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지리99.가객님 글(06.11.08)
두류산유록(頭流山遊錄) (하)
김 택 술(金澤述)
※<지리99>에서 발굴해 국역한 작품.
[3월 29일]
이른 아침에 곧장 천왕봉에 가려고 도촌(島村)에 사는 강주원(姜周元)을 방문하여 산위로 오르는 길을 물으니 천왕봉과는 40리 거리라고 대답하였다. 안내하는 사람 1명을 샀다. 오후에 먹을 음식을 싸서 힘을 내어 바쁜 걸음으로 올라갔다. 산 위에는 숙박할 만한 집이 없기 때문에 당일에 돌아올 계획이었다.
10여 리를 가니 '하동암(河東巖)'이라고 세 글자가 새겨진 큰 바위가 있다. 옛적 하동군수가 가마를 타고 산에 오르다 떨어져 상처를 입었다가 이 바위에 도착해서 죽었다고 '하동암'이라고 부른다. 그런 사연을 들으니 두려워서 처마 끝에는 서 있지 마라[위험한 곳에는 가지 마라]는 훈계를 더욱 조심하게 되었다.
제석당(帝釋堂)에서 점심을 먹었다. 통천문(通天門) 잔도(棧道)를 지나 미시(未時: 오후 1시~3시)에 천왕봉 꼭대기에 도착하였는데 높기는 높음을 깨달았다. 봄과 여름이 교차하는 시기인데도 나무가 무성하지 않고 철쭉이 피지 않은 것은 지대가 높고 추운 까닭이 아니겠는가?
호남과 영남 두 지역에는 큰 산이 많다. 그렇지만 여기서 굽어보니 작게 보여 마치 어른과 어린아이라고 할 수 있다. 날씨가 맑을 때는 서쪽, 남쪽, 동쪽 삼면 바다를 아득히 볼 수 있고, 일본의 대마도 일대를 어렴풋이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 날은 구름이 하늘과 닿을 정도로 자욱하게 끼고, 하늘과 한 덩어리가 되어 끝이 없었으니 안타까웠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산은 선산(仙山: 신선이 사는 산)이다. 신선과 인연이 없는 사람은 정상까지 오르지 못하고 대부분이 비와 안개 때문에 곤경을 겪는다.”고 하였다. 나의 이번 산행은 마침 그믐이었고, 그믐은 관례적으로 대부분 비가 온다. 그런데 다행히 비는 맞지 않았으니 하늘과 인연을 얻은 것이 아닌가? 역시 우습기만 하다.
옛날에는 내가 금강산의 비로봉(毘盧峯)에 올랐고 지금은 또한 천왕봉에 오르는데 천왕봉이 비로봉보다 높음을 알겠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비로봉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곳이라고 말하지만 천 왕봉에 대해서는 듣지를 못하였다. 비로봉은 동북쪽 높은 곳에 있고, 천왕봉은 서남쪽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바위 위에는 “일월대(日月臺)”라고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전후로 유람하러 온 사람들의 이름이 많이 쓰여져 있다. 혹은 부자가 이름을 함께 적었으며 심지어는 사대(四代)가 이름을 나란히 쓴 것도 있다. 족보와 같다고 할 수 있으니 이것은 일 벌이기를 좋아함이 지나치다.
오호! 높은 곳은 오르면 반드시 감회가 있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다. 성인이신 공자도 태산(泰山)에 올라 천하가 작다고 여겼으며, 주자(朱子)도 축육봉(祝融峯)에서 호탕한 기상을 드러내었다.
지금 나는 뜻은 있지마는 주견(主見)이 없으므로 내가 터득한 것을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진(晉)나라 주의(周?)가 새로 지은 정자에서 바라 본 산하(山河)에 느낌이 있었고, 위시(衛詩)에 “서방(西方)에 있는 미인을 바라본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 내가 겪었던 감정이다.
공자와 주자가 터득한 것은 정(正: 정격, 바름)이고, 위시와 주의가 느낀 것은 변(變: 변격, 변화)이다. 정을 깨쳐서 변을 만나더라고 그 중정(中正)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 시변(時變)에 슬퍼하면 마음이 상하는 데 이른다. 이것이 또한 내가 힘써 노력해야 할 것이므로 지은 시가 있다.
