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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이사야가 본 거룩한 이상 (이사야 6:1-4)
사무엘에 대한 말처럼(삼상 3:20), 이사야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었" 을 때 본 이상(vision)은 다음과 같은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1. 그의 믿음을 확증하여 앞으로 그에게 알려질 것들의 진지에 대해 그 자신이 크게 만족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당신과의 교통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들은 그 후 계시가 나타날 때마다 거듭 반복될 필요는 없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처음에는 아브라함에게 영광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고(행 7:2) 그리고 모세에게 나타나셨다(출 3:2). 에스겔의 예언과 사도 요한의 예언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이상으로 시작되고 있다.
2. 이사야에 역사하여, 그가 하나님께 대해 경외감을 지니게 하여 그의 봉사를 부지런히 그리고 꾸준히 행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지식을 가르쳐야 할 자들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한다.
그 이상을 본 날짜가 매우 확실성있게 나와 있다. 곧 "웃시야 왕의 죽던 해" 였다. 웃시야는 자기 통치 기간의 대부분을 유다의 다른 왕들과 같이 번성했고 그리고 훌륭히 통치했고 50년 이상이나 되는 매우 오랜기간을 다스린 왕이었다. 그가 죽던 무렵에 이사야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이상을 보았다. 군왕들의 호흡이 끊어지고, 그들이 자기들의 땅으로 돌아갈 때도, "여호와께서는 영원히 통치하시리" 라는 것은(시 146:3, 4, 10)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이스라엘 왕은 죽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계신다. 아무리 위대하고 선한 자들도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영원하시며 불멸하시는 그 왕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내야 한다. 군왕들의 생명이 한정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영광도 흔히 어두워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살아계시듯 또한 그 영광도 영원하다. 웃이야왕은 병석에서 죽었지만, 왕의 왕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보좌에 앉아 계신다.
그 예언자가 여기에서 본 것이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것은 우리가 그 계시에다 믿음을 합함으로써 거울을 통해 보듯이, 그 속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선을 돌려, 이 위대한 광경을 겸손한 경외감을 가지고 보도록 하자.
Ⅰ. 당신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라. 게다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다. 그것은 다른 보좌들을 능가하기 때문에 보다 높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부하들을 다스리고 명령하기 때문에 보다 위에 있다. 이사야는 "여호와" - 하나님의 본체를 본 것이 아니라(아무도 그것을 본 자는 없다) 아도나이(主) 곧 여호와의 주권을 보았다. 그는 주 예수를 보았다. 이 이상은 요한복음 12장 41절의 설명에 의하면, 이사야는 지금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구주의 신성(神生)을 명백히 증거해 주고 있다. 그가 부활 후,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던 것은 단지 그가 전에 계셨던 그 자리에 앉으신 것에 불과하다(요 17:5). 이 영원한 정신(Eternal mind)의 안식처를 보라.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좌정하신 것을 보았다" 고 했다(시 29:10). 영원한 주권자(Eternal monarch)의 주권을 보라. 그는 "보좌" 에 앉아 계신다. 우리가 그 앞에서 경배해야 할 영광의 보좌에, 우리가 복종해야 할 통치의 보좌에, 그리고 우리가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은혜의 보좌에 앉아 계시는 것이다. 이 보좌는 모든 경쟁과 장애를 물리치고 높이 들려져 있다.
Ⅱ.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들로 가득차 있는 그의 성전, 곧 지상에 있는 그의 교회를 보라. 그의 보좌가(방백들이 문에서 심판하는 것과 같이) 성전 문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그 옷자락이 성전에" 곧 온 세상에(왜냐하면 세상은 모두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늘이 그의 보좌인 것과 마찬가지로 땅은 그의 발등상이기 때문이다) 또는 오히려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의 표적이 가득차 있는 교회에 "가득하였다."
