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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諱)는 근(根)이요 자(字)는 회부(晦夫)이며, 호(號)는 서경(西坰)이다. 진주 유씨(晉州柳氏)는 대성(大姓)으로 고려 좌우위 상호군(左右衛上護軍) 유정(柳挺)을 시조로 하며 그 후에 벼슬이 이어져 대대로 유명한 사람이 배출되었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휘 종식(宗植)은 공조 참판을 지냈는데, 이분이 공의 5대조(祖)이며, 증조 휘 팽수(彭壽)는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할아버지 휘 윤(潤)은 예빈시 별제(禮賓寺別提)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휘 영문(榮門)은 진사로 재행(才行)이 있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죽산 안씨(竹山安氏)는 이조 정랑 안세언(安世彦)의 딸로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여 여사(女士)로 불리었는데 아들 둘을 낳으니, 공은 그 막내이다. 아버지 시정공(寺正公)의 종제 유광문(柳光門)에게 아들이 없어 공을 아들로 삼았는데 후에 공이 귀하게 되어 양아버지는 영의정에, 두 어머니 김씨와 이씨는 정경 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공은 가정(嘉靖) 기유년(己酉年, 1549년 명종 4년)에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뛰어나 공부를 독려하지 않아도 자력으로 학문을 하여 성동(成童)이 되기 전에 이미 사자서(四字書)를 통하니, 백부 참판공 휘 창문(昌門)이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항상 말하기를, “우리 집안을 크게 일으킬 자는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 하였다. 15세에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공에게 배웠는데 문장의 재사(才思)가 날로 진보되니, 지천이 크게 장려하면서 말하기를, “후일 사맹(詞盟)을 주관할 때 노부(老父)는 당연히 맨 첫자리를 양보해야 될 것이다.” 하였다. 경오년(庚午年, 1570년 선조 3년)에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는 영남에 가서 퇴계 선생(退溪先生)을 배알하여 강학(講學)하고 질의하니, 선생이 매우 칭찬하였다.
임신년(壬申年, 1572년 선조 5년)에 문과 별시(文科別試)에서 장원으로 급제하니, 관례에 따라 성균관 전적을 제수하였는데, 방방(放榜)하기 전에 예조 좌랑으로 옮겼다. 이듬해에 홍문록(弘文錄)에 뽑히고, 얼마 후에는 호당(湖堂)에서 사가 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여러 번 호조ㆍ예조ㆍ병조ㆍ형조ㆍ공조 등 5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가 질정관(質正官)에 충원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돌아오자마자 바로 제주 판관(濟州判官)에 제수되었는데, 당시 전조(銓曹)의 장(長)으로 있던 자가 공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 것을 미워하여 가려 뽑은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사실은 멀리 내보낸 것이었다. 공이 어버이가 연로하다고 사체(辭遞)하니, 전관(銓官)이 또 회피한다는 죄로 언관을 사주해서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한참 뒤에 다시 예조에 서용되었다가 흡곡 현령(歙谷縣令)으로 나갔다. 3년 동안 정사하면서 갖가지 폐단을 제거하였는데, 공이 견책을 당해 파귀(罷歸)되자 백성들이 비(碑)를 세워 그리워하였다. 다시 예조를 거쳐 사헌부 지평으로 옮기고, 다시 정언이 되었다가 체직하고 종묘서 영(宗廟署令)ㆍ성균 직강에 제수되었다. 친어머니 상을 당하고, 또 양아버지 상을 당하였다.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년)에 복을 벗자 지평에 제수되었다가 병조 정랑으로 고쳤는데, 기무(機務)를 정밀하게 처리하여 직무를 잘 보니,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이 장관으로 있으면서 큰 그릇으로 여겼다. 이때 북쪽 변방에 사변이 있어 모든 조치를 다 공과 의논하여 처리하였기 때문에 율곡을 헐뜯는 자들이 공도 함께 탄핵하였다.
