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는 과연 미신인가
류주희(중앙대 박사과정)
삶의 터전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명당에 대한 관심은 도에 지나칠 정도로 끊일 줄 모른다. 요즈음에도 자손의 발복을 위하여 이른바 명당이란 묏자리를 잡아 놓고 수천 평의 땅을 흡사 왕릉처럼 꾸며놓은 묘들을 볼 수 있다. 과연 좋은 자리에 묘를 쓰고, 집을 지어야만 자손들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까? 명당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기에 우리의 조상으로부터 자손 대대로 명당 잡기에 혈안이 되어 지관을 상전 모시듯 하는 걸까?
풍수지리란 산과 물의 형세를 살펴, 도읍지, 주택, 묘지 등을 선정하는 일종의 지리학이다. 도읍지나 주택 같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 활동하는 곳을 양기 또는 양택이라 하는 반면 죽은 사람이 묻히는 묘지를 음택이라 한다. 고려시대에는 음택풍수보다는 양기 또는 양택풍수를 더욱 중요시하였다.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 보면, “고려는 본디 글을 알아 도리에 밝으나 음양설에 구애되어 꺼리기 때문에, 그들이 나라를 세울 때에는 반드시 그 형세를 관찰하여 장한 계책을 세울 수 있는 곳이라야 자리잡는다”고 하였다. 풍수지리설이 도읍지를 선정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 주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선정한 곳의 쇠퇴하고 왕성함과 순하고 거스름에 따라 국가나 인간의 길흉화복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땅에는 만물을 탄생시키는 힘이 있는데 그 힘이 왕성하기도 하고 쇠약하기도 하여 땅의 기운이 왕성할 때에는 그 곳에 자리잡은 국가나 개인이 흥하고, 반대로 쇠약할 때에는 멸망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땅의 활력 여부에 따라 국가나 개인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는 ‘지기쇠왕설’이다. 한편으로 땅의 기운은 고정불변하지 않고 항상 변하기 때문에 애초에 땅의 기운이 왕성한 곳을 선정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 땅의 기운이 쇠약해지면 국가나 개인도 그에 따라 멸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고려 중기 이후에 개경은 땅의 기운이 쇠약해졌기 때문에 도성을 옮겨야 한다거나, 국왕이 일정 기간 동안 땅의 기운이 왕성한 곳으로 가서 머물러야 한다는 등의 주장도 나왔다. 이러한 주장은 국정 운영을 쇄신하려는 방편으로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일부 계층의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기 되었다.
풍수가들이 주장하는 명당은 산세가 바람을 막아 주고 수세가 열기를 식혀 주는 곳으로 곧 배산임수의 땅이다. 그들은 그와 같은 명당이 아니면 절이나 탑 등을 세워 재앙을 막아야 한다는 ‘비보사탑설’을 내세운다. 이러한 비보사탑설은 지리적 조건의 부족함을 인위적으로 고칠 수 있다는 관념에 기초하고 있다.
풍수지리설은 그 자체로서 뿐만 아니라 도참설과 연결되어 고려시대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도참은 미래의 길흉화복이나 성쇠 혹은 득실 등의 징조를 추즉하거나 예언하는 일종의 복술을 말한다. 고려시대에는 많은 도참설들이 유행하였는데, 대체로 풍수지리설과 관련하여 왕조의 장래를 예언하고 있다. 고려의 역대 왕들은 이러한 도참설에 입각하여 3경(개경, 서경, 남경 혹은 동경)이나 3소를 설치 경영하기도 하였다. 3소는 국도의 진산이며 수호산인 송악을 중심으로 한 주위의 세 진산을 말한다. 곧 백악산(경기도 장단의 백악산)의 좌소와 백마산(경기도 개풍군 소재)의 우소, 기달산(황해도 신계군 소재)의 북소이다. 이곳에 궁궐을 조성하고 순주하여 국업을 연장시켜 보려고 한 것이다.