Ⅲ. 하나님의 보좌에 시종드는 영광스럽고 복된 시종인들을 보라. 그들에 의해 그의 영광이 송축되며, 그의 나라가 섬김을 받는 것이다(2절). "보좌 위에," 말하자면 보좌 주위나 그 보좌 가까이에는 그 주위를 배회하며, 그 쪽을 바라보며 그 앞에 절하는 "스랍들" 곧 거룩한 사자들이 "모셔 섰다," 그들은 "스랍들" - 곧 "태우는 자들" 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와염으로 자기의 사역자를 삼으시기" 때문이다(시 104:4).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불타고 있으며, 그의 영광을 위하고 죄를 대적하는 데에 열심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원수들에게 사르는 불꽃이 되실 때 그들은 그의 진노의 도구로 사용된다. 그들이 단지 둘이나 넷이었는지 또는 (내 생각대로) "무수한 사자들의 무리" 였는지에 대해서는 이사야가 본 것으로는 확실치 않다(단 7:10 참조). 천사들이 스랍이라는 것, 곧 그들의 빛에 비례하는 열을 지니고 있고, 하나님의 지식뿐만 아니라 거룩한 사랑을 풍성히 품고 있다는 것이 그 천사들에게 영광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그들의 날개가 특별히 주목되고 있는데(그리고 그들의 외양의 다른 부분은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그들이 그 날개를 이용해서 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우리를 교훈하기 위한 의도가 있다. 그들에게는 각기 "여섯 날개가" 있는데, 그것은 (에스겔이 본 것처럼 겔 1:11) 위를 향해 펼쳐져 있지 않다.
1. 오히려 앉아 있는 새의 날개처럼, 넷(四)은 가리우는 데 사용되었다. 머리 옆에 있는 위의 두 날개로 그들은 자기들의 얼굴을 가렸고, 아래 두 날개로 그들의 다리나 아랫부분을 가렸다. 그것은 그들이 큰 겸손과 경외감을 품고 하나님을 시중든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거룩한 자의 회중에서도" 심히 엄위하시기 때문이다(시 89:17). 그들은 그들의 발, 곧 조금도 귀하지 않은 지체(고전 12:23)를 가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얼굴까지도 가리고 있다. 천사들의 얼굴이 틀림없이 사람의 얼굴보다는 더욱 아름다울지라도(행 6:15), 하나님의 존전에서는 그들이 그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현란한 광채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며, 또 하나님의 완전함과는 자기들이 무한한 거리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여 거룩한 하나님 앞에 그들의 얼굴을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천사라도 당신과 겨루고자 한다면, 미련하다고 하신다" (욥 4:18). 천사들도 이처럼 경외감을 품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우리는 얼마나 거룩한 두려움으로 그의 보좌에 접근해야 하겠는가!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는 천사처럼 하나님의 뜻을 섬기지는 못한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이 계시는 산으로 들어갈 때, 그 얼굴에서 수건을 벗었다(고후 3:18 참조).
2. 날개 두 개는 나는 데에 사용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파송되면, 빨리 날아간다(단 9:21). 그들은 바람의 날개로 날아가는 것보다 자기들의 날개로 더 빨리 날아간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을 기쁘게 신속히 행하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천사들이 그 날개로 우리에게 복을 주기 위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데, 우리도 그들과 함께 땅에서 하늘로 날아 올라가 그들의 영광에 동참해야 하지 않겠는가?(눅 20:36)
Ⅳ. 천사들이 보좌에 앉아계신 그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부르는 성가 즉 찬송가를 들어보라(3절).
1. 이 노래는 어떻게 불러졌는가? 열성과 정열로 - "그들은 크게 "창화했다." 그리고 "그들은 차례로" 혹은 일시에 "창화했다." 그들은 교대로 그러나 일제히, 그리고 하모니를 깨뜨리는 이상한 소리는 조금도 없이 노래했다.
2. 그 노래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네 생물이 부른 노래(계 4:8) 같은 노래였다. 항상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하늘에서 할 일이며, 또 위에 있는 복된 영혼들이 끊임없이 할 일이니, 또 영원토록 그러할 것이다(시 84:4). 또한 위에 있는 거룩한 교회도 그것과 같은 찬송을 부른다. 거기에는 시대의 변화나 악보의 변화가 없다.
스랍은 여기에서 다음 두 가지에 대해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다.
(1) 그의 무한하신 완전함. 여기에 찬송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영광스러운 칭호 가운데 하나가 있다. 곧 그는 "만군의 여호와" 라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가장 영광스러운 속성 가운데 하나인 그의 거룩함이 나와 있다. 이것이 없다면, 그가 만군의 여호와라는 것은(또는 그것과 필적할 만한 "하나님 곧 전능자" 라는 것은. 계 4:8) 이처럼 크게 우리에게 기쁨과 찬미의 소재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권력(권능)에는 그것을 지도하는 결백함이 없었다면, 인류에게 큰 공포를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 중에서도 여기에서처럼 크게 찬송되고 있는 다른 속성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의 권능은 두 번 언급되었으나(시 62:11), 그의 거룩함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고 세 번이나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1]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열심과 열정이다. 그들도 자기들의 뜻을 표현할 말이 없어서 같은 말을 거듭 되풀이하고 있다.
