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용으로 운전하기엔 피곤하기도 하고, 혼자 가볍게 다녀오기로 한 성우는
며칠 후 아침 일찍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KTX 1인석 자리에 앉자마자,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세빈이었다.
이제 막 잠에서 깬 부스스한 목소리가 성우의 휴대폰 너머에서 들렸다.
“야…… 기차 탔냐?”
“막 탔다. 지금 간다.”
“잘 다녀와라.”
“내가 네 몫까지 다 먹고 올게.”
“끊는다.”
오래된 친구들의 아무렇지도 않은 대화가 식탁 위의 흔한 배추김치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오고갔다. 성우는 전화를 끊고 난 뒤, 아침의 햇살처럼 아리따운 승무원에게
티켓 확인을 했다.
간단한 안내방송을 마지막으로 기차가 드디어 스르륵, 앞으로 밀려 나아가기 시작했다.
유리창 밖이 온통 회색빛이었다가, 말간 하늘과 초록빛 산등성이들이
성우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수요일 아침 9시 출발 부산행 열차는 승객들이 드물었다.
주중의 한껏 여유로운 기차 칸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성우는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으로 창밖 풍경과 말끔하게 생긴 자신을 폰 카메라로 몇 장 찍었다.
특히 선글라스를 끼고 찍은 사진이 맘에 들었다. 이것, 이따가 인스타그램에 올려야지.
역시, 선글라스를 챙겨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입은 흰색 반소매 티셔츠와
반 청바지와 회색 운동화도 자신의 마음에 들었던 그는, 얼굴에 절로 흐뭇한 미소를 그렸다.
성우는 선글라스를 벗고, 앞 의자 등받이에 붙은 접이식 테이블을 펼치고
발치에 놓아둔 하얀 종이가방을 열어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테이블 위에 정갈하게 올렸다.
그가 기차에 타기 전에 산 생수와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오징어불고기 도시락이었다.
성우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쭉 들이 킨 후 오징어불고기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
또다시 전화가 울렸다. 승호였다.
“형, 날씨가…….”
“끊어. 행님 밥 먹는다.”
“응.”
사내들의 반 토막으로 잘린 단무지 같은 대화가 짧게 오고갔다.
성우는 뚜껑을 열고 향이 그다지 강하지 않은 쫄깃한 오징어불고기 한 젓가락과
잡곡밥을 한 술 떠먹었다. 창밖은 온통 푸른빛이었다. 날씨도 무척 좋았다.
성우는 어제 확인해두었지만, 혹시나 싶은 마음에 일기예보를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을 다시 켰다.
“현재 전국으로 호우주의보와 호우경보가 내려졌습니다. 현재 중부지방은
아직까지 쾌청한 하늘을 보이고 있습니다. 제주도와 남해안을 중심으로
내리던 여름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북상하고 있는데요.
앞으로 다음 주 월요일까지 200밀리미터 정도의 폭우가 내릴 것으로 예상되오니
철저히 대비하시길 바랍니다.
폭우의 영향으로 서해안을 중심으로 나타난 초미세먼지 경보는 해제되었습니다.
호우대비 잘하시길 바랍니다.
이 시각 현재 기온 서울 26도, 부산과 광주 28도입니다.
비가 오더라도 소중한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NMS 뉴스 김혜정이었습니다.”
잠깐만, 어제는 분명히 날씨가 맑다고 했던 것 같은데.
성우는 어제 날짜로 나왔던 일기예보를 보았다.
“오늘 중부지방에는 낮 동안 폭염이 이어졌습니다. 경기도 오산이 37.8도, 서울도 37도까지
치솟는 등 붉은색으로 보이는 수도권과 영서 지역은 35도를 웃돌았는데요.
내일은 태풍의 영향으로 오후부터 전국에 비가 내리겠습니다.
수도권과 영서, 전남과 경남, 제주도엔 최고 200밀리미터 이상의 폭우가 쏟아지겠고
충청과 전북에 30에서 80, 영동과 경북에도 10에서 40밀리미터의 비가 예상됩니다.
태풍은 중국 해안을 따라 북상해 내일은 서해상으로 진입하겠는데요.
