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 생활 적응기 (2012~2015)
이 글은 심재구가 2012~15년 3년 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정보통신산업진흥원(NIPA)에서 퇴직전문가로 선발되어 중남미 과테말라
정부의 재해감축청(CONRED)에 파견 근무하며 적응한 현지
생활경험을 향후 파견될 후배 자문관들에게 참고자료로
제공하기 위해 작성한 내용입니다
성 명 : 심 재 구
과테말라 생활 적응기
멀고도 먼 나라 과테말라
막상 NIPA자문관으로 선발되기 까지도 과테말라에 대한 지식과 정보는 한심할 정도로 일천하였다. 부임한다는 절박감에 부지런히 정보를 검색하고 무장하여 출발한지 총 22시간만에 과테말라에 도착했다.
<과테말라 시티 전경>
과테말라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크기의 국토이나 인구는 1500만명으로 우리의 1/3이 채안되며 수도는 고도 1500미터에 위치한 과테말라 시티이다.
300여년의 스페인 식민지에서 독립한지 올해 193년이 지났으며 다른 중남미 국가와 같이 국교가 카톨릭이다.
오늘날 과테말라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마약과 총기소지 합법화로 치안이 극도로
불안하여 살인강도 사건으로 수도에서 일일 20명 정도가 희생되며 간간히 우리들도 범행 대상이 되고 있는 매우 위험한 나라라는 것이다.
<푸에고 화산의 용암분출>
또한 지진, 화산폭발, 산사태, 산불, 홍수 등 자연재해가 다발하여 매년 피해가 극심하나 대비책도 미비하고 국민들은 불안감 마져도 없다.
정치인의 부정부패도 심하여 역대 대통령이 미국법정에 서기도 하고 과거 오토
뻬레스 대통령은 세관 부정과 관련하여 임기를 불과 석달 앞두고 권좌에서 물러나 구속된 바도 있다.
그러나 년중 기온이 가장 쾌적한 섭씨 15~25도로 매일 아침 감탄을 불러 일으키게 하며 “Eternal spring”으로 불리는데 전혀 손색이 없다.
또한 온화한 기후 탓에 거의 일년 내내 각종 꽃이 만발하고 과일이 풍성하며 특히 이곳의 바나나는 미국 바나나 수입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관광 인프라도 풍부하여 옛 수도 안티구아는 커피로도 유명하지만 스페인 정복시절 설계된 옛 시가지와 건물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고 강한 지진으로 인해 붕괴된 건물 자체도 복원하지 않고 관광자원으로 잘 활용하고 있다. 그래서 정부는 안티구아시내 전체를 유네스코 지정 유산으로 등재하여 관리하고 있다.
<안티구아의 스페인풍 건물 뒤로 보이는 아구아 화산>
북부에는 띠깔이라는 마야문명 시대의 중심지가 광활한 밀림속에서 잠자다가 미국의 고고학자에 의해 발견되어 지금은 인신제사를 드리던 피라미드형 높은 돌탑 등 신전 일대가 일부 발굴되어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사람을 죽여 제사를 드리던 띠깔 신전>
부임초기 호텔에서의 에피소드
나는 부임하여 코이카 직원의 안내로 예약된 클라우네 플라사 호텔에 여장을 풀고
숙소도 구하며 당분간 필요한 생필품도 구매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부임전 교육 및 현지인으로부터 워낙 많은 치안 관련 주의사항을 들어서 거의 호텔 연금 생활을 했다. 그 내용은 “낮이든 밤이든 일체 거리를 걸어 다니지 말라.” “아무리 짧은 거리도 위험하다.” “강도 당할시 줄돈 1~200께짤은 항시 호주머니에 지참하고 다녀라.” “일반택시 탑승도 위험하다” 등등 수도 없는 조언이 발을 꽁꽁 묶어 놓는다.
호텔에서 조식은 해결했지만 점심, 저녁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생필품은 어디서 어떻게 구매해야 할지 너무도 막막했다.
처음엔 서울에서 가져간 일부 식품으로 호텔 내에서 버텨 보았지만 힘들었고 창밖으로 50여미터 떨어진 버거킹 대리점 간판이 보여도 걸어 가질 못하니 그림의 떡이다.
거리에 걸어 다니는 현지인은 모두 총을 감춘 강도로 보이니 이상한 일이다.
가게마다 집집마다 긴 엽총을 든 경비원이 지키고, 조그만 점방이나 큰 가게도 강도침입 방지 창살망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아주 낯 설기만 하다.