[2] 하나님을 묵상하는 가운데 그들이 얻는 특별한 즐거움이다. 이것은 그들이 항상 전심하여 수금으로 타며 떠나기를 싫어하는 과제이다.
[3] 아무리 청결한 피조물들의 거룩함이라도 비교될 수 없는 탁월한 하나님의 거룩함이다. 그는 거룩하시다. 세배나 거룩하시다. 무한히 거룩하시다. 처음부터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거룩하시다.
[4]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성부, 성자, 성령 3위를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왜냐하면 8절에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는 말이 나와있기 때문이다). 또는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 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른다(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예로운 그 칭호가 이 노래에 덧 붙여 있기 때문이다. 계 4:8). 어떤 사람은 천사들이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지금 막 유대 민족에게 언도하려 하는 그 형벌의 정당성에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점에 있어서는 그는 과거에도 거룩하셨고, 이제도 거룩하시며, 앞으로도 거룩하실 것이다. 그의 길은 항상 공평하기 때문이다.
(2) 이런 일을 사람의 자손들에게 보이심을 찬양했다. "그 영광이," 곧 그의 권능과 결백함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고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가 만드신 모든 작품 속에서는 거룩하시기 때문이다(시 145:17).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자기들의 땅에 국한되어 나타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에는(본문은 이것을 가리키고 있다) 복음시대에는 하나님의 영광 곧 그의 거룩하심의 영광이 온땅에 충만하리라는 사실이 시사되어 있다. 거룩함의 영광은 하나님의 다른 모든 속성들 가운데서도 진정으로 영광스런 속성이다. 그 당시에는 그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였" 으나(1절), 이 끝날에 가서는 온 땅에 충만하게 된다.
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이 이상(vision) 속에서,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두려움의 증거와 표적을 살펴보라(4절).
1. 그 전이 "요동" 했다고 했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뿐만 아니라 견고하게 붙어있는 "문지방의 터가 요동했다." 그 소리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판단하시라는 소리요(시 50:4), 그를 찬송하는 천사들의 소리이다. 이 아랫 세상에 있는 많은 물들의 온갖 시끄러운 소리를 제압할 수 있는 소리가 하늘에 있다(시 93:3, 4).
성전의 이 격렬한 진동은 그 백성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셨다는 표시였다. 이것은, 처음에는 바벨론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나중에는 로마 사람들에 의해 그 성전과, 나중에는 그 성읍이 멸망하리라는 것을 보여 주는 징조였다. 그리고 그 사건은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한 것이다. 벽과 문지방이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되는 때에, 우리들 떨게 되지 않겠는가?
2. 그 전은 "어두어" 졌다. 그곳에는 "연기가 충만" 했는데, 그것은 "그의 보좌" 위에 "펴신 구름" 같았다(욥 26:9). 우리는 어두움 때문에 그 보좌를 충분히 살펴보거나 그것에 관해 말할 수가 없다. 하늘에 있는 성전에는 연기가 없고, 모든 것이 명료하게 보일 것이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빛 속에 거하신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캄캄한 데 계신다" (대하 6:1).
6:2 없음.
6:3 없음.
6:4 없음.
6:5
이사야의 소명 (이사야 6:5-8)
우리에게는 스랍들의 노래와 그들의 직무에 관하여 더 묻고 싶은 호기심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접어두고, 하나님과 그 예언자 사이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를 주목해야 한다. "은밀한 것은 우리에게 속해있지 않다." 천사들의 세계에 관한 비밀은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인간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관련된 비밀들은 예언자들에게와 또 그들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계시되었다.
이제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Ⅰ. 그 예언자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그가 본 이상으로 인하여 간담이 서늘해졌다(5절).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하였도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항상 우리 아버지의 얼굴을 뵙는, 그 영광스러운 특권과 함께 이처럼 잠시 크게 총애를 받으며, 매우 영화롭게 되고 존귀케 된 그대는 복되도다.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아 계신 것을 본 눈과 천사들의 찬송을 들은 그 귀는 복되도다" 라고.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가 이렇게 말했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행복하다. 영원히 행복하다. 지금 아무 것도 나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아무 것도 나를 부끄럽게 하거나 떨게 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그러나 그 반대로 그는 이렇게 부르짖었던 것이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슬프도다. 나는 가망없는 자가 되었도다. 내가 반드시 죽으리라(삿 13:22; 6:22). 내 말문이 막혔도다. 충격을 받아 벙어리가 되고 죽게 되었도다." 다니엘도 이처럼 천사의 말을 들었을 때, "벙벙하였고 그의 몸에 힘이 없어졌고 호흡이 남지 아니하였다" 고 했다(단 10:15, 17).