서용되어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에 임명되었다. 공이 홍문록에 선발된 지 10여 년이 되었지만 시론(時論)에 제지당해 주의(注擬)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결원을 모조리 보충하라는 특명으로 비로소 홍문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수찬ㆍ교리ㆍ지평ㆍ정언ㆍ헌납을 역임하고 또 병조에 들어가 어사(御史)로 몇 고을을 염찰(廉察)하였다. 이어 이조 정랑에 천배(薦拜)되었는데 조용히 절조를 지키면서 교유(交遊)와 논의를 일삼지 않으니 문정(門庭)이 쓸쓸한 것이 마치 가난한 선비의 집과 같았다.
정해년(丁亥年, 1587년 선조 20년)에 일본의 승려(僧侶) 현소(玄蘇)가 빙문(聘問)을 오자 선조(宣祖)가 특별히 문장과 재지(才智)를 두루 갖춘 인물을 선위사(宣慰使)로 차출하여 보내라고 명하였다. 조정 의논이 공을 천거하면서 재능은 합당하나 벼슬 서열이 조금 낮아 어렵게 여기니, 임금이 특별히 선위사로 제수하였다. 현소 등이 처음에는 아주 교만하게 굴었으나 공의 의도(儀度)를 바라보고는 일어나 경의를 나타냈으며, 그 시문을 보고 나서는 더욱 부지런히 심복(心服)하였다. 돌아와서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이 되었다가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에 양어머니 상을 당해 괴산(槐山)의 묘 아래에서 시묘살이를 하는데, 현소가 돌아가는 길이 충주를 거쳐 가게 되어 공이 어디에 사는가를 묻고는 멀리서 바라보며 절하고 경의를 표하면서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경인년(庚寅年, 1590년 선조 23년)에 상복을 벗자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에 제수되었다. 당시 정여립(鄭汝立)의 역옥(逆獄)이 있어 최영경(崔永慶)의 이름이 공초(供招) 문서에 나와 동료들의 의논이 국문을 청하고자 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최영경이 본디 길사(吉士)는 아니지만 옛날 제갈량(諸葛亮)이 말하기를, ‘이름은 있는데 실제가 없는 것은 허정(許靖)이다.’ 하고는 오히려 맨 먼저 허정을 기용하여 촉중(蜀中)의 인심을 수습하였다. 지금 최영경이 오랫동안 허명(虛名)이 있었으니 그 사람은 비록 아까울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한 도(道)의 인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때 추포(秋浦) 황신(黃愼)이 정언으로 있으면서 뜻이 공과 일치되어 그 논의가 마침내 중지되었다. 상공(相公) 노수신(盧守愼)이 일찍이 정여립을 천거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선조께서 엄지(嚴旨)를 내려 책망하였다. 이에 양사(兩司)에서 번갈아 글을 올려 논핵(論劾)해 삭출하니, 공은 말하기를, “그 의율(擬律)이 너무 무겁다.” 하였고, 또 탄핵하는 글 가운데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등졌다.[欺君負國]’는 말은 공의 원정(原情)을 말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여러 동료들에게 말하여 그 부분은 삭제하였다. 그래서 성상의 비답에도 이로 말미암아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밝지 못하였다.’ 하여 (노수신을) 파직하기에 그쳤다.
