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 말, 북한산성.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던 북한산성.
백제 개로왕 5년(132)에, 고구려의 남진을 막는 한편
북방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 위해 처음 쌓았던 산성이다.
이후 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각축장.
백제가 약 500년간 점령했고
고구려가 약 100년간 점령했고.
그후, 신라 25대 진흥왕이 점령했다.
비봉에 진흥왕 순수비는
지금으로부터 약 1400년전.
신라 제24대 진흥왕(재위 540~576년)
.......진흥왕 순수비(巡狩碑)..........
삼국통일 기초를 쌓은 진흥왕이 가야연맹체를 병탄하고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던 한강 하류 일대와 동해안을 따라
함경남도까지 영토확장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4곳의 상징물
창녕비(경남 창녕군 창녕읍)
북한산비(서울 종로구 구기동 비봉)
마운령비(함남 이원군 동면 마운령)
황초령비(함남 함흥군 하기면 황초령),
....................................................
.
고려시대에는 11세기 초 거란이 친입하자
태조 왕건의 관을 이곳으로 옮긴뒤 성을 증축.
고종 19년(1232) 몽고군과 격전을 치르기도 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겪은 조선은
북한산의 군사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숙종 37년(1711)에 대대적인 축성공사.
1661(현종 2)~ 1720(숙종 46).
조선의 제19대 왕(1674~1720 재위).
.........................북한지(北漢誌).................................................
1745년(영조 21)에 승려 성능(聖能)이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의 직책을
서윤에게 인계하면서 북한산성 사적을 지지(地誌) 형태로 편찬, 간행한 책.
책머리에 첨부된 북한도(北漢圖) 3장에는
북한산과 북한산성의 지형·윤곽·건물 등이
일목요연하게 그려져 안내도 역할을 하고 있다.
책끝에는 찬자인 성능의 발문이 있다.
성능은 1711년(숙종 37) 산성을 쌓을 때
그가 팔도도총섭이 되어 북한산성을 쌓고
30여 년간 산성을 지키다가 화엄사로 돌아갔다.
책의 내용은 도리(道里)·연혁(沿革)·산계(山谿)·성지(城池)·
사실(事實)·관원(官員)·장교(將校)·궁전(宮殿)·사찰(寺刹) 누관(樓觀)·
교량(橋梁)·창름(倉廩)·정계(定界)·고적(古蹟) 등 14개조로 되어 있다.
일반 지지와 달리 지형에 관한 산계조,
북한산성의 규모와 시설에 관한 성지조,
북한산성 축조 배경과 과정을 적은 사실조,
시설의 수비 인원을 기록한 관원·장교조,
18개의 절과 암자를 기재한 사찰조,
저장곡을 보관하는 창고에 관한 창름조,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 관할구역 정계조 등
일반 지지에 설정되지 않거나
상세하게 나타나지 않은 항목들
기록은 성에 관한 특색을 보여준다.
또한 18세기초의 수도 방위에 대한 관심,
산성의 구조와 시설·운영 및 북한산의 지형과
고적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책이다.
규장각·장서각·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
13개 성문과 130칸 행궁, 140칸 군창,
우물 99개소, 저수지 26개소가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6.25동란 중 시설물들이 파괴.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맞아
1990년부터 '북한산성 제 모습 찾기'
사업으로 성의 많은 부분이 복원되었다.
도성민들의 피와 땀으로 완성된 북한산성
지금의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37년(1711) 4월 3일에 착수
그당시 엄청난 대공사였기 때문에 축성할 구간을 나누고
3군문(三軍門) 군인이 분담, 노임을 주는 모역군을 두었다.
또한 각종 장인은 물론 도성의 가구를 대, 중, 소로 분류
3명, 2명, 1명씩을 동원해 도성민들을 축성에 참여시켰다.
이때 3 ~만 명에 달하는 노역자들이 부역에 동원되었다는데,
당시 도성의 남자 인구가 10만 명이었으니 도성민 1/3에 해당.