다음을 관찰해 보자.
1. 그 예언자를 무섭게 하여, 그로 하여금 곰곰히 생각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엄격한 정의로 다루신다면, 나는 망하게 된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진노케 하는 존재가 되었음이로다" 라는 생각이다. 어떤 사람은 여기에서 이사야가 뜻하고 있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가 해오던 경솔한 말, 또 필요한 만큼의 담대함과 자유를 가지고 죄를 꾸짖지 않고 침묵을 지킨 죄 - 이 죄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너무나 빈번히 범하는 죄이다 -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것은 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나는 죄인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내가 말에 실수하였나이다" 라는 뜻으로 말이다. 말에 실수 없는 자가 어디에 있겠는가?(약 3:2)
우리 모두는 여호와 앞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슬퍼해야 마땅하다.
(1) 우리는 부정한 입술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입술은 하나님께 성별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의 첫 열매" 를(히 13:15) 받지 않았으므로, 우리의 입술들은 비속하고 부정한 "무할례의 입술" 로 간주되고 있다(출 6:30 "둔한 입술" - 개역). 아니 그 입술은 죄로 더럽혀졌다. 우리는 부정한 마음에서 나온 말을 하고, 훌륭한 태도를 더럽히는 악한 대화를 했고, 또 그것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더럽혀졌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 입술에 둘 만한 가치가 없으며, 또 그렇게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천사들은 얼마나 정결한 입술로 하나님을 찬송했는가! 그래서 그 예언자는 말한다. "그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므로, 천사들처럼 나를 찬송할 수는 없도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자들도 거룩한 천사들과 비교될 때, 그들 자신과 그들의 가장 훌륭한 봉사까지도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천사들은 하나님의 정결함과 거룩함을 찬미했다. 그러므로 그 예언자는 죄를 깊이 생각해 보고는, 죄를 "부정함" 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죄의 사악함은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과 상반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이유에서 특히 우리는 죄를 증오스럽고 끔찍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입술이 불결함은 영혼의 슬픔으로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말에 의해 의롭다함을 얻거나 정죄함을 받기 때문이다.
(2) 우리는 역시 그렇게 부정한 자들 가운데에서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슬퍼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더럽혀진 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종족이 그러하다는 것을 탄식해야 한다. 그 병은 유전하고 전염된다. 이 사실이 결코 우리의 죄책을 완화시켜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슬픔을 더하게 한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입술의 더러움을 씻어 줄 수도 있을 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특히 그러할 것이다. 아니, 우리는 도리어 요셉이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들의 맹세법을 배웠던 것처럼(창 42:16) 남들의 방식과 말씨를 배웠다.
" 나는 고의적으로 죄를 지어, 그 땅을 황폐케 하는 심판을 내리게 하는 그런 백성 중에 거하고 있고 나도 역시 죄인이므로, 그 심판 속에 포함되리라는 것을 당연히 각오하고 있도다" 라고 이사야는 말한 것이다.
2. 이때에 이 슬픈 생각을 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인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다" 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은 논쟁의 여지가 없음을 보았다 - 하나님은 왕이시며 그의 권능에는 아무도 저항할 수 없다 - 그는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위로가 되는 진리이나,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알고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위엄에 대한 광경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을 때, 우리 모두는 그것에 대해 경외감과 거룩한 두려움을 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무한한 거리, 그리고 그의 앞에 있는 우리의 죄악과 타락성을 깨달았을 때, 스스로를 겸비해지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와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가 없다면, 우리는 파멸한다(삼상 6:20).
이사야는 이처럼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이제 예언자로 칭함을 받게 될 영예를 마련해 놓았다. 스스로 눈을 낮추며, 자기 자신의 연약함과 무가치함을 깊이 느끼는 자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가장 합당하다는 것을 알자.
