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을 거의 뜬 눈으로 새웠다. 오늘은 어찌 되든 끝내야 하는 날이었다. 삼복 더위에도
가야산 중턱까지 지미집(촬영용 크레인)을 끌어 올려 이미 백련암 법당에 설치했고 조명
장비들도 면밀히 자리를 맞춰 놓았다. 카메라 스텝과의 미팅도 끝냈다. All stand by(모
든 준비완료)상태였다. 그러나, 정작, 주인공이 없었다. 3천배를 촬영하는 날인데 촬영
당일 아침인 이 시간까지도 그 무서운 3천배를 할 사람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절하는
사람이 있어야 절을 촬영할 것이 아닌가. 근 한달동안 3천번 절할 사람을 백방으로 수소
문했지만 나도 스텝들도 찾아내지 못했다.
낭패스러움이야 어찌하든 아침 일찍 스텝들을 인솔하고 백련암으로 올라갔다.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었다. 어렵게 A급 스텝들로 제작팀을 꾸리고 파격적인 제작비로 최신 중장
비를 임대하여 서울에서 합천의 가야산 산중까지 옮기고 끌어 올렸는데 오늘 허탕치면 그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기야 오늘 아니라도 절하는 사람이 언제 나타날지 보장이
없는 상황이었다. 며칠 전부터 비상대책을 생각해 놓긴 했다. 끝내 찾지 못하면 연출가인
내가 3천배를 하는 것이었다. 약한 체력에 몇 번 쓰러질 지 몇 번 까무라칠 지는 알 수
없어도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이것저것 촬영현장의 상황을 감안할 때 이제 30분쯤 뒤에는 촬영을 시작해야 했
다.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는 시간이었다. 나는 각오를 해야 했고, 끝내 3천번 절할 수 있
도록 옷을 갈아 입기로 결단을 내렸다. 내가 절을 하게 되면 연출을 할 수가 없으므로 조
연출과 스텝들에게 대강의 촬영방침을 일러 놓았다. 카메라맨 이길호는 노련하고 성실한
프로페셔널이었다.
백련암 마당에 원택스님과 나란이 서서 내 비상대책을 설명하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산 아래를 내려다 보던 원택스님의 표정이 문득 달라졌다.
“됐습니다 감독님! 저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네?”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3천배하러 오는 사람들 아닌가 싶습니다.”
내려다 보니 저 아래에서 칠팔명의 젊은 남녀가 올라오고 있었다. 원택스님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어렸다. 조금도 허투름이 없는 그 스님의 미소는 언제나 내 마음을 편안
하게 했다. 경남지방에서 큰 기업을 하는 독실한 불자가 있는데 그 분은 성철스님의 가
르침대로 집에서 매일 천배를 한다. 해외출장시에는 비행기에서 절을 할 수 없으므로
호텔에 들어가 비행기에서 빼먹은 천배를 합친 2천배를 하는 분이다. 그 분이 회사의
게시판에 방을 붙여 3천배의 좋은 점을 설명하고 자발적인 희망자를 모아 이따금씩 이곳
백련암에 보내곤 했는데 저 사람들이 그 사람들인 것 같다는 스님의 설명이었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정말 그 사람들이라면 프로그램이 살고 나 또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니까!
과연 그랬다. 그 사람들이었다. 사전에 원택스님과 교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우리의 일
을 아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큰스님께서 보내주셨나
보네요”지나가는 말투로 원택스님이 하는 그 말이 듣는 그 순간 부정할 수 없는 힘으로
내게 파고 들었다. 큰스님이란 열반하신 성철스님이었다.“저 사람들중에서 필요하신 분을
정하시지요. 내가 부탁해 보겠습니다.”스님의 권고를 받고 나는 그 중에서 가장 도시적인
20대 후반의 남녀 한사람씩을 선정했다. 상련(남)씨와 귀녀(여)씨였다. 그렇게 극적으로
촬영작업은 이루어졌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느껴졌다. 1994년 여름이었다.
