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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열 개의 장면
하창수
1. 글은 그림이다
‘글’은 ‘그림’에서 나왔고, ‘그림’은 ‘그리움’에서 생겨났다는 한 어원학자의 낭만적 해석을 읽은 적이 있다. 그의 해석 앞에 ‘낭만적’이라는 수식을 단 것은 논리적 결여를 지적하려거나 순수성을 돋아보기에 하려는 의도가, 전혀, 아니다. 그의 해석을 접한 순간 해맑은 미소가 어리던 내 입과 따뜻해지던 가슴을 새삼스럽게 기억했기 때문이다. ‘글’과 ‘그림’과 ‘그리움’이 서로의 어깨를 겯고 있는 장면을 마음에 그려보는 일은 얼마나 낭만적인가!
2. 헤밍웨이 유령
이따금 글을 쓰다가 막히면 나는 서재 창문을 열어놓고 우두커니 밖을 내다보며, 시인 폴 베를렌이 살았다고 알려진 프랑스 파리의 어느 주택가 방에 세를 얻어 살던 때의 헤밍웨이를 떠올리곤 한다. “이따금 새 소설을 쓰기 시작하다가 막히면 우두커니 서서 창밖으로 파리 주택가의 지붕들을 바라보며 ‘걱정 말게. 자넨 전에도 늘 써왔고 앞으로도 쓰게 될 거야. 자네가 지금 할 일은 진실한 문장 하나를 쓰는 것이야. 자네가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문장을 쓰도록 하게,’ 하고 생각하곤 했다.” 나는 서재 창밖에서 덥수룩하게 수염이 자란 헤밍웨이를 만난다. 그리곤 다시 열심히 자판을 두드린다. 글의 유령이 불러주는 문장들을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겠다는 듯.
3. 권위에 무릎 꿇지 않는 권위
1962년 케네디 대통령이 미국 국적을 가진 마흔아홉 명의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을 만찬에 초대했다. 1949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에게도 당연히 초청장이 보내졌다. 그러나 포크너는 백악관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초청을 거부하는 이유를 백악관 관계자가 물었을 때, 포크너의 대답은 간명하고, 재밌고, 섬뜩했다. “이유는, 백 마일이나 떨어져 있다는 겁니다. 밥 한 끼 먹으러 가기엔 너무 먼 거리죠(Why, that’s a hundred miles away. That’s a long way to go just to eat).” 개인적으로 케네디를 싫어한 게 아니라면 포크너가 대통령의 초대에 응하지 않은 이유는 자명하다. 대통령이라는 권위를 싫어한 것이다. 모름지기 작가란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는가!
4. 글쓰기의 풍류
연전 모 방송국의 리포터 자격으로 일본 북부 돗토리(鳥取)현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역사가 천년이 넘는다는 요시오카(吉岡) 온천에 가서 촬영을 마치고 마루에 앉아 쉬고 있는데 지배인이 두툼한 책자 서너 권을 가지고 내게로 왔다. 방명록이라 했다. 별 게 있나 싶어 후루룩 넘기는데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입이 점점 벌어졌다. 그동안 온천을 방문했던 문인, 화가, 예술인들의 천년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림과 시가 곁들여진 경우도 있었고, 온천의 수질과 근사한 정경에 대한 감회를 적은 제법 긴 산문도 있었다. 촬영시간에 쫓겨 황급히 일어나는 내게 지배인이 웃는 얼굴로 방명록 뒷장을 펼치더니 먹물과 붓을 내밀었다. 창졸지간이었지만, 마다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방명록 하얀 종이 위에 “시문(詩文)을 짓고 읊는 풍류(風流)의 도(道)”를 뜻하는, 소아풍류(騷雅風流) 넉 자를 썼다. 천년 묵은 온천의 나이 지긋한 지배인이 허리를 굽히며 새삼스레 악수를 청했는데, 그 모습이 하도 숙연해서 약간 어지러웠던 기억이 새롭다.
5. 봉황과 꿩을 구별하지 못하는 세상의 소설
어느 해 가을, 오랜 시간 공들여 쓴 네 권짜리 장편소설을 출간하고 지인들을 집으로 초청해 술을 한잔했다. 좁은 아파트를 가득 메운 서른 명 남짓한 사람들 중에는 문인과 화가가 상당수였다. 초저녁에 시작해 깊은 밤까지 주연이 이어졌는데, 술이 거나해진 소설가 이외수 선생이 “종이를 펴자.”고 제안을 했다. 고스톱을 칠 때 쓰던 군용담요가 펼쳐지고 지필묵이 나왔다. 이 선생이 큰 붓에 먹을 찍고는 한달음에 소를 한 마리 그려냈다. 이어서 마음결이 고운 선배 시인이 덕담을 남겼고, 더러는 용기로 더러는 수줍음으로, 느닷없이 벌어진 한밤의 서회가 풍성히 이어졌다. 그러다가 새로 전지 한 장이 하얗게 펼쳐졌을 때, 강산채약인(江山採藥人)이란 멋진 아호를 가진 한의사가 붓을 들어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다. 붓을 거두었을 때,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그가 쓴 것은, 봉치불변지세(鳳雉不辨之世), 소설하익지유(小說何益之有)―“봉황과 꿩을 구별하지 못하는 세상, 소설은 써서 무엇 하리.” 라는 거였다.