Ⅱ. 예언자의 두려움은, 천사들이 그에게 응답해 준 그 훌륭한 말들과 위안의 말에 의해서 진정되었다(6, 7절). 스랍들 중에 하나가 즉시 그에게 날아와, 그를 정결케 했고, 그렇게 하여 그는 진정되었다. 하나님은 거룩한 애도자들을 위해 큰 위로를 준비하고 계신다는 점을 기억하자. 회개의 부끄러움과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낮추는 자들은 곧 격려를 받고 높임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이상에 놀라 쓰러진 자들은, 그의 은혜를 얻게 되어 다시 일어날 것이다. 눈물 흘리는 자는 고침을 받을 것이다. 천사들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곧 그들의 영적 유익을 위해 일하는 영들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여기에 보면, 선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해 주는 사신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잠시동안 떠나게 되는 한 스랍이 있다. 게다가 그는 그러한 직책을 매우 즐거워하여 그 사람에게로 급히 날아갔다. 고민에 싸여 있는 주 예수께도 "천사가 하늘로부터 나타나 힘을 도왔다" (눅 22:43)고 했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1. 그 예언자에게 죄사함의 표시로 준것에 고무적인 표적이 있다. 그 스랍은 "단에서 핀 숯을 가지고" 와서 그의 입술에 대었다. 그것은 이사야를 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치료하기 위한 - 그를 불에 달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를 깨끗케 하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물로 정결케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로도 정결케 했고, 또 예루살렘의 더러움은 "소멸하는 영" 에 의해 씻겨졌기 때문이다(4:4). 성령도 불로 역사하신다(마 3:11). 거룩한 불로 빛나고 있는 스랍이 그 예언자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그도 또한 열렬히 감동을 받게 했다. 왜냐하면 입술을 죄의 부정함에서 정결하게 하는 것은 그 영혼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붙게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 핀 숯은 단, 즉 분향단이나 번제단에서 취해진 것이었다. 이 두 제단에는 끊임없이 불이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대속과 그 대속으로 인한 영원한 그리스도의 중재하심에서 취하여진 것 이외에는 영혼을 깨끗케 하고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평화를 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단에서 취하여진 숯이라야 한다. 그것은(지정되지 않은) 다른 불로 행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2. 이 표적에 대한 한 해설이 나와 있다. "보라. 네게 이것을 확신시켜 주기 위해,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너의 범죄함과 네 혀의 범죄함을 용서하시는 긍휼에 의해 제하여졌다. 죄로 향하던 네 타락된 기질은 소생시키는 은혜에 의해 제하여졌다. 그러므로, 네가 거룩한 천사들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서 하나님께 용납되는 길을 방해하거나 네가 인간의 자손들을 위해 하나님의 사자로 일하는 길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리다." 이처럼 악한 양심에서부터 깨끗케 된 자들만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히 9:14). 확신과 위로를 가지고, 기도로 하나님께 여쭙고 설교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위해서는 죄에서의 정결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 복음 은혜의 달콤함을 이미 맛보고 그 감화력을 얻은 사람들이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 복음의 풍요와 능력을 표명해 주기에는 합당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고 자기의 죄를 짐으로 여겨 애통해 하고, 그것에 의한 자기의 파멸의 위험성을 느끼는 자들은 죄를 제하게 될 것이다.
Ⅲ. 그 예언자의 사명이 갱신되었다(8절). 여기에 보면 이 문제에 관해 하나님과 이사야가 서로 나눈 대화가 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도우려는 자들은 그들 자신도 하나님과의 교제에 낯설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한번도 들은 것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말씀하시리라는 것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또 우리 자신이 그에게 진심으로 말씀드린 적이 없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대언자로서 하나님께 용납되리라는 것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라.
1. 이사야의 사명에 관한 하나님의 협의가 있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마치 사람들이 하는 식으로 스스로 심사숙고 하시고 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조언을 받거나 그 자신과 의논하실 필요가 없다. 그는 그가 행하시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전체적인 뜻에 있어서는 협의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려 했고, 또 우리에게 우리의 길을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것을 가르치시려 했다. 특히 사역자들을 파송하는 일은 심사숙고 할 일이라는 것을 가르치시려 했다.
다음을 주목하라.
(1) 누가 의논하고 있는가? 그것은 영광 가운데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높이 들린 보좌 위에 계심을 보았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으로 말할 예언자를 보내시려 했을 때, 윗 세상의 모든 영광 가운데에서 그 사람에게 나타나게 되었다는 사실은, 교역직에 영예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사역자들은 왕 중 왕의 대사이다. 그들이 아무리 비천할지라도 그들을 보내시는 자는 위대하시다. 그것은 삼위("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처럼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했다. 창 1:26) 즉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으로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들은 창조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속(救贖)에서 그리고 사람을 다스리는 일에서 모두 공동으로 협력한다. 사역자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례 받는 바로 그 이름으로 임명 받는다.
