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朱)씨는 인류학상 북방 몽고 계통이고 언어학상으로는 알타이 계통입니다. 그리고 역사학상으로 동이족(東痍族)인데 이 동이족 한갈래는 만주대륙을 거쳐 직접 한반도에 일족이 있고, 또 한갈래는 中國 깊숙이 들어 갔다가 황해를 거쳐 한반도남쪽 해안지대로 들어 왔는데 우리 朱씨가 이에 해당 됩니다.
주씨의 연원은 기원전 약 2200년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의 한분이셨던 전욱고양/전욱제(顓頊帝)의 후예 조협(曹俠)이 주(周)나라 무왕(武王)으로부터 주(邾)라는 작호를 받아 기원전 1000연경 주(邾)나라를 세워 약 600년간 다스려오다 , 춘추전국시대인 기원전 403년에 초(楚)나라에 병합될 때,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면서 주국(邾國)의 주자(邾字)의 고을 읍 변을 떼어 내고 주씨(朱氏) 성으로 부르기로 한 것에서 기원된다.
수, 당나라 때 주양약(朱良約)의 후예로서 명 재상이었던 주경(朱敬)은 두 손자가 있었는데, 장손 주근(朱瑾)은 당나라 마보군(馬步軍) 총거(總拒)로 영정후(英亭候)로 봉임되어 중국의 회계주씨(洄溪朱氏)의 시조가 되었고, 차손 주괴(朱壞)는 당나라 천우(天佑) 때 다원제치(茶院制置)로서 신안주씨의 원시조가 되었다.
주괴는 주자의 8대조로서 서기 888년에 무원(婺源)지방의 방위를 맡아 이곳에 정착 후손이 번성함으로서 무원의 옛 이름인 신안(新安)을 본관으로 하였다.
특히 신안주(朱)씨는 남송의 대유학자 주자(朱子)의 후예로서 명문가의 자존심을 긍지로 삼고 있다.
몽고족의 나라 원이 문약으로 흐른 남송을 침공하여 중원을 통일하자, 주자의 증손 청계공(淸溪公) 잠(潛)은 오랑캐 국의 신하가 될 수는 없다며, 1224년 당시 대몽항전의 기치를 높이 올리고 있던 기개의 나라 고려로 망명함으로서 우리나라 신안주씨의 시조가 되었다.
시조 잠은 망명할 당시 남송의 한림원태학사로서 아들 여경(餘慶)과 섭공제(葉公濟) 등 칠학사(七學士)를 동반 전라도 금성(지금의 나주)에 선착하여 이들이 고려에 성리학을 전수하였다.
원이 고려를 복속시킨 후 고려에 잠의 압송을 요구해 오자, 잠은 이름을 적덕(積德)이라 고치고 능성(지금의 전라도 화순군 능주면)에 숨어 살았다.
여경의 아들 주자의 6세손 문절공(文節公) 열(悅)은 고려 고종 때 전남 능주에서 출생하였고, 34세에 문과에 올라 장원급제하여 충청 경상 전라도의 안렴사를 역임했는데, 지도첨의부사(知都僉議府事)로서 수차 원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당시 고려에 금, 말, 군선 등의 과도한 조공물 요구를 철회토록하여 조정과 백성들로부터 <구국재상救國宰相>이란 칭송을 받았으며, 고려사 열전에 기록되고 있다.
문절공(文節公) 열(悅)은 세 아들 인장(印長) 인원(印遠) 인환(印還)을 두었는데, 이들 후손들이 각각 능성 웅천 전주파로 갈리어 나갔다.
그런데 조선조가 개국되면서 전주파 인환외에 예부상서였던 인장과 병부상서였던 인원이 당초에 새왕조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였고, 또한 왕자의 난의 수난으로 신안주씨는 관직에서 멀어지게 되었다가 성종이후에나 과거의 길이 열리었지만 등관해봐야 미관말직에 그쳤다.
조선조에 주씨문중에서 문과급제자는 모두 31명이며, 그 중 전주파가 22명을 차지하는데, 숙종, 영조 때에 3대관삼장(三代貫三壯)으로 불리우는 전주파의 22대 손 주정 형만 중둔등 3대가 초시 복시 전시에서 장원을 차지했으나, 조정에서 등용을 하지 않자 이후 주씨문중에서는 과거를 기피하는 현상(포과령 抛科令)도 나타났다.
