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 선생님(조선왕을 말하다)의 작가 만남을 다녀왔다. 2월부터 읽기 시작한 토인비 ’역사의 연구’를 절반 읽고, 책의 난해함과 어려움을 피해가고픈 마음에 가벼운 역사책 ’조선왕을 말하다 1.2’를 읽었다. 조선사에 대한 작가의 분명한 시각이 뚜렷하게 보였다. 1시간 가량 열정적인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역사는 1차, 2차 사료가 있고, 1차 사료는 사실을 기록한 것, 2차 사료는 저자의 관점과 사고가 들어간 것이다. 2차 사료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왜곡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1차 사료를 우선시 한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성서는 라틴어로 기록되었고, 신부만 읽을 수 있었다. 신부의 독점으로 자신의 특권(?)을 이용해 면죄부를 판매했다. 하지만 면죄부를 파는 것은 성서의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금속활자로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읽혀졌기에, 신부가 아닌 사람도 성서의 내용을 알게 되고,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이 널리 알려졌고, 개혁의 필요성이 공감대를 형성해 종교개혁이 성공한다. 100년전 '후터'는 사람은 같은 내용을 주장했다 화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우리 역사에도 마찬가지. 우리 역사는 ’조선의 노론 사관’과 ’일제 식민 사관’으로 대표된다. 노론은 인조 반정에서 시작된다. 서인 중에서 강경파인 노론과 온건파인 소론으로 나뉘는데, 소론은 인조 이후 조선을 실제로 지배하는 세력으로 성장해, 왕, 세자, 반대당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갈아치우거나, 죽이거나 했다.
인조반정 후 권력을 장악한 서인(이이의 제자). 임금을 내쫓으려면 명분이 필요했다. 유교의 공리공론이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명나라 황제가 우리의 황제이며, 조선 임금은 황제의 신하일 뿐'이라는 해괴한 논리가 통용된다. 조선 왕도 그들과 같은 사대부 중 제1인일 뿐. 등걸이 외교를 한 연산군을 내쫓은 것이 인조 반정. 인조의 쿠데타는 당시 백성들의 싸늘한 반응을 받았다.
1,2차에 걸친 예송 논쟁. 효종 사망시 자의대비 조씨의 복상 기간이 문제였다. 15년 후 다시 예송 논쟁이 발생. 조선의 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한 언젠가 곪아터질 문제였던 것이다. 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아 생겼던 문제였다. 그만큼 서인은 왕권을 인정하지 않은 권신집단이었다.
간판으로 권위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 실제 전문가로 대접받을 지식이 있는가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사가와 왕가의 예법은 다른 법. 경국대전에는 장/차남 구분없이 1년 복을 주장한다. 하지만 며느리는 1년과 9개월로 구분했다. 이것이 문제를 일으킨 것. 서인은 송시열은 두려워했지만, 현종은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 효종은 서인정권을 바꾸려다 사망했다. 독살의 가능성.
정권과 국왕의 대립이 정점으로 치달아 결국 국왕이나 세자의 사망이 발생한다. 송시열과 독대 1개월 후 사망했다. 만약 정권 교체를 시도하지 않았다면 사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인과 맞선 사도세자, 정조.. 등도 뒤주에 갖혀 죽거나, 독살이 의심되었다. 반면 노론의 지지를 얻은 왕은 천수를 누렸다. '청' 황제는 이런 조선의 상황을 보고 군약신강으로 백성이 고생이 많다고 말했다. 한족의 1%밖에 안 되는 만주족이 중국을 다스린 비결이 여기에 있다. 청은 조선보다 더 정확하게 조선을 보았다.
최고의 학자인 백호 윤휴. 예송 논쟁시 3년상을 주장했다. 비난 편지가 쇄도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비난하니 두렵지 않냐는 질문에, ’단지 시대가 그럴 뿐이다’고 답했다. 윤휴는 진정한 북벌론자였다. 송시열은 말로만 북벌론자였다. 현종 14년 삼번의 난(명나라 장군 3명이 독립적으로 다스리던 3개의 번에서 반란)이 발생. 효종이 살았다면 북진 가능했을 것. 윤휴가 밀봉한 상소로 북벌 논의를 했다. 윤휴는 국력이 강하려면 신분제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했다.
