쟌느의 화려한 네온사인이 준영의 왼쪽 시야를 어지럽혔다. 마치 못 올 곳을 온 사람마냥 잔뜩 인상 쓰고 있는 폼이 보는 이로 하여금 꺼림직함을 느끼게 한다. 그는 담배 한 개피를 피워 물며 거친 호흡을 가다듬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곳까지 온 것일까. 굳이 확인해야 했던가.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 전문적으로 로비스트와 손을 잡은 것 같습니다.
- 로비스트라 했습니까?
- 예.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지만, 요즘 만나시는 분들...조심하셔야 겠습니다.
- 잠깐, 그렇다면 지금 박 과장 말은 그들이 고용한 로비스트가 내 주변 어딘가에 포진해 있단 말이오?
- 그럴지도 모른다는 가정하에 말씀드린 겁니다.
단호한 박 과장이 한마디가 그의 심장을 차갑게 매만졌다. 그렇다면 첫 만남에서 느꼈던 조심스러운 수줍음도, 아이를 감싸안으며 흘렸던 눈물도 모두 거짓이란 말인가. 믿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었기에 이곳으로 발걸음 한 것이다. 그의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해야 했으니까.
준영은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 쟌느 입구로 발길을 옮겼다. 한 발 한 발 떼는 발걸음이 왜 이리도 힘든 것인지 그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스쳤던 여자로 생각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왠지 모를 압박감은 그 모든 이성을 깡그리 외면하고 말았다.
그가 들어서자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듯 사내 둘이 재빠르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안내 받은 밀실은 늘 그들과 만나던 그 호수였다. 철저한 방음처리가 무척이나 견고했던 바로 그 방, 준영은 오늘도 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느 때와 달리 심호흡으로 거칠게 오르내리는 가슴을 달래야만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약속 시간보다 좀더 이른 시간에 나타난 그의 모습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중년인 셋이 있었다.
" 장 사장, 웬 일로 이리 일찍. 우리가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면 크게 엇갈릴 뻔 했구료."
" 늘 저를 기다려 주신 세분, 오늘은 제가 기다려 보려 일찍 왔는데 이거 선수를 또 빼앗겼군요."
" 무슨 말을...허허허. 우리도 방금 왔소이다."
악수를 건넨 세 사람과의 인사가 끝났다. 준영은 자리에 앉으며 이미 비워진 술병을 바라보았다. 방금 왔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인 것이다. 준영은 세 늙은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나눴을 말들을 훤히 꿰뚫어 본다는 듯 눈을 가늘게 치켜 뜨고 상대편의 가식적인 웃음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급하게 문이 열리며 헐레벌떡 뛰어 온 박 과장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준영을 원망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사장님, 말씀도 안 하시고 이렇게 일찍 오시면..."
" 괜찮아요. 오늘은 특별히 할 일이 없어 그랬습니다. 앉아요, 박 과장."
" 예."
불편한 자세로 엉거주춤 자리를 차지한 박 과장은 행여나 그가 실수라도 했을까, 걱정을 하는지 연신 준영의 눈치만 살펴댔다. 이 자리를 그리도 싫어하던 준영이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는 소식에 놀란 가슴을 얼마나 쓸어 내렸는지 모른다. 박 과장은 그렇게 불안한 마음으로 발걸음 한 것이다. 행여나 불같은 그의 사장이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정계인들에게 돌이키지 못할 실수라도 할까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가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드디어 준영이 그리도 싫어하던 한 중년인의 주사가 시작되었다. 그는 속으로 차마 내뱉지 못한 욕들을 곱씹으며 상대편을 빤히 노려보았다. 그리고 박 과장이 걱정했던 일이 서서히 그 진면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이 봐! 여기 책임자 누구야! 술이 떨어졌잖아!"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리 없다. 하지만 중년인의 주사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를 바라보는 준영의 눈썹이 꿈틀대며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했다. 이에 박 부장은 가슴을 졸이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벨을 눌렀다. 나이야 어쨌든 그가 서열로는 가장 낮은 직급이었으니까.
곧 이어 웨이터가 들어와 급하게 머리를 숙였다.
"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 술이 떨어졌어. 그리고 분위기도 이쯤 됐으니 이제 슬슬 마담이라도 얼굴을 보일 때가 된 거 아냐? 여기 책임자 불러와!"
" 죄송합니다만, 지금은 다른 분 접대중이라."
" 뭐라고? 도대체 여기가 뭐 어때서 자꾸 피하는 거야? 오늘은 이대로 못 가! 어서 데리고 와!"
" 다른 애들이라도..."
" 마담 데리고 오라니까!"
" 그 분은..."
" 허어~ "
감히 혜영의 이름도 제대로 읊지 못하는 웨이터만 난처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창범이 뛰어들어 그를 구제한다.
" 죄송합니다만,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모시고 오겠습니다."
창범은 입에 발린 거짓말로 그들을 달래놓고 술에 취하면 고이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나마 멀쩡한 준영이 마담이란 존재에 대해 무관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오늘은 안타깝게도 이곳으로 발걸음 한 목적을 아예 마담이란 존재에 초점을 맞추었으니 그런 창범의 말이 안 먹혀들 수밖에.
역시나 돌아서는 창범의 뒤통수에 정확히 꽂히는 한 마디는 그 스스로도 명확한 대답을 찾지 못할 만큼 날카로웠다.
" 여기, 대통령께서 방문 하셨나 보지? 김 한석 장관님을 뒷전으로 미루고 다른 고객을 모신다라....참 이해하기 힘들군."
그 말 한마디에 룸을 나가려던 창범의 발길이 뚝 멈추었다. 문손잡이를 틀어쥐고 있는 그의 손에 필요 이상의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놀란 건 비단 창범뿐이 아니었다. 곁에 있던 박 과장도 입을 떡 벌인 채 준영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흐뭇한 웃음을 보이는 이들은 김장관을 제외한 두 중년인 뿐이다. 웬일인지 기뻐해야 할 김장관이 준영을 더욱 떫더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 오늘은 또 무슨 핑계지? 처음엔 아팠다. 두 번짼 출근하지 않았다. 세 번 짼 출타중이다. 네 번째...다섯 번째...더 남은 건가? 설마 오늘은 데려 온다는 말로 시간을 끌다 적당히 취하면 대리운전기사에게 떠넘겨 돌려보내는 건 아니겠지?"
정곡을 찔린 창범은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돌아서서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압박감에 억눌려 감정표현을 드러내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 그럴리가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모셔오겠습니다."
무작정 그렇게 대답하고 룸을 나섰다. 하지만 돌아서 나온 창범의 온 몸은 여전히 긴장으로 굳은 채였다. 그는 곁을 스치는 웨이터를 붙들고 물었다.
" 마담, 어딨지?"
" 패밀리 고객 접대중입니다."
" 패밀리? 수련이 왜 그들을 상대중이지?"
" ...... "
" 젠장!"
창범은 쓴 욕을 내뱉으며 패밀리 접대실로 향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준영이었다. 결코 창범의 탓이 아니다. 그는 이 세계에 몸담고 생활하며 나름대로 익혔던 본능이란게 존재했다. 그리고 늘 조심성 있게 주변을 의식했다. 다만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나 그 본능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뿐이다.
다행히도 준영은 창범의 뒤를 쫓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눈동자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꼭 틀어쥔 주먹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킨다. 그마만큼 많은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창범을 쫓아 마담이 정녕 혜영인지 확인 해보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럼에도 굳은 듯 발길을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나서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웃어주어야 할까, 화를 내야 할까, 그도 아니면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일언반구 없이 돌아서야 할까. 풀리지 않는 문제를 접했을 때처럼 그저 눈앞이 까마득했다.
" 사장님, 속이 안 좋으십니까?"
언제 나왔는지 박 부장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입술을 꼭 깨물고 서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그가 무척이나 안쓰러워 보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관심조차도 준영에게 있어선 귀찮은 간섭에 불과 했다.
" 아니, 그냥 꽉 막힌 밀실에 갇혀 있으려니 답답해서 그럽니다."
" 장관님이 찾으시는데요."
" 화장실 갔다고 해요. 조금만 더 있다간 화산 폭발하듯 넘치겠어요."
" 알겠습니다."
준영은 투명스럽게 대꾸하고 붉은 고급 카펫이 깔린 복도를 스쳐 지나갔다. 잠시 후 화장실을 발견한 그는 망설임 없이 들어섰다. 까칠한 준영을 제일 먼저 맞아준 건 다름 아닌 세면대 거울이다. 붉은 빛이 도는 은은한 조명아래 반사되는 준영의 모습은 산송장과 다름없었다. 아니 그가 스스로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준영은 피곤해 찌듯 얼굴을 씻어내고픈 마음에 물을 틀고 양손으로 받아 냈다. 차가운 느낌이 전신으로 퍼지자 한결 기분이 나아진 것 같다. 간단하게 세수를 마친 뒤 설치된 일회용 수건으로 흘러내리는 물기를 닦아냈다. 그때, 화장실 밖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속삭이듯 울려 퍼졌다.
" 도대체 왜 이러는 거니!"
" 뭐가?"
" 위에서 알면 어쩌려고 단독행위를 하고 다니는 거야!"
" 내가 알아서 해. 그러니 괜한 걱정으로 얼굴 붉히지 마."
" 그걸 말이라고 해? 너 요즘 이상해. 아니, 너 하고 다니는 행동들 이해가 안가! 도대체 왜 대한 엔지니어링에 손을 댄 거야! 거긴 미우나 고우나 설이 생부 회사잖아!"
" 누가...누가 설이 생부야! 다시는 내 앞에서 그 사람 이야기 꺼내지 마!"
" 권 혜영!"
닫힌 문 사이로 흘러 들어오는 이름. 가슴 아프도록 애잔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리도 걱정하고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 내 이름은 권혜영이예요. 권.혜.영.....준영씨...
혀끝에 맴도는 그의 이름을 너무도 소중히 불러줬던 그녀, 그리고 그때 알려주었던 세 글자의 이름, 권혜영. 그 당시 느꼈던 따스한 온기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지금은 싸늘한 한기가 되어 준영의 목덜미를 섬뜩하게 훑어 내렸다.
우연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이렇게 억지를 부려서라도 어긋난 퍼즐 조각을 꼭 들어맞게 끼우려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는 혜영의 신분에 너무도 선명한 선을 그어주고 있었다.
" 정신차려! 그 회사, 네 손으로 일으킨 회사야. 네 신분 들통날까 노심초사하면서도, 위쪽에서 떨어질 불호령 감수하면서도, 무모하게 감행했던 프로젝트였잖아. 너 그 회사 살리려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닌 지난 삼 년을 잊었니?"
" 이러지 마. 나도 심란해. 제발 오빠만이라도 날 좀 내버려 둬."
" 너 후회 할 까봐 그래. 놈한테 모질게 굴고 어딘가에서 후회의 눈물 흘릴까봐!"
