것은, “이 교회에 다니면 사람들이 다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 염두에 뒀던 대상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한테 제일 무섭고 힌들게 한 아버지였다. ‘그 아버지까지 선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갖고 질문을 했던 것이다. 당시 나에게는 그만큼 절체절명의 가장 큰 고민이었기 때문이었다.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면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던 내용이다. 일반적으로는 진리를 찾아 참된 생명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신앙을 찾지만 나에게는 행복한 가정은 고사하고 지옥과 같은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교회를 찾게 된 것이다.
나는 경북교구로 7일 수련을 가게 되었고 수련회에서 원리의 전반적인 강의에서 고민했던 문제들이 풀렸다. 모두 다 옳은 말씀만 하시는 강사님이 너무 멋있고 위대하게 보였다. 수련 기간 동안 원리가 이해되지 안 거나 의심이 되는 부분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많은 은혜를 받아 마냥 즐겁고 행복했다. 마치 다른 세상에 갔다가온 느낌이었다. 그때부터 주일예배는 빠짐없이 착실히 다녔다.
당시 전도사님의 정성의 기도가 있었지만 내가 교회를 찾아갈 수 있게 해주신 믿음의 어머니에게 감사를 드리며 살고 있다. 믿음의 어머니는 가만히 앉아서도 대상자가 찾아오게 하시는 대단한 영력을 갖춘 분이었다. 아버님께서 통일신학생 가운데 부부가 될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나의 믿음의 부모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1800쌍 축복을 받은 후에야 자신들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알았다고 했다.
두 분이 통일신학교 1기생으로 다니실 때는 영적으로 밝아 꿈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아셨다. 영적 능력에 의하여 성전 끝에서부터 앞에까지 날아서 오기도 하셨다고 했다. 정성들이면 하늘은 반드시 함께 해주신다는 것을 늘 체험할 수 있다고도 하셨다.
내 자신이 목회 29년간을 한 사모로써 지금까지 남아질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의 부모님 덕분이었다. 만날 때마다 용돈을 주셨고, 돈이 들어가야 할 일이 생기면 항상 넉넉히 챙겨주셨다. 430가정 종족적메시아 활동을 할 때도 활동비는 물론 접수비까지 전액을 대주시는 덕분에 별 걱정 없이 완료할 수 있었다.
하늘이 지켜주시다
하계 동계 40일 전도기간 때마다 교회에서 타 지역 청년들과 합숙하며 성미사업과 전도활동을 했다. 성미사업으로 얻은 수익금으로 교회 성전의 창문에 커튼을 달았다.
나는 혼자 자다가 한밤중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 일어나다가 그만 넘어졌다. 연탄가스 중독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 일어나지 않았다면 큰 일을 당할 뻔 했다. 항상 하늘이 불꽃같은 눈으로 나를 지켜주셨던 것을 새삼 깨닫는다.
낮에는 집에서 농사일을 돕느라 나가지 못하고 저녁에나 마실을 갈 수 있었다. 어느 날 밤에 친구집에서 남자와 여자 친구들이 추우니까 발을 이불속에 넣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한창 재미있게 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아버지께서 방문을 열어젖히고 들이닥치셨다. 나에게 당장 나오라며 내손을 잡아채어고 끌고 집에로 오셨다. 아버지는 크게 분노하시며 집안에 큰 감나무에 매달아 놓고 “또 밤에 나갈 거야, 안 나갈 거야?”라며 다시는 안 나간다는 약속을 하게 하셨다. 다짐을 받은 후에야 묶었던 줄을 풀어주셨다. 그 이후에는 아예 밤에는 대문밖에도 나갈 수가 없었다.
지난 후에야 부모가 자식이 혹시라도 결혼 전에 이성 친구를 사귈까봐 노파심에서 여식을 지켜주기 위한 최선의 수단이었던 아버지의 깊은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엄격하게 안 하셨다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할 때 축복 받기 전까지는 아버지를 통해 하늘이 나를 지켜준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약혼
1973년도에 입교하여 78년 10월에 약혼하였다. 수택리 중앙수련소로 약혼하기 위해 갈 때 교회의 장로와 권사님의 당부는 전라도 사람하고만 안하면 된다고 하였다. 은연중 마음에 담고 있었다. 아버님께서는 나를 불러 세우셨다. 그 절박한 약혼식장에서 언제 부를지 모르는 긴장된 가운데서도 졸고 있는 주체와 매칭해주셨다. 다행히 고향이 충청도라서 첫 번째 관문은 통과되었다.
둘이 참부모님 앞으로 나아가서 경배를 드렸다. 밖에 나와 차를 마시며 형제가 몇 남매냐고 물으니 9남매라고 했다는데 나에게는 6남매로 들렸다.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상대가 피곤해 보였으며 밤이 깊어 숙소로 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아버님께서 해 주시는 대로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기에 숙소로 가면서 내일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약혼 후 임지생활
21일 동안의 약혼수련을 받은 후, 첫 임지 무안에 발령받았다. 임지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은 시험에 떨어질까 봐 미리 겁먹고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로 가출했던 지난날에 관한 후회였. 떨어지면 재도전하면 될 일을 미리 걱정하는 완벽주의적인 내 성격 때문에 진학 못했지만 늦게라도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더니 잘 생각했다면서 중고등부 강의록을 한 박스 사서 보내 주셨다. 마침 청년 식구 가운데 가정교사가 있었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임지를 시작한지 6개월 후, 다시 영광으로 재발령이 나서 그곳에서 3년간의 임지기간을 마치고 수료를 했다. 영광에서 함께 했던 대원들은 정말 좋은 관계에서 임지생활을 재미있게 보냈다.
예물 때문에 캔슬할 뻔
지금까지도 많은 도움을 주는 임지의 동료가 있다. 목회 30년 간 지금까지 경제적 뒷받침을 지속적으로 해주는 임지의 동료에게 이 지면을 통해서나마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주체가 전주에 있는 일신석재에 근무하고 있었지만 아직 축복전이라 함께 생활할 수가 없었다. 나는 친정으로 가려니 시집가서 쫓겨 왔다고 소문이 날까봐 못 가겠고, 시댁에 가려니 남편도 없는데 어색해서 할 수 없이 다시 임지였던 영광으로 갔다. 교역장님이 열심히 활동하셔서 교구 원리수련에 버스 1대씩을 보냈던 적이 있다. 그런데 항상 수련비가 부족했기에 나는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약혼 때 받은 금 목걸이와 반지를 팔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먹고 전주 남편한테 가서 말 했더니 아무 말 없이 나가서 한참 후에야 들어와서 허락했다.