숙종 6년. 경신환국에 윤휴는 사형된다. 윤휴는 임금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오히려 역적으로 몰려 사형당했다. 나라에서 유학자를 안 쓸거면 안 쓰면 되는거지 죽일 이유는 없다고 말했지만 결국 죽었다. 이후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당연한 것 아닌가). 실제 북벌론자인 윤휴가 사망한 후 기록엔 송시열이 북벌론자인 것처럼 남았다. 역사가 왜곡된 것이다.
숙종 8,9년. 서인의 정치공작으로 남인을 대대적으로 숙청한다. 정치공작을 옹호한 사람은 노론, 반대한 사람은 소론으로 나뉜다. 노론은 자기와 반대되면 임금도 죽였다. 사도 세자도 뒤주에 가둬 8일뒤에 죽었다. 한중록은 사도세자가 죽어야하는 이유를 변명한 것. 총 4권인데 1권은 당시 사도세자가 살았던 시대로, 비판의 수준이 낮으나, 그의 사후 비판은 강도를 높였다. 노골적으로 세자를 욕하기 시작한 것. 사도세자의 아들도 죽여야 한다는 팔자흉언을 만들어 퍼뜨렸으나, 영조는 정조를 보호하기 위해 호적을 이동시켰다. 노론은 정조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했고, 실제로 방해공작을 했다. 정조는 11살에 대리 청정하는 아버지 세자를 8일간 뒤주에 가둬 죽일 때 신하들에게 매달렸으나, 노론 신하 중 아무도 동조하지 않았다. 노론이 사도세자를 죽이려는 당론이었기에.. 이를 아는 정조는 조심해야 했다.
사도세자를 고변한 인물은 노론의 청지기였다. 대리청정하는 세자를 둘째임금이라하는데, 이름도 없는 사람이 고소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배후를 밝히는 조사를 해야하나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빨리 보고해야 한다고 3번이나 닥달했다. 정조가 대사헌을 추궁하며, 그때 그 심정이라면 지금처럼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말했다.
정조 즉위에 혜경궁 홍씨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죽음에도 관여했다. 아들은 보호했지만. 혜경궁 홍씨의 일족은 사도세자의 문제로 벌을 받았다. 정조는 고뇌에 빠진다. 사도세자의 문제로 혜경궁 홍씨(어머니)의 처벌을 하자니, 어머니가 단식으로 저항했고, 가만있자니 죽은 사도세자가 눈에 걸렸다. 햄릿 왕자의 고뇌도 이와 같지는 않았을 것.(to be or not to be)
목호룡 독약 고변 사건. 경종 때 독살 시도 사건. 경종이 즉시 구토를 한 독살 미수 사건이 있었다. 다음엔 더 센 독약을 구해야겠다고 했다. 임금은 바뀌지만 노론은 영원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세도 정치는 노론의 6개 집안이 나라 권력을 차지해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든 것이다. 그들의 후예들이 아직도 대한민국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역사는 계속 이어진다. 조선의 역사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혈의 루. 이인직은 선각자가 아니라 매국노. 이완용의 비서. '혈의 누'는 조선 처녀가 청나라 군사에 겁탈당할 것을 일본군사가 구해줬다는 내용. 일본이 조선을 먹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전엔 중국이 조선을 차지했으니.. 단지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라 말했다.
1910년 나라가 망했을 때 다들 비분강개했을 것 같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이완용과 송병준 등 일진회 소속은 누가 먼저 합벙을 이루나 경쟁을 했을 정도. 왕족도 이런 경쟁에 참여했다. 임금의 장인도 포함되었다. 일본에 조선 귀족열전이 출간 되었다. 그중 55/66명이 노론 계열이다. 이들은 경제력으로 유학을 다녀왔고... 산업(기업)에는 실패한 사람이 많으나, 대학을 장악했다. 현재도 노론 계열의 모임이 있고, 이들이 국사 교과서를 왜곡했다.
낙랑군 bc 108년 세워졌으나 일제는 평양에 있음을 발견했다. 2000년 이상 발견되지 않은 것이, 우연히 일본 사학자가 발견한 것. 이런 식으로 일제 시대 우연히 발견된 것이 많다. 일제 식민사관. 조선의 활동 영역이 만주가 아니라 한반도에 국한된 것이라는 거짓 주장을 하기 위해, 우연히 발견된 자료가 많다는 것. 일본의 식민 사관. 조선의 북부는 중국에, 남부는 일본에 예속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다. 하지만 1차 사료에 발견되는 것은 없다.