" 아니! 난 후회할 짓 따윈 하지 않아! 내 일에 있어서 후회란 단어는 없어!"
" 너!"
" 몰라! 난 그렇게 배웠고 훈련 받았어!"
" 왜 이렇게 된 거니. 죽고 못살겠다며 애까지 낳아 혼자 키울 땐 언제고..."
" ...... "
" 일 이렇게 만든 거 너잖아. 네가 저 결혼 성사시킨 거나 다름없어.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발버둥 친 거지. 생각해 봐. 회사만 저 모양으로 안 만들었어도 굳이 신성전자의 재력이 필요했을까?"
" 내...뒷 조사 하고 다녔어?"
" 아니, 건재하던 대한 엔지니어링이 수 주일만에 부도 위기를 맞았는데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니. 계약관계에 있던 회사들이 줄줄이 떨어져 나간데다 자금줄마저 꽉꽉 막혔지! 그것뿐이면 다행이게? 끌어다 쓴 사채며 은행 대출금, 만기가 멀었는데도 죄다 독촉하고 있어. 장수련이 아니라면 단 시간에 이렇듯 회사 하나 쑥대밭으로 만들긴 무리수가 따르지."
" 나한테서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야?"
" 당장 그만 둬! 모두 정상으로 돌려놓으란 말이야."
" 그럴 수 없어."
" 혜영아!"
" 우리 설이를 빼앗아 갔어! 내 품에서 내 자식을 떼어갔단 말이야! 더 이상 얼마나 참아야 해? 오빤 몰라. 나, 믿었던 사랑에 배신당했어. 자식 빼앗긴 어미 눈에 보이는게 뭐가 있겠어! 하나밖에 없는 사랑에 배신당한 가련한 여자에게 남은게 오기밖에 더 있어? 할 거야. 날 말리려 하지 마! 우리 설이 내 품에 안는 그 날까지 밟을 수 있을 만큼 밟아 놓을 거야. 나 같은거 죽도록 무시해도 좋아. 어차피 그 사람, 내겐 더 없이 과분한 남자였으니까. 하지만 내 피와 살, 우리 딸...떼어 가는 건 용서 못해! 설사 그게 하늘이라 할지라도..."
" 설이....설이가 어디 있다고?"
두 사람의 대화가 잠시 중단되었다. 하지만 곧 이어 남자의 애 타는 듯한 부름이 이어지며 사람의 흔적이 지워졌다.
" 혜영아, 자세히 이야기 해봐. 권 혜영! 거기 서!"
가슴에 담고 있던 울분을 토해낸 그녀가 도망치듯 자리를 떳던 모양이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그 뒤를 잇는 삭막함은 머리털이 쭈뼛쭈뼛 곤두설 만큼 대단했다.
화장실 문 앞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준영의 손에서 하얀 수건이 떨어졌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감당하지 못해 꼭 감아야 했다. 조금 전 세안으로 인해 젖은 머리에서 투명한 물방울이 흘러내린다. 하지만 흘러내리는 건 비단 물방울만이 아니었다. 축 쳐진 몸이 눈 녹 듯 흘러 바닥으로 스며들 것 같았다. 아니, 그건 준영의 바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대로 땅속으로 꺼져 영원히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아이를 안고 있는 민 여사의 눈동자가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경계하고 있었다. 어제 저녁 내내 끙끙 앓던 설이 정신을 차린 건 오후 3시쯤이었다. 유난히도 병원을 싫어하는 어린것을 위해 부득부득 우겨 집으로 데려 왔다. 언제 아팠냐는 듯 생기 발랄하게 뛰어 노는 설을 바라보며 웃음을 보였던게 불과 10분전이다. 하지만 지금은 품에 있는 그녀의 손녀가 어떤 재롱을 부려도 웃어줄 여유가 없었다. 문제는 눈앞에 있는 지민의 붉은 눈동자에서 비롯된다.
그는 민 여사를 노려보며 세부의 신문을 눈앞에 던져 놓고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계속 저(低)자세를 유지했다. 알게 모르게 풍겨오는 기운이 쉽사리 넘어가지 않을 눈치다. 하지만 오늘은 그녀도 단단히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드디어 민 여사를 노려보기만 하던 지민의 입술이 슬그머니 열렸다.
"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저 얼굴이 누구입니까. 어머니 아들 안 지민 맞습니까? 헛, 저도 모르는 결혼이라...도대체 혼자 무슨 꿍꿍이로 이런 일을 벌이신 겁니까! 오늘 제가 얼마나 황당한 일을 당해야 했는지 아십니까? 아침부터 걸려오는 전화, 본인도 모르는 결혼 소식을 남의 입을 통해 들어야 했단 말입니다!"
" 살기 위해서 이 방법밖에 없었다."
" 살기 위해서라고요? 누구요? 단지 어머니 혼자 살아보자고 이런 일을 벌이신 겁니까? 아들 인생을 담보로 부귀영화 누리시려고요?"
" 너 취했니?"
" 아뇨. 맨 정신입니다. 오늘 기도 안 차는 축하 전화 받느라 매일 마시던 술은 단 한 방울도 입에 댈 수 없었다고요."
" 맨 정신으로 이 어미에게 눈을 부릅뜨는 게냐? 도대체 네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공들여 쌓은 탑이 한순간 무너지게 생겼는데 그때 넌 도대체 뭘 했니!"
" 여기 저기 발바닥 땀나게 뛰어 다녔습니다. 어음 기일 연장하고 들어왔던 어음 할인하고, 어떻게든 자금 좀 돌려보려 피나는 노력을 했어요!"
" 그래서 나아진게 뭐가 있어!"
오늘은 민 여사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회사만 살릴 수 있다면 그녀는 더한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발버둥친다 하지 않는가. 민 여사가 꼭 그 심정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욕심은 한없지만 본인이 싫다는 결혼 이렇게 일방적으로 추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민 여사는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정사장의 명성과 부가 그들에게 희망이 되어 줄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민이 이토록 완강하게 나올지 미처 생각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겠지 하고 안심했다. 안타깝게도 붉은 실핏줄이 선 지민의 분노한 눈동자에 이 모든 기대는 여지없이 부셔버렸지만 말이다.
" 이 결혼 못합니다. 내일 그 여자 만나서 확실히 매듭짓고 오겠습니다."
" 못된 녀석, 이번만은 나도 물러 설 수 없어! 좋아, 갈 때까지 가보자꾸나.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두고 보자고!"
민 여사는 살벌한 두 사람의 기운을 이겨내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린 설을 소중히 안으며 안방으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지민 또한 분에 못 이겨 그의 방으로 들어왔으나, 쉽게 잠이 들지는 못했다. 또렷한 정신이 어둠 속에 감춰진 실낱같은 빛줄기를 찾아낼 정도로 멀쩡했다. 그렇게 뒤척이다 끝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재빠르게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지민이 듣고 싶어하는 목소리는 대답이 없었다. 소리샘으로 이어지는 음성메시지를 들으며 힘없이 전화를 끊은 지민의 핸드폰 액정에 혜영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히 깜박였다.
- 이러지 마! 당신...나한테 이러면 안 돼. 지민씨는 내게 이럴 자격 없어.
옷깃을 부여잡고 분에 떨며 했던 혜영의 그 한마디가 지민의 마음을 날카롭게 후벼팠다. 이 걷잡을 수 없는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옳을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 가슴 가득 안아주고픈 여자였다. 하지만 그 날 보았던 혜영의 분노와 눈물이 알 수 없는 망설임으로 남아 그의 발길에 족쇄를 채우고 있었다.
이제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떨어지지 않는 발길이 신문지상에서 제 멋대로 떠든 약혼 기사로 인해 더욱 무거워지고 말았다. 제발 그녀가 오해라도 말았으면 좋으련만.
커튼 사이로 살풋 고개를 내민 아스라한 황금빛이 지민의 눈동자에서 흘러내리는 뜨거운 체액을 잡아냈다. 그는 울고 있었다.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혜영을 향한 그리움과 미래에 대한 절망감이 거칠게 뛰는 붉은 심장을 옥죄여오고 있었던 것이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답답한 가슴이 절로 사그러 들만큼 서럽게 흐느꼈다.
뒷날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사무실에 출근한 준영은 밀려오는 짜증스러움을 억누르며 천훈이 던져주고 간 사진 한 장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황량한 사막 한 가운데 홀로 던져진 기분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절망적일 지도 모른다. 그칠 줄 모르고 짧게 세어 나오는 한숨들이 바로 그 증거들이었다.
- 그 회사, 네 손으로 일으킨 회사야. 네 신분 들통날까 노심초사하면서도, 위쪽에서 떨어질 불호령 감수하면서도, 무모하게 감행했던 프로젝트였잖아.
낯익은 남자의 목소리, 살 떨리도록 두려웠던 사실을 현실화 시켜버린 그 음성이 준영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이젠 그녀를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고민과 번민이 그의 이성을 서서히 잠식해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에 분분히 고민하는 그 자신이 한심스럽게도 했다. 잊으면 그만인 여자였다.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아도 될 여자의 신분에 이렇듯 방황하는 이유를 몰랐다.
준영은 피곤한 듯 관자돌이를 지긋이 누르며 키폰으로 박과장의 출근 여부를 물었다.
" 박 과장 출근했나요?
[ 확인해드릴까요, 사장님? ]
" 내가 좀 보잔다고 해요."
[ 알겠습니다. ]
여비서와 통화가 끝난 후 박 과장은 정확히 10여분만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침부터 그를 찾는 준영의 태도에 내심 불안했던지 들어오는 순간부터 어깨가 축 쳐져 있었다. 문득 준영은 박 과장이 무척이나 지쳐 보인다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른 아침 다운 된 박 과장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위로해주기 위해 억지 웃음으로 맞이했다.
" 좋은 아침입니다."
" 예, 사장님."
" 식사는 하고 나오십니까?"
" 예, 마누라가 항상...아 죄송합니다. 혼자 사시는 분께."
" 아뇨. 듣기 좋네요. 매일 사무실에 앉아 할 일 없이 싸인만 해대는 나보다는 발로 뛰는 박 과장이 더 잘 먹어야 하지 않겠어요?"
" 감사합니다."
비록 형식적인 분위기에 불과했지만 준영의 웃음은 직방으로 통했다. 축 쳐져 들어 온 지 이,삼분만에 주름 진 박 과장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보였던 것이다. 누그러진 분위기 속에서 박 과장의 긴장감이 어느 정도 완화되자 준영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 어제 있었던 김 한석 장관과의 만남, 자세히 보니 손잡았다는 로비스트가 그곳 마담인 것 같더군요."
" 아, 아니 사장님이 어떻게 그걸..."
" 꽤 유명한 여자 같은데."
" 예, 저도 말로만 들었습니다. 아직 얼굴을 보지 못했고요."
" 청탁을 한 그 쪽도 아직 마담을 못 만나본 것 같던데, 그건 어떻게 된 겁니까?"
