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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六十一回 晉悼公駕楚會蕭魚 孫林父因歌逐獻公
제61회: 진도공이 소어에서 초왕과 만나고 손림보가 노래를 듣고 진헌공을 쫓아내다.
話說,晉及諸侯之兵,圍了偪陽城二十四日,攻打不下。忽然天降大雨,平地水深三尺。荀偃士匄二將,慮軍心有變,同至中軍來稟智罃曰:「本意謂城小易克。今圍久不下,天降大雨,又時當夏令,水潦將發。泡水在西,薛水在東,漷水在東北,三水皆與泗水相通。萬一連雨不止,三水橫溢,恐班師不便。不如暫歸,以俟再舉。」智罃大怒,取所憑之几,向二將擲之,罵曰:「老夫可曾說來,『城小而固,未易下也。』豎子自任可滅,在晉侯面前,一力承當。牽帥老夫,至於此地!攻圍許久,不見尺寸之效,偶然天雨,便欲班師。來由得你,去由不得你!今限汝七日之內,定要攻下偪陽。若還無功,照軍令狀斬首!速去!勿再來見!」
한편, 진나라와 제후들의 군사가 복양성을 포위한 지 24일이 지났으나 함락되지 않았다. 갑자기 하늘에서 큰비가 내려 평지에 물이 석 자 깊이로 차게 되었다. 순언과 사개 두 장수가 군심이 변할까 염려되어 함께 중군에 가서 지앵에게 말하기를, “본래 조그만 성이라서 쉽게 함락시킬 줄 알았습니다. 지금 복양성을 포위한 지 오래 되었으나 함락되지 않고, 하늘에서 큰비가 내리고 또 여름철에 접어들어 홍수가 날 것 같습니다. 우리 주둔지의 서쪽에 포수(泡水)가 있고, 동쪽에 설수(薛水)가 있으며, 동북쪽에 곽수(漷水)가 있어 이 세 강물이 모두 사수(泗水)와 통합니다. 만일 비가 계속 와서 세 강이 범람하면 그때는 군사를 퇴각시키기도 불편할까 걱정됩니다. 잠시 돌아갔다가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서 다시 공격하는 게 좋겠습니다.” 하니, 지앵이 크게 화를 내며 기대고 있던 안석을 두 장수를 향해 집어던지면서 꾸짖기를, “내가 이미 너희들에게 말하기를 ‘성은 비록 적지만 견고하여 쉽게 함락시킬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너희들이 주군 앞에서 복양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고 자임하여 이 늙은이를 여기까지 끌고 오지 않았느냐? 복양성을 포위하고 공격한 지가 오래 되었지만, 조그만 공도 세우지 못하고서 어쩌다 비를 만나 군사를 퇴각시키려고 하다니. 올 때는 너희들이 주장해서 왔지만, 갈 때는 너희들 주장대로는 못하겠다. 너희들은 오늘부터 7일 안에 반드시 복양성을 함락시켜야 한다. 만약 공을 세우지 못하면 군령장에 따라 참수하겠다. 속히 물러가서 다시 나를 보러 오지 말라!” 했다.
二將嚇得面如土色,喏喏連聲而退。謂本部軍將曰:「元帥立下嚴限,七日若不能破城,必取吾等之首。今我亦與爾等立限,六日不能破城,先斬汝等,然後自剄,以申軍法。」眾將皆面面相覷。偃匄曰:「軍中無戲言!吾二人當親冒矢石,晝夜攻之,有進無退。」約會魯、曹、邾三國,一齊并力。時水勢稍退,偃匄乘轈車,身先士卒,城上矢石如雨,全然不避。自庚寅日攻起,至甲午日,城中矢石俱盡。荀偃附堞先登,士匄繼之,各國軍將,亦乘勢蟻附而上。妘斑巷戰而死。智罃入城,偪陽君率群臣迎降於馬首。智罃盡收其族,留於中軍。計攻城至城破之日,纔五日耳。若非智罃發怒,此舉無功矣。
두 장수가 놀라 얼굴이 흙빛이 되어, 그저 “예, 예”하고, 물러 나왔다. 두 사람이 막하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원수께서 기일을 정하여 엄명을 내리셨다. 만일 7일 안에 성을 깨뜨리지 못하면 반드시 우리의 목을 치겠다고 했다. 지금 우리도 역시 너희들에게 기한을 정해 6일 이내에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면 먼저 너희들을 참하고 그런 후에 우리도 스스로 목을 찔러 군법에 따르겠다.” 했다. 여러 장수가 모두 얼굴만 서로 쳐다보았다. 순언과 사개가 말하기를, “군중에는 농담이 없다. 우리 두 사람이 마땅히 친히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주야로 공격하겠다. 전진만 있을 뿐 후퇴는 없다.” 하고, 노(魯), 조(曹), 주(邾) 세 나라의 군사들에게도 일제히 힘을 합치기로 약속했다. 물이 조금 빠졌을 때 순언과 사개가 망루차를 타고 사졸들에 앞서 공격하니, 복양성 위에서 화살과 돌이 비처럼 쏟아졌으나 전혀 피하지 않았다. 경인(庚寅) 날에 공격을 개시하여 갑오(甲午) 날에 이르자 복양성 안의 화살과 돌이 모두 바닥나게 되었다. 순언이 성벽을 타고 먼저 기어오르자 범개가 그 뒤를 따랐다. 각국의 장수와 병졸들도 역시 형세를 타고 개미 떼처럼 성벽에 붙어서 성 위로 기어 올라갔다. 운반은 시가전에서 전사했다. 지앵이 성안으로 들어가자 복양의 군주가 군신들을 거느리고 말 머리에서 항복했다. 지앵이 그 종족들을 모두 거두어 중군에 머물게 했다. 진(晉)나라 군사가 성을 재공격하여 함락시킬 때까지 겨우 닷새가 걸렸을 뿐이었다. 만약 지앵이 화를 내지 않았더라면 이 출병에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髯翁有詩云:「仗鉞登壇無地天,偏裨何事敢侵權?一人投杌三軍懼,不怕隆城鐵石堅。」時悼公恐偪陽難下,復挑選精兵二千人,前來助戰。行至楚邱,聞智罃已成大功,遂遣使至宋,以偪陽之地封宋向戌。向戌同宋平公親至楚邱來見晉侯。向戌辭不受封,悼公乃歸地於宋公。宋衛二君,各設享款待晉侯。智罃述魯三將之勇,悼公各賜車服,乃歸。悼公以偪陽子助楚,廢為庶人,選其族人之賢者,以主妘姓之祀,居於霍城。其秋,荀會卒,悼公以魏絳能執法,使為新軍副將。以張老為司馬。
염옹(髥翁)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군주의 명을 받고 단에 서면 천지에 무서울 게 없는데, 수하 장수가 어찌 감히 그 권한을 침범하겠는가? 대장군 한 사람이 안석을 던져 삼군을 떨게 하니, 우뚝 솟은 철옹성도 두려워하지 않았네.” 했다. 그때 진도공(晉悼公)은 복양성이 쉽게 함락되지 않자 걱정하여 다시 정예군사 2천 명을 선발하여 싸움울 도우러 나섰다. 진도공의 행렬이 위나라의 도성 초구(楚邱)에 이르렀을 때 지앵이 이미 큰 공을 세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진도공은 곧바로 사신을 송나라에 보내어 복양의 땅을 송나라 상술(向戌)에게 봉한다고 했다. 상술이 송나라 평공과 같이 초구에 와서 도공을 뵙고 복양성을 받을 수 없다고 사양했다. 그래서 진도공은 복양의 땅을 송나라 군주에게 돌려주었다. 송나라와 위나라의 제후들이 각각 잔치를 열어 진도공을 대접했다. 지앵이 진도공에게 복양성 전투에서 용감히 싸운 노나라의 세 장군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니, 진도공은 각각 수레와 의복을 하사하고 곧 돌아갔다. 진도공은 복양성의 군주가 초나라를 도왔다고 성주의 직에서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었다. 그 종족들 중에 현명한 자를 뽑아 운(妘)씨 성(姓)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곽성(霍城)에 살게 했다. 그해 가을 순회(荀會)가 죽자 진도공은 위강이 군법을 제대로 집행했다고 신군 부장으로 삼고, 장로를 사마로 삼았다.
