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사람들
말소리와 동시에 한 자루의 장검이 독사처럼 등나무 가지 사이를
가로지르며 찔러왔다. 장검은 독사 같은 푸르른 빛을 반짝였다.
백비비는 비명을 지르며 심랑의 품 속으로 파고 들었다.
심랑은 신형을 날려 세 걸음을 피하면서 외쳤다.
누구요?
검끝이 비스듬히 올라가면서 늘어뜨린 등나무 줄기를 들춰 올렸다.
무사복장을 한 영준한 소년이 그들을 보고 있었는데 가슴에 단
동경(銅鏡)에는 '삼십 오'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쾌락왕 휘하의 급풍기사였다.
심랑은 얼굴에 여전히 웃음을 띠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형씨가 이곳에 올 때까지 내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니 형씨의 무공은
필시 다른 동료들보다 뛰어나오. 정말 축하할 만한 일이오.
그 급풍기사는 냉소를 날리며 말했다.
그대는 이미 사랑의 나락에 빠져 비록 천군만마가 온다고 해도 더는
자각을 못했을 것이다.
하, 하, 그럴지도 모르지.
급풍기사는 분노하여 외쳤다.
대왕께서는 너를 박대하지 않고 오히려 지기(知己)로 생각하셨다. 그런데
너는 대왕의 그런 은혜도 모르고 오히려 여기서 대왕의 희첩을 희롱하고
있다니 너는 네 죄를 알고 있느냐?
심랑이 담담하게 미소지었다.
죄를 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를 따라 어서 빨리 대왕께 간다면 대왕께서는 아마 너를 가볍게 벌하여
빨리 죽게 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 하, 정말로 감격스럽기 이를 데가 없소. 하지만.......
심랑은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은 나 심랑을 그렇게 순순히 말 잘 듣는 사람으로 생각하시오?
급풍기사가 분노를 터뜨리며 말했다.
어떻게 할 테냐?
나는 단지 당신을 위해 안타깝게 생각할 따름이오. 만약 그대가 총명한
사람이었다면 아까 조용히 돌아갔어야 했었지. 형씨가 지금 가려고 한다면
아마 어려울 것이오.
흥, 너는 내가 혼자 왔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란 말인가?
이 주위, 사방에는 이미 열일곱 명의 기사가 포진해 있다. 네가 단숨에
우리들을 다 죽일 수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비록 나를 죽여도
도망치지는 못할 것이다.
아......!
심랑의 얼굴에는 아직도 웃음이 있었으나 백비비에게서는 혈색이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갑자기 그녀는 심랑의 악을 막아서며 이를 악물고
큰소리로 외쳤다.
이 모든 것은 그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에요. 내가 그를 오라고 한
거예요.
흥, 백 아가씨는 정말로 정이 깊기도 하군요. 하지만 아깝게도
난.......
백비비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정말 죽여야 한다면 저를 죽이세요.
그 급풍기사의 눈빛에서 갑자기 한 가닥 사악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아가씨 같은 미인을 차마 어찌 죽일 수 있단 말이오?
백비비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당신은 어쩔 생각이세요?
아가씨는 어떻게 할 생각이시오?
백비비는 이를 악물고 안타깝게 말했다.
당신이 그를 놓아주기만 한다면 난...... 난...... 난 당신을
따르겠어요.
하, 하, 정말이오?
백비비의 얼굴은 또다시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정말이에요.
심 공자의 의향은 어떠시오?
좋소. 두 분은 그만 가 보시오.
이 말이 떨어지자 그 급풍기사와 백비비는 동시에 얼이 빠진 듯했다.
백비비의 목소리는 더욱 떨렸다.
당신...... 당신...... 당신.......
당신이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나를 구하겠다는데 내가 고집부려 당신을
놓지 않는다면 당신의 좋은 뜻을 저버리게 되는 것 아니겠소? 기사 형씨,
내 말이 틀렸소?
이것......난.......
하, 하, 두 분이 지금 가신다면 아주 은밀한 곳을 찾아야 할 것이오.
괜히 또 남에게 들키지 말고.
백비비의 목소리는 잠겨있었다.
당신...... 당신은 사람도 아니에요.
그건 당신 스스로 청한 것이오. 어떻게 오히려 나를 욕하시오?
그건...... 난.......
하, 지금 이 상황이 만약 소설이라면 어떻게 이어지겠소? 당신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나를 구하려 하고, 그럼 나는 전력을 다해 당신을 막아야
하오. 심지어는 목숨까지 걸어야 처참하면서도 감동적인 이야기가 되니
사람들의 눈물을 버는 소설이 될 것이오. 만약 이렇게 쓰지 않으면
독자들은 분명히 실망을 할 테고 이야기도 더이상 전개해 나가지 못한다는
말이오.
그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 하, 단지 아깝게도 당신은 지금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오. 이곳에는
관중도 없으니 이러한 상황의 변화는 더이상 전개될 필요가 없소.
백비비는 그저 멍하니 넋이 나가 있었다.
그 급풍기사는 갑자기 '하하하' 하고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좋소. 과연 심랑은 비범하군요.
