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족)- 티베트 근대사의 분수령에서 큰 역활을 한 그의 죽음을 접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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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지역 최대의 요충지 창도(昌都:참도)
밤새 참새산(雀兒山)의 만년설이 흘러내린 시원한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밤을 지내고 아침 일찍 또 길을 떠난다. 오늘의 여정은 동부 티베트 최대의 도시인 참도까지 318km로 역시 만만치 않은 편이다. 그러나 도로 사정이 하도 종잡을 수 없기 때문에 몇 시간이 걸릴지 모를 일이다. 더게(德格)에서 30여km 떨어진, 양자강의 상류인 금사강(金沙江)을 따라 티베트 본토와 경계를 이룬다. 금사강에 걸려 있는 강탁대교(崗托大橋)를 건너면 티베트 입국을 감시하는 검문소가 잇는데, 이곳에서 티베트관광허가서와 변방통행증을 검사받게 되고 재수 없는 경우는 도로 사천성으로 추방당하게 된다.
강을 건너 티베트 땅으로 들어서면 길은 강을 따라 달리다가 쟝다(江達)에 도착하고 다시 한 나절을 더 달려야 목적지인 참도에 도착한다. 참도는 티베트동부와 횡단산맥 사이의 3강(금사강,난창강,노강) 유역에 위치해 있으며 캄지역의 최대의 대도시이다. 사천성과 운남성과 티베트의 접경을 이루는 교통 요충지로 인구 55만여 명(2000년가준)인데, 그중 거의 대부분은 티베트족이 차지하며 그밖에 한족, 회족 등 다양한 민족이 거주한다. 참도 시가지는 걸어서 웬만한 거리는 이동할 수 있으나 시내의 중심은 강 언덕에 자리 잡은, 캄지방 최대의 겔룩빠 사원인 참파링(强巴林)으로 도시의 모든 활동은 이곳 광장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사원은 1440년 겔룩빠의 종조인 쫑카빠의 제자 시랍숨뽀가 세운 것으로 법당의 주불이 참파불(强巴佛:彌勒佛)이기에 사원 이름이 참파링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대대로 청나라 황실과의 관계가 긴밀하여 청 강희제 이후 꾸준하게 청나라의 봉호를 받아 내려왔다. 한 번도 전란에 피해를 입지 않아 오래된 벽화 등을 잘 보존하고 있어서 불교유물의 보고로 꼽히고 있다.
또한 참도에서 120km 떨어진 자취하 상류의 산속에 자리 잡은 까르마사원은 불교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곳이어서 부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1185년 까귀 까르마종파의 종조인 제1대 까르마빠인 두숨켄빠가 캄지방에 세운 까르마사원은 정교일체의 법왕제도를 처음으로 확립한 까르마 종파가 겔룩빠에게 티베트불교의 주도권을 빼앗긴 뒤에도 여전히 불교사적으로 비중 있는 사원으로 티베트민중들에게 인식되고 있어서, 접근성이 어려운 환경에도 불고하고 참배객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더욱이 제17대 까르마빠가 인도로 망명한 처지이기에 해외에서부터 까르마종파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시기여서 더욱 그렇다.
참도는 전통적으로 캄의 중요한 국경도시로 특히 중국과의 사이에 있어서는 최후의 방어선이 있는 야전사령부가 있는 곳으로 근대 티베트 역사에서 통한의 아픔을 겪었던 곳이다. 참도의 관할구역은 중국의 북쪽 청해성과 사천성 북부를 어우르는 중요한 곳이기에 과거에도 티베트의 카샥정부의 ‘4대 카룬(政務大臣)’중의 한명이 총관으로 부임하여 참도를 비롯한 국경선을 지켰다.
