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시와경계 신인상 시부문 당선작] 윤미경 외
제29회 시와경계 신인우수작품상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외 3편 / 윤미경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너에게 묻느라 지친 내 물음표의 점을 챙겨 들고
그랑자트섬으로 떠날 거야
운 좋게 일요일 오후에 도착한다면 엉덩이가 불룩한 빨간 모자를 쓴 여자의 양산에 닿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검은 개 꼬리 끝에 앉을지도
빨갛거나 노랗거나 푸르거나 초록 점들 어디든 숨을만해서 다른 곳에서 굴러들어온 점이란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야 쉼 없는 질문으로 지쳤던 내 점에게 이만한 휴양지란 또 없을 테니 점들의 혼합과 분화 사이에서 느긋하게 굴러 다녀보려고 해
선착장에 배가 도착하는지 가끔씩 보려고 해
남겨 두고 온 물음표의 몸통을 다그쳐서 행여 네가 나의 행선지를 찾아낸다면
네가 그랑자트섬으로 기꺼이 와준다면 그 수 많은 점 중에서 내 점을 찾아낸다면 나는 못 이기는 척, 너를 따라나설지도 모르지
하지만 현실은 그림 같지 않아서
물음표는 답을 얻지 못하고 그랑자트섬은 너무 멀고
나는 망설이는 중이야
이 점을 네 이름 옆에 마침표로 놓을까
그러면 너와 그림 같은 이별을 완성할 수 있을까
앗, 월요일이야
귀뚜라미 한 대 놔드릴까요?
그녀의 발에 귀뚜라미가 들었다 귀뚤귀뚤 울음소리로 걷는다 발이 귀뚜라미 울음소리로 뜨거워질 때라는 건, 그녀가 달빛을 흠뻑 들이켰을 때다 달빛에 취한 그녀는 혼자 아름다워져서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지경이 된다
발은 땅을 무턱대고 날아올라서 도무지 내려올 줄 모르고 우주를 유영하는 그녀, 달빛이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을 차례대로 밟고 내려온다 아, 명왕성이 있던 자리에선 안주 몇 개 낚아와 오도독 씹는 소리가 있었던가
몸은 허공에 있으나 발은 저만치서 뜨거워졌고 어디쯤에 흘리고 온 그녀의 복숭아뼈는 혼자서 뒹군다
달빛의 농도가 묽어지는 새벽이 오면 그녀는 침대 밑에서 발을 찾아들고 없어진 복숭아뼈의 부재에 골몰한다 누군가의 주머니에 담겨있던 복숭아뼈가 돌아와 제자리를 찾는 기적은 정규적으로 일어나고 어느 행성에서 묻혀왔는지 모를 검댕이는 말갛게 씻어 낸다
달빛은 오늘도 찬란할 예정이어서
그녀의 맨발은 오늘도 귀뚜라미 한 대 들일 테다
고난의 시제
간혹, 땅은 예고 없이 90도로 일어선다
무엇 때문에 융기하였는지 설명도 없이 고난은 현재시제로 덮친다
오늘의 길을 걷던 작은 여자 하나 우뚝한 각도에 갇혀 길을 잃었다 물 한 병 없이 슬리퍼를 신고 나선 길이 문득 산이 되었으니 여자는 이제 산을 버텨낼 수밖에 없다
맨발에 물집이 잡히고 목마른데 물길을 열어주지 않는 돌산, 짙은 안개마저 고난을 돕는다 해가 지고 밤이 되어도 고난은 현재진행형으로 끝나지 않고 여자는 몸을 눕힐만한 자리 하나 발견하지 못한 채 끝없이 올라갈 뿐이다
겨우 꼭대기에 올랐으나 내려가는 길은 추락에 가깝다 날개가 돋을 리 없는 겨드랑이를 껴안고 온몸을 굴린다
어리석음의 시제 역시 현재다
융기를 벼르는 산맥은 얼마든지 있다는 명심은 매번 허술하여 여자는 오늘도 슬리퍼를 신고 물병도 없이 길을 나서는 중이다
자주, 땅은 360도로 돈다
거미줄
새벽의 뼈를 만나다
지난밤, 공들여
숨겨두었을 뼈들이 즐비한 새벽
나무의 겨드랑이
의자의 사타구니
풀어헤친 풀들의 머리카락 사이에
밤을 빌어 숨기기 좋았던 뼈들이
새벽이슬의 밀고로
투명하게 검거됐다
날개를 가진 작은 것들의
무수한 사체들이 뼈 사이에서 장렬한
새벽, 산책길이
장지를 향해 열려 있다.