홍문관 응교로 옮기고 또 사간ㆍ사복시 정ㆍ사인ㆍ전한(典翰)을 역임하고, 직제학으로 승진하였다가 승정원 동부승지에 탁배(擢拜)하였다. 일찍이 입대(入對)하니, 임금이 면유(面諭)하기를, “품질(品秩)이 올랐다고 하여 문한(文翰)을 게을리 하지 말라.” 하였다. 이듬해에 좌승지로 올랐다. 처음에 역괴(逆魁)가 고관(高官) 가운데서 나와 거기에 연루된 자가 만연하여 죽거나 귀양을 간 자가 매우 많았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불안하여 기회를 틈타 보복을 도모하여 처음 안옥(按獄)했던 대신을 수죄(首罪)로 삼아 그 함정을 크게 펼쳤다. 그래서 당시의 명경 현사(名卿賢士)들이 모조리 폄찬(貶竄)되었고 공 역시 거기에 끼게 되었는데, 선조(宣祖)가 공의 문재(文才)를 아깝게 여겨 죄가 파직하는 데에 그쳤다. 공은 즉시 묘사(墓舍)로 돌아갔는데 오직 책 상자만 가지고 가서 가난하여 자주 끼니를 잇지 못했으나 편안하게 여겼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왜구가 크게 이르자 공은 변란 소식을 듣고는 걸어서 예궐(詣闕)하니, 선조가 사대(賜對)하여 장유(獎諭)하고 예조 참의에 서용하였다. 평안도로 호가(扈駕)하면서 좌부승지로 옮겼다가 예조 참판으로 특진하였다. 이때 마침 조사(詔使)가 나오게 되어 있어 공은 연위사(延慰使)가 되어 먼저 의주(義州)로 갔다. 7월에 대가(大駕)가 비로소 선천(宣川)에 도착하였는데, 배종(陪從)하는 조정 신하가 겨우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공은 의주에서 달려가 정주(定州)에서 알현하니, 임금이 말을 멈추고 위로하고 즉시 도승지를 제배하였다.
이듬해에 적이 물러가자 환도하게 되었는데 하루 전에 임금이 의주 문루(門樓)에 나아가 고을의 부로(父老)를 문루 아래로 불러모아 공으로 하여금 선유(宣諭)하게 하기를, “내가 불행히 난리를 만나 먼 곳으로 파천(播遷)하여 중국에 구원을 청하고, 그대들이 분주하게 힘을 바친 데 힘입어 회란(回鑾)하는 경사가 있게 되었으니, 내가 어찌 감히 거(莒)에 있던 때1)를 잊겠는가?” 하였는데, 공이 임금이 구술(口述)하는 말을 받아 선포하면서 응대하고 주선함이 매우 임금의 뜻에 맞아 선조가 크게 가상하게 여기고, 고을 백성들 역시 모두 듣고는 감격해서 울었다.
특별히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승진하고 경성 안무사를 겸하여 명을 받들고 먼저 경도로 들어와 폐허가 된 도성을 수습하고 간궤(姦宄)를 단속하였다. 여름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갈리고 사은 부사(謝恩副使)에 충원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겨울에 돌아와 경기 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새로 큰 난리가 지나가서 백성들이 사방으로 유리(流離)하여 흩어졌다. 공은 제로(諸路)에 통문을 보내 유시하면서 위로하고 안집(安集)시키는 방도를 다하였다. 농기구를 비롯하여 종자와 양식을 거둬 모아 경작을 권하고, 재물을 모아 말을 사서 각 역(驛)에 나누어주어 우전(郵傳)을 통하게 하니, 백성들이 비로소 본업(本業)으로 돌아왔다. 임기가 차자 다시 판윤(判尹)이 되어 도총관(都摠管) 지의금(知義禁)을 겸하였다. 조정 의논이 수원 산성(水原山城)을 쌓기로 하여 또 공을 재차 경기 관찰사로 천거하였다. 그 일이 비록 어려운 시기에 벌이는 큰 역사였지만 공이 방도를 써서 잘 경영하여 백성들을 병들게 하지 않으니 백성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공을 기렸다.
병신년(丙申年, 1596년 선조 29년)에 체직해서 돌아와 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얼마 후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다. 이보다 앞서 홍산(鴻山)의 역적 이몽학(李夢鶴)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켰는데 도신(道臣)이 처음에는 겁을 먹고 어쩔 줄을 몰라했고, 나중에는 소탕해 잡는 방법이 마땅치 못하여서 군교(軍校)들이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백성들이 놀라 흩어지고 역로가 거의 막히고 끊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조정에서 도신(道臣)을 체직하고 공으로 대신 한 것이었다. 공은 부임하자 먼저 마구 잡아들이는 것을 법으로 다스리는 한편, 조정에 철저히 체포하라는 명을 늦추어 주기를 청하니, 도(道)의 인심이 비로소 진정되었다.
