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24. 6. 23(주일) 성령강림절후다섯째 주일, 6.25전쟁기념 민족화해주일 (2024 25주)
제목; “내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성경; 겔 37:15-23 (p.1210) (시 95:6-7, 516<265>, 582<261>, 621)
<예배의 부름> (시 95:6-7)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호국보훈의 달 6월 넷째 주일, 6.25전쟁기념 민족화해주일을 맞이하며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 평화가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특별히 이틀 후 25일(화)이 6.25전쟁 발발 74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전쟁 기념일 앞두고,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나라 사랑, 애국(愛國), 조국 사랑, 애족(愛族), 이웃 사랑, 애린(愛隣)을 새롭게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제가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이하고, 6월 6일 현충일을 보내면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 노르망디 오마하 해변 상륙 영상을 보았고, 지난 주 “이웃과의 친교”에서는 우리 이웃에 대한 무관심에 관해서 말씀과 영상을 나누었습니다. 마찬 가지로 6.25전쟁 발발 74주년을 맞이하면서, 남북 통일을 갈망하는 우리는 전쟁을 참상을 분명히 기억하면서, 이웃에 대한 관심, 특별히 저 북녁 동포들에 대한 관심은 물론 북한 체제에 관해서도 그 실상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제사장으로서 제1차 포로기인 기원전 597년에 여호야긴 왕과 함께 사로잡혀가서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있던 에스겔 선지자의 하나됨, 통일에 대한 소망의 메시지를 통해 우리 대한민국 통일에 대한 희망과 방법을 나누는 시간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II.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겔 37:15-23)은 골짜기에 널브러져 있는 마른 뼈들이 에스겔이 명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살아나는 부활의 환상을 보여주는 ‘마른 뼈 환상’(1-14)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두 막대기”를 합치는 상징적 행위(16-17)를 통하여 남북이 하나로 연합한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제1차 포로 잡혀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있는 에스겔은 유다가 멸망하는 기원전 587년까지는 심판의 예언을 하지만, 멸망 이후 포로민들에게 소망을 선포하는 예언을 하였습니다. 에스겔의 심판 예언은 주로 1-33장에 걸쳐 있고, 34-48장에는 구원의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 37장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는 33장이후에 이어지는 부활과 회복의 메시지(34-37)의 결론부입니다. 37장의 전반부에는 마른 뼈를 소생시키는 환상이 기록되어 있고, 후반부에는 왕정 시대에 분단된 두 나라가 하나로 통일되는 사건이 두 막대기를 합치는 상징적 행위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1-14절의 마른 뼈 환상은 에스겔 개인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15-23절은 바벨론에 유수된 백성들을 향하고 있다. 내용상 15-23절은 서두(15), 두 막대기의 상징(16-17), 상징의 해석(18-19), 두 민족의 운명에 관한 예언(20-23)으로 세분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은 이와같이 솔로몬 이후 남북으로 분열되어서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당했던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하나로 통일된 상태로 온전히 회복될 것을 예언하고 있으며, 이 회복된 통일 왕국을 하나님께서 정결하게 하시고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영원히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심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영원히 견고하며 번성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이키실 때에는 옛날 분열되고 찢겨진 그대로의 추한 모습으로 회복시키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북 왕조로 분열된 슬픈 과거사를 종결지으시고 통일되고 평화로운 새로운 나라로 만드실 것이고(22), 모든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들을 제거해 버리고 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23). 이러한 날이 우리가 살아가는 한반도에도 속히 이루어지길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 분열하고 대립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남북이 마주 달리는 열차처럼 극한 대립의 상태를 종식하고 하나로 통일되어 다시는 나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항상 임재하시는 나라로 발돋움하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1. 통일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서만 가능합니다(17).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17)
통일의 힘은 인간이나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에서도 분명히 말씀해 주십니다. 19절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21-22절 “그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잡혀간 여러 나라에서 인도하며 그 사방에서 모아서 그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이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고 세 번에 걸쳐서 남과 북으로 나누어져 있던 이스라엘이 이제는 하나님의 손 안에서 하나로 회복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통일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이 일을 이루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주님께서 모든 일을 빈틈없이 진행해 나가신다는 절대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절대 신앙으로 무장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북한이 ‘주체사상’이라는 교조 형태를 띤 체제 속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통일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주체사상 10조 65항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면,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를 우상화하라는 것이 그 핵심 내용입니다. 그들을 신격화하기 위해 당의 권위를 절대화하고 그들을 신처럼 믿으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여기에다 김정은 우상화까지 추가 되어서, 이 세상과 온 우주 만물의 창조자인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부정하고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라는 인간이 절대 주권을 가진 신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은 우주 만물의 유일한 절대 주권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이 주인이 된 주체사상과 이를 추종하는 대한민국 운동권에 관해서 조금 공부를 해보겠습니다.
