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학의 지역 공간을 찾아서
- 상주와 김천
이승하
■ 글머리에
경북 상주와 김천은 예로부터 ‘문향’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었다. 현대문학의 역사가 전개되기 전에도 많은 선비와 문인을 배출했지만 지금도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문인을 지속적으로 배출하고 있기에 ‘문향’은 결코 허명이 아니다. 두 지역은 내륙에 자리잡고 있고 평야지대도 아니어서 농산물이 늘 부족했고 신선한 수산물을 접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산이 대부분인 경북의 서북쪽에 있지만 다행히 낙동강을 끼고 있어 예나 지금이나 산자수명한 곳이다. 상주는 현재 곶감이 전국적으로 가장 많이 생산되고 있고, 김천은 각종 과일의 주요 산지이다. 김천에 유한킴벌리(주)의 공장이 하나 있지만 두 도시 모두 별다른 산업시설이 없어서 전국의 도시 가운데 가장 쾌적한 주거 공간을 갖고 있는 곳이다. 상주시 도남동에 자전거박물관이 있는데, 이는 이 도시의 공기가 얼마나 깨끗한가를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관점에 따라서 낙후된 도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덜 오염된 곳이다. 조선 전기에 상주의 목사는 관찰사를 겸했을 만큼 큰 고을이었고, 추풍령 바로 밑에 있는 김천은 교통의 요지여서 1949년에 이미 시로 승격되었다.
두 도시의 역사는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므로 생략하고, 현대문학사 전개 이전에 어떤 문인들이 있었는지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 상주 문학의 과거와 현재
「홍길동전」에 백년이나 앞서 한글소설 「설공찬전」을 쓴 채수(蔡壽, 1449~1515)의 고향은 충주 소산이지만 필화를 입어 상주 함창에 은거하여 살았다. 귀신과 저승을 주요 소재로 하여 현실정치를 비판한 「설공찬전」의 국문본이 최근에 발견되어 고전문학계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1511년 사헌부에서는 “「설공찬전」의 내용이 윤회화복지설輪回禍福之說이어서 아주 요망하므로, 문자로 베끼거나 언문으로 번역해서 읽는 것을 금해야 한다”고 했다. 도학 강경파의 미움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게 된 채수는 함창에 ‘쾌재정快哉亭’이란 정자를 짓고 독서와 풍류로 여생을 보내다 작고, 공검면 율곡리에 묻혔다.
경북 예천 출신의 문인 매호梅湖 조우인(曺友仁, 1561~1625)은 조선 선조 때 「매호별곡」이란 가사를 썼다. 광해군 때 이이첨 일파의 모함으로 옥에 갇히기도 했는데 「매호별곡」은 벼슬을 버리고 강호에 파묻혀 한가로이 생활하는 심경을 노래한 것이다. ‘매호’는 상주시 사벌면 매호리다.
영조 때의 성리학자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1664~1732)도 상주의 자랑이다. 이만부는 한국 실학사에서는 실심실학자實心實學者로, 유학사에서는 자가설自家設을 수립한 성리학자로, 서도에서는 팔분체의 대가로, 문학사에서는 문장가로 일가를 이루었다. 상주 외답동에 그가 세운 정자 ‘천운정사天雲精舍’가 잘 보존되어 있다.
상주의 한문학은 김천 출신의 학자인 상주대학교(현 경북대학교 상주캠퍼스)의 권태을 교수가 『尙州漢文學』(문창사, 2002)이란 책으로 총정리하였다. 권태을 교수는 『식산 이만부 문학연구』를 펴냈고, 전집인 『息山全書』도 편하였다.
상주의 문학을 논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낙강시회洛江詩會’이다. 1196년(고려 명종 26년), 최충헌의 난을 피해 상주에 내려와 있던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인근 문인들을 모아 시 짓기 모임을 가진 것을 시발로 상주목사 강구손, 의성군수 유호인의 시회를 거쳐 1862년(철종 13년)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 1813~1872)이 주관한 시회에 이르기까지 장장 666년 동안 총 51회에 걸쳐 행해졌다. 1607년부터 1778년까지 171년 동안 개최된 여덟 차례의 시회에서 나온 작품이 『洛江泛月詩』라는 필사본 책으로 남아 있어 권태을이 같은 이름으로 번역·출간하였다.