금방에 갖고 갔더니 예상외로 너무 싼값으로 사려고 했다. 망설이고 있으니 조금 있으면 금값이 오를 것 같으니 좀 있다가 다시 가져오라는 말을 했다. 그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팔지 않고 돌아왔더니 남편이 하는 말이 만약에 팔았다면 약혼을 캔슬하려 했다고 한다. 축복도 받기 전에 미리 받은 예물을 임지 교회장의 활동비로 쓰려고 하니 기가 막혔을 남편의 입장도 이해가 되었다.
남편이 직장 사업대원으로 동원
1982년 축복을 받은 후, 주체는 3년 동원령에 따라 기업체 필수요원으로 직장에 남게 되었다. 근무하면서 사업대원으로 교회에서 합숙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두 명의 언니들과 함께 주방에서 식사와 청소를 맡아 무료 봉사를 했다.
남편의 월급은 100% 헌금을 하고 생활비로 월 6만원만 받았다. 나중에는 월 6만원 가지고는 생활비가 너무 부족하여 100% 헌금을 못하여 미납금이 밀리기 시작하였다. 회사가 이천으로 이전하여 사원주택에 전세로 살고 있었는데, 전세금 5백만원을 빼서 미납금을 내고 사업대원으로써 수료증을 받게 되었다.
임신을 위한 철야정성과 병원검사
축복 후 몇 년간은 동원이 없었기에 함께 살았지만 3년간 임신이 되지 않았다. 한 날 한 시에 축복식을 받았던 임지 동료들은 아이를 낳아서 돌잔치를 하는데 구역장이었던 내가 임신이 안 되니까 일신교회에서 몇몇 권사님들이 임신을 위한 철야정성까지 들여 주셨다. 이후 부인회 총무님 꿈에 내가 용 그림을 그리고 있는 태몽을 받은 후에야 임신이 되었다.
임신되기 전에 남편과 의논을 했다. 서울대 병원에서 전반적으로 검사를 해보고 임신이 안 되면 입양이라도 하자고 결정했다. 왜냐하면 생리불순으로 몇 년 전에 전주 산부인과 갔을 때 자궁 발육부진의 검진을 받았기 때문이다. 걱정을 했었는데 역시 불임의 원인이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약 1년 이상 불임환자로 정기검진과 자궁내막검사, 나팔관 검사, 복강경 수술 검사 등을 하는 과정에서 임신반응 검사에서 다행으로 임신으로 판정이 나왔을 때 너무 놀랐다. 각종 수술과 염증에 관한 강한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임신이 된 것을 알고는 더 큰 걱정이 되었다. 이로 인해 기형아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밀 검사로 테스트를 해 보았다. 특진교수에게 물어보았지만 대답은 기형아 확률이 50:50이라고만 했다. 그 말이 나에게는 100% 기형아로 들렸다. 그토록 나의 임신 소식을 기다렸던 양가 부모님과 형제 친척 그리고 동료들에게 임신 소식을 알릴 수도 없었다.
더 검사를 해보고 기형아면 유산을 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차라리 임신이 되지 않았을 때가 마음이 더 편했다. 너무나 신경을 쓴 나머지 초음파검사를 하면서 의사에게 애기가 맞느냐고 까지 물어보니 의사가 나를 빤히 처다 보았다.
애기는 정상적으로 잘 태어났고 이렇다 할 문제는 없었다. 그 이후 둘째, 셋째, 넷째까지 1남 3녀의 자녀가 줄줄이 태어났으며 잘 성장했다. 지금은 모두 2세축복을 받았으며 신앙생활은 제대로 못하지만 자기들끼리는 열심히 잘 살고 있다. 그저 하늘 앞에 무한한 감사를 드릴 따름이다.
남편이 의식을 잃다
33년 전 남편이 일신석재회사 노조원들이 데모하는 것을 막다가 떠밀려서 뒤로 세면바닥에 넘어졌다. 갑자기 머리에 충격을 받아 의식을 잃었다. 무의식중에 나도 알아보지 못하는 정도가 되었다.
의사는 남편이 살아난다 해도 식물인간이 될 확률이 높다고 했다. 그때 둘째를 임신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 충격으로 그만 유산되고 말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오금이 저려올 정도로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하늘 앞에 그저 송구한 생각이 들 뿐이다.
친정과 시댁으로 동원되다.
남편이 입원한지 8일이 되었을 때였다. 협회로부터 친정으로 가라는 동원령이 내려졌다. 남편을 퇴원시킨 후 딸 하나를 데리고 기본적인 살림살이만 챙겨서 떠났다. 함께 6000가정 축복을 받은 동생과 친정이 있는 청도 고향에 가서 월세방을 얻어놓고 전도활동을 시작했다. 함께 동원된 서울에서 온 언니의 소개로 남편을 위한 어혈제 한약을 사서 집에서 나온지 40일 후 집에 잠깐 들렸다. 남편은 “아픈 사람을 놓고 안 살려고 살림까지 싣고 나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한 것은 회사에서도 나를 못나가게 말렸는데 협회의 지시를 따라야겠기에 좌고우면하지 않고 출발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몇 년 동안 불입한 딸 교육보험까지 해약했다. 해지금 50만원으로 중국제 곰쓸개 2백만원 짜리를 식구장로에게 50만원에 사서 남편에게 먹이려고 와서야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약의 효험인지 머리에 고인 어혈이 풀렸다. 곰의 쓸개 약을 먹고는 지금까지 후유증이 없었던 것은 하늘이 허락하신 크신 사랑의 역사임을 깨달았다.
환고향 동원
얼마 후 이번에는 시댁을 중심으로 동원이 되어 시댁 소속 서천교회로 갔다. 문상희 교수, 송창례 교회장 두 분의 선배님과 함께 교회에서 합숙하며 활동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둘째와 셋째가 태어난 후 1991년, 사원주택에서 이천 시내 일심아파트로 이사 나왔다. 새 아파트에서 6개월도 채 안되어 환고향 하라는 동원령에 따라 이삿짐 다 풀기도 전에 다시 이삿짐을 싸야했다
넷째 막내를 임심해 만삭 중에 세 살 둘째 딸을 혼자 먼저 환고향시켰다. 그 후 막내가 태어난 지 100일도 되기 전에 고향복귀를 위해 시댁으로 갔다. 1992년 2월, 1톤 트럭 차량을 구입해 활동하면서 주려고 여주 생활도자기를 한 차 가득 싣고 큰 꿈을 품고 내려갔다. 직장도, 그토록 살고 싶었던 안락한 아파트도 뒤로 하고 환경이 열약한 시골집으로 환고향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활동하기엔 예상하지 못했던 장애물들이 너무 많았다.
