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원님이 일본 메이지유신 150주년 기념 일본근대사여행을 준비하시기에 두서없이 몇자 적습니다. 어느 나라든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안에 배태된 인물들의 개성을 알게되면 여행이 아주 풍부해질 것입니다.
가깝고도 먼나라 일본에 대해서는 많이 안다고 하지만 실제 아는 수준은 많지 않습니다. 공부를 할려고 해도 워낙 변화무쌍한 지명과 수시로 바뀌는 인명, 복잡한 정치구조와 지방의 역할, 다른 나라와는 아주 생소한 천황(일왕)제와 막부정치 등 지역적인 특성과 짧은 중앙집권제로 혼란이 가중되죠.
일본의 역사를 고대부터 알 것은 없고 흔히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1185년 가마쿠라(鎌倉 현재의 가나가와현 가마쿠라 시, 도꾜 근처)에 설치한 막부부터 시작하는데 교토의 일왕은 허수아비이고 무사들에 의해 통치되는 구조이죠. 요리토모는 征夷大將軍에 임명됐는데 이때부터 줄여서 將軍(쇼군)이 일본 정치의 중심이 됩니다. 가마쿠라 막부는 1333년경 멸망하고 오랜 전국시대를 걸쳐 이른바 일본통일 영웅의 시대가 나옵니다.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통일의 첫 단서는 오다 노부나가, 그 뒤를 이어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 히데요시 사후 ‘인내의 정치’로 때를 기다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통일을 이루고 에도(지금의 東京)에 막부를 설치, 250여 년간 일본을 호령합니다.
일본 민중들 사이에 전해오는 이야기 "오다가 쌀을 찧어 도요토미가 반죽한 떡을 도쿠가와가 먹었다."라는 동요는 세 사람의 차례를 알려주며 순서를 가리킵니다. 세 사람의 개성도 제각각입니다.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죽여버린다 => 오다 노부나가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매를 들어 때린다 => 토요토미 히데요시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린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사카의 명물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은 오사카죠 덴슈카쿠(천수각). 엄청난 위용 앞에서 16세기 한중일 삼국의 운명의 갈림을 생각하는 것은 씁쓸 (낙화 자료사진)
오다 노부나가는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로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이기도 하죠.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미천한 신하이지만 워낙 명민한 사람, 추운 겨울날, 오다 노부나가의 신발을 품에 안고 있다가 오다 노부나가가 신발을 신으려 하자 따뜻한 신발을 몸소 신겨 주어 오다의 눈에 들어 승승장구한 사람입니다. 토요토미가 한겨울 신발을 품에 안고 주군을 기다리는 충성심, (삼성 비서실에서 이를 채용한 다음 대기업 회장들에게 전파된 의전1호가 됐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나고야 동쪽 지역 성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강대국 사이에 끼어 어려서부터 인질 유배생활을 해 생존력이 뛰어난 사람, 무엇보다 인내력이 강한 사람,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됐죠.
일본의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통일시대에 오다 노부나가부터 토요토미 히데요시,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권력장악은 순탄치 않았고 그야말로 경천동지, 엄청난 반전(오다 노부나가는 “적은 혼노지 안에 있다”라는 말과 함께 측근에게 기습 살해 당합니다). 배신과 야합(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서군을 분열시키고 회유, 배신하게 해서 하루만에 승기를 잡음), 자신의 일족을 살리기 위해 장남까지 할복을 명한 이에야스처럼 비정과 추악함이 점철된 과정입니다. 이가운데 일본통일이라지만 특색이 있습니다. 모든 개인은 통일된 일본이 아닌 통일을 이룬 장군에게 소속된다는 것이죠. 일본 전국시대를 보면 지역마다 하나의 왕국 아닌 ‘國(꾸니)’ 체제입니다. 각자 자신의 지역을 근거로 이웃지역을 정복하고 영토를 넓히며 세력을 키우는 과정, 이 과정에서 혈연과 지연조직은 촤상위 가치입니다.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사무라이의 의지이자 미덕이며 당연한 것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절 47인 사무라이 복수극 얘기, 주신쿠라(忠臣藏)로 알려진 이 47인의 아코 로시(赤穗 浪士, 현재 효고현 아코시) 즉 아코 의사(赤穗義土)의 목숨을 건 복수사건은 일본인들의 의식 저변을 이루는, 목숨을 걸고 지켜낸 진정한 의리의 표상으로 오늘날에도 널리 회자 되고 있습니다. 이때는 도쿠가와 막부에 의한 천하통일이 이루어졌어도 개인의 소속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주군과 주군의 영지였지 천하=국가의 개념은 없다는 것이죠. 일본의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남긴 유산 중의 하나는 이른바 일본인들이 겉과 속이 다르다는 혼네와 다테마에(本音と建前)를 들 수 있습니다. 혼네와 다테마에 두가지 단어를 합친 단어로, 개인의 본심과 사회적인 규범에 의거한 의견을 나타내는 말이며, 흔히 본심과 배려, 속마음과 겉마음으로 불리는데 에도 막부시대 마을공동체규범의 하나로 나옵니다.
