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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게시판 스크랩 한국교회사 /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3)
고영표 추천 0 조회 46 19.10.20 23:2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교회사 /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3)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아펜젤러(좌)와 언더우드(우) :

1885년 4월 5일 함께 내한한 두 선교사는

한국 개척교회의 개척자였으며 절친한 동역자였다.


배재학당

한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신교육 기관으로 1885년 8월에 설립되었다.

1887년에 건축된 교사는 한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서양식 벽돌 건물이기도 했다.


이화학당

1886년 스크랜톤부인에 의해 시작된 이화학당은 한국 여성교육의 요람이 되었다.


경산학당 교사와 학생들

서울에 1886년 설립된 구세학당 학생들로 1893년 경의 교사와 학생들이다.

 

 

고종의 선교윤허

 

미국 감리회 선교부의 지시를 받은 일본 주재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가

1884년 6월에 내한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교육 및 의료 선교 윤허를 받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1934년 감리교 선교 50주년 기념으로 배재학당에서 공인된 연극의 한 장면이다.

 

 

  

한국교회사(35)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Ⅰ. 선교사들의 입국

3. 아펜젤러의 입국

4) 아펜젤러의 활동

정동에 자리 잡은 아펜젤러는 8월 3일 이겸라, 고영필 두 학생을 데리고 영어 학교를 설립해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그 후 190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와 더불어 아펜젤러가 한국선교에 이룩한 업적은 연합선교, 성경 번역, 학교 설립, 신학 교육 그리고 문서 선교에 이르기까지 가히 경이적인 것이었다.

(1) 교육 사역

아펜젤러가 교육 사업을 시작한 것은 서울에 도착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서이며(4명의 학생을 가르침), 미국 공사관의 폴크를 통해 고종의 허락을 받은 후 1886년 6월 8일에 학교를 시작하여 7월 2일에 첫 학기를 끝냈으며, 1887년 2월에는 국왕으로부터‘배재학당’이라는 학교명을 하사받았다. 아펜젤러는 1887년 서울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예배실, 강의실 4개, 도서관 및 산업부를 위한 반 지하실을 갖춘 교사를 지었다. 아펜젤러가 산업부를 둔 것은 한국인들이 육체노동을 천시하고 경멸하기 때문에 노동의 숭고함을 고취시키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아펜젤러는 1887년 연례보고서에서 재학생이 63명이며 평균 최고 출석수가 40명 그리고 보고서를 쓰는 날까지 37명의 어른과 소년들이 입학했다고 썼다. 그러면서 그는 이 해에 회개하고 기독교인이 된 학생들이 나오게 된 것을 매우 고무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아펜젤러는 교육 사업의 초기부터 가능한 한 자조를 도입하려고 했다. 자조정책의 목적은 학생들로 하여금 대가를 낼 줄 모르는 자에게는 도움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새 교사가 생기면서 구 교사는 기숙사로 사용하였으며, 산업부를 두어서 근로 장학생들을 수용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자조훈련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방편의 하나였다. 아펜젤러는 이러한 훈련을 통해 자조·자주·독립의 근대정신으로 발전되어 나가도록 지도하였다.

또한 아펜젤러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자조하는 정신뿐만 아니라 자기 사회의 모순을 개혁하는 데 헌신해야 할 숭고한 마음의 자세를 갖도록 지도코자 하였다. 자기 사회와 나라에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섬기고 남에게 봉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펜젤러는「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7-28)는 말씀을 교육을 통하여 구체화하려고 노력했다. 해서 배재학당의 당훈(堂訓)을‘欲爲大者 當爲人役’즉‘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다른 사람의 부림
을 받아야 한다.’로 정하였다. 아펜젤러는 학생들을 통역관이나 교환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박학한 교양인으로 양성하는 데 뜻을 두고 있었다. 봉건적 사회질서에 순응하는 그런 인간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현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찾아 오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소임을 다하는 사람들을 양성하는 데 교육의 목적을 둔 것이다.

교육 사역을 통해 아펜젤러는 1887년 박중상, 한용경 두 학생을 개종시켜 예비 교인으로 만들었으며, 1888년 종교의 자유가 없어 신학부를 시작하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학생들 중에는 정규시간 외에 교사들을 만나는 말씀에 대한 진지함을 가진 8명의 학생들이 생겼으며, 1890년에는 대다수 학생들이 종교집회에 자발적으로 참석하는 성과를 올렸다. 1890년대에 들어서서 아펜젤러는 신앙교육을 한층 강화하였다. 아직 국내에서의 신약성경 완역출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배재학당에서는 한문신약성경을 교과과정의 일부로 삼았다. 교과과정의 일부로 했다는 것은 입학한 전원에게 기독교교육을 실시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몇 가지 현저한 변화가 유도되었다.

첫째, 한국인 교사와 학생들의 증가된 영적 분위기와 기독교 지식에 대한 열망이 두드러졌고 격려의 원인이 되었다.

둘째, 이러한 영적 분위기가 배재학당으로 하여금 새로운 사명감을 갖도록 했는데, 그것은 크리스천 일반교사를 예비하고 크리스천 사역자 즉 지방의 전임교역자를 훈련시키는 숭고한 기회와 숭고한 사업을 갖게 된 것이었다.

셋째, 위의 교역자 양성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1896년 2월에 신학부를 개설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신학부 개설은 1개월에 그치고 말았지만, 그것은 아펜젤러의 교육의 방향과 배재학당의 선교학교로서의 성격을 드러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펜젤러가 지도하는 신앙훈련은 학교의 분위기를 신앙적으로 변모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하여 1890년대 후반에 가서는, 크리스마스 때에 불신학생까지도 예수의 탄생을 통해서 자신들에게 내린 축복에 대해서 증거하게 되었다. 이렇게 학교는 완전히 기독교 정신으로 충만해 있게 되었고, 복음적인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한 힘 있고 진취적인 기구가 되었다. 학생들 중에는 교과과정만 밟고 학교를 마친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수는 아펜젤러의 교육이념과 신앙훈련에 큰 영향을 받아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며, 때로는 그들의 요청에 의하여 한 주간씩 기도회를 가지기도 하고, 성경공부반이 열리기도 했다. 이렇게 새로운 교육과 기독교 신앙을 통해서 개인의 삶이 변화되자 그 변화된 삶은 누룩과도 같이 사회에 퍼져 들어갔다.