하루 세 끼를 기본적으로 준비하는데 있어서 시아버님이 식성이 까다로우셔서 끼니마다 새밥과 새로운 찌개와 새로운 반찬을 준비해야 했다. 항상 해야 하는 고된 식사준비로 하루 종일 잠시도 쉴 틈조차 없었다. 청소며 세탁물 등 4명의 엄마로서 출산한지 아직 100일도 안 된 몸이 회복이 안 된 상태에서 너무나 힘들었다.
고향복귀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일상생활을 하기에도, 온종일 집안일로도 벅찼다. 부모님께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전도활동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시 살던 이천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과 후회스러운 마음으로 갈등이 생겼다. 그러나 이미 직장에서는 퇴직금까지 받았고 살던 집도 전세를 줘 버렸기에 그럴 수도 없는 처지라 난감할 따름이었다. 한편으로는 환고향을 하지 않고 평온하게 사는 동료들이 부럽기까지 했다.
1992년 2월에 환고향을 하였는데, 4월 10일 세계평화여성연합 창립일을 맞아 버스 1대를 동원하여 행사장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마을 앞에서 그만 뒤에 오던 시내버스와의 충돌사고로 차가 뒤집혔다. 남편은 우리가 행사장으로 가는 차를 세워 부상자들을 데리고 병원까지 이송한 후 창립식에 갔다. 당시 큰 딸이 초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항상 시내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날은 절대 버스를 타고 싶지 않다며 걸어갔다. 덕분에 그날 사고를 면했다. 축복2세라 하늘이 지켜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손수 체휼했다.
시댁에서 쫓겨나다.
고향복귀의 꿈만 가졌지 경제적인 면에서는 아무런 생활대책이 없이 무작정 환고향하고보니 모든 게 녹녹치 않았다. 시부모님 두 분만 절간처럼 조용히 사시는데 갓난 애기까지 6식구가 갑자기 들이닥친 것이다. 4명의 애기들이 온종일 싸우고 울고 야단법석을 치니 참다못한 시어머니가 하는 말씀이, 시아버지께서 시끄러워 신경통이 심해져 그만 살고 싶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시아버님이 신경성 통증이 있어 항상 고생하신 분이셨으니 정말 그러셨구나 하고 이해가 갔다. 더 이상 버티고만 있다가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게 생겼기에 이제 고향복귀의 꿈은커녕 고향집에서 쫓겨날 신세가 되었다. 급히 친정 언니에게 사업자금 천만원을 빌려서 서천 시내에서 작은 식당업을 하게 됐다. 요리사로 주방장을 채용했으며, 메뉴로는 각종 해물탕과 볶음밥 등 한식당을 시작했다. 그런데 요리사가 임신 중이었는데 무리해서 그만 유산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갑자기 요리사가 그만두게 되었고 대신 내가 하려니 1살 2살 연년생 두 애기가 식당 홀에 나와 밥을 손으로 집어먹는가 하면 울고불고 난리를 피웠다. 도저히 영업을 계속할 수가 없게 되어 시작한지 불과 몇 개월 되지 않아 식당 문을 닫게 되었다.
장항교회장 발령받다
이번에는 남편이 세계일보 신문을 배달하고 일화 대리점을 하는 했는데, 그 역시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하면 할수록 적자가 더 늘어났다. 당장 갈 데가 없어서 장항교회 식구집으로 이사를 갔다. 이사한 동네 이름이 북만주였는데 이름처럼 겨울은 너무 춥고 여름에는 지대가 높아 수돗물이 잘 나오지 않아 샘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여섯 식구가 물 부족으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생각조차 하기가 싫을 정도였다.
어쩔 수 없이 또 이사를 가야하게 되었을 때, 아버님의 말씀에 모든 축복가정들은 소유권 전환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 계셨다. 어떤 기준으로 하는지 협회에 문의 했더니 말씀은 하셨지만 다들 환고향 상황이라 몽땅 바치고 나면 활동을 할 수가 없으니 공문으로는 내지 못한다고 했다. 말씀을 생명시하고 살아온 기준이 있어 소유권을 전환한다는 기준에서 이천에 전세를 놓고 온 30평형 아파트를 식구에게 급히 팔아 서천 목사님 승용차도 사드리고 모두 공적으로 쓰게 되었다.
이제 이사 갈 래야 갈 집도 없는 가운데 있을 때 2세 장항교회장님이 갑자기 목회를 그만 두었다. 식구들은 목회자 없이 공석인 교회라며 우리에게 교회로 들어가서 살면 좋겠다고 했다. 교회에 들어가 살던 중 교구장님의 추천에 의해 1994년 3월 1일부로 장항교회장으로 발령이 났다.
160가정 활동
처음 2년간은 교회 증축과 환경 정리에 많은 투자를 했다. 1997년부터 160가정 축복활동을 열심히 해서 6500가정 축복의 큰 실적으로 교구에서 1등을 하여 상패와 상금을 받았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실적에 대해 청평수련원에 갔을 때에 대모님께 여쭈어봤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축복시킬 수 있었을까요?”하고 물으니 흥진님이 협조해 주셨다고 하셨다.
축복 활동비와 접수비까지 들어간 금액이 1억이 넘었다. 교회식구라고는 3만, 36만 가정까지 한일 두가정과 장로 2명, 권사 2명, 집사 1명이 전부였다. 10명도 채 안 되는 교회에서 엄청난 실적을 세운 것이다. 160가정을 못하는 식구는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심정으로 활동비, 접수비까지 지원했다. 가정 당 수백만원씩, 식구 4가정 전체가 160가정을 완료했던 것이다. 우리 가정은 160가정의 열 배 1600가정을 접수했고 외부 식구들 이름으로도 많이 해줬다.
남편과의 연락 두절
1995년 축복식 전날, 36만쌍 축복 후보자 2명을 데리고 주체들 숙소에 간 남편이 돌아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어도 연락이 없어 삐삐를 수십 번이나 쳐봤지만 받지 않았다. 혹시 사고가 나 실종되었거나 사망한 것은 아닌가 하는 불경스런 생각이 들었다. 비가 너무 많이 와 홍수로 인해 잘못되었으니 전화를 안 받지 살아 있으면 안 받을 리가 없다는 등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버스를 인솔해 축복예식장에 가야 할 목사님이 버스 출발시간이 되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고 전화도 받지 않으니 교회의 장로님께 경찰서에 신고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성전에 가서 ‘남편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36만쌍 축복승리에 제물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을 내색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내가 대신 축복식 하객을 태운 버스를 인솔해서 축복식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너무 속상해서 그때는 ‘왜?’라고 묻지도 않았다. 남편은 그저 깊이 잠들었다고만 했다.
