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색 자전거 2
교통사고
by문두Jan 30. 2023
이미 너를 만난 것이 교통사고였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는 것, 만나고 나서 벌어진 일이 돌이킬 수 없었다는 것, 다시 너를 만나기 전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었다는 것. 일상에서 가끔 교통사고를 당하곤 했다. 잘 굴러가던 평화로운 일상이 깨지는 것은 정말 번거롭고 싫은 일이다. 코로나 확진이나 내가 하지 않은 일로 작년 5월부터 지금까지 시달리고 있는 구설도 그런 것일 것이다. 나를 더 크게 한 방 먹인 사고는 작년 겨울 몹시 추운 날 직장에서 있었다. 나를 신뢰한다고 믿었던 사업주가 현장에서 힘겹게 일을 마치고 온 나에게 따뜻한 난로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너는 이 일을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야. 너는 이 일을 이렇게 했어야지.”라는 지적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분노가 폭발해 버렸었다. 물론 그 말은 단추에 불과했고 서운함이 그전부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쌓여있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각자 서로를 다른 범주에 두고 있었는데 그것을 제대로 알아채지 못한 나의 오류와 착각에서 비롯된 대형 사고였다. 현실적인 이유로 나는 지금까지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사실은 서로가 필요에 의해 아직 서로를 품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나도 모르고 있는 숨은 단추들이 눌러졌을 때 일어나는 돌발 상황들은 그냥 사고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교통사고나 산업현장에서 일어나는 재해들처럼 치명적이었다. 내 속에 있던 나도 모르는 분노나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들이 내 온몸을 흔들어버렸다. 큰 소리를 지르며 날뛰거나 숨쉬기가 곤란하고 배가 아파 쓰러질 것 같은 답답함이 생겼다. 마치 그것들은 손을 쓸 수 없는 크고 거친 물결 같아 그저 지나가길 기다려야 했다. 결혼하고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탄 시간은 엄청나게 길지만 지금까지 무사고였다. 그동안 완벽주의에 안전제일주의인 그 사람 옆자리에 앉아 장거리를 이동할 때는 늘 졸고 다녔었다. 남편은 브레이크나 액셀을 밟을 때도 정말 부드럽게 운전해 옆에 탄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러다 작년 6월에 막내 동생의 차로 고향에 내려갔다가 처음으로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때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두려움이 폭발했었다. 교통신호에 맞추어 정지했는데 뒤에서 우회전해 오던 차가 그대로 속도를 줄이지 않고 부딪쳤던 사고였다. 동생의 차가 워낙 커서 사람은 다치지 않았지만 차는 폐차할 정도로 망가져버렸다.
엄마가 원하셔서 김치를 담으려고 재료를 샀었는데 그런 상황에도 나는 그것을 꼭 붙들고 다녔다. 119 구급차에 엄마를 모시고 옆에 앉아 영광종합병원까지 가는데 꼭 깡통 속에 들어간 것처럼 답답하고 멀미가 났다. 병원에 도착해 엄마를 응급실로 들여보내고 나는 복도의 의자에서 진료를 거부하며 드러누웠다. 극도의 두려움에 숨을 쉴 수 없어서 금방 죽을 것 같았다. 그때도 열무 네 단에 당근, 쪽파, 생강 등의 김칫거리는 내 옆에 있었다. 엄마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동생과 나는 보험회사에서 나온 그럴듯한 ‘모바비’라는 차를 타고 고향집으로 돌아와 밤늦도록 사방 쑤시는 몸으로 김치를 담았다. 사실 이 사고는 김칫거리를 사기 위해 영광으로 돌아오면서 난 사고였다. 우리가 아픈 몸을 이끌고 김치를 기어이 담아야 하는 이유는 엄마의 속을 시원하게 해 드리기 위함이고, 엄마가 김치를 그렇게 간절히 담고 싶은 진짜 이유는 아들에게 주고 싶어서였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자동차와 부딪힌 이번 사고는 이미 예견된 사고였다. 작년 6월에 겪었던 교통사고 이후 늘 마음속으로 자전거를 탈 때 생길 수 있는 사고를 시뮬레이션해보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전혀 떨지 않고 침착할 수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드디어 벌어질 일이 벌어졌구나. 오히려 이만하기에 다행이야. 앞으로도 계속 자전거를 타고 싶다면 너는 자전거 타는 습관을 반드시 바꿔야만 해. 넌 너무 건방졌어. 이젠 정말 겸손하게 조심스럽게 타야 해.’