" 글쎄요. 이쪽에서 워낙 완강하게 버티다 보니 어쩌면 아직 추진할 계획을 미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죠. 아니면 마지막 히든카드를 쥐고 있을 수도..."
" 히든카드라..."
준영은 박 과장의 마지막 말을 되읊으며 음미했다. 그 히든카드가 무엇일까. 이내 그는 잘생긴 입매에 묘한 웃음을 보이는 것으로 생각을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박 과장에게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 오늘 저녁, 그들과 면담을 하고 싶군요. 9시경 로즈마리로 잡아요."
" 사장님, 로즈마리라면."
" 내 말대로 해요. 박 과장이 먼저 가서 예약을 완료하고 그 늙은이들 취향으로 여자도 봐두세요. 그리고 내 여자는..."
" 사장님 여자요?"
박 과장의 눈이 커다랗게 치켜 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사생활은 어떨지 몰라도 일을 하는 데 있어 그것이 공석이던 사석이든 간에 결코 여자와 어울리는 법이 없던 준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영은 그런 박 부장의 반문을 묵살하고 말을 이었다.
" 키는 대략 168정도에 희고 갸름한 얼굴의 젊은 여자로 해요. 섹시하고 대담한 여자보다는 다소 청순하고 순수해 보이는 타입으로..."
준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주문을 하고 있었으나 듣는 박 과장은 땀이 삐질삐질 날 정도였다. 로즈마리는 업계에서도 술보다는 여자장사로 정평이 나 있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순수한 여자를 찾아놓으라니, 이보다 더 어려운 주문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박 과장은 '예'하는 대답으로 간단히 자신의 의사를 묵살하며 사장실을 나서야 했다.
그리고 준영은 이로써 장수련이 아닌 권혜영에 대한 판단의 기회를 다시 한번 잡은 셈이다. 술집에서 일을 한다고, 또는 유명한 로비스트가 그녀의 진정한 본 모습이었다고 그가 생각 하는 일반적인 상식과 같으리라는 법은 없다. 어쩌면 로비스트라는 신분은 준영으로 하여금 오히려 혜영에 대한 존재를 더욱 넓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될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술집 마담이란 신분은 달리 생각해야 했기에 결국 해서는 안 될 일을 감행하고 있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더 없는 실망감을 안고 돌아서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미심 적은 마음으로 걷어내지 못할 앙금으로 남는 것보다 나으리란 생각을 해보았다. 미련 없이 돌아서 버리지 못할 여자라면 차라리 정면 돌파로 그녀와 부딪쳐 직접 확인해봄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준영은 그 방법으로 혜영에 대한 실망감을 덮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주어지는 기회라 애써 둘러댔다. 준영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혜영의 이미지가 술집마담이 아닌, 그저 평험한 한 아이의 엄마, 꽃집의 순수했던 여자로 굳혀질 수 있는 또 한번의 기회. 하지만 알게 모르게 억지 퍼즐 끼워 맞추기 식으로 스스로가 만든 만회에 불과하다는 압박감이 준영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렇다. 이것은 그녀에게 주어진 기회가 아닌 준영 스스로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구실이었다. 그녀를 꽃집의 수줍었던 여자로 기억하고픈 마지막 몸부림.
오늘도 혜영은 커다란 빌딩 앞에서 각오를 다지며 서 있었다.
어젯밤, 매일 배달되던 신문에 살짝 끼워서 들어온 스포츠 신문 한 부가 문제가 되어 선영에게 이유를 추궁 당해야 했다. 결국 선영은 이대로 가다간 양쪽 모두 파탄의 경지에 이를까 두렵다며 자신이 나서 설을 데려오겠다 고집을 피우기에 이르렀다. 혜영은 그렇게 나오는 선영을 단 한 마디로 묵살해 버렸다. 그리고 싸늘하게 비워진 설의 작은 침대에 누워 밤새 눈물 흘리며 다짐했던 일을 시행하고자 오늘 이 순간 건물 앞에 선 것이다.
습관처럼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며 계단을 올랐다. 선글라스로 가려진 그녀의 눈동자에 서린 단호함이 오늘 있을 일에 대한 중요성을 드러내 주었다. 살짝 불어오는 미풍에 굵게 웨이브 진 그녀의 머리가 탐스럽게 흔들렸다. 스치기만 해도 느낄 수 있는 상큼한 라일락 향이 혜영의 지적인 이미지를 업 해주고 있다.
회전도어를 밀치고 빌딩 홀로 들어선 그녀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남자들의 안내를 받아 간부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남자의 태도가 그의 신분으로 우러러 보기엔 그녀가 얼마나 까마득한 존재인지를 알게 해 주었다. 하지만 이 남자도 알고 보면 이 빌딩 한 채를 통틀어 매우 중요한 직책을 맞은 간부중 한사람이었다. 마흔이 넘어 보이는 얼굴에 긴장감이 서려 있었지만 남자는 분명 한 회사의 고위간부였다. 다만, 회장에게서 떨어진 한 마디가 한 참 어린 혜영의 존재를 어렵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20층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남자는 그녀와 보폭을 맞춰 고급 카펫이 깔린 비서실을 지나쳐 회장실로 안내했다. 남자가 노크를 하자 노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묵직한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 모셔라."
그 한 마디로 모든 상황은 끝났다. 남자는 문을 열고 혜영을 들여보냈다. 그녀가 들어서자 듬성듬성 빛 바랜 머리가 다소 위엄 있어 보이는 노인이 직접 좌석에서 일어나 맞아주었다.
" 어서 오시게."
" 건강하신 모습 뵈니 기분이 좋군요."
소파를 권하는 노인의 손짓에 단정한 몸을 앉히며 건넨 그녀의 인사였다. 짐짓 건방져 보일 수도 있는 안부의 한마디였으나 노인은 너털웃음으로 기분 좋게 받아 들였다.
" 허허허, 다 덕분이지."
" 별 말씀을 다하시네요."
혜영은 벗어 내린 선글라스를 가지런히 접으며 웃었다. 눈앞에 있는 노인에게서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푸근한 감정이 그녀를 편안하게 만든다. 마치 시골에 계시는 아버지를 대면하는 것 같아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인이었다. 눈가에 잡힌 세월의 잔 흔적과 입가에 서린 한량의 미소가 더 없이 아버지와 똑 닮아 있었다. 비록 찾아 뵐 수 없어 잊혀져 가는 아버지였지만 혜영은 이 노인을 보며 지워져 가는 한 폭의 인물화를 조심히 덧칠했다. 그렇다면 그녀와 마주 앉아 있는 노인의 정체는 무엇일까. 흔히 볼 수 있는 외모였으나 꼭 다문 입매과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한 흑색 눈동자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짐작케 했다. 곧 이어 그의 신분을 확신하게 하는 대화가 이어졌다.
" 바쁠 텐데 이렇게 몸소 들려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네."
" 당연한 말씀을 하시네요. 그렇지 않아도 회장님 축하드릴 일이 있어 가게를 안 찾아 주시면 저라도 찾아뵐 심산이었습니다."
" 허허허, 말만이라도 고맙구먼."
" 여전히 웃음이 많으세요."
" 그건 자네도 마찬가질세."
이야기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아마도 이 만남은 노인 쪽에서 먼저 원해 연락을 취한 것 같았다. 혜영은 흩어지지 않는 모습으로 앉아 노인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치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미리 짐작이나 하고 있듯이.
노인은 꺼내기 어려운 말인 듯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비서에게 혜영이 마실 커피를 한잔 주문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요즘 많이 바쁘지?"
" 항상 그렇죠. 회장님은 어떠세요?"
" 요즘은 다른 일로 바쁘지 뭐. 하나밖에 없는 손녀딸 시집 보내는게 회사 경영하는 것보다 더 어렵구먼."
" 허전하시겠어요."
" 그렇다네. 똥오줌 쌀 때부터 귀애 길렀던 앤데 그렇게 훌쩍 떠나버리려 하니 영 섭섭한게 아니야."
" 언젠가 해야할 결혼이라면 미리 하는 것도 나쁘진 않죠."
" 미리 하는 것도 아닐세. 나이가 나이니 만큼 오히려 늦었다 할 수도 있지."
"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에 깜짝 놀랐어요. 언론이 들썩일 만도 하죠. 동종업계도 아니고 감히 상상도 못했던 사위감을..."
" 상상 못했던 건 아니라네. 우리 민아가 오래 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인물이라서."
지금 혜영은 신성전자의 정회장과 마주 앉아 있었다. 부른 이유를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정민아가 오래 전부터 지민을 마음에 두고 있었단 소리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프로답게 일말의 감정변화도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 혜영의 태도가 불안했던지 정회장은 조심히 본론을 들춰내기 시작했다. 길게 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 내가 자네를 부른 이유는 한가지 묻고 싶은게 있어서야."
" 부담 없이 여쭤보십시오 회장님."
" 오해말고 들어주게. 절대로 자네 하는 일에 그 어떠한 테클을 거는게 아니니까 말이야."
" 예."
" 대한 엔지니어링, 뒷조사를 좀 해봤어. 도대체 어떻게 해서 나름대로 건실하던 그 회사가 순식간에 그 지경까지 치닫게 되었는지를 말이야. 헌데 뒤에 자네가 있더군. 내가 묻고 싶은 건 도대체 자네가 대한 엔지니어링을 어떻게 알고 있으며 어떤 원한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일세. 실상 원한이 아니고서야 이렇듯 송두리째..."
정 회장은 그 다음 말을 생략했다. 일말의 동요도 느낄 수 없는 혜영의 눈동자가 이미 모든 말을 알아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시 정회장의 생각은 옳았다. 혜영은 어제 저녁 정회장의 전화 한 통에 모든 것을 감지했다. 그 정도의 능력이라면 그 뒷 배경에 혜영이 있다는 사실쯤은 쉽사리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신의 손 장수련'의 존재를 너무도 확연히 알고 있는 정 회장이었기에 충분히 예측 할 수 있었다.
의외로 꼭 다문 혜영의 입술이 열리지 않자 정 회장이 다시 한번 입술을 떼었다.
" 큰 고객을 주로 만나는 자네가 대한 엔지니어링을 상대로 로비활동을 청탁 받았을 리는 없을 거라는게 내 생각이야. 짐작컨대 대한엔지니어링에서는 자네의 존재도 모르고 있음이 틀림없네. 작은 중소기업이 알기에 자네의 존재는 너무 커. 그렇다고 대한엔지니어링의 오너 안지민이 다른 사람에게 그만한 원한을 살만큼 악한 사람도 아니네. 내...생각이 맞는가?"
" 예."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짧은 대답, 하지만 그 이상의 말은 없었다. 혜영이 의도적으로 말을 아끼고 있는 것 같았다.
" 자네 개인적인 원한이란 말인가?"
" 예."
" 솔직해서 좋군."
