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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어둠 속의 그림자
역대 황제가 그러했듯 만력제(萬歷帝)는 많은 희첩을 두었다. 특히 장기간 보위에 있으면서 만년에 들어서는 정사는 뒷전이고 황음(荒淫)에 빠지게 되었다.
군주가 정사를 돌보지 않으면 환관(宦官)이 득세하기 마련이다. 만력제의 색탐(色貪)에 편승하여 환관들은 앞다투어 미희(美姬)들을 천거하여 자신의 영달을 추구하기에 바빴다.
화영궁(華瑩宮)은 수많은 희첩들 중에서도 유독 만력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소귀비(素貴妃)의 처소다. 최근 들어 소귀비는 만력제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은연중 자금성 내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가 되고 있었다.
여기에 환관들이 그녀의 비위를 맞추어 설쳐대니 뜻 있는 이들은 황실의 앞날을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귀비는 인간요화로 타고난 요기와 색정을 지닌 여인이었다.
그녀가 거처하고 있는 화영궁은 호화의 극을 이룬 곳으로 온통 금은보화로 치장되어 있었다. 물론 이곳은 금남(禁男)의 성역으로 세상에서 그녀의 방에 들어갈 수 있는 남자는 만력제 외에는 없다.
숨 가쁜 신음소리가 귀비의 침전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원앙(鴛鴦)이 수놓인 화려한 금침 위에 두 쌍의 다리가 얽혀있다. 한 쌍의 다리는 유지처럼 매끄럽고 상아처럼 흰 여인의 발이다. 다른 한 쌍의 발은 근육이 발달한 사내의 발이었다.
만력제는 연로한 만큼 이미 근육이 쇠한 지 오래였다. 그런데 지금 화영궁의 침전에 서 여인의 발과 뒤엉킨 채 격렬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근육질 다리의 주인은 누구란 말인가?
"학... 더어......."
숨이 콱 막힐 정도로 희열에 젖은 여인의 음성이 방안의 뜨거운 공기를 대변해주고 있다.
남자는 등만 보였다. 등 역시 잘 발달된 근육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미끈하게 뻗은 미려한 체격이었다. 지금 사내의 몸 아래 깔린 여체는 뱀처럼 꿈틀대며 두 팔과 다리로 사내의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여인의 손이 허공을 허우적거리다 침상보를 잡아 뜯는다. 마치 세공품처럼 아름답고 귀여운 손이었다. 그 순간 사내의 육중한 몸이 힘차게 여체를 눌렀다.
"하악!"
여인의 작고 앙증스러운 발이 발가락을 잔뜩 오므리며 힘을 주었다. 동시에 여인은 허공에 원을 그리며 사내의 목을 세차게 껴안았다. 사내의 두 팔이 여인의 부러질 듯 가는 허리를 끌어당기자 여체는 마치 만월처럼 휘어져 올라왔다.
대롱대롱 사내의 손에 매달리듯 딸려 오른 여인은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진 듯 밀실의 적막을 요란한 고갯짓과 뜻 모를 외침으로 뒤흔들었다.
정사(情事), 뜨겁고 격렬한 정사였다. 그리고 쾌락에 몸부림치고 있는 여인은 바로 만력제가 그토록 총애하고 있다는 소귀비였다.
소귀비는 침상에 엎드려 있었다. 정사의 여운으로 인해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나신에서는 아직도 뜨거운 김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둥글고 풍만한 엉덩이의 선은 조금도 처지지 않았고, 매끄럽게 뻗어 내린 두 다리는 알맞은 살집과 탄력으로 인해 수면을 차고 오른 잉어처럼 싱싱해 보였다.
"......."
소귀비는 알몸으로 엎드린 채 창가에 서 있는 사내를 흑진주 같은 눈망울로 응시하고 있었다.
팔꿈치로 베개를 누르고 있는 그녀의 자태는 그지없이 요염해 보였다. 젖가슴은 반쯤 베개에 눌려 있었고, 긴 머리카락은 등을 가볍게 덮고 있었다.
