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대한 무수한 이야기를 접했지만 우선 그 책을 읽어보지 못했다. 그 책에서는 오늘날까지 영웅으로 추앙받는 카이사르를 보다 빛내준 책이었다 하면 키케로는 상대적으로 음흉한 정치가로 그려졌다 한다. 이 책과 그 책을 비교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우선은 그 정도로 아쉬움을 달래고 들어가야겠다.
로버트 해리스의 전작에 대한 명성들이 워낙 뛰어났고, 이 책 또한 2008년도에 나온 책이라 그 사이에 읽어보고 탄복한 이들이 있어 기대하고 있던 책이었다. 심혈을 기울여 출간했을 2권, 루스트룸의 출간과 동시에 연달아 두 권을 읽게 되어 1권 이후 몇 년을 기다렸을 사람들보다는 행운이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과거 로마의 영광은 오늘날 남아 있는 것들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리란 생각이 든다. 그렇게 번성했던 나라가 오늘날에는 선조들의 영광의 그림자만이 남은 관광지로 변한 느낌이긴 하지만, 눈으로 보이는 것 외에 문화적인 영향만은 변함없이 여전히 지대한 파급효과를 갖고 있다 본다.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서구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로마의 모든 문화는 언제까지 반복될지 모르는 무수한 그들의 영광으로 빛이 날 것이다. 그리스 로마에 대한 것이라면 많은 사람들의 끝없는 관심을 이끌어내고,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순식간에 오르게 되는 것도 현대인들의 본질의 근본을 찾아 나서고자 하는 그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오늘날의 재미없는 이 정치사가 사실상 로마시대에도 똑같이 재현되었다는 것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언제 어디서나 권모술수는 존재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세도가와의 야합도 존재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정치가들의 이런 행태가 참으로 야속하기만 하지만, 그럼에도 과거 로마사의 쟁쟁한 재판에서의 대립과정이라던지 이름으로만 들었던 화려한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저자의 놀라운 필력의 힘이 아니었을까 싶다.
가진 것은 오로지 목소리 하나뿐이었던 키케로가 대단한 로마 귀족들의 중심에 서서, 최고 자리인 집정관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이 1권 임페리움에서 그려졌다. 원로원 의원이 되기 위한 재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던 그는 돈과의 결혼을 선택했다. 하지만, 아내 테렌티아의 재력에 의존하여 시작한 결혼이긴 했으나 열렬한 사랑은 없었어도 나중에 부를 얻은 이후에도 아들을 낳지 못한 아내와 이혼하거나 하는 이기심을 발하지 않는다. 아들을 보지 못할까 봐 어린 딸을 장래 유망한 청년과 미리 약혼시키기도 하고, 그의 아들에 대한 열망으로 아내도 오랜 시간 노력하여 드디어 아들을 얻기도 한다. 그는 그때까지 아내를 기다려주었다. 키케로의 아내 테렌티아는 훌륭한 귀족출신이기도 했지만, 남편에게 끝없는 잔소리를 하면서도 그에게 정치적, 경제적으로 뛰어난 조언을 해준 조력자이기도 했다. 다소 독특할 수 있는 그런 부부관계가 눈에 더욱 들어왔다. 그에 반해, 후반부에 잠깐 언급되고, 2부 루스트룸에서 본격적으로 키케로와 대립하게 될 카이사르는 어떠한가. 임신한 폼페이우스의 아내와 관계를 갖기도 하고, 그 외에도 다른 이의 아내를 취하는데 전혀 부끄러움이 없었다. 카이사르의 바람기 하나만으로 영웅의 역사적 위대함을 폄하할 수는 없겠지만 오늘날 지나치게 비하된 키케로의 위상을 조금이라도 높여보고 싶어졌다.
거대한 야망을 품었던 키케로지만, 거인들처럼 버티고 선 로마 귀족들을 뚫고 중심에 서기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로마 변호인의 절대적 일인자에 위치한 호르텐시우스, 오로지 무와 명예만을 중시한 폼페이우스, 절대적 부를 과시한 크라수스 앞에 돈도 든든한 배경도 없는 키케로의 항변은 너무나 미미해 보이기만 했다. 그럼에도 그는 시칠리아의 제독으로 집권할 당시 부유한 시민이었던 스테니우스의 재산을 강제적으로 몰수하고, 그를 참수까지 시키려 한 베레스를 로마 법정에 세워, 베레스가 돈으로 매수한 로마 귀족들과의 엄청난 전면전에 돌입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임페리움의 1부 내용이었다. 임페리엄의 후반부인 2부는 그가 최연소 집정관에 오르기까지의 극적인 과정을 그리고 있었다. 사실 그가 집정관이 되는 그 극적인 순간보다도 누가 봐도 키케로가 질 것이 분명했던 베레스의 재판에서 그가 극적인 승리를 거두는 연설장면이 압권이었다. 정말로 통쾌했다. 엄청난 부와 권세를 지닌 사람들 앞에 이렇게 시원한 펀치를 날려주는 키케로가 대단해 보였다.
