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 본위의 통일이 가능한가:
함석헌의 통일론으로 비추어본 통일 과정의 현실
박노자(오슬로대교수)
머리말: 통일 –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
1990년말부터 남한 정부의 햇볕 정책의 효과로 ”통일 운동”이라는 단어는 과거의 재야적 성격을 상당히 많이 벗어나 거의 주류화된 듯한 느낌이다. 정상 회담을 위시한 각종 통치자들 사이의 회담도 거의 정례화됐고, 금강산 관광에 이어 개성 관광도 본격적으로 하나의 일반 관광 상품으로서 자리를 잡게 됐고, 또 남북 교역 분야에서도 직접 교역이 가능해진 1989년 이후에 연평균 22% 교역량 증가율을 보여 지난 2006년에 13억5천만 달러를 기록했다. 방북한다는 것은 1990년대에만 해도 별로 흔하지 않은, 일부 고급 공무원이나 사업가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이었지만 2000년대에 들어 상당히 일반화됐다. 2000년에 남한 측 방북 인사는 7280명에 불과했지만, 2006년에 10만838명이나 되는 등 방북의 ”문턱”이 크게 낮아진 것이다. 남북한 간의 교역, 인적 교류의 지속적 증가가 돌이킬 수 없는 추세라는 점을, 2007년말의 대선에서 남한에서 비교적으로 보수적인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었음에도 대북 정책에 ”조절”은 있어도 큰 기조 변화가 없다는 사실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기류를 감지한 북한 측의 매체들은 이회창 등 일부 강경 ”반북” 정치인들에 대한 비난을 쉴 사이 없이 퍼붓지만 새로운 대통령 당선인에 대해 한 마디의 비판도 하지 않는 것은, 양 쪽 통치 계층 사이의 ”교감”의 정도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남북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 양쪽 지배자들이 과거와 같은 폭력적 대결 대신에 ”공생”을 선택했다는 것은 물론 긍정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과연 여태까지 양쪽 통치자들이 주도해온 물적, 인적 교류의 증강 그 자체가 통일로 이어지는가 라는 부분과, 과연 어떤 방식의 통일과 어떤 방식의 통일 준비가 바람직한가, 지금과 같은 남북 사이 교류의 장단점이 무엇인가 등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남북간의 상호 접근에 있어서 관 (官)과 민 (民) 사이의 균형, 그리고 남과 북 사이의 균형이 전혀 잡히지 않는 것부터다. 대통령을 비롯한 관 대표자들의 방북 및 북한 자료 접근, 북한 인사 접견 등은 사실상 큰 제약 없이 이루어지고 가면 갈수록 일반화돼가지만 민 차원의 북한 자료 이용부터는 아직도 실정법으로 남아 있는 국가보안법의 영향으로 크게 제한돼 있다. 금강산 관광 등 북한 사회와의 진정한 ”접촉”이 결여돼 있는 북한 테마 관광 상품의 판매야 일반화됐지만, 민 차원의 ”만남”의 가장 일차적 형태가 돼야 할 이산가족들의 상봉부터는 ”너무 적게, 너무 늦게” (too little, too late)식으로만 이루어질 뿐이다. 남한 국정 담당자들이 ”참여 정부 4년 동안 1만987명 이산 가족의 상봉이 이루어졌다”고 자랑을 하지만, 이미 80세 넘어 더 이상 가족들과의 상봉을 기다리기 어려운 고령 이산 가족의 총수가 28142명이나 된다는 사실까지 상기해보면 이는 결코 만족스러울 만한 숫자는 아니다. 더군다나 남북한 간의 서신 왕래의 자유 조차 보장돼 있지 않는 상황에서 길어야 며칠 정도 밖에 안되는 짧은 상봉이 다시 한 번 기나긴 이별로 이어진다는 것도 고려에 넣어야 한다. 즉, 비교적으로 원활하게 발전돼 가는 공무원 및 기업 사회 차원의 남북 교류에 비해 이산가족과 같은 가장 절실한 민간 교류 부문부터 아직도 부진한 상태다. 또 남과 북 사이의 불균형을 이야기하자면, 남한 측의 방북 인원과 북한측의 방남 인원 사이의 ”차이”부터 주목해야 한다. 2006년의 방북 인원은 10만838명에 달했지만 북한인으로서 남한을 방문한 사람은 870명에 그치고 말았다. 남한인들의 방북은 절대 다수 (약 89%)의 경우에는 개성 공단 등 북한 노동력을 이용하는 남한 자본의 북한 진출과 관련된 일이었지만, 북한인으로서 남한에 갈 수 있는 이들은 대개 극소수의 고급 공무원 내지 엄선된 특정 행사 (스포츠 경기 등) 관련자들이다. 