아펜젤러와 함께 교육 사역에 동역한 이들로는 올링거 목사와 존스 목사 외에 벙커(D. A. Bunker), 노블(W. A. Noble) 등이 있다.

 

 

한국교회사(36)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Ⅰ. 선교사들의 입국

3. 아펜젤러의 입국

4) 아펜젤러의 활동

(2) 전도 사역

아펜젤러는 북감리교 해외선교부가 맥클레이 목사를 통해 한국정부로부터 교육과 의료사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바에 따라서 복음 선교를 위한 교육에 전념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의 중심에는 기독교 신앙과 복음의 진리를 어떻게 널리 전파하느냐 하는 것이 선교사로서의 그의 주된 임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복음을 통해서라야만 이 땅의 민족을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확실히 믿었다.

① 주한 외국인에게 전도

아펜젤러가 한국에 왔던 초기에는 자유롭게 한국인에게 전도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교육 사역을 먼저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인 1885년 겨울부터는 주한 외국인에게 전도하여 1886년 4월 초에는 3명의 일본인이 주일 오후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였으며, 그 가운데 1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성경공부 모임이 1886년 가을에는 일본 영사의 집으로 옮겨서 모이게 되었고, 참석자도 12명으로 늘어났다.

② 한국인에 대한 전도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의 개설을 준비하며 일본인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있을 무렵 선교사들은 한국인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것은 알렌의 한국어 교사인 노춘경이 몰래 훔쳐서 읽은 성경을 통하여 복음을 영접하고 자발적으로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겠다고 나선 일 때문이었다. 이 일로 인해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한국인을 향한 전도에 큰 용기를 갖게 되었다. 해서 아펜젤러는 그가 설립한 학교를 통하여 조심스럽게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다.

아펜젤러는 국왕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이 하사된 1887년 2월경에 한용경이라는 학생이 복음의 진리를 찾도록 인도했다. 한용경은 1886년 가을에 중국어 성경을 보고는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1887년 2월에 들어서 몇 주간 주일 저녁에 어둠이 깃든 후 참빛을 찾아서 아펜젤러에게 찾아오곤 했다.

또 다른 기회는 그의 제자인 박중상이라는 학생을 통해 찾아왔다. 그는 일본에 유학하는 동안 기독교에 입교한 듯하며 귀국해서 일본 공사관의 하야가와와 교제를 나누다가 세례를 권고받게 되었고, 아펜젤러에게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게되었다.

이 즈음에 그는 성서번역에 종사하면서 어학선생을 고용하고 있었는데, 그를 권서인 겸 전도인으로 세웠다. 그 이름이 서씨인 것으로 보아서 6년 전에 만주 우장에서 맥킨타이어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은 서상륜이 아닐까 추정된다. 아펜젤러는 서씨의 노력이 풍성한 결실을 얻을 수 있도록 축복해 달라고 그의 일기에 써 놓았다.

선교사들의 의료 및 교육부문의 활동과 영향력으로 선교상황은 점차 개선되어 갔으며, 한불조약 체결 후에는 기독교에 대한 금제(禁制)가 약화되어 한결 수월하게 복음을 전할수 있었다.

아펜젤러는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시내 남쪽에 조그마한 집을 한 채 사서 수리하여 한국인들이 모여서 예배할 수 있는 교회당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1887년 10월 2일 주일 날 저녁 그는 배재학교 학생인 한용경에게 두 번째로 세례를 주었으며, 10월 16일 주일에는 29세의 최씨 부인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그녀는 한국 개신교 사상 최초로 세례 받은 여성이 되었다. 10월 23일에는 한국에서 감리교 최초의 성찬예식을 가졌다.

③ 전도여행

아펜젤러는 1887년 4-5월에 걸쳐 지방 여행에 나섰다. 서울을 출발한 아펜젤러는 고양, 장단, 미력, 파주, 임진강, 송도, 금천, 통천, 평산, 서흥, 봉상, 황주, 철도 등을 거쳐 23일에는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평양감사 남정철의 영접을 받으며 평양의 풍물을 견문하였다. 이 여행을 통해 아펜젤러는 한국인의 도덕적 상태에 대한 절망과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만이 저들의 품위를 높여주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 여행은 1888년 봄,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같이 북부지방으로 약 2주일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들은 의약품과 책자와 소책자들을 팔면서 가는 곳마다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2주일간 전도여행을 계속하는 동안, 그들은 서울 주재 미국공사 딘스모어(Hugh A. Dinsmore)로부터 전도여행을 중지하라는 편지를 받았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한국정부의 반대에 직면하여 이 전도 사업을 계속해야 할 지 그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것은 오히려 한국정부에 대해 좋은 인상을 주었으며, 후에 개신교의 선교활동을 용이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아펜젤러는 1888년 한 해 동안 전도 사업을 위해 1,830마일이나 지방여행을 강행했는데, 그 가운데 1,400마일 이상은 승마 여행이었다. 1889년 2월에는 공주를 그리고 8월에는 대구를 거쳐 부산을 방문했다. 8개 도 가운데 6개 도를 방문했다. 시골에 있는 사람들은 이방인을 친절하게 맞아 주었고, 최소한 괴롭히지는 않았다.

서울에서의 활동과 정력적인 지방 전도여행의 결과, 아펜젤러는 1889년 27명의 한국인에게 세례를 주었고, 29명을 준교인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1889년 당시의 교인 수는 정교인이 9명, 준 교인이 36명, 준교인 중에서 2명이 사망하고 3명이 도중에서 떨어져 나갔으며, 주재전도사로서 임명받은 사람이 2명이었다. 또한 4명이 권서인으로 채용되었고, 부분적으로 3개의 교회 조직체가 있게 되었다.