사내는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입었다.
"만력제는 앞으로 일 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오."
기이한 음성이었다. 무력한 듯 하면서도 귓전에 들러붙는 듯했다.
소귀비는 고혹적인 입술을 벌리며 웃었다.
"후훗! 그 늙은 색광의 상태는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어요. 그 늙은이는 기름이 떨어진 등잔 심지와도 같아요."
사내는 나직이 웃었다.
"모든 것이 귀비마마 덕분이오. 더구나 태진왕의 제거는 아주 훌륭했소."
"흥! 또 그 듣기 싫은 귀비마마인가요?"
"하하하... 미안하오, 휘경(輝慶). 내 지난 오 년 간 황궁에 들어와 애쓴 당신의 노고를 잘 알고 있소. 의부께서도 그 점에 대해선 항상 염두에 두고 계시오."
소귀비는 몸을 돌려 옆으로 누웠다. 젖가슴이 출렁! 하고 물결쳤다. 두 다리를 묘하게 구부린 자세로 인해 그녀의 은밀한 부위는 그늘이 져있었으나 도리어 그런 자세는 사내의 욕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소귀비는 손가락 하나를 입술 사이에 넣어 옥 같은 치아로 잘근잘근 깨물며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휘경은 그런 의례적인 말보다는 당신의 관심이 더 필요해요."
등을 돌린 사내는 침묵했다.
소귀비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끌어당겨 허벅지 사이에 집어넣었다. 그녀의 그런 행동은 부처님이라도 가슴이 뛸 것만 같았다.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완벽하게 계산된 미태(媚態)의 극치였다.
그녀는 다리를 더욱 꼬며 콧소리로 말했다.
"흐응, 지난 일은 잊으세요, 담랑(覃郞). 이미 오래 전 이야기예요. 성주께서도 당신이 그 일을 알고 있는 것을 눈치 채시면 결코 이롭지 않을 거예요."
사내는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귀비의 말은 그의 가슴속 깊은 상처를 건드린 듯했다. 그의 손끝이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잊으세요, 담랑. 후취영님의 일은 담랑이 반드시 잊어야할 일이에요."
소귀비는 침상에서 교구를 일으켰다.
상체를 일으키자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젖가슴을 뒤덮었고, 곧바로 아랫배를 스치며 배꼽 아래까지 찰랑댔다. 그녀는 침상에서 내려와 발끝으로 소리 없이 걸어 사내에게 다가갔다.
뒤에서 사내의 상체를 껴안은 그녀는 향기로운 입김을 불어내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아세요? 휘경이 황궁에 들어온 것은 성주의 명령 때문이 아니에요. 당신 때문이에요. 담랑이 원했기 때문이라고요."
소귀비의 입술이 조금 이동하더니 사내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담랑... 당신은 마교의 소종사에요. 휘경 역시 마교십삼사(魔敎十三邪)의 일원이에요. 하지만 휘경은 무림이나 교중의 일보다는 당신과의 미래가 더욱 소중해요."
그 말에 사내의 몸이 경직되었다. 잠시 후 그는 웃음을 흘렸다.
"후후......."
이상하게도 힘이 빠진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휘경, 내게는 영원히 풀어야만 할 숙제가 있소. 십 수 년 전 그날... 그 저주의 밤에 벌어진 사건을 반드시 풀어야만 할......."
사내의 손가락이 서서히 모아졌다.
"......그리고 잃어버린 취영(翠影) 누이의 웃음을 되찾고 나의 절망을 되찾아야 할 숙제가 있소."
사내는 빙글 몸을 돌렸다.
사내의 얼굴에는 탈이 씌워져 있었다. 초승달 형상의 눈만 두 개가 뚫려 있는 허연 색의 탈이었다. 창 밖으로부터 흘러드는 월광을 받아 탈은 허옇게 빛나고 있었다.