是冬,第二軍伐鄭,屯於牛首,復添虎牢之戍。適鄭人尉止作亂,殺公子騑、公子發、公孫輒於西宮之朝。騑之子公孫夏字子西,發之子公孫僑字子產,各帥家甲攻賊,賊敗走北宮。公孫蠆亦率眾來助,遂盡誅尉止之黨,立公子嘉為上卿。欒黶請曰:「鄭方有亂,必不能戰,急攻之可拔也。」智罃曰:「乘亂不義。」命緩其攻。公子嘉使人行成,智罃許之。比及楚公子貞來救鄭,則晉師已盡退矣。鄭復與楚盟。傳稱:「晉悼公三駕服楚。」此乃「三駕」之一。周靈王九年事也。
그해 겨울, 제2군이 정나라를 치려고 우수(牛首)에 주둔하고 또 호뢰에 군사를 증파하여 수비하게 했다. 그때 정나라 대부 위지(尉止)가 난을 일으켜 공자 비(公子騑), 공자 발(公子發), 공자 첩(公子輒) 등을 서궁의 조당에서 죽였다. 공자비의 아들 자서(子西) 공손 하(公孫夏)와 공자 발의 아들 자산(子産) 공손 교(公孫僑)가 각기 문중의 사병을 동원하여 위지를 공격했다. 위지는 패하여 북궁으로 달아났다. 공손 채(公孫蠆)가 역시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도와서 마침내 위지의 무리를 죽이고, 공자 가(公子嘉)를 상경으로 세웠다. 난염(欒檿)이 청하기를, “정나라에 방금 변란이 일어났으니 틀림없이 싸울 수 없을 것입니다. 급히 공격하면 함락할 수 있습니다.” 하니, 지앵이 말하기를, “변란을 틈타서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정나라에 대한 공세를 늦추도록 했다. 공자 가가 사신을 보내어 화의를 청하자 지앵이 허락했다. 그때 초나라 공자 정(公子貞)이 정나라를 구원하러 오니 진(晉)나라 군사들은 이미 모두 물러가 버렸다. 그러자 정나라는 다시 초나라와 맹약을 맺었다. 전하기로 ‘진도공이 세 번이나 어가를 움직여 초나라를 굴복시켰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 세 번 중 첫 번째였다. 그것은 주영왕 9년(기원전 563년)의 일이었다.
明年夏,晉悼公以鄭人未服,復以第三軍伐鄭。宋向戌之兵,先至東門,衛上卿孫林父帥師同郳人屯於北鄙,晉新軍元帥趙武等,營於西郊之外,荀罃帥大軍自北林而西,揚兵於鄭之南門,約會各路軍馬,同日圍鄭。鄭君臣大懼,又遣使行成。荀罃又許之,乃退師於宋地。鄭簡公親至毫城之北,大犒諸軍,與荀罃等歃血為盟,晉宋各軍方散。此乃「三駕」之二。楚共王大怒,使公子貞往秦借兵,約共伐鄭。時秦景公之妹,嫁為楚王夫人,兩國有姻好。乃使大將嬴詹帥車三百乘助戰。共王親帥大軍,望滎陽進發,曰:「此番不滅鄭,誓不班師!」
다음 해 여름, 진도공은 정나라가 여전히 복종하지 않자 다시 제3군을 출동시켜 정나라를 쳤다. 송나라 상술의 군대가 먼저 정나라 도성의 동문에 당도하였고, 위나라 상경 손림보(孫林父)도 군사를 거느리고 예(郳)나라 군사들과 함께 정나라 북쪽 변경에 진영을 세웠다. 진나라 신군 원수 조무 등은 정나라 도성 서쪽 교외에 진을 치고, 지앵은 대군을 거느리고 북림(北林)에서 서쪽으로 우회하여 정나라 도성 남문 앞에 주둔한 후에, 각 방면의 군사와 약속하여 같은 날에 정나라를 포위하기로 했다. 정나라의 군주와 신하들이 크게 두려워하며 또 사신을 보내어 화의를 청했다. 순앵이 또 화의 신청을 받아들이고 곧바로 군사들을 송나라 땅으로 퇴군시켰다. 정간공이 친히 송나라의 박성(亳城) 북쪽에 와서 진나라와 제후국 군사들을 크게 호궤했다. 이어서 정간공은 순앵 등과 삽혈하고 맹약을 맺었고, 진나라와 송나라 등 각군은 흩어졌다. 이것이 세 번의 출병 중 두 번째였다. 초공왕이 대로하여 공자 정을 시켜 진(秦)나라에 가서 군사를 빌려서 함께 정나라를 치기로 약속했다. 그때 진경공(秦景公)의 누이가 초공왕의 부인이 되어 두 나라가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에 진경공은 대장 영첨(嬴詹)으로 하여금 전차 300대를 인솔하고 초나라를 돕게 했다. 초공왕도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형양성(滎陽城)을 향하여 출발하면서 말하기를, “이번에 정나라를 멸하지 않고는 맹세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했다.
卻說,鄭簡公自毫城北盟晉而歸,逆知楚軍旦暮必至,大集群臣計議。諸大夫皆曰:「方今晉勢強盛,楚不如也。但晉兵來甚緩,去甚速,兩國未嘗見個雌雄,所以交爭不息。若晉肯致死於我,楚力不逮,必將避之,從此可專事於晉矣。」公孫舍之獻策曰:「欲晉致死於我,莫如怒之。欲激晉之怒,莫如伐宋。宋與晉最睦,我朝伐宋,晉夕伐我。晉能驟來,楚必不能,我乃得有詞於楚也。」諸大夫皆曰:「此計甚善!」正計議間,諜人探得楚國借兵於秦的消息來報。公孫舍之喜曰:「此天使我事晉也!」眾人不解其意。
한편, 정간공은 박성 북쪽에서 진(晉)나라와 맹약을 맺고 귀국하여, 초나라 군사가 틀림없이 이를 것임을 예상하고, 군신들을 모아 계책을 의논했다. 여러 대부가 모두 말하기를, “바야흐로 진(晉)나라의 세력이 강성하여 초나라는 그보다 못합니다. 다만 진나라 군사들이 아주 느리게 왔다가 아주 빨리 가버리니, 두 나라가 아직 자웅을 결정하지 못해서 다툼이 끊이지 않습니다. 만약 진나라가 죽을힘을 다해 우리나라를 위하여 싸운다면 초나라는 당해 내지 못하고 반드시 싸움을 피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오로지 진나라를 섬겨야 합니다.” 했다. 공손사지(公孫舍之)가 계책을 드려 말하기를, “진나라가 우리나라를 위해서 온 힘을 다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격분시켜야 합니다. 진나라를 격분시키려면 송나라를 공격해야 합니다. 송나라와 진나라는 아주 친합니다. 우리가 아침에 송나라를 공격하면 진나라는 저녁에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진나라가 빨리 쳐들어온다면 초나라는 틀림없이 진나라를 당해 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초나라에 핑계를 댈 수 있습니다.” 하니, 여러 대부가 모두 말하기를, “그 계책이 매우 좋습니다.” 했다. 바로 계책을 의논하고 있을 때, 초나라가 진(秦)나라에 군사를 빌린 소식을 첩자가 탐지하여 알려왔다. 공손사지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하늘이 우리에게 진(晉)나라를 섬기라는 뜻이다!” 하니, 여러 사람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舍之曰:「秦楚交伐,鄭必重困。乘其未入境,當往迎之,因導之使同伐宋國。一則免楚之患,二則激晉之來,豈非一舉兩得?」鄭簡公從其謀,即命公孫舍之乘單車星夜南馳。渡了潁水,行不一舍,正遇楚軍,公孫舍之下車拜伏於馬首之前。楚共王厲色問曰:「鄭反覆無信,寡人正來問罪,汝來卻是何意?」舍之奏曰:「寡君懷大王之德,畏大王之威,所願終身宇下,豈敢離遏?無奈晉人暴虐,與宋合兵,侵擾無已。寡君懼社稷顛覆,不能事君,姑與之和,以退其師。晉師既退,仍是大王貢獻之邑也。恐大王未鑒敝邑之誠,特遣下臣奉迎,布其心腹。大王若能問罪於宋,寡君願執鞭為前部,稍效犬馬,以明誓不相背之意。」
공손사지가 말하기를, “진(秦)나라와 초나라가 함께 공격해오면 정나라는 아주 어렵게 됩니다. 국경에 들어오기 전에 마땅히 나가서 맞이하여 그들을 인도하여 함께 송나라를 쳐야 합니다. 그러면 첫째 초나라의 환란을 면할 수 있으며, 둘째 진(晉)나라를 격분시켜 달려오게 할 것이니, 어찌 일거양득이 아니겠습니까?” 했다. 정간공이 그 계책에 따라 즉시 공손사지에게 명하여 홀로 수레를 타고 밤새 남쪽으로 달려가게 했다. 공손사지가 영수(潁水)를 건너 30여 리도 못 가서 초나라 군사를 만나니, 수레에서 내려 초공왕의 어가 앞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초공왕이 얼굴에 노기를 띠고 묻기를, “정나라가 반복하여 신의가 없으니 내가 바로 와서 죄를 묻고자 한다. 네가 온 것은 무슨 뜻이냐?” 했다. 공손사지가 아뢰기를, “저희 주군께서는 대왕의 은혜를 생각하고 또 대왕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평생토록 폐하를 섬기고자 하며 어찌 감히 폐하의 그늘 밖으로 나가려 하겠습니까? 포학한 진(晉)나라가 송나라와 힘을 합쳐 끊임없이 쳐들어오니, 저희 주군은 사직이 뒤집힐까 두려워서 대왕을 섬기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잠시 그들과 화의를 맺어 그들의 군사들을 물러가게 했습니다. 진(晉)나라 군사가 이미 물러갔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여전히 대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초나라의 속국입니다. 대왕께서 우리들의 진실된 마음을 살피지 못할까 두려워서, 저를 특별히 보내 대왕을 영접하여 우리의 충정을 아뢰게 한 것입니다. 대왕께서 만약 송나라에 죄를 물으신다면 저희 군주께서는 대왕의 말채찍을 잡고 선봉이 되어 개와 말 같이 달려 맹세코 배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共王回嗔作喜曰:「汝君若從寡人伐宋,寡人又何說乎?」舍之又奏曰:「下臣束裝之日,寡君已悉索敝賦,俟大王於東鄙,不敢後也。」共王曰:「雖然如此,但秦庶長約在滎陽城下相會,須與同事方可。」舍之復奏曰:「雍州遼遠,必越晉過周,方能至鄭。大王遣一介之使,猶可及止。以大王之威,楚兵之勁,何必借助於西戎哉?」共王悅其言,果使人辭謝秦師,遂同公孫舍之東行。及有莘之野,鄭簡公帥師來會,遂同伐宋國,大掠而還。宋平公遣向戍如晉,訴告楚鄭連兵之事。悼公果然大怒,即日便欲興師。(此番又輪該第一軍出征了。)
초공왕이 성낸 표정을 기쁜 얼굴로 바꾸며 말하기를, “그대 군주가 만약 나를 따라 송나라를 친다면 과인이 또 무슨 말을 하겠는가?” 했다. 공손사지가 또 아뢰기를, “소신이 행장을 꾸려 떠나올 때 저희 군주께서는 이미 우리나라의 군사를 총동원하여 동쪽 국경에서 대왕을 기다리고 있사오니, 감히 뒤늦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초공왕이 말하기를,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진(秦)나라 서장(庶長)과 형양성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니 모름지기 함께해야 할 것이오.” 했다. 공손사지가 다시 아뢰기를, “옹주(雍州)는 멀고 반드시 진(晉)나라를 넘어 주나라를 지나야만 정나라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대왕께서 한 사람을 진(秦)나라에 보내시어 오히려 군사들의 행군을 중지시키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대왕의 위엄과 초나라 군사의 강함이 있는데, 하필 서융의 도움을 빌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초공왕이 그 말을 기쁘게 받아들여 과연 사람을 보내어 진(秦)나라 군사를 돌아가게 하고, 자기는 공손사지와 함께 동쪽으로 갔다. 곧 유신(有莘)의 들판에 이르렀을 때 정간공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초공왕을 만나 두 나라 군사가 함께 송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노략질하고 돌아갔다. 송평공이 상술을 진(晉)에 보내어 초나라와 정나라가 군사를 합하여 송나라를 침략한 일을 고했다. 진도공이 과연 크게 노하여 즉시 군사를 일으키려고 했다. (이번은 제1군이 출동할 차례였다.)