태풍이 다가오면서 현재 제주 먼 해상엔 태풍 특보가,
그 밖에 남해와 서해상엔 풍랑 특보가 내려져 있습니다.”
그때서야 성우는 깨달았다. 내가, 어제 일기예보를…… 앞부분만 본 거구나.
뒤에 이어져 나오는 태풍 이야기를 못 들었구나. 방금 승호가 나한테 비 올 거란
이야기를 하려던 거였는데, 내가 말을 끊어버린 거구나. 맙소사.
‘부산에 비 엄청 온단다. 돌아댕기면서 맛있는 것 많이 먹어라 ㅋㅋ’
비 많이 오는데 비 쫄딱 맞으면서 돌아다니라는 거냐!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성우는 괜스레 욱하는 마음에 의석에게서 온 문자메시지 아래 험악한 답장을 보내려다,
화를 꾹꾹 누르고 그 메시지에 대한 간단한 답장을 보냈다.
‘응.’
그는 어제 미처 못 들은 일기예보 뒷부분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태풍에 동반된 비구름의 영향으로 전국 곳곳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습니다.
내일은 전국적으로 비가 내리겠고 해안 지역엔 바람이 매우 강하게 불겠습니다. 중부지방
서울과 대전의 낮기온은 26도에 머물면서 폭염의 기세는 꺾이겠습니다.
남부지방도 광주의 낮기온 28도, 대구 29도로 오늘보다 4, 5도 가량 낮겠습니다.
바다의 물결은 서해와 남해상에서 7에서 8미터로 매우 거세게 일겠습니다. 비는 월요일 오후부터
서서히 그치겠습니다. 기상정보였습니다.”
성우는 젓가락을 손에 쥔 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까는 분명 맑은 날씨였는데, 어느 샌가 저만치서 건달처럼 험상궂게 생긴 먹구름이
열차를 슬금슬금 따라오고 있었다.
기차로 두 시간 여를 달려 도착한 부산.
부산역에 발을 내딛자마자, 성우는 공기가 잔뜩 머금은 비의 기운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묵직하고 축축한 공기가 성우에게 꾸역꾸역 밀려왔다.
성우는 부산역 문 앞으로 나가 배낭을 다시금 어깨에 들쳐 업은 후, 그 앞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목소리에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물씬 묻어나는 중년의 택시기사가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어디로 모셔다 드릴까요?”
“재송동 장산으로 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운전석에 앉은 기사는 성우를 태운 택시를 몰고 역을 빠져나가 도로를 달렸다.
“비가 많이 오려나보네.”
차에 탄 성우가 차창 밖으로 비치는 회색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워낙 목소리가 우렁찬 성우의 혼잣말을 기사가 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그렇지예. 손님, 우산은 챙기셨습니까?”
“아뇨. 산에 올라갈 거라서 우비 챙겨왔어요.”
“우짜노, 산행하실라꼬예? 날씨가 마이 꾸무리한데…… 안될 낀데.”
“입산통제하나요?”
“비가 퍼붓듯이 마이 오면 그렇지요. 근데 그것보다…….”
“또 뭐가 있나요?”
“거, 장산에 귀신 있다 아입니꺼. 비 오는 날 장산에서 귀신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 카던데요. 보면 식겁한다던데.”
뜬금없이 귀신 이야기를 꺼내다니. 기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성우가 풋, 하며 웃었다.
“괜찮아요. 저는 그런 것 별로 안 무서워해서요.”
“그럼 다행이고예. 손님, 외지에서 오셨나 봐요?”
“네. 서울에서 왔어요.”
“서울! 실례지만, 어떤 일을 하십니까?”
“음악하고 있어요. 가수.”
“아이고, 연예인인갑다! 어쩐지 손님 인물이 훤하니 좋으시더라고예. 손님, 이름 물어봐도 됩니까?”
“네미시스 최성우에요.”
“네미시스? 아~ 아이돌 그룹이네! 맞지예?”
“록 밴드에요. 저는 베이스 치고 있어요.”
“멋진 일하시네요. 도착하실 때 사인 한번 해주이소.”
“네. 해드릴게요.”
“요새는 손님처럼 이래 젊은 사람들은 혼자 여행 마이 다니시더라고요.
