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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비원 미륵불 @@@
안녕하세요?
경북 안동 이천동 석불상(속칭:제비원미륵불)은 보물 제115호.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여행객의 편의 제공을 위한 시설인 연비원불사(燕飛院佛寺)가 있어 사람들이 연미사 또는 제비원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자연암벽에 신체를 선으로 새기고 머리는 따로 올려놓은 전체 높이 12.38m의 거구의 불상이다.
이러한 형식의 불상은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는데, 머리의 뒷부분은 거의 파손되었으나 앞부분은 온전하게 남아 있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솟아 있고,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어서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진 거구의 불상에서 일반적으로 느껴지는 미련스러움은 보이지 않는다.
머리와 얼굴 특히 입에는 주홍색이 남아 있어서 원래는 채색되었음이 분명하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몇 개 안되는 옷주름은 매우 도식적(圖式的)으로 표현되고 있다.
양 손은 검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어 왼손을 가슴에 대고, 오른손을 배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지방화 된 거구의 불상 가운데 하나로 당시 불상 양식을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주풀이의 본향(本鄕) 제비원 미륵불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대활연(大豁然)으로 설설이 나리소서
성주야 성주로구나 성주 근본이 어디메냐
경상도 안동 땅의 제비원 솔씨 받어
공동산에 던졌더니마는 그 솔이 점점 자라나서
황장군(黃腸君)이 되었구나 조리기둥이 되었구나
낙락장송이 쩍 벌어졌네 대활연(大豁然)으로 설설이 나리소서」
위의 가사는 우리 무가의 대명사인 성주풀이의 도입부분이다.
성주의 근본이 안동 땅 제비원의 불상임을 알려주는 것이니 예로부터 영험함의 대명사로 꼽힌 듯 하다.
찾아오시는 길
안동에서 5번 국도를 따라서 영주방면으로 3km를 가면 한티재에 이른다.
한티재를 넘어 2km 더 북쪽으로 가면 길가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마애불상있는데 이것이 이천동석불상이다.
이 불상 뒷편에 있는 조그만 절이 연미사이다.
안동시외버스터미널 건너편에서 54번 시내버스로 20분 가량 소요
- 제비원의 유래 -
일찍이 신라 시대 안동 지방에 원(院, 지금의 여관 같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여기에는 일찍 부모를 여윈 연(燕, 제비 연)이라는 처녀가 일을 하고 있었다.
연(燕)이는 미모(美貌) 뿐 아니라 마음이 착해서 지나는 길손들을 지성으로 보살펴 주었다.
연이는 늦게까지 일을 하고도 틈을 내어 글을 읽었고 정성으로 염불을 하기도 하였다.
연이를 아는 총각들 중에는 연이의 미모와 착한 마음씨에 마음이 끌리어 사모하는
총각이 많았다. 이웃 마을에 욕심 많고 인색한 김부자(富者)가 살았는데,
김부자의 아들도 연이를 사모하였다.
어느 날, 김부자의 아들이 비명에 죽어 저승에 갔는데 염라대왕이 인사를 받고는 한참을
기웃거리며 명부를 뒤적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자네는 아직 올 때가 되지 않았는데?
이왕 왔으니, 인정(은근히 주는 선물)이나 좀 쓰고 [살아 돌아]갈 마음이 없나?”
“저는 지금 가진 것이 없는 걸요.”
이 말을 들은 염라대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엇을 생각하더니 씩 웃으며 총각을 다시 불러 말했다.
“자네는 세상에 적악(積惡)한 사람이라, 다음에 소로 환생할 터인즉,
자네 창고는 텅 비어 있지만 자네가 사는 건너 마을의 원(院)에 있는 연이는 착한 일을 많이 하여 창고에 많은 재물이 쌓여 있다네.
그걸 좀 꾸어 인정을 쓰고 [살아 돌아]가면 어떤가?”