선비들의 이러한 시정신을 잇고자 경북문협이 주최하고 상주문협이 주관한 제52회 ‘낙강시회’가 2002년 경천대 도남서원에서 열렸다. 시회는 상주문협 주최로 해마다 이 지역의 큰 문학 행사로 자리잡아 2010년에 제60회가 열렸다. 시회는 제57회부터 ‘낙강시제’로 명칭을 바꿨다. 시제의 일환으로 상주지역 시인들을 중심으로 외지의 시인들까지 가세하여 강을 소재로 한 시를 모아 2006년부터 매해 기념 시집을 발간하고 있다.
상주의 문인 중 박찬선은 ‘터줏대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시인이다. 시집 『尙州』(문학세계사)를 간행한 적도 있고 ‘상주’ 연작시를 지금까지 100편 이상 쓰면서 상주의 역사와 인물을 증언하고 풍경과 풍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박찬선의 논문 「尙州文學이 걸어온 길」1)을 보니 상주문학이 태동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던 이는 이대희 시인(1925~1990)이다. 1950년대의 상주 문단을 이끌었다고 하는 그는 생전에 시집을 내지 못했다. 작고 이후 제자 채의진이 주선하여 유고시집 『너랑 가고 싶어라』를 냈다. 박찬선은 논문에서 연대별로 다음과 같이 상주의 문학회를 소개하고 있다.
1960년대:상주글짓기회, 황토부락동인회, 열하문학동인회
1970년대:삼백문학회, 상주아동문학회
1980년대:한국문인협회 상주지부, 소천문학회, 갑장문학동인회
1990년대:상주들문학회, 붓꽃문학회, 참솔문학, 마파람
2000년대:숲문학회, 느티나무시
(고딕체는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는 문학회)
6·25전쟁 이후 상주에서 문학의 씨앗을 뿌린 동인은 박두곤·박찬선·양상길·장원달이 중심이 되어 모인 ‘황토부락동인회’인데 아쉽게 동인지를 내지는 못했다. 이를 모체로 하여 발전한 ‘삼백문학회’는 2권의 동인지를 발간했다.
1985년에 결성된 한국문인협회 상주지부에서는 『尙州文學』을 지금까지 22집이나 발간하고 있다. 매호 이 지역의 주요 문인을 집중 조명하는데, 그간 이창화(시)·이계명(동시)·장원달(시)·박찬선(시)·김연복(시)·김경자(시조)·민병덕(시조)·정복태(소설)·박두필(시)·임인호(시)·박두화(시)·김재수(동시)·박정구(동시)·이칠우(시)·조재학(시)·이창모(동시)·박정우(시)·신동한(시)·권형하(시조)·황구하(시)·박순혜(수필) 등이 이 지면을 장식했다. 이를 보면 이 지역의 문학은 시와 시조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990년대에 등장한 붓꽃문학회·참솔문학·마파람은 각각 2~3권의 동인지를 냈다. 의료보험조합 직원들이 노조를 결성한 이후 문학 활동을 해나갔다는 데 의의가 있다.2) 상주대학교 문학 동아리인 ‘소천문학회’는 1984년 지도교수 권태을을 중심으로 창립되어 3권의 동인지를 냈으나 권태을 교수의 정년퇴임 이후 이어지지 않고 있다.
1993년에 결성된 상주들문학회는 지금까지 18집의 동인지를 냈다. <매일신문> 신춘문예(시조)와 『불교문예』(시)로 등단한 임술랑, 『실천문학』으로 등단한 윤임수, 『시조문학』으로 등단한 유재호, 판화가로 유명한 김봉기 등이 주축 멤버이다.
1998년에 결성된 숲문학회는 지금까지 동인지 『숲문학』을 11권 펴냈다. 숲문학회는 2002년부터 중국 연변민족문학원과 자매결연을 맺어 상호 교류를 하고 작품도 함께 실으며 우호 증진에 힘쓰고 있다. 동인 중 조희옥·장미향·김숙자·장운기·김옥화·박옥희·김차순이 시로, 박해자가 시조로, 황점선·정경해가 수필로, 권흥렬이 소설로 등단했다. 시 중심의 동인지라고 할 수 있다.