(2) 그 의논 내용은 무엇인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갈꼬?" 혹자는 이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를 전해 줄 특별한 메시지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9, 10절). "누가 분한 마음으로(겔 3:14), 이처럼 우울한 심부름을 기꺼이 하려할꼬?" 하는 식으로 본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더 넓게, 그것을 그 예언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백성에게 전하도록 위임받은 그 모든 메시지로 받아들이고 싶다. 마음이 굳어지게 하는 것이. 결코 그 메시지의 주된 의도가 아니라 그것은 그 부차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고후 2:16). "내가 누구를 보낼꼬" 하는 말은, 그 과업이 선택을, 그리고 견고히 세워진 사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렘 49:19).
하나님은 이제 거룩한 천사들을 동반하고 나타나셨으나, "내가 누구를 보낼꼬?" 하고 묻고 계시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형제들 중에서 선지자" 를 보내고자 하셨기 때문이다(히 2:17).
다음 사실들을 기억해 두자.
[1]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총이다.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우리를 두렵게 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 자신도 그들이 가져온 그 메시지 속에 관계되고 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들은 우리와 같은 죄인들이며 우리와 함께 고난을 당한다.
[2] 하나님을 위해 가기에 합당하며 인간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기에 합당한 자를 발견한다는 것은 희귀한 일이다. "내가 누구를 보낼꼬?" 누가 충족할꼬?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용기가 있고 인간을 위해 일할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능히 신실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하늘 나라의 신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서 유능한 자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을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해석하는 이러한 자는 천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욥 33:23).
[3] 하나님이 보낸 자들 이외에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위해 가도록 허락받지 못한다. 즉 하나님은 그가 정하시는 자들 이외에는 그 누구도 인정하려 하시지 않는다(롬 10:115). 사람들을 사역자로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실 사업이다(딤전 1:12).
2. 그 협의에 대한 이사야의 동의를 보자. 이사야는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했다. 그는 어려운 심부름을 맡으려 한 것이다. 그 직책은 구걸하는 것 같아 사람들마다 그것을 싫어했으나, 이사야는 그 자신을 그 봉사에 바쳤다. 혼자서 하나님을 위해 나타나는 것은 영예로운 일이다(삿 5:7). 우리는 "만일 내가 성공하리라고 생각된다면 가겠습니다"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성공은 하나님께 맡기고 내가 가겠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말해야 한다. 이사야는 의혹과 두려움이 가득한 우울한 상태에 있었다(5절). 그러나 이제 그는 자기의 죄가 사하여졌다는 확신을 갖게 되자, 그 구름은 걷혀졌고, 그는 봉사하기에 적합한 상태가 되어 그것을 적극 서둘렀다.
그가 말한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을 의미한다.
(1) 그의 준비 태세이다. "강요 받아서가 아니라, 그 봉사를 자원하여 내가 하겠나이다" (단어 그대로하면 "나를 보소서" 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를 보라" (65:1), "내가 여기 있다" (58:9) 하고 말씀하시며, 심지어 우리가 부르기 전에도 그렇게 하신다. 그가 부르실 때는, 우리도 그에게 그렇게 하자.
(2) 그의 결단력이다. "내가 가장 큰 어려움과 만날 각오를 하고 여기 있나이다. 내가 부싯돌 같이 얼굴을 굳게 하였나이다." 이것을 50장 4-7절과 비교해 보라.
(3) 하나님께 그 자신을 의뢰했다. "주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나를 보내소서. 주께서 기뻐 여기시는 대로 나를 사용하소서. 나를 보내소서. 즉, 주여 내게 명령과 충분한 지시를 주소서. 나를 보내소서. 그리고 주께서는 내 곁에 계시옵소서." 하나님을 위해서 간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들에게 있어서는 큰 위로가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권위를 지녔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며, 그가 그들을 지원하시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6:6 없음.
6:7 없음.
6:8 없음.
6:9
이사야가 전할 말씀 (이사야 6:9-13)
하나님은 이사야의 말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이상한 사명을 준다. 즉 그것은 그의 백성의 파멸을 예고하고 심지어는 그 백성이 파멸을 받기에 알맞게 되게 하는 것이며, 마침내 그들은 그 파멸을 악용하여 그것이 그들에게는 죽음에서 죽음에 이르는 냄새가 되리라고 전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메시야 시대에 유대교가 처한 모습에 대한 모형과 상징이 되었다. 메시야 시대에 그들은 그 복음을 완고하게 거절했고, 따라서 그들의 하나님의 거부를 받아야 했다. 이 대목은 신약에서 여섯 번씩 부분적으로 인용되거나 언급되고 있는데 그것은 복음 시대에는 이 영적인 심판이 매우 자주 가해지리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그것이 거의 소문이 나지 않고 또 관찰될 수 없을지라도, 그것은 모든 심판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될 것이다.