과찬의 말씀.
하, 하, 하, 당신은 어떻게 나를 알아보았소?
급풍기사가 만약 그 정도의 경공이 있었다면 쾌락왕이 걱정할 것은
하나도 없지. 하물며 급풍기사라면 그대 같은 경공과 색정어린 눈빛은
보이지 않을 것이오.
심랑은 계속 말을 이었다.
이러한 경공에 또 이러한 눈빛은 천하의 왕련화 공자 외에는 다시는 찾아
볼 수 없을 것이오.
백비비는 영문을 몰라 심랑을 바라보다가 다시 급풍기사를 봤다. 그녀는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급풍기사가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아까 장난으로 놀라게 한 점, 백 아가씨께 사과합니다.
당...... 당신이 정말로 왕련화란 말인가요?
하, 하, 제가 만든 이 면구(面具)가 상당히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라
지금은 벗어서 보일 수 없는 것이 안타깝군요. 그렇지 않다면 저의
진면목을 백 아가씨께 보여드릴 수 있을 텐데.
백비비는 갑자기 주르르 눈물을 흘리며 심랑을 책망했다.
당...... 당신은 어떻게 그런 장난을 할 수 있어요?
만약 상대가 주칠칠이었다면 벌써 심랑을 한 대 갈겼을 것이다. 하지만
백비비는 단지 자신만을 탓하며 눈물만 흘렸다.
하지만 당신 탓만은 아니에요, 이건...... 이건 다 제가 못나서 그런
거에요. 난.
그녀가 정말로 심랑을 때렸다면 심랑은 오히려 속이 후련했을 것이다.
그녀의 그러한 모습을 보자 심랑은 정말로 너무나 미안했다. 그녀는
가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랑스러웠다. 그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끌어안고는 부드럽게 달랬다.
난 당신이 그를 알아 본 줄 알았소, 그래서.......
제가 어떻게 그를 알아 볼 수 있겠어요? 그 급풍기사 삼십오호는 본 적이
있었지만 하지만 그는...... 그는 너무 똑 같아요. 정말이지 말소리와
표정은 한 치도 틀림이 없어요.
왕련화가 말했다.
하, 하, 아가씨께서 칭찬해 주시니 정말 고맙소. 하지만 그래도 심
형에게는 들켰군요.
그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자신의 뺨을 치더니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죽일 놈이지, 내가 죽일 놈이야.
왕련화는 경이로운 재능과 출중한 외모, 그리고 깊은 심계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은연중 일대(一代) 효웅의 기개를 풍겼는데 갑자기
광대와 같은 동작을 하기 시작했다.
백비비는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죠?
이 '심 형'이란 말은 내가 부를 수 없는 칭호이오.
왜 심 형이라고 부르면 안 돼죠? 그럼 당신은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하죠?
그녀는 입으로는 말하고 있었지만 눈빛은 이미 심랑을 보고 있었다. 이
총명하고 영리한 여인은 이미 왕련화의 한 마디로부터 뭔가를 알아냈단
말인가? 그녀는 안색이 약간 변한 듯했다.
심랑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때 그의 표정은 백비비가 전혀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그의 행동거지는 뭔가 안절부절못하는 듯했고 웃는 것도 매우
어색했다.
왕련화는 마치 아무 것도 보지 못한 듯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께 알려드리죠. 전 지금 심 공자를 '아저씨'라고 불러야 합니다.
백비비는 섬섬옥수로 앵두 같은 입술을 가리고 엉겁결에 되물었다.
아저씨?
왕련화가 말했다.
그렇소. 아저씨요. 왜냐하면 심 공자는 이미 저의 모친과 혼약이
되어있기 때문이오.
백비비는 마치 누구에게 채찍을 맞은 것 같았다. 그녀는 비스듬히 옆으로
몇 걸음 물러섰다. 온통 놀람과 비통함, 그리고 분노로 가득찬 한 쌍의
눈으로 심랑을 노려보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정말....... 정말인가요?
이 일이 당신을 놀라게 했소?
백비비는 몸을 떨면서 눈물을 흘렸다.
거의 차 한 잔을 마실 시간이 지나도록 그녀는 그렇게 서 있었다. 계속
떨면서, 계속 눈물을 흘리면서 그녀는 그렇게 서있을 수밖에 없는 듯했다.
그녀가 갑자기 쉰 목소리로 비통하게 외쳤다.
당신은 왜 진작 저에게 말해주지 않았나요? 당신은 왜 아까 저에게
말해주지 않았나요? 당신은 저를 속이려고 했나요?
말이 끝나자 마자 그녀는 몸을 돌려 늘어진 등나무 사이로 비틀거리며
뛰쳐나갔다.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심랑은 그녀가 꽃밭을 뛰쳐나가는 것을 그저 그렇게 바라만 봤다.
그는 막지도 않았고 말도 안했으며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는 이미 표정마저도 평정을 되찾았다.
왕련화는 그런 심랑을 바라봤는데 그 역시 움직이지도 않았고 말도
안했다.