1940년대에 들어 달라이라마의 공석 중에 대리국정을 맡은, 섭정이 이끄는 티베트 카샥정부는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국이 내전상태에 빠지자, 중국으로부터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독립하기 위하여 일련의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1941년 친중적인 레팅활불이 실각하고 친영(親英)적인 따자활불이 섭정이 되며 정권을 장악하고는 독립국으로서의 외교활동을 강화하기 시작하여 1943년 여름에는 까샥정부에 외교국을 설립했고 1947년에는 티베트 대표단이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된 ‘범아시아 회의’에 참석했다. 1947년 10월 티베트 정부는 상무대표단의 이름으로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외교활동을 벌었는데, 이 때 대표단은 외국차관을 들여와 티베트 화폐의 준비금으로 사용하려고 했지만, 큰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유럽 여러 나라를 거쳐 1949년 3월 티베트에 귀환했다.
주전파가 실권을 장악한 티베트 카샥정부는 1949년 7월8일에 라싸에 근무하는 중국대표부의 중국인들에게 티베트를 떠나라고 명령하여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금사강을 건너 사천땅으로 넘어갔다. 1950년 1월에는 티베트 ‘친선외교사절단’이 영국, 미국, 인도, 네팔 등지에서 티베트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군수지원국을 설립하고 외국에서 대량의 무기와 무선설비를 도입해 신식군대를 훈련하여 그 일부를 참도 사령부와 금사강 일선에 배치했다.
이런 일련의 상황 하에서 1950년 10월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티베트군의 주력이 주둔하고 있는 참도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티베트군 5천7백명이 죽고 2천여 명이 인민해방군에 투항했다고 통계는 나와 있지만, 당시 참도 총관(總官)은 대표적인 주화파의 카룬인 아패․아왕진메였는데, 그는 결사적으로 참도를 지킬 의지가 없었기에 스스로 화약고를 스스로 폭파하면서 저항을 포기하였다. 이에 최전방의 방어선이 뚫리자 인민해방군은 파죽지세로 라싸까지 밀고 들어왔다. 그리하여 다음 해 1951년 5월23일 티베트의 카샥정부대표단이 북경으로 가서 마침내 인민정부와 <티베트의 평화적인 해방 방법에 관한 협의 17조>를 체결하고 말았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티베트 인민은 단결하여 제국주의 세력을 티베트에서 몰아낸다. 둘째는 티베트 지방정부는 인민해방군이 군량 및 기타 일용품을 구입하고 수송하는 것에 협조해야 한다. 셋째는 티베트 인민은 민족구역자치를 실행할 권리를 갖는다. 넷째는 중앙정부는 티베트의 현행 정치제도를 변경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그러니까‘제17조 협의’는 티베트를 독립국가가 아닌‘민족자치구’를 시행하는 중국의 한‘지방정부’로 규정한 셈이다. 이로써 티베트는 정확하게, 57년 동안 중국의 한 자치구가 되어 중국화의 길을 빠르게 걷고 있다.