이듬해에 사체(辭遞)하고, 이어 오도병마 부체찰사(五道兵馬副體察使)에 임명되었다. 이때 중국에서 산동(山東)의 양향(粮餉) 수백 척을 선천(宣川)과 철산(鐵山) 사이에 잇달아 운반해 놓았는데, 여기에서 경강(京江)까지 배로 옮기는 일은 전적으로 우리의 책임이었다. 이때는 바야흐로 가을 바람이 거세고 바닷길이 위험해서 조정 의논이 어떻게 옮겨야 할지 몰랐다. 좌상 윤두수(尹斗壽)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공을 천거하고, 또 입대하여 아뢰기를, “이 일은 유모(柳某)가 아니면 처리할 수 없습니다.” 하니, 선조가 특별히 운향 검찰사(運餉檢察使)로 제수하였다.
공은 명을 받자 즉시 가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노심초사하며 두꺼운 판자를 써서 큰 배를 많이 만들었다. 어떤 사람이 너무 둔해서 행선(行船)하기가 어려울 것을 염려하자 공은 답하기를, “후에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하였다. 마침내 그 곡식을 50여 척에 나누어 싣고, 배마다 군관(軍官)과 기고(旗鼓)를 태우고 일제히 출발하였다. 이때는 벌써 한겨울이어서 경강(京江)이 거의 얼어붙었는데, 명나라 장수는 날마다 사람을 보내 강가에서 살피고 조정 역시 기일을 맞추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하루 50여 척의 배가 조수를 타고 돛을 펴고는 강을 거슬러 오르니, 군관은 각기 깃발 아래에 서서 북을 울리고 각(角)을 불어 일제히 선인(船人)을 독려해 강의 얼음을 깨뜨리고 차례로 용산(龍山)에 정박하였는데, 대개 배의 판자가 두꺼웠기 때문에 얼음에 부딪쳐도 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사람들이 비로소 탄복하였고 명나라 장수도 먼저 알고 군교(軍校)를 보내 예궐(詣闕)하여 치사(致謝)하니, 선조가 매우 기뻐하여 한 계급을 올려 포상하고, 군관 이하에게도 차등을 두어 작상(爵賞)하였다. 서민(西民)들은 비(碑)를 세워 그 일을 기록하였다.
돌아와서 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경자년(庚子年, 1600년 선조 33년)에 예조 판서에 제배되고 호조로 옮겨 사체(辭遞)하였다. 얼마 후에 다시 호조에 들어가고 이듬해에는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병으로 사직하였다. 또 예조 판서ㆍ경조(京兆)ㆍ세자 우빈객(世子右賓客)을 역임하고, 하절사(賀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예조 판서가 되었다. 이때 왕비를 새로 책봉(冊封)하게 되었는데, 공은 그 관복이 옛날과 같지 않은 것을 개탄하여 중국 후비(后妃)의 복식제도를 모방하여 대례복(大禮服)으로 바로잡기를 청하였다. 충청도 관찰사에 천거되어 도순찰사(都巡察使) 공주 목사를 겸하였다. 이때에 조정의 의논이 장차 공주 산성을 수리하려고 하였는데, 그 처리와 시설은 반드시 공을 얻어야 중하게 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공은 백성을 모집하고 양식을 비치해서 힘을 비축하고는 때를 보아 제대로 잘 수선하여 성첩(城堞)ㆍ누로(樓櫓)ㆍ기계(器械)ㆍ창고가 모두 새롭게 모습을 바꾸어 우뚝이 일로(一路)의 보장(保障)이 되었다. 아울러 폐해가 군민(軍民)에게 미치지 않아 선조가 호궤(犒饋)하여 위로하였다.