왕련화의 표정은 매우 특이했고 눈빛에는 한 가닥 잔혹한 미소조차 깃들어
있었다.
심랑은 드디어 고개를 돌려 왕련화와 마주 봤다.
왕련화는 웃음 띤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심랑의 입가에도 여전히 산만하고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미소가 흘렀다.
왕련화가 만약 역용을 하지 않았다면 그의 미소 역시 심랑의 것과 거의
비슷했을 것이다.
이들은 당금 무림에서 가장 위협적이고 가장 위험성이 있고 또한 가장
침략적인 두 인물이다. 현재 사방에 길게 늘어뜨린 등나무의 그늘에서
서로 얼굴 마주보며 웃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서는 무슨 생각이 일고
있을까? 그들의 웃음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그 누가 알까? 그 누가 알아
맞출 수 있을까?
그들의 나이는 별로 차이가 없었고 그들의 입장은 같으면서도 같지
않았다. 그들의 관계 역시 이렇듯 복잡하니 그들은 친구일까? 아니면
적일까?
그들은 서로 해칠까? 아니면 서로 도울까?
누가 알 것인가? 누가 분간할 수 있을까?
어찌됐던 지금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그들이 만약 마음 속에 쌓인
원한을 억누르지 못한다면 그 때가 바로 출수할 순간이다.
그들이 출수를 한다면 필시 경천동지할 것이며 현 무림의 대국(大局)을
바꿔놓을 것이다. 그들의 출수는 필시 생사존망을 가름하니 강자는 이기고
약자는 패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도 출수하지 않았다.
위험한 순간은 단지 조용한 미소 속에서 지나갔다.
심랑이 침묵을 깼다.
그대는 왜 그렇게 했지? 왜 그런 말을 했지?
왕련화는 담담하게 웃었다.
설마 모르지는 않겠지?
아무리 내가 알고 있어도 직접 너의 입으로 듣고 싶군.
물론 알고 있겠지만 이것도 물론 내 어머님의 뜻이지.
어? 그녀가.......
왕련화는 매우 괴이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만약 그녀의 입장이라고 해도 역시 이렇게 했을 거야. 당신 같은
남자를 그냥 이대로 놓아 두고 세상 어느 여자가 안심할 수 있을까?
지금 자네는 내게 무슨 자격으로 말하는 거지?
형제지간(兄弟之間)이나 적과 아군의 관계이지.
그럼 지금은 다시 형제와 같은 관계로 회복이 됐단 말인가?
다른 사람 악에서 너는 내 선배이고 아저씨이지만 우리 단 둘이 있을
때는 나는 너의 형제요 친구이며...... 어느 때는 적일 수도 있겠지.
심랑은 한참 동안 그를 주시한 후,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이렇게 솔직할 때도 있었군.
하, 하, 내가 그대를 속이려 한다고 해서 속일 수 있을까?
두 사람은 손뼉을 치며 웃었는데 마치 서로 의기투합한 친구 같았다.
갑자기 심랑이 웃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대는 한 가지 일을 잊었어. 그것은 바로 이 모든 문제의
실마리지.
그 일이 그토록 중요한 일이라면 난 분명히 잊지 않았음을 자신하지.
자네는 잊었나? 여자가 자극을 받았을 때는 어떤 짓이라도 한다는 점을
말일세!
이 말은 세상 모든 남성들이 꼭 기억해야 할 점인데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나?
그럼 자네는 백비비가 충격을 받은 끝에 쾌락왕에게 밀고를 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나?
허, 허, 그녀는 절대 밀고를 하지 않아.
자네가 어떻게 알지?
나야 당연히 알고있지.
그렇게 자신있나?
나야 물론 자신있지.
심랑은 눈빛을 빛내며 계속해서 물으려고 했다. 갑자기 어떤 영감이
뇌리를 스치자 그는 말머리를 돌렸다.
어찌됐건 그대가 이곳에 온 것은 정말 뜻밖의 일이야.
내 어머님의 전략과 계책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지.
쾌락왕에게 들킬까 두렵지 않나?
그의 곁에만 가지 않는다면 들킬 염려는 없지.
심랑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는 왜.......
하, 너는 분명히 많은 의문점이 있을 거야. 내가 너에게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한 사람을 보여주지. 아마 깨닫는 것이 많을 거야.
응? 그게 누구지?
왕련화가 눈빛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그를 만나고 나면 자연히 알게 될 거야.
언제 그를 만나 볼 수 있지?
바로 지금.
심랑은 다시 묻지 않았다. 다시 물어도 더이상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 멀리서 한 사람의 환호소리가 들렸다.
심 공자께서는 과연 고상한 분이군요. 이렇게 서늘한 곳에서 피서를
즐기다니.
심랑은 눈썹을 약간 찌푸렸다. 늘어뜨린 등나무 사이로 가슴이 펼쳐진
금의를 입고 손에 든 채찍으로 긴 풀들을 채찍질하면서 한 사람이
걸어왔다.
저 자는 심랑에게는 매우 뜻밖의 인물이었다.
그는 바로 온종일 제대로 일도 않고 싸돌아다니는 건달 '소패왕'이었다.