일본의 한가운데 제3의 도시가 나고야(名古屋)인데 아이치(愛知)현 소속이죠. 나고야에서는 전국시대 3걸 오다, 토요토미, 도쿠가와가 모두 나고야 출신이라고 자랑하는데 오다와 도쿠가와는 나고야가 맞는데 토요토미는 나고야 보다는 지금의 오사카에 속한 계(堺)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무장이죠. 오사카에서는 여전히 토요토미에 대한 인기가 높습니다. 아울러 한국의 영호남 못지않은 간토우(關東)와 간사이(關西)의 대립도 바로 토요토미와 도쿠가와의 전쟁(1600년 기후현 세키가하라 전투) 때문이기도 하죠. 이 전쟁으로 관동지역의 관서지역에 대한 패권이 확립된 것이죠. 후술하는 메이지유신은 어쩌면 세키가하라 전쟁에 대한 복수라는 측면도 있습니다.
*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荘八, 1907년 1월 11일 - 1978년 9월 30일)는 일본의 소설가이며 본명은 후지노 쇼지(藤野庄蔵)다. 시대 소설을 중심으로 썼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주인공으로 하는 장편 대하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한국판 대망, 지금 탄핵당한 박근혜가 감옥에서 읽는다는 책입니다]를 썼다.
* 한국의 재벌 회장 사무실에 가장 많이 걸린 내용이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유훈입니다. 한번 읽어볼 만 합니다. 풍운의 전국시대 최후의 승자가 후손에게 알려준 승리의 비결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 절대 서두르지 말아라.
부자유가 항상 따른다고 생각하면 부족함이 없고, 마음 속에 욕심이 생기면 가난했던 때를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의 기본이며, 분노는 적으로 생각하라.
이길 것만 알고, 질 것을 모르면 해害가 그 몸에 미친다.
자신을 책망하고 남을 책망하지 말라.
미치지 못함은 지나침보다 낫다.‘
전국시대를 마치는 3걸의 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일본 역사에 큰 비중을 차지한 다케다 신겐(1521-1573 武田信玄) 입니다. 신겐은 전쟁을 위해 태어난 사나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전술과 전투 양쪽에서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고, 각지에 첩자를 풀어 정보를 수집하고 닌자로 불리는 암살단을 조직할 정도로 치밀한 사람입니다. 신겐은 자신의 정예군을 《손자병법》에 기록된 '풍림화산(風林火山)'을 군기로 사용했는데, 이는 그의 군대 운용 방식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빠르기가 바람과 같고, 고요하기는 숲과 같다.(其疾如風 其徐如林)
치고 앗을 때는 불같이 하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을 때는 산처럼 한다.(侵掠如火 不動如山)
숨을 때는 어둠 속에 잠긴 듯이, 움직일 때는 벼락치듯 적에게 손쓸 기회를 주지 않아야 한다.(難知如陰 動如雷震)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신겐을 '가이의 호랑이'라고 불렀으며,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을 격파하고 패권을 차지할 장군으로 여겼는데 전장터에서 지병으로 사망합니다. 그는 죽으면서 자신과 유사한 사람을 ‘影武者(가케무샤)’로 내세워 3년 동안 활동하게 해서 라이벌의 침략을 막아냈는데 이를 시기하고 공명심에 불탄 동생이 밝힘으로써 이에야스 가문에 의해 멸망합니다. 만약 다케다 신겐이 더 살았으면 일본 전국시대의 판도는 달라졌을 거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일본 전국시대 최고 무장의 하나인 다케다 신겐의 '카게무샤'를 주제로 만든 쿠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작품