그해, 10월 19일 축성 6개월 만에 석성을 완공하는 놀라운 성과
축성 성곽의 길이 약 9.5km.
이 기간 동안 도성의 백성들은
자신이 먹을 것을 싸가지고 와서
축성하며 힘든 노동을 견뎌야 했다.
숙종 37년(1711년) 가을에 축성을 완료한 조선 조정.
산성 방어를 위해 설치한.,3군문 파견대의 유영을 설치
경리청 관할 아래.,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유영(留營).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임진왜란 당시
그 능력을 충분히 보였던 승려(僧侶)들을 주둔
평상시 승려로, 유사시 승군(僧軍)으로 산성방어.
1712년 성능(聖能)이 북한산성 도총섭이 된 이후에
산성 안 사찰들은 군영(軍營)으로서 창건되거나 중창.
승군 사찰은 산성 12성문 안 수비와 성곽 관리를 맡았다.
승영사찰은 승군을 주둔시키고
무기를 보관하는 창고를 두었고
병영의 역활을 겸하는 승병 수행처.
임진왜란 때 국사., 사명대사
국녕사가 흥하면 나라가 흥하고
국녕사가 무너지면, 나라가 흔들린다."
임진왜란때 8도도총섭이었던 사명대사는
북한산 요소 요소에 10 사찰을 중창 및 창건
호국기도 도량 및 승병양성 도량으로 쓰여졌다.
1713년 성능이 중창한.,국녕사
숙종37년(1711)에 산성 축성 당시 각성이
가사를 하사 받은 곳으로 추정되는.,국녕사.
가사당암문에서 가사당이란 국녕사로 여겨진다.
.........................가사(袈裟)............................·
가사를 만드는 재료를 의체(衣體)·의재(衣財)라 한다.
버린 옷, 죽은 사람의 옷, 등 낡은 옷을 조각조각 벤 뒤,
백팔번뇌 의미를 본따서 108개 천 조각을 꿰매어 만든다.
.
조선시대 국사(國師,) 도총섭이 입는.,가사(袈裟)
왼쪽 어깨 위에 걸쳐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로 착용
조선시대 산성 승병 수비대는 흑의(黑衣)를 입었다.
....................................................................
8도 도총섭으로 약 30년간 산성에서 재직한.,성능.
국녕사는 산성 12성문 승병 수비대 12 수행처 중 하나.
현재, 가사당암문은 축성 때 <국녕사암문>이라 불리웠다.
1711년 중흥사에 도총섭 성능이 주석하며 산성 수리를 주도.
이듬해까지 기존 태고사와 중흥사를 제외한 8 승영사찰을 건축.
용암사, 보국사, 보광사, 부왕사, 원각사, 진국사(노적사), 국녕사,
상운사, 서암사, 봉성암, 원효암 등 8개 승영사찰이 이때 지어졌다.
그 결과 산성 내에 새로 창건한 절이 12개이며
기존 중흥사까지 13개 사찰에 350 승려가 상주.
북한산성 12성문 지킴이 승병대로서 역활을 수행.
본래 북한(北漢)은 한양 한강 북쪽을 일컫는 지명.
북한산성은 북한에 위치한 산성(山城)이란 뜻 이름.
성능이 쓴 북한지 기록 속.,북한산성 12 성문의 옛 이름
........북한지(1745년 영조 21년)........
북문, 대동문, 대서문, 대성문, 중성문, 소동문,
소남문, 서암문, 백운봉암문, 용암봉암문, 동암문,
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 수문(총 : 15개)
........................................................................
....비변사등록(1711년 숙종 37년)........
북문, 대동문, 대서문, 소동문, 소남문,
서암문, 백운봉암문, 용암암문, 동암문,
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 수문 (13개)
중성 : 중성문, 수문, 암문 (3개) 모두 합하면 (16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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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7~1896. 2월 개화파 내각이 추진한 갑오경장(甲午更張)
그후 승병수비대 제도는 폐지되고 승영 사찰은 폐허화되었다.