심랑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나보고 만나라는 사람이 바로 저 사람인가?
왕련화는 실소를 터뜨렸다.
저 사람일 리가 없지.
심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그의 눈에는 사람을 압박하는 광채가
떠올랐다.
소패왕은 길게 늘어뜨린 등나무 사이로 쏙 들어오더니 손에 든 채찍을
휘두르며 말했다.
허, 허, 정말로 시원한 장소군요. 심 형은 어떻게 이런 곳을 찾을 수
있었나요?
그러게 말일세, 정말 이상한 일이라니까? 하, 하!
소패왕이 눈을 깜빡이면서 말했다.
이상하다고?
형씨는 아직 이곳에 오지도 않았는데 멀리서 이미 내 이름을 불렀으니 이
어찌 이상하지 않겠나?
그것은...... 히히하하...... 정말로 묘하군. 심 형은 이 말을 못
들었소? 생각하는 것이 같다면 서로 마음도 통한다는 말이죠. 내 비록 심
형을 보지는 못했지만 멀리서 이곳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았죠. 곧 그
사람은 분명히 심 형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 맞춘 거요.
소패왕은 좋아라 손뼉을 치더니 계속 말했다.
솔직히 심 형 외에 그 누가 이토록 고상할 수 있겠소?
하, 하, 하! 묘하군, 정말로 묘하군. 형씨는 과연 묘한 사람이오.
그는 무심코 손을 뻗어 소패왕의 어깨를 치려했다.
왕련화도 무심코 살짝 그의 손을 받치려는 듯했다.
심랑의 눈빛이 살짝 반짝이자 왕련화가 고개를 약간 흔들었다. 바로 이
눈을 깜박이고 고개를 흔드는 찰나에 소패왕은 이미 생사의 갈림길을 한
바퀴 돌았다.
소패왕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멍청하게 웃고만 있었다. 그는 간계를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아무런 딴 생각이 없다고
하기에는 너무 의문점이 많았다.
심랑은 순간 깨달았는데 그것은 이 쾌활림 속의 모든 사람들은 표면적인
것과는 다르게 그렇게 단순치가 않다는 것이다. 모두가 신비한 내막이
있는 듯했다.
소패왕은 채찍을 휘두르며 좌우로 두리번거리더니 몸을 돌려 심랑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왜 심 형을 찾아왔는지 알고 있소?
심랑은 단지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소패왕이 말했다.
내가 심 형을 찾아 온 것은 바로 심 형께 한 사람을 감상해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요.
응?
제가 전에 데리고 온 그 여자는 솔직히 너무 저속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었소. 아마 심 형께서도 속으로 이가 빠질 정도로 웃었을 것이오.
그래서 제가 다시 한 아가씨를 데려와 심 형에게 심사를 부탁하고 싶은
거요.
나는 여자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소. 그렇지 않았다면 여태 혼자일
리가 없잖겠소?
하, 하, 하! 심 형은 너무 겸손하지 마시오. 심 형은 여자에 대해 너무
잘 알아서 여태 아직도 혼자인 것이오. 기사 형씨, 내 말이 어떻소?
왕련화가 맞장구쳤다.
정말 옳은 말이오, 정말 절묘하군.
소패왕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아가씨는 바로 이 근처에 있으니 부르기만 하면 곧 도착하게 될
것이오. 늘어진 등나무 아래에서 미인을 감상한다. 이 얼마나 고상하고
멋진 일이오? 심 형께서는 고상한 사람이니 필시 거절은 하시지 않을
테지요?
정히 그렇다면 내 어찌 거절을 하겠소?
소패왕은 채찍을 한 번 휘둘렀다.
심 형께서는 잠시 기다려 주시오. 내 곧 돌아오리다.
그는 채찍을 휘두르면서 마치 말을 타는 자세로 뛰어갔다.
심랑은 그의 뒷모습이 멀어져가는 것을 보고는 약간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서야 나는 절대로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소. 이는 마치 바다의 물을 바가지로 측량할 수 없다는 것과 같소.
심 형께서는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됐소?
저 소패왕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직 덜 자란 아이 같지만 그의 속
마음에는 저렇듯 내용이 있었다는 것이오. 그는 단지 저런 행동을 취해서
남들로 하여금 그를 얕보게 하고 방비를 않게 하려는 것뿐이오.
왕련화는 되는 대로 대꾸했다.
응.
그리고 이제서야 안 일인데 바로 이 소패왕이 왕 형의 부하라는 것이오.
그것을 어떻게 알았소?
만약 왕 형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겠소? 그가 왕 형의 부하가 아니라면 또 어떻게 그가 다치는 것을
막았겠소?
과연 그럴까?
사실 방금 내가 진짜로 그를 치려 했겠소? 나는 단지 자세를 취해서
우리의 왕련화공자를 시험하려던 것이었지.
왕련화가 박장대소했다.
그대와 내가 하는 일은 모두가 진실 속에 가면이 있고 가면 속에 진실이
담겨 있으니 우리 서로 너무 집착하지 맙시다. 그러면 우리 모두 얼마나
즐겁게 지낼 수 있겠소?