④ 교회설립 및 건축

1887년 10월 9일 주일에 아펜젤러가 성경공부를 위해서 매입한 집인 벧엘에서 오후 예배를 시작했다. 오전에는 선교사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고, 오후에는 한국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선교사들의 예배에서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번갈아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한국인 4명이 참석한 한국인들의 예배에서는 아펜젤러가 1887년 12월 25일에 처음으로 권서인 최씨의 도움을 받아 한국어 설교문을 작성한 후 그것을 읽어줌으로써 설교를 시작하였다. 이런 설교는 아펜젤러가 한국어에 익숙해져서 자유롭게 설교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벧엘교회는 점차 성장하게 되어 1888년 3월 11일 주일에는 14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고, 비록 영어로 진행된 것이긴 했지만 이 무렵 주일학교가 아펜젤러의 집에서 30분간씩 인도되었다. 또한 스크랜튼 부인(스크랜튼 선교사의 어머니)에 의해 여성들을 위한 저녁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최초의 부인 예배로서 첫째 날에 21명이 참석했다.

1894년 정동과 이화학당 구역에서 남녀가 각각 따로 모여 예배드리는 회중을 합치면 200명이나 되었다. 해서 예배당을 신축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1895년 8월 7일에는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교회의 신축공사는 잘 진행되어, 1896년 6월 3일에는 거의 창 높이까지 쌓아져서 건물의 윤곽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교회 건축에 소요되는 경비때문에 크게 고심하고 있었다. 이미 막대한 금액을 투입했지만, 아직도 많은 경비가 요청되었다. 그는 이 건축경비 마련을 위해 그의 아버지에게 눈물겨운 호소를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통 끝에 신축 교회당은 1897년 7월 거의 완공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 달 8일 종강행사 때 사용되었다. 그리고 1897년 10월 3일 주일에 남녀 교우들이 모여 이 새 예배당에서 첫 예배를 드렸고, 그해 12월 26일에 예배당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새 교회당이 완공된 것은 그 이듬해인 1898년 10월이었다.

(3) 성경 번역 사역

한국에 도착했을 때 선교사들은 존 로스 목사가 번역한 신약성경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못 되어서 이것이 매우 불완전하며, 보다 나은 번역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서 그들은 성서번역상임실행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아펜젤러는 그 후 수년 동안 이 위원회의 한 구성원으로 일했다. 위원들은 선교사들 가운데서 번역 작업을 확실히 할 수 있는 사람들로 선출되었다. 아펜젤러는 처음으로 뽑힌 사람들 속에 포함되었으며, 그 이후 계속해서 번역반에 소속되어 일했다. 아펜젤러는 가능한 모든 회기에 이 모임에 참석하기위해 최선을 다했고, 이 일에서 큰 기쁨을 느꼈다.

또한 아펜젤러는 기독교 서적을 번역 출판하는 일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이 책들을 출판하기 위해 대한성교서회를 설립하였으며, 주일학교연합과 감리교 선교부 문서회의 후견인으로 일했다. 그리고 올링거 목사와 함께 출판소와 제본소를 시작하여 각종 신앙 서적을 출판하였다.

뿐만 아니라 올링거 목사와 그의 아내가 1892년부터 ''코리언 리포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를 발행하다가 떠난 후, 그 발행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1895년부터 4년 동안 아펜젤러는 존스 목사와 함께 이 책을 다시 발행하였다. 이 잡지의 영향력은 전 동양에 미쳤으며, 한국 문제에 대한 권위지로 통했다.

5) 아펜젤러의 순교

1902년 6월 11일 밤,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목포로 가는 작은 증기선인 쿠마가와 마루호를 타고 가던 아펜젤러는 그가 탄 배가 기소가와호와 충돌하는 바람에 그만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목포로 가던 배에는 그의 번역 조사 조한규와 아펜젤러가 동행시킨 여학생 한 명, 광산기술자 미국인 보울비 그리고 2,3명의 일본인이 동승하고 있었다. 한밤중 짙은 안개 속을 헤치며 항해하던 배는 마주 오던 배와 충돌하게 되었다. 곧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고, 보울비와 아펜젤러는 갑판으로 올라왔으나, 아펜젤러는 자신의 안전보다도 동행했던 조사와 여학생의 안전을 먼저 생각했다. 해서 물에 빠진 여학생을 건지려다 결국 순교하고 말았다.

그는 한국선교 17년 만에 4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동안 그가 이룩한 선교의 업적은 가히 경이적이었다. 세상을 떠나기 바로 한 달 전, 아펜젤러는 17년 동안의 한국 선교를 이렇게 정리했다.

“한국에서 첫 세례 받은 사람이 생긴 지 15년이 채 안되며, 첫 지방회가 조직된 지 12년이 좀 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재 세 장로사와 세 지방회가 있고 입교인이 1,296명, 학습인이 4,559명이 있으며, 14명의 본처 전도사와 47개의 교회와 주일학교가 있습니다. 교회는 목회와 교회 경비와 교회 건물들의 경비를 위해 1,600달러의 헌금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한국교회사(37)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Ⅰ. 선교사들의 입국

4. 각 선교회의 입국

알렌과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입국한 후 세계 각국의 선교사들의 관심이 은둔의 나라 한국에 쏠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미 북장로교와 감리교 외에 타 선교회에서도 한국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1) 영국 성공회

미 북장로교와 감리교 선교회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 선교를 시작한 교단은 영국 성공회였다. 1883년 말경 얼마 동안 제물포와 서울을 방문하고 돌아간 주중 영국 전권대사 해리 팍스(Harry Parkes) 경은 한국에서의 복음 전파의 문호개방에 관한 편지(1884년 1월 12일자)를 받고 한국선교의 시급성과 필요성을 담은 서신을 띄웠으며, 찰스 스캇(Charles Perry Scott) 감독은 이 편지를 켄터베리(Canterbury) 대주교에게 전했다. 하지만 영국 성공회가 한국 선교를 시작하기까지는 그로부터 5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성공회는 코르프(C. J. Corfe, 1865-1921, 高要翰)가 여섯 사람의 성직자와 랜디스(E. B. Landis, 1865-1898) 등 2명의 의사와 함께 1890년 9월 26일 부산에 도착해서 주로 제물포와 서울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성공회는 직접 선교보다는 의료 선교, 사회복지 사업, 문서 선교에 주력했다. 1890년 10월 제물포에 성누가병원, 1891년 정동에 성베드로병원과 낙동에 성마태병원을 개원했다. 경기도 여주와 충북 진천에도 병원을 설립하여 의료 선교를 활발하게 전개했다. 성공회는 낙동에 인쇄 시설을 갖추고 성교이증(聖敎理證), 성회송가(聖會頌歌) 등을 발간하여 문서 선교를 시작했다. 영국 성공회는 6년 동안 한글,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습득하면서 직접 전도는 삼가해 오다가 1897년 10월 30일에 한독막에게 최초의 영세를 주었으며, 다음달 7일에는 김희준과 김군명에게 각각 영세를 주었다.