" 감사합니다."
" 그래. 이야기나 들어봄세. 만일 내가 안지민이란 사람을 잘 못 본 것이라면."
" 아뇨, 회장님. 회장님이 보신 대한엔지니어링의 오너는 분명히 선량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때론 그 선량함이 살아가는데 있어 막대한 장애가 될 수도 있어요."
" 허허허, 그거 괜찮은 이론이군. 자네 말대로라면 적당히 선하고 악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 글쎄요."
그녀는 애매모호한 말로 대답을 마무리지었다. 그때 혜영의 핸드백에서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려왔다. 받지 않는 혜영에게 정 회장은 손수 권해주었다.
" 전화가 울리는구만. 받아보게나."
" 죄송합니다."
" 별말을."
" 여보세요."
[ 그 여자가 빌딩 정문을 막 들어갔습니다. ]
" 알았어요."
혜영은 자신의 운전기사의 그 한마디를 듣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벽에 걸린 시계를 들여다보며 조심히 계산에 들어갔다. 운전기사가 말한 '그 여자'가 회장실 문 앞까지 당도할 시간을 말이다.
" 더 길게 통화해도 되는데."
" 아닙니다. 별 일 아니예요. 그러나 저러나 회장님, 손녀분과 약속 있다고 안 그러셨나요? 제가 시간을 뺏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도 이 시간 이후에는 약속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찾아뵈었어요."
" 아니야. 부담 갖지 말게. 난 괜찮으이."
정 회장이 손을 내저으며 그녀가 가지고 있는 부담감을 덜어주었다. 그때였다. 비서실에 당도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척이나 명랑하면서도 들떠 있는 목소리였다. 혜영은 정민아가 비서실에 도착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때를 기다려 또렷한 목소리로 계획적인 대사를 읊어갔다.
" 대한엔지니어링은..."
민아의 가벼운 발걸음이 회장 비서실로 들어섰다. 할아버지와의 점심 약속이 있었던 것이다. 선천적인 것인지 무척이나 웃음이 많은 그녀는 비서실로 들어서면서도 활기찬 인사를 잊지 않았다.
" 다들 오랜만이예요."
"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비서들이 일어나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밝은 민아의 목소리만큼이나 상대편의 목소리도 기분 좋게 들렸다.
" 할아버지 안에 계시죠? 들어가 볼께요."
" 앗, 지금은..."
비서가 말렸지만 민아는 평소에 그랬던 것처럼 거침없이 문손잡이를 돌렸다. 검은 문이 무게감과는 달리 무척이나 매끄럽게 소리 없이 열렸다. 하지만 완벽하게 열어 젖히지는 못했다. 소파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와 웬 여자의 모습에 살며시 열었던 문을 반쯤 닫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들은 민아가 문을 열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한 것 같았다. 물론 그녀가 와 있음은 워낙 등장부터가 화려해서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소리 없이 열리는 문 때문에 본의 아니게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다는 걸 모를 뿐.
" 대한엔지니어링은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회장님께서 저를 이곳까지 부르신 이유, 잘 알고 있지만 그 부탁을 들어드릴 수가 없어요. 굳이 작은 중소기업 하나에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냐고 물으신다면 그 대답은 후로 미루겠습니다. 하지만 저를 그만두게 만들지는 못하실 거예요. 이 한가지 목표 달성을 위해 숱한 사람들을 몇 주간 줄기차게 만나왔어요. 그 목표가 눈앞에 와 있는데, 고지가 바로 앞인데 이제 와서 멈춘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제 물밑 로비는 계속 될 거예요."
" 이 늙은이가 자네를 설득시킬 수도 없단 말인가?"
" 예."
" 이유나 들어봤으면 좋으련만."
" 지금은 시간이 없어 긴 이야기를 못 드리겠고, 오후 2시쯤에 르네상스 호텔 401호에서 다른 분과의 만남이 있습니다. 한시간이면 끝나니 3시 반경에 그쪽으로 들려주시면 설명드릴게요.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 그러시게."
두 사람의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민아는 이 놀라운 사실을 들으며 조심히 떨고 있다가 내심 뒤쪽을 훑어보았다. 비서실 안에 있는 나머지 두 사람이 들었을까 싶어 나온 행동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정 회장과 젊은 여자의 목소리는 문 쪽에서 가까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들을 수 없는 크기였다. 비서들의 책상이 무척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을리 없다. 그 사실에 안도하며 민아는 재빨리 문을 닫고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곧 이어 문이 열리며 낯익은 정회장의 모습이 보였고 뒤 이어 여자가 나왔다.
정회장이 손수 그녀를 배웅할 정도로 대단한 존재인 듯 싶었다. 민아는 살짝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서 있었다. 여자는 문 앞에서 정 회장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 오후에 뵙겠습니다."
" 그래. 그때 봅세."
" 예."
너무도 정중하고 절제되어 있는 행동이었다. 검은 선글라스로 가려진 얼굴이 어딘가 낯익은 것 같기도 했지만 결코 그녀와의 만남을 떠올릴 수는 없었다. 민아는 여자가 돌아서 비서실을 나갈 때까지 그녀의 뒷모습을 넋 잃고 쳐다보았다.
" 민아 왔구나. 안 들어오고 뭐하니?"
" 아, 예 할아버지. 헌데 저 젊은 여자는 누구예요? 손수 나와서 배웅까지 하시다니...대단한 사람인가 봐요."
" 허허허, 능력 있는 여자지. 아마 넌 설명해줘도 저 사람의 존재에 대해서 단 2할도 이해하기 힘들 거다."
" 훗, 이해하고픈 생각도 없어요. 아~ 배고파라. 오늘 뭐 사주실 거예요, 할아버지?"
민아는 거짓말을 했다. 그녀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분명 나간 여자는 로비스트일 것이다. '물밑 로비'라는 한 단어가 그 모든 확신감을 심어주었다. 물론 이건 민아의 극단적인 판단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애써 웃으며 밝은 척 하는 민아의 가슴이 심하게 요동쳤다. 그녀는 방금 전 지민을 불행의 늪으로 떨어트린 장본인을 스친 것이다. 그 사실이 겉잡을 수 없이 두렵기만 했다. 보기에도 절제된 언행으로 엄청난 압박감을 선사했던 여자, 감히 바라 볼 수 없어 민아로 하여금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던 여자, 그녀가 가지고 있는 힘은 어디까지일까.
아스라하게 느껴지는 이름 모를 여자의 힘이 민아를 심한 강박관념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자가 읊었던 약속 장소와 시간을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들어올 때도 밀치고 들어왔던 회전 도어를 통해 다시금 빌딩을 나선 혜영.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기되어 있는 자신의 승용차에 올랐다. 그리고 대뜸 기사에게 지시했다.
" 르네상스 호텔 401호 오늘 오후 2시 반 이후대로 예약해놔요."
" 알겠습니다."
차가 출발했다. 혜영은 까만 선글라스 너머로 신성전자 빌딩을 바라보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전화를 한 곳은...
" 정회장님 부탁드립니다.....회장님, 저 수련입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지금 보니 제가 그 후 면담이 또 있네요. 만남은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예, 죄송합니다. 제가 시간을 잘 못 체크했어요. 바쁘지 않은 시간에 제가 연락 드리겠습니다."
혜영은 핸드폰을 끊으며 창문을 열었다. 커다란 빌딩가를 벗어나는 그녀의 차문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흘러 들어온다. 여유 있는 그녀의 표정, 하지만 이와는 달리 무릎 위에 놓여 있던 손은 거칠게 스커트를 틀어쥐고 있었다.
' 겉도는 경고로 안 된다면 정면승부야, 지민씨.'
널다란 사무실 안, 착 가라앉은 분위기가 여느 때와 달랐다. 오늘따라 지민의 컨디션이 최악의 수준을 달리고 있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겠지만 앞으로 있을 민아와의 만남이 주는 짜증 때문이었다. 그렇다. 지민은 오늘도 홀로 고민했다. 어젯저녁에는 어이없는 결혼설에 휘말려 낯선 이들로부터 전해들은 소식에 분노를 금치 못했으나, 하루가 지난 오늘은 그러한 감정보다는 합리적인 이성이 뒤따랐다.
결재해야 할 서류와 프로젝트는 산더미같이 책상 한켠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아침 출근 이후 지금까지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앉아 끊임없이 옳고 그름을 판단했다.
' 이대로 가다간 정말 죽어. 어떻게 해서든 회사는 살려놓고 봐야 해. 그래. 혜영의 오해를 산다 해도 그건 후에 걱정해야 할 문제야. 일단 내가 건재해야 설이도 혜영이도 살릴 수 있으니까. 내가...내가 먼저 살아야 해.'
침울한 생각에 잠겨 어두워진 지민의 눈동자가 책상 한쪽에 위치한 카렌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유독 눈에 띄는 빨간 색으로 동그라미를 그려놓은 날짜가 있었다. 앞으로 4일 뒤다. 4일 뒤면 어린 딸의 수술이 있었다. 막상 눈앞에 닥친 문제도 난관이었지만, 그보다 더욱 급한 건 어린 딸의 생명이었다. 의사는 분명 후에 있을 만약의 사태에 대해서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된다며 무척이나 강조했었다. 또한 그에 따르는 부대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꾸준한 방사선 치료가 뒤따랐고 그에 응당한 보살핌도 있어야 했다. 이 모든 것은 지민이 건재해야 보장받을 수 있는 혜택이었다. 그의 어린 딸은 곧 혜영을 의미한다. 설을 그가 데리고 있는 한 혜영이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할 거라는 것이 지민의 생각이었다. 일단 그녀가 아닌 결혼 배필은 단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으니까.
' 좋다. 혜영아, 조금만 기다려. 아직은 네게 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 엄연히 약혼녀와 아내는 다른 의미야. 정민아가 약혼녀 행세는 할 수 있지만 절대로 내 천생연분이 될 수는 없어. 네가 살아 있는 한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야. 용서는 그때 가서 빌게. 건강한 설이 데리고 여전한 모습으로 나타나 네 앞에 무릎 꿇을게. 그러니 제발, 마지막 기회만은 남겨줘.'
그리움으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무척이나 처절해 보인다. 흐느낌 비슷한 작은 신음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삭막하게 갈라놓았다.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숨가쁜 여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지민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 지민씨!"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 가능케 하는 목소리다. 지민은 짜증스러움이 묻어난 눈동자를 들어 노크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선 불청객을 쏘아보았다.
" 결혼발표도 제멋대로 하더니 이젠 노크도 없이 들어오는 겁니까!"
" 미안해요. 너무 급해서."
사과는 했지만 민아는 전혀 미안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지민을 재촉하듯 급한 손짓으로 다음 말을 흘렸다.
" 어서 일어나요. 나하고 갈 데가 있어요."
" 보다시피 난 바빠요. 가려면 혼자 가시지."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로 냉랭함이 스며 있었다. 하지만 민아는 그에 개의치 않는다는 듯 손수 지민의 곁으로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우기까지 했다.