여성 시인들만으로 구성된 ‘느티나무시’ 동인은 김정순·이미령·전정희·황구하가 결성하여 지금까지 7권의 동인지를 냈다. 현재의 동인은 김이숙·김주애·김춘자·박순덕·이미령·이순영·황구하 등 7인이다.
상주를 지키고 있는 소설가는 화북면 입석리 보건진료소에 있는 김인숙(『소설문학』으로 등단)과 상주 서문동에 사는 정복태(『문예사조』로 등단), 상주 서곡동의 고창근이다. 김인숙은 이상문학상 수상 작가 김인숙과 동명이인이라 손해를 많이 본다. 2006년 오월문학상으로 등단한 고창근은 투철한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으로 쓴 소설들을 모아 작품집 『소도蘇塗』를 펴내면서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문인들은 대개 상주 거주 문인이다. 그런데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문인 가운데 상주가 고향인 사람도 적지 않다. 한때 문학과지성사의 대표를 했었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원장을 역임한 문학평론가 김병익이 상주 출신이다. 김병익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 입사해 기자 생활을 하다가 『문학과 지성』을 창간, ‘문지 4K’의 일원으로 많은 문학평론을 썼다.
시인 중에서는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와 『남해 금산』의 시인 이성복이 상주 출신이다. 오대동에서 태어나 5학년 1학기까지 남부초등학교를 다녔다. 서울로 전학가기 전까지 상주에서 자란 이성복이지만 그의 시에 고향 상주를 추억하면서 쓴 것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대구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정유화 시인은 상주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온 상주 토박이다. 『동서문학』으로 등단한 이후 『떠도는 영혼의 집』 『청산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 같은 시집을 내어 주목을 받았다. 그의 시의 원천은 낙동강이다. 「낙동에서의 대화」 연작시를 보면 고향이 점점 도시의 면모를 띠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가슴아파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앙대 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한국 현대시의 구조미학』 『타자성의 시론』 등 문학평론집을 내 시와 시론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그는 현재 서울시립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다.
1986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으면서 시로 등단했지만 1995년부터 소설로 장르를 바꿔 더욱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성석제도 상주 태생이다. 그는 우리 소설사에서 골계미와 해학의 정신이 넘치고 구수한 입담을 구사하는 작가라는 점에서 채만식과 김유정, 그리고 윤흥길의 뒤를 잇고 있는 셈이다. 누구보다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면서 한국일보문학상·동서문학상·이효석문학상·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김천문학의 과거와 현재
김천사람들은 옛날부터 ‘삼산이수’를 자랑스러워한다. 삼산은 황악산·금오산·대덕산이며, 이수는 감천과 직지천을 가리킨다. 1949년 김천군의 김천읍이 분리되어 김천시로 승격되고 김천군은 금릉군이 되었지만 1995년에 금릉군이 다시 김천시와 통합되었다. 김천은 물이 맑아 ‘金泉’이란 지명을 얻은 것 같고, 근처에 직지사直指寺라는 고찰이 있다.
고려 중기부터 후기에 걸쳐 크게 유행한 가전체소설 「국순전」과 「공방전」의 작가 임춘(林椿, 본관 예천)이 김천이 자랑하는 문인이다. 무인의 난 때 임춘의 일가는 큰 화를 입어 개경에서 5년 정도 숨어 지내면서 출사의 기회를 엿보았다. 하지만 친지들로부터도 경원시되자 임춘은 살아남은 가속을 이끌고 개령현의 한골(지금의 아포읍 대신리)로 옮겨가 7년여 은거 생활을 했다. 남아있는 그의 글 중 많은 부분이 이 당시에 씌어진 것인데 대부분 고통스러운 현실로 인한 좌절감과 절망감을 토로한 것들이다.
김천이 자랑하는 또 한 명의 문인은 매계梅溪 조위(曺偉, 1454~1503)이다. 조위는 김천시 봉산면 봉계 출신으로 김종직의 처남이다. 도승지, 호조참판까지 벼슬을 했지만 무오사화 때 순천에 유배되었고,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했다. 그는 여러 차례 시제에서 장원했고, 28세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유윤겸 등과 같이 두보의 시를 우리말로 옮겼으니 그것이 『두시언해』이다. 그는 유배지 순천에서 「만분가萬憤歌」를 지어 우리나라 최초의 유배가사를 남겼다. 봉계에 그의 재실이 남아 있는데 해마다 이곳에서 그의 호를 딴 매계백일장이 열리고 있다.