부부가 하나 되지 못하고 싸움의 연속되었다. 타락성을 벗고 싸우지 않으려고 갖은 정성을 들였다. 한번에 만 배의 경배를 들인 적도 있었다.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긴 터널과 같은 일상 속에서 매일같이 싸우지만 결론을 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교구장님에게 목회를 그만 둬야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친정아버지를 잘 아시는 교구장님께서 “영계에 계신 구집사님이 목회를 포기하지 말고 계속하길 바라신다.”라는 말씀을 했다. 아버지의 뜻을 전해들은 후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40일 금식
얼마 후 1998년 3월에 예산교회장으로 발령이 났다. 예산으로 부임한 후 1999년 6월 24일부터 26일까지 2박 3일간 설악콘도에서 전국 목회자 부부 워크숍이 있었다. 그때 협회장님께서 전임 이사장님으로부터 재단을 인수받으셨는데 재단의 상황이 한강에 빠진 형국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4억쌍 축복을 승리해야 하는데 우리가 죽음을 각오하고 열심히 하지 않고는 이 어려움을 극복하여 승리할 수 없다며 눈물로 간절히 호소하셨다. 말씀을 듣던 중 40일 금식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교회로 돌아와서 그 다음날부터 금식을 하려니까 남편이 반대를 했다. 그럼 목회를 그만두면 금식을 안하겠다고 했다. 남편은 밖에 나갔다가 한참 만에 돌아와서 금식을 허락을 했다. 나는 40일 금식을 시작했다.
식구들이 반대할까봐 33일 동안 아무도 모르게 금식을 했다. 그런 가운데 초등학교를 순회하며 식구님과 함께 순결강의를 하기도 했다. 33일째 되는 날, 교구에서 예산교회 에 전도 지원 활동 나왔다가 금식하는 사실을 알게 되어 협회에 보고를 하게 되었다. 금식기간 중 협회의 손병호 부장님께서 격려차 방문해 주신 정성 덕분에 무사히 마쳤다. 40일 금식이 끝나는 날에는 협회장님이 미국 순회 후에 귀국하셔서 공항에서 곧바로 예산교회로 달려오셔서 승리 축도를 해주셨다.
네 명의 어린 자녀들에게는 많이 미안했다. 6월 27일에 시작하여 8월 5일에 끝났으니 달수로는 3개월이었다. 큰딸은 한창 사춘기 때여서 엄마의 일방적인 선택과 결정으로 가족들을 힘들게 하는 엄마를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성가10장 ‘내 가오리다’를 계속 틀어놓고 있었더니, 둘째 딸은 “엄마, 어디를 가시려고 하세요?”라며 엄마가 죽으러 가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엄마 가지마세요.”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는 성가 가사의 의미대로 아버님 걸으신 눈물과 가시밭길을 따라 뜻만을 바라보며 가고자 하는 가사가 좋아서 반복해서 듣고 또 들었던 것이다.
끝날 무렵에 냉수를 먹은 것이 그만 체해서 맛사지사가 하루 종일 손으로 쓸어내려도 안 내려가서 물 먹고도 체할 수 있음을 실감했다. 금식을 할 때 보다 끝난 후에 더 무섭게 고생을 했다.
그러나 금식을 끝냈지만 어떤 것도 입에 넣기만 하면 토하는 것이었다. 물도 받아들이지 않아 당근을 갈아마셨다. 달콤하니 넘어가서 마셨더니 또 체해서 이제는 정말 죽을 고생을 했다. 도저히 그대로는 안 되어 병원에 입원을 했다. 가만히 누워 생각하니 이대로 죽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침 전임 목회자의 사모님이 불의의 사고로 성화하셔서 외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소문이 나있었는데 나까지 금식하다 사고가 났다는 소문이 나면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죽더라도 소문 안 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에 가서 외부 사람 모르게 조용히 죽어야지 하는 생각에 서둘러 퇴원을 했다. 물 한 모금도 목으로 넘길 수가 없으니 이제 죽을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하늘이 보내신 선문대교회 부인회
금식이 끝난 후 이틀이 지날 때까지도 물도 못 먹고 열이 나서 방에도 있지 못하고 밖에 평상에 누워 있었다. 목사님은 며칠 후 맞이할 대원들 방의 증축 공사로 바빴다. 식구들은 이제 금식이 끝났으니 괜찮겠지 하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 모처럼 선배 권사님 한 분이 오셨다. 늘어져 있는 나를 보더니 말도 없이 급히 나가셨다. 이후에 들려주는 말씀이, 금방 죽을 것 같이 보여 무서워서 얼른 나왔다는 것이었다. 당신의 아버지가 죽을 때처럼 보였다는 것이었다.
금식 후 3일째 되던 날 하늘이 살려 주시려고 그랬는지, 선문대 부인회에서 방문하여 교대로 밤을 세워가며 도와주었다. 누룽지 끊인 물을 숟가락으로 떠먹여주는 것을 받아먹기 시작하면서 토하지 않고 넘길 수 있었다. 비로소 먹을 수가 있게 되어 그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
협회에서부터 국내외에 아는 식구들의 따뜻한 격려의 말씀과 회복을 위한 격려금을 보내 주셨다. 선문대 박물관장 사모님께서는 참어머님께서 즐겨 입으셨던 투피스 한 벌의 성의를 주셨다. 덕분에 회복을 잘 할 수 있었다.
입적 임지
1999년 8월 5일, 금식이 끝난 후였다. 청평 21일 입적수련을 받고 정읍시 옹동면 임지활동을 위해 신태인교회로 출발했다. 초중고와 미취학의 막내까지 아이들 4명을 남편에게 맡기고 가는 마음은 무겁기만 하였다.
하루만 엄마가 없어도 안 되는 상황에서 언제 돌아올지 기약도 없이 가족들을 뒤로하고 조국광복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임지로 갔다. 임지 사택 환경이 노후화 되어 주방의 천정에서 갑자기 쥐가 떨어지는가 하면 쥐가 전기줄을 끊어놓기도 했다. 열약한 환경에 적응 하느라 한 동안 고생을 하다가 도저히 못 살고 별관을 수리해서 짐을 옮겼다. 쥐를 보면 기겁을 하는 내가 쥐와 함께 살아야 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매일 소리치며 놀래며 생활했다.