" 잔소리말고 따라오란 말예요. 설명은 가면서 해줄게요. 못해도 3시에는 도착해야 우리가 할아버지도 보다 빨리 그 여잘 만날 수 있어요."
" 여자? 이봐요. 난 상관도 없는 인물을 쫓아다닐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예요."
지민이 투명스럽게 대꾸했으나 민아는 막무가내였다. 그의 정장마이를 입혀주며 손수 넥타이까지 손봐준 민아는 지민의 손을 덥썩 붙들고 사장실을 나섰다.
졸지에 여자에게 끌려가는 꼴이 되어버린 지민은 화가 난 얼굴을 붉히며 비서들의 눈길을 피했다. 그리고 사장실을 나와 비서실을 지나쳤을 때 참고 있던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반강제적으로 걸음을 멈춘 후 민아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 가려면 혼자 가요! 난 당신처럼 한가한 사람이 아니야. 내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녀도 살아남기 힘든 기로에 서 있다고!"
지민이 언성을 높이며 버럭 화를 내자 민아는 잠시 주춤하며 그를 데리고 나온 그녀의 방법이 틀렸다 판단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의 결혼설로 인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그에게 오늘 그녀의 행동은 더욱 마이너스가 되었던 것이다. 민아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상황에도 손목시계를 훑어보며 지민이 뿌리친 손을 또 다시 붙들었다.
"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따라와요. 적을 알아야 패자가 아닌 승자가 될 수 있어요. 지금 지민씨 적은 당신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반면 지민씨는 그녀에 대해 그 신분조차도 예측하지 못하고 있잖아요. 따라와요. 지민씨 적을 보여줄 테니."
지민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아니 이해불능이었다. 하지만 기계적으로 따라 나서는 발길은 그 말에 충분한 설득력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주었다.
민아는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재빠른 그녀의 행동에서 상황의 급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지민은 말 없이 옆 좌석에 오르며 자못 심각해 보이는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 지금 몇시죠?"
" 두시 반."
" 삼십분 안에 르네상스 호텔로 가야 해요. 안전벨트 매요."
지민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말 없이 안전벨트를 매었다. 주차장에 정지해 있던 빨간 스포츠카는 매끄러운 시동소리와 함께 그곳을 빠져 나왔다. 소음공해가 심한 시내 한복판을 달리면서도 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견디다 못한 지민이 민아에게 물었다.
" 르네상스 호텔에 누가 있다는 거죠?"
" 여자요."
" 여자? 지금 나랑 농담따먹기 하자는 겁니까? 얼굴도 모르는 여잘 만나러..."
" 보통 여자가 아니란 말 이예요! 로비스트예요. 그녀의 정체는 로비스트라구요. 지민씨 회사를 그 지경으로 몰고 간 장본인이란 말예요."
" 뭐라고?"
" 그녀가 그랬어요. 대한엔지니어링, 눈앞이 바로 고지인데 여기서 멈출 수 없다구요. 대단한 여자예요. 보는 것만으로도 주눅드는 그런 여자라구요."
" 그렇다면 민아씨 말은 누군가가 내 회사를 무너트리기 위해 로비를 했단 말입니까?"
" 그럴 수도 있죠. 그 가능성을 전혀 배제한 건 아니예요. 하지만 그녀의 배후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 누가 감히 그런 무모한 짓을 한단 말입니까. 작은 중소기업이지만 우리 회사는 내실이 튼튼한 곳이예요. 웬만한 재력과 권력이 아니고서는 일순간 이렇게 만들긴 힘들어요."
" 그렇다면 그 여자의 배후가 굉장한 인물이란 결론이 나오는군요. 지민씨, 혹시 잘못해서 정계인을 건드렸다든가 하는 일은 없죠? 아니 꼭 정계인이 아니더라도 꽤 유명인의 비위를 거슬렸다면..."
"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민아의 말에 지민이 화가난 듯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앞만을 응시한 채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해 나갔다.
" 생각을 해봐요. 그렇지 않고서는 누군가 계획적으로 지민씨 회사를 위해 로비스트까지 고용하겠어요?"
" 지금 민아씨가 알고 있는 사실, 모두 믿을만한 겁니까?"
" 당연하죠."
" 물밑 로비가 있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죠?"
지민의 물음에 민아가 잠시 말을 끊었다. 무언가에 골몰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 할아버지와 그 여자가 만났어요. 오늘 낮에."
" 할아버지라면 정 회장님..."
" 그래요. 할아버진 알고 계세요. 그녀의 뒤 배후까지 알고 계실지도 모르죠. 여자는 할아버지의 부탁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반론했어요. 어디 그 뿐인가요? 그녀가 갈 때는 할아버지께서 손수 배웅까지 해주셨다구요. 그게 무얼 뜻하겠어요. 그만큼 그녀의 존재가 업계에서는 유명하다는 걸 간접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거예요. 그녀는 능력 있는 여자예요. 새파랗게 젊은 여자 앞에서 저희 할아버지가 예의를 차려야 할 정도로 대단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민은 민아의 이야기를 들으며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내렸다. 그는 도시내의 소음과 탁한 공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때문에 차를 타면 창문을 열어 놓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 탁한 공기라도 한껏 들이마시지 않으면 질식사 할 것 같았다.
열기를 품고 있는 바람이 지민의 경직된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느낌이 독사가 스멀스멀 기어가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민아의 말대로 이 모든 상황이 로비스트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면 그가 알게 모르게 원한을 샀을 가능성이 컸다. 어쨌든 로비스트는 누군가의 이익이 아닌 그의 파멸을 위해 뛰고 있었으니까.
도대체 누굴까. 어느 누가 이토록 사무친 원한을 무시무시하게 발출 하는 것일까. 그는 기억을 더듬으려 애를 써봤다. 허나, 결과는 너무도 허탈했다. 지민이 짧은 한숨으로 생각을 마무리짓고 있는 사이, 민아의 차는 르네상스 호텔 지하 주차장에 머물렀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홀 로비로 들어섰다. 하지만 거기서부터는 민아가 먼저였다. 그녀는 로비스트가 머무르고 있는 방의 호수를 알고 있을 테니까. 역시 지민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프론트를 스쳐 지나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망설임 없이 엘리베이터로 오르는 민아, 그리고 그녀를 따라 함께 오른 지민은 심장박동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부근을 지긋이 손으로 압박하며 잔뜩 긴장한 어깨에 힘을 뺐다. 그러나 뻣뻣하게 경직된 얼굴은 도통 풀리지 않는다.
민아는 4층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바로 앞에 위치한 401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의미 심장한 눈동자가 바로 이곳이 로비스트가 머물고 있는 곳임을 예견해주고 있었다. 그는 크게 호흡을 들이킨 이후 소리 없이 내쉬면서 어깨를 활짝 폈다. 이제 지민은 희대 악녀와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분명 누군가에게 사주를 받았음이 확실했지만 그래도 여자의 몸으로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회사 하나를 통째로 구워삶은 보통 여자 이상의 악녀라 생각했다.
'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이나 한번 보자.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내 회사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는지 차근차근 들어주겠어. 그리고 널 벌 할거야. 이대에 걸쳐 평생의 피와 땀이 서린 회사를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깔끔하게 먹어치운 너희들을 용서 할 수가 없다! 절대로!'
그는 확실하게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를 따라 민아도 함께 들어섰지만 정면에 보이는 호화 호텔의 로얄룸은 삭막할 정도로 고요했다. 분명 안에 사람이 있었다면 그들이 문을 여는 소리를 들었으리라 짐작한다.
잠겨 있지 않은 문을 통해 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로얄룸의 진풍경은 절로 입이 딱 벌어질 만큼 대단했다. 은은한 조명아래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명품 가구들이 사람의 넋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최고급 호화 호텔 로얄룸만 보더라도 그녀의 뒷 배후가 굉장한 재력가임을 짐작 가능케 한다. 지민은 이런 곳에서 머물며 작은 회사 하나가 무참히 쓰러져 가는 것을 웃으며 지켜봤을 여자가 역겨웠다. 그는 숨을 죽이고 조심히 방안을 훑었다.
" 지민씨, 거기는 접견실이 아니라 그냥 입구예요. 이리로 와요."
민아가 손짓을 했다. 그러고 보니 길게 이어진 통로와 넓은 곳에는 룸으로 짐작이 가는 문이 무려 8개나 있었다. 민아는 그 중 정 중앙의 문을 가리키며 속삭이듯 말했다.
" 저기가 맞을 거예요. 접견실, 집으로 따지자면 응접실이죠."
지민은 숨을 죽이고 조심히 문손잡이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소리 없이 그것을 돌렸다. 알 수 없는 긴장감과 두려움이 일었다. 그 동안 그토록 애를 먹였던 모든 사건이 한 여자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니. 분노를 금치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압박감에 진땀이 흐를 정도였다.
' 그래. 보자. 어떻게 생겨 먹은 여잔지, 얼굴이나 좀 보자고!'
드디어 문이 열렸다. 민아의 말대로 사람의 모습을 접할 수 있었다. 분명 여자였다. 검은 정장의 실루엣이 서울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대형 유리 앞에서 그 아름다움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사람의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여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출렁이는 흑발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지민은 굳은 듯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돌려세워 뺨이라도 후려치고 싶었지만 끓어오르는 욕구를 억누르며 인내했다. 이에 민아가 대신 입을 열었다.
" 이봐요. 당신이 원하는 손님이 아니라 미안해요. 하지만 사람이 왔으면 돌아봐야 예의 아닙니까?"
민아의 한 마디가 먹혀든 것일까. 미동도 보이지 않던 여자의 실루엣이 그 모습을 달리 하기 시작했다.
" 아니, 내가 원하던 손님이 맞아요."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낯익은 목소리, 한 여자를 향한 그리움에 지쳐버린 지민의 심장을 사납게 할퀴는 음성이었다.
드디어 여자가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지민은 눈을 감아 버렸다. 엄청난 충격으로 인해 몸조차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지민을 민아가 부축했다. 그는 다시 한번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여자를 바라보았다. 예전과 다름없이 고와 보이는 혜영의 얼굴,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차가움이 넘치는 지성미가 섬뜩하리만큼 가슴에 와 닿았다. 그녀는 곧 쓰러질 것 같은 지민과는 달리 여유 있는 웃음을 보이며 인사를 건네 왔다.
" 오랜만이야, 지민씨."
오후 2시를 갓 넘어선 시각이다. 아직 오픈할 시간이 아님에도 안 부장은 비대한 몸을 이끌고 쟌느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를 시작했다. 실상 차만 막히지 않으면 5분 안에 도착할 거리였으나 오늘따라 무슨 차가 그리도 안 빠지는지 더 이상 참고 기다릴 수 없었다.