고려시대에 풍수지리가들은 서운관이라는 관청에 소속되어 천문. 역수. 축후. 각루. 점복 등의 일을 맡아 보았다. 풍수지리와 관련된 일을 맡은 관리들은 958년(광종9)에 쌍기의 건의로 실시된 과거시험에서 잡업 중 지리업으로 등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들 풍수지리사들의 관리 임용은 당시 사회에 풍수지리사상이 널리 보급된 데 따른 것이었다. 이들은 주로 왕실의 능묘를 축조하고 보수하는 일을 전담하고 풍수에 관한 책을 편찬하는 데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왕명으로 이 궁지(왕의 별장터)나 천도할 만한 땅을 찾아다녔으며, 성을 축조할 만한 터를 잡거나 왕의 피서지를 선정하는 역할도 하였다.
전 국토의 효율적 운영월니, ‘풍수지리설’집대성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이래로 고유의 풍수지리설이 전래되어 왔다. 삼국통일 이후 체계화된 중국의 풍수이론이 도입되면서 풍수설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신라 하대에는 특히 지배층 내부의 거듭된 권력 쟁탈전으로 지배체제가 붕괴되었고 중앙 귀족들은 끝없는 정치적 혼란상태에서 정신적인 안식처가 필요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풍수지리설은 불교 신앙과 함께 그들에게 안정과 희망을 주는 또 하나의 사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지방에 대한 중앙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 각지에서는 성주 장군을 칭하는 호족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대두하였다. 이들 호족들은 세력을 성장시키는 데 풍수지리설을 적극 이용하였다. 특히 왕건이 태어나기도 전에 도선이 이미 새로운 왕조의 창건을 예언하였다고 전하는 <옥룡사 선각국사비>의 내용에서 풍수지리설은 호족들에게 자기 세력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근거로 적극 이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 비문은 도선이 입적한 후 곧바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250여 년이 지난 1150년(의종4)에 찬술되었기 때문에 윤색된 부분이 적지 않다.
중앙귀족에게 받아들여졌던 풍수지리설이 지방의 호족사회로 확대되어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 신라말 고려초의 승려인 도선이다. 도선은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문의 승려로 20세에 혜철 문하에 들어가 선을 배우고 태백산 등지를 유람한 뒤 광양의 옥룡사에 들어가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머물렀던 옥룡사는 견훤의 세력권 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도선과 견훤을 연결하는 풍수지리설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아마도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곧 왕건세력을 정당화하고 합법화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는 풍수지리설만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던 데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도선은 전국을 답사한 경험을 토대로 국토의 효율적인 운영원리로서 풍수지리설을 집대성하였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827년(신라 흥덕왕 2)부터 898년(신라 효공왕2)에 걸쳐 생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각국사비>에 따르면 도선은 이인에게서 풍수지리설을 배웠다고 하는데, 그 사람은 불교계의 인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가 술법을 전해 주면서 이 또한 대보살이 세상을 구제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법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도선에게 풍수지리설을 전수해 준 사람이 바로 그의 스승인 혜철일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혜철이 당나라에 다녀오면서 중국의 풍수이론을 도입하여 전수해 주었다는 것이다.
도선은 그 후 전국을 답사한 경험을 토대로 산수의 순함과 거스름을 정하고 명당을 제시하는 한편 국토에 대한 각종 비기와 답산가를 남겼다. 그의 저술로는 <도선비기>가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외에도 <도선밀기>, <송악명당기>, <도선답산가>, <삼각산명당기>, <옥룡기>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 풍수지리사상이 어떻게 이용되었는가를 알려 줄 수 있는 유일한 자료는 <도선비기>이다. 이 책은 오늘날 전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당시 가장 권위 있는 책으로 중요한 정책결정을 할 때에 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도선은 풍수지리의 이론에만 치우치지 않고 실제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풍수지리설을 유기적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어느 한 지역(명당)을 중심으로 국토를 재편성하고 그에 맞는 운영원리를 찾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산수의 순함과 거스름을 정하는 데 중점을 두고 보조적인 성격으로 비보사상을 내세웠다.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명당을 설정하고 그 곳을 중심으로 전 국토의 순역형세를 집대성한 것이다.