김천 출생의 육영사업가 최송설당(1855∼1939)은 김천 사람들이 존경하는 분이다. 그이는 외가 쪽이 홍경래의 난에 연루되어 증조부와 조부가 억울하게 죽은 것을 알고 어려서부터 가문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누명을 벗게 하리라 맹세하였다. 1886년 아버지가 죽고 남편과도 사별하자 서울에 올라와 권문세가의 부인들과 교제하던 중 입궐하게 되어 영친왕의 보모가 되었고, 귀비에 봉해지면서 고종으로부터 송설당이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1931년 전재산 30만 2,100만원을 희사하여 재단법인 송설학원을 설립, 김천고등보통학교를 개교하여 오늘날의 김천중고등학교로 발전시켰다. 시문에 능하여 200여 수의 한시와 60여 수의 국문시가를 남기고 있으며, 저서로 『최송설당문집』 3권이 있다.
현존 문인 가운데 김천을 빛내고 있는 이는 단연 백수 정완영(1919~ ) 시인이다. 신춘문예에 시조(<국제신문>, <조선일보>)와 동시(<서울신문>, <동아일보>)가 당선되었고, 유치환이 『현대문학』 추천을 해주었다. 1969년에 첫 시조집 『채춘보』를 낸 이후 십여 권의 시조집과 『꽃가지를 흔들 듯이』 『엄마 목소리』 『가랑비 가랑가랑 가랑파 가랑가랑』 등의 동시조집을 냈다. 가람문학상·만해시문학상·유심특별상·육사문학상 등을 받았다. 2008년 12월에 대항면 운수리에 ‘백수문학관’이 세워졌다. 정완영의 문학세계에 대해서는 장병우의 논문3)이 아주 잘 정리하고 있다.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사랑, 조국에 대한 숙명적 집착과도 같은 애정이 정완영의 시조를 떠받치고 있다고 장병우는 논하였다. 정완영의 시정신을 기리기 위해 ‘백수 정완영 전국시조백일장’이 2005년부터 김천예술제 행사의 일환으로 행해지고 있다.
김천문학에 대해서 참고할 만한 글은 이익주의 「김천문학의 어제와 오늘」4)이다. 한국문인협회 김천지부장을 역임한 이익주는 최근에 시집 『달빛 환상』을 발간하였다. 이익주 시인의 논문에 의하면 김천의 문학회는 결성된 해를 기준으로 삼아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1940년대:吾東시문학구락부, 김천문화의 집
1950년대:벽과 눈 동인회, 벽파동인회, 黑麥文學會
1960년대:麥童 동인, 김천문우회
1970년대:香木會, 김천문우회, 김천시문학회, 김천문학회
1980년대:한국문인협회 김천지부
1990년대:은유문학회
2000년대:등등, 세모시
(고딕체는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는 문학회)
김천이라는 작은 도시에 이렇게 많은 문학회가 명멸해간 것만 봐도 김천문학의 저변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는 것이 한국문인협회 김천지부 하나뿐인 것을 감안하면 창작의 분위기가 많이 침체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볼 수 있다. 일일이 다 언급할 수는 없고, 이익주의 논문을 참고하여 중요한 문학회만 소개한다.
1954년 2월에 강중구·김상민·정재호가 발의하여 조직된 문화단체인 ‘김천문화의 집’은 뒤에 건물도 마련하고 김천문화원으로 발전하여 김천 문화예술의 총본산이 된다. 1955년부터 1978년까지 동인지 『小文化』를 발간하면서 김천을 문화의 도시, 문학의 도시로 만드는 데 일등공신 노릇을 한다.
1959년에 김기환·박용설·윤사섭·정수봉·홍성문 등이 창설한 흑맥문학회도 김천문학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이 동인 출신 홍성문은 영남대 미대학장을 했는데 시집도 다수 발간하였다. 부산일보 사장을 한 김상훈 시인도 흑맥문학회를 거쳐 갔고, 아동문학가 김상문·김종상·신현득도 이 문학회 출신이다. 배병창 시조시인의 딸 배정미와 아들 배수열도 시단에 나가 활동하고 있다.