6. 누군가를 소설가로 만드는 것
누군가 소설을 쓰게 되거나 소설가가 되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사람만의 사연이 있게 마련이다. 남들에게 그 사연을 들려주는 게 겸연쩍어서 하지 않을 뿐, 만약 그 사연들만 모두 모아놓아도 아주 훌륭한 읽을거리가 될 거라는 데 오만 원을 걸 수 있다.
20세기 말에 나온 소설들 중에 내게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작품은 마이클 커닝햄의 『디 아워스(The Hours)』다. 당시 나는 5천매 분량의 장편소설을 펴낸 후유증을 심하게 앓고 있는 상태였고, 더 이상 소설을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떠올랐으며, 그렇게 되더라도 그다지 억울해하지는 않을 거라고 담담히 생각하곤 했었다. 그때 잘 아는 출판사의 편집장이 커닝햄의 소설 원서를 보내주었는데, 시간이 되면 번역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메모가 책 안에 들어 있었다. 하지만 심신이 지친 탓인지 그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쯤 어느새 21세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커닝햄의 『디 아워스』가 가진 미덕과는 상관없이 그 소설을 다 읽고 났을 때 나는 ‘소설’과 ‘소설쓰기’ 모두에 완전히 입맛을 잃어버렸다. 실제로 나는 그로부터 오랜 시간 소설을 쓰지 않았다. 사실, 이것은 내가 하려는 얘기가 아니다. 내가 하려는 것은 『디 아워스』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한 인물인 버지니아 울프 사이에 존재하는, 마이클 커닝햄으로 하여금 소설을 쓰게 만든 그만의 ‘사연’이다.
지미 핸드릭스에 빠져 있던 여드름투성이의 고교생 마이클 커닝햄은 어느 날 같은 학교 여학생으로부터 버지니아 울프의 유명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선물로 받는다. 그녀가 커닝햄에게 이 소설을 선물한 데는 록음악에만 빠져 있지 말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그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었고, 지미 핸드릭스의 기타가 주는 감동을 버지니아 울프로부터 받게 된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는 ‘소설이란 것’을 쓰게 되고, 결국 작가가 되었다. 작가가 된 그는 마치 필생의 업처럼 버지니아 울프와 그녀의 ‘댈러웨이 부인’에 대한 오마주인 역작 『디 아워스』를 쓰기에 이른다.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의 제목으로 달고 싶어 했던 것이 ‘The Hours’였다는 ‘사소한’ 사실은 마이클 커닝햄이란 한 사람의 삶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꾸게 된 '엄청난' 사실이었다.
몇 년 뒤, 나는 극장에 앉아 영화로 만들어진 「디 아워스」를 보았다. 니콜 키드먼의 재발견이나, 영화 전편을 휘감는 필립 글래스의 미니멀한 음악들은 그저 덤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열여섯쯤 먹은 여드름투성이의 한 사내아이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타자기를 두드리는 청년의 모습이 스크린 너머에 어른거렸다. “소설을 쓴다는 건 참 멋진 일이었다.”고 회상하며 숨을 거두는 작가가 아니더라도, 소설가라면 누구나 ‘참 멋진’ 시작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전부일는지도 모른다.
7. 목에 건 밧줄을 푼 작가
40년 동안 열심히 소설을 썼지만 실패만 거듭했던 한 무명작가가 그동안 써왔던 글들을 한 데 모아놓고 불을 지폈다. 마지막 한 장의 원고가 재로 변하는 걸 지켜본 그는 대들보에 밧줄을 걸고 목을 매었다. 발밑에 받쳐놓은 의자를 걷어차려고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불에 타지 않은 종이 한 장이 그의 눈에 띄었다. 몇 번 망설인 뒤 그는 목에서 밧줄을 걷어내고 내려가 그 원고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은 빈 종이였다. 그는 자살을 육 개월 뒤로 미룬 뒤,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그가 거둔 생애 최초의 성공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8. 절필에의 유혹
세상이 누군가를 고립시키면, 결국 세상은 그 누군가로부터 고립되는 것이다. 같은 논리로, 작가가 만약 절필을 해버린다면, 세상은 더 이상 그의 글을 읽을 수가 없다. 작가들은 가끔 글에 정나미가 떨어지곤 한다. 자신의 글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대단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일정부분, 작가는 그런 사명감을 지닌 듯 살아가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더 이상 자신의 글이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더 지저분하게 만들 뿐이라는 자책과 자학에 사로잡히게 될 때, 그는 더 이상 책상 앞에 앉고 싶지 않게 된다. 그때 일어나는 절필에의 유혹은 매력적인 이성의 유혹보다 훨씬 지독하다. 자신으로부터 세상을 고립시키고 싶은 욕망은 거역하기 힘든, 세상에 대한 저항이다.