탈에 뚫려 있는 초승달 모양의 눈이 웃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구멍 속의 눈동자가 힘없이 웃고 있었다.
사내야말로 담자개가 아닌가?
놀라운 사실은 그가 마교의 소종사(小宗師)라는 사실이었다. 아니,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당금 황제의 애첩인 소귀비와 간통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디 그 뿐이랴? 소귀비 역시 마교십삼사의 일원이라니.......
반쯤 열린 창문으로 스며든 달빛이 방안을 비스듬히 비추고 있다. 달빛 아래 소귀비가 하얀 나신을 다시 침상 위에 눕히고 있었다. 그 위에 담자개의 탈 쓴 머리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화영궁의 깊은 내실.
그곳에서는 다시 속살 떨리는 안타까운 신음과 교성이 달빛을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의(御醫) 백충량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문도의 음성은 차가웠다. 장천린은 차를 마시다 말고 고개를 들며 물었다.
"무슨 소린가, 문도?"
사문도는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소제가 조사한 바로 백충량의 무남독녀가 한 달 전 실종되었습니다. 이상한 일은 백충량은 그 일을 극비에 붙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장천린은 별반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래서?"
"백충량의 딸이 실종된 것은 누군가에 의해 납치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 자는 딸의 목숨 때문에 태진왕 전하의 사인을 거짓으로 말한 것이라고 봅니다."
장천린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확실한 정보인가?"
"틀림없습니다."
장천린은 찻잔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누가 백충량의 딸을 잡아갔단 말인가?'
그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다. 당금 황궁에서 벌어지는 일은 엉킨 실타래만큼이나 복잡했다. 더구나 관인의 신분이 아닌 이상 짧은 시간 동안에 실마리를 찾아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문도는 살기 띤 음성으로 말했다.
"그 자를 족쳐 볼까요?"
장천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된다. 백충량을 건드리면 역효과가 날 수 있다."
"무슨 뜻입니까?"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우를 범한다는 뜻이다. 적들에게 경각심만 불러 일으켜 더욱 일이 어렵게 될 수도 있다."
사문도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오면?"
"좀 더 신중히 대처해야 한다."
장천린은 찻잔을 들었다. 찻물은 반 잔 정도 남아 있었다. 그것은 용정차였다. 필시 품귀현상으로 인해 황실에서도 꽤 비싼 값으로 사들였으리라.
그는 용정차 건으로 인해 거금을 벌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엽천우 때문에 실마리를 찾아내기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 ... 다른 곳에서.......'
문득 그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일이 번쩍 떠올랐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보광사(普光寺)의 해우선사(海宇禪師)를 찾아가게.
'해우선사!'
장천린은 자신도 모르게 찻잔을 꽉 움켜쥐었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찻잔이 가루가 되어버렸다.
사문도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형님께서 저런 무서운 공력을 갖고 계시다니.......'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장천린을 바라보았다. 장천린은 그를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해우선사를 떠올리자 마치 어둠 속에서 한 가닥 빛을 발견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가자, 문도."
"네? 어디로 말입니까?"
"따라 오면 안다."
장천린은 앞장 서 걸어 나갔다.
사문도는 그가 이렇게 서두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가슴 가득 의문을 느꼈으나 묵묵히 뒤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보광사는 북경성 서북쪽 십 리 밖에 있는 유서 깊은 고찰(古刹)이다.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으나 정작 역사에 비해서는 그 규모가 크지 않았다.
그것은 보광사가 일반 불자들의 예불을 받지 않기 때문이었다.
보광사의 내력은 범상치가 않았다. 대대로 보광사의 주지는 선승(禪僧)으로 국한되었으며 불도(佛道)가 엄하고 심오하기로 이름나 있었다.
해우선사는 전대 보광사의 주지로 백 세가 넘은 노승이었다. 그는 한때 황실에 직접 불경을 강론한 적이 있었으나 근자 들어서는 워낙 연로하여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정오 무렵, 보광사 앞에 두 청년이 나타났다. 장천린과 사문도였다.