1972년에 결성된 향목회는 김천 시조시단의 구심점이었다. 정완영·장정문·이동현·조오현·김남환 등 쟁쟁한 시조시인들이 포진해 있었다. 시조시인들의 분발에 자극받아 1974년에 윤사섭·권태을·심형준·배병창·장정문이 김천문우회를 조직하였다. 연중행사로 문학의 밤과 시화전을 열었고, 주부백일장과 학생백일장을 주관하였다.
향목회가 김천 시조시인 1세대의 모임이라면 1976년에 결성된 김천시문학회는 시조시인만 모인 것은 아니지만 2세대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 장정문·정순량·이경안·이정환·황명륜이 시조를 썼고, 권숙월·박수일·신현필이 시를 썼다. 동인지 『김천시문학』을 제3집까지 출간하고 나서 제4집부터 제호를 『黃嶽』으로 바꿨다.
김천문우회와 김천시문학회의 회원이 타지로 다수 빠져나가자 새롭게 정비하자는 의미에서 김천문학회가 만들어졌다. 권숙월·이경안·황명륜이 김천의 문학을 지켰다. 『黃嶽』은 1988년 한국문인협회 김천지부가 결성되면서 제호가 『김천문학』으로 바뀌었다. 『黃嶽』은 제7집까지 나왔고, 제8집을 대신하여 『김천문학』 제8집이 나왔으며, 2010년에 제29집이 나왔다. 한국문인협회 김천지부에서는 해마다 5월에 청소년 백일장을, 10월에 김천예술제 백일장을 개최해오고 있다. 이외에도 주부백일장, 문학강연회, 시와 음악의 만남, 작품전시회, 회원 시낭송회 등을 매년 돌아가면서 열고 있다.
현재의 김천문단을 이끌고 있는 주축은 시인 권숙월·민경탁·송상용·이건창·최명숙·정영화·나홍연·김종인, 시조시인 노중석·황명륜·이익주·장병우·박기하·이교상·이동현, 수필가 이우상·이태옥·이성환·이응진 등이다. 정완영 시조시인의 고향이 김천인지라 아무래도 이 지역의 주축 문인은 시조시인들이다. 은유문학회는 젊은 아마추어 시인들의 모임으로 동인지를 9집까지 냈지만 지금은 모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김천을 지켜온 문인 중에 동화작가 윤사섭(1930~2006)은 시조의 아성에서 거의 유일하게 동화를 쓴 이채로운 존재로 세종아동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10여 권의 동화집과 『소년원의 푸른 하늘』 같은 장편 소년소설을 펴낸 윤사섭은 김천고등학교에서 오랜동안 사서교사와 미술교사를 하면서 제자를 길러냈는데 후배 아동문학 작가는 키워내지 못한 것 같다.
또 한 명의 터줏대감은 권숙월이다. 그는 다움문학회, 텃밭문학회, 여울문학회 등 3개의 문학교실을 운영하면서 수강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김천의 여성문인들을 잇따라 등단시켜 김천의 시인 지망생들에게는 ‘대부’로 통한다. 권숙월은 『시문학』으로 등단해 김천문학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김천지부장을 역임하고 김천신문 편집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경북도문화상·경북예술상·삼일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출향 문인 중 향목회 출신 김남환은 한국여성시조문학회 초대회장을 했고 지금은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장으로 있다. 송강시조문학상·정운시조문학상·이호우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한 원로 시조시인이다.
이정기 시인은 서울대 영문학과를 나와 국민대 영문과에 재직하면서 시작 활동을 했는데 한국현대시인협회장을 역임했다. 서울대 인문대학장과 대학원장을 역임한 이상옥 교수는 수많은 연구논문과 연구서를 갖고 있는데 『두견이와 소쩍새』라는 산문집에서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부산일보 논설주간을 거쳐 현재 한국기독신문 주필로 있는 정선기 시인은 『심상』으로 등단하여 『경부선 그리고 호남선』 『흔들의자 위의 시간』 등 여러 권의 시집을 냈다.
김성현은 계명대 심리학과를 나와 김천고등학교에서 상담교사를 하고 있는데 2010년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에 「겨울, 바람의 칸타타」가 당선되었다.