9. 나이 든 작가의 글맛
언젠가 새로 책이 출간되어서 기자와 인터뷰를 하다가 “나이는 들어도 글은 젊어야 한다고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이미 40대 후반으로 접어들어 있던 나는 묘하게 비틀어 대답했다. “젊음에 영원히 머물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나이 듦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열망이 아니라 어리석음으로부터 배반당할 겁니다.” 사실 이 말은, 미국의 에세이스트이며 비평가였던 로건 스미스가 『셰익스피어를 읽고(On Reading Shakespeare)』라는 책에서 한, “젊음은 육체의 모험을 위한 시간이고, 노년은 정신의 승리를 위한 시간”이라는 말을 윤색한 것이었다.
괴테의 『파우스트 박사』를 들먹일 것 없이 사람이면 누구나 젊음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이 여기며 가능하다면 오래도록 이 행성에 머무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가는 자신을 내던져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청춘과의 결별을 과감히, 그리고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일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한 시기만을, 오직 좌충우돌하는 시간만을 살 뿐이다. 청춘에서 맛보았던 모든 모험, 엄청난 실패, 혹독한 시련, 찰나적인 기쁨과 즐거움, 위험천만의 쾌락,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사랑, 놀라운 충동, 허무, 충격, 간지러운 속삭임―그 모든 것을 새롭게 맛보게 되는 시간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만, 눈부시도록 황홀하지만 아주 짧고도 허망한 ‘부분’만을 살아갈 뿐이다. 청춘은 아름답지만, 아름다운 건 청춘만이 아니다.
10. 마지막까지 소설을!
목사와 여행가와 소설가가 같은 날 죽어서 천국과 지옥이 갈라지는 길에 섰다. 갈림길 초입에 이정표가 있긴 했지만 거리만 표시되어 있을 뿐이었다. 한쪽 길엔 ‘1킬로미터’, 다른 쪽 길엔 ‘1.5킬로미터’. 갈림길 앞에 서 있던 안내인이 세 사람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일단 선택하면 그뿐, 다시 돌아올 수는 없습니다.”
맨 먼저 여행가가 ‘1.5킬로미터’쪽을 선택했다. 목사와 소설가가 이유를 묻자 여행가가 대답했다. “당연하지 않소. 1킬로미터보다는 1.5미터 길이 조금이라도 구경할 게 많을 테니까.”
이번엔 목사가 양쪽 길을 번갈아가며 유심히 살피더니 ‘1킬로미터’쪽을 택했다. 소설가가 선택의 이유를 물었다. 목사가 대답했다. “1킬로미터 쪽 길이 1.5킬로미터 쪽 길보다 폭이 조금 더 좁은 것 같네요. 주님께선 무릇 의로운 자는 좁은 길로 가라고 하셨거든요.”
목사와 여행가는 그렇게 자신들이 선택한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소설가는 골똘히 생각에 잠길 뿐 어느 길도 선택하지 않았다. 걸음을 옮겨놓던 목사와 여행가가 고개를 돌려 왜 그러느냐고 묻자 소설가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이별의 손만 흔들 뿐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아스라이 사라지고도 한참이나 지난 뒤까지 소설가는 갈림길 앞에 선 채로 이정표를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그의 눈에는 눈물까지 가득 고였다. 갈림길에 서 있던 안내인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소설가에게 왜 그러냐고, 왜 그렇게 선택을 못하느냐고, 지옥을 선택할까봐 그렇게 걱정이 되냐고, 물었다. 소설가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안내인을 바라보며 힘없이 말했다.
“이 기막힌 소재를 앞에 두고도 쓸 수가 없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 그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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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창수 : 1978년 대구 대건고 졸업. 1987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당선. 1991년 한국일보 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천국에서 돌아오다』 『1987』 『돌아서지 않는 사람들』 소설집 『지금부터 시작인 이야기』 『수선화를 꺾다』 『서른 개의 문을 지나온 사람』 대담집 『먼지에서 우주까지』 『뚝』 외 다수.
고수가 왔네요. 하 선생, 반가위요. 지난번 책도 고맙고 ㅎ 이렇게 문예반 축제에 동참해줘서 참 고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