* 다케다 신겐 사후 그의 대역을 전쟁터에 내세운 이야기는 1980년 쿠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影武者(가케무샤)’에 잘 나타닙니다. 이 영화는 구성과 엄청난 전쟁씬을 풍림화산 깃발로만 묘사, 스케일 크게 묘사되어 서구 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죠. 아울러 좀도둑에 불과한 사나이가 다케다 신겐을 흉내내면서 점차 다케다 신겐으로 빙의하는 내면의 심리변화를 잘 포착, 1980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습니다. 쿠로자와 감독을 존경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한동안 ‘가케무샤’를 영화의 교범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을 물리치고 오사카성에서 천하통일을 선포하고 에도(동경)에 막부를 세우고 250여 년 평화시기가 도래했는데 봉건체제의 절정인 이 시기 내부보다는 외부의 세력이 에도막부 체제를 뒤흔듭니다. 사실 에도막부는 동경 일대에 있었고, 전통적으로 일본의 서양문물 창구는 큐슈쪽 나카사키나 하카다쪽이었는데 에도막부는 서양과의 쇄국정책을 취하고 있었죠. 바로 이때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이 일본에 나타난 것이죠. 이로 인해 에도막부는 굴욕적인 개국을 하게 되자 에도막부에 반감을 갖고 있던 쵸우슈우(長州, 지금의 시모노세키)번과 사쓰마(薩摩, 가고시마 일대)번, 히젠(肥前 사가- 나가사키현), 시코쿠(四國) 섬의 도사(土佐 고치현)이 주축이 되어 반막부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일본지도를 보게 되면 확연히 드러나지만 에도막부가 있는 동경일대 정반대 지역, 큐슈와 시모노세키, 시코쿠 등 일본 서부 변방지역이 중심이 된 것인데, 이는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막부를 세우면서 충성파는 에도 근처에 배치하고 말을 안듣는 저항세력은 변방에 위치한 지정학적 특성도 반영한 것입니다.
반막부 4개의 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또 다른 특색이 보입니다. 쵸슈, 사쓰마, 히젠 등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등 서구와 물자교역, 천주교 수입 등 문화교류를 나눈 지역이고 서양에 대한 인식도 높은 곳입니다. 반대로 에도막부는 오랫동안 외국과 접촉하지 않은 지역이죠. 그러다 미국 페리제독의 흑선이 나타나 국서교환 및 개방조약을 맺자 4개의 번은 ‘존왕양이-왕실을 받들고 서양 오랑캐를 물리친다’를 구실로 반막부운동을 펼치지만 준비미흡과 사전연락 부재로 막부군에 진압당합니다. 이때 반막부운동을 이끌고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인물들이 나타나는데 사쓰마 번의 지도자 사이고 다카모리( 西鄕隆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 利通)와 초슈의 지도자 기도 다카요시( 木戸 孝允) 등 유신삼걸(維新三傑)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이른바 가장 선진지역이자 인재가 많은 사쓰마와 초슈의 삿죠동맹(薩長同盟)이 구체화 됩니다. 그래도 최후에 막부타도, 왕정복고를 가능케 한 메이지유신의 총설계자는 30초반의 도사 번 출신의 사무라이 사카모도 료마(板本龍馬)이죠.