장천린은 곧바로 주지스님을 찾았다. 그의 기도가 범상치 않은 탓인지 지객승은 그를 주지스님에게 안내해 주었다. 그러나 장천린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미타불, 빈승은 공법(空法)이라 하오이다. 시주께서는 어인 일로 빈승을 찾으시는지요?"
보광사의 현 주지인 공법대사는 육순 가량 되어 보이는 평범한 승려였다. 장천린은 합장했다.
"실례이오나 소생은 해우선사를 만나러 왔습니다."
공법대사는 흠칫하는 듯하더니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미타불....... 사백(師伯)께서는 워낙 연로하신지라 외인을 접견하지 않으신지 오래 되셨습니다. 시주께서는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장천린은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소생이 찾아온 것은 중대한 일이 있어서입니다. 대사께서는 편리를 봐 주실 수 없으십니까?"
"아미타불....... 사백은 세상사는 물론 사내의 일에도 일체 관여치 않으십니다. 감히 그 분의 청정을 방해할 수 없으니 이해 바랍니다. 아미타불......."
공법대사는 지객승을 향해 말했다.
"공지(空智), 두 분 시주를 배웅해 드리게."
"알겠습니다. 사형."
공지대사는 장천린을 향해 손짓했다.
장천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명백한 축객령이였기 때문이다. 그는 할 수 없이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사문도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그의 뒤를 따랐다. 북경에 온 이래 그는 도무지 마땅치가 않았다. 성질대로 하자면 황궁이고 절간이고 다 뒤집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장천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쫓겨나다시피 보광사 문전으로 되돌아 나왔다. 사문도는 불만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형님."
장천린은 씁쓸하게 말했다.
"정식으로 안되면 강제로라도 해야지."
사문도는 어리둥절했다.
'기껏 쫓겨 나오고 이제 와서 강제라니?'
장천린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빙긋 웃으며 보광사의 담을 끼고 한참을 걷다가 멈추었다.
"문도."
"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게."
"알겠습니다. 그런데......?"
사문도는 입을 벌렸다. 장천린이 갑자기 신형을 솟구친 것이다. 장천린의 신법은 기쾌무비했다. 그저 눈앞에서 인영이 번뜩! 했다 싶었는데 순식간에 담장을 넘어 사라져버렸다.
담장 높이는 이장(二丈)이 넘었다. 보통 사람은 사다리를 대지 않고는 결코 한번에 넘을 수 없는 높이였다. 아니, 설사 무림인이라 해도 그리 만만한 높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장천린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담장을 넘어가 버렸다. 그가 구사한 신법은 강호에서도 좀처럼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이었다.
사문도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대단하다. 형님의 경신술이 엄청나게 발전했구나.'
그는 새삼 장천린에 대해 다시 인식한 기분이었다.
'형님은 대하면 대할수록 신비한 느낌을 갖게 하는 분이다. 대체 형님의 진정한 능력은 어느 정도일까?'
이때였다. 그의 귓전으로 한 가닥 낭랑한 웃음이 들려왔다.
"후후훗! 한 명은 몰래 담을 넘고 한 명은 망을 보다니. 한데 하필이면 절간을 털려 하다니 도둑치곤 치사한 좀도둑이로군."
사문도는 빙글 몸을 돌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한 명의 미소년이 서 있었다. 나이는 대략 십 팔구 세쯤 되었을까?
같은 남자가 봐도 반할 만큼 아름답게 생긴 미소년이었다.
사문도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미소년이군! 하지만 남자치곤 지나치게 염기(艶氣)가 짙어.'
한편 소년도 사문도를 보고 멈칫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의 기도가 보통이 아님을 느낀 듯.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이제 보니 보통 도둑이 아닌가 보군."
소년은 말하면서 건들건들 다가왔다. 사문도는 그의 건들거리는 보법(步法)을 보고 눈썹을 꿈틀했다.