智罃進曰:「楚之借師於秦者,正以連年奔走道路,不勝其勞也。我一歲而再伐,楚其能復來乎?此番得鄭必矣。當示以強盛之形,堅其歸志。」悼公曰:「善。」乃大合宋、魯、衛、齊、曹、莒、邾、滕、薛、杞、小邾各國,一齊至鄭,觀兵於鄭之東門,一路俘獲甚眾。(此師乃「三駕」之三也。)鄭簡公謂公孫舍之曰:「子欲激晉之怒,使之速來,今果至矣,為之奈何?」舍之對曰:「臣請一面求成於晉,一面使人請救於楚。楚兵若能亟來,必當交戰,吾擇其勝者而從之。若楚不能至,吾受晉盟,因以重賂結晉,晉必庇我,又何楚之足患乎?」
지앵이 나와서 말하기를, “초나라가 진(秦)나라에서 군사를 빌리고자 한 것은 해마다 군사들을 출동시켜서 그 피로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 년에 두 번 정벌에 나선다면 초나라가 능히 다시 오겠습니까? 이번에는 반드시 정나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땅히 강한 모습을 보여서 그들이 귀속하려는 뜻을 굳혀야 합니다.” 하니, 진도공이 말하기를, “옳은 말씀이오!” 하고, 이에 송(宋), 노(魯), 위(衛), 제(齊), 조(曺) 거(莒), 주(邾), 등(滕), 설(薛), 기(杞), 소주(小邾=郳) 등 각국의 군사를 합쳐서 일제히 정나라에 이르러 신정성 동문 밖에서 위세를 보이고, 그 길로 많은 노략질을 했다. (이번의 출전은 세 번 출병 중 세 번째였다.) 정간공이 공손사지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진(晉)나라를 격분시켜 군사가 빨리 오게 했소. 지금 과연 이르렀으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하오?” 하니, 공손사지가 대답하기를, “신이 한편으로는 진(晉)나라와 화의를 청하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을 초나라에 보내 구원을 청하겠습니다. 초나라 군사가 만약 빨리 오면 반드시 교전할 것이니, 우리는 이긴 나라를 택하여 따르면 됩니다. 만약 초나라가 도착하지 않으면 우리는 진(晉)나라와 화친을 맺고 많은 뇌물을 바치면 진나라는 반드시 우리를 보호할 것입니다. 또 어찌 초나라를 걱정하겠습니까?” 했다.
簡公以為然。乃使大夫伯駢行成於晉﹔使公孫良霄太宰石㚟如楚告曰:「晉師又至鄭矣,從者十一國,兵勢甚盛,鄭亡已在旦夕。君王若能以兵威懾晉,孤之願也。不然,孤懼社稷不保,不得不即安於晉,惟君王憐之,恕之!」楚共王大怒,召公子貞問計。公子貞曰:「我兵乍歸,喘息未定,豈能復發?姑讓鄭於晉,後取之,何患無日!」共王餘怒未平,乃囚良霄石㚟於軍府,不放歸國。髯仙有詩云:「楚晉爭鋒結世仇,晉兵迭至楚兵休﹔行人何罪遭拘執?始信分軍是善謀。」
정간공이 그렇게 생각하여 곧 대부 백병(伯騈)을 시켜 진(晉)나라와 화의를 맺게 하고, 공손양소(公孫良霄)와 태재 석착(石𤟭)을 시켜 초나라에 고하기를, “진(晉)나라 군사가 또 우리나라에 쳐들어왔습니다. 열 한 나라의 제후들이 그를 따라 그 군세가 매우 성하여 정나라의 멸망이 아침저녁에 있습니다. 군왕께서 능히 군사적 위엄을 보여, 진(晉)나라를 두렵게 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희는 사직을 보존하지 못할까 두려워서 진나라에게 안전을 보장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대왕께서 가엽게 여기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했다. 초공왕이 크게 화를 내며 공자 정을 불러 계책을 묻자 공자 정이 말하기를, “우리의 병사들은 이제 막 돌아와서 숨도 고르지 못했습니다. 어찌 또 출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잠시 정나라를 진(晉)나라에 양보했다가 뒤에 다시 취한다면 어찌 날이 없다고 걱정하겠습니까?” 했다. 초공왕이 화를 삭이지 못하고 공손양소와 석착을 군부에 가두고 귀국시키지 않았다. 염선(髥仙)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초나라와 진나라가 다투어 대대로 원수가 되었는데, 진나라 군사는 달려왔으나 초나라 군사는 쉬어야 했다. 외교사절이 무슨 죄가 있다고 잡아 가두었는가? 참으로 먼저 군사를 나눈 것은 좋은 계책이었다.”라고 했다.
時晉軍營於蕭魚,伯駢來至晉軍,悼公召入,厲聲問曰:「汝以行成哄我,已非一次矣。今番莫非又是緩兵之計?」伯駢叩首曰:「寡君已別遣行人先告絕於楚,敢有二心乎?」悼公曰:「寡人以誠信待汝,汝若再懷反覆,將犯諸侯之公惡,豈獨寡人!汝且回去,與汝君商議詳確,再來回話。」伯駢又奏曰:「寡君薰沐而遣下臣,實欲委國於君侯,君侯勿疑。」悼公曰:「汝意既決,交盟可也。」乃命新軍元帥趙武,同伯駢入城,與鄭簡公歃血訂盟。簡公亦遣公孫舍之隨趙武出城,與悼公要約。
그때 진(晉)나라 군사는 소어(蕭魚)에 진영을 세웠는데, 정나라 사자 백병이 진나라 진영에 이르자, 진도공이 불러들여 성난 목소리로 묻기를, “너희들은 화의를 맺어 놓고도 나를 속인 것이 이미 한 번이 아니다. 이번에도 또 우리 군사의 공격을 늦추려는 계책이 아닌가?” 하니, 백병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저희 군주께서는 이미 별도로 초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맹약을 파기한다고 했습니다. 어찌 감히 두 마음을 품겠습니까?” 했다. 진도공이 말하기를, “내가 너희들을 성심과 신의로서 대했는데도, 너희가 다시 뒤집을 마음을 품었다면 장차 제후들의 공분을 살 것이다. 어찌 과인뿐이겠느냐? 너는 돌아가서 그대의 군주와 상의하여 상세하고 확실하게 뜻을 정하고 다시 와서 말하여라.” 하니, 백병이 다시 아뢰기를, “저희 군주께서는 향료를 옷에 뿌리고 머리를 감아 몸을 깨끗이 하고 소신을 보냈는데, 실은 정나라를 군후께 맡기려 하였습니다. 군후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했다. 진도공이 말하기를, “너희들의 뜻이 이미 정해졌다면 맹약을 맺도록 하겠다.” 하고, 이에 신군 원수 조무에게 명하여 백병과 같이 정나라 도성에 들어가서 정간공과 삽혈하고 맹약을 맺도록 했다. 정간공도 역시 공손사지에게 명하여 조무를 따라 성 밖으로 나가 진도공에게서 약속을 받아 오라고 했다.