2000년대 들어 일본 아사히신문이 1천년간 일본의 가장 존경할 인물이 누구냐는 설문조사에 1위에 등극,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사카모토 료마는 도사번 하급무사 출신이지만 일본통일, 부국강병을 모토로 복잡다단한 반막부세력을 통합시켜 막부타도, 메이지유신 일본근대화 성공의 총설계자로 등장합니다. 여기에는 일본의 대표적인 역사소설가 시바 료따로의 ‘료마가 간다’와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荘八)의 ‘사카모토 료마’ 전기, 그리고 2010년 NHK에서 방영한 ‘료마전’의 엄청난 인기 등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죠. 약관 20대에 닳고 달은 반막부운동의 지도자들을 하나로 묶어 강력한 힘으로 260년간 이어진 이에야스 가문의 쇼군체제를 종식한 인물, 꽃이 더 피우기도 전 33세의 나이에 암살당해 역사의 이슬로 사라진, 그래서 더 안타깝고 그리운 인물로 살아남은 료마, 남큐슈 올레길 기리시마 묘켄 코스에는 료마가 신혼여행와서 부인과 즐겼다는 온천까지 있습니다. 그만큼 료마의 인기를 반영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남큐슈 기리시마 묘겐 코스 온천에 있는 '료마 하니문로드' 팻말. 일본에서는 사카모토 료마가 맨처음 신혼여행을 떠난 인물이라며 남큐슈 기리시마 온천에 기념 팻말까지... 너덜길님 사진
시카모토 료마가 메이지유신의 총설계자라면 요시다 쇼인(1830-1859 吉田松陰)은 메이지유신의 건설자라 불립니다. 쵸슈번 출신으로 존왕파 사상가이자 교육자로 "천하는 천황(일왕)이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라며 존왕양이 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죠. 특히 정한론과 대동아공영론을 주장해 일본의 제국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송하촌숙(松下村塾, 쇼카손주쿠)을 세워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등 조선을 침탈한 주역들을 길러 냈습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취임식을 앞두고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요시다 쇼인을 꼽았는데, 한국인에게 그는 일본 우익 세력의 원조로 여겨지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쇼인은 반막부파에서 손꼽히는 존왕파였지만 페리의 함선을 보고 친구에게 '배도 대포도 적수가 안 된다'라는 편지를 쓰며, 서구의 신문물과 정치 체제를 직접 체험하지 못하면 구미 열강에 대항할 수 없다고 생각, 개방파로 전향합니다. 그리고 막부에 서양 군사학과 무기를 도입할 것과 그를 위해 인재들을 해외에 파견해야 한다는 요지의 정책을 제안, 그 유명한 송하촌숙(松下村塾)을 세워 메이지시대 주역들을 길러내죠. 사카모토 료마가 33살에 암살 당했다면 쇼인은 1858년 제1차 반막부운동이 진압되면서 29살 나이로 처형됩니다. 그래도 그의 유산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오늘날 아베 신조에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막부운동이 성공하고 일왕이 정치의 전면에 서는 왕정복고가 시작, 이것이 바로 1867년 메이지유신의 성공으로 나타납니다. 메이지유신이 성공하자 봉건체제는 허물어지고 근대적인 체제로의 전환이 급속도로 이뤄지는데 이는 근대적 국가체제로 편입될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코스이죠. 요시다 쇼인의 경우처럼 반막부운동은 막부의 굴욕적인 개방정책을 비판하고 ‘존왕양이’를 기치로 내걸었지만 자신들이 정권을 잡자 곧바로 개방정책으로 나갑니다. 상공업의 장려, 신분제 혁파, 근대적 사법체계, 무엇보다 일본 사회의 근간인 사무라이의 특권배제로 일본 사회는 혼란이 가중되고 ‘위대한 중재자’ 사카모토 료마가 암살된 이후 반막부운동 진영 내 갈등으로 사쓰마번의 사이고 타카모리는 내부의 불만을 토요토미 히데요시처럼 외부로 돌리기 위해 ‘정한론’을 일으키지만, 다른 번, 특히 쵸슈번의 반대와 견제로 시기상조라는 의견에 부닥치자 독자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내부분열을 초래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이난(西南)전쟁’으로 전쟁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이고 타카모리는 할복자살로 마감합니다. 이 일로 2차세계대전까지 육군은 쵸슈번이, 해군은 사쓰마번이 책임지고 역대 수상은 쵸슈번 출신들이 도맡아 맡게 됩니다.
메이지유신은 기존 권력인 막부를 타도하고 4개의 지방세력이 연합, 왕정을 세우고 근대적 통치행위로 짧은 시간 근대화에 성공, ‘탈아시아’를 외치며 이웃나라인 조선과 만주침략, 중국까지 진출하면서 1차 2차세계대전까지 일으키게 한 동력이었습니다. 근대국가로 전체 국민이 아닌 일왕 통치하의 신민국가로 중앙집권적인 통일국가를 지향했지만 권력 내부는 소수의 권력집단(삿죠동맹이 기본)과 침략국가의 특성답게 군수업 중심 4대 재벌(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야스다)과 결탁한 구조로, 무한팽창야욕의 구조로 긑내 자신 뿐 아니라 일본과 세계에 재앙을 불러 일으킨 정치개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메이지유신은 일본 전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정치혼란과 사회문화의 결과물이지 그 자체로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신시대를 맞아 구체제를 개혁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려는 고뇌와 창조력이 결여된 위로부터의 정치개혁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죠.