밥상 위의 유골함
일본서 먼저 온 1800쌍 선배와 별관에서 간단한 살림을 차렸다. 함께 생활하던 중 선배 대원이 밥상 위에 예쁜 항아리를 올려놓고 식사를 하기에 뭐냐고 물어보았다. 죽은 딸을 화장한 유골함이라고 하는 말에 순간 나는 기절할 뻔 했다. 나는 몹시 언짢았으나 내색하지 않고 마음을 가라앉힌 후 태연하게 그러냐며 애써 “따님이 많이 보고 싶겠어요.”라며 위로해드렸다.
그 이후부터 방안에 잘 보이는 곳에 모셔놓은 유골함을 쳐다보며 생활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금식으로 아직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영양섭취를 잘해야 하는데 식욕을 잃어 세 끼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고생을 했다. 그로 인해 일본사람들은 조상들을 가까이 모셔놓고 함께 생활하는 일본문화를 알게 되었다.
입적 임지의 면내 이장과 부녀회장단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임지의 담당자로써 첫인사를 하고 세미나 일정을 잡아놓고 활동 중에 있었다. 한창 사춘기를 보내며 서울로 부산으로 콘서트라면 다 찾아다니던 고2의 큰딸이 있는데, 그날 밤에 콘서트를 본다며 서울로 갔다. 그런데 통화가 끊어져 불통이 되었다. 이튿날 새벽까지 온갖 불길한 생각에 시달렸다. 딸을 잃어버릴까봐 서울로 찾으러 당장이라도 뛰어 가고 싶었지만 임지를 지켜야 되는 몸이라 기도나 할 수 밖에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발만 동동거리고 있었던 절박한 상황에 놓인 적도 있었다.
신태인교회가 정읍교회로 통합되어 정읍으로 임지를 옮겨 활동하였다. 대선배가 몇 년간 임지활동을 했으니 이제 집에 가서 애들 돌보며 소속교회에서 활동하라고 했다. 조국광복을 위해 동원 되었다가 아직 승리 못한 가운데 임지 종료도 안 된 상태지만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아쉬움을 갖고 떠나왔다.
남편은 목회 신학을 공부하지 못한 입장이었다. 그래서 예산교회 시무 중에 순전단 6개월과 2004년 가정연합 부설 선문목회대학원 1기생으로 학교까지 다녔기 때문에 나는 항상 바쁘게 살아야만 했다. 급한 마음에 옥상에서 계단을 뛰어내려오다 헛딛는 바람에 수돗가 모서리에 넘어져 입술이 찢어져 구급차로 실려 가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예산교회에서 시무 8년 만에 2006년, 아산교회로 발령이 났다. 당시 잊지 못할 일도 많이 있었다. 선문대가 있는 지역이었고, 우리는 자녀 3명을 선문대에 보낸 덕분에 총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2007년 5월 12일, 어머님 승리귀국을 하셨을 때, 우리 부부는 천정궁에서 참부모님께 꽃다발 봉정했다. 재빨리 장갑을 벗고 아버님과 악수할 때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또한 2008년도 천일국 국회의원 18대 총선 때, 아산시에서는 유경득 국회의원 후보자가 출마했다. 사무실도 더 좋은 곳을 얻기 위해서 3번씩이나 옮겼고 유세하는 팀 중 인원이 가장 많고 단합이 잘 되어 완전 축제 분위기에서 활동했다. 출마자 중 말씀도 잘 하시고 정말 기대가 컸다. 식구들이 가정 당 수백만원씩 후원금을 냈다. 우리 큰 딸도 STF 5기 수료할 때 우수 실적으로 받은 상금 전액을 후원금으로 냈다. 나는 너무 무리했는지 유세가 끝나는 시간에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가는 불미스런 사태도 있었다. 혈압이 너무 높아져 그때부터 먹던 혈압약을 14년이 지난 지금도 먹고 있다.
아산교회 시무 2년이 지나 수평 이동 섭리로 2008년도에 서대전교회로 이동했다. 1년 후에는 교회 통합섭리로 2009년 5월말까지 대전교회 부교회장으로 시무했다. 당시 나는 여수 40일 수련에 참석했다. 수련을 마치고 교회로 돌아오니 보령교회로 인사이동이 있어 남편 혼자 이사를 해야 했다.
40일 여수해양수련
어릴 때에 같은 마을에서 물에 빠져죽는 사람을 본 기억이 있어 나는 유난히도 물을 무서워했다. 내가 아버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그 민족을 위해 나누어 주어야 한다. 그래도 안 되면 자기의 생명까지도 바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람이 곧 천국 백성이라며, 백성을 규합해서 천국이념을 성취해야 할 하나님의 사정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되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언제라도 생명까지 바칠 각오로 살아왔던 것이다.
수련이 시작하면서 임원규 강사님께서 “혹시나 수련 중에 무슨 불의의 사건이 터지면 청해가든 섭리가 중단된다.”는 말씀에 ‘여기서는 죽으면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12시간 훈독회
참부모님께서 2011년 5월 8일 오전 8시30분경에 오셔서 온종일 낚시하시며 정성을 들이셨다. 농어 44마리 잡으셔서 조건을 세우셨다. 저녁에는 간부회의를 주관하시고 9일 훈독회에서 새벽 5시에 경배 받으셨다. 앞줄만 일어나 기역자로 만들게 한 후 4시간 동안 서서 말씀 듣게 하셨다. 후에는 이제 앉으라 하시고 오후 5시까지 만 12시간 말씀을 하셨다.
12시간의 훈독시간에 단 한순간도 아버님께 시선을 떼지 않고 초점을 맞추었다. 아버님과 교감을 나누면서 상대기대를 세워드리고자 온 정성을 다했던 것이다.
12시간 아버님과 함께
부족하고 정성을 드리지 못한 내가 앞줄에 앉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것도 아버님을 바로 바라볼 수 있는 맨 앞에 앉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앞사람이 다 뒤로 가버리는 바람에 나도 따라서 뒤로 가려고 했는데 훈독회장의 엄숙한 분위기에서 앞에 앉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난날 부모님의 뜻 맞게 잘 살았다면 기쁨의 대상으로 떳떳하게 아버님 바로 앞에 앉을 용기가 있겠지만, 한없이 부족하고 죄송하고 면목 없어 도저히 앞에 앉을 자신이 없었다. 그저 얼떨결에 앞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것은 12시간 동안 화장실 한 번 안 갔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자다가도 2시간마다 일어나 화장실을 갔던 터였다. 내가 12시간 이상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아버님과만 교감했고 그 외는 아무런 의식 자체를 하지 않아서 가능했던 것 같았다.