해방 후 일제 식민사관을 재검토 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 사학자가 월북되고 납북되었던 것. 남은 사람은 노론 계열의 사학자로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지도 않았고, 현재의 잘못된 역사가 아직도 남아 있다.
부국 강병을 하려면 인재를 알아봐야 한다. 고종은 갑신정변을 되돌리면서 급진 개혁파를, 아관파천을 통해 갑오개혁을 무력화하며 온건 개혁파를 제거했다. 동학 농민 항쟁을 청/일군을 동원해 억압함으로 아래로의 개혁도 저지시켰다. 결국 친일파만 남게 되었고, 청/러를 전쟁으로 이긴 일본에 친일파의 노력?으로 조선을 일본에 바치게 된다. 고종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허황된 왕권강화에 매달리며 개혁을 방해만 했다. 실상에 걸맞는 평가가 이뤄지지 못했다. 과장된 평가를 받는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 메이지 천황은 조선을 합병했다. 44년간 나라를 다스리며 일본에 나라를 넘긴 왕 치고는 평가가 후하다.
10만 양병설도 율곡 이이가 주장한 것은 거짓. 그의 제자 김장생과 송시열이 만든 역사. 1차 사료를 보면 확인 된다. 율곡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다면 그런 기록이 남아있어야 하는데, 실제 율곡 이이의 주장이 남은 기록엔 양병설을 반대하는 내용은 풍부하게 남아있다.
역사는 선택의 문제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신라가 통일한 것이 잘못된 것, 나쁜 것은 아니다. 강한 나라, 강한 사람이 반드시 이긴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선택을 하냐느가 중요하다. 신라가 삼국 통일 후 수도를 이전해 선조들의 기상을 이어갔어야 하는데, 신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결국 신라는 고구려 영토를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조선의 뛰어난 왕은 태종, 세종, 정조를 뽑았다. 태종은 숙청을 통해 공신을 제거함으로 세종에게 좋은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세종은 태종의 공신제거와 본인의 노력, 애민 사상으로 조선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강남에서 좋은 환경과 좋은 교육을 받아 100점을 받은 왕이다. 반면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문제, 노론의 견제를 뚫고 조선 후기의 황금기를 만들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75점을 받은 왕. 누가 더 좋은지는 모르겠다고 이덕무 작가님은 말했다.
나쁜 왕은 인조, 세조같이 쿠데타를 일으켜 잘못된 유산을, 백성에겐 절망을 준 임금,
백성을 내팽개치고 도망만 다니면서, 전쟁이 승리로 될 것 같자, 영웅을 제거하려한 선조(선조의 존재가 왜란 극복의 장애가 되었음)
나라를 일본에 넘겨준(개혁의 결정적 순간에 항상 방해가 된 고종) 고종
역사는 관심있는 분야를 현미경적 시야와 망원경적 시야로 봐야 한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하며, 국사가 제외된 현재의 고등 교육을 정상으로 복귀시켜야 한다.
첫댓글 깔끔하고 핵심을 찌르는 일목요연한 정리 강연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 처럼 오래토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정리하느라 힘드셨겠어요 ~~ 긴 글 잘 읽었습니다...
녹음을 하신건가요? 어찌 이렇게 정리를 하셨나요... 감사드립니다. 자주 뵈었으면 합니다.~^^
역사는 관심있는 분야를 현미경적 시야와 망원경적 시야로 봐야 한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하며,
국사가 제외된 현재의 고등 교육을 정상으로 복귀시켜야 한다.
마지막 말씀에 진심으로 동감하는 1인 입니다. ^^
훌륭한 정리 감사합니다. 무한동훈님^^
함께하지 못했지만 후기로 나마 아쉬움을 달랩니다. 잘 읽었습니다.
정리 내용으로 아쉬움을 달래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애쓰셨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수고 하셨네요.
언제 또 만남을 가질수 있나요? 한번 만나서 대화를 하고 싶었는데....
이덕일 선생님 강의 녹화본 편집을 맡은 아름드리버드나무 입니다. 녹화방식에 약간의 차질이 있어,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그 동안 북콘서트 와 함께 조만간 카페에 올릴 수 있도록 할께요~ ^^
책을 읽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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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