고등학교 체력장 이후 처음으로 뛰어보는 안 부장이었다. 그가 스칠 때마다 욕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지금 안 부장의 이성으론 그들에게 어떠한 반박도 해줄 수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도착해야 했다. 때문에 안 부장은 숨이 턱까지 차 오르고 있었으나 뛰는걸 멈추지는 않았다.
" 빌어먹을, 이 나이에 무슨 꼴이람!"
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 나왔다. 반갑지 않은 인물의 갑작스런 귀국 소식에 옷도 제대로 못 챙겨 입고 집을 뛰쳐나와야 했다. 하지만 그가 살기 위해선 그 방법 밖에 없었다. 완벽하게 철수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귀국을 하다니. 안 부장의 입에선 수도 없는 욕설이 언어가 되어 나오지 못한 채 웅얼거림으로 그쳤다.
드디어 쟌느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대 낮임에도 쟌느 입구에는 열댓 명이나 되는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안 부장은 그가 벌써 도착했음을 예감했다. 등에서 식은땀이 삐질삐질 났다.
그가 나타났음에도 사내들은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잘 훈련된 모습이었다. 안 부장은 그들에게서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느끼며 재빠르게 쟌느 입구로 들어섰다. 그러자 남자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 입은 팔등신 금발 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안 부장을 안내한다. 그는 숨을 죽이고 그녀를 따라가야 했다. 그 와중에도 안 부장은 눈앞에 있는 금발미인이 걸을 때마다 조심스럽게 흔들리는 둔부의 움직임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한번쯤 안아 보고픈 욕구를 일으키는 걸음걸이였다. 그러나 안 부장은 알고 있다. 이 여자가 하나가 밖에 있는 사내 열 명보다 더욱 위험하다는 것을. 결국 그는 생각만으로 그치는 욕구를 잠재우며 붉은 문 앞에 당도했다.
안 부장은 겁에 질린 눈동자로 '1호'라 쓰여진 작은 팻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 곳은 대통령이 온다 해도 내주지 않을 특실이었다. 한 마디로 안 부장이 두려워하는 룸안의 인물과 일명 '그분'으로 통하는 가장 윗분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곳으로 손님 접대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리고 아직까지 두려운 존재로 남아 있는 한 남자를 주시했다. 그는 여유 있는 얼굴로 접대 장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안 부장의 등장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흡사 곰을 연상케 하는 안 부장이 두려워 마지못해 하는 인물, 그는 의외로 무척 흔해 빠진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특별히 잘생기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얼굴과 작은 체구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보험회사 세일즈맨 같은 생김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안 부장은 비대한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이 사람 앞에선 초긴장 상태였다.
" 왔나?"
짤막한 한 마디였다. 늘 이 남자는 안 부장에 필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간단한 대답과 간단한 질문, 그것이 다였다.
" 예. 연락도 없이 귀국하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헌데 혼자 귀국하셨습니까."
" 그 분은 오시지 않는다. 작은 업소 몇 개 처분하는데 굳이 그분께서 오실 필요는 없으니까."
" 아, 예."
작은 남자의 입에서는 분명 '작은 업소 몇 개'라는 문구가 흘러 나왔다. 500평이 넘는 최고급 클럽 쟌느와 그밖에도 이와 비슷한 규모의 업소가 무려 11개나 되었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작은 업소라 표현 한 것이다. 이게 바로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이다. 남자는 장부를 하나하나 훑어 내려가며 느릿한 어조로 물어왔다.
" 어떻게 되어 가는가. 한달 매상이 이것뿐인가?"
" 예, 요즘은 불경기라..."
" 다른 곳은?"
" 다른 곳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나마 이곳 쟌느가 그 중 가장 탑에 속하죠."
" 불과 몇 달만에 이렇게 하락세를 타다니 예상치 못했던 결과야. 이래서 인수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건가?"
" 아마도."
" 안 부장, 책임지고 이번 년도까지 11개 업소를 모두 처분하게. 그렇지 않으면 내가 직접 사람을 파견해서 처분토록 하겠네."
" 예. 알겠습니다. 꼭...이번 년도 안으로 모든 걸 처리하겠습니다."
" 지금으로써는 자네가 최고 직위나 다름없군. 어떻게 된 거지?"
" 저번에 보고 드렸다시피 모두 그만뒀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제가 행정실무를 담당하며 이곳 저곳을..."
" 아, 됐네. 그만하게나."
" 예."
" 헌데 수련은?"
" 수련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 그래. 그래야지. 그 분이 귀해 여기는 애야. 잘 보살피게."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안 부장은 그 웃음의 의미를 알기에 더욱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눈앞에 있는 이 평범한 남자가 수련에 대한 사실을 모두 알게 된다면 안 부장은 죽은목숨이나 다름없었다.
' 젠장, 갑자기 귀국할게 뭐람? 그리도 치밀하게 계획을 짰는데, 잘 하면 모든게 틀어지게 생겼어.'
안 부장은 속으로 투덜대며 남자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조금 전 보았던 금발의 미녀와 유유히 사라지는 그를 바라보며 살이 쪄 접혀지지 않는 손을 꼭 쥐었다.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 어떻게 준비한 계획인데 이쯤에서 발을 뺀단 말인가. 안 부장의 두툼한 미간이 접히며 그의 의지를 반영해 주었다.
' 계획은 이대로 밀고 나간다. 여기서 멈출 순 없어. 그 동안 수련과 저 인간의 만남을 주선해선 안 돼. 절대로...'
주변의 어두운 기운이 스멀스멀 피부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다. 터질 것 같은 심장과 곧 끊어질 듯한 호흡이 지민을 무아지경으로 이끌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이변이란 말인가. 정녕 눈앞에 있는 이 여자가 그가 사랑해 마지못했던 그녀란 말인가. 놀라운 상황이 거듭될수록, 혜영의 정체가 벗겨질수록 그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치닫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를 사랑한다 속삭였던 입에서 무시무시한 경고가 가해지고 있다. 이 어이없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눈앞에 있는 혜영의 모습이 예전과 너무도 다를 바 없었다.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눈동자와 수줍음을 머금은 다소곳함,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다 여겨질 만큼 하얀 웃음, 어느 것 하나 다를 바 없건만 그런 그녀에게서 튀어나온 한마디 한마디는 서슬이 퍼런 칼날보다 날카롭고 위험했다.
" 설이를 데리고 와. 내일 당장!"
소파에 몸을 묻은 그녀가 10여분만에 다시 토해낸 한 마디다. 세상에서 가장 착한 얼굴로 어쩜 저토록 독한 음성을 내뱉을 수 있을까. 그녀의 목소리로 인해 지민의 살갗이 반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민아 또한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는 듯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로써는 혜영과 지민의 관계를 도통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다.
" 당신 약혼녀에게서 들어 알겠지만 보다시피 난 이런 여자야. 지금껏 지민씨를 속였던 건 미안해. 하지만 이게 진짜 내 모습이야. 내 아이를 내 품에 안는 그 날까지 난 멈추지 않아. 당신 어머니께 가서 말해. 본인께서 뿌리쳤던 여자가 이런 칼을 품고 있던 여자였노라고. 그러니 당장 아이를 데려가야겠다고. 어차피 그분께서는 더러운 여자가 낳은 손녀, 바라지도 않으실 테니까. 조용히 사라져 주겠어. 지민씨 인생에서...그러니 아이만 데려와."
혜영의 말에 지민은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대신 민아가 한마디 거들었다. 이제야 두 사람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 이봐요. 두...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이제야 알았어요. 하지만 제가 좀 끼어도 될까요? 어차피 지민씨 곁에서야 할 사람은 당신이 아닌 나니까 그 정도 자격은 있는 거죠?"
자격은 운운하는 그녀의 말에 혜영의 차가운 눈동자가 못 박혔다. 순간 민아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위압감에 호흡을 멈추어야 할 정도였다. 도대체 눈앞에 있는 이 여자에게서 뻗어오는 기운의 정체는 무엇일까. 사랑하는 남자의 배신감에서 비롯된 분노? 그도 아니면 아이를 빼앗아 간 것에 대한 원한?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살기였다. 그러나 민아는 귀하게 자란 여느 집 자식과는 또 다른 면을 갖춘 여자였다. 무수한 들꽃과 함께 자란 장미라는 표현이 더 옳게 인식될지 모르겠다. 그렇다. 그녀는 부유하지만 보통 사람과 함께 돈이란 것이 쪼들려 봤고 당당하지 못한 가슴앓이 사랑도 해보았다. 물론 결국에 그 짝사랑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가진 비장의 무기를 내놓아야 했지만 말이다.
민아는 살을 꿰뚫고 전신을 휩쓰는 두려움에 기죽지 않으며 말을 꺼냈다.
"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어머님은 설이를 예뻐하세요. 그러니까 내 말은 그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 이봐요. 정민아씨 같으면 내 품에서 때어간 살덩이 남이 귀하게 여긴다고 그쪽에 맡겨 놓은 채 맘 놓고 살 수 있어요? 아무리 미운 굳은살이라도 내 몸에 있을 때가 자연스러운 거예요. 아시겠습니까? 더군다나 우리 설인 지민씨 없이 3년을 홀로 키운 내 보배이자 바로 나예요! 다름 아닌 내 자신이란 말입니다!"
" 그래서 아이가 그런 몸쓸 병에 걸릴 때까지 손놓고 바라만 봤어? 내게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네 아이이기 전에 내 자식이야! 아이는 너 혼자 낳았니? 왜 아비인 내게 그 모든걸 덮어둔 거야. 날 그런 인간으로밖에 보지 못했던 거니? 병든 아이 짐으로 생각할 만큼 모진 사람으로 생각한 거야?"
그 동안 한 마디 없던 지민의 입에서 봇물 터지듯 원망의 목소리가 주르르 흘러 나왔다. 혜영의 조용한 눈동자가 그런 그를 지켜보며 말 없는 회환의 빛을 띈다. 지난 날 그녀가 했던 실수를 만회하고자 함일까. 그도 아니면 정말 할 말이 없어서 일까. 혜영은 지민의 말에 소리 없는 눈물을 머금을 뿐 그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았다.
" 그래. 좋아. 아이를 데려다 주지. 하지만 오늘은 잊지 않겠어. 절대로! 넌 날 두 번씩이나 속였어. 이젠...그 어떤 말을 해도 믿지 않아. 아니 믿을 수 없어."
" 미안해. 그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난 그럴 수밖에 없었어. 미안하단 말 이외의 변명은 생략할게. 그 어떠한 말로도 당신을 설득시킬 수 없으니까."
" 역시 상황 이해가 빠르군. 로비스트다워! 네가 이런 여자인줄 알았다면 난 그날 절대로 손을 뻗지 않았어!"
" 지민씨..."
이성을 잃은 그의 말이 조금 심하다 생각했는지 민아가 곁에서 제지했다. 하지만 지민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흥분상태였다. 결국 돌아서서 후회할 말들을 서슴없이 해버리고 만 것이다.