여기서 특기할 사항은 당시 참도총관이었던 아패․아왕진메는 예의 그‘17조’를 체결할 때 정부대표단의 수석자격으로 북경으로 가서 조약에 날인하였고 그 후에도 서장자치구의 주석으로 승승장구한 주화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1950년 당시 중국이 티베트를 무력 점령할 때, 현재 다람살라에 티베트 망명정부 땅을 제공하고 있는 우호적이고 평화적인 나라라는, 인도 역시 티베트영토였던 지역을 점령해나갔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티베트의 남서부의 공뽀지방과 응아리지방의 남쪽 절반에 해당되는 지역인 킨노르, 돌뽀, 쟌스카르, 그리고 카슈미르지방의 라닥, 스카루드(大勃律), 길깃트(小勃律) 등이 바로 그 땅들이다. 그리하여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될 때 스카르두와 길깃트는 다시 파키스탄 땅으로 갈라져 나가서 고대 투뵈제국의 영토는 사분오열되고 말았고 현재 부탄왕국만이 유일한 티베트권 독립국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중국의 행정개편으로 옛 티베트영토는 더욱 쪼개져 감숙성, 청해성, 운남성, 사천성으로 편입되어 버렸다. 특히 사천성의 동부는 캄 또는 서강성(西康省)이라 부르던 곳이었는데, 통째로 사천성으로 편입되어 버렸다. 그래서 현재의 티베트는 옛 투뵈제국의 3/1에도 못 미치는 영토만이‘서장장족자치구’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전 세계인들의 희망대로 티베트가 다시 독립국가가 될 것인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티베트의 운명을 두 어깨에 걸머진, 제14대 달라이라마 텐진갸초 성하조차도, 아니 전지전능하시다는 관세음보살조차도 티베트의 내일은 점칠 수 없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국제관계는‘정글의 법칙’그대로 통용되는 냉혹한 현실세계이다. 힘이 약해 일단 먹히고 나면 억울해도 하소연 할 데가 없는 게 현실이다. 우리는 여기서 “패자는 할 말이 없다.”라는 속담을 곱씹어 볼 일이다. 나라를 이민족에게 넘겨버린 위정자들이나 또는 무력으로 남의 나라를 점령한 침략자를 나무랄 수 있는 것은 분명히 한계가 있고 설혹 그런다고 해도 그런 상황이 바로잡아지지는 않기 마련이다.
최근(2008년 11월 22일) 인도 다람살라에서는 티베트의 미래에 대한 역사상 가장 이례적인 회의가 <1st Special General Meeting 2008>이란 제하에 6일간 열렸는데, 티베트 망명정부의 총리 삼동린뽀체 이하 5백 명의 대표들이 모여 티베트의 향후 운명에 대해 논의한 후에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우리 티베트인들은 계속적으로 중국 정부를 향해 ‘고도의 자치’를 요구해 왔습니다. 우리의 방법은 항상 비폭력적이었고 공식적으로 독립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3월 티베트에서 발생한 사건들은 중국정부가 티베트를 다루는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중략) 또한 티베트를 대표하는 500명이 모인 이 회의를 통해 앞으로도 우리는 독립노선이 아닌 완전히 폭력이 배제된,‘중도노선’을 유지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우리는 중국에 독립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중국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우리의 요구에 전향적인 자세로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중략) 전 세계의 티베트 지지자 여러분, 전 세계의 시민 여러분, 불교신자, 그리고 불교를 믿지 않는 분들, 무엇보다도 인도의 국민 여러분! 당신들의 지지와 관심을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티베트를 사랑하는 사람치고, 따듯한 마음씨를 가진 티베트인민들이 강쩬이란 순결한 땅에서 자유롭게 살면서 그 선명한 문화와 종교를 잘 보존하면서 외부세계와는 다른 색깔로 남아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할 일이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가끔 외신으로 전해지는 티베트사태를 보고 즉흥적으로 흥분하여 중국의 폭력적인 행위를 매도한다고 해서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냉엄한 국제관계가 금방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까?" 라는 실질적인 방법론은 당분간 티베트를 사랑하고 염려하는 우리들 모두 각자에게 당면한 화두가 되리라.....
첫댓글 훗날 <뵈릭의 푸른 역사>가 그에 대한 평가를 어찌 내릴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영욕의 삶을 살고간 그가 떠나갔으니,.... 이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가 또 넘겨지게 되는 것인가?.
역사를 돌이켜 보면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까?'...
인간사(진실)은 묻으려 하고 (진리)는 따르려 하듯이 / 제가 아는 중국은 영웅이 태어나면 흥했다 죽으면 분열되는 나랍니다 / 구태여 조급히 힘빼지 맙시다 /진리를 따르고 익히다 보면 진실은 밝혀 집니다 / 가장 큰 적은 안에 있듯이 티벳에 북을 쳐 깨울순 있어도 일어나 싸우고 이겨서 지키는 것은 그들 몪이지요/ 존재의 이유가 아닌 가치겠죠!
음~~~
글씨 우쨔 남의일이 아닌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