즉, 북한에 비해 남한이 훨씬 더 강한 국력을 가진다는 ”힘 불균형”의 상황은, 남북 교류 관련 양쪽 인사들의 ”행동 반경”의 차이에서부터 확인된다. 교류의 내용을 따져봐도 남한의 우위와 북한의 열위가 확인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남북한 교역 전체의 69% (2006년 통계)를 차지하는 상업성 거래의 내용을 보면 북한이 남한에 반출하는 것은 주로 위탁가공한 의류 등 노동 집약적 상품이나 아연, 무연탄, 바지락조개, 한약재 등 자연 자원들이고, 남한이 북쪽으로 보내는 것은 비료와 쌀 이외에 주로 기술 집약적 상품들이다. 남한에서는 북한 대중 문화를 ”북한 알리기” 차원에서, 시청자 내지 독자의 비교적인 무관심 속에서 ”소개”해주지만, 북한 주민들이 남한 드라마 CD를 하나의 유행 상품으로 암시장에서 거래하는 등 문화 교류 부문에서도 남한 대중 문화의 이북에서의 유포 위주의 ”문화 식민화적” 현상들이 나타난다. 우리가 보는 앞에서 남북한간 교류에 있어서는 북한이 자원과 저임금 노동력의 공급자라는 불리하고 열등한 위치에 서게 되고, 남한은 인도주의적 지원을 보내는 시혜자이자 고(高)부가 가치, 기술 집약적 상품과 문화 상품의 공급자라는 우월한 위치에 처하게 된다.
이대로 나아가 개성 공단 등 북한의 저임금 노동력과 자연 자원을 이용할 수 있는 곳에서 남한 자본의 투자가 늘고 오늘과 같은 구조의 교역이 증가됐다가 어떤 정치적 이변으로 북한이 종전과 같은 방식의 통치가 불가능해져 남한과의 합병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면, 과연 양쪽 사이에 ”동등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지나친 비관을 하고 싶지 않지만 이미 오늘날과 같은 상호 의식으로 봐도 ”동등한 통일”의 꿈은 거의 물 건너간 듯한 느낌이 된다. 많은 북한인들은 벌써 지금쯤에 남한을 ”멋진 드라마와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부유한 사회”로 인식하지만, 남한 주민들의 눈에는 이북 주민들이 이미 ”거지떼”의 모습으로 각인돼 있는 것이다. 즉, 남북한의 형식적인 ”결합” 내지 ”합병”은 앞으로는 북한에서의 어떤 돌발 사태로 인해서 생각보다 일찍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이는 한반도의 일체 주민들이 하나의 국민 국가의 평등한 시민들이 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통일”이 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분단”은 종식될 수 있지만, 경제, 문화, 상호 인식 등 여러 부문에서의 ”보이지 않는 38선”이 오래 지속될 것은 우려된다. 1950‐60년대와 달리 양쪽 ”관”이 더 이상 다른 쪽에 대한 적대성을 권력 유지용으로 이용하지 않는 것은 다행이지만, 어쩌면 수출 도약 이전의, 경제적 수준이나 의식, 언어, 거주 형태가 북한과 훨씬 더 가까웠던 ”옛날 남한”은 ”동등한 통일”을 이루기에는 더 적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좌우간에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통일”아 아닌, 관 주도와 양쪽 불평등을 전제로 하는 장기적 ”불균등 교역” 체제와 궁극적인 ”불평등 통합”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남북 통합이 현실화될 경우 ”민족 숙원”이 이루어지는 유토피아보다 후진적인 이북 지역의 ”내부 식민지화”의 디스토피아가 도래할 가능성이 더 많다는 것을 현재 탈북자 (새터민)의 실태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 남한에서 정착하여 생존하는 탈북자가 1187명에 불과했던 2001년에만 해도 그들 중에서는 50% 이상이 ”무직” 내지 ”실직자”로 분류되고, 한 달 가정 평균 소득을 심한 빈곤 수준인 96만 원 이상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을 연구해온 러시아계 한국학자 랑코브 교수 (국민대)에 의하면, 이와 같은 적응 실패, 남한 사회 주변부에의 편입의 원인은 남한 수준에 객관적으로도 미치지 못하는 데다가 또 남한인들에 의해서 주관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북한인들의 문화 자본에 있다는 것이었다. 