是冬十二月,鄭簡公親入晉軍,與諸侯同會,因請受歃。悼公曰:「交盟已在前矣,君若有信,鬼神鑒之,何必再歃?」乃傳令:「將一路俘獲鄭人,悉解其縛,放歸本國。禁諸軍不得犯鄭國分毫,如有違者,治以軍法!虎牢戍兵,盡行撤去,使鄭人自為守望。」諸侯皆諫曰:「鄭未可恃也。倘更有反覆,重復設戍難矣。」悼公曰:「久勞苦諸國將士,恨無了期。今當與鄭更始,委以腹心,寡人不負鄭,鄭其負寡人乎?」乃謂鄭簡公曰:「寡人知爾苦兵,欲相與休息。今後從晉從楚,出於爾心,寡人不強。」
그해 겨울 12월에 정간공이 친히 진(晉)나라 군영에 들어가서 여러 제후와 만나서 삽혈하기를 청하였다. 진도공이 말하기를, “두 나라 간의 맹약은 전날에 이미 맺었습니다! 군주께서 만약 신의가 있다면 귀신이 굽어보고 있을 터인데, 어찌 다시 삽혈을 하겠습니까?” 하고, 이에 명령하기를, “길에서 붙잡은 정나라 사람들의 결박을 풀어서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동시에 군사들에게 정나라를 추호도 범하지 못하게 하고, 만일 위반하는 자가 있다면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또한 호뢰를 지키던 수비군들도 모두 철수시키고 정나라 군사들로 하여금 스스로 지키게 하라.”고 했다. 여러 제후가 모두 간하기를, “정나라는 아직 믿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다시 맹약을 뒤집는다면 다시 호뢰와 같은 수자리를 설치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했다. 진도공이 말하기를, “여러 나라의 군사들이 오랫동안 노고가 쌓였을 뿐만 아니라 언제 전쟁이 끝날지 기한도 정해지지 않아 한스러울 겁니다. 오늘 마땅히 정나라와 우호 관계를 다시 시작하는데, 나는 진심을 다하여 대하고자 합니다. 내가 정나라를 저버리지 않을 것인데 정나라가 나를 저버리기야 하겠습니까?” 했다. 다시 진도공은 정간공에게 말하기를, “나는 정나라가 싸움을 치르느라 고통을 받아서 서로 쉬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압니다. 이제부터는 정나라가 진나라를 섬기든 초나라를 섬기든 스스의 판단해야지, 나는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했다.
簡公感激流涕曰:「伯君以至誠待人,雖禽獸可格,況某猶人類,敢忘覆庇?再有異志,鬼神必殛!」簡公辭去。明日使公孫舍之獻賂為謝:樂師三人,女樂十六人,歌鐘三十二枚,鎛磬相副,針指女工三十人,軘車廣車共十五乘,他兵車復百乘,甲兵具備。悼公受之。以女樂八人,歌鐘十二,賜魏絳曰:「子教寡人和諸戎狄,以正諸華。諸侯親附,如樂之和,願與子同此樂也。」又以兵車三分之一,賜智罃曰:「子教寡人分軍敝楚,今鄭人獲成,皆子之功。」絳罃二將,皆頓首辭曰:「此皆仗君之靈,與諸侯之勞,臣等何力之有?」悼公曰:「微二卿,寡人不能至此,卿勿固卻。」乃皆拜受。
정간공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제후들의 우두머리이신 군후께서 지성으로 사람을 대하시니 비록 금수라도 감격할 텐데 하물며 저도 사람의 탈을 쓰고 감히 덮어주고 비호해줌을 잊겠습니까? 다시 다른 뜻을 가진다면 귀신이 반드시 죽일 것입니다.” 하고, 인사를 한 후 정나라로 돌아갔다. 다음날 공손사지를 시켜 사은의 예물로 악사 3인, 여자 악공 16인, 가종(歌鐘) 32개, 박경(鎛磬) 한 쌍, 바느질 잘하는 여인 30인, 돈거(軘車)와 광거(廣車) 50대, 갑옷과 무기를 적재한 수레 100대를 바쳤다. 도공이 예물들을 받아들여 그중 여자 악공 8인과 가종 12개를 위강에게 주며 말하기를, “그대가 나에게 융적의 여러 종족과 화의하도록 깨우쳐 주어 중화의 여러 나라를 바르게 이끌게 했소. 그 결과 여러 제후가 나의 옆에 모이게 해서 화락하게 되었소. 이 즐거움을 그대와 같이하고자 하오.” 하고, 또 병거 100대 중 삼분의 일을 떼어 순앵에게 하사하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과인에게 군사를 나누는 계책을 내어 초나라를 피폐하게 하여, 오늘 정나라와 화의를 맺게 되었소. 이것은 모두가 그대의 공이오.” 했다. 위강과 순앵 두 장군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양하기를, “이것은 모두가 주군의 영명하심과 제후들의 노고에 의지한 것이지 신 등이 무슨 힘을 썼겠습니까?” 했다. 진도공이 말하기를, “두 경이 아니었으면 과인이 이 일을 이루어내지 못했을 것이니, 경들은 결코 사양하지 마시오!” 하니, 이에 두 사람이 절하고 받았다.
於是十二國車馬同日班師。悼公復遣使行聘各國,謝其向來用師之勞,諸侯皆悅。自此鄭國專心歸晉,不敢萌二三之念矣。史臣有詩云:「鄭人反覆似猱狙,晉伯偏將詐力鋤。二十四年歸宇下,方知忠信勝兵戈。」時秦景公伐晉以救鄭,敗晉師於櫟,聞鄭已降晉,乃還。明年為周靈王十一年,吳子壽夢病篤,召其四子諸樊、餘祭、夷昧、季札至床前,謂曰:「汝兄弟四人,惟札最賢,若立之,必能昌大吳國。我一向欲立為世子,季札固辭不肯。我死之後,諸樊傳餘祭,餘祭傳夷昧,夷昧傳季札,傳弟不傳孫。務使季札為君,社稷有幸。違吾命者,即為不孝,上天不祐!」言訖而絕。
이에 열두 나라의 병사와 전차들은 같은 날 모두 돌아갔다. 진도공은 다시 사신을 각국에 보내어 군사를 출동시켜 준 노고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하니,제후들이 모두 기뻐했다. 이때부터 정나라는 오로지 마음을 다하여 진(晉)나라를 섬겨서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정나라가 이리저리 뒤집어서 원숭이 같았는데, 진나라 한 장군이 속이는 계책을 써서, 정나라를 24년 만에 당진의 품에 돌아오게 했다. 정성과 신의가 무기보다 낫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했다. 그때 진경공(秦景公)은 정나라를 구하려고 진(晉)나라를 쳐서 역(櫟)에서 진(晉)나라 수비군을 격파했으나 정나라가 진(晉)나라 군사에게 이미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돌아갔다. 그다음 해인 주영왕(周靈王) 11년에 오나라의 군주 수몽이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자, 네 아들 제번(諸樊), 여제(餘祭), 이매(夷昧), 계찰(季札) 등을 침상 앞으로 불러 당부하기를, “너희들 네 형제 중 오직 계찰이 가장 현명하다. 만약 그를 세우면 틀림없이 오나라를 크게 창성시킬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한결같이 계찰을 세자로 삼으려 했으나 계찰이 굳이 사양하였다. 내가 죽은 후에 제번은 여제에게 왕위를 전하고, 여제는 이매에게 전하고, 이매는 계찰에게 전하여, 아우에 전하고 자손에게 전하지 말아라. 그렇게 해서 계찰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하면 사직으로서는 다행일 것이다. 나의 명을 어긴다면 불효이니 하늘이 돕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이 끝나자 절명했다.