높기도 하다. 이 봉우리 高哉此絶頂
한 번 올라간들 무엇을 하겠는가? 一陟欲何爲
큰 소리로 외치자면 하늘도 놀라겠지 語恐驚天上
눈은 땅 끝까지 보리라 眼應極地涯
지금의 나는, 공자께서 태산에 오른 날과 같고 宣尼泰嶽日
주자께서 축융봉에 올라간 때와 같다네 晦老祝峯時
내가 지난 시대의 일을 생각한들 而我千秋想
곁에 있는 사람이야 어떻게 알겠는가? 傍人那得知
제자인 조정(趙貞)이 말하기를 “옛적에 병암(炳菴) 김준영(金駿榮)이 지리산 반야봉 정상에 오르면서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기분 좋다고 외치면서 말하기를 ‘나 역시 성인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말하기를 “옛사람은 산꼭대기에 오름을 도(道)의 최고봉에 도달하는 것으로 비유했다. 병암은 도의 최고봉에 도달함을 산꼭대기에 오르는 것으로 비유했다. 그러니 자신이 높은 곳에 올랐으므로 공부를 다했음을 말한 것이다. 서로가 말을 주고받은 사이에 자신도 힘써 노력하고, 타인도 힘써 노력하도록 도와준다는 뜻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아! 북쪽을 바라보니 함양(咸陽)의 개평(介坪)이요, 동쪽을 바라보니 진주의 덕산(德山)이 모두 지척간에 있다. 일두(一蠹: 정여창), 남명(南冥: 조식)의 고상한 풍모를 높이 받들 수 있으니 어찌 이 지리산에 신령한 기운이 뛰어난 인물을 태어나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남쪽을 바라보니 남강(南江) 한 줄기가 흰 비단을 펼친 듯하다. 김문열(金文烈: 김천일), 황무민(黃武愍: 황진), 최충의(崔忠毅: 최경회) 삼장사(三壯士)가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물에 몸을 던져 나라를 위해 절개를 지킨 곳이다. 충성스런 혼백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영원히 남아 있다. 명현(名賢)이 이곳에 태어나서 이곳에서 사망함도 역시 산신령이 그렇게 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여러 명현들은 모두 재주와 뜻을 가지고서 덕을 닦고 공부를 하여 크게 등용되어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일이 어그러져 그렇게 하지를 못하였다. 남명 조식은 은둔하여 화를 면했으나 일두 정여창은 무오사화에 죽었고 삼장사는 임진 때 죽었다. 요컨대 모두 시대적인 재앙의 불행이다.
고금천하에 재앙이 이렇게 많았으니 나는 변(變: 일제시대를 의미)에 어떻게 한단 말인가? 다만 내 마음을 편안히 하면서 대처할 뿐이다.
이리저리 배회하면서 두루 구경하는 사이에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그리고 이 날은 또 봄이 가는 마지막 날이었다. 봄을 보내는 사람은 관례적으로 반드시 높은 곳에 오른다. 그런데 마침 이날에 이 천왕봉 꼭대기에 올랐으니 이번은 뛰어나게 좋은 장소에서 봄을 보냈다고 할 만하다. 아래와 같은 시를 지었다.
천왕봉 위에서 가는 봄을 보내고 天王峯上餞靑皇
일월대 앞에 서니 또 석양이라네 日月臺前又夕陽
오는 길에 봄바람과 짝을 이뤄 동행하고 來路東風同作伴
봄은 갔건만 나만 홀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였네 春歸我獨未歸鄕
돌아가는 길은 순식간에 날이 저물었으므로 신속히 하산하였다. 침구와 음식을 가지고 와서 하룻밤을 여기서 숙박하지 못함이 매우 아쉬웠다. 여기에는 지붕처럼 생긴 석장(石墻: 돌로 된 담장)과 시우(柴宇: 땔나무로 얽은 집)가 있다. 그러므로 천왕봉을 오르려고 하는 사람은 밤을 세우는 예가 많다.
밤에는 노인성(老人星)을 보고 새벽에는 일출(日出)을 볼 계획을 세우며, 날씨가 쾌청하고 따뜻한 추분(秋分)에 가고자 한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이런 실책을 저질렀다. 길을 재촉해서 내려와 백무촌(白武村) 주막에 당도하여 저녁밥을 먹었다.