답답하다는 이유로 안전모를 쓰지 않았고, 무슨 자신감인지 신호는 잘 지켰지만 건널목에서도 내려서 걷지 않고 타고 다녔다. 나름 자전거 타기에 자부심이 있어서 거침이 없었다. 여태껏 꽤나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다. 사고가 난 곳은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다니던 길인 데다 큰길도 아니어서 무감각하게 겁 없이 다녔다. 상가 뒤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벚나무 가로수 산책로와 마트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길이 교차하는 신호등 없는 건널목이었다. 더군다나 길가에 주차된 차가 있어서 시야가 가려 서로를 잘 보지 못했다. 어릴 때 겪었던 자전거 사고들은 내 몸이 가볍기도 했고, 나 혼자 운전미숙으로 일어난 사고였다. 차와 부딪치는 사고도 아니었고, 대부분 푹신한 논바닥으로 떨어지는 사고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모든 게 달랐다. 연두색 자전거야, 네 덕에 아니 나의 무모함 덕에 드디어 맨몸으로 자동차와 직접 부딪쳐 보았다. 나는 정말로 공중으로 날아올랐지만 새가 될 수는 없었다. 너와 부딪힌 분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렇게 보지도 않고 들어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큰소리치며 기선제압을 했다. 나는 너를 타고 건널목을 건넌 죄로 내동댕이쳐진 몸을 벌떡 일으켜 아픈 줄도 모르고 굴러가지 않는 너를 질질 끌어내며 뒷수습을 했다. 이 모습을 목격하고 있던 마트 직원들은 경찰을 부르세요. 119를 불러야죠. 움직이지 말고 그냥 있으세요. 하는데도 혼자서 가까이에 있는 병원으로 걸어서 갔다. 그곳은 신경외과라 진료할 수 없고 정형외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사무실에 연락을 했더니 사무장이 바로 달려와 주었다. 차주는 산책로의 블록을 까는 공사 중이어서 많이 바쁘다며 보험회사에 전화를 해주고 일을 보러 갔다.
정형외과로 갔더니 점심시간이어서 다시 중앙성모병원 응급실로 갔다. 그곳에서는 간단한 처치만 해주고 다시 큰 병원인 의정부성모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너무 일이 커지는 것 같아, 또 의정부까지 사무실차로 이동하기 미안해져 그냥 아까 정형외과로 다시 돌아가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나는 새끼발가락 하나가 골절되고 왼쪽 얼굴을 눈썹 위, 광대뼈, 코 밑, 턱까지 골고루 길바닥에 갈았을 뿐이었다. 오른쪽 갈비뼈 쪽에도 심한 통증이 왔지만 엑스레이로는 골절이 확인되지 않았다. 내 몸의 가장 작고 낮은 새끼발가락이 모든 것을 막아준 것 같았다.