총 조장이 첫 번째, 수련기간 중 아들을 제물로 잃은 사모님이 두 번째, 그다음 내가 3번째로 앉게 되었다. 그냥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순종하는 자세로 아버님을 뵈었다. 아버님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계셨고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 보이셨다. 가슴에 고통과 한이 태산만큼이나 쌓여 있는 듯하여 그 어느 누구도 그 한을 풀어 드릴 엄두도 못 낼 정도로 크게 느꼈다. 12시간 동안 개인적으로는 아버님의 눈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는 큰 행운은 얻었지만 불효자의 모습이라 그저 죄송하고 송구스러운 심정이었다.
한평생 고생만 하시고 희생하신 아버님을 지척에서 뵈니 아픈 맘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저 아버님, 아버님, 아버님을 수없이 되뇌며 12시간이 금방 지나간 것처럼 느꼈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아버님 감사합니다. 기쁨과 자랑의 대상의 모습이 아니라 죄송합니다.’라고 생각하며, 한없이 한이 많으신 아버님을 뵈면서 마음속으로 많이 울었다. 앞으로는 ‘저희가 부부 싸움을 절대 하지 않고 잘살겠습니다.’하는 결의를 수없이 다지며 약속을 했다.
말씀을 끝내시고 “소지하고 있는 전부를 평화기금으로 쓸 것이니 내 놓으라.”고 하셨다. 나는 배 운전면허증을 취득코자 등록할 돈을 갖고 있었다. 10원짜리 5원짜리는 빼고 큰돈만 내 놓았는데 지나고 생각하니 전부를 안 하고 님긴 그 5원짜리 잔금이 마음에 걸렸다. 절대순종하면 될 것을 지난 후에야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 나를 중심한 생각을 했던 것이 두고두고 후회되었다.
전부를 바쳤다는 조건을 세워주시고자 하신 뜻을 미처 생각지 못하고 내 입장에서 10원짜리는 돈도 안 되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내 생각이었기에 하늘은 온전히 받았다는 조건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지난 후에야 느끼게 되었다.
천심원의 계시
예산교회로 발령을 받고 8년간 시무할 때의 일이었다. 교회의 재정이 어려워 공과금(수도, 전기, 전화)을 몇 달간 미납이 되어 끊길 위기에 있을 때 입적 임지 동료였던 나나꼬씨가 백만 원을 헌금했다. 청평 정심원에서 기도를 했는데 예산교회가 어려우니 도와주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했다. 며칠만 늦었어도 전기와 수도, 전화가 끊길 뻔했는데 입적 임지 동료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 것이다.
봉고차가 노후되어 교체해야 되는 상황에서 어느 기부자가 통장으로 갑자기 2천만원을 입금시켜 주시므로 9인승 카니발을 구입할 수 있었다.
1세 미혼자 축복을 가장 많이 시킨 곳이 예산교회에 있을 때였고, 열악한 교회 환경을 가장 많이 수리하고 증축했던 곳이었다. 성전, 방, 응접실, 화장실, 주방, 정화조, 대문, 마당, 담장 등 손을 안 본 곳이 없을 정도로 일을 많이 했던 교회다.
장항, 예산, 아산, 서대전, 대전, 보령, 청양교회까지 일곱 개 교회를 거쳤다. 청양교회에 가장 오래 동안 있었다. 10년째다. 섭리적으로 주어지는 교회 책임을 항상 초과 달성했었다. 식구들과도 정이 가장 많이 들었고 실적도 가장 많았던 것 같다.
2013년 8월 1일, 보령교회에서 모시던 시모님을 요양원으로 보내고 청양 A타입 교회로 왔다. 2년 만에 4층 건물의 큰 교회로 리모델링해서 오기까지 정말 교회 건축에 온몸이 부서지도록 투입했다. 그것은 부족한 건축비용 때문이다. 기술자가 하는 일 외엔 단 한 사람의 인력을 위한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해 식구들과 함께 그 많은 일들을 해냈다.
둘째 딸과 함께 성전 형광등을 설치하다가 떨어진 파편으로 눈가가 찢어져서 천안에 병원 응급실로 가서 꿰맸다. 일요일이라 응급실로 갔고 보험도 들어 있지 않아 많은 치료비가 나왔다. 목사님과 나의 치료비가 천만 원 이상 들어갔고 교회 리모델링 건축 비용이 부족한 상태라 치료비 청구를 할 수 없었다. 살면서 실손 보험이 없어 힘들었으나 나는 지금까지도 보험이라고는 하나도 가입한 적이 없다. 너무나 절박한 하늘섭리를 우선시 하니 당연히 내 사정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다.
4층 건물을 뼈대만 남기고 전체 리모델링했으니 새로 짓는 것보다 몇 배 더 일이 많았다. 온몸이 너무너무 아파서 완공해 놓고는 다른 교회로 도망가려고 생각했다. 엘리베이터도 없고 다리가 너무 아파 2층 사택까지 다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천심원(정심원) 매칭
2018년 2월 21일, 청평대역사 및 참아버님 탄신 98주년 기념식과 전진대회에 참석차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청평에서 보내던 중이었다. 2일째는 식구가 너무 많아 큰 딸집에서 자기 위해 가던 중 다시 수련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미 고속도로에 진입했기에 화도 IC까지 갔다가 유턴해서 수련원으로 돌아와서 천심원(정심원)에서 기도하던 중 태윤이와 하정이의 매칭에 관한 계시를 받았다. 이에 관해 양가 부모들과 2세들이 싫다고 안하고 좋아해서 15일만에 약혼이 확정되고 축복을 받게 되었다. 태윤이는 연세대를 졸업한 후 취업을 준비 중이었고 하정이는 역사편찬에 근무하면서 천주사관 1년생이었다.
교회의 실적
교회에 나오지 않는 필리핀 가정을 제외한 식구 20여 가정 중 15가정이 천보에 등재했다. 활동적인 면에서 천보를 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식구는 비용적인 면에서 수천 만 원씩을 빌려주어서 할 수 있게 도와줬다. 참어머님의 자서전 보급과 교회성장 등 미혼자 축복을 위한 2020년 효정봉헌서, 효정원 등 종합적으로 식구를 비례하여 교구에서 1등을 하였다. 이로 인해 교회 표창장을 받았다. 기원절 헌금을 교회와 개인이 각각 천만 원과 일본선교사 전체와 한국 중심식구 등 100%가 백만 원 이상을 했다. 한반도 평화서밋 승리를 위해서 4가정이 남북통일을 위한 백만 원의 특별 정성을 드렸다. 섭리적 책임이 하달되면 교회목표보다 항상 초과달성으로 최고의 정성을 드려서 하늘 앞에 크게 조건을 세워드리는데 초첨을 맞췄다.