<총을 들고 경계하는 주차장 경비원>
주말이 끝나고 코이카 직원이 차를 가져와 숙소를 구하러 가고 생필품도 사자고 하는데 어찌 그리 반가운지 눈물이 날 정도이다.
부임은 하였지만 이와같은 감옥에서 어떻게 앞으로 생존해 나갈지 정말 답답하고
암담하였다. 더구나 나의 경우는 자문관 중에서 처음으로 가족까지 오기로 하였으니 방도를 찾아야 할 판이었다.
결국은 호텔생활 사흘째 되는 날 로비를 통해 잠시 호텔 앞에 몇 발짝을 나갔지만 이내 뒷머리가 근질거려 외출에 실패하고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너무 융통성 없이 겁먹은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해보지만 오히려 그와 같이 조심하므로서 한 건의 불미스런 일을 경험하지 않고 안전하게 귀국하지 않았나 위로해본다.
현지 적응의 가장 첩경은 종교활동
호텔에서의 생활 중 한식이 하도 먹고 싶어 프론트에 안전한 콜택시를 불러 달라 요청하여 짧은 스페인어 실력으로 무조건 한인식당으로 가자고 하니 모 식당으로 안내해주었다. 그곳에서 얼큰한 육개장으로 식사를 마치니 내일이 일요일이라는 것이 문득 떠오르며 식당 프론트에 우리 교민 교회 달력이 눈에 띄었다.
얼른 주인 아주머니께 내일 아침에 교회를 가야하는데 어떻게 안내해줄 수 있는가를 요청했더니 바로 교회로 전화하여 어떤 분이 내일 호텔로 안내해주러 오겠다고
친절한 답변을 들었다.
그로부터 이곳에서 안정된 신앙생활은 물론 초기단계 대부분의 생활정보를 교회 신도들을 통해 안내받았다.
생필품 구매장소, 갈만한 교민 및 현지인 식당, 병원/약국, 생선/과일 시장, 우체국, 은행, 중고차 구매 등 수없이 많은 도움을 받았다.
<종교생활을 통한 교민과의 일체감>
이와 같은 상황은 교회 뿐만 아니라 성당, 법당도 마찬가지 이다.
그래서 나 이후로 부임하는 자문관들은 먼저 종교를 파악하여 종교시설을 우선 찾을 것을 권유하고 그곳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 무교를 고집하는 일부 자문관은 그런 도움없이 혼자 해결하려니 위험과 시행착오를 많이 겪는 모습을 보았다.
사실상 부임 후 현지에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일부 자문관, 대사관, 코이카 직원의 도움을 받지만 그들도 기본임무수행 때문에 별도의 시간을 내기 어렵고 사적인 분야의 도움까지 얻기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에 따른 신도들과의 교제는 자연스러우면서도 현지생활에 가장 최선의 방책으로 생각한다.
나의 경우는 파견국의 주요 관광도 거의 이들의 안내로 편안하게 즐겼으며 업무와 관련된 주재국의 비공식적 정보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신변 안전을 위한 방책으로서의 차량구매
과테말라에서는 주야간을 막론하고 걸어다니는 것은 강도범행의 표적이 되기 쉽다.
특히 한국인은 저들 속에서 얼굴과 옷차림이 쉽게 식별이 되고, 현금을 지갑에 많이 넣고 다니는 한국인이라는 속설이 있기에 위험한 일이다.
또한 한국인은 납치하면 뒷거래를 통해서 큰 돈을 쥘 수 있다하여 범죄 조직의 표적도 되고 있으니 이동시 차량 탑승은 필수적이다.
나는 부임 후 기관에서 일주일간 출퇴근 차량을 지원해 주더니 예산부족을 이유로 더는 곤란하다고 하여 몇 주는 매일 콜 택시를 불러 출퇴근을 하였으나 돈도 많이 들고 기다리는 시간도 많아 비 경제적이었다.
여러 방책을 고민하다가 이곳 자문관 중에서는 처음으로 중고차를 구매하기로 결심을 하고 교민 중 차에 대해 잘 아는 분의 도움을 받아 차령 13년의 선팅이 짙은 중고 혼다 아코드를 구매하여 3년간 잘 타고 적절한 값으로 다시 매매를 하고 귀국하여 그곳 생활 적응 중 잘한 일의 첫 번째이다.
이후로 나는 자문관이 부임하면 안전보장의 일호로서 중고차 구매를 권하여 안전한 이동을 하도록 도와줬다. 차량은 출퇴근 뿐만 아니라 생필품 구매, 운동 및 취미활동, 주말 현지 여행등에 요긴하게 활용하였다.