'보통 보법이 아니다.'
미소년은 언제 꺼냈는지 수중에 한 자루의 은빛 소도(小刀)를 움켜쥔 채 만지작거렸다. 그의 꽃잎처럼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도둑 양반의 정체가 뭐지? 혼나기 전에 말하는 게 유리할 거야."
사문도는 히죽 웃었다.
"젊은 친구의 입심이 대단하군. 하지만 참견 않는 것이 그 매끈한 얼굴을 다치지 않는 길이다."
미소년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그러나 곧 만면에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흥, 건방진 주둥아리를 소유하셨군."
번... 쩍!
말과 공격이 선후를 가릴 짬도 없이 전개되었다. 소년의 손에 쥐어져 있던 소도가 찰나적으로 사라졌다. 사문도의 안색은 금세 딱딱하게 굳어졌다.
'빠르다.'
미소년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상대방의 손가락 사이에 자신이 던진 소도가 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단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는 내 비검(飛劍)이 잡히다니......!'
사문도는 소도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자네가 내 급소를 노리지 않았기에 참는 것이다, 친구."
쨍!
그는 소도를 손가락 끝으로 퉁겼다. 그러자 소도는 일직선으로 미소년을 향해 날아갔다.
"함부로 날뛰면 다친다는 것을 명심하게."
미소년은 왼손을 뻗어 소도를 받는 순간 돌연 오른 주먹으로 무섭게 공격했다.
슈슈슉!
단 한 번의 주먹질임에도 불구하고 찰나적으로 수십 개의 주먹이 환영을 일으키며 사문도의 요혈을 가격했다.
'헛! 대단하군!'
사문도는 소년이 그토록 빠르게 반응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는 황급히 피하며 수도(手刀)로 막았다.
파파팍!
수도가 권세를 흐트러뜨리며 미소년의 가슴을 쳤다.
펑!
"앗!"
둔탁한 음향과 함께 소년은 비명을 발하며 뒤로 주르륵 밀려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대소를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하하하! 이제 보니 조화성 염무의 개였구나! 추혼명옥수(追魂冥玉手)까지 익힌 걸 보니 조화성의 일급 고수로군!"
사문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추혼명옥수를 알아보다니.......'
그는 커다란 의혹을 느꼈다.
'한데 추혼명옥수가 염무의 무공이라고?'
추혼명옥수는 분명 사부로부터 배운 사문의 절학이었다. 그는 미소년이 잘못 판단했다고 느꼈으나 어쨌든 정확한 무공의 명칭을 안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놀랐다.
갑자기 소년의 음성이 추상같이 변했다.
"그냥 두지 않겠다. 조화성의 고수나리!"
소년은 열 손가락을 접었다 펼치더니 일제히 퉁겨냈다. 놀랍게도 그의 열 손가락이 두 배나 커지며 무시무시한 지풍(指風)을 쏘아냈다.
슈슈슈슉!
열 가닥 지풍이 뻗어오며 가공할 파공성을 냈다. 사문도는 경악성을 발했다.
"탁약지(拓 指)!"
그의 신형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는 누구보다도 탁약지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탁약지는 육백여 년 전 실전된 천하제일의 지공(指功)으로, 격중되기만 하면 바위는 물론 철판도 관통되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허공에 떠오른 사문도는 팔다리를 저으며 무려 일곱 번이나 회전했다. 그것은 탁약지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음!"
그는 침중한 신음을 터뜨렸다. 한쪽 어깨가 화끈했다. 열 가닥의 지풍 중 하나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어깨에 스쳐 맞은 것이다.
그는 어깨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꼈으나 창응박토(蒼鷹迫兎)의 신법으로 하강하며 손을 갈고리처럼 구부려 소년의 손목을 낚아채 갔다.
소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탁약지까지 피해내다니!'
찌익!