손님도 억수로 어려 보이시는데.”
“선생님, 제가 몇 살 즈음으로 보이세요?”
“한…… 20대 초, 중반? 우리 딸내미하고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데요.”
“저는 30대에요. 나이 좀 있어요.”
“아이구야, 30대면 한창이지예. 손님, 억수로 동안이시네요.”
“감사합니다. 저, 동안이란 말 너무 좋아해요.”
기사가 정겨운 목소리로 기분 좋게 껄껄 웃었다.
택시 앞쪽 데시보드 위에 올려놓은 그의 신분증 속 나이는 이미 중년의 나이였지만,
기사의 목소리에는 매캐한 담배연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건강한 목소리였다.
택시는 길을 달리고 달려 장산 근처에 도착했다.
성우는 차비를 내고, 기사가 건네는 낡은 가죽수첩 속의 하얀 종이 위에 사인을 휘갈겼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기사의 따님의 이름을 썼다.
성우가 택시에서 내린 길은, 귀신이 뿜어내는 허연 입김 같은 물안개로 가득했다.
머지않은 곳에 바다가 있었다. 짭조름한 소금 냄새가 물안개에 물씬 배어있었다.
궂은 날씨의 길은 인적도 드물고, 피부에 닿는 공기도 싸늘했다.
그는 왠지 모를 오싹함을 느끼며, 희뿌연 물안개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결국, 하늘 위로 비가 한 방울씩 떨어졌다.
저녁이 되기도 전인데, 벌써 주위는 온통 어둠으로 휩싸여 있었다. 성우가 입은 우비 겉으로
굵직한 빗방울이 후두두, 떨어져 내렸다.
왼쪽 등산로 -
억새밭 -
장산너덜길 -
장산습지 -
장산 중턱 -
마고당 -
천재단 -
중봉
이날의 성우의 머릿속 등산코스는 이러했다.
길을 잃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쉬운 등산코스였다.
하지만 계획은 그저 계획일 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씨였다면 산 입구 쪽에 ‘입산통제’ 푯말이 세워져 있을 테지만,
장산 주변에 그런 표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굳게 마음을 먹은 성우는 산 입구 쪽으로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때였다.
“저기요!”
성우의 등 뒤에서 어린 여자애 목소리가 들렸다. 성우는 반사적으로 뒤돌아보았다.
하얀 반소매 블라우스와 무릎까지 오는 파란 체크무늬 스커트를 입은,
여중생 즈음으로 보이는 귀여운 단발머리 소녀였다.
핑크색 우산을 쓴 소녀의 양쪽 어깨에 책가방을 메고 있는 걸 보니, 조그만 소녀가 입은 옷이
그 학교 교복인 것 같았다.
그 소녀가 마주 서있는 성우에게 말했다.
“좀 있으면 비 마이 오는데요. 지금 산에 올라가면 위험할 수도 있어요.”
“입산통제 안했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그러고 이런 날은…… 여기서 이상한 것 보는 사람도 있어요.”
“맞나? 무섭겠네.”
“거짓말 아닌데요. 진짠데. 오빠야 올라가면 위험해요.”
“오빠 걱정하지 마. 괜찮아. 고마워.”
성우는 언제나 그랬듯,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귀여운 단발머리 소녀에게
끝까지 괜찮다고 말했다. 단발머리 소녀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어깨를 한번 으쓱, 올리곤 이내 뒤돌아섰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소녀가 어깨에 멘 남색 책가방에 달린 오렌지색 하트 키링이 달랑거리며 성우에게 안녕을 고했다.
식당은 산중턱 조금 더 올라간 지점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준비물을 간단히 채운 카키색 배낭과 하얀 우비와 튼튼한 운동화
그리고 허리에 두른 검은 힙색 안에 배터리를 꽉 채운 휴대폰.
무엇보다 성우는 자신의 체력과 자신감을 믿었다.
아직 해가 지기 한참 전인데도 길에는 짙은 어둠이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비도 점차 거세게 내리쳤다.
성우는 검은 야구 모자를 다시 고쳐 쓰고는, 등산로 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성큼성큼 내딛었다. 종아리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걷다보니, 성우와 반대로 내려오는 두 사람이 보였다.