이 말을 들은 총각은 놀랐지만, 다시 살아 돌아간다는 기쁨에 연이의 재물을 꾸어 쓰고는 다시 세상에 돌아왔다.
다시 살아난 김 총각은 즉시 연이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는 자기의 재물을 나누어주었다. 연이는 그 재물을 부처님을 위해서 쓰리라 결심하였다.
연이는 원(院) 옆에 있는 석불이 비바람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여
도선국사(596∼667)로 하여금 석불을 중심으로 하여 큰 법당을 짓도록 하였다.
이 공사는 큰 공사여서 5년이나 걸렸는데, 불상을 덮는 6칸의 전각(殿閣)이 완성되어
공중에 나래를 편 것처럼 찬연한 모습을 자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역사를 다 마치는 마지막 날, 밥을 이고 그 높은 바위 위로 오르던 연이는
그만 미끄러져 열 길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그녀는 홀연히 한 마리의 제비가 되어 하늘 높이 오르더니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리하여 ‘제비가 날아갔다’라는 뜻으로 연비사(燕飛寺), 혹은 연미사(燕尾寺)라고 하고,
그 여관을 연원(燕院), 혹은 연비원(燕飛院)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래서 그 곳에 제비원[燕院]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유증선 『영남의 전설』, 형설 출판사, 1971)
(오숙자 『제비원 성주풀이』, 전원출판사. 1995)
안동 제비원 : 국도를 타고 안동 시내 서북쪽을 달리다보면
이천동 학가산 남쪽에 천연 입석에 새겨놓은 거대한 미륵불을 만나게 된다.
이름하여 [제비원 미륵불]. 보물1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연 암벽에 음각으로 조각한 옷깃의 선은 아직도 선명하고 머리는 따로 만들어 얹은
마애불(磨崖佛: 큰돌이나 암벽에 새겨 만든 부처)이다.
서방을 바라보고 있는 이 부처는 전체 높이가 약 15미터, 가슴너비는 7미터에 이르고
논산 관촉사의 은진미륵 다음으로 우리 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돌미륵부처이다.
지금의 연비사는 아주 쇠락한 절이다.
그러나 안동의 향토지(誌)인 영가지(永嘉誌)에서 전하는 역사 기록은
선덕여왕 때 제비원 미륵불상의 머리 위에 만들어진 그리하여 불상 전체가 비와 눈을 맞지 않도록
불상을 덮은 6칸의 전각, 즉 연자루(燕子樓)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당시 연자루를 증축할 때 세운 돌비석이 서 있다.
그러므로 제비원의 전설을 바탕으로 현재에 남아있는 연자루 기둥의 위치로 당시의 모습을 재구성해 보면
미륵부처의 온 몸이 눈비를 맞지 않도록 6칸의 전각을 세워 실내불처럼 만들었는데
그 주춧기둥은 미륵의 양어깨와 목, 그리고 미륵불 앞의 큰 바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이 모습이 밖에서 볼 때 밋밋한 것이 아니라 용마루가 높이 솟아서
나래를 펼친 모양이라고 하니 얼마나 장관이었으랴?
신라 선덕여왕 3년(634년)에 6칸의 전각을 지어 불상을 덮었다.
높다란 용마루가 아스라이 공중에 나래를 편 것 같다.
그 후 다시 이를 지었으나 용마루와 대들보는 모두 옛 것이었다.
지금도 불상 주변에 주추를 박기 위해 만든 흔적 6개가 남아 말없이 당시를 증언하고 있다.
[제비원의 미륵불 목은 염주를 목에 걸은 모양으로 되어 있다.
이여송이 임진왜란의 구원병으로 우리 나라에 와서 난을 평정한 후에
우리 나라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훌륭한 인물이 날 만한 혈(穴)을 찾아
지맥을 끊고 쇠말뚝을 박았는데, 제비원 앞을 지나다가 말이 더 이상 나가지 않는 것이었다.
미륵불의 조화 때문이라 생각한 이여송은 칼로 미륵의 목을 내리쳤다고 한다.