혜영은 그런 그를 매몰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조금 전 보였던 잠시동안의 죄스러움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린 후였다.
" 아이는 내일 돌려주지."
" 설이는 물건이 아니야!"
" 하지만 네가 짓이긴 회사도 복원해놔! 이게 내 조건이야!"
" 아이를 협상의 조건으로 생각하다니, 당신답지 않아."
혜영의 차분한 눈길이 점점 경멸로 바뀌어갔다. 두서 없는 그의 말에, 그리고 아이를 물건 다루듯 하는 그의 말에서 환멸을 느낀다. 그 와중에도 민아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곧 정 회장이 올 시간임을 알렸다.
" 지민씨, 곧 할아버지가 오실 거예요. 그녀와 3시 반에 약속을 하셨 거든요."
민아는 어서 물러가자는 뜻에 한 소리였지만 뜻밖에도 혜영은 조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 정회장님은 오시지 않아요. 이미 약속은 취소되었으니까. 조금 전 말했다시피 내가 기다린 손님은 다름 아닌 정민아씨와 지민씨입니다."
" 아주 철저한 계산이었군."
" 그게 내 일이니까."
노려보는 지민의 눈동자를 느끼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민아는 새삼 혜영의 주도면밀함에 치를 떨어야 했다. 결국 그녀의 신분을 공개하기 위한 하나의 계획에 불과했으니까.
" 당신이 알기를 빌었어. 대한엔지니어링 뒤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끝끝내 몰라주더군. 결국 겉도는 경고로는 승부가 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었지. 지민씨, 설이를 데리고 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이를 협상의 조건으로 생각하지 마. 난 당신 회사와 아이를 저울질 하는 거 가당치도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왜 인줄 알아?"
진실한 그녀의 눈동자는 예전의 혜영이었다. 하지만 다음에 나올 말들을 예상케 하는 입가의 웃음은 눈앞에 있는 여자가 혜영이 아닌 장수련임을 확인케 해주었다.
" 내가 끌어올린 회사니까. 다시 말해 내 손으로 정상까지 올려놓은 회사를 원상복귀 해 놓은 것 뿐이야. 당신을 위해서였어. 난 이미 계약이 된 몸, 어찌해서든 그들과의 계약은 2년이었어. 하지만 내가 올해로 이 일을 하게 된 건 3년째,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아? 당신 회사에 바친 세월이 1년이란 뜻이야. 내가 여기서 발을 뺌과 동시에 제일 먼저 위험에 처해야 하는 건 대한엔지니어링이었으니까. 그깟 1년 당신 위해 못 버틸까 하는 생각으로 수긍했지. 내가 그랬잖아.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조금만 더..."
지민은 정수리를 얻어맞은 충격을 느꼈다. 그리고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던 혜영의 간절한 음성을 떠올렸다. 그랬다. 그녀는 분명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 간청했었다. 하지만 그녀를 하루라도 빨리 곁에 두고픈 욕심에 매일같이 투정을 부렸던 그가 아니었던가. 결국 이 모든 상황은 그의 과한 욕심이 이끌어낸 결과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넋이 나간 지민을 곁에 있던 민아가 잡아당겼다. 그와 마주치지 않는 혜영의 눈동자, 가늘게 떨리는 어깨가 흐느끼고 있다는 걸 암시해주었다. 일인용 가죽 소파에 앉아 고개를 돌리고 우는 모습이 더 없이 처연하게만 느껴진다. 그가 늘 지켜주어야겠다 생각했던 가냘픈 어깨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다가가 안아줄 수는 없었다. 결국 지민은 태어나 가장 사랑했던 한 여자를 뒤로 한 채 믿지 못할 현실을 보듬어 안고 돌아서야 했다. 떨리는 어깨를 감싸줄 수조차 없는 자신의 신분을 원망하면서...
하지만 돌아서는 그의 발길을 붙드는 한 맺힌 목소리. 지민에게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치명적인 상처로 낙인 찍어줄 한마디가 눈물나도록 서럽게 들려왔다.
" 다른 여자들처럼 조촐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싶었어. 다른 이들에겐 더 없이 강하고 명석한 여자로 기억될 장수련, 그 허물을 벗고 당신에게만은 평생을 같이 할 한 여자로 남고 싶었어. 헌데...모두 내 허황 된 꿈이었나봐. 결국 난 권혜영이 아닌 장수련이었던 거야. 그 허물에서 벗어 날 수가 없어."
곁에서 듣고 있는 민아조차도 가슴이 내려앉을 만큼 아픈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들은 혜영을 뒤로 한 채 넓은 로얄 룸을 벗어났다. 결국 존재하는 건 홀로 남겨진 한 여인의 설움 뿐, 한 줄기의 빛조차 찾을 수 없는 이 호화 호텔에 혜영은 혼자 남았다.
너저분하게 널린 안주와 양주병이 꽤나 많은 시간이 지났음을 암시해준다. 하지만 이들은 어느 누구도 먼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이것이 지금 현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다. 준영은 자신의 인내력이 한계에 치닫고 있음을 느끼면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룸의 분위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확고한 지위와 권력을 자랑하는 이들의 만남이라고는 느낄 수 없을 만큼 망가져 있었다. 빛과 어둠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인간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정신만은 말짱한 인물이 있다. 다름 아닌 준영, 그는 자신이 계획한 바가 있기 때문에 취해서는 안되었다. 그러나 저쪽도 원하는게 있기는 마찬가지, 결국 가장 궁극적인 목표를 가진 준영과 김한석 장관만은 여느 때보다도 멀쩡한 정신으로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박 과장은 때가 되었다 싶었는지 조심히 준영에게 귓 말을 했다.
" 사장님, 술자리는 이쯤에서 끝내도 되지 않을런지요."
" 그런 것 같군요. 박 과장이 술에 취한 두 분을 모시겠습니까? 난 김한석 장관님과 할 말이 남아서요."
" 그러지요."
새벽 3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이미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두 사람을 달래어 박과장이 룸을 나섰다. 하지만 김 한석 장관은 선뜻 그들을 따라나서지 않고 준영이 머물고 있는 자리를 마주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역시 최고의 지위를 자랑하는 인물답게 그는 준영의 의중을 꿰뚫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이 나간 후 두 사람은 한 동안 말 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결국 무거운 분위기에 못 이겨 입을 연 사람은 준영이 아닌 김한석 장관, 예상했던 바였지만 이렇듯 빨리 기회가 찾아오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 장 사장은 언제까지 혼자 살 건가?"
" 글쎄요."
" 보아하니 아직 그 아가씨를 정리하지 못한 모양이구만."
"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 사람은 술에 취하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기 마련이야. 하지만 장 사장은 늘 현실 속에서 빡빡하게 돌아가는 시계 마냥 한치의 어긋남도 찾아 볼 수 없다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가. 누군가가 그렇게 조용했기 때문이야."
" 저는 이런 공석에서 제 자신이 흩어지는걸 용납하지 못합니다."
" 그러게 하는 소리야. 취하면 나이도 신분도 잊어버리는 사람들과 달리 자네는 작은 상자속에 빼곡이 자네 자신을 채워 넣지. 하지만 때론 그 답답함에서 벗어나 보는 것도 나름대로의 자유를 느껴볼 수 있을 걸세. 곁에 여자가 있으면 안아보고 싶지 않은가? 술이 있으면 마셔보고 싶지 않은가? 늘 절제되어 있는 삶은 나른하고 지루하기 마련이야. 이제 그만 그 틀에서 한발자국 걸어나오게나."
준영은 김장관의 말이 포함하고 있는 날카로운 의미를 여지없이 간파하고 있었다. 준영의 심중을 은근슬쩍 떠서 그가 원하는 바를 알아내고자 함이리라. 하지만 거기에 넘어갈 준영이 아니었다.
" 그렇다면 장관님께서 제 숨통을 조금 터 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숨이 막히던 참입니다. 혼담이 오가는 장관님을 뵙고 있자니 제 할아버지께 누가 될까 늘 조심하게 되지요."
" 그러지. 자, 오늘 밤 탁 터놓고 이야기 해 봄세."
" 그러죠. 일단 분위기부터 바꿔볼까 하는데요. 사실 이런 무거운 분위기는 제가 즐기는게 아니거든요."
" 그렇게 하시게나."
김 장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준영은 대기 중인 여자 둘을 불렀다. 조금 전에도 여자가 들렀다 갔지만 석고상 같은 준영의 반응에 그의 파트너는 웃음 한번 제대로 흘리지 못하고 룸을 나서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 들어 온 여자에 대한 그의 행동은 사뭇 달랐다. 물론 김장관의 파트너는 조금 전 들어왔던 그 아가씨였으나 이번에 준영의 파트너로 들어온 여자는 전혀 다른 아가씨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 머리에 적당한 키, 갸름한 얼굴. 어디를 보아도 술의 찌든때를 느낄 수 없는 그런 이미지였던 것이다.
" 오호~ 장 사장의 여자 보는 눈이 탁월한 건가, 아님 우연인가?"
" 글쎄요."
준영은 애매모호 한 대답으로 김장관의 질문을 일축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분위기와는 달리 준영의 곁에 있는 여자는 잔뜩 겁먹은 눈동자로 그들을 대면하고 있었다. 이 곳은 등급별로 손님을 접대하는 곳이다. 하지만 그녀는 가장 하위에 있는 아가씨였고 로즈마리에 들어온 건 불과 삼일 전이었다. 그런 그녀의 직위에 준영과 김장관 같은 손님은 감히 넘볼 수도 없는 먹이감이었다. 같이 일하는 여자들은 질투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대했으나, 정작 본인은 잔뜩 겁을 먹고 이곳으로 발걸음을 한 것이다.
그녀는 조금 전 한 중년 남자에게서 거액의 돈을 넘겨받았다. 오늘 여자가 해야할 연기의 몫으로는 너무도 큰 돈이었다. 남자도 로즈마리 어딘가에서 술을 거하게 한잔 한 듯 잔뜩 취해 있었지만 그녀에게 하는 말은 너무도 선명하고 뚜렷했다.
- 오래 전 알았던 사이처럼 완벽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들은 기억 속에서 깡그리 지워주십시오.
그녀는 잔뜩 긴장한 상태로 들어와 지금껏 마주하지 못했던 준영을 조심스레 올려다보았다. 앞에 있는 남자처럼 나이를 먹었을 남자이겠거니 했건만, 뜻밖에도 곁에 있는 준영은 젊다 못해 어려 보였으니 눈이 동그랗게 치켜 떠질 수밖에.
" 하하하. 아가씨가 자네 인물을 보고 눈이 동그레지는구만."
김장관이 웃었다. 그제서야 여자는 조금 전 남자가 한 말을 상기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은근슬쩍 자신의 연기를 펼쳐 나갔다.
" 오랜만에 오시네요. 그동안 왜 안 찾아 주셨어요."