북한산 정상 바위 바닥에 암각문이 새겨져 있다.
삼일운동을 기념하는 정재용(鄭在鎔) 선생의 암각문
1919. 3.1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정재용.
직사각형 네 귀퉁이.,경천애인(敬天愛人)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이란 뜻.
본문에는 암각문으로 새겨져있는.,그날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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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立宣言記事 己未年 二月十日
朝鮮獨立宣言書 作成 京城府淸進町 六堂崔南善也 庚寅生.
己未年 三月一日 塔洞公園 獨立宣言書 萬歲導唱 海州首陽山人 鄭在鎔也 丙戌生.
기미독립선언의 일을 적음 : 기미년 2월 10일
조선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이는 경성부 청진정 육당 최남선임 경인생,
기미년 3월 1일 탑동공원에서 독립선언 만세를 선도하여 외친 이는 해주 수양산 사람 정재용임 병술생)
.
축성 때 민초들의 피와 땀으로 완성된 산성은
구한 말,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에
북한산성 성벽 만 남고 그안 시설물들은 사라지고
그후, 다시 잡목 속에 묻혀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다.
.
백제가 하남 위례성으로 도읍을 정했을 당시.,한강 북쪽의 산성.
백제 개루왕 5년(132)에 세워졌고,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했을 때
고려 8대 현종이 고려 태조의 관을 북한산성으로 옮겨 오기도 했다.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군과의 격전
우왕 13년(1387)에 성을 다시 고쳐지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 외곽을 고쳐짓자는 의견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 토성을 석성으로 재건축.
성의 규모는 대서문, 동서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불을 피우던 곳으로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성내 중흥사를 비롯한 12개 사찰과 99개의 우물,
26개의 작은 저수지, 그리고 8개의 창고가 있었다.
현재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 토성 흔적이 있지만
대개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여장은 허물어졌고,
대서문, 장대지,·우물터,·건물터 방어시설 일부 흔적.
이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 격전지
조선시대 도성을 지키는 중요한 곳.
"북한산은 그 줄기가 인수봉(仁壽峰)에서
남서쪽 백운봉(白雲峰 : 백운대)으로 이어지고,
백운봉에서 산성의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만경봉(萬景峰:국망봉), 노적봉(露積峰), 용암봉(龍巖峰),
일출봉(日出峰), 월출봉(月出峰), 기룡봉(起龍峰), 반룡봉(盤龍峰),
시단봉(柴丹峰), 덕장봉(德藏峰), 복덕봉(福德峰), 석가봉(釋迦峰),
성덕봉(聖德峰), 화룡봉(化龍峰), 잠용봉(潛龍峰),
보현봉(普賢峰), 문수봉(文殊峰)이 연이어 있으며,
나한봉(羅漢峰), 나월봉(蘿月峰), 증취봉(甑炊峰),
용혈봉(龍穴峰), 용출봉(龍出峰), 미륵봉(彌勒峰)
줄기가 대서문(大西門)을 향하고 있다." -북한지 -
또한 보현봉에서 남동쪽으로 형제봉(兄弟峰)을 거쳐
북악산으로 내달은 주맥이 보이는데, 이 줄기는 예부터
(한양 )도성과 연결된 용의 맥이라 하여 신성시하여 왔다.
대서문을 지나면
성내 계곡의 물을 흘려보내는
중흥수구(中興水口)에 닿는다.
이곳을 지나면
둥그렇게 능선이 휘어
원효봉(元曉峰), 영취봉(靈鷲峰),
시자봉(侍者峰)을 거쳐 백운봉과 만난다.
또한 능선안에는
기린봉(麒麟峰), 장군봉(將軍峰),
등안봉(登岸峰), 구암봉(龜巖峰), 상원봉(上元峰),
휴암봉( 巖峰) 등 높지않는 산들이 계곡 양쪽에 들어서 있다.