출향 문인 중에 이화여대 국문학과를 나와 『시문학』으로 등단한 배정미, 경북대 법학과와 연세대 경영대학원을 나와 『시와 시론』으로 등단한 정창운, 서울대 미술학과와 계명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문학세계』로 등단한 홍성문도 있다.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마왕의 잠』으로 등단한 이동순 시인은 영남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첫 시집 『개밥풀』 이후 많은 시집을 냈는데 신동엽창작기금, 시와시학상, 난고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동순은 백석·조명암·권환 등의 시선집을 발간하여 분단시대의 잊혀진 시인을 발굴한 공로가 크다. 그는 또 대구 MBC 라디오에서 ‘이동순의 재미있는 가요 이야기’(2003~2008년)란 프로를 맡아 MC 로 활동했으며, 미국 워싱턴 소재 자유아시아방송(RFA)의 ‘남북이 같이 듣는 노래’ 프로에 매주 고정출연 했다.
활동 무대가 서울이면서 김천이 고향인 소설가로 김연수와 김중혁이 있고, 시인으로는 이승하·문태준·김종태·문혜진 등이 있다. 이들의 활발한 활동 사항은 오늘날 김천을 더더욱 문향으로 일컬어지게 하고 있다. 특히 김연수와 문태준은 김천고 동기생으로 현재 우리 문학계의 두 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성균관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김연수는 1993년 『작가세계』에 시로 등단한 후 1994년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 창작을 시작하여 이상문학상·황순원문학상·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중후한 문체와 치밀한 자료 조사, 견고한 구성과 웅숭깊은 주제가 김연수 소설의 특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농촌도 아니고 대도시도 아닌 김천이라는 고저늑한 도시의 면모를 잘 살려 시를 쓰고 있는 문태준은 1994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한 이후 시문학파와 박재삼의 계보를 잇는 아름다운 서정시를 써 노작문학상·유심작품상·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문태준은 고려대 국문학과와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을 나왔고 불교방송국 PD로 있다.
김종태도 고려대 국문학과를 나와서 고려대에서 석사, 박사를 받은 학자 시인이다.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여 『떠나온 것들의 밤길』 같은 시집을 펴내기도 했지만 여러 권의 문학평론집을 발간한 중견 문학평론가이다. 현재 호서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이다.
문혜진은 199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하여 『질 나쁜 연애』 『검은 표범 여인』 등의 시집을 냈는데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소설가 김중혁은 2000년 『문학과 사회』로 등단하였다. 『펭귄뉴스』 『악기들의 도서관』 『좀비들』을 펴낸 김중혁은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계명대 국문학과를 나왔다.
(이승하는 이 글의 필자이므로 등단 경로며 작품 활동 내용은 생략한다. 의성군 안계면 출생이지만 본적은 김천시 성내동 210번지로 김천 사람이다. 김천중앙초등학교와 김천성의중학교를 거쳐 김천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두 달밖에 못 다니고 학업을 중단, 검정고시를 거쳐 중앙대 문창과에 들어갔다. 김천고 송설역사박물관에 김천고가 낳은 자랑스런 문인으로 사진이 걸려 있다고 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한번 가볼 생각이다. 동문으로 대접해준 것이라면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 마무리
상주와 김천은 예로부터 선비와 장군은 물론이거니와 의병과 독립운동가가 지속적으로 나온 곳이다. 체제를 부정하고 외세에 반대하는, 반골기질이 강한 인물이 특히 많이 나온 곳이다. ‘풍요’와 ‘여유’가 아닌 ‘척박’과 ‘궁핍’이 그런 기질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경주나 안동과는 풍토가 꽤나 다르다.
현실에 만족하거나 안주하면 문학작품이 나올 수 없다. 문학은 그 시대의 피뢰침이며 문인은 이 세상이 썩어가게 두지 않는 소금의 역할을 해왔다. 상주의 채수와 조우인, 김천의 임춘과 조위는 상주와 김천에 살다가 뼈를 묻은 문인이다. 그들의 대쪽 같았던 문학정신은 알게 모르게 지금까지도 연면히 이어지고 있다. 상주와 김천의 문학은 오늘, 르네상스기를 맞이하고 있다. 두 도시 모두 인구가 전국적으로 아주 적은 편에 속하고 도시의 산업시설도 변변치 못한 농업도시에 교육도시이지만 문학은 이렇게 풍성하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문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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