먼저 북한의 통치 이념인 주체사상을 조금 살펴보면, 주체사상은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인간 중심의 새로운 철학사상 창조’를 기본으로 합니다. 주체사상은 사회적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을‘자주성, 창조성, 의식성’ 등 세 가지로 보는데, 결국 이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다 가진 사람은 김일성과 김정은, 여기에 더해 김정은 세 사람뿐이라는 것이 주체사상의 핵심 주장이며, 이는 “진보적인 혁명리론은 탁월한 수령에 의해서만 창시됩니다”라는 김정일의 말을 근거로 합니다. 여기서 주체사상의 가장 핵심 개념 중의 하나인 ‘수령주의’라는 이론이 등장하는데, 이는 ‘수령’이라는 하나의 개인을 우상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론입니다. 이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타파하고 당에 의한 인간의 지배’를 강조한 ‘마르크스-레닌주의’ 곧 ‘공산주의’를 변종시킨 것으로, 인간에 대한 우상 숭배로 빠져 스탈린보다 더한 개인 숭배의 이데올로기 체제입니다. 또한 현재 북한은 ‘선군 정치’라 하여, 노동자가 아니라 군인이 국가의 기반이며 자주성을 수호하는 주체임을 선포하므로 ‘마르크스-레닌주의’ 곧 ‘공산주의’와 완전히 결별하였습니다.
세계 모든 국가는 헌법(憲法)을 갖고 있으며 그 전문(혹은 서문)에 한 나라의 역사와 통치 원리를 밝히고 있는데, 우리 나라 헌법과 북한 헌법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먼저 1987년 10월 29일 전부 개정되고 공포된 대한민국 헌법을 살펴보면,
“전문 :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ㆍ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제1장 총강,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입니다.
그런데 1998년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1차회의에서 수정 보충된 북한 헌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전문을 보면,
“서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사상과 령도를 구현한 주체의 사회주의 조국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이시며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이시다. 김일성 동지께서는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을 창시하시고 그 기치 밑에 항일혁명투쟁을 조직 령도하시여 영광스러운 혁명전통을 마련하시고 조국광복의 력사적 위업을 이룩하시였으며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분야에서 자주독립국가건설의 튼튼한 토대를 닦은데 기초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하시였다. …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민족의 태양이시며 조국통일의 구성이시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주체적인 국가건설사상과 국가건설업적을 법화한 김일성 헌법이다.”,“제1장 정치, 제1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
우리 헌법과 여타 다른 나라들의 헌법과 많이 다르지요. 소위‘주체사상과 수령주의’에 입각하여 ‘수령 김일성’ 모든 것을 창시하고 이끌어가는, 성경에 말하는 우상 숭배보다 더한, 인간이 유일신이 되어 통치하는 유일무이한 나라가 북한입니다.
문제는 이 말도 안되는 주체사상과 수령주의 망령이 우리 자유 대한민국에도 버젓이 회자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운동권에 ‘주사파’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1980년대에 등장한 운동권 두 주류가 ‘민중민주파(民衆民主派, People's Democracy Faction; PD파)’와 ‘주체사상파(主體思想派, 주사파, NL파)입니다.