결국은 차량한대가 이동 안전을 보장해주고 자신의 활동 영역을 크게 넓히며 살수 있다는 것이 자문관 활동에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타이밍이 맞으면 귀국하는 자문관이 부임하는 자문관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인계하니 서로 도움도 되었다.
기관의 현지 직원 내편 만들기
과테말라는 스페인어권으로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는 나라이다.
나는 영어는 좀 하지만 스페인어는 부임전 더듬더듬 독학한 실력이 전부이다.
따라서 사무실 출근하여 아침인사하고 나면 이내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 만다.
유창하게 저희들의 말로 떠들고 껄껄 거리는 속에서 한마디 알아 듣지 못하고
한마디 말 못하는 것의 고통은 세종대왕님의 훈민정음 서문을 생각나게 한다.
“나랏 말쌈이 중국과 서로 달라.... 마음을 실어 펴질 못하니 한이로다”
기관의 전 직원 400여명 중에 영어로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10명도 채 안되니
스페인어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 자긍심을 훨씬 넘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이들에게 나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고 나아가서는 대한민국을
이들에게 잘 알려 줄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2단계 전술을 쓰기로 했다. 우선 1단계로 내가 먼저 생활 스페인어를 매일 열심히 사무실 직원에게서 배우고, 간간히 우리말도 이들에게 알려주어 간단한 소통을 할 수 있도록 하고, 2단계로 기관장의 정식 승인을 받아 직원중 희망자를 모집하여 한글교육 학급을 개설하여 말과 글, 우리 문화까지도
소개해야 겠다 마음을 먹게 되었다.
우선 사무실에 커다란 화이트 보드를 구매해 내 자리 뒷부분에 설치하고 매일
새로운 스페인어 단어와 문장을 기록하여 암송하고 사무실 내외에서 마주치는 직원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연습하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열심히 노력하는 나의 모습에 그들이 감동하고 격려해주며 깊은 관심을 보여 주었다.
약 3개월이 지난 후 부터는 사무실 직원에게 기초적인 한국말 인사와 실용표현을 보드판에 기록하여 연습하게 하니 급기야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어느새 스페이어로 인사하고 사무실 직원은 한국말로 인사하는 반대현상이 나타나며 언어로 인한 사무실의 분위가 매우 밝고 유쾌하게 바뀌었다.
<기관에 개설한 한글교실 수업>
6개월 정도 지나자 마침내 타 사무실 직원들도 한국말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고 이제 2단계 전략을 구사할 시점 된 것으로 생각하여 카운터 파트 국장을 통하여 재해감축청(CONRED) 청장에게 보고하여 자문관이 직원대상의 한글 클래스를 열도록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청장은 흔쾌히 승인하였으며 인트라넷을 통해 희망자를 모집하여 주2회 1시간씩 수업을 진행하였다.
한글교재는 한인회 한글학교에 요청하여 초급학년 사용 교재를 지원받아 사용하며 열심히 가르치고 배워서 더듬더듬 한글을 읽고 쉬운 단어를 말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물론 이들에게 동기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한글교육 수료자는 내년도 코이카 국내연수프로그램 피교육자로 우선 선발한다고 공표하였다.
이 내용은 내가 귀국하기 전에 현실화되어 그중 4명이 우리나라에 오게 되었다.
한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문화이해와 병행되지 않으면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따라서 나는 대사관에 우리나라 관광, 음식, 의복 등 여러 분야의 관련 동영상자료를 요청하고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우리나라 소개 영상자료를 준비하여 한글교육과 병행하여 홍보함으로써 그 효과를 배가시켰다.
사실 우리가 과테말라를 모르는 것 같이 이들도 한국에 대해 오히려 더 모른다.
이들은 동양인을 보면 중국인인가 일본인인가 먼저 물어보고 심지어는 삼성휴대폰과 현대자동차가 일본제품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기관의 공무원도 이 지경인데 일반 사회인은 더욱 무지한 실정이다.
어쩧든 한글교육을 통하여 기관 내에서는 자문관과 대한민국을 확실하게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 배출된 제자들은 나의 임기 종료 시까지 충실한
나의 후원자요 조력자가 되었다.
기간 중 나는 두 번에 걸친 커다란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소속기관 뿐만 아니라 정부 각 부처 대표들을 소집하여 프레젠테이션하는 기회가 있었다.