즉, 극소수 엘리트를 제외하고는 탈북자들의 한자, 영어, 컴퓨터 구사 능력이 낮았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문 지식마저도 (연기자 등 일부 특수 직종을 제외하고는) 남한 사회에서 불인정 내지 폄하되는 경향이 강했다는 것이다. 국내 학자의 또 다른 연구에 의하면, 남한 사회 편견들 때문에 심적 고통을 느낀 탈북자들은 1996년에 3,9%에 불과했지만, 기층 민중들의 탈북이 잦아졌던 2001년에 11,5%에 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탈북하여 입국하는 이들이 많아야 1년에 148명 정도 (1999년도) 됐던 1990년대에 비해서는 2000년대는 ”탈북 러시 (rush)”의 시대가 됐다. 2006년만 해도 2000명 정도의 탈북자가 입국했으며, 전체 재남 (在南) 탈북 인구는 이제 만 여 명이 된 것이다. 최근 여성, 저학력 기층 민중이 다수를 차지하는 탈북자의 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남에 따라서 그들은 남한 사회 안에서는 하나의 보이지 않는 ”게토” (ghetto)를 이루어 살게 된 것이다. 보수 언론들이 앞장서서 탈북자들의 범죄 건수 증가 등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등 그들에 대한 ”위험, 폭력 집단” 이미지 조작에 들어갔으며, 상당수의 일반인들도 그들을 ”후진”, ”위험”, ”부담” 코드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2006년의 탈북자를 상대로 벌인 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51,5%가 남한인들의 차별을 적응에 있어서의 ”어려움”으로 꼽았다. 심지어 54,6%가 ”처벌의 위험이 없으면 북한에 돌아갈 생각도 해본다”는 답을 선택하는 등 남한 사회 안에서의 고립 및 차별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하게 했다. 2000년대 중반의 남한에서의 전형적 탈북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끝내 지워지지 않는 북한 억양 때문에 사회의 곳곳에서 ”왕따”를 당하는, 대부분의 경우에는 취직이 되지 않거나 비정규직, 영세자영업자로 생계를 꾸리지만, 취직이 돼도 실수를 범할 때마다 ”너는 북한 사람이라서 그렇다”는 꾸지람을 들어야 하는 ”영원한 국외자(局外者)/낙오자”이었다. 오늘날 남북한의 국력, 개발 수준의 차이, 그리고 남북한 사이의 교류의 추이를 감안하면 가까운 시일 내에 ”준비 없는” 남북한의 통합이 이루어질 경우에는 남한 사회에 의한 이와 같은 대접을 북한의 기층 민중 대다수가 겪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함석헌의 통일 비전, 그리고 ”동등한 통일”을 위한 심적 준비:
남한에 의한 이북 지역 ”내부 식민화”의 방지를 위해 무엇보다 통합 시의 북한 주민에 유리한 통일 조약 체결 등 제도적 준비가 가장 핵심적이다. 또한 완전한 통합 이전까지 이북 지역 생산 시설, 사회 간접 시설에의 막대한 투자가 필요할 것이고, 기층 민중들의 주거 및 토지에 대한 사유권 확립, 부동산 매매 등 자본주의적 거래 문화에 대한 점차적인 훈련의 긴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훈련 기간을 아무리 길게 잡아도, 훈련의 내용을 아무리 알차게 만들어도 우리가 내다볼 수 있는 미래에 통일이 이루어질 경우 남북 각자의 기본적인 우위와 열위가 본격적으로 바뀌리라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즉,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가장 잘 되는 경우에도 북한 평민 대다수가 ”통일 조국”의 약자층으로 편입될 것이고, 이들의 처우 문제는 결국 한국의 전반적인 약자층에 대한 의식 및 처우 문제와 직결돼 있다. 