2003년 에드워드 즈윅 감독 탐 크루즈와 와타나베 켄이 주연한 '라스트 사무라이'. 세이난 전쟁을 일으킨 사이고 타카모리를 모델로 만든 영화. 사무라이를 지나치게 미화 논란도 있었지만, 사이고 타카모리를 미화해서 한국인들에게 불편한 시선을 줬던 영화
* 사이고 타카모리의 ‘정한론’과 이로인해 일으킨 ‘서남의 전역’을 모티브로 만든 것이 2003년 에드워드 즈익 감독의 ‘라스트 사무라이’라는 영화입니다. 톰 크루즈와 와타나베 칸이 주연한 이 영화는 사무라이 세계, 메이지유신 전후의 상황을 사이고 타카모리를 빗대 만든 것인데, 서양인의 눈으로 본 사무라이 세계를 너무 미화했다는 것이,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편하기도 하지만 유신삼걸이라 불리는 사이고 타카모리를 빠르게 이해할 수 잇는 영화이기도 하죠.
* 메이지유신의 총설계자인 사카모토 료마에 대해서는 앞서 ‘도쿠카와 이에야스’ 전기물인 ‘대망’을 쓴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荘八)의 3권짜리 ‘사카모토 료마’가 있습니다. 이 책만 다 읽어도 메이지유신의 80%는 이해한다고 볼 수 있죠.
* 시바 료타로(일본어: 司馬 遼太郎, 1923년 8월 7일~1996년 2월 12일)은 일본의 소설가이며 본명은 후쿠다 데이이치(福田 定一)인데 이 사람의 ‘료마가 간다’는 일본 최고 베스트셀러 중 하나입니다.
* 같이 추천할 책에는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을 추천합니다. 2차세계대전 중 미국인들은 일본인들의 카미카제(자살특공대) 등을 이해하지 못해 당시 콜럼비아대 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에게 일본 사회를 알 수 있는 연구를 의뢰, 이 연구물이 ‘국화와 칼’입니다. 재미난 것은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어도 모르고 일본을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지만 미국내 일본인들과의 인터뷰, 영문으로된 연구물로 이같은 분석서를 만들었다는 것이 당시 미국학계의 두터운 연구열과 자료축적에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것이죠.
*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지만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도 일본 사람들의 심리, 내면상태와 기저심리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기도 합니다.
* 메이지유신을 둘러싼 반막부파와 막부파 간의 대결, 어찌보면 일본판 ‘삼국지’나 ‘수호지’ 같은 다양한 인물들의 활약상을 보게 됩니다.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지성인 중 한명인 동경대 정치과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교수는 “일본의 숱한 근현대 인물중 국가와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은 없고 자신이 속한 집단 인맥을 위해 노력한 인물들만 있다”고 갈파합니다. 국가라는 단위보다 자신이 속한 집단과 인맥속에 부유한 일본인들의 특성을 한마디로 정의한 명언이죠.
1860년대, 같은 처지의 조선과 일본을 생각합니다. 똑같은 조건인데 일본은 메이지유신에 성공하고 부국강병의 길을 걷고, 조선은 지리멸렬하여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후 일본은 패전국으로 또 다시 경제부흥을 이루지만 세계에 존경받지 못한 경제동물로 이류취급받고, 조선은 분단과 전쟁의 상흔속에 민주화 경제화 세계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라고 세계에 존중받는 나라로 변했습니다.
150년 전, 한국과 일본에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 동북아시아와 세계, 국가와 인민들의 노력의 흔적은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같이 조망될 때 더욱 풍부해지리라 믿습니다.
향원님의 일본근대역사기행, 메이지유신의 발자취를 찾아서 여정이 풍성하시길 기원합니다.
* 두서없이 정리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 더 좋은 정보를 댓글로 달아주세요~
* 본문에 나오는 일본에 대한 평가는 극히 주관적인 개인적 판단이니 참고만 하시길...
첫댓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가깝고도 먼나라 일본.
생각해 보니 일본에 대해 아는것이 전혀 없더라구요.
올려주신 글로나마 일본의 근대사를 어느정도 알 수 있었습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근대사를 시대별로 귀에 쏙쏙 들어오게 영화와 함께 재미나게 풀어주셨네요.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풀수 있다는건 그만큼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가능하겠지요.
많은 분들이 낙화님 글을 봤으면 합니다.
귀한 자료 잘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낙화님의 글로 공부하면 2등급은 나올것같습니다. 설민석 저리가라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