3천배 촬영은 성철스님 일대기(<스님 성철큰스님> 60분 5부작.1995년)제작의 일부분이었
다. 일부분이기는 했지만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기도 했다. 그 분의 가르침이 그 속에 농축되
어 있다고 믿어서 제작역량을 집중 투입했기 때문이다.
성철스님 일대기는 백련암(열반하시기 전까지 성철스님이 주석하셨던 절)의 요청으로 제작
되었다. 그 분 열반하신 뒤 불과 며칠사이에 해인사 일대에 깔린 성철스님 일대기라는 이름
의 영상물이 수없이 많았지만 큰스님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나 고증없이 급하게 만든 것들이
어서 거의 대부분 그 분이 고집스럽고 괴퍅한‘괴승’의 이미지로 묘사되어 있었다. 이대로
두면 뛰어난 구도자이며 선각자이신 성철스님이 자칫 한국인의 뇌리와 한국불교사에 사실과
다르게 기록될 우려가 있으니 정확하고 권위있는 일대기를 만들어 세상에 남기자는 것이 백
련암 그 분 제자들의 뜻이었다. 그런 의도로 이리저리 정통 다큐멘터리 연출가를 찾았고 결
국 나에게 그 일이 맡겨졌던 것이다. 망설임끝에 요청을 받아들이고 보니 일의 규모를 떠나
서 그 분의 행적과 그 분이 추구했던 정신세계를 알아내고 이해하는 작업이 엄청나고 어려운
것이었다. 물론 고비고비마다 큰스님 제자들이 도움을 주었다. 무소유를 앞서서 실천하신 분
이라 그 유명한 누더기옷과 바리때 하나, 돋보기안경과 고무신 한 켤레, 주민등록증과 승려
증등 불과 몇 점뿐인 유품을 모으고 현장을 답사하며 분석과 종합을 되풀이한 끝에 나는 그
분의 가르침을 가장 정확하게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3천배라고 판단하였다. 그리
하여 나는 그 3천배촬영에 거의 모든 힘과 열정을 쏟아 붓게 된 것이다.
해인사 禪房을 찾은 성철스님
“무릇 참선을 하는 자는,
네 시간 이상 잠자지 말라!
책 많이 보지 말라!
간식 먹지 말라!
말 하지 말라!
돌아다니지 말라!
그래도 공부가 안 되거든 내 목을 베어 가거라!“
큰스님 성철은 참선하는 제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쳤다. 제자들은 어떤 당락이나 영욕을 좇는
세속의 대중이 아니라 인간사의 모든 인연을 끊고 끓어 올랐다 사라지고 다시 또 끓어오르는
번뇌망상을 털어내며 영원한 삶을 찾으려 선방에 앉은 치열한 구도자들이었다. 그들이 선방
에 바위처럼 앉아 화두를 붙잡고 검푸른 바다보다 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큰스님은 불
시에 선방에 들어와 졸거나 자세가 흐트러진 제자가 보이면 여지없이 그의 등짝을 죽비로 내
리치며 불호령을 내렸다.
“이 도둑놈들아 밥값 내놔라! 해인사 밥이 썩은 밥인 줄 아느냐?”
어느 때는 죽비를 뚝 부러뜨려 두겹으로 쥐고 내리쳤다. 그렇게 부러지는 죽비가 일주일에
오륙십개나 됐다고 제자들은 기억한다.
엄한 스승이었다.
철저한 구도자였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의표를 찌르는 전혀 새로운 정신적 지도자였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5451A47529F372F08)
백련암을 나서는 성철스님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 법어)
제자와 사바세계의 대중들을 그렇게 가르치던 성철스님은 통영의 안정사에 주석할 때부터
절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3천배를 시켰다. 내 말을 듣는 것보다 부처님께 3천번 절하는 것이
더 이로울 것이다. 3천번 절하며 느끼는 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것과 같다 라고 설명하였다.
직장인 주부 늙은이 젊은이 모두 3천배를 해야했고 재벌도 장사치도 3천배를 해야만 성철스
님을 만날 수 있었다.