소년은 혼신의 힘을 다해 피했으나 왼쪽 어깨의 옷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찢겨 나갔다. 분홍빛의 어깨 피부가 드러났다. 상대의 손가락이 닿지도 않았는데 어깨의 피부가 금세 퍼렇게 변색되었다.
사문도는 맞은 편에 내려선 후 싸늘하게 말했다.
"내가 어린 친구를 너무 얕보았군."
소년은 경악을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사문도는 냉랭하게 반문했다.
"조화성의 개라고 자네가 말하지 않았는가?"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조화성에는 내가 아는 한 당신 같은 나이에 그토록 강한 무공을 지닌 고수는 없소.
사문도는 소년을 주시했다. 문득 기이한 생각이 든 것이다.
'조화성을 싫어하면서도 조화성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는 어린 친구라니. 기이한 면이 있군.'
사문도는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나는 사문도라고 한다."
소년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부르짖었다.
"생사집혼!"
그의 눈은 크게 떠졌다. 소년의 얼굴에는 기쁨의 빛이 차 올랐다. 그는 잔뜩 들뜬 음성으로 물었다.
"용대인을 아십니까?"
사문도는 어리둥절해졌다.
"자넨... 누군가?"
"으하하하핫! 나는 소진입니다. 부금진이란 이름을 못 들어 보셨습니까?"
미소년, 그는 바로 부금진이었다. 오랫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그가 교묘하게도 보광사에 나타난 것이다.
같은 시각.
보광사 경내는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고즈넉하기 그지없었다.
스슷.......
웬만큼 시력이 좋지 않으면 그저 새 한 마리가 지나갔다고 느낄 정도였다. 장천린은 경신술을 발휘하여 경내를 지면을 스치듯 날아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정도의 신비한 경신술이었다.
신형을 날리면서도 옷자락 날리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한 번 도약할 때마다 십여 장을 이동했다. 그의 모습은 안개처럼 흐려졌다가 모이고, 다시 흩어졌다.
이름하여 표홀무(飄忽霧).
사자천군(獅子天君) 목혈성(穆頁醒)이 남긴 태마경(太魔經)에 수록되어 있는 희대의 경신술이었다.
스스스!
한 채의 전각 앞에 안개가 모이며 장천린의 모습이 드러났다.
'저 곳이 불성각(佛聖閣). 해우선사가 있는 곳이다.'
장천린은 단청이 퇴색할 대로 퇴색해 있는 전각을 바라보았다. 그가 막 두 걸음 정도 움직였을 때였다.
"문 밖의 시주는 어찌 그리도 은밀히 움직이시는가?"
한 가닥 청아한 음성이 울려왔다. 음성은 분명 나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귀에는 마치 우레처럼 울려왔다.
장천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서운 청력이다. 낙엽조차 바스러지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걸었거늘....'
그는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숨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가볍게 헛기침하며 말했다.
"말학(末學) 용백군이 삼가 해우선사님을 뵈러 왔습니다."
"용백군?"
전각 안에서 가벼운 탄성이 들려왔다.
"소시주가 그럼 구룡장원의 용백군 시주요?"
장천린은 의외였다.
'날 알고 있구나.'
그는 한 가닥 희망을 느끼며 정중히 포권했다.
"그렇습니다. 노선사."
"흠. 들어오시오, 용시주."
장천린은 한숨을 쉬며 전각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전각 안은 겉과 달리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널따란 정실의 안쪽에 포단이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 중년승려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승려의 무릎 앞에는 작은 상(床)이 있었고, 상 위에는 두터운 불경이 펼쳐져 있었다.
장천린은 눈을 크게 떴다.
뜻밖이었다. 그가 예상한 모습이 아니었다.
중년승려는 청수한 용모에 전신에 은은한 서기가 흐르고 있었다. 물처럼 담담한 눈빛에서는 부드러운 기운이 흘러나와 은연중에 사람을 감화시키는 듯한 힘이 있었다.
장천린은 머뭇거렸다.