諸樊讓國於季札曰:「此父志也。」季札曰:「弟辭世子之位於父生之日,肯受君位於父死之後乎?兄若再遜,弟當逃之他國矣。」諸樊不得已,乃宣明次傳之約,以父命即位。晉悼公遣使弔賀。不在話下。又明年為周靈王十二年,晉將智罃、士魴、魏相,相繼而卒。悼公復治兵於綿山,欲使士匄將中軍,匄辭曰:「伯游長。」乃使中行荀偃代智罃之任,士匄為副。又欲使韓起將上軍,起曰:「臣不如趙武之賢。」乃使趙武代荀偃之任,韓起為副。欒黶將下軍如故,魏絳為副。其新軍尚無帥。
제번이 나라를 계찰에게 양보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부친의 뜻이다.” 하니, 계찰이 말하기를, “아우는 부왕이 살아 계실 때에 세자의 자리를 사양했었습니다. 부왕이 돌아가신 후에 제가 어찌 왕위를 받겠습니까? 형님께서 만약 다시 왕위를 물려주시겠다고 하면, 아우는 다른 나라로 도망가 버리겠습니다.” 했다. 제번은 할 수 없이 차례로 전하기로 약속을 밝히고 부왕의 명에 따라 오나라의 왕위에 올랐다. 진도공(晉悼公)이 수몽의 죽음에 대한 조문과 제번의 즉위에 대한 축하의 사절을 보냈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다시 그다음 해는 주영왕 12년인데, 진(晉)나라 장수 지앵(智罃), 사방(士魴), 위상(魏相)이 연이어 죽었다. 진도공이 다시 면산(綿山)에서 군사들을 열병하고 사개(士匄)에게 중군을 거느리게 하니, 사개가 사양하며 말하기를, “백유(伯游 ; 순언)가 저보다 연장입니다.” 했다. 이에 진도공이 중행 순언에게 지앵의 임무(중군 원수)를 대신하게 하고 사개를 부원수로 삼았다. 그리고 한기(韓起)를 상군 원수로 삼으려 하니, 한기가 말하기를, “신은 조무보다 어질지 못합니다.” 했다. 이에 조무에게 순언이 맡았던 상군 원수를 대신하게 하고, 한기를 부원수로 삼았다. 난염은 옛날처럼 하군 원수를 맡게 하고 위강을 부원수로 삼았다. 신군은 아직 장수가 없었다.
悼公曰「寧可虛位以待人,不可以人而濫位。」乃使其軍吏,率官屬卒乘,以附於下軍。諸大夫皆曰:「君之慎於名器如此。」乃各修其職,弗敢懈怠。晉國大治,復興文襄之業。未幾,廢新軍并入三軍,以守侯國之禮。是年秋九月,楚共王審薨,世子昭立,是為康王。吳王諸樊,命大將公子黨帥師伐楚。楚將養繇基迎敵,射殺公子黨,吳師敗還。諸樊遣使告敗於晉,悼公合諸侯於向以謀之。晉大夫羊舌肹進曰:「吳伐楚之喪,自取其敗,不足恤也。秦晉鄰國,世有姻好,今附楚救鄭,敗我師於櫟,此宜先報。若伐秦有功,則楚勢益孤矣。」
진도공이 말하기를. “차라리 자리를 비워두고 사람을 기다릴지언정, 자리 때문에 사람을 함부로 쓸 수는 없다.” 하고, 이에 군리(군 사무관)들로 하여금 그 관속과 군졸 및 전차들을 이끌고 하군에 붙게 하였다. 대부들이 모두 말하기를, “주군께서 군제(軍制)를 운용하는 데 신중하기가 이와 같구나!” 했다. 이에 진도공은 관리들에게 직책에 전념하여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게 했다. 진(晉)나라는 크게 다스려져 진문공과 진양공 때의 치세를 부흥시킬 수 있었다. 오래지 않아 신군을 폐하여 삼군에 편입시켜 제후국의 제도를 지켰다. 그해 가을 9월에 초공왕 심(審)이 죽고 세자 소(昭)가 섰다. 이가 초강왕(楚康王)이다. 오왕 제번이 대장 공자 당(黨)에게 명하여 초나라를 치게 했다. 초나라 장수 양요기가 적을 맞아 공자 당을 활로 쏘아 죽였다. 오나라 군사들은 패하여 돌아갔다. 오왕 제번이 사자를 진(晉)나라에 보내어 패전했음을 알렸다. 진도공이 제후들을 정나라 상(尙)에 모이게 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진나라 대부 양설힐(羊舌肹)이 나와 말하기를, “오나라가 초나라에 초상이 난 틈을 이용하여 공격하였다가 싸움에서 진 것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동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秦)나라는 우리나라와 이웃으로서 대대로 혼인하여 좋은 관계를 맺어 왔는데, 요즘에 초나라에 붙어 우리 군대를 역(櫟)에서 패배시켰으니, 이번에 마땅히 보복해야 합니다. 만약 진(秦)나라를 정벌하여 공을 이룬다면 초나라의 세력이 더욱 고립될 것입니다.” 했다.
悼公以為然。使荀偃率三軍之眾,同魯、宋、齊、衛、鄭、曹、莒、邾、滕、薛、杞、小邾十二國大夫伐秦。晉悼公待於境上。秦景公聞晉師將至,使人以毒藥數囊,沉於涇水之上流。魯大夫叔孫豹,同莒師先濟,軍士飲水中毒,多有死者。各軍遂不肯濟。鄭大夫公子蟜謂衛大夫北宮括曰:「既已從人,敢觀望乎?」公子蟜帥鄭師渡涇,北宮括繼之。於是諸侯之師皆進,營於棫林。諜報:「秦軍相去不遠。」荀偃令各軍「雞鳴駕車,視我馬首所向而行!」
진도공이 옳다고 생각하여, 순언을 시켜 삼군을 거느리고, 노(魯), 송(宋), 제(齊), 위(衛), 정(鄭), 조(曹), 거(莒), 주(邾), 등(滕), 설(薛), 기(杞), 소주(小邾) 등 12개국 대부들과 함께 진(秦)나라를 정벌하도록 했다. 진도공이 국경에서 기다리자, 진경공(秦景公)이 진(晉)나라 군사가 장차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시켜 독약이 든 포대 몇 개를 경수(涇水)의 상류에 가라앉혔다. 노나라 대부 숙손표(叔孫豹) 휘하의 군사들과 거나라 군사들이 함께 앞장서서 경수를 건너면서 물을 마셨다가 많은 군사들이 중독되어 죽었다. 이것을 본 다른 나라 군사들이 강을 건너려고 하지 않았다. 정나라 대부 공자교(公子蟜)가 위나라 대부 북궁괄(北宮括)에게 말하기를, “기왕에 남을 따라왔는데 어찌 보고만 있겠는가?” 하고, 공자교가 정나라 군사들을 거느리고 경수를 건너가자 북궁괄이 그 뒤를 따랐다. 이에 제후들의 군사들은 모두 나아가 역림(棫林)에 영채를 세웠다. 첩자가 보고하기를, “진(秦)나라 군사들이 멀지 않은 곳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하니, 순언이 각군에 명령을 내려 말하기를, “새벽닭이 울 때 전차를 타고 내 말의 머리가 향하는 곳으로 진군하라!” 했다.
下軍元帥欒黶,素不服中行偃,及聞令,怒曰:「軍旅之事,當集眾謀,即使偃能獨斷,亦宜明示進退,烏有使三軍之眾,視其馬首者?我亦下軍之帥也,我馬首欲東。」遂帥本部東歸。副將魏絳曰:「吾職在從帥,不敢俟中行伯矣。」亦隨欒黶班師。早有人報知中行偃。偃曰:「出令不明,吾實有過。令既不行,何望成功?」乃命諸侯之師,各歸本國,晉帥亦還。時欒鍼為下軍戎右,獨不肯歸,謂范匄之子范鞅曰:「今日之役,本為報秦,若無功而返,是益恥也。吾兄弟二人,並在軍中,豈可一時皆返?子能與我同赴秦師乎?」范鞅曰:「子以國恥為念,鞅敢不從!」乃各引本部馳入秦軍。
하군 원수 난염은 평소에도 중행언(순언)의 말에 복종하지 않았는데, 명령을 듣고는 화를 내어 말하기를, “군사에 관한 일은 마땅히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은 후에 결정해야 하고, 설사 순언이 독단하더라도 또한 진퇴를 명확히 밝혀야 하거늘, 어찌 삼군의 군사들에게 그의 말머리를 보라는 말인가? 나 역시 하군 원수라 나는 말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게 하겠다.” 하고, 즉시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돌아갔다. 하군 부장 위강이 말하기를, “내 직임이 하군 원수를 따르게 되어 있어서 감히 중행 원수를 따를 수 없구나!” 하고 역시 난염을 따라 군사를 돌렸다. 어느새 어떤 사람이 중행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중행언이 말하기를, “내가 명령을 분명치 않게 했으니 그 허물은 나에게 있다. 명령이 실행되지 않았으니 어찌 공을 세우기를 바라겠는가?” 하고, 제후국들의 군사들에게 각기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진(晉)나라 군사들 역시 돌아갔다. 그때 난침(欒鍼)이 하군의 융우(戎右 ; 장수의 오른쪽에 탄 무사)였는데, 혼자 회군하려 하지 않고 범개(사개)의 아들 범앙에게 말하기를, “오늘의 전쟁은 진(秦)나라에 보복하려는 것인데, 만약 공도 없이 돌아가면 이는 더욱 부끄러운 일이라. 우리 형제 두 사람이 함께 군중에 있으면서 어찌 한꺼번에 모두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대는 나와 함께 진(秦)나라 군사에게 달려들 수 있겠는가?” 하니, 범앙이 말하기를, “그대가 나라의 치욕을 생각하니, 내가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는가?” 하고, 곧 두 사람은 각각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진(秦)나라 군영으로 달려들었다.