상원봉은 남장대가 있는 곳이며
나한봉이라도 불리우는.,봉우리.
.
이 밖에 천룡강(天龍岡), 와룡강(臥龍岡),
주마강(走馬岡)이라고 불리우는 높은 산등성이.
주마강은 '와룡강에서 나눠지며 노적봉을 향한 언덕.
.
천룡강은 '원효봉~ 등안봉' 연락이 오고가는 언덕
와룡강은 '증취봉과 장군봉'이 마주보이는 산등성이.
증취봉과 장군봉이 대치되는 와룡강 위에 연못.,흥룡지.
.
인수봉은 고려시대에 일명 부아봉(負兒峰)으로도 불리었으며,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을 쌓을 때 이를 지휘하고 『북한지』를 쓴
고승 성능(聖能)은 백제 건국 신화와 관련이 있는 산봉우리로 추정.
백운봉은 백운대라고도 하며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봉우리.
조선시대 여암 신경준(申景濬) 등은
백제 건국과 관련 깊은 곳으로 보았다.
만경봉은 그곳에 서면
눈 아래 산하(山河)가
만경(萬景)처럼 들어온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일명 국망봉이라고도 한다.
조선 건국 초에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한양을 조망하고
국도(國都)를 정했다는 유래.
.
하여, 정해진 이름이나 국망봉이란 이름은
고려시대부터 있었으므로 믿을 바가 못된다.
인수봉, 백운봉, 경봉을 합쳐 삼각산이라 불렀다.
.
보현봉은
조선 초기에
도성의 내맥(來脈)을
살펴보기 위하여
오르내린 봉우리.
조선 세종때 규표(圭表 : 태양관측기구)를 바로 잡기 위하여
수양대군 등이 출입한 일이 있고,영의정 황희 등이 세종15년(1433)에
이 곳에 올라 도성의 내맥(來脈)을 살핀 일이 있다.
단종때 수양대군이 강희맹,양성지 등 권위자들을 대동
보현봉에 올라 도성도(都城圖)를 최초로 제작하기도 하였다.
비봉(碑峰)은 정상에 신라시대 진흥왕 순수비가 있어 붙혀진 이름.
북한산의 봉우리
인수봉, 백운봉, 만경봉, 노적봉, 용암봉,
일출봉, 월출봉, 기룡봉, 반룡봉, 시단봉,
덕장봉, 복덕봉, 석가봉, 성덕봉, 화룡봉,
잠룡봉, 보현봉, 문수봉, 나한봉, 나월봉,
증취봉, 용혈봉, 용출봉, 미륵봉, 형제봉,
원효봉, 영취봉, 시자봉, 기린봉, 장군봉,
등안봉, 귀암봉, 상원봉
대(臺)의 명칭
대(臺)란 대체로 기암절벽 봉우리.
전망이 좋은 암봉(巖峰)을 말한다.
위에 설명한 백운대, 만경대가 대표적.
미륵봉 아래 의상대(義相臺),
의상대 북쪽 수구 위 원효대(元曉臺),
구암봉 아래에 태고대(太古臺),
동장대 옆에 소요대(逍遙臺),
보국사 남쪽에 법왕대(法王臺),
부왕사 앞에 유선대(遊仙臺),
보광사 왼쪽에 곡룡대(曲龍臺),
원효대 아래에 요초대(瑤草臺)
<북한지>에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한 위치를 찾기 쉽지 않다.
동(洞)의 이름
북한산의 백운동ㆍ
금강산의 만폭동ㆍ
설악산의 천불동
계곡 등과 같이
깊은 계곡을 형성하고 있는
아름다운 골짜기를 일컫는 말이다.
북한산에는
지금의 번지만큼
자세하게 골짜기마다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 사용해왔다.
