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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도선 이남에 일본군의 항복을 받는다는 구실로 이 땅에 들어온 미군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사항인 임시정부 수립을 파탄시키고, 이승만과 김성수를 내세워 자신들의 꼭두각시 정부를 세우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죽기를 각오하고 반대합시다. 미제의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 음모를 반드시 저지합시다.”
1948년 2월 7일 오전 9시, 밀양고등공민학교 학생들은 자치회장 강성호의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밀양중학교를 자퇴한 강성호는 밀양고등공민학교로 편입했고, 아버지도 같은 학교에 편입할 예정이었다. 당시 고등공민학교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중학교 과정을 교육하는 학교였는데, 메이데이 투쟁으로 퇴학당한 학생들이 더러 편입해 오기도 했다.
전국 곳곳에서 ‘2.7 구국투쟁’이 동시에 벌어졌다. 밀양에서도 밀양중학교와 밀양고등공민학교 등 4개 학교에서 총궐기했다. 전농과 전평의 밀양지부도 동시에 들고 일어났다. 시위 군중들은 읍사무소 앞으로 집결했다. 마침 장날이라 아침부터 장꾼들도 모여들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출발해 읍내를 돌며 장터까지 상당한 거리를 행진했는데, 경찰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어. 이상하다 싶었지. 알고 보니 초동면과 청도면의 지서가 깨지고 악질 경찰들이 무장해제당했다는 거야. 밀양경찰서에서 지원 병력을 보냈는데 미리 도로를 파서 만든 함정에 경찰차가 빠져 난리가 났다고도 하고.”
장터에서 본격적으로 군중대회를 열려고 하는데, 밀양농잠학교 학생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대회에 참가하려는 학생들을 학련(전국학생총연맹, 대표적인 우익 학생조직) 학생들이 막으면서 충돌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밀양농잠학교는 친일 목사 권태희가 교장이었다. 권태희의 비호를 받아 학련 조직이 강한 학교였다.
강성호는 밀양고등공민학교 2학년 학생들을 보내 농잠학교를 지원하도록 했다. 아버지에게도 함께 가서 상황을 보고하라고 했다. 특히 붙잡히지 않게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농잠학교로 가던 골목길에서 밀양경찰서 사찰 형사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그 형사 옆에는 기관단총을 멘 정복 경찰이 함께 있었다. 아버지를 붙잡은 그들은 카빈총을 어깨에 멘 두 명의 순경에게 인계했다. 그들은 아버지를 밀양경찰서 뒤편에 있는 경찰 무도장으로 끌고 왔다.
그날 붙잡혀 온 사람은 300명이 넘었다. 경찰은 시위군중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팼다. 지서가 습격당한 것에 대한 분풀이였다. 곳곳에서 경찰의 폭력으로 유혈이 낭자했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왜놈들도 만세운동을 이렇게 마구잡이로 진압하지 않았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민심이 들끓었다. 지역의 유지와 구장들까지 나서서 어린 학생들과 청년들을 석방하라고 경찰서장에 대들었다.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전기, 철도 등이 끊겼다. [사진 제공 - 안영민]
그날 밤 무도장으로 손전등을 켠 경찰 여럿이 들어왔다. ‘남전’(남선합동전기주식회사) 산하의 지방 전기회사까지 몽땅 파업에 들어가는 바람에 온 나라가 전깃불 하나 없이 깜깜한 세상이 되었다. 경찰들은 붙잡힌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면서 얼굴에다 손전등을 비췄다.
“안재구 어딨노? 빨리 손 들고 나와라!”
“안재구 이 자식이 잡혀 온 걸 내가 분명히 봤다니까.”
아버지는 피칠갑을 하고 누워 있는 청년의 곁으로 갔다. 그 청년의 피를 손바닥에 묻혀 얼굴에 발랐다. 순식간에 아버지 얼굴도 피칠갑이 됐다.
“어차피 나가도 맞을 게고, 들켜도 맞을 건데 뭐 하러 내가 나가겠노. 내 곁에 와서 손전등을 비췄는데 못 알아보고 그냥 지나가더라.”