밥을 먹은 후 피곤하여 쓰러져 누웠는데 온 몸이 두드려 맞은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었다. 곧 웃음을 지으면서 “심하도다. 산수를 좋아하는 너의 괴벽(怪癖)이다. 누가 너로 하여금 이렇게 피로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자신이 저질렀으면 다시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겠는가?”라고 하면서 시 한 수를 지었다.
훌륭한 경치라고 누가 말했는가 誰言壯觀好
몸 고생이야 다시 비할 바가 없다네 身苦更無比
마음이야 우습기도 하지만 堪笑靈臺主
일시적인 유쾌함을 내 스스로 구한다네 自求快一時
이 시는 몸이 마음을 책망한 것이다. 또 시를 짓기를,
일시적인 유쾌함을 구한 것이 아니고 非求快一時
어진 사람은 산을,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要見智仁術
좋아한다는 원칙을 방법을 보려고 한 것이라네
나는 참으로 사사로운 번뇌를 씻어버리고 我苟淨私塵
너를 따라다니면 역시 편안함을 알겠네 從知?亦逸
이 시는 마음이 몸에 대답한 것이다.
[4월 1일]
백무를 떠나 직치(直峙)를 넘어가서 덕평(德坪: 덕평봉)으로 가려고 하였다. 지나가면서 본 바에 의하면 조금 넓고 평평한 곳은 매우 높은 지대거나 깊숙한 지역이라도 더러 인가(人家)가 있었다. 대개 지금은 이인(夷人: 일본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어 백성들이 제대로 살아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리저리 흘러 다니다가 이런 지리산 골짜기까지 들어와서 산을 개간하여 감자를 먹고 산다. 모습이 짐승과 같은데도 구차하게 생명을 연장한다.
그런데 저들[일본인]의 법령은 아무리 깊은 골짜기에 살아도 속속들이 다 들어온다. 산은 국유(國有)라고 하여 숲을 양성함이 매우 엄하다. 숲을 태워 밭을 만드는 것도 금한다. 깊은 산에 들어와 사는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구속받는 생활을 하니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간간이 안온하고 따뜻한 곳에 터를 잡아서 비옥한 땅을 개간하면, 감자와 보리는 풍성하고 약방도 역시 있고 저자거리도 삼, 사십리에 불과하다. 물품을 교환해서라도 평생을 지낼 때까지 굶주림과 추위 근심이 없다. 아울러 저 일본인의 사역(使役)과 조사를 받지 않아도 된다. 이것이 어찌 평지와 너른 들에서 저 일본인의 논을 소작하고, 저 일본인이 시키는 일을 하며 노예처럼 살고서도 오히려 죽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같은 선상에서 따질 수 있겠는가?
내가 만난 밀양에서 온 민씨(閔氏) 4형제는 노친을 봉양하고 자식들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낙토(樂土)라고 여겼다. 만약 나처럼 세상과 맞지 않는 사람이 참으로 지리산 골짜기로 들어와 안온한 곳을 찾아서 남은 여생을 마치면 다행이다. 다만 근력이 이미 노쇠하여 농사짓는 고생을 견딜 수 없음이 안타깝다.
직치(直峙) 아래에 도착하여 갑자기 길을 잃으니 진퇴유곡(進退維谷)이다. 반나절을 바위와 가시 사이를 헤치고 나가서 겨우 화를 면하였는데 머리로 햇볕이 스치면서 지나갔다. 오후에 소위 덕평(德坪)에 도착했다. 이곳은 하동(河東) 땅이다. 지역이 너무 높고 바람이 너무 차가워서 처음 오는 사람은 오래 머물지 못한다.
거주하는 사람에게 물으니 “이 지역은 오곡(五穀)이 자라지 않고 다만 청저(靑藷)만 생산된다. 처음에는 감자가 매우 많아 먹어도 여유가 있었다. 해마다 바람이 많고 추위가 심해 감자 수확량이 줄고 양식 대기가 어렵게 되자 대부분이 이사하여 떠났다. 20여 가구가 지금은 6~7가구가 있다. 진퇴양난이지만 형편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더라고 그 지역에서 나는 생산물을 먹은 연후에 아주 외진 지역에서 살 수 있는 것이다. 이 지역이 이미 음식물이 나올 만한 곳이 없으면 살만한 땅이 아니다.
