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1회 공수부대 逐次투입
그 해 5월 17일 자정을 기해 濟州道를 포함한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이 발령됨에 따라 육군의 중앙기동 예비대인 공수특전단이 光州에 출동, 배치된다. 공수부대의 光州투입은 `5.18 비극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한 해답을 준다.
계엄사령부는 5.17 조치 전후에 이미 공수부대를 차례로 光州에 투입시킬 계획을 수립했었다. 이른바 축차투입계획.
光州지역을 중심으로 배치된 공수특전단의 출동상황을 보면(88년 국회청문회에 제출된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18-80호) 光州출동후 각 대학을 점령한 제7공수여단에 뒤이어 18일 오후 3시에는 제11공수여단, 19일 오전 6시30분에는 제3공수여단(여단장.崔世昌준장)이 항공 또는 철도를 이용해 각각 `출차투입' 된다.
鄭雄 31사단장의 지난 7월 25일 12.12 및 5.18사건 24차 공판 증언을 들어보자.
-李鎭江변호사=5월 14일 오후 2시 전교사에서 열린 학생가두시위대책 합동회의에 申우식 7공수여단장도 참석했습니까?
▲鄭씨=그렇습니다.
-李변호사=7공수여단병력의 光州행은 결정돼 있었습니까?
▲鄭씨=5월 14일 이미 결정된 것으로 압니다. 충정작전계획에 따라서였습니다. 5월 15일 오전 10시께 全南大.朝鮮大에 2개대대 숙영지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李변호사=7공수부대 투입은 요청한 것 아닌가요?
▲鄭씨=공수부대 투입은 천재지변이나 부마사태처럼 반드시 시위현장 지휘관의 요청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가지 부마사태와 사북사태 두 번밖에 없었습니다. 병력을 요청한 적은 절대 없습니다
鄭雄 31사단장의 이같은 법정증언은 80년 光州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계엄사는 5.17조치 전인 15일 공수부대 2개 대대를 光州에 투입해 31사단장의 지휘하에 둔다고 31사단에 통보했었다. 이에 따라 鄭雄 사단장은 5월 17일 오후 2개 대대 병력 숙영을 위해 全大.朝大운동장에 각 12개씩의 천막을 미리 쳤다.
또 계엄사는 5.17계엄조치가 발효되기도 전인 17일 오후 全北 益山 金馬면에 주둔하고 있던 제7공수특전여단(여단장.申佑植준장) 제33.35대대에 光州이동을 명령했다. 이들은 79년 10월 18일 부마항쟁에 투입됐던 경력을 가진 부대였다.
金馬를 이날 밤 10시30분에 출발한 제7여단 33.35대대가 全南大에 도착한 것은 18일 새벽 1시10분께.
全.朝大에 주둔하고 있던 제33.35대대는 18일 오후 2시25분께 鄭雄 31사단장으로부터 "오후 4시부터 시위진압에 나서도록" 명령을 받는다.
그런데도 서울 동국대에 주둔하고 있던 제11여단(여단장.崔雄준장)에는 18일 새벽 光州로 내려가도록 예비명령이 내려져 있었고 이날 오후 3시쯤 鄭鎬溶 특전사령관은 11여단을 직접 찾아가 "지금 光州에 우리 7공수 애들이 고전하고 있다. 유언비어가 난무해 사태가 악화되고 있으니 임무수행을 잘하도록 하라"고 崔雄여단장에게 지시했다.
하지만 鄭사령관의 말과는 달리 光州에 파견된 7공수가 시내 시위진압에 나선 시각은 이날 오후 3시50분께(전투교육사령부 작전상황일지). 공수부대와 光州시위대가 충돌한 시각이 최소한 18일 오후 3시50분 이후인데도 鄭사령관은 光州 파견 계엄군이 소요진압작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증파를 지시한 것이다.
공수증파는 계속된다. 11공수가 시위진압에 나서기도 전인 19일 새벽 6시30분 3공수여단은 육군본부로부터 이동명령을 받는다. 즉 가장 먼저 光州에 투입된 7공수가 현지에서 시위진압에 나서기도 전에 11공수를, 11공수가 光州에 도착한 뒤 병력부족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3공수여단을 `축차투입'한 것이다.
金泳鎭의원은 지난 88년 12월 19일 국회청문회에서 이같은 상황을 두고 "11공수와 3공수의 순차적인 투입은 光州의 시위가 악화된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5.17쿠데타와 정치인의 구속으로 예상된 저항을 단숨에 무너뜨려 버리거나 혹은 일부러 저항을 불러 일으켜 `光州의 희생'을 발판삼아 권력을 거머쥐기 위해 사전음모된 철저한 계획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鄭鎬溶사령관의 光州관련설도 바로 이처럼 공수 축차투입의 전면에서 맹활약한 그의 행적 때문이다. 그는 5.17조치를 취하자고 주요지휘관회의에서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고 18일 3공수를 직접 찾아 光州파견을 지시했으며 光州 주둔지를 찾아 여단장들에게 상황보고를 듣고 설명을 한 장본인이다.
축차투입이 계획된 것이라면 신군부의 쿠데타인 12.12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군부 핵심세력은 국내 소요가 거의 없던 80년 2월 18일 소위 `忠正작전'을 실시할 것을 전군에 명한다.
李熺性 계엄사령관은 88년 12월 9일 국회청문회에서 鄭昌和의원(민정)의 "3월까지 충정훈련 완료배경이 뭔가"라는 질의에 "80년초는 정치권력이 미약한 시기였고 장기간의 유신체제하에서 국민들이 억압을 당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불평불만이 봄이 되면 분출될 시기로 보고, 그 이전에 폭동진압훈련을 완료해야될 것으로 판단했다"고 답변했다.
신군부는 내각의 비상계엄전국확대결의 이전부터 계엄군, 특히 공수부대의 사전출동조치를 내렸다. `특전사 전투상보'에 따르면 80년 5월 3일 육본작전명령 12-80호에 의거, 9공수여단을 수도군단에 배속시키고, 6일에도 11공수와 13공수여단을 특전사령부 및 1여단지역으로 이동시켰다. 5.18을 4일 앞둔 14일에는 육본에서 李계엄사령관과 全斗煥보안사령관, 盧泰愚수경사령관 등 실세들이 회동, 육본 작전명령 0-203호에 의거, 수경사에 4개 공수여단, 2군에 1개공수여단의 작전통제권을 이양준비하도록 지시했으며 15일에는 20사단(사단장.朴俊炳소장)을 중부전선에서 서울로 이동시키고 공수여단도 각 기지에서 서울로 옮기도록 하는 등 군사적 조치를 내렸다.
14일 오후 6시에는 전교사885수송중대에 金馬주둔 7공수 이동을 위한 2.51t트럭을 보내도록 하는 차량지원요청이 있었다(육본계엄상황일지), 2개대대 7백50명 병력이었다. 공수 光州투입이 최고 실제투입 1주일 이전에 세워졌음을 짐작케하는 대목.
5월 14일 光州에는 비가 내렸고 시국성토대회가 평화롭게 치러졌다. 그럼에도 계엄군의 光州투입 충정작전은 진행되고 있었다.
<특별취재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