북한산 계곡 옛지명이 사라진 것이 안타깝다.
하류에서부터 장춘동, 옥류동, 청계동, 백운동,
용계동, 구룡동, 잠룡동 구간 별., 불리우던 계곡.
계곡 구간마다 운치가 담긴 옛 지명.
지금도 '백운동문'이라는 각자(刻字)가
용화사에서 노적사 가는 바위에 남아있다.
장춘동(長春洞), 옥류동(玉流洞),
청계동(淸溪洞), 노적동(露積洞),
영천동(靈泉洞), 은선동(隱仙洞)ㆍ
용계동(龍溪洞), 규룡동(叫龍洞),
잠용동(潛龍洞), 용유동(龍遊洞),
백운동(白雲洞), 자하동(紫霞洞),
중흥동(中興洞) 청담동이 그것이다.
청담동은 사기막골 초입에 위치.
자세한 위치는
성능이 쓴 『북한지』
상세히 적혀 있다.
산성 안 계곡에는 상당히 구체적인 이름이 전해온다.
계곡을 구간 별로 주소를 붙이듯 세분화시켜 놓았다.
그 설명이 모호해 현재 개념으로는 파악하기 어렵다.
사기막계곡
상장능선과 사기막능선 사이 계곡으로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도에는 효자리계곡
합수점 일대 너럭바위 소 풍광이 아름답다.
합수점에서 두 개의 지계곡으로 나누어지며
인수대피소 방향의 계곡은 인수계곡으로 불리며,
인수계곡 위 합수점은 숨은벽 지계곡이 나누어진다.
합수점에서 분기하는 지계곡은 영봉 방향으로 향한다.
밤골계곡
사기막능선과 밤골능선 사이 상단부에서 발원
숨은벽계곡 초입 밤골매표소까지 이어지는 계곡.
밤골계곡 중하류지역에는 폭포가 연이어져 폭포골
계곡을 따라 백운대로 가는 등산로가 이어진다.
등산로 끝은 백운대와 숨은벽정상 사이 V자 안부.
북한산성계곡
대남문 아래에서 발원 효자동까지 계곡
북한산 일대의 계곡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주계곡을 중심으로 백운대 방향, 국녕사 방향,
중흥사 옆, 부왕사 방향 등 지계곡이 갈라진다.
백화사계곡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에서 발원해
백화사 여기소마을로 이어지는 계곡.
우이동계곡
하루재에서 우이동으로 이어지는 계곡.
중간에 대동문에서 발원하는 소귀천계곡과
도선사 무당골이 합쳐져 우이동계곡을 이룬다.
소귀천계곡
대동문 아래 진달래능선 분기점에서 발원
우이동계곡과 만나는 지점까지 이어지는 계곡.
전체적으로 완만하지만 평범하며 약수터가 많다.
냉골
칼바위능선의 435봉 근처에서 발원하여
냉골매표소 북쪽 능선 너머로 이어지는 계곡
길이가 짧지만 냉골 상단부는 협곡으로 이어진다.
범골
칼바위능선 435봉 근처에서 발원하여
냉골매표소 옆으로 이어지는 평범한 계곡.
빨래골
칼바위능선 395봉과
224봉 사이에서 발원하여
빨래골로 이어지는 계곡이다.
구천계곡
칼바위능선과 진달래능선 사이에서
발원해 수유동으로 이어지는 계곡이지만
구천폭포 일대는 넓은 암반이 있고 풍광이 좋다.
정릉계곡
보국문 근처에서 발원하여 정릉매표소로 이어지는 계곡
영추사 근처에서 발원한 계곡과 정릉매표소 위에서 합류.
삼천사계곡
문수봉에서 발원 삼천사매표소로 이어지는 계곡
사모바위 아래에서 발원한 계곡과 합류한다.
길이가 긴 편이지만 평범한 계곡이다.