울진 입향조는 주자의 6세손인 열의 둘째 아들 문간공(文簡公) 인원의 10세 손인 전적공(典籍公) 선림(善林) 인데, 1504년경 울진읍 구만동으로 들어왔다.
전적공은 경주에서 출생 증광시에 등과하여 일본사신을 다녀오고, 진보 언양 정의 등지를 덕치선정하여 현대부(賢大夫)라 칭송하는 민요가 전해져오고 있으며, 1504년 (연산군10년) 에 문과에 올라 봉렬대부(奉列大夫) 전적감찰(典籍監察)을 역임했는데, 조선명인록에 등재되어 있다..
울진 입향조 전적공의 중자(仲子) 의(懿)는 조선 성종 때 약관 18세로 중사마시와 중종 1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정자(正字)을 시작으로 64세에 강릉 부사로까지 임명받았으나 출조를 사양하자, 중종이 안와안치(安臥安治)의 하명과 삼의죽재백세청풍(三宜竹齋百歲淸風)이라는 8자 어필을 보내옴으로서 2년임기를 수행했다.
전적공의 손자 참봉공(參奉公) 세홍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의 장자 충효당(忠孝堂) 경안(景顔)은 지극한 효성으로 42세 되던 1587년에 나라에서 정려각을 세웠고 삼강행실록에 등재하였는데, 불천사(不遷祠)에 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공은 또 임란을 당하여 구만동 동쪽 봉우리에 올라 왜적의 퇴진과 국태민안을 7년간 기원하여 후인들이 이곳을 축천대(祝天臺)라 이름하고 그의 유허비를 세웠다.
그리고 전적공의 손자 교수공(敎授公) 세창(世昌)이 부의 묘소에서 3년간 여묘(廬墓)생활을 할 때 호랑이가 샘물나는 곳을 가르켜 준 천감지효(天感之孝)로서 조정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아 상포 3백필을 내리고, 연일 경원 의주 3고을에 교수직을 제수했다.
이에 교수공은 청고동(靑皐洞)에다 자신의 호를 따라 독송정(獨松亭)을 지었는데, 지금 이 자리에는 후손들이 세운 유허비가 남아있다.
전반적으로 조선조를 통해서 영화를 누리지는 못한 집안이었지만, 나라가 어려울때 우국충정의 지사를 많이 배출, 기개와 의용의 집안임에는 틀림이 없다.
주몽룡은 금산군수 재직시에 임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강덕룡 정기룡과 거창 우지현 싸움에서 왜적을 대파 3룡(三龍)으로 불리워진다.
진주성이 함락하자 왜장 모곡육조(毛谷六助)를 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유명한 의기로 알려진 논개도 신안주씨의 후손으로 1574년 9.3(갑술년,갑술월,갑술시)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아버지(달문),어머니(밀양박씨) 사이에서 출생하였으며, 1591년 장수현감 최경회(해주최씨)와 결혼한 양가집 규수였다. 1592년 임진왜란시 최경회가 장수에서 의병에 모집하였고, 1593년 6월 29일 진주성이 함락되자 1593년 7월 7일 적장 게야무라 로꾸스께(毛谷六助)를 안고 남강에 순절하였다.
신안주씨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약 780년 전국각지에 산거하게 된 주자의 후손들이 본관을 서로 달리하자 문중에서는 서기 1902년(고종39년)에 당시 의정부 찬정(贊政)이었던 주석면(朱錫冕)을 대표로 상소하여 주씨들은 모두 중국의 신안을 본관으로 통일하라는 윤허를 받았다.
구한말부터 일제에 이르러 주씨문중에선 주진수(朱鎭壽) 주기철 주용규 등 많은 독립투사가 나왔다.
특히 백운 주진수는 1907년 울진 매화리에 만흥학교를 세워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 2년간 옥살이를 한 후 만주로 가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지금 울진 초등학교 정문 왼편에는 그 뜻을 기리기 위해 1959년에 세운 기념비가 있다.
주기철은 조만식과 더불어 물산장려운동을 펼쳤고, 만주에서 정의단(正義團)을 조직 군자금을 전달했으며 평양부청(平壤府廳)등 일제기관을 폭파하고, 체포돼 13년간을 복역했다.