2)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

영국령이던 호주의 빅토리아 성 장로교회 외국선교위원회가 한국 선교를 시작한 것은 1889년이다. 그해 10월, 언더우드가 “대단히 재능이 많고, 거룩하고 열정적이며, 이제까지 한국에 왔던 가장 훌륭한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예찬했던 조셉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 1856-1890)와 그의 여동생 메리 데이비스(Mary T. Davies)가 빅토리아성 장로교회의 후원을 받아 한국에 입국했다. 빅토리아성 장로교회는 교인이 약 3만 5천밖에 되지 않는 작은 교단이었으나 외국선교에 대한 열의는 대단했다. 빅토리아 성 장로교회 외국선교위원회는 1860년 조직되어 호주 본토인들과 중국 이민자들, 뉴 헤브라이즈(섣 New Hebrides)에 선교를 해왔다. 호주 장로교회 본부가 선교 사업을 통괄하지만 실제로는 빅토리아 성 장로교회가 선교를 직접 맡고 선교비도 조성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호주 선교회라 하지 않고, 빅토리아 장로교회 선교회라 불렀다.

조셉 데이비스와 그의 동생 메리 데이비스는 호주의 메카트니 목사가 운영하는 한 작은 선교지에 실린 한국 선교를 촉구하는 편지를 읽고 한국 선교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 편지는 영국 성공회 소속 존 울프(Archdeacon John R. Wolfe) 선교사가 알렌의 초청으로 선교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한국의 선교지를 돌아본 후 그 가능성을 확인하고는 본국 선교부에 한국 선교를 호소한 것이었다.

1889년 8월 5일 장로교 목사로 안수를 받은 데이비스는 여동생과 함께 8월 21일 한국을 향했으며, 10월 2일 부산을 거쳐 4일에 서울에 도착함으로써 호주 장로교 선교가 시작되었다. 5개월을 서울 언더우드 집에 머물면서 한국 선교를 준비하던 데이비스는 서울과 서북 각도에서 이미 선교가 시작된 것을 확인하고 남부지역을 개척하기로 언더우드와 뜻을 모았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그리 오래 사역하지는 못했다. 데이비스에 대해 언더우드의 아내 릴리아스는 ‘언더우드 한국에 온 첫 선교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해(1889년) 여름에 오스트레일리아의 데이비스 목사가 그의 누이동생과 함께 한국에 왔다. 그는 언더우드와 똑같은 열정적인 정신, 똑같은 힘, 똑같은 언어의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은 완전히 마음이 통했으므로 언더우드는 그와 같은 조언자와 조력자로부터 앞으로 큰 축복과 도움을 받기를 원하였다. 물론 이 두 사람은 모두 기도에 강한 신앙인들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하고 있는 사업과 그들이 구원하기를 갈망하는 수백만의 사람들을 위해 함께 언더우드의 서재에서 기도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에는 알 수 없는 신비함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다음 해 늦겨울 이 아름다운 영혼은 하늘로 불려갔던 것이다. 그는 내륙을 여행하는 도중 천연두에 걸려 가까스로 한국 남쪽 해안의 부산에 도착하였으나, 그곳에서 흙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데이비스는 1890년 3월 14일, 부산을 호주 장로교 선교 거점으로 삼아 경상남도 지역을 무대로 복음을 전하기로 하고, 부산 지역 선교 답사를 위해 누이를 서울에 남겨둔 채 어학선생과 수행원 한 명을 대동하고 충청, 경상도를 거쳐 부산에 이르는 장장 300리의 장거리 여행을 떠났다. 환전한 엽전을 가지고 가는 일, 열악한 여인숙에서의 숙박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한국 음식에의 적응으로 고생했지만 부산으로 내려가는 동안 성경을 팔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성경을 구입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로 대단히 격려를 받았다.

3월의 한국 날씨는 쌀쌀해 충분한 준비 없이 여행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충분한 수행원을 동행하지 않고 여행을 떠난 데이비스는 많은 어려움을 만났다. 수원, 남원, 하동을 거쳐 부산에 도착했으나 4월 5일 입국한 지 불과 6개월도 되지 않아 천연두에 감염된데다 폐렴마저 겹쳐 갑자기 세상을 떠나 데이비스의 부산선교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오빠 데이비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동생 메리는 더 이상 홀로 남아 한국 선교를 강행하기가 힘들어 고향 호주로 돌아갔다. 이 소식이 데이비스가 소속된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에 알려지자 한국 선교를 포기할 수 없다는 여론과 한께 교단적인 차원에서 한국 선교를 착수하기로 결정했다.

데이비스의 죽음에 자극을 받은 호주 장로교 여선교회 연합회와 빅토리아주 장로회 청년연합회가 맥케이(James H. Mackay) 부부와 벨 멘지(Belle Menzies), 진 패리(Jean Parry), 파셋(M. Fawcett) 세 명의 여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이들은 1891년 10월 12일에 부산에 도착해 부산 초량을 거점으로 부산, 진주, 마산 등 경남 지역 선교사업을 시작하여 농촌 교회와 부녀자 사업을 위해 남다른 공헌을 남겼다. 이렇게 해서 데이비스의 죽음은 호주 장로교의 한국 선교를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것이다.