진관사계곡
비봉 아래에서 발원하여 진관사매표소로 이어지는 계곡
암반이 잘 발달된 계곡으로 여름철에는 쉬어가기 좋은 계곡.
기자촌능선 정상에서 발원한 지계곡과 진관사 일주문 앞에서 합류.
평창계곡
사자능선과 형제봉능선 사이 계곡
동령폭포 근처의 풍광이 아름답다.
구기계곡
사자능선과 비봉능선 사의 계곡으로
문수봉에서 발원해 구기동으로 이어지는 계곡.
중간에 승가사 근처에서 발원하는 지계곡이 합쳐진다.
향림담계곡.
향로봉에서 발원해 향림담을 거쳐 불광매표소로 이어지는 계곡
족두리봉 근처에서 발원하는 계곡과 불광매표소 직전에서 합쳐진다.
길이는 짧지만 좌우로 웅장한 바위벽으로 형성되어 거대한 느낌을 준다.
효자골.
밤골능선 남쪽의 계곡으로 북문 근처에서 발원하는 계곡.
은평, 서대문 교장 맞은편 길을 따라 들어가면 보이는 계곡
계곡의 규모는 작지만 너른 암반이 잘 발달되어있는 계곡이다.
옛문헌에 기록된 계곡
장춘동(長春洞)
수구에서부터 백운교 아래에 이른다. (북한지의 산과 계곡 편)
옥류동은 백운교에서부터 만경봉 아래에 이른다. (북한지의 산과 계곡 편)
청계동은 백운교 위쪽에서부터 청운교 아래에 이른다. (북한지의 산과 계곡 편)
청운교는 중성 밖 장춘동에 있다. (북한지의 교량 편)
백운교는 상운폭 아래에 있다. (북한지의 교량 편)
백운교를 중심으로 나누어지는 두 계곡의 이름.
백운교는 계곡의 합수점 근처에 설치된 교량이다.
백운교는 백운대와 대남문 등산로가 갈라지는 지점.
현재, 북한산계곡 수문지에서
백운대와 대남문 갈림길까지 계곡
그곳 두 계곡의 합수점까지가.,장춘동.
옥류동(玉流洞)
백운교 ~만경봉 아래.
(북한지 산과 계곡 편)
백운교에서 합수되는
청계동과 옥류동 계곡
청계동은 대남문 방향 계곡
옥류동은 백운대 방향 계곡.
청계동(靑溪洞)
백운교 ~ 청운교 아래
(북한지의 산과 계곡 편)
청운교는 중성 밖 장춘동에 있다.
청운교는 중성문 밖 합수점 위쪽 교량
노적동(露積洞)
노적봉 아래 쪽에 있다.
(북한지의 산과 계곡 편)
영천동(靈泉洞)
노적봉 아래 있다.
그 위에 영천굴이 있고
그 아래에 강선교가 있다.
여기담은 환선교 아래쪽, 강선교 위쪽에 있다. (산과 계곡 편)
환선교는 반룡담 아래쪽 부왕동구에 있다. (교량 편)
강선교는 중성폭 위쪽에 있다. (교량 편)
은선동(隱仙洞)
중흥동 위, 만경봉 아래.
(북한지의 산과 계곡 편)
용계동(龍溪洞)
용암동 어귀 일출봉 아래.
(북한지의 산과 계곡 편)
중흥사지~ 북한산대피소
규룡동(叫龍洞)
중흥동 ~ 무학당.
(북한지의 산과 계곡 편)
중흥사지 ~ 대동문 분기점
잠룡동(潛龍洞)
상원봉 아래 쪽에 있다.
(북한지의 산과 계곡 편)
잠룡동은 잠룡봉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추정되며,
잠룡봉이 보국문과 대남문 사이의 봉우리인 점과
규룡동 위치로 보아., <대동문 ~ 대남문까지 계곡>
용유동(龍游洞)
중봉 아래쪽에 있다.