■ 맨발 외 3편 / 최하나
맨발
촐랑, 촐랑, 무수한 맨발들이
뛰어들었다
운동장에 비가 오고 있다
리베르 탱고 색소폰 연주처럼
여기도 찰박 저기도 찰박
발가락을 떼었다 붙였다 하며
누에보 탱고를 좋아한
하얗고 포동포동한 발들이
피아졸라의 변화를 감지한 것처럼
운동장 물속에서 춤을 추었다.
뛰노는 맨발들 곁에
자유 자유 자유
반도네온 소리에
나도 어느새 촐랑촐랑 찰박찰박
뛰어 들어갔다.
미싱
오버로크 한 번에 500원을 받았다.
무거운 스팀다리미를 종일 들면
짙은 어둠처럼 짓눌러오는 어깨의 통증
먼 산 소나기 몰아오듯 쏟아졌다
밤은 매일 오듯 가난의 실오라기들
거미집 같았다, 밤마다
재봉틀로 거미줄을 걷어냈다.
옷감의 가장자리가 풀려버린 박음질처럼
좀체 풀리지 않는 가난은
교복의 이름표처럼 박히기도 했다
미싱은 돌고 돌아 책상을 만들고 노트를 썼다
가난 위에 박음질 치고
오버로크를 치고 블랭킷 스티치를 쳤다
엄마의 꿈도 풀리지 않도록 단단히 휘갑치기 했다
이제는 엄마가 칠판에 오버로크를 친다
아이들이 바늘땀처럼 또박또박
엄마의 미싱을 읽는다
교실에 미싱이 돌고 돈다
엄마의 손이 아이들의 꿈에
블랭킷 스티치를 친다
선풍기
할아버지는 배 열 척이 넘는 선주였다
남들 다 먹는다는 박카스 한 병도 안 드셨다는 할아버지
주문진항에서는 우리 할아버지 배를 타지 않은 이가 드물었다
꽁치 명태는 만선이었다
출항할 때마다 떡 찌고 고기 삶아 고사 지냈다
할머니의 일은 선원들이 먹을 국수를 삶는 일,
아궁이 밖으로 뻗치는 불기운에
땀방울조차 타들어 가고는 했다는 것인데,
그때마다 선풍기는 돌고 돌았다
우리 집 아이들은 스크류처럼 도는 선풍기보다
스크류바를 더 좋아한다
어머니는 한사코 아이들이 신일 선풍기 바람이
제일 시원하단다고 우긴다
선풍기 뒤에는 기류가 발생하지 않는 것을 어머니는 모른다
스크류바 아이스크림 맛의 뒤는 달콤하다
날개 부근의 공기를 흡입하여 날개 뒤쪽으로 밀어내는 선풍기
프로펠라 주변의 물을 끌어당겨 뒤로 내보내는 스크류 배
그 어디쯤서 발생한 난기류는
할아버지의 어선을 비행기처럼 날려버린 것일까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는 퇴물 선풍기 한 대
여름이면 끌어안고 사시는 어머니
신일 선풍기의 나이는 40살이 넘었다 했다
그 옛날 주문진항 선주집의 유물이란다
강바람
섬진강 모래 펄에서 학춤을 춘다
대나뭇잎 훑어내 막퉁소 불며
푹푹 빠지는 발밑에 봄을 심었다
강물로 강물로 아래로 아래로
물푸레잎 사이 은어들 숨어들 때
새눈 부릅뜨기 시작한 매화나무 맹아리들
온몸 부르르 떠는 것이었다
앙상한 나뭇가지들 드문드문
붉고 야문 방울들이 맺혀있다
새눈이 가지마다 붙어
섬진강 미처 풀리지 않아도 바람에
일렁이는 갈대같이
견디고 맞닥뜨리며 트는 싹
불그레한 새눈이 핏방울 터지듯
폭폭 터지면
쌍계사 십리 길에 만개한 벚꽃
누군가 겨우내 얼려두고 갔을 이별 따위도
화개장터 국밥집에 말아먹으면
화계천 은어튀김처럼 부푸는 봄
도다리쑥국처럼 시원 향긋해지는 봄
강바람 뜨거운 입김에 노래하며
날아가는 학,
끝내 옛 겨울 울음도 덮었다.