이 이외에 또 난리를 피할 수 있는 길지(吉地)로 상세석평(上細石坪), 하세석평(下細石坪)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여기서 30리 거리이다.
상세석평은 어제 천왕봉 정상에서 이미 보았다. 산 위의 형세는 덕평보다 높다. 그리고 북쪽을 등진 남향이며 좌우가 안온하게 감싸고 있어 장풍(藏風) 모습과 비슷하였는데 매우 넓고 크다. 순대(脣臺)를 이루고 있어 형세가 매우 오묘하다.
하세석(下細石) 역시 그러하다. 예전에는 몇 만 그루 회화나무가 군집으로 있었는데 근래에는 모두 말라죽어 풀이 자라나는 곳이 되었다. 이런 까닭에 운수가 돌아왔다고 생각하여 사람들이 간혹 들어와서 살기도 하였지만 끝내는 다시 되돌아갔는데, 지대가 높고 추워서 양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지형이 묘하고 또 고운 최치원 유적이 있다. 한 번 가볼 만하였으나 길이 험하고 매우 피곤하여 가기를 중단하였다. 이 날 밤에는 삼정리(三井里) 주막집에서 잤다.
[4월 2일]
당현(堂峴)을 넘어 칠불암(七佛菴)에 도착하였다. 암자는 매우 조용하고 외진 곳에 있었다.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路王)의 왕자 7명이 이곳에서 성불(成佛)하였으므로 암자이름을 칠불암이라 불렀다.
수로왕이 있던 때를 중국 연대로 따진다면 서한(西漢)시대이다. 그의 자식들이 성불했다면 불교가 우리나라가 전래된 것이 동한(東漢) 명제(明帝) 때보다 앞섬을 역시 알 수 있다. 내가 <금강유기(金剛遊記)> '유점사론(楡岾寺論)'에서 이미 상세하게 논하였다.
칠불암에는 아자방(亞字房: ‘亞’자 모양으로 생긴 온돌방)이 있다. 하나의 큰 방 안에 높낮이가 다르게 도면을 만들었는데 “亞”자 모양과 같다. 부엌에서 불을 때면 고저가 모두 따뜻하였으며 수 백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신라시대 52대왕인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912) 때 담공선사(曇空先師)가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비록 참선하면서 불도를 닦는 스님들의 작은 기술이지만 역시 매우 기이하다.
가다가 삼신동서숙(三神洞書塾)을 들렀다. 숙사(塾師: 훈장)인 박정규(朴貞圭)는 정민화(鄭?華)의 부인 동생인데, 초면인데도 오랜 친구 같았다. 길 떠나는 것을 은근히 만류하였다. 독한 고량주, 황반(黃飯: 눌은밥, 당울티), 산나물, 냇물고기 등은 입에 맞도록 향기있고 정결하였다.
며칠 계속된 피로와 이리저리 다니는 여행길에서 우연히 좋은 주인을 만나 하룻밤을 지내니 그 편안함은 곧 집으로 돌아간 것과 같았다.
[4월 3일]
계곡을 따라 내려와 세이암(洗耳巖)에 도착했다. 이곳은 고운 최치원이 유람하던 곳으로 수석(水石)이 매우 기이하다. 사람들의 이름이 많이 쓰여져 있으며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고인(高人)은 귀를 씻었지만 高人洗得耳根餘
세상 사람들 명예에 대한 욕심은 씻어도 씻지를 못한다네 俗子名心洗未除
이 시는 고운 최치원이 유람하던 지역에 새겨져 있던 것인데, 돌 겉면이 지저분하다. 여기서부터 20리를 가 쌍계사로 들어갔다. 쌍계사는 쌍계(雙磎: 두 계곡 물)가 합해서 흐르는 지역 안에 있기 때문에 쌍계사라는 명칭을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
마을 어귀 좌우에 있는 석벽에는 “쌍계(雙磎)”와 “석문(石門)”이 각각 나뉘어져 새겨져 있다. 전해오기로는 고운 최치원이 철장(鐵杖: 쇠 지팡이)으로 돌에 썼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지? 안 그런지? 절은 겨우 중간 정도의 사찰인데 전각(殿閣)이 매우 화려하다. 문루(門樓)에는 “청학루(靑鶴樓)” 세 글자가 걸려 있다. 전해오기로는, 고운 최치원이 이곳에서 거문고를 연주하고 생황을 부니 청학이 날아 왔다고 한다. 그러므로 후세 사람들이 그 일을 근거로 “청학루”라고 이름지었다.
