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입맛은 역시 국산
김현주
튀르키예에서의 첫 식사였다. 미슐랭 가이드에 등재된 한 식당으로 갔다. 오랜 전통이 느껴졌다. 우리 투어 그룹 인원이 30여 명이 넘었다. 안내를 받아 고급스럽게 준비된 테이블에 앉았다. 하얀 양복 윗도리를 입고 같은 배지를 단 많은 남자 종업원이 왔다 갔다 하며 일사불란하게 서빙을 했다. 젊은 사람들도 있지만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종업원이 더 많았다. 거의 엄숙한 태도로 soup을 서브했다. 당근을 주재료로 한 듯 주황색의 걸쭉한 미음 같은 모습이었다. 피곤하고 별로 식욕도 있을 리 없는 밤 시간인데 soup을 한 숟갈 입에 넣자 피곤해서 감기던 눈이 반짝 떠졌다. “음. 맛있다.” 이 깊은 맛은 뭐지? 부드러우면서도 고소했다. 입맛을 다시며 먹었다. 이 집 미슐랭 가이드 등재 식당이란 거 헛소리 아니었나 봐. 그다음엔 상추 당근 등의 생채소들이 먹기 좋게 잘라져 나왔다. 한 입 먹으니 순하고 약한 듯하면서도 채소의 상큼한 맛을 입 안 가득 느끼게 해주었다. 올리브유와 발사믹 식초가 따로 나왔지만, 더 간을 할 필요가 없었다. 조미료를 과하게 쓰지 않았고 깔끔하게 채소를 먹어서 좋았다. “Not bad” 속으로 뇌였다.
그다음에 케밥(kebab) 네 가지.
첫 고기는 소고기를 얇게 썰어서 깔끔하게 구워낸 것이라 맛있었다. 계속해서 세 가지 이상 다른 식으로 요리한 고기가 나왔는데 맛이 있어도 갈수록 좀 느끼해졌다. 처음보다는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가 점점 불러와서이기도 했다. 디저트 기억은 과일로 붉은 색깔을 낸 부드러운 꿀 과자였고 맛있다고 포크를 놀리던 생각이 난다. 음료수는 애플사이다 비슷한 것 같았는데 기억이 흐리다. 옆에 앉은 사람이 카페인이 안 들었다며 세븐업을 먹던 생각은 난다. 만족한 식사였다.
그렇게 첫 튀르키예 음식을 기분 좋게 먹고 나니 너무 피곤해서 식사하러 가기 싫다는 나를 억지로 데려간 남편이 고마웠다. 계속되는 여행으로 뒤에 보니 지중해 음식들이 soup을 먹고 채소를 먹고 고기나 생선을 먹는 순서로 식사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걸쭉한 soup은 질에 있어서 차이가 나긴 했어도 먼저 나왔고 그다음에 채소가 나와서 건강한 식사를 하게 해주는 것이 좋았다. 짜지도 맵지도 않아서 좋았고 신선한 채소를 먹어서인지 김치 생각도 안 났다.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주로 먹었는데 치즈 종류도 많았고 빵이 여러 가지로 구워져 나왔는데 맛있었다. 올리브가 여러 모양으로 장아찌같이 나왔는데 너무 짜서 하나 이상 못 먹었다. 특히 꿀을 꿀 집 그대로 가져다 놓고 직접 조금씩 잘라 먹는 것이 특이했고 맛이 좋았다. 생꿀 그대로. 많은 사람이 줄 서서 기다렸다가 먹을 정도였다. 튀르키예와 그리스는 비슷한 음식문화를 가진 듯했다. 호텔 한구석 바닥에 앉아 큰 솥뚜껑 같은 철판 앞에 톨티아(tortilla)를 직접 구어 채소와 치즈를 넣고 구워주는 시골 할머니가 있었다. 기다려서 한 조각 가져다 먹었더니 담백하고 맛있었다. 항아리 속에 고기와 채소를 넣어 입구를 막고 깊숙한 오븐에 넣어 오래 구운 요리도 맛있게 먹은 기억이 난다. 대체로 만족한 식사였고 나는 한국 음식을 안 먹어도 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두 주일간 그룹 투어를 마치고 드디어 한국에 도착했다. 늦은 밤이었고 몹시 피곤했지만 뜨거운 국밥을 먹고 쉬면 좋을 것 같았다. 놀란 것은 호텔 골목 안에 그럴싸한 식당이 있어서 가보아도 벌써 문이 닫히어 있었다. 밤 9시 정도였는데. 수타 칼국수 집에 가니 더 이상 손님을 안 받는다고 했다. 이거 뭐야? 장사들 안 해요? 그러나 한 식당이 그것도 국밥집이 열려 있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들어가 앉았다. 오랜 전통이 있는 국밥집이라고 쓰여 있었다. 조옿지! 드디어 국밥이 나왔다. 너무 맛있었다. 피곤이 달아날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맛있는 거야. 언제 지중해 음식이 좋고 김치가 필요 없다고 한 거야. 콧물이 흘렀다. 휴지로 콧물을 찍어내듯 닦아 냈다. 거짓말했네. 역시 한국 음식이 최고야. 언제 튀르키예 음식 그리스 음식이 좋았다는 거야. 픽 픽 웃음이 났다.
식당 안에 여러 군데 큰 글자로 써 붙인 글에 눈이 갔다. “식사 도중에 식당 안에서 코를 풀지 마세요” 이건 뭐야. 잘 나가다가 무슨 이런 무례하고 멋없는 말을... 근데 하하하 이해가 갔다. 맛있게 뜨거운 국물을 먹다 보니 콧물이 주욱 흐르고. 어느새 휴지로 콧물을 찍어 내다가 아하! 이래서… 웃어야 할지 찌푸려야 할지. 우선 웃었다. 노골적으로 그 무례한 경고문을 아무렇지 않게 써 붙이는 단순함을 어쩌겠는가. 코를 풀지 말라고 예의를 요구하면서 그 노골적 요구가 무례함을 모르는 단순함이여. 아니면 나처럼 코를 풀려다가 웃으라고 써 붙인 걸까. 하하하 하하 한참 웃었다. 내가 단순했던 건가 봐. 뭐니 뭐니 해도 오랜만에 먹는 우리 국밥 맛 최고. 오래 우려서 깊은 맛을 낸 국물에 살짝 김치 내를 풍기는 부드러운 우거지 맛 조옿고.
도토리묵 가루로 묵 대신 전을 부치고 그 위에 상큼한 살라드를 얹어 내온 요리도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걸쭉하고 고소한 콩국수는 처음 먹어 봤는데 바쁜 중에도 그 집에는 한 번 더 가서 먹었다. 강릉에서 먹은 들깨 칼국수에 감자옹심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그걸 안 먹으면 강릉에 다녀온 게 아니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재래시장에 일부러 찾아가서 먹고 왔다. 가는 곳마다 얼마나 특이하고 맛있는 음식이 많은지 이루 다 못 먹어 섭섭했다. 내 입맛은 역시 국산. 고향의 맛과 비길 수 있는 음식이 어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