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향파(向破)와 청남(菁南)
향파 이주홍(李周洪, 1906-1987)은 합천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토목, 제탄, 식료품 공장에서 일했다. 1946년부터 부산 수산대학 교수로 있었고 1972년 동대학 명예교수를 지냇다. 1925년 「신소년」에 동화 <뱀새끼의 무도>를 발표하고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향파는 소설, 동화, 시, 수필, 희곡, 동시 여러 장르에 걸쳐 활동한 스케일이 큰 문인이었다.
향파는 진주 의곡사 주지였던 서예가 청남(菁南) 오제봉(吳濟峰, 1908-1991)과 교분을 가지면서 부산과 진주를 오르내리며 숱한 일화들을 남겼다. 청남은 경북 금능에서 태어나 1921년 해인사 홍제암 임환경 스님의 상좌로 삭발 수계했고, 1930년 진주 의곡사 주지가 되어 23년간을 주지로 있었다.
의곡사는 청남이 파성 설창수와 더불어 개천예술제 창제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부터 예술제의 센터 아닌 센터가 되어 있었고 청남은 예술제에 참여하는 예술인들의 대부 역할을 하게 되었다. 향파도 1949년 시작되는 개천예술제 이후에 청남과 아주 각별한 사이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술제 초창기에 의곡사를 드나들었던 문인으로는 김광섭, 모윤숙, 구상, 박노석, 정진업 등 주로 자유문학파들이었다. 그 중 6.25 직후 월남해 온 문인이었던 구상(具常) 시인은 50년대초에 설창수와 결의형제를 맺고 시대의 괴로움을 달래기 위해 술독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나라 시인 가운데 가장 인격관리에 완벽했던 이가 구상인데 젊은 시절 술로서 일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전설적이라 하겠다.
만취한 상태에서 젊은 시인 구상은 대소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경내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에다 방뇨를 하여 청남 스님을 분노케 했는데 그때마다 향파가 나서서 수습을 했다. 하루는 구상이 시내 수정동 어디 술집에 찾아 들어 외상술을 잔뜩 마시고는 향파가 와서 마시고 있다는 전갈을 보냈다. 향파라면 청남이 불문곡직 달려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 믿음은 그때마다 적중했다는 것이다.
청록파의 조지훈은 수도여고 교사시절, 예술제 백일장에 여학생들을 데리고 와 의곡사에 머물렀는데 이 청년 시인도 주사가 만만치 않았다. 대취한 뒤 아무데서나 방뇨를 했는데 "조지훈이, 조지훈이"라 반복하다가 뒤에 가서는 '훈'자를 떼고 자기 이름을 불러댔다는 것 아닌가. 데리고 온 여학생들이 깔깔거리고…… 향파는 서울에서도 지훈이 만취한 상태로 귀가하는 길에 대선배 박종화의 집 대문에다 몇 번이고 발길질을 하여 경범죄를 범하는 전과가 있었다는 사실을 듣고 있었던 터이므로 주사가 있지만 애교로 보아주자고, 아량을 베푸는 것이 좋겠다고 청남을 설득시켰다는 것이다.
향파와 청남이 이렇게 교분이 두터워질 수 있었던 것은 서예와 동양 고전에 대한 취향이 같았다는 데 그 원인이 있지 않았을까 한다. 향파의 서예도 일정한 경지를 가지고 잇었고 청남은 촉석루 현판과 국전심사위원장이라는 이력만 가지고도 한국 서예의 꼭대기에 올라선 작가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향파도 애주가 이면서 주량면에서도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는 후문이 있다. 청남이 시인, 작가들의 술집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글씨를 써서 쉬운 판로로 적당히 작품을 넘기는 것을 보고는 안타까와 하면서 밤새워 술잔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청남에게 "이보게 청남, 이제 작품을 그만 내놓게. 대신에 술을 아예 빚어 놓게. 예술제가 코앞에 닿지 않았는가."
향파는 이렇게 인간적이었고 조용 조용 주변에 스며들어가는 인정을 지니고 살았다. 그래서 그랬던가. 무엇이든지 쓰고 싶은 것을 쓰자는 취지로 동인지 <갈숲>을 주재했고 본격 수필 동인지 <윤좌>를 내면서 마음 맞는 이들과 어울렸다. 여기에도 청남이 조용 조용, 후원금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