하나님의 조국광복! 국가복귀가 될 때까지 최선을 다하리라. 부모, 자녀 3대권을 희생하고 가겠다고 오래전에 천심원에서 하늘 앞에 약속했던 기준으로 살고 있다. 자녀들은 부모가 퇴직 후 노후가 걱정이 되어 엄마 한 달에 만원씩이라도 저축하며 살라고 간청하며 걱정했다. 하지만 더 절박한 하늘의 사정을 아는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공직을 하면서 퇴직 후를 위해 저축 한다던가 노후대책을 세운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천일성전을 승리적으로 봉헌하기 위해서는 총력전을 펼쳐 나가야 할 시점에 서 있다. 천보수행 43가정 실세화 승리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늘 고민하였다. 어떻게 하면 타락성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되어 창조본성으로만 살 수 있을까? 지난날 무던히도 자신과싸웠다. 수십 년간을 타락성이 유발되어 싸울 때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탕감조건을 세웠다. 수없이 몸부림치며 탕감조건을 위해 노력했지만 사심과 끊어버리려야 끊어버릴 수 없다. 육신의 육욕과 자체 자각의 이기심과 타락성을 완전히 정리하지 못하고 아직도 몸부림치며 이 길을 가고 있다. 이제 섭리의 완성기를 맞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하늘이 주신 천보로써 가야 할 마지막 고지는 3대 축복을 완성하는 길이다.
타락성과의 싸움
지금까지 참부모상을 네 번에 걸쳐 받았으나 참부모님의 상을 받은 자로서의 인격이 함량 미달된 저희부부가 타락성으로 싸우고 화를 낼 때마다 사탄이 하늘 앞에 조롱하는 것을 느꼈다. 하늘부모님을 편히 모시고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결단을 내렸다. 타락성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나서게 되었다.
참아버님의 말씀에, 습관성과 고질화된 타락성을 벗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이면 역사를 밟아 치울 수 있고 세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자각된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것을 정복할 수 없다고 하셨다. 개성완성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과감히 도전했다. 참사랑으로 참고 견디며 승리할 것을 결단하였다.
2019년도부터 타락성을 유발할 때마다 효정봉헌서를 쓰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배로 하다가 나중에는 10배의 효정봉헌서를 쓰기로 결정을 했다. 타락성을 뿌리 뽑기도 하고 효정활동비를 비축하여 활동비 걱정 없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소원도 풀게 되었으니 일거양득이라 생각해 도전할 만한 가치가 충분했기에 과감히 시도했다. 하늘은 결코 손해 안 보시는 분이셨다. 신의 한수라는 확신이 들었다.
2019년도에 쓰게 된 봉헌서는 6백만원 정도였다. 2020년도 8월까지는 약 4천여 만 원 정도 였다가 2020년11월에는 4억까지 쓰게 되었다. 4천만원까지는 대출을 받아서 한꺼번에 다 쓸 수 있었으나 억 단위가 되니 도저히 한꺼번에는 다 못 써서 분할로 20년간 월 168만원씩 쓰기로 한 후 3개월분으로 5백 5만원은 한꺼번에 미리 썼다. 봉헌서를 쓰는 것도 힘들었다. 수백 장을 쓰니 손도 아팠다.
목회자 43가정 실세화 1차보고
2020년11월29일, 신임 충남교구장 취임 후 20일 만에 교구장님을 청양교회 천심기도실 봉헌식을 위해 모셨다. 봉헌식을 마친 후 천심기도실에서 갑자기 43가정 실세화 전국 목회자 충남 대표로 천보수행 1차 보고를 청양 목사가 하라고 하셨다. 당시는 당황했지만 거부할 수 없어 12월 30일에 참부모님 주관 특별집회에서의 보고였다. 주요내용은 천보수행 승리를 위한 타락성 분립을 주제로 했다. 타락성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타락성을 벗기 위해 사생결단한 결의한 보고드렸다.
그 이후 천심원기도실에서 천심의 소리가 들렸다. 참어머님 앞에서 타락성을 벗겠다고 결의한 것으로 4억의 탕감조건을 벗겨주시면서 앞으로는 탕감조건으로 봉헌서를 쓰지 말고 감사한 맘으로 미리 감사의 봉헌서를 쓰라고 하셨다. 한번 더 쓰게 될 때는 10배인 40억을 쓸 차례였으므로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것을 어머님께서 먼저 아셨기에 중단시켜 주신 것이다. 불가능한 것 같은 것이라도 타락성을 가진 채로는 개성완성 조차도 못하기에, 완성하고자 하는 꿈이 있었기에 도전을 멈출 수가 없었다. 우리 가정을 지극히 염려하시는 참부모님이심을 체험했다.
시모님을 요양원에서 집으로 모시다
어머니를 처음 모시게 된 때는 지금부터 16년 전인 2006년이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직후 아산교회 있을 때였다. 서대전교회를 거쳐 보령교회까지 6년간은 직접 모셨으나 청양교회로 오면서 요양원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성전 A타입 교회에는 방이 1개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축교회로 이사 와서는 환경으로는 모실 수 있었지만 모실 수 있는 자신이 없어 요양원에서 성화 때까지 계시게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요양원에 면회 갈 때마다 자식을 따라 가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아들과 며느리와 같이 살고 싶다고 하시는 어머니를 떼어놓고 올 때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현실적으로 도저히 모실 수 없다는 합리적 판단을 내린 상태였다. 그러나 1년 8개월 전에 교회 천심원 기도실에서 어머니를 모시라는 천심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 후 8일간의 준비를 끝낸 후 2021년 3월 16일 요양원에서 교회로 모시게 되었다.
8년간 요양원에 계시면서 안 좋은 기억들을 다 잊어버리신 모습을 보면서 참아버님께서 “치매가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나쁜 것들은 다 잊어버리고 영계에 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라고 하신 말씀이 실감났다.
부모 모심으로 받은 축복
나는 시어머니가 그토록 싫어하시는 요양원에서 집으로 모신 후 마음 죄스러움에서 해방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9남매 형제들로부터 원망대신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 입장이 되었다. 따라서 천보수행의 첫째 과제인 부모를 하늘처럼 모시는 것을 실천할 수 있었고, 참가정운동을 하면서 남들한테는 하늘처럼 부모를 모시라고 했지만 나 자신은 힘들다고 부모를 요양원에 맡겨놓은 것이 양심의 가책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모든 것을 해소시켜 주셨던 것이다. 천보수행자로서 모시라는 계시의 책임을 주신 것은 하늘의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음을 어머니가 성화 후에야 알게 되었다.