다음 날 아침부터 경찰서 앞에는 수백 명이 모였다. 붙잡힌 사람들의 가족이었다. 이들의 항의로 잡혀간 사람들 대부분이 풀려날 수 있었다. 물론 한꺼번에 수백 명을 경찰서에 가둬놓기 어려운 점도 작용했다. 덕분에 아버지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석방된 뒤 아버지는 다른 동무로부터 강성호가 보낸 쪽지를 전해 받았다. 쪽지에는 아버지 이름도 강성호 이름도 없었다. ‘되도록 빨리 종남산 꼭대기 오른편 방동고개로 오라’는 사연뿐이었다. 종남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잘록하게 들어간 방동고개는 초동면과 부북면을 잇는 길목이었다.
아버지는 밀성초등학교 때 같은 반 동무였던 박순희와 방동고개로 향했다. 박순희도 2.7구국투쟁 때 밀양농잠학교의 주동자였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경찰에 쫓기는 신세였다. 방동고개에서 강성호를 만난 아버지는 그로부터 상세한 정황을 들을 수 있었다. 구지에서 밀양으로 나오자마자 2.7구국투쟁에 참가한 아버지는 당일에도 일찍 경찰에 잡히는 바람에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단선단정 반대 2.7구국투쟁’은 전국에서 전개됐다. 전평이 주도한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공장은 일제히 문을 닫았다. 전신, 전화 등 통신도 두절됐고, 철도와 버스 운행도 멈췄다. 항만과 탄광에서도 파업이 일어났다. 학생들은 동맹휴학에 들어갔고, 노동자와 농민들과 합세해 경찰관서를 습격했다.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나온 10월 인민항쟁과 달리 2.7구국투쟁은 사전에 계획된 투쟁이었다. 또 경찰의 무력 탄압에 폭력으로 맞선 투쟁이었다.
“강성호를 따라 방동마을에 들어가니 두암에 사는 죽서 할배, 월산 할배와 계음 아재가 계셨어. 세 분 모두 초동면 지서를 습격하고 경찰들을 무장해제시킨 뒤 빼앗은 무기를 갖고 산으로 들어오셨지.”
죽서 할배와 월산 할배는 증조할아버지 숙부인 참위 할배 아들이었다. 아버지한테는 재종조부이다. 죽서 할배는 나중에 투쟁이 꺾인 뒤 일본으로 밀항했고, 월산 할배는 보도연맹에 들어갔다가 전쟁 때 이승만의 대학살로 희생당했다. 아버지의 삼종숙(9촌 아재)으로 밀양군당 초동면책이었던 계음 아재는 나중에 아지트가 발각돼 총격전 끝에 전사했다.
방동마을은 방동골짜기에서 흘러나오는 개울가의 산허리에 붙어 있는 작은 산골 마을이었다. 모두 일곱 가구뿐이라 오가는 사람이 드물어 면당의 아지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 장정 열댓 명이 탄압을 피해 모여든 것이다.
종남산 정상 봉화대. 종남산은 진달래 군락지로 유명한 산이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우리는 그믐날(2월 9일)을 맞아 종남산 정상 봉화대에 달집을 커다랗게 짓고 봉화 투쟁을 벌였어. 이를 신호로 산 아래 민중들은 야산에 올라 함성을 지르고, 밀양 읍내에서는 농악을 울리며 동시에 궐기했지.”
봉화는 단선단정 반대를 위한 새로운 투쟁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2.7구국투쟁을 계기로 이남의 운동은 점차 무장투쟁으로 전환해 나갔다. 이때부터 각 지방에는 유격소조인 ‘야산대’가 조직됐다. 야산대는 제주도의 4.3항쟁과 5.10단독선거 반대 투쟁을 거치면서 ‘남조선인민유격대’로 발전해 나갔다.
봉화 투쟁을 마치고 설날 아침이 되었다. 면당 책임자인 계음 아재가 전체를 소집했다. 간밤에 하달된 군당의 지시 사항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서 계음 아재는 ‘적들의 반격에 맞서 역량을 보위하기 위해 방동 기지는 즉시 해체하고, 설날의 세배 내왕을 이용해 예정된 장소로 이동하며, 지명수배된 동지와 노출된 동지는 군당에서 소환해 임무를 부여할 것이며, 그 밖의 동지들은 귀가해 대중단체에서 활동한다’는 내용을 전달해 주었다.