목에서 가슴으로 흘러내린 칼자국이 있고, 왼쪽 어깨에는 말발굽 자국이 있다.
당시에 떨어진 목은 오랫동안 땅바닥에 뒹굴다가 스님 한 분이
목을 제자리에 붙이고 횟가루로 불룩불룩 나오도록 다듬어 놓았다.]
제비원 솔씨 : 제비원 주변에는 특이하게도 큰 돌바위들이 미륵불을 중심으로 널려있다.
지금도 미륵불의 오른 어깨 뒤에는 큰 바위가 병풍처럼 지탱하고 있다.
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바위 틈새에는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내는 용트림하듯
뿌리를 내린 소나무 여러 그루가 우람차게 뻗어 지나간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그러면 왜 하필 제비원 솔씨를 받고자 기원하는가?
제비원 솔씨는 구조상 미륵불 어깨자락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미륵부처님의 몸에 닿아 미륵님과 인연맺는 솔씨….
깨끗한 마음씨로 정성스레 쌓아 모은 천상의 복전(福田)을 아낌없이 쾌척(快拓)하여
미륵님을 눈비로부터 보호하려한 제비아씨[연燕이]의 정성이 깃든 곳.
미륵부처님을 모시는 불사(佛事)가 끝나는 날 생명을 바친 거룩한 여심(女心)이 가득한 곳.
그토록 인연 깊은 솔씨로 앞산 뒷산에서 싹틔운 소나무는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삼신(三神)의 자손[城主]들이 삶의 역사를 꾸려가는 터전의 대들보가 되고
기둥[棟樑]이 되어 성주(城主)와 대대(代代)로 역사를 같이한다.
그러므로 「성주풀이」의 핵심에는 전생(前生)의 공덕, 선행(善行),
미륵님과의 인연 등을 우리 삶의 뿌리에 두고자 한 민족의 서정이 담겨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민간(民間)에 전승되어 내려온 성조신과 제비원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그러면 정작 그 내용을 담은 「성주풀이」의 속뜻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마디로
제비원의 솔씨 받아 대궐터의 대들보와 동량을 길러 내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황장목이 그러하고, 청장목이라는 말이 이를 증명한다.
황장목은 소나무의 수령이 오래되어 겉이 불그스레한 빛을 띄고 속은 황색이
나는 최고급 재질의 소나무를 말한다.
당연히 이런 나무는 특별 관리되고 예로부터 대궐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황장금표를 세워
일반인의 접근을 막았다.
원주 치악산에 가면 입구 좌측 산에 황장목이 아직 건재하고 있고 금표가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임금이 돌아가시면 또한 관재 [재궁(梓宮)]로 쓰이는 것이 황장목이다.
단군임금 때 궁실 건축을 담당한 성조(成造)대군이 다듬던 나무의 공(木+公=松)의 내력 이것이 「성주풀이」다.
그러므로 원래는 임금님의 정사(政事) 보시는 대궐 본전(本殿, 태평전)의 대들보를 선택하는 것인데
민간에서는 나랏님의 대들보 되는 충신(忠臣)이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확대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수(萬修)를 다시 본다.
「성주풀이」 속에 나오는 “어라 만수”의
만수(萬修) 신장(神將)을 직접 불러서 입회한 가운데 이 공사를 보신다는 점이다.
보통 “어라 만수” 하면 대개 단순한 추임새로 알기 쉽다.
굳이 한문으로 옮기라면 만수무강(萬壽無疆)의 만수(萬壽)로 알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비원의 제비는 기실 ‘새’가 아니라 전설상의 이야기이지만 음동(音同)을 취하면
제비(帝妃, 임금의 비)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제비원 미륵불(보물 115호)
연(燕)이를 사모한 법당 짓던 와공이 한 순간 실수로
지붕에서 떨어져 죽어 날아간 혼이 제비요,
연(燕)이는 죽어 석불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기에 제비원미륵불은 연(燕)이 아씨를 닮아
풍채가 나라 안에서 내노라 하고 미소도 그러하다.