소패왕은 다시 돌아오더니 말했다.
왔습니다...... 왔어요....... 하, 하!
두 명의 건장한 무인이 녹색비단으로 된 지붕에 자죽(紫竹)으로 된 휘장을
늘어뜨린 작은 가마를 들고는 이 신비하고 작은 세계로 들어왔다.
그들은 가마를 내리고는 즉시 몸을 돌려 나갔다.
자죽 휘장 속에서 희미하게 한 사람이 비쳤다. 아주 날씬한 몸매였다.
소패왕은 자죽 휘장을 잡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 사람이 만약 심 형의 눈에 안 든다면 아마 세상 모든 여자가 다 심 형
눈에 안 들겁니다.
그렇다면 나는 마땅히 인사를 해야겠군요.
그는 정말로 팔이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굽혀 인사를 했다.
소패왕은 곧 실소를 하며 말했다.
심 형께서는 너무 예의를 갖추는 것이 아닙니까?
천하 절색이라면 마땅히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소?
그는 낭랑하게 웃더니 계속 이어갔다.
영웅은 얻기 쉽지만 절세가인은 얻기 힘들다는 말도 못 들었소? 전해내려
오는 옛말을 들어보면 영웅은 강변의 모래알처럼 많지만 절세가인은 단지
셀 수 있을 정도라 하오. 만약 오늘 절세가인을 볼 수 있다면 내 어찌
예를 취하지 않겠소?
소패왕이 찬사를 했다.
심 형께서는 과연 세상 모든 여성의 지기(知己)임에 부끄럽지 않군요.
갑자기 자죽 휘장을 젖히자 가마 속에 단정히 앉아 있는 여인은 뜻밖에도
주칠칠이었다.
심랑은 이곳에서 주칠칠을 만나리라는 것을 정말이지 생각도 못했다.
주칠칠은 바로 왕 부인이 심랑을 위협하기 위해 인질로 잡아 두었었다. 왕
부인은 왜 그녀를 심랑의 곁으로 보내려했고 또 이곳으로 보냈단 말인가?
찰나지간에 심랑도 얼이 빠진 듯했다.
주칠칠은 머리를 높게 땋아 올렸고 화려한 금의(錦衣)를 입고 눈썹을 낮게
드리워 단정하면서도 순종하는 모습이었다. 비록 눈길은 심랑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표정은 호수처럼 평온했다.
그녀의 표정에서는 주칠칠 본래의 교만하고 버릇없고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또한 미치도록 사랑하고 미치도록
미워할 줄 아는 주칠칠의 모습도 역시 아니었다.
얼굴은 분명히 주칠칠이었다. 그 눈썹, 그 눈, 그 코, 입......!
그건 전혀 거짓없는 사실이었다.
비록 불에 타서 재가 된다 해도 심랑은 주칠칠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누가 그녀로 변장을 한다 해도 절대로 심랑을 속일 수는 없었다.
심랑은 한참 동안을 멍청히 있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오래간만이오. 잘 있었소?
이 한 마디의 가장 평범한 인삿말 속에는 사랑이 가득했다. 그는 주칠칠도
분명히 느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내심 그녀의 정열적인 반응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도 남자임에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주칠칠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변화도 일지 않았고 담담한 대답만
들려 왔다.
그런대로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공자님.
이 냉랭하고 담담한 그녀의 대답은 마치 채찍질 같았다.
심랑은 자신도 모르게 반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는 이제서야 사람이 냉담을 당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알았다. 그는
이제서야 자신도 역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이처럼 허전해 하고 슬퍼할 줄이야!
소패왕은 채찍을 휘두르며 눈을 깜빡이더니 다시 웃고 또 봤다.
왕련화의 눈에도 득의에 찬 웃음이 가득했다.
심랑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녀...... 그녀가 어떻게.......
왕련화가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저의 모친께서는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심 공자를 위협하는
것보다는 심 공자가 자발적으로 일하도록 하는 것이 더욱 났다는 생각을
하셨죠. 제 모친의 심 공자에 대한 이해심에 심 공자께서는 매우 감격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녀가 이 곳에 온.......
저의 모친께서는 더이상 주 아가씨를 인질로 심 공자를 위협할 수 없기에
특별히 그녀로 하여금 심 공자께 다시 인사를 드리게 하는 것입니다.
심랑의 표정이 바뀌었다.
새로 인사를?
저의 모친께서는 이미 저와 주 아가씨의 혼사를 허락하셨거든요.
심랑은 엉겁결에 반 걸음 뒤로 물러섰으나 두 눈은 계속 주칠칠을
바라보면서 더듬거렸다.
당신......당신.......
주칠칠이 담담하게 웃더니 조용히 말했다.
심 공자께서는 기쁘지 않으신가요?
난...... 난.......
그는 한참 동안 나무토막처럼 그곳에 서 있더니 갑자기 활짝 웃고는
포권을 취했다.
축하합니다.
주칠칠이 담담하게 답례했다.
심 공자, 감사합니다.