"허허, 빈승이 바로 해우요."
장천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해우선사는 이미 백 세가 넘은 고승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승려는 고작해야 사십대 밖에 안 되어 보였다.
'반로환동(返老還童)이라도 했단 말인가?'
사실이 그렇다면 해우선사야말로 무림고수, 그것도 절정고수가 아닌가?
장천린은 깊숙이 공수했다.
"소생 용백군이라 합니다."
해우선사는 해맑은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앉으시오, 용시주."
장천린은 사양하지 않고 맞은 편에 앉았다. 해우선사는 한동안 그를 찬찬히 바라보다 입을 열어 물었다.
"어인 일로 빈승을 찾으셨소?"
장천린은 그를 마주 보았다. 확실히 해우선사는 범승이 아니었다.
"선사께서는 태진왕 전하를 아십니까?"
해우선사의 안면이 차갑게 굳었다.
"아미타불... 용시주의 질문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몇 년 전 전하께서는 소생에게 당신의 신상에 변화가 생기면 노선사를 찾아뵈라는 분부를 내리신 적이 있습니다."
해우선사의 미간에 짙은 그늘이 어렸다. 그는 한동안 불경에 시선을 내리 깔더니 무거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안타까운 일이로다. 무너진 황실의 규범이 또 다시 무너져야 한다는 말인가......?
해우선사는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에는 고뇌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장천린은 내심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해우선사는 분명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그는 음성에 힘을 주어 말했다.
"전하께서는 분명 타살되었습니다."
해우선사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반드시 사인을 규명해야 합니다."
해우선사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는 오랫동안 장천린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차가웠다. 고요한 가운데 찌르는 듯한 기운이 찬 별빛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장천린은 점점 더 무거운 압박감을 느꼈다.
'실로 무서운 안광이구나.'
그때였다. 해우선사는 앉은 자세에서 갑자기 우수를 뻗어 공격했다.
장천린은 예측하지 못한 급공에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반응했다. 그는 태마경 상의 마공(魔功)을 일으켰으나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어 마공을 회수하고 반야대능력(般若大能力)의 부드러운 기운을 장심(掌心)을 통해 밀어냈다.
팍......!
두 사람의 양 손바닥이 마주쳤다. 아무런 폭음도 일지 않았고, 회오리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방안 공기가 가볍게 진동했을 뿐이었다.
장천린은 신음을 발했다.
"음!"
장심이 부딪친 순간 만 근의 압력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온몸이 바닥으로 박혀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엄청난 내공이다!'
그는 내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해우선사의 눈에 경이의 빛이 떠올랐다.
두 사람은 여전히 장심을 붙인 상태였다. 장천린의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혔다.
두 사람의 대치(對峙)는 겉보기에는 조금도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서로의 손바닥을 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형상은 직접 칼을 휘두르는 것보다 몇 십 배나 무서운 대결이었다. 아차 하면 상대의 내공에 의해 내장이 가루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해우선사는 공력을 서서히 거두었다. 장천린도 그의 의도를 알고 진기를 조금씩 거두어 들였다. 이윽고 두 사람의 손바닥이 떨어졌다.
해우선사는 놀람이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대단하오. 삼천불엽기(三千佛葉氣)를 대항할 수 있는 불공은 천하에서 다섯 가지를 넘지 못하오. 시주가 그 중에서도 상승의 공부인 대반야능력을 익혔을 줄은 몰랐소."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소생은 소림의 귀원선사와 개봉의 담운선사, 그리고 항주 천불동의 반가대선사 세 분께 사사 받았습니다."
해우선사는 눈을 크게 떴다.
"담운과 반가에게?"
"그렇습니다."
장천린은 차분하게 담운과 반가선사를 만나 인연을 맺게된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연후 이곳에 오게 된 사유를 이야기했다.
"담운선사께서도 특별히 해우선사님을 찾아뵈라고 했습니다. 소생에게 도움이 될 것이란 말씀도 하셨습니다."