3) 미국 남장로교회

1892년에 호주의 빅토리아 선교회에 이어 미국 남장로교회가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남장로교 선교부는 이미 중국, 이탈리아, 브라질, 멕시코, 쿠바, 희랍, 일본에 선교사를 파송한 상태였다. 남장로교회의 한국 선교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은 언더우드였다. 언더우드는 안식년으로 미국에 체재중이던 1891년 9월에 시카고의 맥코믹신학교에 들러 신학생들에게 한국 선교 상황에 대해 강연하였는데, 이때 남부 출신 테이트(Lewis Boyd Tate, 崔義德)가 큰 감동을 받았다. 그해 10월 미국 내쉬빌에서 열린 전국 신학교 해외선교대회(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s)에 한국의 언더우드와 밴더빌드대학교에 재학 중인 윤치호가 강사로 초빙을 받아 한국 선교를 호소하는 강연을 하였다. 이 대회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국에 입국하기 전 참석하였던 미국 안에서 가장 유명한 학생선교대회였다.

해외선교를 꿈꾸던 테이트, 존슨(Cameron Johnson), 레이놀즈(William David Reynolds, 李訥瑞) 등 남장로교 소속 목사 후보생들이 감동을 받고 한국 선교를 결심했다. 후에 전킨(William McCleary Junkin, 全緯廉)이 일행에 합류했다. 4명의 학생은 모두 선교회의 실행위원회에 한국에 보내달라고 신청하였으나, ‘새로운 선교회를 만들 방법이 명확하지 않다.’는 대답을 들었다.

언더우드는 북미의 다른 친구들의 협력과 자신이 애써 모은 거금 3,000달러와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를 운영하는 형프레드에게 부탁해 2,000달러를 마련해 총 5,000달러를 한국 선교를 위해 써 달라며 미국 남장로교 해외 선교부에 선교기금으로 보냈다. 또한 뉴욕의 존 언더우드(John T. Underwood)가 25,000달러를 남장로교 해외선교위원회에 보내 왔다. 이렇게 되자 남장로교 선교부는 더 이상 한국 선교를 지연시킬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한국 선교를 지망하는 전킨, 테이트, 레이놀즈, 마티 테이트(Mattie S. Tate), 린니 데이비스(Linnie Davis), 팻시 볼링(Patsy Bolling), 메어리 레이번(Mary Leyburn) 등 일곱 명이 두 그룹으로 나뉘어 각각 그 이듬해인 1892년 10월 18일과 11월 3일에 한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

도착 후 이들은 레이놀즈를 회장으로 한 남장로교 선교회를 공식적으로 조직하고 한국 선교를 시작했으며, 1893년 1월에 장로교 공의회 조직 때 레이놀즈가 의장에 선출되는 등 남장로교 선교회는 처음부터 한국 선교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들은 즉시 한국어 습득에 들어가 1년 정도 지나 간단한 설교를 할 수 있게 되자 1893년에 레이놀즈는 강화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테이트는 마포삼열과 더불어 평양을 비롯한 북부지역에 선교여행을 떠났다. 1894년 2월에 열린 제2차 남장로교 선교회의 결정에 따라 사역지를 전주와 군산을 중심으로 한 전도 사업을 전개하였으며, 의료선교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898년 11월 3일 의료선교사 잉골드(Mattie B. Ingold)를 통해 호남 지역 최초의 의료기관인 전주예수병원을 설립했다.

 

한국교회사(38)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Ⅰ. 선교사들의 입국

4. 각 선교회의 입국

4)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

캐나다 장로교의 한국 선교가 시작된 것은 1898년이지만 캐나다 출신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한 것은 그보다 10여 년 전인 1889년이었다. 캐나다에서 가장 먼저 한국 선교에 관심을 표명한 곳은 당시 영국과 북미 전역에 일고 있던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영향을 받고 있던 토론토대학이었다. 1887년 5월 토론토대학교 낙스 칼리지 먼쓰리(The Knox College Monthly)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조나단 고포드(Jonathan Goforth)의 말을 인용해, “복음에 문을 연 마지막 나라, 한국이 소리 높여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1,500만의 영혼들이 주님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다.”며 한국 선교를 촉구했다.

그로부터 2년 6개월 후, 1889년 12월 15일 한국어를 한국사람보다도 더 유창하게 구사하는 선교사로 알려진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 奇一)이 명문 토론토대학을 졸업하고, 그 대학 YMCA로부터 8년간 연 500달러의 지원을 약속 받고 한국에 입국했다. 이듬해 3월까지 서울에 체류하던 게일은 선교지를 답사한 후 황해도 송천(松川)으로 옮겨 3개월간 그곳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선교가 여의치 않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가 부산으로 내려갔다. 1892년 봄까지 부산에서 복음을 전하던 게일은 토론토대학 YMCA와 관계를 끊고, 1891년부터 북장로교 선교회로 이적하고, 부산에서 원산으로 선교 거점을 옮겨 새롭게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게일은 마펫과 함께 1891년 2월 27일부터 5월 말까지 3개월 동안 압록강 봉천에 이르는 1,400마일의 역사적인 전도여행을 하였다.

그러나 캐나다 장로교의 선교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을 통해 시작되었는데, 그 동기를 제공한 사람은 바로 매켄지(William John McKenzie, 1861-1895) 목사였다. 그는 선교회의 공식 파견 선교사가 아니고, 개인 자격으로 내한했던 열정의 청년이었다. 그는 캐나다 동해안의 라브라도(Labrador)에서 개척 전도를 하다가, 졸지에 한국 선교를 착상하여, 친구들에게 기여받은 제한된 선교비를 가지고, 1893년 12월에 한국에 입국했다.“ 그는 조선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서 그들과 같이 살다가 마지막 나팔 소리를 들을 때까지 그들과 같이 일하리라.”는 결의를 가지고 한국 선교에 임했다.