이때마다 나의 한글반 제자들은 스페인어 교정, 전문 PPT작업, 프레젠테이션 총괄 지원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성심껏 도와 주었다.
<Presentation 발표시>
또한 현지 직원을 위해 봉사 할 분야가 무엇인가를 연구하다가 나의 아내가 꽃꽂이 사범이므로 기관 내 여직원에게 가르치면 정서 함양과 우리 문화를 알리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마침 담당국장 부부와의 만찬 기회시 이야기 하였더니 다음날 바로 기관장에게 보고하여 승인을 얻어내어 CONRED(재해감축청)내에 인터넷으로 공고하여 무료
꽃꽂이 수강생을 모집하여 30여명이 채워졌다.
<기관 여직원 대상의 무료 꽃꽂이 강습 봉사>
매주 1회씩 모여 꽃값만 내고 수강하여 아름다운 꽃꽂이를 사무실 또는 가정에 가져 가니 금방 기관내에 소문이 퍼지고 추가 희망자들이 속출하였다.
꽃꽂이 수업간에도 영어로 말하면 스페인어로 통역해주는 사람, 꽃을 구매하러 같이 가서 도와주는 사람 등 여러 돕는 사람들의 손길로서 보람을 이룰 수 있었다.
어느 나라에 나가든 자문관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면서 지니고 있는 특기와 취미가 있다면 이들에게 서비스 하므로써 더 큰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고 우리나라를 알릴수 있는 기회로서 활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현지 어려운 사람들은 도울 길이 없을까?
과테말라에 살면서 맑은 하늘과 예쁜 꽃과 보람있게 일하는 나 자신을 돌아볼 때 절로 감사한 마음이 우러난다.
그래서 문득 이 감사한 마음을 부족하고 가진 건 없지만 이곳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미력하나마 도울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생각을 해보았다.
과거 미얀마에서 3년간 국방무관 근무시에도 같은 생각을 했지만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고 생각에만 그친 일이 있었기에 좀 더 고민을 했다.
그래서 주변을 둘러보니 시골지역은 머리를 자르지 못해 투박한 머리모양으로 비위생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미국에서 어느 분이 와서 머리를 깍아주니 한결 깨끗하고 좋아보였다. 나는 가족과 함께 이발기구셑을 우선 구매하여 이미용 자격을 가진 분에게 기초 이발, 미용기술을 속성으로 두달 간 배우고 부부간에 실습도 하였다.
<이.미용기술을 배우는 나의 모습>
이젠 주변 자문관 머리도 다듬어 줘보면서 자신감이 생기고 급기야 시골 변두리 지역으로 몇 명이 함께 무료 이미용 봉사를 1주에 일회 정도 다니기 시작했다.
머리를 안감아 빗질이 되지 않는 소녀, 버짐이 뒤덮은 소년, 베컴선수 머리로 깍아 달라는 학생..... 처음에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한명씩 머리를 깍았으나 점차 숙달되자 속도도 빨라지고 이발기술도 향상이 되었다.
<소녀의 머리 커팅봉사>
수많은 빈민지역을 다니며 이발 봉사를 하다 보니 내가 비록 이미용 자격증이 없지만 나를 믿고 그들의 머리를 맡기는 모습과 내가 저들의 머리를 깍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나의 마음을 깨끗이 정리해 주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 오히려 감사했다.
특히 여성들은 머리를 다듬어 주고 머리핀, 고무줄 등을 선물로 주면 기뻐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미용 봉사 후 현지인 아이들과 함께>
또한 기관 내에서 어려운 사람을 도울 길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우리나라에서 매년 연말에 불우이웃돕기 하던 생각이 떠올라 기관에서 가장 생활이 어려운 직원(경비원)을 추천 받아 매년 말 비록 적은 액수지만 개인적으로 지원해 줄 수 있어서 감사했다.
우리가 자문관으로 파견되어 개도국에 나와 있지만 비공식적으로 이들 현지인을 어떤 모양이든지 개인적으로 도울 수 있다면 큰 보람과 기쁨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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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에서 추천 받은 어려운 가정에 금일봉 전달>
체력관리만이 살길이다
자문관으로 파견되어 공적인 임무의 성패는 업무 실적 이지만 개인적인 성패는
건강관리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과테말라 같이 치안이 불안한 나라는 실외활동이 위축되어 본인이 노력하지 않으면 체력관리에 실패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나는 부임 후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장소를 교민 및 현지인에게 수소문하여 집근처의 대사관저가 밀집한 라 까냐다라는 곳을 소개받게 되었다.