그녀가 섬섬옥수를 들어올리자 자죽 휘장이 '쏴악'하면서 내려졌다.
그녀의 냉담한 눈길과 아름다운 모습은 다시 볼 수 없게 됐다. 단지
몽롱한 몸매만이 보일 뿐이었다.
이제 심랑의 마음 속에 남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한 차례의 씁쓸한
추억과 더이상 매꿀 수 없는 커다란 허전함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더욱 당당하게 서 있었고 그 멋진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옆에서 보고 있는 소패왕은 연신 탄복하는 빛이 눈에 역력했다.
왕련화가 말했다.
난 심 공자께서 아직도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렇소, 내가 지금 묻고 싶은 말은 바로 주칠칠이 이렇게 왔다면
웅묘아는 어디 있느냐는 것이오?
웅묘아도 아마 심 공자께서 전혀 생각지도 못할 일을 하고 있을 것이오.
심랑은 단번에 그의 손목을 잡으며 다그쳤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지?
왕련화의 안면 근육이 한 차례 경련을 일으켰지만 그래도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은 짓지 않았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지금.......
바로 이때 사방에서 사람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심랑...... 심 공자, 어서 나오시오, 대왕께서 찾고 있소.
소리내어 부르는 이 소리는 계속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왕련화는 눈빛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이제 이 곳은 말을 나눌만한 장소가 아니니 당신은 어서 가 보시오. 내
곧 당신에게 연락을 취하겠소.
심랑은 그를 주시하면서 한 손가락, 한 손가락을 차례로 풀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갔다.
아주 신선한 토마토로 만든 한 잔의 진한 즙이 금잔에 담겨 있었다.
쾌락왕은 단숨에 다 마셨다.
그리고 그는 낭랑하게 웃으며 외쳤다.
주병(酒病)이야, 주병(酒病)이야, 옛부터 이 술 때문에 고생안한 영웅은
별로 없을 것이야.
심랑이 몸을 약간 굽혀 침상에 누운 쾌락왕을 보면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영웅이 술로 인한 병이 없다면 그것은 마치 미인이 근심 걱정이 없는
것처럼 뭔가 좀 빠진 듯한 느낌일 것입니다. 단지 이 술로 인한 병(病)에
대해서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을 따름이죠.
쾌락왕이 박장대소했다.
옛 역사학자들이 만약에 조금이라도 융통성이 있어서 옛 영웅들과
명장(名將)들의 주병에 얽힌 얘기들을 생생하게 묘사를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비록 한서(漢書)나 삼국지(三國志) 같은 역사
기록책일지라도 모두 재미있게 읽었을 거야.
조아만(曺阿兩)과 유황숙(劉皇叔)이 술을 따뜻하게 데우면서 영웅을
논했는데 결국에는 누가 먼저 술에 취해 쓰러졌을까? 반정(班定)이 멀리
종군을 떠날 때 혹시 세 말의 술을 마시지는 않았을까? 이 모든 것이
사람들이 매우 궁금해 하는 일들이 됐죠.
쾌락왕은 갑자기 심랑을 뚫어질 듯이 주시하더니 천천히 물었다.
그대가 지금 가장 궁금해 하는 일은 과연 뭘까?
심랑이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작은 요정'이 나뭇잎처럼 가벼운 경공으로 그 유령궁주의 소굴을
알아냈겠습니까?
쾌락왕이 눈쌀을 찌푸렸다.
그런 재미없는 일은 꺼내지도 말게.
혹시 그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아아, 그렇네. 그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네.
그는 갑자기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더니 큰소리를 질렀다.
그가 지금 돌아오지 않는다면 아마도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네.
심랑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내심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했다.
정말 대단한 유령궁주야,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너의 정체를 밝히고
말리라. 그리고 그날이 이제 멀지 않았다.
갑자기 쾌락왕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본왕은 오늘 아주 재미있는 일을 봤네.
대왕께서는 무슨 일이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쾌락왕은 긴 수염을 쓸면서 한껏 소리 높혀 웃었다.
오늘 천 리를 멀다 않고 나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네.
순간 심랑의 얼굴 표정이 바뀌며 물었다.
아......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사람 역시 천하의 영웅일세.
심랑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천하의 영웅이라구요?
그 사람 주량은 자네와 필적 할 뿐만 아니라 무공도 아마 자네 보다
못하진 않을 것이네. 독고상이 그와 일곱 장을 겨루고서 패했으니까.
심랑은 재차 얼굴 표정이 변하면서 물었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와 자네는 동일시대(同一時代)의 영웅이랄 수 있지. 본왕이 특별히
자네와 그를 만나게 하려던 참이네. 이제 천하의 영웅들이 전부 다 이곳에
모였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손뼉을 치며 말하던 쾌락왕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 사람은 지금 누구와 술을 마시고 있을 테니 자네가 가면 그 사람과
삼백 잔은 마실 수 있을 걸세.
그는 곧 심랑의 손을 잡고서는 꼬불꼬불한 회랑의 끝인 화청(花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늘어진 주렴 사이로 호탕하게 술을 마시며 간간이 지르는 환호성이
들려왔다.