"음."
해우선사는 신음을 흘렸다. 한동안 침음하던 그는 음성을 바꾸며 말했다.
"용시주, 방금 전 빈승이 무례를 범한 점 널리 이해해 주시오."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미타불...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해우선사는 문갑을 향해 걸어가더니 한 통의 빛바랜 서찰을 꺼내왔다.
"시주께서 직접 읽어보시오. 이것은 태진왕 전하께서 몇 년 전 빈승에게 보내신 서찰이외다."
장천린은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서찰을 읽어 내려갔다. 거기에는 낯익은 태진왕의 친필이 적혀 있었다.
<......하늘이 저에게 부여한 생은 오 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할 일은 태산 같은데 실로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인명(人命)이니 어찌 순응치 않으오리까? 하오나 그 짧은 생명조차 남아있음을 허락지 않는 무리들이 많사오니 저의 가슴은 시종 답답하기만 합니다. 암담한 심정에 노선사께 서찰을 올리니 만에 하나 저의 신상에 변화가 생기면 대신 후사(後事)를 처리해 주시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중략)...... 하루인들 마음놓고 살아갈 수 없는 생활이오나 소생은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습니다. 그러니 누구라도 함부로 경거망동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만일 저의 생명의 끈이 홀연히 끊어진다면 이는 곧 저와 가 장 가까운 측근에 있는 사인(四人) 중 한 명이 범인이라는 것을 대사께 알려 드리는 바입니다. 이런 불미한 서찰을 존경하옵는 대사께 전해 드리게 됨을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선사의 깊은 불심(佛心)을 통해 다시 한 번 황실과 국운(國運)에 번영이 깃들기를 기원하나이다.
-태진왕(太眞王) 익적(翊 ).>
장문(長文)의 서찰은 몇 번을 살펴봐도 태진왕이 친필로 쓴 것이었다.
장천린은 콧등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떨리는 음성을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
"전하의 측근 사인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해우선사는 기이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하께서 모든 것을 믿고 의지하는 측근이란 그리 흔치 않소."
"그 속에는 소생도 포함되어 있습니까?"
"물론이오."
장천린은 침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엽천우 대영반은?"
"역시 포함되어 있소."
"그럼 나머지 두 명은 누구입니까?"
해우선사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백연연 여시주와 전하의 생모이신 서태비(徐太妃) 마마이시오."
"아!"
장천린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그 분들 중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전하께 가까운 분들이오. 그러니 빈승인들 어찌 용시주를 가볍게 믿을 수 있겠소?"
장천린의 마음은 천근이나 된 양 무거워졌다. 한참 후에야 그는 질문을 던졌다.
"선사께서는 소생을 의심하십니까?"
해우선사는 입가에 기이한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장천린은 문득 냉소하며 말했다.
"어째서 전하께서 오인(五人)이라고 적어 두시지 않았는지 이상합니다."
해우선사의 안색이 변했다.
"빈승도 그 속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오?"
장천린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허허허헛......!"
해우선사는 한동안 너털웃음을 터뜨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미타불, 미안하오. 용시주. 빈승이 너무 과했던 것 같소이다."
그는 번쩍! 하고 두 눈에 신광을 발하더니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용시주, 내일 저녁에 다시 한 번 이곳에 들러 주시겠소? 시주께 전해드릴 것이 있소."
장천린이 뭐라고 묻기도 전에 해우선사는 다짐하듯 말했다.
"전하께서 빈승에게 맡겨두신 극히 중요한 물건이오."
해우선사는 탄식하며 덧붙였다.
"바로 황실의 비리와 부패를 기록한 책자요."
장천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태진궁에 깊이 감추어져 있어야할 물건이었다. 그 때문에 지금 태진궁이 철저히 봉쇄되어 있지 아니한가.
장천린은 비로소 태진왕의 뜻을 알았다. 동시에 해우선사가 그토록 신중해야 했던 이유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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