오늘날 후손들은 전라도 화순군에 주자묘(朱子廟)와 한국의 시조 잠의 위패등을 모신 동원사(東源祠)를 성역화하여 매년 양력 5월 5일이면 전국에서 모여든 약 1천명 족인들이 제향을 올리며 조상의 얼을 기리고 있다.
현재 신안주씨는 남한에 약 55000세대에 약 18만명이 살고 있어 우리나라 성씨인구별 순위에서 42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고, 집성촌으로는 울진읍 고성리 읍남리 호월리, 근남면 구산리, 원남면 매화리, 북면 검성리, 죽변면 후정리로서 울진 북부지역에 집중 세거하고 있다. 전국적으로는 경기도 광주, 충청도 홍성, 전라도 나주 능주 고흥 광양 여수 익산, 경상도 경주 울진 웅천 진주 김해 예천 청도 등지에 산거하고 있다. 울진에는 약 500세대에 1250여명이 살고 있어 인구별 순위 12위이다.
주진용(66세, 죽변) 울진종친회장과 직전회장인 주성하(70세)씨는 주씨문중은 권세와 부귀를 멀리하고, 성리학을 개창한 석학의 후예답게 시속에 영합하지 않는 꼿꼿한 재야사림으로서의, 오로지 청빈한 선비가문의 정신으로 학문과 후학 양성에만 진력해 온 전통의 가풍을 이어 왔다고 밝혔다.
울진에는 울진읍 고성리 <산성 山城> 아래에 문공(文公) 주자의 영정과 위패 청계공 잠과 문절공 열의 위패를 모신 도통사(道統祠)에서 매년 음력 3월 초 9일날 배향하고, 매년 10월 초 9일에는 울진읍 박금동에 있는 울진입향조 전적공 선림의 묘소에서 제사를 올리고 있다. 묘소 아래 부락에는 1881년(고종18년, 신사)에 박금재(拍琴齋)를 건립 추모하고 있으며, 2002년에 후손들의 성금으로 새롭게 단장하여 보존 관리해 오고 있다.
(울진군종친회 연락처: 간사장 주기원 054) 782-1332)
신안주씨종친 585-0767
신안주씨중앙종친회 597-1713
항렬 (2자씩-참고로 저는 34대손 [돈]자 항렬입니다.)
世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항렬자 녕 형 중 규 재 종 돈 하 동 우 경 환 기 지 호 전 영 락 식 화 신 성 곤 균 현 용 승 태 형 行列子 寧 炯 中 奎 宰 鍾 暾 河 東 尤 경 煥 基 址 鎬 銓 泳 洛 植 華 愼 性 坤 均 鉉 鎔 承 泰 馨
결론 : 주(朱)씨 성은 동이족(한민족)의 성이고, 현재의 중국을 동서로 나누어 예기를 하자면, 고대동중국의 건국 시조(삼황오제)의 성씨가 됩니다. 고대동중국(필자-가칭) : [고대중국(동이족으로써 고조선 이전시기 구리국/구환국의 치우천황시절의 제후인 [소전의 아들 황제헌원이 세운 나라]로써 국가로서의 연원을 사용하지않음) -> 하 -> 은 -> 주(周나라의 지배층은 동이족)] 고대동중국은 환국의 이복형제쯤 되는 나라이지요.. 삼황오제도 알고보면 다 한~식구로 성경에 보면 나오는 누구의 아들은 누구이고... 뭐 이런씩입니다.. 여튼, 주나라이후 지배권이 漢족으로 이양되었습니다. 중국의 한족은 원래 서부중국/타이완지역의 민족(황화족)이며, 周나라 이후로 중국 동부지역으로 이동하여 현재의 중국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동이족은 중국남부지역으로 이동(제나라/노나라)하였으며, 현재까지 쭈~욱 중국대륙에 계속 남아있습니다. 또 일부 더~ 남하하여 한반도로 들어온 계열중에 朱씨가 있는것입니다.
제가 나의 뿌리(정체성)에대해 중시여기다보니.. 한 10여년에 걸쳐서 연구(?)한 결과입니다. 대체로 믿고싶은것만 믿는 것이라고 폄하하셔도 좋지만..저는 제가 朱씨 인것에 자긍심을 느낍니다... [출처] 신안 주씨 유래|작성자 태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