卻說,秦景公引大將嬴詹及公子無地,帥車四百乘,離棫林五十里安營,正遣人探聽晉兵進止。忽見東角塵頭起處,一彪車馬飛來,急使公子無地率軍迎敵。欒鍼奮勇上前,范鞅助之,連刺殺甲將十餘人。秦軍披靡欲走,望其後軍無繼,復鳴鼓合兵圍之。范鞅曰:「秦兵勢大,不可當也!」欒鍼不聽。嬴詹大軍又到,欒鍼復手殺數人,身中七箭,力盡而死。范鞅脫甲,乘單車疾馳得免。欒黶見范鞅獨歸,問曰:「吾弟何在?」鞅曰:「已沒於秦軍矣!」黶大怒,拔戈直刺范鞅。鞅不敢相抗,走入中軍。黶隨後趕到,鞅避去。
한편, 진경공(秦景公)은 대장 영첨(嬴詹)과 공자무지(公子無地)로 하여금 전차 400대를 이끌고 역림(棫林)에서 50리 되는 곳에 영채를 세워 주둔하도록 하고, 사람을 보내 진(晉)나라 군사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 갑자기 진영 동쪽 끝에서 먼지가 일어나더니 한 떼의 전차가 나는 듯이 달려들었다. 진경공이 급히 공자무지를 시켜 군사들을 이끌고 적을 맞이하도록 했다. 난침이 용기를 내어 앞으로 달려들자 범앙이 그를 도와서, 연달아 무장한 장수 10여 인을 창으로 찔러 죽였다. 진(秦)나라 군사가 당하지 못하고 후퇴하려고 하다가 적장의 뒤에 후속부대가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 다시 북을 울려 군사들을 모아 그들을 에워쌌다. 범앙이 말하기를, “진(秦)나라의 군세가 커서 우리가 당할 수 없소.” 했으나 난침은 듣지 않았다. 영첨이 대군을 몰고 도착하니, 난침은 다시 몇 사람을 죽였으나 몸에 화살을 7대나 맞고 힘이 다해 죽었다. 범앙은 갑옷을 벗어버리고 작은 수레에 올라 질주하여 포위망을 뚫고 나왔다. 난염이 혼자 돌아온 범앙에게 묻기를, “내 동생은 어디에 있는가?” 하니, 범앙이 말하기를, “이미 진(秦)나라 군중에서 죽었습니다.” 했다. 난염이 대로하여 과를 잡고 범앙을 찌르려 했다. 범앙이 감히 대항할 수 없어 중군 막사 안으로 도망쳤다. 난염이 뒤를 쫓자 범앙은 피하여 달아났다.
其父范匄迎謂曰:「賢婿何怒之甚也?」(黶妻欒祁,乃范匄之女,故以婿呼之。)黶怒氣勃勃,不能制,大聲答曰:「汝子誘吾弟同入秦師,吾弟戰死,而汝子生還,是汝子殺吾弟也。汝必逐鞅,猶可恕,不然,我必殺鞅,以償吾弟之命!」范匄曰:「此事老夫不知也,今當逐之。」范鞅聞其語,遂從幕後出奔秦國。秦景公問其來意,范鞅敘述始末。景公大喜,待以客卿之禮。一日,問曰:「晉君何如人?」對曰:「賢君也,知人而善任。」又問:「晉大夫誰最賢?」
범앙의 부친 범개(사개)가 난염을 맞으면서 말하기를, “사위는 어찌 화를 그리 심하게 내는가?” 했다. (난염의 처 난기(欒祁)는 곧 범개의 딸이었기 때문에 사위라고 부른 것이다.) 난염이 노기를 펄펄 내어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대답하기를, “그대의 아들이 제 동생을 꾀어서 진(秦)나라 진영으로 들어갔다가 내 동생은 전사하고 그대의 아들은 살아서 돌아왔으니, 그것은 그대의 아들이 제 동생을 죽인 것입니다. 그대께서 반드시 범앙을 다른 나라로 쫓아내야만 제가 화를 풀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반드시 범앙을 죽여서 제 동생의 목숨을 보상받을 것입니다.” 했다. 범개가 말하기를, “이 일은 늙은이가 모르지만 지금 당장 쫓아내겠다.” 했다. 범앙이 그 말을 듣고 막사의 후문을 나와 진(秦)나라로 도망쳤다. 진경공(秦景公)이 범앙이 찾아온 이유를 물으니, 범앙이 일의 시말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진경공이 대단히 기뻐하며 범앙을 객경의 예로써 대하였다. 어느 날 진경공이 범앙에게 묻기를, “진(晉)나라 군주는 어떤 사람이오?” 하니, 범앙이 대답하기를, “어진 군주입니다. 사람을 알아서 일을 잘 맡깁니다.” 했다. 진경공이 또 묻기를, “진(晉)나라 대부 중에 누가 가장 현명하오?” 했다.
對曰:「趙武有文德,魏絳勇而不亂,羊舌肹習於《春秋》,張老篤信有智,祁午臨事鎮定,臣父匄能識大體,皆一時之選。其他公卿,亦皆習於令典,克守其官,鞅末敢輕議也。」景公又曰:「然則晉大夫中,何人先亡?」鞅對曰:「欒氏將先亡。」景公曰:「豈非以汰侈故乎?」范鞅曰:「欒黶雖汰侈,猶可及身,其子盈必不免。」景公曰:「何故?」鞅對曰:「欒武子恤民愛士,人心所歸,故雖有弒君之惡,而國中不以為非,戴其德也。思召公者,愛及甘棠,況其子乎?黶若死,盈之善未能及人,而武之德已遠,修黶之怨者,必此時矣。」
범앙이 대답하기를, “조무는 글을 잘하고 덕이 많은 사람입니다. 위강은 용기가 있지만 어지럽지 않으며, 양설힐은 역사에 밝습니다. 장로는 믿음이 깊고 지혜가 있으며, 기오(祁午)는 일에 임하여 결코 허둥대는 법이 없고, 신의 부친 범개는 일의 요체를 능히 식별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한 시대의 우수한 인재들입니다. 그 밖의 공경대부들 역시 모두 정령과 법규에 익숙하여 그 맡은 바 직책을 잘 해내고 있습니다. 제가 감히 더는 가볍게 논할 수 없습니다.” 했다. 진경공이 또 말하기를, “그렇다면 진(晉)나라의 대부 중에 어떤 사람이 먼저 망하겠소?” 하니, 범앙이 대답하기를, “난씨가 장차 먼저 망할 것입니다.” 했다. 진경공이 말하기를, “그것은 너무 교만하기 때문이 아니오?” 하니, 범앙이 말하기를, “난염이 비록 교만하지만 오히려 그 몸에는 화가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 난영(欒盈)은 틀림없이 그 화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했다. 진경공이 말하기를, “무엇 때문이오?” 하니, 범앙이 대답하기를, “난무자(난서)는 백성들을 돌보고 선비들을 사랑하여 백성들로부터 인심을 얻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비록 군주를 죽인 죄를 지었지만, 나라 안에서는 그것을 비난하지 않았고 그의 덕을 공경했습니다. 옛날 주(周)나라 소공(召公)을 사모하던 사람들이 소공이 쉬었던 감당나무까지 사랑했습니다. 하물며 그 자식이겠습니까? 그러나 난염이 죽게 되면 난영의 선행은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고, 난서의 덕도 이미 먼 일이 되었기 때문에 난염에게 원한을 갚고자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들고일어날 것입니다.” 했다.
景公嘆曰:「卿可謂知存亡故者也!」乃因范鞅而通於范匄,使庶長武聘晉,以修舊好,并請復范鞅之位。悼公從之,范鞅歸晉。悼公以鞅及欒盈並為公族大夫,且諭欒黶勿得修怨。自此秦晉通和,終春秋之世,不相加兵。有詩為證:「西鄰東道世婚姻,一旦尋仇鬥日新,玉帛既通兵革偃,從來好事是和親。」是年欒黶卒,子欒盈代為下軍副將。話分兩頭。卻說,衛獻公名衎,自周簡王十年,代父定公即位。因居喪不戚,其嫡母定姜,逆知其不能守位,屢屢規諫,獻公不聽。及在位,日益放縱,所親者無非讒諂面諛之人,所喜者不過鼓樂田獵之事。
진경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경은 가히 존망의 까닭을 안다고 하겠소.” 했다. 이에 범앙으로 인하여 범개와 통하려고 서장(庶長) 무(武)를 사절로 진(晉)나라로 보내어 옛날처럼 수호를 맺고 다시 범앙의 작위를 돌려 달라고 청했다. 진도공(晉悼公)이 허락하여 범앙은 진나라로 돌아갔다. 진도공은 범앙과 난영을 공족대부로 삼고 또 난염에게 원한을 풀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후로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통하여 화친하고 춘추시대가 끝날 때까지 서로 군사를 동원하지 않았다. 시가 있어 이를 증언하는데, “동서의 이웃 나라가 대대로 혼인을 맺어오다가, 하루아침에 원수가 되어 매일 서로 싸우게 되었으나, 예물이 오고 가며 전쟁이 그쳤으니, 옛날부터 좋은 일은 이웃끼리 화친함이라.” 했다. 그 해에 난염이 죽고 그 아들 난영(欒盈)이 대신하여 하군 부장을 맡았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 위헌공(衛獻公)의 이름은 간(衎)인데, 주간왕(周簡王) 10년에 그의 부친 위정공(衛定公)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위헌공은 상중에 있으면서도 슬퍼하지 않았다. 그의 모친 정강(定姜)은 그가 자리를 지키지 못할 것을 미리 알고, 누누이 옳은 말로 간했지만, 위헌공이 듣지 않았다. 위헌공이 군주 자리에 올라 날이 갈수록 방종해졌고, 그가 친한 자는 모략하고 아첨하는 자가 아닌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즐겨 하는 일은 북을 치거나 사냥을 하는 것밖에 없었다.