(북한지의 산과 계곡 편)
중봉이란 의상능선 상.,증취봉
증취봉과 용혈봉 인근에서 발원
산성계곡에서 국녕사 갈림길 계곡
백운동(白雲洞)
장군봉 아래 있다.
동문에 백운동문 암각
(북한지의 산과 계곡 편)
장군봉 아래쪽은 증흥사지 근처이며,
백운동문은 노적사 갈림길과 용화사 사이
백운동은 중성문에서 중흥사지까지의 계곡.
벽하동
중흥사 뒤에 있고 길은 백운봉에 이르러 끊어졌다.
(이덕형의 중흥동산성 형세 보고서, 1561~1613)
자하동(紫霞洞)
선유대 아래쪽에 있다.
(북한지의 산과 계곡 편)
환선교는 학현 아래쪽 자하동구에 있다. (북한지의 교량 편)
환선교는 반룡담 아래쪽 부왕동구에 있다. (북한지의 교량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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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선교 위치가 자하동구, 부왕동구라는 점으로 보아
자하동은 구한말 청하동으로 지명이 바뀐듯 추정된다.
'자주색(핏빛) 노을' 뜻말 지명이 '푸른 노을'로 바뀐듯..
인조반정 당시 반정군의 구데타 경로였던
홍제원 ~세검정 ~자하동 ~자하문 ~경복궁.
조선시대 북소문 창의문(彰義門) 일대 계곡
하여, 창의문은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불렀다.
숙정문이 닫혀있었기에 창의문은 사실 상.,북대문.
반정군은 세검정에서 칼을 씻고
자하동으로 거쳐 자하문을 통과후
경복궁으로 진입해 인정반정을 성공.
청하동
부왕사는 북한산 남쪽 깊은 곳에 있다.
(이덕무의 유북한기, 1741~1793)
청담동
청담동이 백운대 서편에 있고
수석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이만부의 삼각산기, 1664~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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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막골 초입에 암각.,청담동(淸淡洞).
교량(橋梁)
환선교(喚仙橋) : 반용담 아래 부왕동 입구에 있다.
언룡교(偃龍橋) : 항해루 아래에 있다.
강선교(降仙橋) : 중성 폭포 위에 있다.
환선교(喚仙橋) : 학현 아래 자하동 입구에 있다.
봉황교(鳳凰橋) : 여기담 아래에 있다.
청운교(靑雲橋) : 중성문 밖 장춘동에 있다.
백운교(白雲橋) : 상운폭포 아래에 있다.
여기담(女妓潭)
환선교 아래,
강선교 위쪽.
(산과 계곡 편)
영천동은 노적봉 아래.
그 위쪽에 영천굴이 있고
아래 쪽에는 강선교가 있다.
환선교는 반룡담 아래 부왕동구. (교량 편)
강선교는 중성폭 위쪽에 있다. (교량 편)
봉황교는 여기담 아래에 있다. (교량 편)
반룡담(盤龍潭)
항해루 아래쪽에 있다. (산과 계곡 편)
언룡교는 항해루 아래에 있다. (교량 편)
항해루는 중흥사 동구에 있다. (누관 편)
월인담(月印潭)
수구 위쪽에 있다.
(산과 계곡 편)
국녕폭포
용혈봉 동구
(산과 계곡 편)
상운폭포
백운동 아래
(산과 계곡 편)
북한산 중흥산성의 현지조사를 다녀온 병조판서 이덕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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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 무너진 것이 열에 일곱 여덟인데,
수리를 한다 해도 높은 봉우리 꼭대기는
인력 소비가 커서 쉽게 해내기 어려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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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각 도의 승려들을 소집
중요한 곳에 집을 짓게 하고서
지역별 공역을 맡겨 산성을 수리하면
인심도 믿고 의지하는 곳이 있게 되고
일도 쉽게 이루어질 것” -1593년 이덕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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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1711년 숙종때 축성 복원된.,북한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