현판 위에 쓰여진 시의 운으로 아래와 같은 시를 지었다.
청학을 맞이하기 위해 청학루를 지었는데 爲迎靑鶴起樓臺
세상 바깥에서 사는 신선은 몇 번이나 왔을까? 物外仙人幾度來
신선도 가고 학도 돌아간 천 년이 지난 뒤에는 仙去鶴歸千年後
머리 허연 늙은이가 서성거릴 줄을 어찌 알리오? 豈知滄老此徘徊
세상에서는 “지리산 속에 청학동이 있는데 십승(十勝: 전국 10대 길지)의 하나이다. 만 명이 살 수 있고 삼재(三?: 전쟁, 기근, 전염병)가 들지 않는다.”고 하여, 산꼭대기나 깊은 계곡을 샅샅이 찾아다녔다. 어떤 사람은 세석평전이나 덕평봉이 해당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천 년 전에 청학이 이미 이곳에 왔으므로 “청학루”가 만들어졌는지 모르니, 청학루가 있는 곳이 즉 청학동이다.
화개시(花開市)에서 벽소령(碧霄嶺) 아래까지 위아래 4, 5십리는 산도 높고 계곡도 깊다. 북을 등진 남향이며 바람도 따뜻하고 토질도 비옥하고 물도 풍부하다. 곡식과 과일이 모두 구비되었고 담배 생산량도 많다. 지리산 속의 가장 낙토(樂土)이며, 만 명이 생활할 수 있고, 삼재가 들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곳이 어찌 청학동이 아니랴?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지리산으로 가는 사람을 전송하면서 지은 시에
그대는 지금 청학동 속의 사람이다 君今靑鶴洞中人
라는 구절이 있는데 역시, 청학동을 가리킨다. 그 당시에도 어찌 인적이 닿지 않는 외지고 험한 지역을 지적했겠는가? 세석평전이나 덕평봉 등의 장소를 운운한 것이 아니겠는가?
쌍계사 마당에는 고비(古碑) 하나가 있는데, 고운 최지원이 지은 것으로 진감선사비명(眞鑑禪師碑銘)이다. 비명 속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있다.
“동진(東晋)의 고승인 혜원(惠遠: 334~417) 스님이 ?논(論)?을 짓기를 ‘석가여래가 주공(周公), 공자(孔子)와는 다르게 진리를 표현했지만 귀착점은 동일하다. 이치를 터득했으면서도 두루 대응하지 못한 것은 만물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양(梁)나라 문장가인 심약(沈約: 441~513)은 ‘공자는 진리의 실마리를 열었고, 석가는 그 이치를 철저히 밝혔다.’고 하였다. 참으로 그 대요(大要)를 아는 사람과 더불어 비로소 도(道)를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비명의 이 부분을 읽고 시를 지어 논평하였다.
유학은 도와 통하는 큰 근본이 있고 (儒有大本與達道)
허무적멸은 불교가 보배로 여기는 것이라네 (虛無寂滅佛所寶)
동정체용(動靜體用)은 본래 제각각 다른데 (動靜體用本自殊)
혼동해서 구분하지 않으면 애매모호하게 된다네 (混而無分已糊塗)
공자가 도를 밝히자 석가가 곤궁해졌다고 함은 무슨 말인가? (孔發釋窮是何言)
유학을 끌어들여 불교로 들어가니 불교가 도리어 유학을 존중하네 (援儒入佛佛反尊)
고운 최치원은 어찌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닌가? (孤雲豈非儒家子)
너무 명실상부(名實相符)하지 않은 듯하네 (無乃名實不相似)
퇴계선생 이후 학문은 간재 전우선생으로 내려 온 것은 (退溪而後逮淵艮)
참으로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라네 (良有以來千秋論)
여기 쌍계사에서 시작하여 화개시를 거쳐 섬진강에 당도하였다.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고 배가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니 가슴이 탁 트였다. 산속의 유람과 비교하니 또 별다른 맛이 있어 일두 정여창이 지은 시를 낭송하였다.
