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강의의 큰 제목. 졸업 후 우리는.. 졸업 하고는 어떤 삶을 살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을 갖고 있는 이들이 모였다. 잘 살고 싶기에, 지금 이대로는 아니라는 생각이 있기에. 그럼 다르게 사는 방법은 무엇일까?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될까?
일단은 지금 이 자리에서 만나고 있음이 차이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에게는 시험기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부를 얼마나 하든 공부해야된다는 생각, 실제로 시간과 몸과 마음, 영혼까지 갈아 넣고 있는데 성적에도 스펙에도 하등 도움 1도 되지 않는 이 강의를 들으러 왔으니 이것이 차이인 것이다. 변화란 시간과 공간의 배치를 달리하는 것이니. 내가 있는 시간과 공간이 변하면 나는 자연스레 변하게 된다. 그러니 오늘 이 강의를 들은 것 만으로 달라지고 있음에 기뻐하자.
사람은 삶과 살림의 의미. 人間 인간은 '사람 인'과 '사이 간'. 사람과 사람 사이 모든 것이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모든 것이 좋았지만 딱 한 가지 좋지 않았던, 실수? 실패? 아쉬움이 남는 것이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하실 때 '우리'의 형상대로 지으셨다. 사람은 함께 하는 관계로 지음 받은 것이다.
그런 인간이 청춘이라는 때가 있다. 이들은 경험도 능력도 지혜도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위험 요소가 많다. 확신 할 수 없고 근거 없고 불안정하니까. 그럼에도 생기 발랄하고 뜨거운 기운만큼은 흘러 넘친다. 그래서 어디든 두려움 없이 혹 두려움이 있더라도 즐거움에 아름다움에 반응하여 뛰어들 수 있는 것이다. 이 시대 청년들에게 당신은 청춘입니까? 라는 질문에 그 생기 발랄함 잃지 않고 네!!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 청춘은 사회적 나이로 규정된 것이 아닌 본인이 살아가는 힘으로 주체적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젊어도 청춘의 생기가 없다면 늙은 것이고 나이가 많아도 생기를 잃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는 청춘인 것이지. 내가 하고픈대로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이 생기야말로 자유인의 삶이다.
이렇듯 우리는 관계로 살아가고 생기를 갖고 살아가야 하는데 이 시대 자본주의는 홀로 있게 만든다. 모든 것을 분절시키고 개체화 시킨다. 이걸 소비로 가능하게끔 구조를 만들어서. 먹는 것도 모두 소비로 이뤄 만들고 먹는 것이 가능하도록. 노는 것도 소비를 통한 놀이니 함께 하는 놀이보다는 홀로 영화보고 여행하고 쇼핑하고 혼자가 얼마든지 가능하게 만든다. 이 구조 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계속 내 노동력을 팔아 내 상품성을 유지해야만 살 수 있다. 그러니 청년들은 스스로를 더 좋은 스펙으로 포장하고 다른 이들보다 나아지기 위해 노력노력노력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다 힘들어 소진하고 다시 소비로 회복하는 그 굴레 속에서 벗어날 기대도 희망도 생각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관계 맺고 사랑하고 사랑 받고픈 욕구는 모두에게 있다.
이런 생명력 없는 삶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 생기 발랄하게 사는 청춘은 관계와 사랑에 반응한다. 이 욕구, 욕망은 인간의 본래 욕구다.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욕망이지. 하지만 자본주의는 이마저 상품으로 만들어 이 욕망을 이용해 돈을 번다. 대부분이 저 강력한 힘에 영향을 받고 있으니 사랑도 연애도 그것에 노출된 미디어, 주변 관계를 통해 배운다. 이 주변 관계마저 웬만하면 이미 미디어와 저 구조의 영향을 받았으니 동일하다고 봐도 되겠다.
그럼 연애, 사랑을 어떻게 해야될까 하는 질문이 생긴다. 그 대답부터 하자면 우정, 사랑, 연애는 다를 것이 없다고 한다.
다윗과 요나단을 보면 이성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사이다. 부모의 원수, 내 원수의 자식이니. 그럼에도 이 둘은 서로 사랑했다고 한다. 자기보다 사랑했다고. 여인보다 사랑했다고.
그리고 룻과 나오미도 그렇다. 고부관계가 저렇게 애틋할 수 있을까?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모습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연인관계의 1대1 특별한 관계가 아니라 깊은 관계다. 자기보다 사랑하는, 서로 상관하고 살리는 관계 돕는 베필이다.
홀로 있는 아담에게 돕는 베필로 하와를 보내주셨지만 선악과 앞에서 서로 비춰주고 살리지 못했다. 선악과 먹는 것이 잘 못 됐음을 발견하지 못했든 알았어도 알려주고 깨워주지 못했든 돕는 베필로 만나지 못함으로 죄가 들어왔다. 그 결과는 관계의 파괴. 남 탓하며 서로를 미워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이 주신 저 여자게 내게 줬다며 화살이 하나님에게까지 가기도 한다. 서로 살리는 관계로 살아야함이, 우리가 그렇게 지음 받은 존재임을 처음부터 얘기하고 있던 것이다.
무감어수 감어인. 물에 비추는 것이 아닌 사람에 비춰라. 서로 살리는 관계, 돕는 베필이란 상대를 비춰주고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돕는 관계겠다. 이것이 진정한 우정, 사랑의 관계다. 이 우정의 관계가 보편화 된 곳이 교회. 신앙 공동체고. 우리의 신앙은 삶의 사건 앞에서 드러난다. 졸업과 취업. 연애와 결혼등. 우리 인생의 큰 선택과 변화들 앞에 어떤 기준으로, 어떤 푯대를 정해 살 것인가. 이 중요한 선택을 함께 고민하고 함께 결정하는 관계들이 필요하다. 그러한 관계가 사랑하는 관계. 돕는 베필인 것이지.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돕는 베필들. 그리고 그 관계를 옆에서 같이 보고 지켜주는 더 넓은 관계들.
이 관계의 삶. 함께 하는 삶을 우리는 꿈꾸고 바라며 몸으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