갑진년(甲辰年, 1604년 선조 37년)에는 들어와서 의정부 좌참찬 겸 예문관 제학이 되었다. 임진년(壬辰年)의 호종(扈從)한 공로로 공은 충근 정량 효절 협책 호성공신(充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 2등에 녹훈되었으며 숭록 대부(崇祿大夫)에 초자(超資)되고 진원군(晉原君)에 봉해졌으며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또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ㆍ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ㆍ지춘추관ㆍ성균관사ㆍ동지경연사에 제배되고, 얼마 후에는 의정부 우찬성 겸 지경연이 되었다. 병오년(丙午年, 1606년 선조 39년)에는 좌찬성 겸 세자이사(世子貳師)로 승진하였다. 명나라 한림 학사(翰林學士) 주지번(朱之蕃)ㆍ급사중(給事中)ㆍ양유년(梁有年)이 와서 조서를 반포하였는데, 공을 원접사로 삼았다. 주공은 중국에서 평소 문장의 대가로 일컬어지는데 공의 수창(酬唱)함이 신속(神速)한 것을 보고는 탄복하여 말을 할 때면 반드시 사장(詞丈)이라 일컫고 돌아갈 즈음에는 진심으로 서운해하였다. 그 뒤 우리나라 사행을 만나게 되면 항상 공의 안부를 묻고 아울러 자주 편지를 부쳐 은근한 정을 나타냈다.
광해군(光海君) 초년에는 보국 대부(輔國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중국 사신 웅화(熊化)가 나와서 조제(弔祭)를 지낼 때 또 원접사가 되었다. 웅공은 문명(文名)이 주지번과 맞먹었다. 그는 국경에 들어오자마자 연도에서 읊은 시 수십 편을 꺼내 보이며 즉시 보운(步韻, 다른 사람 시의 운을 써서 화답하여 시를 지음)하라고 재촉하였다. 공이 즉시 붓을 휘둘러 지으니, 웅공이 손을 씻고 읽으면서 칭탄(稱歎)해 마지않았다.
이때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와 퇴계(退溪, 이황(李滉)) 두 선생을 성묘(聖廟)에 종사(從祀)하였는데, 정인홍(鄭仁弘)이 상소하여 마구 헐뜯었다. 태학생들이 정인홍의 이름을 청금록(靑衿錄)에서 지우자 그 무리 박여량(朴汝樑)이 대관(臺官)으로 정인홍을 위하여 깃발을 세우고 태학생들을 모함하였다. 광해군이 노하여 제생을 금고(禁錮)하라고 명하니, 공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정인홍이 종사(從祀)한 유종(儒宗)을 모함해 배척하였으니, 이는 그가 먼저 스스로 조정과 끊은 것이므로 하루라도 그 이름을 유적(儒籍)에 남겨 둘 수가 없습니다. 이는 실로 사림의 논의여서 조정에서 간여할 바가 아닙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사(前史)를 두루 보아도 금고라는 두 글자를 성세(盛世)에 볼 수 있었습니까? 박동량의 비밀스러운 계책에 동요되어 점점 격렬해짐이 이에 이르니 신은 통분하게 생각합니다.” 하였다. 또 임숙영(任叔英)을 삭과(削科)하라는 명에 대해 논하기를, “옛날 소철(蘇轍)이 정대(庭對)할 때 너무 지나치게 곧은 말을 하므로 고관(考官) 호무평(胡武平)이 내치고자 하니, 송 인종(宋仁宗)이 말하기를, ‘임금이 인재를 뽑을 때는 오직 직언하는 자를 뽑아야지 어찌 직언을 하였다고 내쳐야 되겠는가?’ 하고는 제1등으로 뽑아 지금까지 미담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만약 정식(程式)이라 핑계하여 고시관이 이미 뽑아놓은 급제자를 삭과(削科)한다면 후일의 폐단을 막으려고 하다가 오히려 앞으로 직언을 꺼려한다는 이름을 얻기에 알맞습니다.” 하였으나 광해군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계축년(癸丑年, 1613년 광해군 5년)에 호조 판서를 겸하였다가 사체하였는데 조정(朝政)이 날로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는 더는 벼슬할 뜻이 없었다. 