먼저 ‘민중민주파’혹은 ‘PD파’는, 마르크스주의의 사회-철학적 전통을 중시하는 사회주의계의 1980년대 대한민국에서 시작된 진보주의 운동의 한 갈래로, ‘평등파(平等派)’라고도 합니다. 대한민국 사회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규정하고, 사회 변혁 방법으로는 민중민주주의 혁명론에 따르며, 사상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다음으로 ‘주체사상파(주사파)’는 북한의 주체사상(主體思想)을 지도 이념으로 삼은 남한의 반체제 운동 세력으로. 남한 사회의 성격을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하고, 북한의 남한혁명노선이라고 하는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혁명론을 추종하여 특히 민족해방(national liberation)을 강조하였기 때문에‘NL파’라고도 불렸습니다(전대협 등).
두 정파는 혁명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를 타도하고 노동자들이 국가의 주체가 되고 주인이 되는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지만, 그 지도 이념과 조직은 많이 다릅니다.
민중민주파(PD파)는 단일한 지도 이념에 따라 통일된 조직을 형성한 주사파, 민족해방파(NL파) 계열과 달리, 본래부터 단일 정파는 아니며 몇 개 정파가 독립적으로 형성되어 조직적으로도 분립된 양상을 보여왔습니다. 더불어,민족 모순을 대한민국 사회의 주요 모순으로 파악하는 주사파(NL파)계열에 반해, 민중민주 계열은 이를 민족 모순이 아닌 계급 모순으로 파악합니다. 계급 투쟁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고 남한 혁명을 이뤄야 한다는 이들은 ‘민주노동당, 정의당, 진보신당, 노동당’등으로 정치권에 진입하며, 후에 ‘진보신당’은 소위 ‘이석기 내란 음모 사건’등으로 인해 헌법재판소에서 내린 해산 명령으로 강제적으로 해산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1970-80년대 군부 독재 시절에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등, 정의와 공의의 실현을 위해 태동되었던 소위 ‘운동권’이 변질되어, 21세기 최악의 인권 유린 국가이자 최빈국인 북한을 추종하는 주사파가 버젓이 활보하고 있고, 국회의원까지 되어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후 해방되고 전쟁을 겪은 수많은 나라들 중 유일무이하게 선진국으로 진입한 대한민국이 아직도 미 제국주의의 지배 하에 있는 식민지로 분류하고, 투표라는 민주주의 방법에 의해 세워진 정부를 전복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또 민주당 계열 야당과 주사파 등이 주장하는 ‘진보주의’라는 말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원래 진보주의(進步主義, Progressivism)는 ‘기존 정치·경제·사회 체제에 대항하면서 개혁을 통해 새롭게 바꾸려는 성향’입니다. 이는 전통 가치와 안정을 지향하는 ‘보수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이다. 원래 진보주의는 교육 사조로서,1918년에 아동 중심 교육을 주장하던 미국의 교육학자·심리학자들이 “진보주의 교육협회”(The Progressive Education Association)를 결성한 데서 본격적으로 출발한 교육 운동입니다. 진보주의는 루소(J.J. Rousseau)의 자연주의 교육사상의 영향을 입은 19세기 유럽의 「신교육운동」(The New Education Movement)과 19세기 말에 발달한 심리학과 아동에 관한 연구가 고조된 것에 관련하여20세기의 초기에서부터 미국 사회에서 전개된 교육 사조입니다. 전통적인 권위주의와 성인 중심적 교육관에서 탈피하여, 아동의 개성·흥미·욕구·적성·자발성 등을 교육의 중요한 원리로 삼고 외부의 강제나 통제에 의한 교육을 배척하는, 이른바 아동 중심 교육이 진보주의 교육 운동의 동기입니다. 그러나 미국 사회가 1930년경에 대경제공황(大經濟恐慌)을 겪는 동안 진보주의가 사회의 비판적 여론의 대상이 되자, 사회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관심을 높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초기의 진보주의가 아동 중심적 특징을 가진다면, 후기의 진보주의는 사회 문제 중심적 특징을 가집니다. 지역사회 학교, 생활 중심 교육등은 후기운동의 두드러진 특색입니다.