이사야는 여기에서 다음 네 가지 사실을 받아 깨닫고 있다.
1. 그가 보내짐을 받은 그 백성들의 대부분은 그의 가르침에 귀를 막을 것이며, 그가 그들에게 알려 주어야 하는 마음의 모든 적나라한 상태와 하나님의 낯에 대해 그들은 고집스럽게도 눈을 감을 것이라는 점이다(9절). "가서 이 백성에게, 이 어리석고 비참한 백성에게 이르라.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형편에 대해 말하라.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경망스러운가를 그들에게 말하라." 이사야는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실지로 그의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다. 그들은 그의 말을 명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깨달으려고 노력하거나 열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가 말하는 참된 의도와 의미에 대해 그릇된 편견을 가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모르는 척할 것이다. 그들은 보기는 보아도" (왜냐하면 그 이상은 뛰어가는 자도 읽을 수 있도록 판에 분명하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거기에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객담과도 같다. 하나님의 말씀의 소리는 들어도, 그 말씀과 능력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는 것을 기억하자.
2. 그들은 이사야의 사역을 통해 좀더 개선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욱 나빠져야 했다. 고의적으로 눈가림을 한 자들은 천벌에 의해 눈이 멀어야 했다(10절). "그들은 네 말을 이해하거나 깨달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의 마음이 둔하게 하며, 어리석고 음탕하게 하여 그 귀가 더욱 막히고 눈이 더 꽉 감기게 하는 일을 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 따라서 결국 그들의 회복과 회개는 완전히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이 처한 위험을, 그들에게 곧 임할 멸망을, 그리고 그것을 피할 길을 눈으로 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경고와 교훈을 더 이상 귀로 듣지 못할 것이며 또한 그들에게 화평을 줄 것들을 마음으로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길의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서 이처럼 고침을 받지 못할 것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해 두자.
(1) 죄인들이 회심하는 것은 자신들을 고치는 길이다.
(2) 회심에는 올바른 깨달음이 필요하다.
(3) 하나님은 때로 정당한 심판의 한 방법으로서, 사람들을 마음의 무지와 강한 망상 속에 버려둔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려 하기 때문이다(살후 2:10-12).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게 두라" (계 22:11).
(4)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때로는 죄인들의 마음을 굳게 하는 역할을 하고 만다. 그 복음주의적인 예언자 자신이 이 백성들의 마음을 둔하게 만들고 있다. 그것은 그가 그러한 사실을 예고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형을 언도하고, 거기에 인을 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설교가 그렇게 만드는 경향을 가지고 있어서, 안심하고 잠들어 있는 자들을(그들에게 그것은 사랑스러운 노래였다) 흔들어 깨우고, 또 다른 사람을 더욱 난폭하게(그것은 그들을 수치스럽게 만들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만들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말씀을 하나의 특권으로 보고, 그들이 자기들의 양심의 가책을 그 말씀으로 무마시켰다고(렘 7:4) 본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도전으로 보아, 그들의 부패상이 그 말씀으로 의해 더욱 악화되었다고 본다.
3. 이 결과는 그들의 "전멸" 이 될 것이다(11, 12절). 그 예언자는 이 처벌에 대해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심부름을 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고(뜻밖의 질문으로서) "주여 어느때까지이니이까?" 하고 묻고 있다. "항상 그렇게 되겠나이까? 나와 다른 예언자는 언제나 그들 가운데에서 헛수고만 하고, 사태는 결코 더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또는(그 대답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주여 그것이 결국 어떻게 되겠나이까? 이것의 결국은 무엇이 되겠나이까?" 하는 뜻이다. 이것에 대한 대답으로, 이사야는 그것이 유대 교회와 유대 민족의 최종적인 멸망을 초래하리라는 것을 듣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특히 복음의 말씀이 이처럼 그들에게 학대당할 때는, 그들은 교회의 특권을 빼앗겨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성읍들은 거민이 없고, 그 촌락에도 역시 집이 없게 될 것이다. 그 땅은 경작되지 않은 채 황폐함으로 황폐케 될 것이다. 그것은 그 가옥들을 채우고 밭을 갈아야 할 사람들이 칼과 기근과 온역에 의해 모두 쓰러졌고, 생명을 건진 자들은 포로로 멀리 유배되어 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땅 가운데 황폐한 곳이 많을 것이다. 사람이 많던 땅은 쓸쓸하게 될 것이며, 온 땅의 그 영광은 버림받을 것이다." 영적인 심판이 때로는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땅에 현세적인 심판도 가져온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것은 갈대아 사람들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당했을 때 부분적으로 이행되었다. 그때 그 땅은 황폐케 되었기 때문에, 70년 동안 그 안식을 즐겼던 것이다. 그러나 앞에 나온 예언의 말씀은 신약성서에서 우리 구주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매우 명백히 적용되었으므로, 이것은 로마 사람들에 의한 유다 백성의 최종적인 멸망을 가리키고 잇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 사건 속에서 이 경고는 완전히 이루어졌고, 그 백성과 그 땅은 오늘날까지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헨리가 이 주석을 쓸 당시는 이스라엘이 독립하지 못했음 - 역주).
