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오광휘(吳光輝)는 오씨의 도시조인 오 첨의 24세손 오현필(보성오씨의 시조)의 넷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 말에 문과에 장원하고 상서성 좌복야를 거쳤다. 흥위위상장군으로 삼척 울진에 출몰했던 외적을 토평한 공으로 추충정난광국 공신에 서훈되고 함양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보성오씨에서 분관하여 본관을 함양으로 하였다. 시조의 아들 오홍예는 고려 때 정의대부, 손자 오 유는 고려 때 호부상서를 지냈다. 증손 오세용은 조선조에서 대사성을 역임했다. 오세용의 아들 오중원은 조선조에 이조판서, 손자 오 엄은 충청도관찰사를 지냈다. 조선의 문신이며 학자인 오 건은 조식, 김인후, 이 황 등의 문인이다. 선조 때 이조좌랑을 지냈으며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조선의 의병인 오익창은 진사 오사실의 아들이다. 그는 1597년 정유재란 때 피난민 수천 명을 인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도와 군량과 무기를 공급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오응(吳凝) : 문과(文科) 세조3년(1457) 별시 을과(乙科) 장원급제, 오전(1581 辛巳生) : 문과(文科) 광해군7년(1615) 식년시 을과(乙科), 오건(吳健, 1521 辛巳生) : 문과(文科) 명종13년(1558) 식년시 병과(丙科), 오형(吳泂, 1698 戊寅生) : 문과(文科) 영조14년(1738) 식년시 병과(丙科), 오석규(吳錫奎, 1864 甲子生) : 문과(文科) 고종30년(1893) 별시 병과(丙科), 오장(吳長, 1864 甲子生) : 문과(文科) 광해군2년(1610) 식년시 병과(丙科), 오명증(吳命增, 1659 己亥生) : 문과(文科) 숙종25년(1699) 식년시 병과(丙科), 오첨경(吳添慶, 1603 癸卯生) : 문과(文科) 인조23년(1645) 별시 병과(丙科), 오상문(吳尙文, 1603 癸卯生) : 문과(文科) 문종1년(1451) 증광시 정과(丁科), 오릉(吳凌, 1603 癸卯生) : 문과(文科) 성종14년(1483) 춘당대시 을과(乙科) 등 모두 38명이 있다. 문과 11명, 무과 6명, 사마시 21명이다. 주요파는 ▲형판공파 ▲안동파 ▲용계공파 ▲우재공파 ▲취수당파 ▲선산파 ▲사인공파 등 47개 파가 있다. 항렬자는 13世 이(以), 14世 삼(三), 15世 학(學), 16世 명(命), 17世 호(浩), 18世 상(相), 19世 찬(燦), 20世 곤(坤), 21世 석(錫), 22世 식(植)이다.
본관 함양(咸陽)은 경상남도 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신라 때는 속함군(速含郡) 또는 함성(含城)이라 하였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천령군(天嶺郡)이라 개칭하였고, 이안현(利安縣: 安陰)·운봉현(雲峰縣)을 영현으로 관할하였다. 고려 초에 허주(許州)로 개칭하였고, 983년(성종 2)에 허주도단련사(許州都團練使)로 승격하였으나 1010년(현종 1) 함양군으로 개칭하였고, 1172년(명종 2)에 함양현으로 강등되었다. 1395년(태조 4) 함양군으로 승격하였으며, 1629년(인조 7)에 현으로 바뀌었고 1729년(영조 5) 함양부(咸陽府)로 승격하였다가 1788년(정조 12) 다시 함양군으로 강등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함양군, 1986년 경상남도 함양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안의군(安義郡)에 있던 현내(縣內)·황곡(黃谷)·초점(草岾)·대대(大垈)·지대(知代)·서상(西上)·서하(西下) 등 7개 면을 통합해서 함양군으로 합병하였다. 1933년 위성면이 함양면으로 개칭되고, 1957년에는 석복면(席卜面)을 함양면에 통합하여 함양읍으로 승격되었다. 집성촌은 전라북도 고창군이 대표적이다. 고창군 입향조인 오세영은 함양부원군 오광휘의 10대손이자 참판공(叅判公) 수심재(修心齋) 오치선(吳致善)의 현손으로 1487년(성종 18) 서울에서 태어났다. 19세에 연산군의 난정(亂政)을 목격하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관을 모시고 외가가 있는 전북 고창군 대산면 연동리 장동으로 내려와 정착하였다. 오구는 오치선의 동생인 정랑공(正郞公) 오치행(吳致行)의 현손이자 남원군 오응(吳凝)의 증손이다. 그는 남원에서 살다가 전북 고창군 고수면으로 옮겨 와 정착하였다. 오세영(吳世英)의 손자 오익창은 정유재란 때 충무공 이순신을 도와 전공을 세워 임난공신으로 녹훈(錄勳)되었다. 오익창(吳益昌)의 아들 오전(吳晪)은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을 지냈으며, 이괄(李适)의 난과 병자호란 때 공을 세우고 효성이 지극하여 고창군 아산면 성산리 죽산사(竹山祠)에 배향되었다. 