집에서 10분정도 이격된 곳인데 내부는 정문에서 신분확인을 철저히 확인하여 출입시키기 때문에 안전이 보장되고 유럽풍의 건축물과 아름다운 가로수, 잘 가꾸어진 정원과 사철 만발한 아름다운 꽃을 덤으로 구경하며 운동할 수 있는 곳이라 거의 매일 일과 후 가족과 함께 1시간 정도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좀 더 강도 높은 운동을 위해 계속해오던 테니스를 하고 싶은데 어디서 어떻게 운동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구글지도에서 항공사진을 찾아 과테말라 시티에 있는 테니스 코트를 식별하고 하나씩 방문하여 알아 본 결과 테니스 협회가 회원으로 배려해주어 일주일에 2번 정도는 저렴하게 운동할 수 있었다.
그래서 코이카 소장을 비롯한 자문관단에 정보를 제공해주고 매주 말 친선대회도 하는 등 즐겁게 운동하였다.
<테니스 운동을 마치고>
땀을 많이 흘리며 체력을 단련하다 보니 3년간 병원신세를 진 일 없이 건강히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자문관 들은 이미 현직에서 은퇴한 고령자이고, 파견국들이 대부분 기후나 생활여건 면에서 낙후된 곳이 많기에 테니스 외에도 골프, 수영, 배드민턴, 탁구 등 자신에 맞는 운동을 선택하여 꾸준히 체력을 관리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이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자문관들께
우리나라에 NIPA, KOICA자문관(전문가) 제도가 생긴지도 어언 15년의 시간이 흘러 이제는 명실 공히 개도국에 꼭 필요한 제도로서 인식이 되어가고 있다.
이에 따라 매년 자문관 지원도 점차 늘고 수원국의 수요와 요청분야도 다원화
되고 있다.
그러나 수원국의 대부분은 자연환경, 정치, 경제, 치안 등 각 분야가 불안정하고
열악하여 파견 전부터 자문관의 많은 준비와 노력이 요구되고 있다.
부임하여 초기 적응은 대단히 중요하며 특히 기관과의 관계, 우리 대사관, 코이카 사무실과의 긴밀한 협조는 업무수행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특별히 치안의 어려움이 큰 과테말라에서 3년간 임무를 수행했기에 현지생활 적응에 비중을 많이 두고 살아왔다.
종교생활에 자연스럽게 의지하여 많은 정보와 도움을 받았으며, 이동 간 위험에 노출되지 않기 위하여 중고차량을 구매하여 사용하였고, 기관 직원을 내편으로 만들기 위해 한글교육, 기관 여직원 대상 무료꽃꽂이 강습 등 다양한 노력을 가족과 함께 하였으며, 현지인을 사랑하여 돕기 위해 이.미용봉사, 불우 이웃돕기 등을 하며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아울러 치안문제로 아웃도어 운동이 불가하여 각종 스포츠 정보를 찾아내어 안전한 곳에서 여러 가지 운동을 하며 체력관리에 치중하였다.
즉, 안전관리, 체력관리, 인간관리, 정보획득 등 네가지 측면에 중점을 두고 현지 적응에 노력한 결과 두 번의 추가연장 근무까지 기쁜 마음으로 건강하게 감당하게 되었다.
내가 경험한 과테말라에서의 적응경험은 빙산의 일각이며 각국에서의 적용은 훨씬 다양하고 변화무쌍하지만 다소나마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뿐이다.
첫댓글 과테말라 생활 적응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멋진 삶의 한 편 드라마입니다.
심재구 동기님의 글을 통하여 과테말라를 많이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부가 위험을 무릅쓰고 외국현지에 나가서 살아가는 모습이 무척 도전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앞으로의 삶도 멋있게 살아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16기에 강재구 선배가 있다면 32기에는 심재구 동기가 있군요. 강재구 선배가 죽어서 나라를 살렸다면 심재구 동기는 살아서 나라의 위상을 드높였군요. 장하십니다. 과테말라가 어디에 붙어있는지 지도를 찾아봐야 알 수 있는 곳인데 그런 곳에 가서 대한민국의 훌륭한 모습을 내외가 함께 드러내 보여주셨으니 역시 자랑스럽습니다.
훌륭한 일을 많이 하셨네요. 국위도 많이 선양하고.....멋집니다.
짜임새있는 인생 설계와 실천입니다. 과데말라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여러 봉사활동 수고 많으셨습니다. 회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