심사평 상상력과 체험의 시적 거리에 선 두 주체
미디어는 인간의 의식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특히 대화형 인공지능 챗GPT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시점에 시를 포함한 예술 일반이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갈지 자못 궁금하다. 또 다른 형태의 문학의 죽음이 선언될지, 아니면 제3의 문예부흥이 일어날지 헤아리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긍정적인 답변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더 많은 것 같다.
예술의 환경이 점점 더 급변해가는 시점에 『시와 경계』는 윤미경의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외 3편, 최하나의 「맨발」외 3편을 등단작으로 내보낸다. 타라 농장의 스칼렛 오하라가 석양을 바라보며 내일의 태양이 다시 떠오를 것을 기약했던 것처럼, 『시와 경계』도 오늘에 만족하지 않고 내일을 밝힐 윤미경, 최하나 시인을 시의 아카데미로 초대한다.
말을 찾아 떠나는 시의 길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 물론 Chat GPT로 인해 시 쓰기가 더 쉬워질 수도 있겠지만, 시란 늘 실존과 결단 사이에서 하나의 선택만을 강요하게 되는데, 이는 시의 정전적 가치와 실험적 전위 사이에서 방황하는 시지포스의 반복적인 운동임을 자각하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시적 정체성을 찾는 숙명의 전언임도 명심해야 한다.
상상력이 돋보였다. 뭐랄까? 대상과 시말 사이에 간격을 자유자재로 조정하는 폭이 상당히 컸고, 그로 인해 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데, 이는 시가 가진 미덕, 즉 새로움을 향하는 시인의 열정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시는 저와 같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시인이란 자고로 자신만의 고유한 체험을 시말 속에 응고시키되, 최대한 신선한 언어감각을 육화시키는 임무를 가진 자이다.
특히 윤미경 시인이 전개한 일련의 시말운동은 그러한데, 이는 조르주 쇠라의 점표화법을 시적으로 고양시킨 것인 동시에 삶과 미적 상상력 사이의 균열을 “이별”의 전언으로 육화시키고 있다. 때론 귀뚜라미 보일러를 우주적 상상력으로 고양시키면서, 때론 “여자”의 삶에 매개된 “고난”의 흔적을 “현재진행형”으로 소묘하면서, 시인은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얽혀 있는 인간사를 자신만의 상상적 지평을 확장해가고 있다. 앞으로 더 좋은 시를 쓸 것으로 기대가 된다. 미래가 밝다.
상상력과 기억의 어디쯤에 머물다가 문득 실존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실존이 본질을 앞서는 이유는 끊임없이 기억을 통해서 시간의 파편들을 의식으로 끌어올려 존재의 의미를 반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최하나 시인의 당선작들이 그러한데, 이는 상상적 “자유”와 과거의 기억 사이의 거리를 실존의 언어로 봉합하면서, 자신만의 시말을 찾아가고 있다. 때론 “엄마”의 “오버로크” 미싱을 추억하면서, 때론 40년이 넘은 “할아버지” “신일 선풍기”를 유년의 상상력으로 재구하면서, 최하나 시인은 하동의 섬진강 “강바람”으로 “옛 겨울 울음”을 덮으며 매화꽃 피는 봄을 상상하고 있다.
윤미경, 최하나 두 분의 등단을 축하드린다. 앞으로 더 좋은 시를 쓰며 거듭나기를 부탁드린다.