그리고 진보는 시대적ㆍ역사적 배경에 따라 상대성을 띱니다. 왕정 시대에는 ‘자유’를 옹호하였지만, 산업혁명 이후에는 자본주의에 반발한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에 의한 재분배, 규제와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며, 경제적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보수와 대립합니다.
제가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잘 안하는 편이 아닌데, 왜 이렇게 우리나라 운동권과 진보주의에 대해 조금 길게 설명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가짜 유공자들과 가짜 진보주의가 활개치고 있는 현실 때문입니다. 6월이 호국보훈의 달인데 진짜 대우받고 보살펴야 할 유공자들은 소외되고, 가짜 유공자들이 대우받고 활개치고 있으며, 기존 잘못된 정치, 경제, 사회 체제를 개혁하고 참된 자유와 해방, 정의와 평등을 추구하는 참 진보주의 가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해서, 당리당락을 위해서 진보의 개념을 악용하는 가짜 진보주의자들이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진보’라는 미명을 이용하여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종북 주사파들의 준동을 경계하며 올바른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우리의 통일과 개혁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분열되어 서로 싸우다가 각각 다른 나라에 의해 멸망당하고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포로 해방과 통일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 한 분뿐이기 때문입니다.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17),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더 이상 자신들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하게 한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23)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통일과 개혁은 우상과 가증한 죄악으로 성취되지 않습니다. 김일성 등 인간이 주체가 되는 주체사상이나 인간이 중심이 되는 진보주의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고 통일의 주체라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이 주체가 되거나 어떤 이념이 중심이 되면 그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그런즉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오늘 내가 네게 명령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신 4:39-4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이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 절대 신앙으로 무장하여 나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따라 전무후무한 놀라운 역사를 이 땅에 허락하심으로 두 막대기를 하나의 막대기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통일도 그러합니다. 남북의 정상들이 만나고 여러 가지 통일 사업이 진행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 아니하시면 그 모든 것들이 허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통일은 하나님의 손에서만 가능하다는 믿음을 확고히 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2. 통일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취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거듭해서 ‘여호와의 말씀’(15,19,21)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5절에는 백성들에게 전할 통일의 비전이 말씀으로 에스겔에게 임하고 있고 19절, 21절에는 예언자 자신이 ‘여호와의 말씀’에 근거하여 통일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통일은 인간의 얄팍하고 거짓된 이론이나 술수로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진리 안에서만이 진정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써 바벨론 포로 생활로 절망에 빠져있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새로운 민족의 미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진리 위에 굳게 서 있었기에 어떤 압력이나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갔던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편에 서야 합니까?
①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그 진리는 결국 승리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②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며, 예수님도 병든 자를 고치시고, 사탄을 쫓아내며,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 독일어: 하나님의 말씀‘Tatwort’=‘doing word’=살아서 꿈틀거리는 능력의 말씀,
* 행 3장: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 일어나, 9장사울의 변화 ☞ 전부 말씀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이 진리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계셔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놀라운 능력과 지혜를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역사하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 역사할 때 우리의 삶은 물론, 심지어 그 사회와 나라까지도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능력이 있어서 복음이 전해질 때 놀라운 변화를 일으킵니다. 생각이 변하고 마음이 변하고 태도가 바뀌고 가치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강퍅하고 완악한 자라도 주님의 말씀에 사로잡히면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고꾸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둘이 하나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씀의 능력이 우리에게 와야 하는 것입니다. 온통 거짓으로 도배하다시피 되어 있는 북한의 체제와 무엇을 가지고 싸울 수가 있습니까? 그들의 거짓과 위선을 철저히 무력화시키려면 진리의 말씀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3. 통일은 교회와 성도들의 기도를 통해 성취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통일의 과업을 그 누구도 아닌 하나님을 알고 그 뜻을 받드는 기도하는 자에게 맡기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네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 손을 도구로 통일의 사명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네 손”은 누구의 손입니까? 하나님의 사람, 기도의 파수꾼 에스겔의 손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한국 교회와 교회 지도자, 성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한반도의 운명을 우리에게 붙여 주셨습니다.