오구(吳球)의 큰아들 오명량(吳命良)은 춘천부사(春川府使)를 지냈고, 작은 아들 오명란(吳命鸞)은 이괄의 난이 일어나 전세가 화급하자 인조를 업고 서울을 떠났다. 오금리에 이르러서야 쉬면서“아이고 오금이야”라고 하였으므로 마을 이름이 오금리(梧琴里)가 되었다는 이른바‘오금리 전설’의 주인공이다. 오세영의 후손들은 현재 전북 고창군 아산면 성산리 죽산, 전북 고창군 아산면 남산리, 전북 고창군 성송면 양곡, 전북 고창군 심원면 연화리 등지에 많이 살고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전북 고창군에 살고 있는 함양오씨는 총 93가구에 226명이다. 그밖에 집성촌은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대천리, 황해도 송화군 윤유면 다천리 등이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함양오씨는 1985년에는 총 5,354가구 22,158명, 2000년에는 총 8,270가구 26,339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5년 만에 3천여 가구, 4천여 명이 늘어났다. 1985년 당시 전국의 지역별 인구 분포는 서울 4,298명, 부산 2,403명, 대구 1,198명, 인천 539명, 경기 1,447명, 강원 206명, 충북 209명, 충남 755명, 전북 4,857명, 전남 708명, 경북 1,546명, 경남 3,930명, 제주 62명이다. 전북 지역에 가장 많이 살고 있다. 그 뒤 15년 후인 2000년 현재는 서울 5,531명, 부산 2,898명, 대구 1,563명, 인천 940명, 광주 455명, 대전 577명, 울산 507명, 경기 3,795명, 강원 252명, 충북 250명, 충남 531명, 전북 3,724명, 전남 398명, 경북 1,304명, 경남 3,547명, 제주 67명이다. 서울, 경기, 전북, 경남, 부산 지역에 많이 살고 있다. 한편 오씨(吳氏)는 우리나라 토속 성씨가 아니다. 중국으로부터 건너온 성씨로 여겨진다.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말에서 나타나듯이 중국 양자강 부근의 주나라 제후국이었던 오(吳)나라에서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월나라 왕 구천과 견원지간이 되어 싸웠던 사람으로 오나라의 부차라는 사람이 있었다. 부차의 손자 루양이 천자로부터 오씨 성을 하사 받아 오씨가 생겨났다고 전한다. 오나라뿐 아니라 초나라에도 오(吳)씨가 있는 등 3가지 계통의 오(吳)씨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우리나라의 오씨는 신라 지증왕(500년) 때 중국에서 신라로 입국했다가 중국으로 귀환한 오첨을 도시조로 삼는 파가 있다. 반면 이를 부인하고 송나라의 대학사로서 984년(고려 성종 3년) 고려로 귀화한 오인유가 시조라고 주장하는 파가 있다. 오씨 본관들은 해주(海州), 동복(同福), 보성(寶城), 고창(高敞), 두원(荳原), 나주(羅州), 함평(咸平), 울산(蔚山), 낙안(樂安), 평해(平海), 군위(軍威), 의성(義城), 장흥(長興), 함양(咸陽), 화순(和順) 등이다. 오씨 대동보에 따르면 오첨을 도시조로 하는 해주오씨에서 울산, 낙안, 고창, 함평, 나주, 평해 등이 분적되었고, 동복오씨에서는 군위오씨가, 보성오씨에서는 장흥, 두원, 화순, 함양 오씨가 각각 분적된 것으로 보고 있다. 오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19명, 상신 4명, 대제학 3명, 개국공신 2명을 비롯하여 공신 8명, 청백리 3명을 배출했다. 해주오씨가 상신 2명, 대제학 3명, 공신 2명, 청백리 1명을 배출하여 주축을 이룬다. 그 외에 동복오씨, 나주오씨, 보성오씨 등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오씨 전체 인구는 2000년 현재 70만6908명이다. 이 중 해주오씨, 보성오씨, 동복오씨의 3본이 전체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해주오씨 422,735명 ▲보성오씨 59,914명 ▲동복오씨 55,517명 ▲함양오씨 26,339명 ▲나주오씨 25,546명 ▲군위오씨 22,408명 ▲고창오씨 16,716명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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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위키백과와 새만금일보가 다릅니다.
바로잡아야 하는데요..위키백과가 맞겠죠?
새만금일보 ㅡ 도시조인 오 첨의 24세손 오현필(보성오씨의 시조)의 넷째 아들이다
위키백과 ㅡ 도시조 오첨(吳瞻)의 24세손 오현필(吳賢弼)의 둘째 아들 오량(吳良)의 4대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