부부로 보이는 60대 남녀 두 사람은 손을 잡거나 가까이 몸을 붙이지 않고,
각자의 우비를 챙기기에 바빴다.
가족이나 친구처럼 오랜 시간을 함께 거친 이들은 서로에게 오히려 살갑지 않았다.
그저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존재로 같은 공간에 머무는 것이다.
옷이 비에 젖어서인지 원래 좀 작은 건지 모르겠지만
숨 막히는 타이트한 등산복을 입은 덩치 큰 남자는 올라가는 성우와 마주치자마자,
마치 잘 아는 사람을 대하듯 성우에게 손사래를 치며 큰 목소리로 샤우팅을 외쳤다.
“총각!!!”
“네?”
“올라가지 마요! 지금 비 억수로 올라 카는데!”
“저는 지금 산에 밥 먹으러 가는데요. 빈달루 먹으러.”
“빈달루? 그기 뭔데요? 아, 빈달루고, 비니루고 어둡고 비 마이 와가꼬
올라가면 위험하고 억수로 무서운데요! 우짤라고! 올라가면 안 될 낀데! 식겁하는데!
무슨 산에 밥을 묵을 끼라고 올라간다 카노! 우짜면 좋노! 어떡해야 하노!”
“준이 아빠, 와 총각한테 화를 내노! 근데, 올라가면 진짜 위험해요! 내려가이소!”
성우와 마주친 그들은 거칠게 손사래를 치며 성우에게 내려가라고,
산행 자체를 반대했다. 특히 아저씨의 말투는 속사포 래퍼의 그것과도 흡사했다.
경상도 사람들은 대체로 말의 속도가 빠르고 목소리가 컸다.
우렁찬 목소리의 자신만 보더라도 그랬다.
“올라가지 마세요! 진짜 조심하셔야 돼요!”
아저씨를 뒤따르던 아주머니가 산길을 내려가면서 그를 뒤돌아보며 외쳤다.
조심하라. 비가 오니까. 어두우니까.
성우는 한 걸음 한 걸음 산을 올라가면서 그 세 마디를 되뇌고 되뇌었다.
그는 목적이 분명한 올곧은 사람이었다.
한번 결심이 서면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강한 사람이었다.
빈달루 커리를 먹어야 해. 조심해서 올라가면 되겠지.
머릿속이 오로지 빈달루 커리로 가득 찬 성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온 세상을 내리치듯 퍼붓는 빗속에서 성우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첫댓글 그놈의 반달루 카레가 모라고😭 위험하다 안카나~~~!! 가지뭬여 무습따아아~~~~
큰일나는 일은 없도록 신경써서 썼으니 재밌게 읽어주세요^^ 고맙습니다~~^^*
NMS 뉴스 김혜정 기자님 깨알등장 😍ㅎㅎ
담편보고싶네요~~
뜻밖의 카메오 출연ㅋㅋㅋ 다음편도 열심히 다듬어 올릴게요^^ 고맙습니다^^*
카레와 오빠의 안전을 맞바꾼건가요? 오빠 진짜로 위험 무릅쓰고 맛집 찾아다니시는 건 아니시겠죠?? 넘 재밌네요~~다음화도 기대합니다
성우오빠는 건강하고 용감하신 분이니까, 무사하실 거에요^^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빠.... 택시기사 아저씨부터 학생. 부부. 3번이나 말렸잖아요 좀 들어주세요 ㅠㅠ
말렸는데도 그것을 뿌리치고 먹고싶은 걸 먹겠다는 일념하에 빗속을 뚫고 산을 오르시는 성우오빠ㅠㅠ 끝까지 재밌게 읽어주세요^^
오빠 그만 가요ㅋㅋㅋㅋㅋㅋㅋㅋ
붙잡는다고 쉽게 잡히지 않으실 성우오빠~ㅋㅋㅋㅋㅋㅋ 마지막까지 재미있게 읽어주세요~고마워요^^*
거 참. 고집......
실제 성우오빠는 캐릭터가 어떤지 잘 모르겠어서..ㅋㅋ 저의 망상 상상이 버무려진 팬픽입니다 ㅋㅋㅋ 재밌게 읽어주세요~민경님,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