4. 그러나 남은 자는 보존되어, 하나님의 긍휼의 기념물이 될 것이다(13절). 유대 민족의 마지막 멸망 가운데서도 살아남은 자가 있었다(롬 11:5, "이제도 남은 자가 있느니라"). 왜냐하면 여기에 이미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 것이다" 고 했다. 그것은 상당한 수효이나, 불신앙 가운데에서 멸망해야 할 무리들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효이다. 율법 시대에는 십분의 일이 하나님의 몫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십일조처럼 하나님께 바쳐질 것이며, 하나님 봉사와 영예를 위해 일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이 십일조, 곧 구원받은 남은 자에 관해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1) 그들은 돌아올 것이다(6:13; 10:21). 죄에서 떠나 하나님과 의무로 돌아올 것이며, 포로에서 벗어나 본국으로 돌아올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돌리실 것이며 그들은 돌려질 것이다.
(2) 그들은 삼키우게 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집의 양식이었던(말 3:10) 십일조처럼 하나님의 용납하심을 얻게 될 것이다. 이 남은 자의 구원은 하나님의 나라가 잘되기를 바라는 자들의 믿음과 소망에 양식이 될 것이다.
(3) 그들은 잎은 없지만 생명을 갖고 있는 겨울나무 같을 것이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것 같이." 이 남은 자들도 비록 그들의 외적인 번영을 빼앗기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공통적인 재앙을 받을지라도 봄의 나무처럼 회복되어 다시 번성할 것이다. 그들은 쓰러질지라도, 환전히 쓰러지지는 않을 것이다.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날 것이다" (욥 14:7).
(4) 이 구별된 남은 자들은 민중의 유익에 지주와 도움이 될 것이다. 영혼 안에 있는 "거룩한 씨" 가 사람의 실체이다. 마음속에 있는 은혜의 원리가 거기에서 생명을 지킬 것이다. "하나님께로 난" 자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한다" (요일 3:9). 마찬가지로 그 땅에 있는 거룩한 씨가 그 땅의 그루터기이며, 그것은 그 땅이 소멸되는 것을 막고, "땅의 기둥을 세워" 줄 것이다(시 75:3; 사 1:9 참조). 호자는 앞절을 다음과 같은 내용을 덧붙여, 이렇게 풀이한다. 즉 "살레겟의 버팀목이 느릅나무와 상수리나무인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이다" 고. 인도(人道) 한 쪽에서[왕궁에서 성전까지 이르는(왕상 10:5) 살레겟 문에 있는(대상 26:16) 약간 높은 길] 자라나는 나무가 그 땅을 튼튼히 해 줌으로써 인도가 허물어지지않게 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금 남은 - 신앙적이고 진중하고 기도하는 - 백성들이 그 나라의 버팀목이며, 물건들을 함께 보관하여 썩지 않게 하는 일을 돕는다.
혹자는 거룩한 씨를 그리스도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유대 민족은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시게" 되어 있었으므로(롬 9:5), 완전한 멸망에서는 구원되었다. "그것을 멸하지 말라. 거기에 복이 있느니라" (65:8). 그리고 그 복이 일단 도래하고 난 뒤에는, 그것이 곧 멸망되었다.
이러한 사항들을 고려한 것은, 그 예언자의 일을 돕기 위해서였다. 비록 허다한 사람들이 불신앙으로 멸망할지라도, 일부의 사람들에게는 그의 말씀이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게 해 줄 것이다. 사역자들은 자기들이 단 한 사람의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는 도구 역할밖에 못하게 되더라도, 그 수고가 결코 헛된 것은 아니다.
6:10 없음.
6:11 없음.
6:12 없음.
6:13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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