바꾸어서 말하면 약자를 차별하고 착취 및 멸시 대상으로 만드는 우리 제도와 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기다리고 기다리던 통일이 이북 지역 주민들의 ”내부 식민화”, 그리고 지금으로서 예상조차 하기 어려운 정도의 끔찍한 갈등의 폭발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부터 바꾸자는 의미의 통일에 대한 진정한 준비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 20세기 한반도의 가장 독자적이며 창조적인 종교 철학자 함석헌 (1901‐1989)의 저서에서 답의 실마리를 주는 시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전혀 다른 상황 밑에서 쓰여진 몇 십 년 전의 저서들의 내용을 ”지금, 여기”의 상황과 무리하게 직결시켜 직접적이며 완벽한 ”답”을 거기에서 찾는다는 것은 무리지만, 이북의 스탈린주의 정권에도 이남의 반공 독재에도 두루 다 저항한 월남인 함석헌의 통일 비전은 양쪽 정권들의 이해관계를 넘어 민중에 중점을 두는 의미에서도, 무엇보다 평화 정신에 기반하는 의미에서도 우리에게 통일 논의의 좋은 기본틀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통일 관련 함석헌 글들 중에서 비교적으로 이른 편에 속하는 것은 ”민족통일의 종교”라는, 1962년에 <생활철학>에 실린 논고다. 이 논고에서는 함석헌이 – 모든 문제들의 ”종교적 본질”부터 규명하는 그의 평소 스타일대로 – 통일의 문제도 ”근본적으로 종교적 문제”라고 전제한다. 38선이 미, 소 양(兩) 열강에 의해서 그어졌다 해도 이렇게 그어진 38선이 나중에 굳어져 민족상잔의 비극으로 이어진 것이 결국 ”우리의 문제”, 당장의 이해 관계를 초월할 만한 ”믿음” 내지 ”정신”이 결여 돼 있었다는 우리 부족함의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 책임”에 대한 함석헌의 강조는 일차적으로 ”남 탓”보다 ”내 탓”을 먼저 하려 하는 진정한 종교인의 본연의 자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역사적 현실과도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와 하등의 관계가 없는 민족주의적 마르크시스트 강만길 선생도 분단의 근본적인 원인들을 분석하면서 외세에 편승, 영합하여 분단된 상태에서 남북 양쪽에서 권력을 장악하려는 분단 세력을 견제할 만한 제대로 된 범민족적 통일 민족 국가 건립에 대한 합의도 충분한 힘을 가진 통일전선 세력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소련, 중국의 절대적인 원조에 힘 입어 남한 지역의 정복이라는 유혈적이며 반(反)민중적인 방법으로 ”국토 완전”을 기하려 했던 김일성이라는 한 쪽의 분단세력에게도,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면서 ”좌파 박멸, 북진, 멸공”을 외쳤던 이승만과 민주당이라는 또 다른 쪽의 분단세력에게도 상당부분 민중들의 적극적 내지 소극적 동의가 있었다는 역사적 비극을, 함석헌이 종교적인 시각에서 ”죄악”으로 본 것이다. 함석헌이 이 죄악에 대한 범국민적인 ”회개”를 호소했으며, 이와 같은 회개를 바탕으로 해서 소련과 미국 등 분단에 책임이 있는 외세들의 양심도 깨어날 것이고 한 쪽에 의한 다른 쪽의 정복이 아닌 참 통일, ”인간적 통일”이 이루어지리라 내다봤다. 회개라는 종교적 개념을 사회과학적 언어로 번역하자면 이는 분단과 폭력적 대치 속에서 일어난 일련의 비극들에 대한 책임을 양쪽이 인정하고 진실 규명과 화해를 도모할 것을 의미한다. 이 차원에서는 예컨대 남한 쪽에서 최근에 북파 공작원 관련의 자료를 상당부분 비밀해제하여 1950‐70년대의 북한을 향한 남한 쪽의 비공식적, 비밀스러운 폭력 행위의 전말을 적어도 어느 정도 공개한 것을 (사회적 의미의) 회개의 일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1987년11월29일 KAL858 여객기의 실종 사건 등 북한 간첩 소행으로 돼 있는 일부 사건들이 아직도 의혹으로 덮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진정한 회개로 가는 길이 멀어도 너무 멀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북한 쪽으로서도 남한을 포함한 다른 국가 시민들의 납치, 감금이라든가 무장 공작원 침투, 그리고 궁극적으로 6‐25 전쟁 발발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앞으로의 남북한 화해에 큰 기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여태까지의 온갖 상호간의 폭력 행위에 대한 회개를 함께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해 보인다.