도저히 모실 수 없다는 것은 항상 내 입장을 먼저 생각했던 불효였었다. 요양원에서 성화하셨다면 돌이킬 수 없는 불효로, 두고두고 후회와 부모 형제 친척들에게 고개 들 수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어머니를 보낼 수 밖에 없었을 것을 생각하니, 모시라고 가르켜 주신 하늘 앞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한계를 넘어서니 우주력에 의해 모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한계는 하늘의 입장과 상대의 입장을 내입장보다 먼저 생각하는데서 가능해 짐을 깨달았다.
2021년 4월 3일에는 양가 믿음의 부모님을 모시고 4명의 자녀들까지 오게 해서 감사회를 갖고 여행 경비로 적지만 금일봉도 드리니 처음으로 작은 효도를 한 느낌에 마음이 기뻤다.
청양군수 축복식
2021년 4월 9일에는 청양군수 사모님이 심혈관 질환으로 타계하셨다. 그때 천심원 기도실에서 새벽기도를 하는 중 천심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바삐 대전까지 달려가 군수에게 성주식을 하라는 것이다. 나는 말씀에 순종해, 앞으로 청양군 복귀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모를 축복가정으로 만들어 영계로 보낸 후 해원을 해드렸다.
5월에는 부부와 함께 34명의 중심적인 영의 해원을 했으며, 양가의 방계 해원도 30여 명을 했다.
천보수행으로써 43가정의 천주적 실세화 활동을 하기 위해 아벨권 친척 조카까지 방계와 가인권 배우자 해원까지 거의 다 했다.
참어머님 하사금
참어머님께서는 목회자부터 먼저 천보수행의 모델이 되어 주길 바라셨다. 3차까지 보고를 받으시고 43가정 실세화 승리를 위해 430만원을 하사해 주셨다. 우리는 전액을 교회 천심원 기도실을 만드는데 투입했다. 천심원 기도단을 조직하여 2020년 12월 23일부터 1일 1회 기도실 기도를 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약 2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4명의 권사(선교사)들이 정성을 들이고 있다
우리는 지난번 한반도평화서밋대회에 여성연합 3지구 대표로 2박 3일간 롯데호델에 다녀왔다. 단체장 두 명과 함께 참석해서 수많은 세계정상들과 지도자들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우리의 활동 목적이 단지 포교가 아니라 남북통일과 세계평화라는 것을 직접 확인함으로써 그동안 가지고 있던 왜곡된 편견을 확 바꾸어 놓았을 수 있었다.
이제는 어떤 행사나 세미나에도 초청하면 여성단체장들이 기꺼이 참석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봉사활동과 고추 축제 부스 운영
청양여성연합이 ‘2022 청양군 우수단체 자원봉사 프로그램비 지원 공모전’에 선정되어 연 3백만 원을 지원 받아 군내 이웃사랑 나눔봉사와 고추 축제 때 부스를 운영하였다. 제5유엔 사무국 DMZ 유치 홍보와 무료 음료를 나누어 봉사단체로 지역 내에 확실하게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다. 이와 병행하여 여성연합 창설자를 홍보하며 전 국민을 대상으로 자서전 500여 권의 보급 실적도 거두었다.
육천가정 40주년 기념 총회는 참어머님의 특별하신 사랑으로 더 할수 없는 은혜가 넘치는 승리적인 총회를 이끌어주신 참부모님께 한없는 감사를 드린다.
특별히 이번에는 참어머님께서 백화점에서 직접 준비하신 귀한 선물 행운권이 당첨되어 참어머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어 너무 기쁘고 감사했다. 남편은 선물을 바라보며 그동안 내가 많이 베풀다 보니 “몇 일이나 갈려나 보겠다며, 앞으로 더 받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이번에는 보관하라,” 것이었다.
받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이 크다
그러나 역시 며칠 못 가 마음이 바뀌어져, 내가 갖고 있는 것보다 주는 기쁨이 더 크기에 주지 않고는 베길 수 없는 충동이 일어났다. 선물을 보낸 후 문자가 왔다. 선물을 도로 보내겠다는 문자에, 귀한 것일수록 내가 가지는 것보다 주는 기쁨이 더 크기에 당연히 더 기쁘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니 나를 위해서라도 받아달라고 했다. 물질에 대한 욕망은 목회 29년째에 접어들면서 많이 없어진 것 같다.
그동안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아 하지 못했던 총생축헌금을 했다. 거기에 천승기금까지 참자녀의 날 전에 하고 나니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온함을 느꼈다.
이요한 목사님의 말씀에 “남편과 하나 안 된 것은, 아내가 하나님과 심정적으로 접선이 안 된 탓이며, 하나님과 하나 되면 참사랑의 힘으로 남편과도 하나 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다. 따라서 자신감도 생긴다. 내가 남편과 만난 지도 벌써 44년이 지났다.
그동안 성격은 물론 취미, 식성까지 맞는 것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그래도 서로 맞추려고 많이 애를 썼다. 이제는 정말 다시는 더 이상 다투지도 싸우지도 않고, 남편을 이해해주고 배려하며,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알아차려주고 관대하게 용서하는 넓은 아량으로 남편을 섬기고, 자녀를 섬기는 내가 될 것을 굳게 다짐해 본다.
내가 1955년에 태어나서 24세에 약혼하고 67세가 될 때까지 간단하게나마 자서전을 쓰면서 정리해보니, 내 힘으로 산 것은 하나도 없었고 하늘이 배후에서 감독자처럼 이끌어주셨다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느끼게 된다. 지나고 보니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입교할 때 조국이 나아갈 길이 여기 있다는 전단지가 입교의 동기가 되었다. 그때의 조국은 나의 조국이었지만 뜻을 알고 보니 한국이 하늘부모님의 잃어버리신 하나님의 조국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다시 찾는 조국광복의 그 한날이 올 때까지 총진군 할 것이다. 약혼 후 13번의 임지동원에 참여하므로 44년간 3년에 한 번씩 이사한 계산이 나온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어려운 고비 고비마다 언제 어디서라도 함께해 주신 하늘이 이 시간 이곳까지 이끌어 주셨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지금까지 하늘의 축복을 분에 넘치게 받아 왔음도 역시 부인할 수 없다.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께 한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천지인참부모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박영숙님 댓글
구은지 사모님~
자서전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하늘을향한 불변의 심정으로
자녀들을 모두 축복으로 하늘부모님을 기쁘게 하시고
약한 몸으로 40일 금식정성을 승리함에 귀감이 됩니다
내내건강하세요~💗
김연희님 댓글
신철원.구은지사모님.자서전말씀 너무나뜻에귀감이됩니다.이천에서같이살때도언제나심정이넘쳐나지요 모두가존경했지요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