이석준(문학평론가)
제30회 시와경계 신인우수작품상
■슈뢰딩거 고양이 외 2편 / 심영일
슈뢰딩거 고양이
골목 끝으로 길이 걸어간다
허공에 쪽창을 남기고 집은 떠났지만
액자 속 남자는 창을 연다
달을 품은 적 없는 창의 소름이 서로 부둥켜 틀을 적실 때마다 가슴 한쪽 흘러간다
이곳에선 누구나 젖게 된다
말라있다 해도 얼룩의 크기를 감추지 못해 웃게 된다
넌 내가 열고 나온 서랍 속 세상이
궁금했고
쪽창으로 들어온 새의 날갯짓을 난 사랑해야 했다
불을 켜면 담장을 밟고 내려오는 창
그림자에 앉아 발등을 핥는다
행인들은 발을 굴러 야성을 간 보지만 두 눈에 잠긴 연민을 읽진 못했다
벼랑을 타고 오른 길이 벼랑 아래로 떨어진다
빌린 시간을 발라낸 자들은 먼지로 세운 몸뚱이를 와르르 무너뜨린다
네모진 달에 의심이 자라면 커튼을 내린다
쪽창에 실려 떠나는 건 세상을 비우는 일
골목이 사라지면 몸을 접어 어둠이 된다
서랍 속에도 골목이 있다
두고 온 창문을 기다리는 집이 있다
잃은 것을 모으는 재주가 있는지 집을 놓친 창문이 멀리 흘러온다
커튼 너머 흔들리는 사내
어디에서 마주치든 우린 낯설다
세탁기 앞에 무릎을 끌어안고
겉과 겉이 사랑을 한다
중력 잃은 공간에서 하나가 된다
상상할 수 없는 자세로 뒤엉키는 내 겉과 네 겉
탈수시킨 바깥의 그늘에서 우린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다
서로를 축으로 공전할 뿐 각자의 세상을 범하진 않았다
속일 것도 속을 것도 남아있지 않은 속과 속은 투명하다
엉킨 겉을 꺼내며 옆집 남자의 허벅지를 생각한다
두 눈에 잠긴 욕심을 낚아 올려
가장 은밀한 속을 내주고 싶은 날
눈이 내린다
흰 깃을 품고 있으면서 구름은 왜 먹구름일까
정지 버튼을 누르고 싶은 오후 다섯 시
관음을 앓고 있다
네가 돌아오지 않는 저녁이 계속되길 바란다
딸꾹!
겉들의 체크아웃
발자국 한 쌍이 가슴을 밟고 간다
한 시절, 도둑맞았다
지미처럼 살아가기
지미 카터가 아비라고 우겼어요
말도 아니라는 소리, 휘파람 소리
지미가 엄마지 아빠냐는 소리
그렁그렁 수채화로 번지던 풍경
가다 서던 바람, 멀리서 걸어오던 학교, 구름은 머리 위로 모여들었죠
그럴지도 모를 일, 그럴수도 있는 일
우물 밖은 알 수 없는 세상
지미의 혀가 심장을 핥을 때마다 흔들렸어요
소똥 질펀한 바닥을 피해 지미는
지미와 함께 유년 너머로 사라졌죠
어제는 달렸어요
꼬리를 감출 수 없어 무대가 좁았죠
술을 따르며 지미를 씹었어요
지미는 늙은 지미를 만나 지미와 잘살고 있다네요
어린 지미는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만만해서 우기는 게 익숙했죠 받아들임도 너그러웠죠
누구도 지미의 소식을 몰랐지만
밤은 쵸콜렛 입은 치즈케잌
밤새 녹이느라 처음 본 여자와 편 먹었어요
다 삼키고 난 세상은 훤하네요
샤워를 했는데도 개운치 않은 당신
우물 밖으로 나가면 다시 우물
갇혀 있는 내가 갇혀 있는 당신에게 우기죠
오늘은 첫날, 난 매일 태어나요
내 아비는 전능하신 어둠이어서 한낱 인간인 지미와 비할 바 없어요
칫솔을 물고 있는 당신을 보며 지미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그대가 삶을 속일지라도 난 다짐하죠
바람의 속살에 가슴을 내줄지라도
석양을 담으려 소주병을 깔지라도
당신을 속이고 말거야
생은 사기죠, 망설임조차 사기죠
*푸시킨 인용
■환상지 외 2편 / 은이정
환상지
카페 사장, 당근이 되어 꽂혀 있어요
주문마다 흙을 터느라 정신이 없네요
더 이상 쿠폰을 발행하지 않습니다 원자재가 인상돼 제 몸을 갈기로 했습니다
새로운 메뉴는
당근 오픈 샌드위치
차에서 내린 것들은 병색이 완연합니다
통째 실려 온 호밀빵의 진단명을 확인합니다
버려진 쿠폰처럼 고양이 하품이 짧고도 길어요
차라리 당근마켓에 올려 주세요