회개라는 대전제와 함께 함석헌이 강조했던 것은 통일의 주체로서의 ”생각이 있는 백성”, 민중의 역할이었으며, 민중의 ”믿음”, 즉 ”나 안에서의 절대자”에 대한 확신과 속세적인 이해 관계의 대립을 뛰어넘을 수 있는 ”민중의 인격”이었다. 여기에서는 함석헌이 기독교 등 어떤 특정 신앙을 모두에게 무조건 강요하여 통일의 조건으로 내세우려는 것은 전혀 아니다. 함석헌 자신은 본인 개인의 신앙 생활에서 기독교를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여러 종교로부터 영감을 받았지만, 불교인들을 상대로 행한 한 강연에서 밝혀진 그의 근본적 입장은 ”보편의 자리”, 즉 ”참된 종교의 알짬은 하나”, ”부처님을 목적어로 삼든 하나님을 목적어로 삼든 진정한 믿음은 하나”라는 것이었다. 함석헌이 이야기했던 ”믿음”은, 어떤 특정 신앙을 의미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자신의 말로 ”마음 속의 영(靈)과 육(肉) 사이의 평화”, 그리고 ”고상한 이상”을 뜻했다. 이는 종교의 언어에서 사회과학의 언어로 번역하자면 결국 각자 아집과 사리사욕을 초월하는 ”가치”에 대한 보편적인 동의를 의미할 것이다. 통일을 위해서 다수가 우선적으로 동의해야 할 근본적인 가치는 결국 타자를 위하여, 미래를 위하여 ”나” 자신부터 나름의 경제적인 손실까지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 즉 북한 주민을 포함한 ”모두들”의 장기적인 이해관계가 ”나”/”내 가족”의 ”지금 당장”의 이해관계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통일에 따르는 남한 측의 비용이 어느 정도 될 것인가에 대해 논란이 많고 2000년에 통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가정해도 전체 비용이 1조2천억 달러에 달했을 것이고 분단이 오래 가면 갈수록 더 높아지리라는 시각도 있지만, 그 구체적인 규모가 어찌 됐든간에 ”미래를 위한 희생”이 일시적으로 불가피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과연 함께 공유하는 1945년 이전의 역사와 언어, 전통 이외에 지금으로서 우리와 별로 연 (緣)이 닿지 않는 ”남”인 북한인들을 위한 이와 같은 희생을 할 자세가 지금 남한 사회에 돼 있는가? 통일이 오늘, 내일의 일이 아닌 지금으로서는 통일 인식 관련 여론 조사에 응답하는 대학생의 15,5%, 그리고 중고등학생의 약 35%가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답해도 다수는 여전히 통일을 원한다는 ”모범 답안”을 내놓았다.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들이 북한에 대한 적대감이라기보다는 이질감, 경멸 내지 무관심과 통일 비용에 대한 의식 때문에 통일을 꺼린다는 것은 지배적인 해석인데, 아직은 우리 사회에서 당위적인 ”우리 숙원 통일”론이 그래도 힘을 계속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통일의 첫 단계에서 북한에서의 사회 간접 시설에의 공공 투자를 위하여 세금 부담이 늘어나기 시작할 경우, 통일 회의론적 정서가 훨씬 더 넓게 확산되지 않을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1997년 이후부터 신자유주의적으로 개편된 남한 사회에서는 ”나”와 ”나의 직계 가족”의 경제적인 ”성공”은 거의 절대적인 가치가 되어 ”남”, 특히 북한인 만큼 동질성을 느끼기가 어려운 ”머나먼 남”을 위한 ”희생” 담론 자체가 설득력을 갖기가 많이 어려운 데다가 정부 등 공공기관에 대한 신뢰도마저 낮아 희생의 부담이 공평하게 나누어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소수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경제동물화” 추세, 경제적 이해 관계에 따르는 사회적 ”원자화” 추세를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가치관 확립 차원의 통일 준비, 함석헌이 이야기했던 마음과 성격의 준비다. 그런데 정부 정책이 신자유주의 일색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는 이와 같은 ”가치 확립”이 현실적일까? 아마도 신자유주의의 횡행을 막지 않는 이상 통일을 위해 절실히 필요한 각종의 시민적 ”가치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회개, 믿음과 함께 함석헌에게 참된 통일의 핵심적인 조건으로 보였던 것은 ”두 체제의 초월”이었다. 즉, 진정한 통일은 ”적화 통일”도 ”반공 (反共)이 성공하여 북한을 정복해서” 이루는 싸움에 의한 통일도 아니고, 둘 다를 다 지양한 ”제3자의 자리”다. 이를 공상으로 몰아붙일 사람들이 있을 것을 예상한 함석헌은 이에 대해서 ”싸워서 이겨가지고 세계에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은 그것보다 몇 배 더한 공상”이라고 덧붙여 이야기했다. 타자를 힘으로 굴복시키는 일방적 승리가 참된 평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보편적인 진리이기도 하지만, 특히 남북한의 관계에 있어서는 일방적, 강제적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제 통설이 된 듯하다. 그러나 북한 지배계층이 남한 지배계층과 야합을 하여 남한 방식의 자본주의를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적당히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전면적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이는 표면상 폭력이 아님에도 함석헌이 바랬던 양쪽 체제 지양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은 지배계급 사이의 야합 형태의, 남한 체제의 이북 지역으로의 확산 방식의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결국 경제력의 압도적인 우위에 의해 북한 측의 항복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양쪽 지배계급으로서 가장 편리한 길일 수도 있지만 이는 북한 지역 다수 주민들에게 장기적인 구조적 고통을 의미할 것이고,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경제, 인식, 문화 분야에서의 ”보이지 않는 38선”들이 그어질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함석헌이 이야기한 양쪽 체제 지양은 결국 현실적인 차원에서 북한 주민들과 같은 약자를 포용할 수 있는 복지 제도의 건설, 그리고 대한민국을 사회 투자형(形) 국가, 복지 국가로 개조하는 것을 뜻할 것이다. 독일의 통일을 ”성공”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들이 많지만 적어도 통일 이후에 구(舊) 동서독 지역 사이의 불균형들이 많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 동란이 없었던 근본적 이유는 아마도 동독 지역 주민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돼 그 불만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린 서독의 복지 제도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남한에서는 이와 같은 길로 간다는 것은 국가, 사회의 기본적인 형태를 본격적으로 바꾸는 일을 의미할 것이다.