그는 서울에서 몇 달을 지낸 뒤 벽촌 황해도 장연의 솔내(松川)에 가서, 한복을 입고 한식을 먹으며, 이 겨레와 함께 생활을 했다. 이곳에서의 그의 삶은 희생과 봉사와 헌신의 삶 그대로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건강 악화로 인해 이듬해 1895년 6월 23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익숙하지 아니한 기후, 고독, 극단의 조식(組食), 열병, 이런 것들이 그의 의지를 꺾고, 그의 신체를 병들게 하여”마침내 낯선 솔내 초가집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그의 죽음은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가 한국 선교를 하기로 결정하는 동기를 제공하였다. 그의 외로운 죽음은 숱한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는데, 그 가운데 솔내 교회의 한 늙은 신자였던 서경조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그는 캐나다에 매켄지에 대한 소래 교인들의 존경과 애정, 그와 같은 목사를 파송해 달라는 내용을 담은 편지 한 장을 띄웠다. 마침내 캐나다의 장로회 총회는 1897년 한국 선교를 의결하고, 1898년 9월 8일에 푸트(W. R. Foote) 목사, 맥레(D. M.McRae) 목사, 그리고 그리어슨(R. G. Grierson) 박사 등 세사람을 파송하게 되었다. 이것이 함경도를 중심으로 선교하게 된 캐나다 장로회의 선교의 시작이었다.

1898년 캐나다 장로회가 한국 선교를 시작하였을 때,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는 이때까지 도와주던 한 사람의 재한 선교사에 대한 후원을 중지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제임스 게일이었다. 게일은 1892년 북장로교 선교부로 적을 옮겼다. 그럼에도 토론토의 후원은 1898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자체 선교사를 파송함으로써 그 후원을 중지했던 것이다.

캐나다 출신의 또 한 명의 선교사는 후에 1903년 원산부흥운동의 주역으로 널리 알려진 로버트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 하리영, 1890)이다. 토론토 의대 YMCA는 1890년 봄 하디가 의대를 졸업할 때 그를 한국 의료 선교사로 임명했다. 하디는 1890년 9월 30일 최소한 8년간의 복무보장을 받고 한국에 입국했다. 본래 하디는 게일과 함께 부산을 거점으로 선교 활동을 수행할 예정이어서 1891년 4월 14일 도착하여 한국인 집 하나를 세내어 사역을 시작했고, 8월에 그의 아내와 자녀들이 합류했다. 1892년 북장로교 선교회와 호주 장로교 선교회가 부산에 선교사역을 착수하자 서울로 올라와 토론토 의과대학 스승이었던 에비슨(O. R.Avison)을 도와 잠시 제중원에서 함께 사역하였다. 그러다 하디는 게일과 펜윅 두 캐나다 출신 선교사들이 활동하는 원산으로 선교지를 옮겨 그곳을 선교 거점으로 삼았고, YMCA와 맺은 8년간의 복무 약속이 끝난 1898년에 남감리교 선교회로 적을 옮겨 사역하였다.

이렇게 해서 1898년까지 한국에는 미 북장로교, 미 남장로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등 네 개의 장로교 선교회가 입국해 한국장로교 선교를 가속화시켰던 것이다. 한국에 입국한 각 장로교회 선교회는 1893년에 결성된 장로교공의회의 구성원이 되어 교단별로 한국 선교를 추진하기보다 범 장로교연합을 통해 선교의 효율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5) 미 남감리교 선교회

1885년 아펜젤러와 스크랜톤의 입국으로 시작된 북감리교 선교에 이어 1896년 남감리교도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남감리교 선교가 시작되기까지는 중국 주재 남감리교 선교사 리드(Clarence Frederick Reid)와 밴더빌드대학 출신 윤치호의 노력이 컸다. 리드 선교사는 1892년 2월 입국해 중국 북부지역에서 활동하기 위해 그곳 사정을 시찰하던 중 이미 “다른 여러 선교회에서 벌써 점거”한 것을 확인하고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마침 남감리교 교인이자 남감리교가 운영하는 중서학원 교수를 지낸 윤치호로부터 간곡한 요청을 받고 한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896년 5월에 열린 남감리교 해외 선교부는 헨드릭스 감독이 제출한 남감리교회 상해선교연회의 한국선교구 설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1896년 8월 14일 한국의 첫 남감리교 선교사로 임명받은 리드와 그의 가족이 상해에서 서울에 도착했다. 중국 선교구역의 한 지방으로 한국 선교를 시작했던 남감리교는 1897년 5월 중국연회에서 분리하여 한국선교부를 조직하고 리드 목사가 초대 감리사가 되어 송도에 선교 거점을 마련했다.

6) 대한(동아) 기독교(침례교) 선교회

침례교의 전신 대한(동아)기독교의 한국 선교는 두 개의 역사적 기원을 가진다. 하나는 캐나다 출신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1863-1935)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엘라 씽 선교회(Ella Thing Memorial Mission)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은 하나의 뿌리, 즉 영미 복음주의운동의 선구자 고든(Adoniram J. Gordon)이 담임하고 있던 보스톤의 클라렌돈 가(街) 침례교회에서 유래되었다.

근대 복음주의운동과 해외선교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나이아가라 사경회에서 은혜를 받은 펜윅은 그 사경회의 지도자들과 말씀을 공부하면서 선교사로의 소명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1887년 학생자원운동의 지도자로 북미에서 해외선교열을 고취시키는데 기여를 한 로버트 와일더(Robert P.Wilder)의 토론토 방문과 그의 강연을 통해 한국 선교를 결심했다. 펜윅은 몇몇 YMCA 회원 기독교 사업가들에 의해 조직된 한국 연합 선교회(Corean Union Mission)의 지원을 받는 독립 선교사로 1889년 12월 한국에 입국하였다.

펜윅은 소래를 거쳐 원산에 정착했는데, 이는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선교를 시작하지 않아 새로운 선교지로 전망이 밝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펜윅은 매켄지가 그랬던 것처럼 한국 문화, 예절, 전통, 풍습 전반을 대단히 존중했다. 그는 선교사는 언어, 관습, 사람에 관한 실제적인 지식을 터득한 뒤에야 비로소 전도할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펜윅은 한국인에 의한 복음 전도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선교 방법이라고 확신하여 이를 직접 실행한 선교사이기도 했다.