당근 위아래로 몰랑한 벽이 가로막자
수염처럼 늘어진 오후가
붉은 등을 두드리며 그림자를 남겨요
찬바람이 몸에 해로워도 물은 조금 뿌려 주고요 터가 좋으면 당근도 달다네요
한쪽 팔로 분주한 당근 옆에서 잠이 빠져나가요
올라가지 않는 오른팔 대신
왼손의 시간이 올 줄 알았는데 지켜보는 삶에는
기회조차 오지 않습니다
당근 뿌리에 묻어 이주한 흙은
뽑힌 자리를 기억하지도 어긋나지도 않아요
오래 한곳에 머물러 고양이 울음이 되어야 해요
땅속을 걸어야 한다며 부츠를 주문할 때도
왼팔은 외면합니다 땅 위를 비틀대면서 땅속은 어찌 걸을까요 흙을 털기 전에
당근에 물어보면 제대로 답을 해줄까요
신선한 팔을 들어 올려 없는 잊힌 날씨를 가름합니다
카페 사장을 갈아 넣은 샌드위치는 먹을 만했어요
시신이 제일 고생이죠
노르웨이에서 오메가-3를 직구했어요
서둘러 상자를 열었더니 등 푸른 비린내 대신
잘 포장된 시신 세 구가 들어 있지 뭐예요
원산지 인증 도장까지 선명하게 찍혀 있었어요
방부처리도 깔끔해 택배기사가 기절도 없이 내려 주었지요
흔한 일은 아니지만
가끔 북해를 떠돌다 불시착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답니다
나야 반품하면 그만이지만
시신이 사라진 집은 또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생각해보세요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에게 작별 키스를 하려는데
관에 오메가-3가 들어 있어 봐요
청하지도 않은 환장이 벌떡 일어서겠지요
중간에 사이즈가 달라져도 문제가 안 된다니요
3명이 나란한 죽음도 흔한 일은 아니잖아요
시신이 국경을 넘는 사이
주변의 전쟁에 눈 감은 사이
누군가 슬쩍 바꿔치기한 것은 아닐까요
폭격의 사이렌이 울리면
바닷물도 울음을 멈추고 땅 밑으로 스며든다는데
이 세상에 중립은 영원히 존재할 수 없는 연안일까요
아무리 송장을 확인해도
오메가-3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네요
늘 침대에 누워 있는 할머니에게
또 다른 가족을 선물할 순 없었어요 곡기를 줄인 할머니의 침묵이 냉전체제처럼 길어집니다 하긴 졸지에 타국에 끌려온 시신이 제일 고생이죠
사라진 시신을 찾기는 할까요
발각되기 전에 돌려보내야 할까요
간밤에 비의 비린내가 창문을 두드려
서둘러 택배 상자에 고모를 넣고 밀봉했어요
제대로 송장 확인도 하지 않고 경계를 넘겠지요
할머니를 발견한 오메가-3는
고요히 장사를 지내주겠지요
멸치볶음
서로를 향해
떼로 몰려갈 때는 앞이 안 보여도
달리는 이유 분명하다 굳을지언정
순간 문을 닫을지언정 전진
또 낮은 포복
적 아닌 적으로 의도된, 속셈은
없는 게 분명해도
판은 뒤집히고 아군은 언제나 미미하지만
그나마 붙어 있어야 살아남을
확률 높아지는
기름 총알 빗발치는 전장에서도
뛰어야만 사는 작디작은 것들
불러주지 않아도 숨소리
기억해야 하는
그물에서 바싹 말라버릴 운명을
뜨거운 물에 데치고 볶다가
가여울 것도 귀여울 것도 없는 이 많은
삶 너머의
나를 불러주는 소리조차 없음에 눈을 감고
사람들 기름지게 넘실 울렁대는 골목에서도
홀로 뻣뻣하게 굳어가는
뼈가 있어도 대가리와 꼬리밖에 안 보이는
피아도 구분되지 않는
앞도 보지 않고 보이지도 않고
서로 우르르 겹쳐 온몸이 굳어갈 때
■하네스 외 2편 / 정수월
하네스
푸들이 모빌을 보며
눈동자를 돌리네. 눈이 아리도록
자세가 움츠리면 마음도 작아질까. 눈을 깜빡이며 꼬리를 흔드네. 영악한 녀석은 건조대에 담겨 있는 내 런닝을 꽉 물고 있네. 최소한의 간식은 확보한 셈. 천장에 매달린 모빌 따라 움직이면 이완은 습관, 냉각이 필요해.
이제 협상의 시간
내가 푸들에게 슬픔을 안긴 건 아닌데,
녀석이 짖어대네.
나는 간식을 녀석에게 주는 순간 런닝을 재빨리 빼앗지요.