“이때 모두랑 헤어졌어. 죽서 할배와 월산 할배, 계음 아재는 방동마을에서 상복을 빌려 입고 설날의 시묘 상주로 가장해 새로운 면당 비트(비밀 아지트)로 이동했어. 경찰지서 습격에 참여한 다른 청년들은 노획한 무기를 가지고 밀양과 청도의 경계에 있던 화악산으로 들어갔지. 화악산에서 청도군 산서 지역의 역량과 결합해 야산대를 조직했다고 들었어. 박순희는 대중단체 활동을 위해 밀양으로 다시 내려갔고.”
강성호는 키가 크고 훤칠한 지도원을 따라갔다. 나중에 듣기로는 강동정치학원으로 갔다고 했다. 강동정치학원은 당시 남조선의 핵심역량을 키우기 위해 북조선에 설립한 기관이었다. 탄압과 테러가 일상이 된 이남에서는 그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성호를 만나지 못했어. 강동정치학원으로 간 동지들은 교육을 마치고 다시 월남하다 많은 이가 특무들에게 사살당했다고 해. 남로당 내부의 종파 프락치를 통해 정보를 입수하고 내려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모두 죽여버린 거지. 성호도 그렇게 억울하게 죽었을 거라 생각하니 정말 가슴이 아팠어.”
아버지는 외가로 몸을 피했던 자신을 다시 투쟁의 길로 이끌어 준 강성호에 대한 애틋함을 평생 간직했다. 아버지와 밀양중학교 동급생이었던 강성호는 아버지가 생의 마지막까지 잊지 못했던 동무였다. 이승에서 함께 보낸 시간은 겨우 1년 남짓이었지만, 아버지는 기억이 사라져가는 마지막 순간, 죽음을 코앞에 둔 시각에도 그에 대한 그리움을 놓지 않았다.
정상에서 밀양 시내를 내려다보면 밀양강과 그 안에 섬처럼 들어서 있는 삼문동이 눈 앞에 펼쳐진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나는 밀양의 종남산에 오른 적이 있었다. 종남산은 진달래 군락지로 유명한 산이다. 밀양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보이는 종남산은 성만마을의 뒷산인 덕대산과 이어져 있다. 정상에 오르면 2.7구국투쟁 직후 봉화 투쟁을 벌인 봉수대가 보인다. 정상에서 밀양 시내를 내려다보면 밀양강과 그 안에 섬처럼 들어서 있는 삼문동이 눈 앞에 펼쳐진다.
방동마을에서 시작해 방동고개를 거쳐 종남산 정상을 오르는 동안 나는 70여 년 전 이 길을 올랐을 아버지와, 분단을 저지하기 위해 투쟁하다 산화해 간 아버지의 동지들과 할배들을 생각했다. 온 산을 아름답게 수놓은 진달래꽃이 그분들의 넋인 듯했다. 돌 하나, 풀 한 포기 모두 소중하고 절실하게 다가왔다.
강성호와 헤어진 아버지도 설날 오후에 서른쯤 돼 보이는 지도원을 따라 출발했다. 한 군데 아지트에 들러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저녁밥을 먹고 다시 출발했다. 그렇게 어둠 속에 몇 시간을 걸어서 또 다른 아지트에 들러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아버지는 지게를 진 산골 총각으로 위장해 지도원 동지가 이끄는 대로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검문을 피하면서 도착한 곳은, 단장면에 있는 표충사의 위쪽 층층폭포 골짜기에서 다시 오른편 안부 계곡 속에 숨은 무릉동이라는 마을이었다.
“무릉동 마을은 해발 800미터 고지대였어. 동서는 높은 산줄기로 가려져 있고, 남쪽은 안부 로 훤히 틔어 있으며, 북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계곡이 있었는데, 그 위에 덩그렇게 얹혀 있는 모습이었지. 고래(古來)로 나라의 통치가 안 미치는 해방구였다고 해.”
그곳에서 아버지의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조직에서 받은 이름은 신덕생(申德生)이었다. 사람들에게 ‘덕을 베푸는 일을 하자’는 뜻이었다. 아버지가 제일 먼저 해야 할 과업은 바로 ‘산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무릉동에 개설된 남로당 군당 간부 양성반에서 유격 활동의 간부로 성장하기 위한 학습을 받았다. 학습은 군당의 호출이 있기까지 두어 달 동안 집중적으로 진행됐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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