과거 로마사에서 웅변가, 철학가 등의 위상이 드높은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을 변호사라고 표현을 하니 그 또한 신선하게 다가왔다.
오로지 군인으로 유명세를 떨쳤던 폼페이우스 장군과 달리 키케로는 오직 혀의 힘 하나로 우뚝 섰다. 그 과정을 필력 하나로 생생히 재현해 내준 로버트 해리스 작가 앞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이 책은 단순히 재미만으로 평가하기엔 부족함이 크다. 업적 몇 가지로 기록되는 로마사를 마치 현재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인 것처럼 생생히 감정까지 살려내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지식 위에 작가의 허구가 덧붙여졌음은 받아들여야 하는 순리이긴 하지만, 로마 당대의 치열했던 암투는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서평으로 책 읽기를 되돌아보는 북러버입니다. http://melaney.blog.me
1957년 영국 노팅엄에서 태어난 로버트 해리스는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해리스는 BBC 뉴스나이트와 각종 파노라마 프로그램의 리포터로, 또 [옵서버]의 정치 담당란 기자로, [선데이 타임스]와 [선데이 텔레그래프]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브리티시 프레스 어워드(BRITISH PRESS AWARD)에서 올해의 칼럼니스트로 선정되기도 했던 해리스는 칼럼니스트 활동 중에도 틈틈이 작품을 써왔다. 이렇게 발표된 것이 [당신들의 조국]으로 이 작품은 히스토리 팩션의 새 장을 열며 언론과 독자들에게 큰 찬사를 받았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또한 HBO에서 TV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다. 이후 해리스는 2차 대전 당시 실존한 최고의 암호기 이니그마를 풀어내는 암호해독가의 이야기를 다룬 [이니그마]와 45년 만에 발견된 스탈린의 숨겨진 일기장에 얽힌 비화 [아크엔젤]을 발표하며 일약 히스토리 팩션의 최고봉으로 떠올랐다. 이 두 작품 역시 각각 케이트 윈슬렛과 다니엘 크레이그 주연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고대 로마 시대를 다룬 대작 [폼페이]로 정통 역사 소설가로서 입지를 넓힌 해리스는 그의 필생의 역작인 로마사 3부작을 기획한다. 2006년에 발표된 제1부 [임페리움]은 완벽한 고증, 주관 있는 역사의식, 광대한 세계관으로 역사 소설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을 받으며 전 세계 평단의 극찬과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이후 한 대필작가의 눈으로 본 현대 정치사를 다룬 스릴러 [고스트라이터]를 통해 잠시 동시대 소설로 외도를 했던 해리스는 2008년 겨울 로마사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인 [CONSPIRACY]를 발표할 예정이다.
"키케로, 부인을 지배할 수 없다면 로마를 정복할 수도 없네." "로마 정복은 애들 놀이야. 세르비우스. 내 아내를 지배하는데 비하면 말일세, 맹세하지." (66쪽)
지금도 두 눈을 감으면 그 한여름 오후의 황금빛을 받던 그들의 얼굴이 선하게 떠오른다. 키케로,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호르텐시우스, 카툴루스, 카틸리나, 메텔루스 형제..그런데도 그들의 모습과 야심과 심지어 그들이 앉아 있던 건물까지 지금은 온통 먼지로 화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다니. (238쪽)
"변호가 필요하다면 지옥의 최고 악마라도 변호한다. 이건 우리 법체계의 핵심이지만, 루키우스 생전엔 이 원칙을 외면할 수 밖에 없었어. ... '나는 신인원로다. 나는 집정관직을 원한다. 여기는 로마다.' 그 세 문장, 그게 다야.나는 신인이야. 때문에 너희들 외에는 나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 나는 집정관을 원해. 그건 불후를 의미하고 당연히 싸워볼만한 전리품이잖아? 그리고 여기는 로마야. 로마. 철학이 논하는 관념상의 이상향이 아니라 부패의 강 위에 세워진 영광의 도시란 말이다. 그러니까 받아들여. 필요하다면 기꺼이 카틸리나라도 변호하겠어.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그를 내칠거야. " (361쪽)
카틸리나와 클로디우스 둘 다 기이할 정도로 닮은 사람들이었다. 한 방에서 함께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는데도 정말 부자지간이라도 해도 통할 정도였다. 느린 말투, 세상이 모두 자기들 것이라는 듯 담담한 표정. 그런 게 소위 '혈통'이었다. 로마의 최고 명문들이 400년 동안의 정략혼인을 통해 만들어낸 두 명의 악마. 아랍산 종마만큼이나 순종이며, 또 그만큼 날렵하고 고집스러운데다 위험하기까지 한 인간들. (365쪽)
42세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그는 이렇게 법이 허락하는 최연소자로서 로마 집정관이라는 지고의 임페리움을 달성한다. 그것도 가문, 재산, 도와줄 군대도 일천한 '신인'으로 출발해, 백인대의 만장일치라는 전대미문의 절대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다. (4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