덩치답지 않게 눈동자가 붉게 빛나는 푸들. 어깨는 펴고 가슴은 열고 깍지를 끼고 아래로 내리고 동글동글 뱅글뱅글 놀고 있네.
꼬릴 흔드네.
높은 곳이 익숙한 나도 눈동자를 돌리네. 오래 보고 있으면 내가 푸들인지, 머리가 빙빙 도네. 나는 먹지 않아도 짖어대고 부름 받지 않아도 울고 있어요.
모빌은 스트레칭을 안내해요. 나와 협상하는 버릇이 생긴 녀석. 간식과 바꿔 먹는 재미가 쏠쏠하지. 런닝을 물고 달리니 내 상체가 구겨지며 아려온다. 푸들의 튀어나온 주둥이가 물어뜯는 완력 얼어붙은 빨래처럼 딱딱해요. 나는 마음이 움츠릴 땐 몸부터 펴요.
질주하는 푸들
구겨지는 내 상체
반려견 덕분에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이 생겨요. 자세만 바뀌어도 마음이 달라져요.
나는 휴대전화 내려놓고 모빌을 그려요. 햇살에 그림자가 사라졌어요.
일어나세요.
다리 한 번 뻗어보세요. 나는 모빌을 보며 수군대고 있지.
푸들이 내게 슬픔을 안긴 건 아닌데, 나는 짖어대네.
런닝은 또다시 세탁 박스에 담긴다. 나는 집을 나서며 표정을 준비해요. 내 몸이 욱신거리네. 이제 푸들이 외출해요. 하네스를 한 나를 끌고
소문
꽃대에 혈이 돋았다
소문과 험담에
심장이 멈출 것 같다
불길하고 급작스러운 소식에
누가 볼까
너의 가녀린 몸짓
숨이 가빠진다
나는 흘러간다
문득 발길에 닿는 꽃
가장 낮은 곳에
움츠리고 있는 꽃
개울물 소리 들리고
사방에서 소문이 모여드는
모퉁이
노을이 질 때까지
귓속말은 계속되고
너는 반항 없이
눈시울 붉히고 서 있다
말할 힘마저 없는 너
자꾸만
내 가슴 때리는 제비꽃
재개발
바깥 풍경이 보이는 창가에
그녀는 즐겨 앉았지
닭과 고양이가 보이는
반려견이 불안해하거나 짖거나
거미는 집을 크게 만들어
나에게 조짐을 알려주었지
날씨에 따라
그녀의 색조와 앉은 자리가 달랐네
찻잔을 저어봐요
빗소리가 풀어져요
누굴 부르는 소리 들리세요
빗소리에 날씨와 음료가 달라지는 찻집
반려견과 고양이와 닭은
풍경 밖으로 사라졌네
자릴 채우고 또 자릴 채우던
그 보고 싶던 얼굴들
빗물에 고인 슬픔
이제 다 떠나가고
인부 소리만 들리는 자리
너와 내가 흐르네
기억을 저어봐요
창과 모든 게 지워졌지만
아직도
갈전천은 내 맘속에 흐르고 있네
심사평 이전과 다른 질과 폭을 지닌 목소리 확보
신인 등장의 가장 큰 덕목의 하나는 두말없이 새로움이다. 이전의 선배문학인들과 다른 감정의 질과 사상의 폭과 깊이를 지닌 자기만의 목소리 확보가 필수적이다. 흔히 착각하기 쉽지만, 그러기에 서정시(Poesie)는 한낱 여기餘技로 정서적 그리움의 환기나 주관적 감정의 고양을 위한 자기만족 내지 취미활동일 수 없다. 만일 거기에 그친다면, 우리들의 모든 시작詩作 행위는 기껏해야 날마다 자신들이 체험한 사건이나 느낌 등을 적어가는 일기 쓰기 범주와 다를 바 없다. 특히 그런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작품들의 경우, 제 아무리 포장해도 결국엔 수사적이고 언어적인 차원의 표피적인 새로움 또는 겉멋에 그치기 십상이다.
그런 만큼 한 편의 시는 언어의 배치에 의해 의미를 포착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적이고 생태적인 환경과 그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존재의 생기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자신 곁에 집약시켜 머무르게 하는 그 어떤 세계의 전개다. 설령 물리학적으로 설명된다고 할지라도,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문제를 처음부터 품고 있다. 왜 ‘저것’ 아니고 ‘이것’, ‘저기’가 ‘여기’에 있는가를 묻고 대답하는 존재의 지리학이자 존재론이 모든 새로운 시의 출발점이다.