너는 나의 단짝이었다. 대중교통보다 자유로운 이동수단이었던 너는 나에게 교통수단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너랑 함께 했던 무수한 시간과 사건들은 이제 그 누구도 도둑질해갈 수 없는 나만의 기억의 보물창고에 넣어둘 것이다. 이제 네가 내 곁을 속절없이 떠나게 되었지만 너의 존재는 할머니나 아버지의 존재가 그러하듯이 나에게 명확한 사실이다. 너의 바퀴 틀과 핸들은 이제 엿가락처럼 휘어져버렸다. 나도 지금 여기저기 멍들고 깎이고 금이 가 너덜거리지만 네가 그 충격을 직접 막아주어 이만할 것이다. 물건은 희한하게 늘 그 주인을 닮아가더라. 트랙터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트랙터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너의 모습도 나를 그대로 닮아 있구나.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공동현관에 다른 자전거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세워두었던 너를 비가 계속 오는 데도 지금 밖에 내버려 둔다. 이제는 꼭꼭 채워두었던 열쇠도 풀어버린 채 바구니 속에 내팽개쳐둔다. 너의 바퀴 틀은 다 휘어져있는데 고무 타이어는 아직도 멀쩡하다. 너의 안장에 써둔 내 마음의 글귀도 빗물에 씻겨 희미해져 간다. 나는 너와 정말 긴 시간을 함께하고 싶었는데, 우리를 기어이 만나게 해 주었던 운명은 또 우리를 기어이 갈라놓는구나.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노항장곡) 오동나무는 천년이 지나도 항상 그 곡조를 간직하고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매화는 일생동안 춥게 살아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 月到千虧餘本質(월도천휴여본질)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은 남아있으며 柳經百別又新枝(유경백별우신지) 버드나무는 백 번을 꺾여도 새로운 가지가 돋아난다. - 申欽신흠(1566~1628) 조선 인조 때 영의정을 지냄. 수필집 『野言야언』에 수록 나는 입는 옷도 너에게 맞추었다. 나의 몸도 너에게 딱 맞추어 다리와 엉덩이를 단련시켰다. 너를 좋아한 만큼 너에게 집착하는 만큼 너로 인해 내가 다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사실 눈이 오는 날이나 비가 오는 날에도 너를 포기하지 않고 끌고 다닌 날이 많았다. 나는 너랑 떨어지는 것이 싫었다. 그만큼 너에게 길들여져 있었다. 바퀴를 가진 네가 가진 속도와 굴러가는 부드러움이 현실감을 떨어지게 했다. 신천의 물은 늘 흐르고 있지만 가죽을 염색하는 공장에서 또 환경사업소에서 흘려보내는 시커먼 물로 그렇게 맑지 않았다. 현실을 다 알면서도 너를 타고 달리면 신천은 더없이 아름다운 풍경이 되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했던, 가장 안전하다고 했던 길들은 교차로마다 사실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한눈팔기 좋다는 그 길들은 다 조심해야 되는 길들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젊을 때 교통사고를 몇 차례 겪으며 억울한 일을 겪어본 남편은 나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다음을 위해 철저하게 매뉴얼을 짜주었다. 사고가 나면 무조건 경찰과 구급차를 불러라. 이들은 너의 상황을 정확하게 확인해 주고 증명해 주며 제대로 된 병원으로 인수인계를 해준다. 첫 진료지가 중요하니 되도록이면 큰 병원으로 가라. 작은 병원에서는 장비가 없어서 제대로 확인해주지 못하고 작은 병원에서 했던 진료는 문제가 될 때 인정받기 어려워 큰 병원에서 다시 진료를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교통사고는 항상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부의 문제들이 있을 수 있다. 뇌진탕이나 내장파열 등. 그러니 되도록 병원에 입원해 경과를 살펴보는 것이 치료나 합의를 볼 때도 유리하다. 그리고 보험회사와의 합의는 최대한 치료를 끝낸 뒤에 천천히 해야 한다. 