풍수지리설을 이용한 지역차별
이러한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왕건에게 적극 수용되어 정치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왕건은 도선과 달리 비보에 더 중점을 두었다. 그는 도선의 풍수지리설을 받아들이는 한편 자신의 정치운영에 맞게 비보사상과 도참사상을 연결하여 변용시켰다. 비보설은 도참설과 연결되어 특정 지역을 중시한다든가, 혹은 반란을 일으킬 형세이거나 임금에게 배역하는 모습이므로 그 지역민은 등용해서는 안된다는 등의 이론적 근거로 작용하였다. 왕건이 남긴 훈요10조 가운데 차령산맥 이남과 금강 밖은 산수의 형세가 배역하는 모습이므로 그 지역 사람들도 배역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하여 그 곳 인물들은 기용을 삼가라는 내용이 있다. 곧 후백제 땅에 대해 유독 차별적인 인사정책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지리적인 이유에서라기보다는 고려 체제에 순응하고 투항한 신라와는 달리 끝까지 반항했던 후백제에 대한 보복적인 조처로 보아야 한다. 또 한편으로 강제로 통합된 후백제 출신 인물들이 그 원한으로 반란을 꾀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그 곳 출신 인물들의 정치참여를 막고자 한 것이다. 왕건은 풍수지리의 이론에서 권위를 빌어와 후백제 지역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이는 그 정치적 의도와는 상관없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풍수지리를 동원한 묘청의 야망
풍수지리설은 비보사상과 결합될 때까지도 전 국토를 답사한 경험을 토대로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면모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도참사상과 결합되면서 그것은 지리도참설로 흘러 정쟁에 이용되었다. 정치가들은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풍수지리의 권위를 빌리려 하였으며, 풍수가들은 정치가의 권력을 빌려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정치가들은 풍수지리의 권위를 빌려 정책 추진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풍수가들은 그들의 정책을 뒷받침해 줄 이론을 개발하여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 과정에서 도참 논리를 빌어 왔다.
풍수지리설과 도참사상의 결합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건이 서경천도운동이다. 서경은 동쪽과 남쪽이 대동강에 닿아 있고, 북쪽은 을밀대와 모란봉을 품은 금수산이 있으며, 서쪽은 대동강의 지류인 보통강이 흘러 풍수가들이 말하는 명당이었다. 이 곳은 수덕이 순조롭고 지맥의 근본을 이루는 ‘만대 대업의 땅’으로 지목되어, 태조는 후대의 임금들이 반드시 넉 달 동안 이 곳에 머물라는 훈요를 남기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보다 실질적인 이유가 있었다. 태조는 북방민족의 침략에 대비하는 국방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서경지역의 이반을 사전에 봉쇄하는 정치적 의도로 서경경영을 추진하며 이론적 근거로 풍수지리를 내세운 것이다.