펜윅이 침례교와 유대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은 1893년 안식년 차 귀국해 캐나다에 머물고 있는 동안 고든이 목회하고있는 보스톤의 클라렌돈 가 침례교회를 방문하면서부터이다. 펜윅은 1889년 고든이 설립한 보스톤 선교사 훈련원에서 교육을 받은 바 있었다. 펜윅은 1894년 한국순회선교회를 조직하고 한국 연합 선교회와 결별하였으며, 같은 해 고든과 피어선(Arthur T. Pierson)으로부터 안수를 받은 후, 본국 친구들의 협조를 얻어 중국내지선교회의 강령과 비슷한 원칙 하에 한국순회선교회를 조직하고 1896년에 그 선교단체의 책임자로 한국에 돌아와 원산을 거점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펜윅과 별도로 클라렌돈 가 침례교회는 한국 선교를 위해 사업가였던 씽(S. D. Thing)이 자기의 외동딸 엘라 씽을 기념하여 엘라 씽 선교회를 설립하고, 1895년 폴링(E. C.Pauling) 목사 부부, 아만다 가들린(Amanda Gardeline) 양을 파송하고, 이어 스테드맨(F. W. Steadman) 목사 부부, 사디 액클(Sadie Ackles), 아마 엘머(Arma Ellmer) 양을 추가로 파송했다. 이들은 부산을 거처 충청도 공주, 강계, 홍성등에서 복음을 증거했다. 그러나 애쓴 보람도 없이 재정난으로 존속이 어렵게 되어 결국 철수하게 되었고, 1900년 스테드맨은 펜윅에게 선교지 교회와 그 전 소유권을 이양하게 되었다. 따라서 펜윅은 1889년 12월에 독립 선교를 시작하였다가 1895년 시작된 침례교회를 1900년에 흡수해서 침례교 선교로 전환하여 한국에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한국교회사(39)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Ⅰ. 선교사들의 입국

4. 각 선교회의 입국

7) 동양선교회(聖潔敎)의 한국선교

동양선교회는 성결교의 전신으로 1907년에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성결교는 단일한 하나의 교파로 시작한 교회는 아니었다. 초교파적인 동양 선교를 위한 단체에서 출발해 자리잡은 교회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감리교 신자였던 카우만(Charles E. Cowman,1867-1924) 목사와 친구 킬보른(E. A. Kilbourne)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뜨겁게 체험하고 성서적인 순복음을 동양 여러 나라에 전도하겠다는 단심 하나만으로 후원의 약속과 그 전망이 전혀 없는 소명의 길을 떠났다. 일본 동경에서 이들은 미 북감리교 전도사로 활동하다 무디 성경학교를 졸업한 후 뚜렷한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고 귀국한 나카다 쥬지(中田重治, 1870-1939)를 만나 1901년 4월에 도쿄 간다(神田)에 중앙복음 전도관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일본에서 시작한 그들의 선교사역은 그들 자신도 놀랄 만큼 날마다 신장되었다. 이들은 본래 교파 형성의 의도 없이 출발하여 감리교 본래의 방향인 성결의 복음을 만인에게 선포할 생각이었으나 기구의 조직이 불가피할 정도로 신도수가 확장되어, 결국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는 교단을 세워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1905년 11월 일본인, 한국인, 중국인이 참석한 가운데 동양선교회를 조직하고 동양 각 지역의 선교를 시작했다. 성결운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는 중생, 성경의 은혜로 말미암는 성화, 믿음에 의한 신유, 그리고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사상에 근거한 재림 등 사중복음을 자신들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가르침으로 표방했다.

동양선교회 한국선교는 1907년에 시작되었지만 한국에서의 복음의 접촉은 그 이전부터 있었다. 나카다 쥬지는 혼다 요이치와 함께 일본 복음동맹회의 파송으로 1904년 5월 11일 동경을 출발하여 부산, 목포를 거쳐 제물포에 도착했다. 서울, 송도, 평양, 선천, 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까지 순회하면서 주로 일본병사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였지만, 여러 곳의 한국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할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서북지역은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영적 각성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지역들이었기 때문에 나카다는 살아 움직이는 한국교회의 현장을 직접 목도할 수 있었다. 제물포를 거쳐 서울에 돌아온 나카다는 수원, 공주,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약 2개월 반의 한국 전도여행을 마치고 7월 말에 제물포를 출발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갔다. 킬보른의 장남 E. I. 킬보른에 의하면 동경성서학원 최초의 한국인 유학생 정빈(鄭彬)은 나카다의 한국전도여행의 결과였다. 그렇다면 비록 2개월의 짧은 한국전도여행이지만 이 기간 동안 나카다는 후에 한국선교를 개시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한 셈이다. 그로부터 3년 후 동양선교회 한국선교가 개시되었다.

동양선교회 한국선교는 한때 연동교회 청년 신자였던 정빈이 김상준의 협력을 얻어 시작했다. 정빈은 1904년 일본으로 건너가 1907년 3월 동경백목성서학원을 졸업한 후 그 해 5월 2일 가우만, 킬보른과 함께 일본에서 귀국해 같은 학교 출신 김상준의 협력을 얻어 1907년 5월 30일 한국의 최초 성결교회인 염곡복음 전도관을 설립했다. 1908년 이장하가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이들과 합류해 이들 세 명은 동양선교회 한국선교를 태동시킨 개척자들이 되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전국을 휩쓸고 있던 5월 2일 입국한 이들은 부산에서 평양까지 여행하는 동안 부흥운동의 현장을 몸소 체험하며 선교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현재의 종로 1가인 경성 염곡에 오륙십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작은 집 한 채를 세 얻어 임시 전도관을 차린 후 카우만 일행이 2주간 집회를 개최했다. 카우만 일행이 돌아간 후 정빈과 김상준이 5월 30일 이곳에 복음 전도관의 효시인 ‘동양선교회 예수교 복음 전도관’을 설립하였다.