동독과 서독이 어떻게 해서 둘이 손을 잡고 하나가, 통일이 될 수 있었는지 아십니까? 죽음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민족이 하나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 교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눈물의 기도가 있느냐 없느냐? 에 따라 한 민족이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독일 통일과 베를린장벽 붕괴 원동력은 놀랍게도 한 작은 밀알 기도회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 동영상, 사진 보며)
1980년 동독 작센주 수도 라이프치히에 있는 성 니콜라스 교회에 37세의 크리스티안 퓌러(Christian Führer) 목사가 부임했다. 1981년퓌러 목사는 ‘평화 기도회’(peace prayers)를 조직하고, 1981년 9월 20일부터는 매주 월요일 오후 5시에 정기적으로 기도회를 열었다. 그리고 기도회가 끝나면 통일을 위하여 자유롭게 토론되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토론했고, 억압당하는 자의 편에 서서 억압하는 자를 비난했다. 처음에는 루터파 교인 위주로 조직되었으나, 점차 비 기독교도들도 기도회에 참여했다. 퓌러 목사는 신약성서 산상수훈의 구절을 강조하며 가난한 자, 온유한 자에게 복이 있을 것이며, 억압하는 자, 권좌에 있는 자의 권위는 끌어내려 질 것이라고 설교했다.
무신론를 믿는 공산주의자들은 교회의 기도회를 멸시했고, 예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아냥거렸다. 독일의 교회는 두 번의 무신론자와 싸웠다. 첫 번째는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정권이고, 두 번째는 동독 공산정권이었다.
교회 정문에 “모든 이들을 위하여 열려있는 니콜라이 교회”(Nikolaikirche/ offen für alle)라는 문구가 씌여있는 니콜라스 교회의 작은 기도회는 독일 통일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창출했다. 젊은 목사는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갖은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유와 평화를 외쳤다. 그들은 비폭력을 고수했다. 억압하는 자들이 폭력을 행사하더라도, 그들은 평화를 노래했고, 기도로 두려움을 극복했다.
이 작은 밀알 기도회가 1989년 11월 8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이뤄진 독일 통일의 자그만 초석이 되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통일이라고 다르겠습니까? 한국 교회가 깨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셔서 머지않은 장래에 통일의 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에는 기도의 힘이 얼마나 강하고 대단한가를 보여주는 예들이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사도행전 1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투옥과 탈옥 장면입니다. 헤롯 왕이 요한의 형제 야고보 사도를 칼로 죽이고(2), 베드로를 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에 교회는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5),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고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집니다. 천사는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고 말하면서 옥문을 나가라고 하지만, 베드로는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합니다.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고 한 거리를 지나 천사가 떠나므로 비로소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게 됩니다. 이 모든 탈옥의 근원이 된 것이 바로 교회가 간절히 기도한 때문이었습니다.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행 12: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둘이 하나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무장할 때 통일을 그날도 속히 다가올 것입니다.북한은 핵무기를 가지고 세계를 위협하고 협박하고 있지만, 우리는 핵무기보다 더 가공할 만한 신무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바로 기도의 힘입니다. 이 세상에 기도의 능력을 대항할 힘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말합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기도의 힘이 크다”(약 5:16)
4. 결(結) : 우리의 통일은 평화 통일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26-27절에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26-27)고 말합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 북한이 핵을 갖고 있지만, 우리의 군사력이 북한보다 나으니 핵을 더 보유하기 전에 어떤 기회가 오면 전쟁을 통해서라도 통일을 이룩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고의 가치조차도 없는 발상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몇 년전 미국 시사 주간지 Time지 보도에 의하면 인간 역사 5,500년동안에 14,351회의 전쟁기록이 있는데, 이는 한해 평균 2.6회의 전쟁이 일어난 것을 보여줍니다.