이에 문을 닫고 인사를 사절하고, 이윽고 괴산(槐山) 묘소 아래에서 생을 마칠 계책을 세웠다. 그때 마침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서 양사(兩司)에서 대론(大論)을 염피(厭避)한다고 공을 탄핵하여 멀리 찬축(竄逐)하는 것으로 조율(照律)했는데, 광해군이 삭출만 하도록 명하였다. 기미년(己未年, 1619년 광해군 11년)에 다시 원봉(原封)을 회복하였으나 이때부터 물러나서 병을 요양하며 한번도 조회(朝會)에 나아가지 않았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 인조 반정(仁祖反正) 때 특별히 소대(召對)하여 매우 우악(優渥)하게 대하였다. 몸은 쇠약하고 병은 더 심해져서 차자를 올려 치사(致仕)를 빌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에 오랑캐의 경보가 있어 임금이 강도(江都)로 행행하였다. 공은 말을 탈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져 뱃길로 행재소로 가다가 통진(通津) 촌가(村家)에 이르러 그만 병이 위독해져 2월 초5일에 졸(卒)하니, 춘추는 79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임금이 진도(震悼)하고 철조(輟朝)하였으며, 조제(弔祭)를 예대로 하고 관에서 장례 준비를 갖추게 하였다. 아울러 공을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ㆍ홍문관ㆍ예문관ㆍ춘추관ㆍ관상감사ㆍ세자사로 추증하였다. 그해 8월에 괴산 현치(縣治) 북쪽 영등산(影燈山) 계좌(癸坐) 언덕에 장사하니, 선영을 따른 것이다.
부인 송씨(宋氏)는 진천(鎭川)의 망족(望族)으로 모관(某官) 송억수(宋億壽)의 딸이며,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선생의 동모제(同母弟) 조숭조(趙崇祖)가 외조부인데 부덕(婦德)이 있었다. 딸만 둘을 낳아 사자(嗣子)가 없어 백씨 정언공의 아들 유시보(柳時輔)를 아들로 삼았는데 벼슬은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이다. 두 딸 가운데 장녀는 영의정 김유(金瑬)에게, 차녀는 홍문관 교리 오전(吳竱)에게 시집갔다. 전첨의 아들 유구(柳
)는 정사 공신(靖社功臣)에 책훈되어 진천군(晉川君)에 봉해졌다. 내외 증손과 현손은 모두 백여 명이다.
공은 천자(天資)가 빼어나고 기도(器度)가 단중(端重)하였다. 어려서부터 말과 행동에 절도가 있어 여럿이 함께 있으면서 자신을 자랑하거나 꾸미지 않았으며 혼자 한가로이 있다고 해서 게으르지 않았다. 사람을 대함에 비록 온화하고 까다롭지 않았지만 비위(非違)를 보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고 바로 잡고 꾸짖었다. 직무를 처리할 때면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는 듯 하였으나 큰 이해가 달린 문제는 뜻이 굳고 확고하여 꺾을 수가 없었다.
어버이를 섬김에는 뜻을 따르는 것을 효도로 삼아서 봉양함이 예에 어긋나지 않았으며, 전후(前後) 거상(居喪)할 때는 한결같이 훼멸(毁滅)의 지경에 이르렀으니, 마치 자신을 다해서 예(禮)를 극진히 하는 듯 하였다.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몸에서 최질(衰絰)을 벗지 않았고 조석으로 슬피 곡읍(哭泣)하여 듣는 자들이 감동하였다. 복이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흰옷을 입다가 생을 마쳤으며, 큰 연회 때가 아니면 음악을 듣지 않았다. 백형(伯兄) 섬기기를 아버지처럼 하여 공경과 사랑이 모두 지극하였다. 평소 산업을 일삼지 않아서 집안에는 남은 재물이 없었다. 중신(重臣)의 지위에 올랐으나 항상 빙벽(氷蘗)같이 스스로 깨끗하게 처신하여 청탁이 행해지지 않고 뇌물이 이르지 않았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봉직하여 비바람과 더위와 추위를 피하지 않았다.