바람결에 부들은 가벼이 흔들거리고 (風蒲獵獵弄輕柔)
사월에 화개에는 보리가 벌써 한창이네 (四月花開麥已秋)
지리산 천만 골짜기 다 구경하고서 (觀盡頭流千萬疊)
조각배로 또 다시 큰 강물로 흘러가네 (扁舟又下大江流)
웃으면서 제자 조정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겨우 지리산을 다 보았지 배를 타고 큰 강으로 내려가지 못했으니 일두 정여창의 풍류에 미치지 못함을 알겠다.”고 하였다.
일두의 시운에 따라 시를 한 수 지었다.
안개 낀 경치가 흥을 돋구어 박유(●柔)로 들어가니 (烟光助興入●柔)
녹음이 짙게 우거졌지만 보리를 벨 때는 아니라네 (綠樹陰濃麥未秋)
섬진강 넘실넘실 만 장이나 우뚝 솟아 있는 듯 (蟾水滔滔萬丈屹)
일두옹이 지은 시에서 풍류를 생각하네 (蠹翁高●想風流)
강을 거슬러 20리 올라가 송정(松汀) 주막에서 숙박하였다.
[4월 4일]
구례(求禮) 토지면(土旨面)을 지났다. 보니까 소위 “금환락지형(金環落地形 : 금가락지가 땅에 떨어지는 형태)”이다. 새로운 명당터라고 해서 각처 사람들이 다투어 몰려와 집터를 잡았으나 대다수가 실패를 보았다. 그런데도 오가는 사람들이 또 계속된다.
마을마다 집들이 별이 퍼져있는 듯이 바둑알이 놓여있는 듯이 많기도 한데 어느 곳이 진짜인지 아니면 진실이 없는 허명(虛名)인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요컨대 산수면(山水面)은 사방으로 퍼진 넓은 들판을 끌어안고 있으므로 천 명이 살만한 지역으로 넉넉하다.
여기서 북쪽을 향해 20리를 가 화엄사(華嚴寺)로 들어갔다. 화엄사는 큰 사찰이며 2층 각황전(覺皇殿)은 매우 높다. 이것은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자식을 위하여 복(福)을 구하고자 사람을 보내어 짓도록 한 것이다.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석가 사리탑은 매우 정묘하며 경치가 매우 좋은 곳에 자리잡았다.
마당에는 벽암선사비명(碧巖禪師碑銘)이 있는데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이 지었다. 비명 중에는 임진왜란 때 나라에 공로가 있음을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저들이 비록 스님 신분이기는 하지만 임금을 위한 충성심을 알고 있으니 가상한 일이다.
또 북쪽으로 20리를 가서 수월치(水越峙)를 넘어 미국 사람들이 피서하는 별장에 도착하였다. 별장은 50여 개 되고 돌을 사용하여 지었다. 외부는 견고하고 내부는 화려하다. 높고 험한 곳에 별장을 이처럼 지었으니 꽤 많은 돈이 들어갔음을 생각할 수 있다. 사람들이 미국은 돈이 많다고들 하였는데 참으로 그렇다.
산 위는 시원스레 펼쳐져 있고 산봉우리는 수려하여 안계(眼界)가 확 트였다. 돌 사이에서 샘물이 나온다. 저울로 달아보더라도 그 무게가 다른 물과 비교할 바가 아니며, 물을 마시면 모든 병을 없앤다고 한다. 이 지역에 이렇게 좋은 터가 있었음을 누가 알았겠는가? 미국인도 감여술(堪輿術 : 풍수지리술)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참 무더위 때 와서, 더위가 물러가면 가지만 여름 한철에는 즉시 번화한 지역이 된다. 골짜기에 사는 곤궁한 사람들이 미국인의 고용인이 되어 작은 돈이라도 받게 됨을 기뻐한다. 나라 잃은 백성들이 슬프고도 안타깝다.