自定公之世,有同母弟公子黑肩,怙寵專政。黑肩之子公孫剽,嗣父爵為大夫,頗有權略。上卿孫林父,亞卿寧殖,見獻公無道,皆與剽結交。林父又暗結晉國為外援,將國中器幣寶貨,盡遷於戚,使妻子居之。獻公疑其有叛心,一來形跡未著,二來畏其強家,所以含忍不發。忽一日,獻公約孫寧二卿共午食。二卿皆朝服待命於門,自朝至午,不見使命來召,宮中亦無一人出來,二卿心疑。看看日斜,二卿飢困已甚,乃叩宮門請見。守閽內侍答曰:「主公在後圃演射,二位大夫若要相見,可自往也。」孫寧二人心中大怒,乃忍飢逕造後圃,望見獻公方帶皮冠,與射師公孫丁較射。
위정공의 치세 때는 그의 동모제인 공자 흑견이 형의 총애를 믿고 정사를 독단했었다. 흑견의 아들 공손 표(公孫剽)가 부친의 작위를 이어받아 대부가 되어, 제법 권모와 지략이 있었다. 상경 손림보와 아경 영식(寧殖)은 위헌공의 무도함을 보고 공손표와 손을 잡았다. 손림보는 또한 비밀리에 진(晉)나라와 내통해 밖으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했다. 그리고 나라 안의 명기와 폐백 및 보물들을 모두 척(戚)땅에 옮기고 처자들을 살게 했다. 위헌공이 손림보가 반심을 품고 있다고 의심하였으나 첫째는 증거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고, 둘째는 그의 큰 세력을 두려워하여 참았다. 갑자기 어느 날 위헌공이 손림보와 영식 두 경과 점심을 같이하기로 약속했다. 두 경이 모두 조복을 입고 궁문 앞에서 명을 기다렸으나 아침부터 정오에 이르기까지 부르러 오는 사람이 없었고, 또한 궁중에서도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없어서. 두 경이 마음속으로 의심했다. 어느덧 해가 기울어 두 경은 허기가 심해졌다. 그래서 그들은 궁문을 두드려 뵙기를 청했다. 궁문을 지키는 내시가 대답하기를, “주공께서 후원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고 계시니 두 분 대부들께서 뵙기를 원하시면 직접 찾아가십시오.” 했다. 손림보와 영식이 마음속으로 크게 노하여 배고픔을 참고 궁궐의 후원으로 곧바로 들어가니 헌공은 가죽 모자를 쓰고 활 선생인 공손정(公孫丁)과 함께 활쏘기 내기를 하고 있었다.
獻公見孫寧二人近前,不脫皮冠,掛弓於臂而見之,問:「二卿今日來此何事?」孫寧二人齊聲答曰:「蒙主公約共午食,臣等伺候至今,腹且餒矣。恐違君命,是以來此。」獻公曰:「寡人貪射,偶爾忘之。二卿且退,俟改日再約可也。」言罷,適有鴻雁飛鳴而過,獻公謂公孫丁曰:「與爾賭射此鴻。」孫寧二人,含羞而退。林父曰:「主公耽於遊戲,狎近群小,全無敬禮大臣之意。我等將來必不免於禍,如何?」寧殖曰:「君無道,止自禍耳,安能禍人?」林父曰:「我意欲奉公子剽為君,子以為何如?」寧殖曰:「此舉甚當,你我相機而動便了。」言罷各別。
위헌공이 손림보와 영식 두 사람이 앞으로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가죽 모자를 벗지 않고 활을 어깨에 걸치고 그들을 보면서 묻기를, “두 경들이 오늘 여기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하니, 손림보와 영식 두 사람이 일제히 대답하기를, “주공께서 점심을 함께하자고 약속하여 저희는 지금껏 기다리느라 배를 주렸습니다. 그러나 주군의 명을 어길까 걱정하여 이렇게 왔습니다.” 했다. 위헌공이 말하기를, “과인이 활쏘기에 몰두하여 그대들을 잊어버리고 있었소. 두 분 경들께서는 물러가시오. 내가 날짜를 다시 잡아 약속하지요.” 했다. 위헌공이 말을 마치자, 그때 마침 기러기가 울면서 날아가고 있었다. 위헌공이 공손정에게 말하기를, “그대와 저 기러기를 쏘아 맞추는 내기를 합시다.” 했다. 손림보와 영식 두 사람은 부끄러워하며 물러나왔다. 손림보가 말하기를, “주공이 유희에 탐닉하고 소인배들을 가까이하여 대신들의 뜻을 전혀 존중하지 않으니, 우리는 장차 틀림없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니, 어찌해야 하겠소?” 하니, 영식이 말하기를, “주군이 무도하니 스스로 화를 그치게 해야 할 뿐이오. 어찌 화를 당하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했다. 손림보가 말하기를, “나는 공자표(公子剽)를 군주로 받들고 싶은데 그대의 뜻은 어떻소?” 하니, 영식이 말하기를, “그렇게 함이 아주 마땅합니다. 우리가 기회를 보아 움직이면 편할 것입니다.” 하고, 말을 마치자 각기 헤어졌다.
林父回家,飯畢,連夜逕往戚邑,密喚家臣庾公差尹公佗等,整頓家甲,為謀叛之計。遣其長子孫蒯,往見獻公,探其口氣。孫蒯至衛,見獻公於內朝,假說:「臣父林父,偶染風疾,權且在河上調理,望主公寬宥。」獻公笑曰:「爾父之疾,想因過餓所致,寡人今不敢復餓子。」命內侍取酒相待,喚樂工歌詩侑酒。太師請問:「歌何詩?」獻公曰:「《巧言》之卒章,頗切時事,何不歌之?」太師奏曰:「此詩語意不佳,恐非歡宴所宜。」師曹喝曰:「主公要歌便歌,何必多言!」原來師曹善於鼓琴,獻公使教其嬖妾,嬖妾不率教,師曹鞭之十下。
손림보가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끝내고 밤이 되자 바로 척읍으로 달려가서 가신 유공차(庾公差)와 윤공타(尹公佗)를 몰래 불러 가병들을 정돈시켜 모반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큰아들 손괴(孫蒯)를 헌공에게 보내 기색을 탐지하게 했다. 손괴가 위나라 도성으로 들어가 조당에서 위헌공을 뵙고 거짓으로 말하기를, “신의 부친 손림보가 우연히 감기가 들어, 잠시 하상(河上)에서 몸조리를 하고 있습니다. 주공께서 너그러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위헌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의 부친이 아픈 것은 생각건대 너무 배를 곯았기 때문일 것이다. 과인이 오늘 또 그 아들을 굶길 수야 없지.” 하고 내시에게 명하여 술을 가져와 접대하고 악공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여 술을 권했다. 태사(太師)가 묻기를, “무슨 노래를 부를까요?” 하니, 위헌공이 말하기를, “<교언(巧言)>의 마지막 장은 자못 요즘 일에 절실하니 어찌 그 노래를 부르지 않느냐?” 했다. 태사가 아뢰기를, “그 시어의 뜻이 좋지 않으니, 즐거운 연회에 마땅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하니, 사조(師曹)가 꾸짖기를, “주공께서 노래를 부르라 하면 부를 것이지 어찌 잔말이 많으냐?” 했다. 원래 사조는 거문고 연주에 정통했다. 위헌공이 그를 시켜 애첩에게 거문고를 가르치게 하자, 사조가 위헌공의 애첩을 채찍으로 열 대를 때렸다.