공무에서 물러나서는 조용히 방안에 앉아 오직 한묵(翰墨)으로 스스로 즐겼다. 의론(議論)은 화평(和平)을 위주로 하여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어 비록 여럿이 다투고 각축하는 가운데서도 태연 자약하게 처신하였다. 구차하게 시세에 영합하는 사람을 보면 장차 더러움에 물들까 경계하였다. 시비를 가릴 때에는 자신의 견해를 확고히 믿어서 남을 따라 반복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번 좌절되기도 하였지만 또한 후회하지 않았다. 논자들이 기축 옥사(己丑獄事) 때 이발(李潑)이 죽은 것은 억울하다고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이발이 처음에는 율곡(栗谷)을 섬기다가 나중에는 정여립(鄭汝立)에게 붙어 반복(反覆, 언행을 이랬다 저랬다 함) 경알(傾軋, 남을 죄에 빠뜨림. 배척함)하며 참으로 서로 창화(唱和)하였다. 그러니 역모에 참여하여 그 사정을 알고 있었는지는 비록 알 수 없으나 정여립이 주륙을 당했는데 이발이 어찌 혼자 죽음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발과 정여립이 꺼리는 자는 율곡이었으니, 율곡이 만약 있었더라면 반드시 오늘날의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니, 사람들이 확론(確論)이라고 하였다.[이상(以上)이 선인(先人)께서 쓰신 글이다.]
공의 문장은 경훈(經訓)에 근본하였으며 사어(詞語)가 풍부하고 문사(文思)가 민첩해서 그 운용을 지극히 하였는데, 특히 시에 뛰어났다. 애초 고상하고 뛰어나기를 힘쓰지 않았지만 정치(精緻)하고 전아(典雅)하며 세련되었으니, 좇으려해도 미칠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관각(館閣, 홍문관과 예문관)에 있어서 고문 대책(高文大冊)이 공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선조(宣祖)가 승하하셨을 때 공이 유교(遺敎)를 대신 초하면서 대비(大妣)를 받들고 동기(同氣)들과 우애하며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돌보고, 사대(事大)와 외적을 물리치는 방도 등을 상세히 아뢰었는데, 사의(辭意)가 아주 간절하였다. 그 후 광해군이 패하였는데 이러한 여러 조항을 다 범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공이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말하였다.
공은 일찍부터 문장으로 성주(聖主)의 지우(知遇)를 받았고, 당시의 예원(藝苑) 제공(諸公) 역시 모두 옷깃을 여미고 종장(宗匠)으로 추복(推服)하였다. 기타 행실과 업적, 정술(政術), 내외직을 출입하며 충근(忠勤)하게 봉공(奉公)한 일에 이르러서도 모두 본말이 있어서 가히 전해서 실을 만하니, 참으로 일대의 명신(名臣)이라고 하겠다.
공의 증손 군수(郡守) 유명재(柳命才)가 일찍이 선군자(先君子, 지은이의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을 말함)에게 공의 행장(行狀)을 지어달라고 부탁해서 시호의 은전을 청하려고 했으나 불행히 이루지 못하고 선군자께서 화를 입으셨다. 지금 그 초고가 남아 있는데 공의 사행(事行)과 논찬(論撰)이 대략 갖추어져 있다. 그래서 군수가 다시 불초에게 그 단편들을 이어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참으로 글을 잘 못하지만 생각건대 의리상 차마 사양하지 못하여 감히 몇 마디 더 붙여 선군자의 뜻을 이루어, 태상씨(太常氏, 봉상시(奉常寺))가 참고하여 채택하게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근 [柳根]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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