결국 함석헌이 예언적으로, 종교적으로 이야기한 ”참된 하나됨의 길”이란 사회과학적인 언어로 풀이하자면 개개인의 경제적 이해 이상의 공동체적 가치와 신뢰의 분위기가 확립된, 과거의 문제점들에 대한 진상 규명을 바탕으로 한 화해를 이룬, 그리고 복지 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사화를 만드는 것을 뜻할 것이다. 이를 ”유토피아”라고 이야기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이와 같은 ”유토피아”를 지향하려는 노력 없이 우리가 결국 ”디스토피아”의 나락으로 떨어질 위험이 큰 것이다.
함석헌의 통일론에 있어서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특징은 통일의 주체로서의 민중, 즉 피(被)지배계층들의 대다수의 역할을 늘 강조해온 것이다. ”설혹 민중에게 해가 아니되더라도 민중의 손으로 된 것이 아니고 누가 가져다 씌우는 통일이면 통일이 아닙니다. (….) 스스로 민(民)의 손으로 아니한 것이면 해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이는 박정희 정권과 김일성 정권 사이의 ”악수”라 할 1972년7월4일 ”자주평화 통일 원칙 합의” 선언에 대한 함석헌의 반응이었다. 이 선언에 대해서는, 함석헌과 김재준, 이병린, 천관우 등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소속의 재야 원로들이 일단 국가보안법 등 악법들의 폐기와 민의 (民意)가 자유로이 표명될 수 있는, ”민중의 자유 의사에 의한 통일의 과정”을 요구했다. 그 때부터 30여 년이 지나 김대중을 비롯한 그 당시 민주 투사들 중의 상당부분이 이미 권력을 쥐어본 일도 있었지만, 참된 통일의 전제인 갈라진 나라 반대쪽 주민들과의 자유로운 서신 교환, 상호 출판물 자유 열람, 상호 자유 왕래 등은 아직도 양쪽에서 법률적으로 억압돼 있는 것이다. 통일의 주체가 돼야 할 민(民)을 구성하는 각 개인이 통일 문제에 대한 자신의 독립적인 의견을 성립하기 위한 반대쪽 자료 수집조차도 현재 실정법으로 하기가 간단치 않다. 북한에서야 국제 인터넷 그 자체는 극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지만, 남한에서는 전문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북한 사이트에의 접속이 아직도 차단돼 있으며 당국의 허가 없는 북한 주민과의 회합, 통신 (전자 우편을 교환하는 수준이라 해도)은 아직도 처벌의 대상이 된다. 상호간의 서신 교환이나 자유로운 여행은 물론 인터넷상의 ”만남”도 ”관인” (官認)이 아닌 경우에는 이처럼 어렵다면 과연 관 (官)이 아닌 민 (民)이 주체가 되는, 민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통일이 올 수 있겠는가?