연아는 마침 휘장을 반쯤 젖히고 살짝 안쪽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녀는
뒤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쾌락왕을 발견하자 급히 목을
움츠리며 한달음에 도망쳤다.
주렴 안쪽에서 여자의 교태로운 웃음과 말소리가 들려왔다.
방방이 당신에게 스무 잔을 올렸고 평아도 서른 잔을 올렸어요. 이제
제가 서른 잔을 올리려는데 왜 마시지 않는 거죠?
다른 여자가 역시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그래요, 당신이 마시지 않는다면 주령은 화를 내면서 당신의 혀를 깨물을
거예요.
이때 한 남자가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겨우 서른 잔이 뭐가 대단하냐? 자, 모두 대야에 쏟아 부어라, 내 단숨에
마신 후, 다시 서른 잔을 마시지.
그는 이미 너무 마셔서인지 혀꼬부라진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말소리가 심랑의 귀에 어찌나 친숙하게 들리는지! 심랑은 참지 못하고
급히 달려가 주렴을 젖혔다.
화청 안에는 술잔과 접시가 어지러이 놓여져 있었고 경사(輕紗)를 입은
오육 명의 소녀들이 거의 반은 풀어 헤치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채와
붉게 달아오른 얼굴, 실 같이 가늘게 뜬 눈들은 바로 그녀들이 완전히
취했다는 것을 알려줬다.
비록 취했지만 남들을 더욱 취하게 하는 이들 소녀들 틈에 한
대한(大漢)이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있었다. 그는 웃옷을 풀어 헤친 채
손에는 술이 든 금색 대야를 받쳐들고 호방하게 마셔댔다.
금색 대야의 뒤로 그의 두 가닥의 짙은 눈썹, 한 쌍의 취한 눈이 보였다.
헤쳐진 옷 사이로 그의 강철 같은 가슴이 드러났는데 바로 웅묘아가
아니고 그 누구였겠는가?
웅묘아! 웅묘아! 이제보니 너도 이곳에 왔구나.
일순간 심랑은 놀람인지 기쁨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웅묘야가 저렇게 한 대야의 술을 마셔대는 것으로 봐서 그는
여전히 소처럼 건강하다는 것이니 무엇보다도 기뻐할 일이었다.
심랑은 갑자기 눈앞이 희미해졌는데 아마도 눈물이 앞을 가린 듯했다.
그는 바로 문 옆에 서서 조용히 웅묘아를 바라봤다. 웅묘아는 그 한
대야의 술을 단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시더니 금색 대야를 높이
들고 호탕하게 웃었다.
자, 또 누가 내게 술을 올리겠느냐?
심랑이 미소 지으며 답했다.
나.
웅묘아는 눈동자를 돌려 심랑을 보더니 멍해졌다.
잠시 후, 갑자기 미친 듯이 환호하며 대야를 팽개치고는 튕기듯이
일어나며 크게 외쳤다.
심랑아! 심랑아! 너 아직도 죽지 않았구나? 환호 속에서 그는 심랑을 꼭
안았다. 그의 술 냄새와 땀 냄새가 심랑의 코를 찔렀다. 그러나 심랑은 이
냄새가 온세상 모든 여성들의 화장품 냄새보다 더 향기롭다고 느꼈다.
친구다! 이것이 바로 친구이다! 사랑스런 친구이다!
누구라도 이런 친구가 있다면 모든 시름을 잊을 수 있으리라!
한 차례의 벼락소리와 함께 비가 억수 같이 내렸다.
이는 메마른 변경지역에서는 보기 드믄 큰 비라서 모든 사람들의 기쁨이
배가했다.
심랑과 웅묘아는 서로 팔을 마주 잡고 이 폭우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머리는 다 젖었고 옷도 다 젖었다. 하지만 이런 큰 비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들의 끓어오르는 뜨거운 피를 식혀줄 수 있겠는가?
정원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단지 새파란 나뭇잎만이 폭우 속에서 다시
만난 이들 친구들을 위해 춤을 추고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이 서로 포옹하는 것을 본 순간 쾌락왕도 마음 속으로부터
기쁨이 우러나왔다. 그는 그들의 어깨를 치면서 말했다.
오랫만에 만난 친구와 하고 싶은 말들은 오랫만에 만난 애인보다 더 많을
걸세. 그대들은 마음껏 이야기를 나누게, 그 누구도 절대 방해하지 못하게
할 테니.
순간 심랑은 이 절대의 효웅도 역시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고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악독하고 냉혹하지 만은 않은 것 같았다.
웅묘아의 발걸음은 이미 흐트러졌고 호로병 속의 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호로병을 휘두르면서 만족한 웃음을 흘렸다.
친구야, 술...... 세상에 친구가 없고 술이 없다면 자살하는 사람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을 걸세. 특히 제일 먼저 자살한 사람은 바로
나니까.
심랑은 그를 부축하며 미소를 지었다.
웅묘아, 자치 또 취했나?
웅묘아가 눈을 부라렸다.