妾泣愬於獻公,獻公當嬖妾之前,鞭師曹三百,師曹懷恨在心,今日明知此詩不佳,故意欲歌之,以激孫蒯之怒。遂長聲而歌曰:「彼何人斯,居河之糜?無拳無勇,職為亂階。」獻公的主意,因孫林父居於河上,有叛亂之形,故借歌以懼之。孫蒯聞歌,坐不安席,須臾辭去。獻公曰:「適太師所歌,子與爾父述之。爾父雖在河上,動息寡人必知,好生謹慎,將息病體。」孫蒯叩頭,連聲「不敢」而退。回戚,述於林父。林父曰:「主公忌我甚矣!我不可坐而待死。大夫蘧伯玉,衛之賢者,若得彼同事,無不濟矣。」
애첩이 눈물을 흘리며 위헌공에게 호소하자, 위헌공이 애첩 앞에서 사조를 채찍으로 3백 대를 때렸다. 사조는 가슴속에 한을 품고 있었다. 오늘 그 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나, 일부러 노래를 부르게 하여 손괴의 분노를 격동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마침내 목소리를 길게 하여 노래하기를, “저 사람은 누구인가? 강물 가에 산다고 하네! 완력도 용기도 없으면서, 오로지 분란의 불씨를 일구네!” 했다. 위헌공의 주된 뜻은 손림보가 하상에 머물면서 모반을 꾀한다고 생각하여 일부러 그 노래를 빌려서 두렵게 하려는 것이었다. 손괴가 노래를 듣고 좌불안석이 되어 곧 인사하고 물러가려 하니, 위헌공이 말하기를, “마침 태사가 노래한 것은 그대와 네 부친을 서술한 것이다. 네 부친이 비록 하상에 있다 하지만 그 거동을 과인은 틀림없이 알고 있다. 잘 근신해야 장차 병이 낫지 않겠는가?” 했다. 손괴가 머리를 조아리며 연달아 말하기를, “감히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물러났다. 손괴가 척읍으로 돌아와 손림보에게 서술하니, 손림보가 말하기를, “주공이 나를 아주 미워하는구나! 내가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다. 대부 거백옥(蘧伯玉)은 위나라의 현자이니, 만약 그를 얻어 함께 거사하면 성공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했다.
乃私至衛,往見蘧瑗曰:「主公暴虐,子所知也。恐有亡國之事,將若之何?」瑗對曰:「人臣事君,可諫則諫,不可諫則去之,他非瑗所知矣。」林父度瑗不可動,遂別去。瑗即日逃奔魯國。林父聚徒眾於邱宮,將攻獻公。獻公懼,遣使至邱宮,與林父講和,林父殺之。獻公使視寧殖,已戒車將應林父矣。乃召北宮括,括推病不出。公孫丁曰:「事急矣!速出奔,尚可求復。」獻公乃集宮甲約二百餘人,為一隊,公孫丁挾弓矢相從,啟東門而出,欲奔齊國。孫蒯孫嘉兄弟二人,引兵追及於河澤,大殺一陣,二百餘名宮甲,盡皆逃散,存者僅十數人而已。賴得公孫丁善射,矢無虛發,近者輒中箭而死,保著獻公,且戰且走。
손림보는 곧 아무도 몰래 위나라 도성에 가서 거원(거백옥)을 만나 말하기를, “주공이 포학한 것은 그대도 아시는 바입니다. 아마도 나라가 망할 것인데 장차 어찌해야 하지요?” 하니, 거원이 말하기를, “신하가 군주를 모시는 법은 간할 만하면 간하고, 간할 수 없으면 떠나는 것이오, 다른 것은 내가 아는 바가 아니오.” 했다. 손림보는 거원을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이별하고 갔다. 거원은 그날로 노나라로 달아났다. 손림보가 가병들을 구궁(邱宮)에 모아 장차 위헌공을 공격하려고 했다. 위헌공이 두려워하여 사자를 구궁에 보내 손림보와 화의를 맺자고 했으나, 손림보는 그를 죽였다. 위헌공은 다시 사자를 보내 영식을 살펴보게 하니, 이미 전차로 순림보에게 호응하려고 했다. 이에 북궁괄(北宮括)을 불렀으나, 북궁괄이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나오지 않았다. 공손정(公孫丁)이 말하기를, “일이 급합니다! 빨리 달아나서 후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하니, 위헌공이 즉시 궁궐을 지키는 무장병 200여 명을 모아 한 무리를 만들고, 공손정이 활과 화살을 차고 따르게 하여, 동문을 열고 나와서 제나라로 달아나려고 했다. 손괴와 손가(孫嘉) 두 형제가 군사들을 이끌고 위헌공의 뒤를 쫓아가 하택(河澤)에서 따라잡아 한 떼의 군사를 죽였다. 2백여 명의 무장병은 모두 흩어지고 남은 자는 겨우 10여 명뿐이었다. 그러나 공손정의 활 솜씨는 헛되이 쏘는 법이 없어 가까이 오는 자는 명중시켜 죽이고 위헌공을 보호하여 싸우면서 달아났다.
二孫不敢窮追而返。纔回不上三里,只見庾公差尹公佗二將,引兵而至,言:「奉相國之命,務取衛侯回報。」孫蒯孫嘉曰:「有一善箭者相隨,將軍可謹防之!」庾公差曰:「得非吾師公孫丁乎?」原來尹公佗學射於庾公差,公差又學射於公孫丁,三人是一線傳授,彼此皆知其能。尹公佗曰:「衛侯前去不遠,姑且追之。」約馳十五里,趕著了獻公。因御人被傷,公孫丁在車執轡,回首一望,遠遠的便認得是庾公差了,謂獻公曰:「來者是臣之弟子,弟子無害師之事,主公勿憂。」乃停車待之。庾公差既到,謂尹公佗曰:「此真吾師也。」乃下車拜見。公孫丁舉手答之,麾之使去。
손씨 형제는 감히 끝까지 추격하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그들이 겨우 3리도 가지 않을 때 유공차(庾公差)와 윤공타(尹公佗) 두 장수가 군사를 이끌고 오는 것을 보았다. 두 장수가 말하기를, “상국의 명령을 받들어 위후를 붙잡아 돌아가려고 합니다.” 했다. 손괴와 손가가 말하기를, “활을 잘 쏘는 사람이 따르고 있어서 장군은 조심해서 막아야 할 것이오.” 하니, 유공차가 말하기를, “아마 나의 스승 공손정이 아닐까요?” 했다. 원래 윤공타는 유공차에게서 활쏘기를 배웠고, 유공차는 또 공손정에게서 활쏘기를 배워서 세 사람은 한 줄로 전수하여 피차 모두 그 활 솜씨를 알고 있었다. 윤공타가 말하기를, “위후가 멀리 도망가지 못한 것 같으니 잠시 쫓아가겠습니다.” 하고, 약 15리를 달려가니 위헌공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때 위헌공의 마부가 부상을 당하여 공손정이 말고삐를 잡고 수레를 몰았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 공손정은 멀리서 유공차를 알아보고 위헌공에게 말하기를, “쫓아오는 자가 신의 제자입니다. 제자가 스승을 해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공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했다. 이에 수레를 멈추고 기다렸다. 유공차 일행이 도착하여 윤공타에게 말하기를, “이분은 틀림없는 내 스승이구나.” 하고, 곧 수레에서 내려 절하고 뵈었다. 공손정이 손을 들어 답례하며 다시 손을 저어 돌아가라고 했다.
庾公差登車曰:「今日之事,各為其主。我若射,則為背師,若不射,則又為背主,我如今有兩盡之道。」乃抽矢叩輪,去其鏃,揚聲曰:「吾師勿驚!」連發四矢,前中軾,後中軫,左右中兩旁,單單空著君臣二人,分明顯個本事,賣個人情的意思。庾公差射畢,叫聲:「師傅保重!」喝教回車。公孫丁亦引轡而去。尹公佗先遇獻公,本欲逞藝,因庾公差是他業師,不敢自專﹔回至中途,漸漸懊悔起來,謂庾公差曰:「子有師弟之分,所以用情,弟子已隔一層,師恩為輕,主命為重。若無功而返,何以復吾恩主?」庾公差曰:「吾師神箭,不下養繇基,爾非其敵,枉送性命!」尹公佗不信庾公之言,當下復身來追衛侯。
유공차가 수레에 올라타며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각기 그 주인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약 활을 쏘면 스승을 배신하는 것이고, 만약 쏘지 않으면 또한 주인을 배신하는 것입니다. 지금 양쪽에 의리를 다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고, 화살을 뽑아 수레바퀴에 두드려 화살촉을 떼어 내더니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스승님은 놀라지 마십시오!” 하고, 연달아 4개의 화살을 날려서 공손정이 타고 있던 수레 전면의 횡목(橫木)과 후면의 가로목 좌우 양쪽에 명중시키고, 위헌공과 공손정을 맞추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히 공무도 수행했지만, 개인적 정리도 표시한 것이었다. 유공차는 4개의 화살을 쏜 다음, 큰소리로 외치기를, “스승님은 몸조심하십시오.” 하고, 수레를 돌리라고 고함쳤다. 공손정도 역시 고삐를 당겨 가버렸다. 윤공타는 처음부터 위헌공을 따라잡은 후에 자기의 궁술을 발휘하려 했는데, 유공차가 그의 스승을 살려주었기 때문에 감히 제 맘대로 할 수 없어 돌아가는 길에 점점 후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윤공타가 유공차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사제지간의 정이 있어서 온정을 베풀었다 하겠지만, 저는 이미 사이가 한 층 떠서 스승의 은혜는 가볍고, 주인의 명령은 무겁습니다. 만약에 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무슨 면목으로 은혜로운 주인을 뵙겠습니까?” 하니, 유공차가 말하기를, “내 스승은 귀신같은 활 솜씨라 양요기(養繇基)에 뒤지지 않아서 너는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하니 헛되이 목숨을 버리지 말아라!” 했다. 윤공타가 유공차의 말을 믿지 못하고 바로 몸을 되돌려 위헌공을 쫓아갔다.
不知結末如何,再看下回分解。
결말이 어찌 될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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