정빈과 김상준은 창립집회 때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는 구도자가 5명이나 생겨나 힘을 얻고 일주일에 8번의 집회를 열면서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부흥을 가져왔다. 이러한 성장은 평양대부흥운동으로 인한 놀라운 성령의 역사로, 다른 한편으로는 정빈과 김상준을 비롯한 초기 개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가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헌신적인 전도열에 힘입어 6개월 만에 272명이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비록 이 숫자는 평양대부흥운동이 한창 일고있던 경성에서 당시 장로교와 감리교가 얻은 수확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교단 배경도 없고 선교사가 상주하는 것도 아닌 데도 소수의 한국인 지도자에 의해 한 전도관에서 그 같은 결실을 얻었다는 것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부흥운동의 열기, 카우만과 킬보른의 헌신적인 지원 그리고 김상준, 정빈과 같은 일본백목성서학원에서 훈련받은 이장하의 합류로 동양선교회 한국선교는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동양선교회는 처음 시작할 때 특정한 교파의식을 갖지 않고 문자 그대로 노방에서 복음을 전해 구주를 영접하게 한 후 이들을 인근의 기존의 다른 교파 교회로 인도했다. 그러다 노방전도가 비난이 일자 정빈은 카우만의 도움을 얻어 1908년 9월 현 을지로 입구인 동현(銅峴, 구리개)에 염곡보다 더 큰 150석의 중국인 소유 기와집 한 채를 월 20불, 6개월 기한으로 임대하고 오전에는 성서학원을 개교하고 오후에는 전도집회를 개최했다. 그 해 11월 카우만과 킬보른이 다시 내한하여 집회를 개최하면서 동양선교회는 날로 성장을 거듭했다. 정빈, 김상준, 이장하는 전도관이 협소하여 고민하던 중 이듬해 1909년 5월에 온 카우만 일행이 다시 경성을 방문하자 이들과 함께 장소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고, 장로교인 이씨의 도움으로 무교정에‘신 성결장막’이라 부르는 경성중앙복음 전도관을 설립했다. 당시 이들이 자리를 잡은 무교정은 모교동 또는 모전이라 불린 상가 지역으로 여인네들의 머리 장식과 갓을 파는 장사치들로 붐비는 곳으로서 가까이 인접한 다정은 경성에서는 기생촌으로 유명한 환락지대였다. 때문에 지극히 세속에 물든 서민들과 민중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이 교회가 정식으로‘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고 부르게 된 것은 1921년의 일이었다.

8) 기타 교단의 한국 선교

① 플리머스 형제단

1896년 12월 플리머스 형제단 노리마츠(乘松雅休, 1863-1921)가 입국해 수원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해 기독동신회를 조직, 플리머스 형제단을 한국에 전파했다. 그는 일본의 신민화 정책의 시녀역할을 했던 조합교회 와다세와는 달리 정치적 권력과 무관한 입장에서 순수하게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② 구세군

구세군은 1907년 10월 허가트(R. Hoggart)가 내한 한국선교를 착수했다. 본래 사회복지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전통을 따라 구세군의 한국선교 역시 이 방면에서 진행되어 초기 한국선교가 직접 선교와 간접 선교의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③ 러시아 정교회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 이후 정치적 불안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이른바 아관파천 후 한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던 1899년 혹은 1900년 한로(韓露) 해빙무드를 타고 러시아 정교회 선교회가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④ 안식교

1904년 이단으로 평가받고 있는 안식교가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선홍조와 유은현이 하와이 이민 길에 일본에 들렸다가 재림교회 전도사 구니야로부터 침례를 받고 이민을 포기하고 6월에 국내에 들어와 선교했다. 귀국 도중 하와이 개발공사 계몽원 임기반에게 전도하고, 8월 10일과 9월 13일에는 구니야와 일본주재 재림교회 선교사 필드(F. E. Field)를 초청하여 한국선교를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러다 1905년 11월 안식교 선교사 스미스(W. R. Smith) 목사가 내한 1906년 선교본부를 평남 순안에 두고 전도, 교육, 의료, 문서를 통해 전국적으로 선교를 확장해 나갔다. 타 개신교단에 비해 안식교는 처음부터 토요 안식일 준수와 재림신앙으로 인해 기성 교회, 정부, 일반 사람들 모두로부터 적극적인 호응을 받지못했다.

⑤ 여호와의 증인

역시 이단으로 평가받고 있는 일명 여호와의 증인, 만국성경연구회도 1912년 헐리스트 선교사가 내한 서울 계동 147번지에 사무소를 차린 후 하나님의 거문고, 정부(政府)라는 책자를 발행하면서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뉴욕에 본부를 둔 이들은 한국에 경성 우체국 사서함 21호를 개설하여 일본 요코하마 복음인쇄소를 통해 1913년부터 월간 만인보를 발행해 국내에 반포하기 시작했다.

5. 선교사들의 입국과 복음 전래에 대한 평가

1884년 알렌의 입국으로 선교가 시작된 이래 다양한 각 교파의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활발한 선교 활동이 펼쳐졌는데, 이를 종합 평가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다양한 개신교 선교회가 거의 동시에 입국하여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둘째, 그럼에도 장로교와 감리교가 한국개신교 선교를 주도했다. 셋째, 대부분의 초기 선교사들은 교파를 막론하고 정통적인 신학과 아울러 복음의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칼빈주의 전통에 기초한 장로교회 출신 선교사들은 영미의 청교도 전통과 화란의 개혁주의 전통 속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이들이었지만 무디를 비롯한 당시의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감리교 출신 선교사들도 본국의 신학적 분위기보다는 성경의 객관적 권위와 구원의 주관적 체험을 동시에 강조하는 전통적인 신앙의 소유자들이었기 때문에 장로교와 감리교가 교파를 초월하여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협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비록 교파와 교단은 달랐지만, 복음주의 기독교를 이상적인 모토로 삼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다양성 속에 통일성이 있었다. 그렇다고해서 교파 개념이나 교파 의식이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며, 자신들의 신학적 관점을 포기했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개신교 선교사들이 복음주의 신앙과 정신을 공유하고 선교 지향적이고 복음 전도 지향적이었다는 점에서 교파의 벽을 넘어 통일된 복음화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복음 전파는 기대 이상의 결실로 이어져 1897년 세례교인이 777명으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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