절대 먼저 연락하지 말고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여기에 본인이 겪었던 억울한 이야기를 곁들여 아직도 다 풀리지 않은 울분을 토해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번 교통사고의 일처리를 남편이 알려주는 매뉴얼과 모든 것을 반대로 처리했다. 경찰이나 119를 부르지 않았고 지인을 불러 동네병원에 갔다. 병원에서 간단히 치료를 받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차주에게 전화를 해 서로 운이 안 좋았다고 위로와 사과 겸 감사인사를 드렸다. 집에서 1주일을 요양한 뒤에 병원에 가서 바로 진단서와 판독 지를 받아 보험회사에 연락을 했다. 성질이 급한 나는 바로 합의를 끝내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리고 두어 달 가까이 발가락과 옆구리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안전, 또 안전이 제일이다. 조금 늦게 가더라도 건널목에서는 반드시 내려서 걸어가야 한다. 안전한 습관을 들여야 한다. 자전거는 걷는 것을 조금 거들어 주는 보조수단으로 써야 한다. 자전거를 타고 늘 마음이 너무 멀리까지 갔었다. 과거나 미래로, 하늘까지 날아오르려고 들었다. 그러나 안전에 무감각해지면 정말 저 세상까지 바로 날아갈 수도 있다. 나이 90이 넘도록 자전거를 타는 것이 꿈이라면 안전하게 자전거를 타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올해 건강검진을 통해 훈장을 하나 또 달지 않았는가. 폐경 이후 급격히 오는 골다공증이라는 진단 말이다. 이제 나는 어린 소녀가 아니다. 이제는 중노인이다. 그리고 지금은 사고가 나면 어릴 때의 폭신한 논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여기는 딱딱한 아스팔트 바닥이고, 떨어지면 바닥에 떨어진 사과처럼 속으로 깊이 멍들고 말 것이다. 자전거는 날개가 아니다. 그렇게 자유로운 이동수단도 아니다. 자전거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면 책임감이 필요하다. 현실감각이 필요하다. 나의 현실과 이상의 차이만큼 이 망상이고 노망이다. 내 뼈는 그렇게 유연하지도 강하지도 않다. 내 얼굴 피부는 어릴 때는 금방 재생이 되어 어지간한 생채기에 흉터가 남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가만히 있어도 점들이 늘어나고 무언가가 생겨나고 있다. 이제는 생채기로 인한 흉까지 더해지면 얼마나 추해질 것인가. 내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생기는 사고는 옆에 있는 이들에게 불편을 주고 피해를 주는 일이다. 자전거라는 자유를 누리고 싶다면 이 행복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면 더 큰 책임감과 현실감이 필요하다. 부디 90이 아니라 100세까지도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법을 지키면서 조심히 이 즐거움을 누리고 살 수 있길 바란다.
내가 자전거로 떠날 수 있는 세상은 어디까지일까? 물리적으로는 이 자전거로 그리 먼 세상까지 떠나지 못한다고 했었던가. 겨우 내 일상생활의 반경에 머무를 뿐이라고. 집에서 보산동이나 신시가지, 상패동 쪽까지가 내 터전이라고. 경사가 급한 광암동도 엄두를 못 내고 겨우 동두천시내가 자전거로 만나는 세상의 전부라고. 출퇴근을 하고 우체국이나 은행에 가고 재가방문 사회복지사로서 요양사들이 일하고 있는 어르신 댁을 방문하는 것이 전부라고 했었던가. 그러나 사실 자전거로 만났던 세상은 결코 좁지 않았다. 나의 그 일상이 얼마나 넓고 큰 세상인지 사고가 나 집에 갇혀보니 실감하게 된다.
“연두색 자전거로 만났던 세상은 꼭 물리적인 장소에 머무르지 않는다. 나의 마음은 자전거를 타고 훨씬 더 멀리 여행을 떠나곤 한다. 이 자전거를 타고 하늘 위로 바로 날기도 하고 어린 시절이나 내가 꿈꾸는 세상으로 떠나기도 한다. 있는 힘껏 페달을 밟아 바람을 가르며 시원하게 내달리는 시간은 나를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고 시끄럽던 마음을 평화롭게 해 준다. 이 시간은 나를 가장 나답게 하고 마음을 가지런히 정리할 수 있게 하며, 내 다리와 생각에 힘을 붙여주고, 바람과 계절을 직접 만나게 해주는 것이다.”
나는 또다시 연두색 자전거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