여기서 반야봉과는 이미 절반은 온 것이다. 바라보니 한 번 뜀박질에 도달할 수 있을 듯도 한데 여전히 20리 길이다. 사람들 대부분이 반야봉과 천왕봉이 지리산에서 가장 높다고 하지만 반야봉이 약간 낮다. 그렇지만 높은 곳에 올라왔다면 낮은 곳 정도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4월 5일]
반야봉에서 하산하여 구산령(九山嶺)을 넘었다. 구례 당곡(堂谷)을 지나서 원(院)의 우측에 있는 주막에서 점심을 먹었다. 또 둔산령(屯山嶺)을 지나 남원 포암(包巖)에 도착하여 자경(子敬) 정영식(鄭泳寔) 집에서 묵었다. 비록 지리산을 전체를 속속들이 보지는 못했어도 대략은 보았다.
아래와 같은 시를 지었다.
백두산에서 흘러 내려온 맥이 남쪽 진주에 머물러 (白頭流脈鎭南州)
중국의 형산(衡山)과 짝을 이룰 만 하네 (中國衡山可與●)
만 골짜기에는 은하수가 걸려 있는 듯 물이 쏟아져 내리고 (萬壑皆懸銀漢瀑)
수 천 봉우리는 신선 사는 옥경루에 닿았다네 (千峯高逼玉京樓)
산의 정령(精靈)이 많은 현자를 배출하였고 (精靈幾毓群賢出)
골이 깊고도 넓어서 오곡을 경작할 수 있네 (深廣多治五穀疇)
산에 올라서 아래를 본다면 어진 사람 물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물을 좋아한다는 이치를 알겠으니 (登覽要知仁智術)
산을 보던 안 보던 간에 또한 부끄러움을 느끼리라 (看如不看也堪羞)
내가 옛적에 본 금강산과 지금 본 지리산을 비교한다면 금강산은 청초용발(淸●聳拔 : 맑고 곱고 봉우리들이 우뚝 솟아 있다)하고, 지리산은 웅고심수(雄高深邃 : 웅장하고 높고 계곡이 깊다)하면서 광대함은 금강산보다 낫다.
금강산은 청명(淸明)한 군자가 세속의 근심에서 벗어나 사람으로 하여금 세속의 잡념을 저절로 소멸되게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지리산은 장중(莊重)한 군자가 인격도 훌륭하고 지식도 풍부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속마음을 추측하게 어렵게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요컨대 배우는 이들은 모두 지리산을 취해서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다만 세상에서 말하는 삼신산(三神山)으로 따져 본다면 기형승상(奇形勝狀기이한 모양과 뛰어난 모습)은 당연히 금강산을 앞에 두어야 한다. 또 듣기로는, 영남과 호남사람들이 서로 지리산을 자기 고장에 속한다고 하면서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고 한다.
넓고 또는 좁게 터를 잡고 있는 암반과 산세(山勢)가 향하고 있는 방향으로 본다면 영남에 속함이 당연하고, 국가 전례(典禮)에서 남악(南嶽지리산)에 지내는 제사가 호남에서 실행된 것으로 본다면 호남에 속함이 당연하다. 이 산의 주맥(主脈)이 호남에서 시작하여 반야봉으로 들어가 주봉(主峯)을 일으키는데 앞장섰으니 역시 호남 땅에 있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 말하기를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던 날에 명산(名山)에 기도하였다. 여러 산의 산신령이 응답하였지만 유독 지리산 신령이 응답하지 않아 호남으로 유배보냈다.”고 하는데, 이것은 근거 없는 허튼 이야기에 속한다.
그렇지만 나는 또 일설(一說)이 있다. 지리산은 한결같이 중후하여 뒤틀린 기운이 없다. 특별히 비교해서 논한다면 반야봉은 다토소석(多土少石 : 흙이 많고 돌이 적음)이라 한결같이 수려하며, 천왕봉은 다석소토(多石少土 : 돌이 많고 흙이 적음)라 조금 낭떠러지 같은 큰 바위가 많다. 이것이 호남지역의 인심은 유순하고 영남지역의 인심은 모진 까닭이 아니겠는가?
지혜로운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다.
[4월 6일]
포암을 떠났다.
[4월 7일]
해질 무렵에 비로소 귀가하였다. 총 여행기간은 19일이다.
<두류산유록>을 우리말로 옮기신 임재완 님은, 현재 삼성미술관 '리움'의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첫댓글 눈에 익은 글귀가 여럿 보입니다.
요즘 회자되는 답사기 이 유산기에서 옮겨 온 문장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