그러기에 안동의 얼굴로 삼았을 것이다.
산 넘어가던 길손이 쉬어가던 곳이 제비원(燕飛院)이요,
성주의 근원이 안동땅 제비원으로
민간신앙의 근원지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제비원은 사람들이 머물다 갈 자리이다.
갓바위/김동아 노래/별님
1. 중생에 지은 업보 등에 업고서
갓바위 가는 길은 한 나절 인데
이끼내린 돌담길에 산새가 울면
갈 길을 잃어버린 나그네 마음
약사여래불 깊으신 그 뜻
팔공산아 너는 알겠지
2. 동화사 풍경소리 밤은 깊은데
갓바위 가는 길은 멀기만 한데
촛불 켜고 소원비는 아낙네마음
길손이 갈 길 없어 가슴 태우네
약사여래불 높으신 그 뜻
팔공산아 너는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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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봤습니다. 야간에도 보기가 아주 좋더군요.
아주 멋있어요.
모시밭에서 시내까지 통학할때..지금 주변도로가 많이 변했서 그 당시 추억의 도로가 없어지니? 아쉽네요
초등학교때 소풍다니던 곳인데 새로보니 그때 개구장이 시절이 생각나요 감사합니다 옹천 새댁님
학교다닐때 많이 보았는데 사진으로 보니 새삼 우아하게 감상 잘 했습니다...역시 내고향 안동은 좋네요...누님 노래 정말 듣기좋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요
제비원 가끔씩 지나 다니면서 얼핏 보고만 다녔는뎅~*^^;
옹천새댁님 덕분에 자세한 유래와 朝.夕으로 제비원의 또 다른 모습을 볼수 있게 해 주심에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행복한 저녁 시간 되소서...*^^~
54번 버스속에서 늘 보던것인데, 지금 보니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 오르네요
사진 잘 찍으셨네요
우리 동네 가는길에 있는건데! 여기서보니 새롭네요.
미륵님의 온화한 미소 ,글내용,잘보고 갑니다.
구전에 의하면 기존의 미륵불의 두상 이외에 구 도로부근에 묻힌 또 하나의 두상이 있다고 했습니다. 들은 말로는 미륵불 앞의 바위에도 미륵불이 있었다는 예긴데.....진실은 알 수 없고 담에 고향가면 이 살펴보고 싶어요 고향집에서 1km 거리니까......
보고있노라면 그옛날 생각이 무자게 많이나내요..감솨해요
경북 안동시 북후면 이천동 아님니다.수정
원래 있었다던 머리 뒷부분을 맞추어 놓으면 어떨지요?
탑 등의 석물이나 목조구조물에 있어서 어느 부분이 헐어지면 돌이나 나무를 가공하여 원형을 되살리는 것처럼요
잘은 모르나 법흥동 칠층전탑도 보수공사 하던데 이번에 원모습에 근접하면 좋겠어요
저렇게 잘 생긴 미륵님의 얼굴을 옆에서보면 마치 하회탈처럼 앏아서... 좀 품격이.... 원형대로 다시 보수했으면 하는 바램입ㄴ다
집옆이라 하도 많이봐서 귀한 보물인줄 못느겼는데 세월이 갈수록 영험함과 함께 존귀함이 느껴지니더.........4차선에 묻힌 작은 제비원 형상은 흙무덤이 되고 마니.......(과거 그옆이 울집이ㅕ
ㅣㄴ데)
좋은 하루 되세요
제비원미륵불옆동네(오치)가 고향인데 새삼 여기서 보니 남다르네요 ㅎㅎ
모르고 있었는데 상세한 설명 고맙니더
故鄕에 천에 얼굴 제비원 미륵불의 전설에 좋은글 멋진作品 잘보앗슴당 몇번이고 더읽어야겟어요 健康하시고 좋은날들만 가득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