또한 매우 걱정스러운 것은, 자주와 통일을 강조하는 남한 안에서의 소위 ”좌파 민족주의적인” (내지 ”진보적 민족주위적”) 경향의 지식인들도 양쪽에서 관 (官) 주도로 이루어지는 현재와 같은 통일 과정에 대해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예로,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때에 김대중과 함께 평양으로 간 시인 고은은 김대중의 햇볕 정책에 거의 무한한 환희심을 나타낸 것은 물론 그의 상대자이었던 김정일에 대해서도 ”시인적 풍모”, ” 민족 공존의 시대를 이끌어 갈 예외적인 인물”이라고 평하고, ”우리가 한 나라로 되면 가장 멋진 나라가 된다”는 낙관론을 내비쳤다. ”자유주의자”이자 과거 국가보안법의 희생자이었던 김대중마저도 국가보안법의 철폐를 하지 못한 (내지 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리고 ”시인적인 풍모”의 김정일 체제하의 일반 주민들이 남한으로 왕래하는 것은 고사하고 인접 고을로도 ”여행증” 없이 갈 수 없는 상황에서 과연 ”멋진 나라” 만들기가 가능하겠느냐는, 함석헌의 통일 논리를 접해본 사람이면 다 가져볼 수 있는 아주 단순한 의문을, 고은 시인이 거의 가져보지 못한 듯하다. ”6.15공동선언실천 남측 위원회”의 상임대표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 교수도 지난 2007년8월15일에 ”민족통일 대회”에서 연설을 할 때에 ”남북 철도 개통, 새로운 공동사업의 개발, 동북아지역 차원의 다자적 협정” 등 양쪽 관 (官)에서 실행해야 할 일들을 자세히 이야기해도 ”민간 교류”를 간단히 언급만 했을 뿐이고, 이산 가족의 상호 방문이나 민간인들의 자유 왕래 허용, 상호 출판물의 무제한 접근의 허용 등을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통일의 주체가 돼야 할 민중과 그 인권들이 ”정상 회담”, ”비핵화 논의”, ”사업 개발”의 그늘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고은과 백낙청 등 ”진보적 민족주의” 원로들이 생산하는 담론의 특징이다. 백낙청이나 고은 등 자유주의적 색채의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은 북한의 민 (民)이 아닌 지배계층을 ”통일” 논의의 주된 상대자로 의문없이 인정하여 남북 양쪽 사이 통치자들의 합의에 의한 ”국토완전”을 통일로 간주하면서도, 그나마 북한 통치계층의 수사 (修辭)를 사실로 오해하고 북한 지배자들을 추종하는 우(愚)라도 범하지 않으니 다행이다. 그들보다 덜 자유주의적이며 친북적 태도가 훨씬 더 분명한 일군의 ”급진적인 좌파적 민족주의자”들은 주저 없이 북한을 ”강대국”으로 인정하고 이 ”강함”에 대한 거의 무한하다 싶은 긍정과 흠모의 뜻을 밝힌다. 예컨대 친북 내지 종북 (從北)적 색채의 <자주민보>에서의 한 기고문에서 북한의 상황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 북한은 2008년 1월 1일 신년공동사설에서 강성대국 건설의 ‘역사적 전환’의 해로 규정하였다. 1999년 고난의 행군에서 강성대국을 향한 낙원의 행군으로 위대한 전환을 한 북한은 2008년 강성대국 건설의 역사적 전환을 계획하고 있다. 그리고 김일성 주석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12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어놓겠다는 결심을 내놓았다.
다시 말해 2012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어놓겠다는 것은 사상,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강국의 반열에 들어서는 강성대국의 완성을 선포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2008년 강성대국 건설의 역사적 전환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북한은 이미 사상, 정치, 군사분야에서 강국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이제 남은 과제인 경제강국으로의 도약만 이루어진다면 강성대국으로 선포할 수 있는 것이다” 북한 핵무기의 ”강함”에 대한 선망으로 가득 찬 이와 같은 텍스트에서는, 운이 좋아야 하루에 400‐500 g의 쌀을 배급 받는 북한 평민들의 최근의 신세에 대한 하등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무기의 힘으로 ”강국의 반열”에 올라야 할 국가 내지 ”민족”의 물신화 (物神化)된 모습이 보일 뿐이다.
국가와 ”민족”의 물신화야말로 함석헌이 항상 경계해온 것이다. 국가주의를 극대화시킨 유신 정권과 싸우고 있었던 함석헌에게는 국가란 ”전체의 가면을 쓴 집단주의”이고 이 집단주의는 ”이기주의의 확대된 것 밖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사랑으로, 화 (和)로 서로의 유기적인 ”관계”를 맺어 ”전체”를 이루어야 할 수많은 개체들을 국가가 그 자유를 무시하면서 법과 힘으로 하나의 집단 단위로 묶어놓는다. 그 자체가 폭력뿐인 국가는 다른 국가나 개인 등의 수많은 타자들을 침략, 착취, 억압 내지 이용할 수 있지만 자기희생이라는 도덕적 행실을 보통 잘 하지 않는다. 함석헌에 의하면 국가는 우선적으로 ”백성의 마음을 지배하려는 거만한 뜻”을 버려서 ”안녕 질서 유지” 정도의 최소한의 본연의 역할에 충실해야 됐으며, ”지배적”, ”간섭적” 국가에 저항하는 것은 개인으로서 ”참 뜻의 실천”, 즉 자유 실천이었다. 국가의 현실성을 인정해도 국가와의 긴장을 늘 늦추지 않았던 함석헌의 자각을 남북 관계, 그리고 통일의 문제에 어떻게 적용시킬 수 있을까? 사회 전체를 하나의 커다란 단일 공장처럼 운영하면서 자본의 역할을 대신하는 북한의 국가가 인민에 대한 극심한 과도 착취로 얻어낸 핵무기 개발 등 군사 부문의 ”강성”도, 교육과 의료를 시장에 맡기고 복지 부문을 최소화하면서 근로자들에게 산업화된 국가 중에서의 최장의 노동 시간을 강요한 남한 자본의 ”경제력”도 성공이라기보다는 문제로 취급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러면서 북한의 초(超)국가주의와 군사주의, 국수주의적 민족주의, 그리고 남한의 자본 이익의 일방적인 극대화 경향과 (재벌이 독점하는) 시장 만능주의를 동시에 극복하면서 민중 중심의 새로운 모델을 모색하는 것은 참된 하나됨의 길일 것이다.