비록 화려하진 않지만, 꾸준히 시의 자리를 지켜왔다고 자부하는 《시와경계》의 이번 신인상 수상작들이 여기에 부합한다고는 솔직히 자신할 수 없다. 하지만 세 명의 시인들을 한꺼번에 내보내는 데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공통적으로 이들의 작품에서 자신들의 사유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유의 성실성과 더불어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공간의 의미에 대한 치열한 질문이 개입되어 있다. 특히 ‘새로움’을 빙자한 당대의 시적 유행 또는 또 다른 상투성의 덫에 걸리지 않은 채, 묵묵히 시의 길을 걸어온 자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시적 정직성이 확인된다.
먼저 정수월의 「하네스」외 2편이 여기에 해당한다. 얼핏 소박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대지와 세계, 사물과 언어가 서로 다르면서도 결합되는 그 순간에 일어나는 ‘풍경’이나 ‘조짐’(「재개발」)을 놓치지 않고 있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겉도는 타인들의 무수한 ‘소문’과 ‘험담’에 ‘말할 힘’을 잃은 상황 속에도 제 ‘가슴’을 때리는 ‘제비꽃’(「소문」)과 같은 현실의 사물과의 만남을 위한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반려견’과 ‘모빌’과 ‘나’의 관계처럼 ‘자세만 바꿔도 마음이 달라’(「하네스)」지는, 그러나 그 근본에서 일치하는 인간 존재의 구조적 계기에 주목하고 있다.
은이정의 「환상지」외 2편은 ‘속셈(내심)’과 다른 ‘딴청’의 화법과 행위를 통해 기존의 선입견이나 고정관념과 거리를 두는, ‘당근’에 대한 기존의 의미나 정보의 해체를 통해 거기에 묻어 있는 ‘흙’의 ‘터’ 또는 ‘자리’(「환상지」)를 더듬어보는 아이러니적 기법이 돋보인다. 정작 ‘직구’한 ‘노르웨’산 ‘오메가-3’ 대신 일견 주제와 무관해 보이는 반어적 발화를 통해, 갈등으로 얼룩진 ‘세상’의 ‘중립’이나 ‘냉전체제’(「시신이 제일 고생이죠」)의 극복과 깊이와 높이를 추구하고 있다. 아무도 ‘멸치’를 ‘멸치’라고 ‘불러주는 소리조차 없’는 의미의 공화空化/空話를 통해, 그러나 ‘붙어 있’거나 ‘뛰어야만 사는 작디작은 것들’(「멸치볶음」)의 존재를 성공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양자물리학의 가장 큰 역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심영일의 「슈뢰딩거 고양이」외 2편은 살아있으면서도 동시에 죽은 그것처럼 ‘(쪽)창’과 ‘집’, ‘젖음’과 ‘마름’, ‘오름’과 ‘떨어짐’「슈뢰딩거 고양이」)과 같은 상태들의 겹침. ‘서로의 축으로 공존할 뿐 각자의 세상을 범하지 않’은 채 공존하는 ‘겉’과 ‘속’과 같은 두 개의 중력장 또는 두 시-공간의 구부러짐(「세탁기 앞에 무릎을 끌어 안고」)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마치 ‘지미’를 ‘아비라고 우’길수도 ‘엄마’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언어적 미끄러짐이 보여주듯이 결코 재현할 수 없는 ‘생’(「지미처럼 살아가기」)’의 신비와 실재를 감각적 현실과 성공적으로 관계 맺게 하고 있다.
끝으로 시인이 여타 인간 존재와 다른 것이 있다면, 이 지구라는 행성 속에 그 어떤 의미를 새기는 존재는 아닐 것인가. 특히 그렇다면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사태들과 무관하지 않으며, 그것들이 바로 그 자신들의 실존을 구성하는 것이 아닐까. 결코 적지 않은 응모자들과 수상자들에게 격려와 축하의 말을 전하기 전에 당부하고 싶은 말 가운데 하나다. 바로 그 질문만이 그 어디서든 근본적으로 답이 없는 시세계 반복된 질문이 낡지 않는, 진정으로 새로운 한국시의 출발점이 되리라고.
심사위원 임동확(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