약간은 어설펐지만 고개를 못 드는 수줍음에서 사뭇 다른 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김장관은 뜻밖의 말에 놀란 듯 준영을 보며 물었다.
" 오호~ 이곳을 자주 찾나 보지?"
" 예, 그러는 편입니다."
준영의 확고한 대답과 여자의 반응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올 때마다 같은 여자를 찾나 보다라고 김장관은 생각했다. 그러면서 슬쩍 그의 여자 취향을 눈에 익혀두었다.
" 의외군."
" 다들 그러죠."
" 자네도 여자를 좋아하나?"
" 그럼요. 저도 남자인데 품에 안겨오는 여자, 마다할리 있겠습니까?"
그의 말에 김 장관의 눈썹이 하늘 높이 치켜 올라간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기에 더욱 놀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준영은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무표정으로 당연하다는 듯 하는 말이 왜 이리도 가시처럼 목구멍에 걸려 안 나오는 것인지. 이런 식으로까지 해서 그녀와의 만남을 가지려는 준영의 쇠된 노력이 눈물겹도록 고통스럽다. 이제 슬슬 그의 의도를 비춰야 할때가 온 것인가. 준영은 내심 어림짐작으로 시기를 점찍으며 입을 열었다.
" 오늘 제가 이 자리를 마련한 계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자가 따라주는 술잔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준영이 내뱉은 말이다. 이에 김 장관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방금 들어온 아가씨들을 나가라 지시했다. 그러나 곁에 있는 여자가 일어서기도 전에 준영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거부의 의사를 내비춘다.
" 아뇨, 이 아가씨는 곁에 남겨두고 싶습니다. 믿을 만한 아가씨니 염두에 두실 필요 없습니다."
강한 부정에 김장관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곁에 두기로 했다. 하지만 눈에 거슬리는 건 여전히 변치 않는 사실이다. 그 만큼 여자를 향한 준영의 믿음이 강하다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김장관은 여전히 준영과 여자를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 자, 이제 이야기 해 봄세. 지금껏 만남에 단 한번도 제대로 된 의사를 통보 받은 적 없네. 무엇 때문에 일을 마다하는 것인가. 나라의 사안이 달린 일일세. 오죽 우리가 심사 숙고해서 자네를 택했겠는가."
" 압니다. 하지만 방법이 틀렸습니다."
" 방...법이 틀리다니?"
" 혹시 개인적인 욕심을 부리시는 건 아닙니까?"
" 뭐라고?"
김 장관은 경악을 하며 분노를 나타내었다. 지금 준영의 한마디가 담고 있는 의미는 대단한 것이다. 그건 정치인의 비리를 논하는 직접적인 의문이었고 그 화살의 목표는 다름 아닌 당사자 김장관이었기에 그에 대한 반감은 실로 엄청났다.
김 장관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양주잔을 쥐고 있는 그의 손에 필요 이상의 힘이 들어가 뼈마디가 하얗게 변한다. 심중을 꿰뚫어 봤음에 놀란 것일까, 아니면 얼토당토않은 질문에 분노한 것일까. 지금 김 장관의 상태는 이 두 가지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는 준영에게 그 어떠한 답도 주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 무슨 근거로 하는 소리인가. 방금 그 말 한마디가 일으킬 엄청난 파장은 어찌 감당하려 함부로 하는겐가!"
" 죄송합니다만, 저는 여러 가지 상황을 대비할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잘못하면 그 피해는 저 한사람에게서 그치는게 아니라 제 친지들에게도 악영향이 미치니까요. 이해해주십시오."
" 도대체 왜 그런 오해의 여지가 성립되는지 모르겠군."
" 말씀드렸다시피 방법이 틀렸습니다."
" 방법?"
" 사업적인 이야기가 오가는 단계에 결혼문제를 들고일어나신 것도 그렇고."
" 아, 그건 오해하지 말게나. 나쁜 의도에서 그런게 아니라 순전히..."
" 장래 손녀 사위감에게 술자리에서 여자를 붙여주시다니요."
준영의 그 한마디에 김 장관의 얼굴이 흑빛으로 변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준영의 함정에 꼼짝없이 걸려들고 만 것이다.
" 이봐.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해야 하지 않겠나. 그때 우리는 사적인 관계를 떠나서 나랏일로 만난 것일세. 그런 자리에서 자네와 내 관계를 운운하여 사적인 감정을 개입할 순 없지 않은가."
궁색한 변명이다. 정말인지 초라하고 별 볼일 없는 말이었다. 자신의 실수를 어설픈 말 한마디로 미화 시려는 그에게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심중을 내비칠 준영이 아니다. 그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말들이 오가는 가운데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여자의 손을 지긋이 잡아주었다. 주눅 든 그녀에게 더 없이 따스한 손, 그것은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라는 것을 모르는 여자의 일방적인 느낌이다. 김 장관의 눈동자가 언뜻 준영의 손을 따라 여자의 무릎으로 향했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 사적인 감정을 개입할 수 없다라, 그렇다면 김 장관님의 그 한마디에 철저한 책임을 묻겠습니다."
" 자네!"
김장관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처음엔 화로 그 다음에 민망함으로 바뀌었던 감정이 이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격한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새파랗게 어린 준영의 한 마디는 예의에 어긋남은 물론이요, 그의 사회적 지위를 우습게 보는 처사였다. 그러니 김 장관의 분노는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 보아야 옳다.
도대체 준영의 속셈은 무엇일까. 그와 공존할 수밖에 없는 이 위인을 건드려 준영이 얻는게 무엇이란 말인가. 답은 없다. 하지만 그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얻기 위해 한 걸음 다가섰다.
" 로비스트와 손을 잡으셨다지요. 한낱 외환컨설팅 회사 하나를 끌어들이기 위해 그 유명한 로비스트까지 초빙하셨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로비스트가 쟌느 마담, 장수련....맞습니까?"
심문하는 듯한 말투에도 김장관은 불쾌함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좀 더 살펴보고 계획을 진행하려 했는데 치명적인 약점을 준영에게 들키고 만 것이다. 이 정도까지 눈치 채고 있으리란 예상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해 두지 않은 상태였다. 헌데 뜻밖의 상황이 이렇듯 갑작스럽게 닥쳐오다니.
" 아, 그건 충분히 오해가 있었겠구만.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난 아직 그 여자를 만나보지도 않았다네. 그냥 이야기만 오갔을 뿐, 그녀 얼굴 생김새조차도 몰라."
" 잘 보십시오. 이 여자가 바로 그녀의 이미지와 흡사합니다. 딱 제 취향이죠. 비록 신분은 술집 마담이지만 진정한 내면은 남자들도 감히 이겨내기 힘든 로비스트입니다. 전 그녀를 잘 알죠. 아주 잘..."
" 그녀를 안다고?"
" 예. 김 장관님은 이상한 거 못 느끼셨습니까? 마담은 분명 쟌느 내에 있으나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저희를 피했죠. 얼굴도 모르는 김 장관님을 피했겠습니까, 그도 아님 그 밖의 분들을 피했겠습니까?"
" 내가...어떻게 해야겠는가. 어떻게 해야 오해를 풀 수 있는가."
" 그녀와 만남을 주선해주세요. 모든 협상의 조건은 그녀를 통해 듣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명심하라 일러두십시오. 그 동안 저를 피해 도망 다닌 대가는 꼭 치러야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 무슨..."
" 날 애태웠으니 저도 그녈 애 태워야죠."
준영의 말에 김 장관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의도하는 바의 무게감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준영이 본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는 사면이 꽉 막힌 밀실에 갇혀 있는 느낌을 받았다. 한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 새파랗게 젊은 준영의 모습이 오늘따라 왜 이리도 거대하게만 보이는지, 그는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그렇다. 김 장관은 지금껏 대답을 피해오기만 했던 준영에게 은근한 압력을 행사하려 했으나 되려 당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준영이 전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곧게 인식했다.
" 좋네. 그렇다면 만사를 제쳐놓고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눔세. 일단 약속 날자와 장소를 말하게. 원하는 대로 해주지."
김장관은 '원하는 대로'란 곳에 악센트를 주어 강조했다. 하지만 준영은 고개를 내저으며 그의 말을 단호히 잘랐다.
" 아뇨. 제가 달리 원하는 건 없습니다. 그녀면 충분합니다."
" 충분하다니?"
" 이틀 후 롯데호텔 704호로 그녈 보내주세요. 그럼 전 이만 일어서겠습니다."
곁에 있는 여자의 손을 잡고 일어선 준영의 의도는 눈앞에 있는 김장관에게 정확히 전달되었다. 낯이 뜨거울 만큼 노골적인 표현과 행동, 하지만 그런 준영의 심중에 숨어 있는 날카로운 칼날.
멍 한 듯 앉아 있던 김 장관은 여자와 함께 준영의 모습이 완연히 사라지고 나서야 긴장감을 풀고 그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리고 판단했다. 준영이 원하는 것, 그건 다름 아닌 로비스트였다. 개인적인 관계를 따지고 들자면 새파란 젊은이들의 멈출 수 없는 욕구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김 장관의 판단이 옳다면 얼굴도 모르는 로비스트와 그의 사이에는 확실한 애정문제가 걸려 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와 닮은 여자를 상대로 흔들림 없던 준영이 그 같은 애정 표현을 했을리 없으니까.
이렇게 홀로 남겨진 룸에서 김 장관이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쯤 준영은 어깨를 감싸고 나온 여자를 로즈마리에서 나서자마자 조심히 풀어주었다. 잔뜩 긴장했던 여자의 눈동자의 알 수 없는 의문이 떠올랐다.
준영은 담배 한 대를 피워 물며 여자를 남겨 놓은 채 발길을 돌렸다.
" 집에 들어가요. 야심한 밤에 아가씨 혼자 돌아다니면 침흘리고 있는 늑대들이 물어가요. 그렇다고 다시 가게로 들어가면 안되요. 그 늙은이는 지금쯤 아가씨와 내가 호텔에서 함께 밤을 지새우는 걸로 알고 있을 테니."
이로써 준영의 오늘 일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본인이 낯뜨거울 만큼 확실한 암시를 주었으니 그가 원하는 바를 눈치 챘을 것이다. 이제 그는 조심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 오지 마. 차라리 모른 채 날 지나쳐 줘. 당신을 그런 여자로 몰아새운 날 가차없이 외면하란 말이야.'
그는 바랐다. 혜영이 이 제안을 매몰차게 잘라버리길.
그런 자리에서 그녀와 대면하는 일은 참을 수 없는 곤욕이다. 희미한 한 가닥의 희망을 안고 돌아서는 준영. 과연 혜영이 그 자리에 나타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준영 스스로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난제였다. 오직 하늘만이 아는 그들의 운명, 바로 그것인 것이다.
살가운 바람이 준영의 뺨을 스친다. 그리고 그의 입에 물린 아스라한 담배 연기와 함께 유유히 주변을 맴돌다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