왜 그랬을까?
3천번 절하고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3천배 속에는 무슨 비밀이 숨어있는 것일까?
나는 그 해답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었다.
원영스님이 찾아온 젊은이들에게 3천배의 요령을 설명했다.「예불대참회문」이라는 경전을
읽으며 절을 하는 것인데 한번 다 읽으면 108배가 된다는 것. 그러므로 30번쯤 읽으면 3천배
가 끝난다는 것. 절을 하되 법도에 따라 해야 한다는 것. 물과 오이를 준비해서 3천배 장소
에 넣어주고 다 끝날 때까지 나오지 못하도록 밖에서 문을 잠그는 것이 통례인데 오늘은 삼
복더위에 촬영을 하는 관계로 문은 열어두겠다는 것. 고통을 참고 절을 하면서 나 스스로를
성찰해보라는 것.... 그동안에 나는 카메라맨에게 지금 이 시점의 주인공들의 얼굴을 정확히
찍어 놓으라고 지시했다.
아침 8시 백련암 법당인 적광전에서 내가 선정한 20대 후반의 상련(남)과 귀녀(여), 그리
고 그들을 격려할 불심 깊은 처사 천호석이 불상앞에 섰다. 그 처사는 거의 매일 3천배를
하는 중년의 남자로 초심자가 중도 포기하지 않도록 끝까지 함께 절하며 격려하는 길잡이
역할이었다. 불상과 마주 선 두 젊은이는 당당해 보였다. 계산하고 따지고 부딪치고 얻어내
는 이시대 젊은이들의 자신만만한 분위기였고 그래서 더욱 이까짓 3천배쯤이야 하는 듯한
자신감이 엿보이는 얼굴들이었다.
S#. 시작
아침 8시10분. 나는 "큐!"를 외쳤다. 연출가가 출연자와 스탭들에게 촬영시작을 알리는
구령이다.
절이 시작되었다. 드디어 그들은 힘차게 1배를 시작하고 2배 3배.. 5배... 10배를 거침없
이 이어갔다. 예불대참회문을 읽으며 한번씩 한번씩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어 3천배 그 기
나긴 고통의 터널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3천배를 시킨 성철
큰스님의 뜻을 알아내기 위해서 조연출 장혜영과 함께 그들의 표정 표정의 변화를 면밀히 관
찰하고 메모하기 시작했다. <계속>
![](https://t1.daumcdn.net/cfile/cafe/274DE04E529F39AE04)
성철스님 일대기중 백련암 스케치에 열중인 연출가와 이길호 카메라맨
첫댓글 아주좋은 송년선물^^만나면 좋은친구!이.동.석.
의미심장하지만 재미있겠다, 계속 수고 해주세요
새로운글 시작,, 즐겁게보고 기다림을 만들어주어 감사하네,, 건강하시게
시작부터 큰 스님의 영험이 느껴지는 스토리
엄청난 고통과 인내를 요한다는 말로만 듣던 삼천배의 생생한 실체를
오송의 글속에서 느껴볼수 있겠군요
다년간 산행하시면서 고통과 인내를 이겨낸 사람이니 더욱 생생한 느낌으로 간접체험하실 듯...
처처불상
이거, 잘하면 앉아서 그 어려운 삼천배의 효과를 .... 댕큐 !
멀리 중남미 대륙의 안데스 산맥에서 남태평양 군도를 건너
이번에는 가야산 백련암에서의 삼천배 Documentary 라 !!!
오랜만에 펼치는 다재다능 친구 吾松의 필력에 다시한번 감동이 기대되네 ~~~
불변하는 절대의 실체가 없다느 空과禪 그리고 절 또 그삼천拜!!!
그무더위 속에서의 백련암의 그림(?)과 당시의 묘사가...
과연 기대 됩니다!!!
우리 오송의 탁월한 Document적 서술과 현란한 표현의 글쓰기를 읽을 수있는 영광스러운 기회...
다음편이 기대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