고려시대에 지리도참설을 바탕으로 발생한 가장 커다란 사건을 1135년(인종 13)에 묘청 등이 일으킨 서경천도운동이다. 인종 때는 외척인 이자겸이 ‘십팔자(이)위왕’이라는 도참설을 믿고 난을 일으켜, 많은 사람이 죽고 궁궐이 거의 불타 버려 민심이 매우 흉흉하였다. 대외적으로도 금나라의 외교적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때 묘청. 정지상 등은 개경의 지덕이 쇠약해져 국내외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며 서경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의 서경천도 주장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인종 6년에 일관 백수한이 검교소감으로 서경의 분사에 임명되고, 묘청을 스승으로 삼고 음양비술을 잘한다 하여 뭇사람을 현혹하였다. 정지상 또한 서경사람이라 그 말을 깊이 믿고 말하기를 “상경은 기업이 이미 쇠하여 궁궐이 다 불타 남은 것이 없으나 서경은 왕기가 있으니 도읍을 삼는 것이 좋겠다.”하고 곧 근시인 내사랑 김안과 더불어 꾀하기를 “우리들이 만약 임금을 모시고 서경에 도읍하면 마땅히 중흥공신이 될 것이니 일신의 부귀뿐만 아니라 자손의 무궁한 복이 될 것이다”라 하였다... 묘청 등이 아뢰기를 “신 들이 서경 임원역의 지세를 살펴보니 이것은 곧 풍수에서 말하는 큰 꽃 모양의 터입니다. 만약 궁궐을 지어서 거처하면 천하를 병합할 수 있으며 금나라가 폐백을 가지고 스스로 항복할 것이고 36국이 모드 신하가 될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를 보면 인종 때의 서경천도운동은 묘청. 정시장 등 서경세력이 자기들의 출신지역으로 도읍을 옮겨 중흥공신이 되어 정권을 잡으려는 정치적 야심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의 주장은 서경기설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마침내 묘청 등의 주장에 따라 대화궁을 짓고 그 안에 팔성당을 세우는 등 서경천도가 곧 실현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궁궐을 준공한 뒤 대화궁 근처에 벼락이 떨어지고 임금이 서경으로 행차하는 도중 갑작스런 폭풍우로 수많은 인마가 살상되는 등 불상사만 잇따라 일어났다. 이에 서경천도론은 백성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묘청 일파를 배척하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서경천도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묘청 등은 서경에 대위국을 세워 개경의 조정과 정면으로 대결하기에 이르렀다.
이 묘청의 난을 김부식은 5,6년 전부터 계획하여 일으킨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묘청이 난을 일으켰다가 곧바로 서경사람들에게 잡혀 죽은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오랜 준비 끝에 일으킨 거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도 국왕의 서경 행차가 중지된 인종 12년 8월 이후에야 반란 계획을 꾸민 듯하며 거사도 반란을 일으키기 며칠 전에 갑자기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서경천도운동의 중심인물인 정지상. 백수한 등이 반란이 일어난 줄 몰고 개경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었던 데에서 알 수 있다. 또한 대위라는 나라 이름과 천개라는 연호를 칭하고는 있지만 국왕을 새로이 옹립하지 않았다든지, 군대를 일으켰다고 그들 스스로 임금에게 알린 점 등으로 미루어 왕권 자체에 대한 도전이 아닌 중앙의 문벌귀족들을 타도하는 데 그 거사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조정이 군사를 동원하여 반란을 완전히 평정하는 데에는 일년이라는 시일이 필요하였다. 결국 김부식을 중심으로 하는 개경의 보수귀족들에 의해 서경천도운동은 좌절되고 서경의 지위는 갈수록 격하되어 갔다.
그 뒤 고려에서는 무인정권의 성립 등 사회가 크게 바뀌지만 지리도참사상은 여전히 유행하였다. 조선초까지도 풍수지리설은 도읍지의 선정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허무맹랑한 비기로 전해지면서 미신화되어 결국에는 집터나 묘자리 등을 잡아 주는 가장 초보적인 방법만 남게 되었다. 도선이 전 국토를 합리적으로 운영하는 방법으로 집대성하였던 풍수지리설은 후대로 갈수록 미신적인 요소만 남게 된 것이다. 풍수지리를 빙자한 갖가지 행사가 왕실과 지배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때 각종 폐단이 일어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지금도 종교적 의미를 떠나 미신적 속성을 지닌 사이비 종교가 자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다.
고려말 풍수지리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게 된 계기는 물론 그에 대한 폐단이 큰 이유가 되었겠지만, 한편으로는 성리학의 발전과 깊은 연관을 지닌다. 특히 신진사대부는 당시 왕실을 지배하고 있던 불교가 통지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을 잃고 풍수도참과 습합되는 등 폐단을 노출하자 불교에 대한 비판과 함께 풍수도참을 비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유교와 불교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던 고려말에 있었던 것이었고, 조선 건국 이후에도 여전히 풍수도참은 이성계와 무학대사에 의해 한양을 수도로 정할 정도로 중요한 사상으로 작용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