나아가며:
1964년, 반공 (反共)이 엄연히 국시이었던 시절에 함석헌이 이미 ”분단이 외세 뿐만 아니라 권력 독점만을 지향했던 남북 양쪽 정치인의 책임”이라고 전제하고, ”군비증강, 북한에 대한 증오심 키우기”에 기반을 두는 ”정복적” 통일이 아닌 사랑, 용서에 의한 통일을 외쳤다. 남북한 양쪽의 분단 정권들이 서로를 ”적대적인 타자”로 정해놓고 전(全)사회 군사화, 병영화의 분위기 속에서 기층 민중의 희생 위에 자본의 원시 축적 내지 국가에 의한 공업화를 지향했던 시절로서는 가히 혁명적 발언이라 할 수 있다. 반대 쪽 정권에 대한 폭력적인 부정이 ”우리” 정권 명분의 기반이었던 시대에 이 폭력적인 부정에 의문을 표명한 함석헌은 ”우리” 폭압 정권의 ”정통성”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이 ”적대적 공존”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 남한 정권이 감당, 관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이북 정권의 붕괴를 예방하기 위해서 오히려 안간 힘을 써가면서 이북 관료 집단과의 관계 맺기, 그리고 점차적인 경제 이권 챙기기를 마치 통일로의 길인 것처럼 선전하고 있는 것이고, 북한 정권도 ”우리 민족끼리”라는 배타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 남한 정권과의 수혜 (受惠) 관계, 남한 자본가들에 의한 북한 노동력의 착취의 허용 등을 합리화한다. 서로 ”증오심 키우기” 하는 대신에 북한 관료층은 기득권의 유지를, 남한 정부와 자본이 ”북한 붕괴”와 같은 재앙적 이변이 없기를, 그리고 북한의 자연자원과 저임금 노동력의 이용을 꿈꾸는 것이다. 저명 지식인들이 앞장서는 민간 통일 운동마저도 ”6‐15 남북 공동 선언 실천”을 목표로 삼는 등 양쪽 국가들의 수장들을 ”통일을 이끄는 우리들의 지도자”로 인정하고, 결국 관 (官) 위주의 통일 과정을 인정한다. 이 과정에서는 반세기 이상 헤어져도 아직도 만나지도 서신 왕래하지도 못하고, 고향 방문 하지도 못한 체 죽고, 배고픔과 억압을 참다 못해 도강(渡江)을 하여 중국, 몽골, 동남아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고, 운이 좋아 남한에 들어와도 냉대, 차별, 실업 (失業), 가난에 시달리는 씨알들의 외침들은 철저하게 차단되고, ”국토 완전”, ”강성대국”, ”민족웅비”의 논리로 봉쇄된다. ”사람의 하나됨”은 간데 없이 사라지고, 폭력 조직인 국가의 ”힘 키우기”만이 의제화되는 것이다. 이 흐름을 과연 돌이킬 수 있는가? 돌이키기가 매우 힘들더라도 ”진보”를 자칭하는 이들이라도 함석헌이 일찍 이야기해주었던 ”회개, 믿음, 양쪽 체제 지양, 유기적 전체”의 이상에 기반하는 ”씨알의 통일”, 북한 민중들의 주체화와 인권 보호를 위주로 하는 ”사람을 위한 하나됨”에 힘을 썼으면 좋겠다. 그래야 가면 갈수록 짙어져가는 북한 지역의 ”내부 식민화”, 북한 주민들의 ”이등 시민화”의 디스토피아의 그늘을 벗어날 가능성이 희박하게라도 생기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