취했다고? 누가 취했다는 거야?
자네 지금은 절대로 취할 수 없네. 난 지금 자네에게 묻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고 하고픈 말도 너무 많으니까. 앞으로 자네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기회는 별로 없을 것이네.
폭풍우는 나뭇잎을 때리고 끊임없이 뇌성이 울려 그들의 말소리는 삼
척(三尺) 밖에서도 전혀 들을 수 없었다. 더구나 이 큰 폭우속의 정원에는
사방 삼십 장(三十丈) 내에 있는 사람이라도 알아 볼 수 없을 테니까.
만약 서로 밀담을 나누려 한다면 이곳은 가장 좋은 장소이며 가장 좋은
기회였다.
심랑이 말했다.
자네는 지금 취해서는 안 되고 이후에도 절대로 취해서는 안 되네. 취한
사람의 입은 비밀을 지킬 수 없게 되지. 자네가 만약에 취해서 비밀을
누설하게 된다면......
나 웅묘아가 비밀을 누설할 사람으로 보이나?
자네는 물론 아니지.
심랑은 웃음을 멈추더니 탄식을 했다.
그녀가 이번에 자네와 주칠칠을 풀어준 것은 정말이지 뜻밖의 일이었네.
이로 미루어 본다면 그녀의 계책을 운용하는 변화는 정말로 아무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이네.
자네가 말한 그녀란 혹시......
그야 물론 바로 그 왕......
그녀가 하는 일이 자네의 예상을 뛰어 넘는다고 하니 그녀도 과연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군.
심랑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물었다.
그녀가 정말로 주칠칠과 왕련화의 혼사를 정했나?
웅묘아는 한탄을 했다.
여인이여, 여인이여...... 정말로 사람도 아니야.
주칠칠이 정말로 기꺼이 승락을 했단 말인가?
세상에는 귀신만이 여인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네.
심랑은 또 다시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사실 이것은 주칠칠만 탓할 것도 아니네. 그녀는 내가 그 왕...... 왕
부인과 혼약을 맺은 것으로 알았으니 무슨 짓인들 다 할 것이네. 아,
그녀의 성격은 자네도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지?
웅묘아가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그녀도 자네에게 어떤 속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을까?
심랑이 쓴 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 세상에 그 누가 이 내 심정을 알아주겠나? 어떤 때는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다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냉담하게 대하게 되니 이것은 대체 어찌된 영문일까?
그것은 바로 자네가 도피를 하고 있기 때문이야. 자네는 어떠한
은원(恩怨)의 굴레에도 속박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 왜냐하면 자네의
어깨에는 이미 극히 무거운 짐이 지어져 있고 또 언제 갑자기 죽을지
모르니까!
심랑이 암담하게 말했다.
자네 말이 맞네.
자네가 정말로 그렇게 고통스럽게 느낀다면 그 짐을 내려놓으면 되지
않겠나?
어떨 때는 나도 정말로 그 짐을 내려놓고 싶네. 세상의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하필이면 나만이 그 무거운 짐을 지어야 하는지. 쾌락왕이 비록
나쁜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나를 박대하지 않았는데 내가 왜 꼭 그를
죽여야 할까? 내가 그렇게 해서 과연 뭣을 얻을 수 있는가? 또 누가 알아
주겠는가? 누가 나를 동정해 주겠는가?
봇물을 쏟아붓는 듯한 이 큰 비 속에서 이토록 좋은 친구가 곁에 있자
심랑은 자신도 모르게 여태껏 쌓였던 푸념과 생각을 털어놨다.
그는 지금까지 마음 속 깊이 간직한 채 전혀 내색하지 않았던 일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웅묘아는 그를 보지 않았고 단지 조용히 경청하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자 심랑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물론 이럴만한 이유는 있었지.
자네는 어떤 이유 때문에 이 모든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 짐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렇네.
그건 또 대체 어떤 이유인가?
그것은 바로 쾌락왕과 나는 절대로 양립(兩?)이 될 수 없다는 것이네.
비록 나도 왕씨(王氏) 모자(母子)들이 악마에 속하는 자들이란 것을 알고
있고 또한 그들도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나를 이용하려 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쾌락왕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그들과 끝까지 협조할 수 밖에 없네.
혹시 자네와 쾌락왕 사이에 개인적인 원한이 있단 말인가?
심랑의 눈 속에서는 불꽃이 튀겼다.
그렇다네.
혹시 백비비 때문인가?
자네는 내가 그녀를 위해서 그랬을 것 같나?
그렇다면 대체 뭣 때문이지?
심랑은 한참 동안 생각을 하더니 천천히 말했다.
그것은 내 마음 속 깊이 간직한 비밀이네, 아직 그것을 말할 수는 없어.
그럼 자네는 언제 그것을 말할 수 있겠나?
쾌락왕이 죽는 순간이지.
그는 자네보다 먼저 죽지는 않을 걸?
웅묘아는 말을 하면서 그의 손으로 이미 심랑의 일곱 개의 혈도를 눌렀고
마지막 한자를 말하면서 팔꿈치로 심랑을 쓰러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