미국의 IBM컴퓨터가 계산한 바에 의하면 주전 45년에는 전쟁에서 적군 한 명을 죽이는데 소요된 경비가 미화 75센트, 지금의 우리 돈으로 약 1,000원 정도 들었고, 1차 세계대전 때는 1,000달러, 약 140만원이 들었으며, 2차 대전 때에는 20만달러, 2억 8천만원이 들었습니다. 만약 3차 대전이 일어난다면 1명을 죽이는데 드는 비용은 약 103만 달러로, 약 15억원이 들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만약 전쟁이라는 비극이 다시금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 나라는 세계 최하류국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통일은 반드시 평화 통일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평화의 개념은 어떠한 것인가를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① 구약에서 ‘샬롬’(Shalom)을 평화의 개념으로 사용했는데, 여기에는 건전, 완전, 안전, 복지의 뜻까지 포함시킵니다. 결국 인간의 모든 상황은 발전을 거듭하되 그 결과는 질적, 양적의 영원한 평강에 귀결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샬롬’은 어떠한 부분도 결여되거나 부족하거나 손상되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샬롬의 반대말은 전쟁이나 분쟁이 아니라, 완전함의 파괴요 조화와 화합의 붕괴인 것입니다.
② 헬라인들은 ‘에이레네'(Eirene)로 지칭되는 평화의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평안의 근본적인 의미를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적인 것으로 보기보다는 일상에서 잊혀지기 쉬운 하나님의 존재가 개인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편안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마음의 조화로운 상태를 추구해 온 헬라인들은 평화를 사물이나 사람의 관계로 보기보다 감정으로 느껴지는 심리상태라는 점에 더 큰 비중을 두었습니다.
③ 신약에서의 평화의 개념은 다양하게 쓰였습니다. 인사와 문안할 때(눅 10:5), 사람을 보낼 때(약 2:16),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화목하다는 뜻으로도 쓰였습니다(행 7:26). 그러나 이보다 더 평화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평화의 본질로 간주한 것입니다. 즉 구원을 ‘평화에 관한 일’(눅 19:42)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엡 2:13-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통일 역시 이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둘이 하나가 되는 통일, 서로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서로의 마음을 열고 공감대가 형성된 조화로운 상태에서의 통일, 전쟁이 아닌 평화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III.
오늘 본문에서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 …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16)이라고, 말하므로 남유다의 중심인 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중심인 요셉, 곧 에브라임 지파와 나머지 모든 지파들이 하나로 통일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독립적인 나라로서의 유다 또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그 짝”으로 인식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그 짝”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가 ‘하베르’(הבר)인데, ‘연합한 자’ 또는 ‘동료(동무)’라는 뜻입니다. 시편 45:7에서는 왕의 “동료”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시편 119:63에서는 주를 경외하는 자들의 “친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와 그 짝”, “요셉과 그 짝”이란 표현은 주 구성원만 아니라 나머지 모든 지파 예컨대, 르우벤, 시므온, 레위, 베냐민 등 모든 지파가 하나님의 손에서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먼저 우리 교회가 이러해야 합니다. 지연, 학연, 신분과 계층, 남녀노소 아무 상관없이 주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통일 역시 마찬 가지입니다. 남북의 모든 지방, 모든 사람들이 하나 되는 통일을 이뤄야 합니다.
특별히 공산주의 맞서 싸워서 피흘리며 지켜낸 우리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평화 통일을 이뤄내야 합니다.
19세기와 20세기 초만을 휩쓸었던 자유주의 신학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물결 속에서 거의 사라졌던 정통주의를 복원해서 신정통주의로 발전시켰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로 돌아와서 동서 이데올로기로 굳어져 가는 냉전체제를 주시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독일교회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사실 지금까지 실상이 드러난 동방의 공산주의를 어느 면에서든지 찬성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나는 결단코 공산주의 영역에 몸담고 싶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생각도 없다. 그러나 나는 서방세계에 살면서 점증되는 혼란과 극단적인 대립 가운데서 몸부림치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공산주의를 거부한다거나 멸시해야 할 의무를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공산주의 그 자체보다는 반공을 빙자한 우리의 현실이 더 악하다고 생각한다.” 교회와 성도들에게 큰 반향을 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6.25 전쟁 발발 74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남북의 갈등은 여전하고 통일의 가능성은 묘연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것들이 불확실하다고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손 놓고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한국 교회는 민족의 화해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의 통일이 무력이나 이데올로기(이념), 어떤 인간에 의한 통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이뤄진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뜨겁게 기도하므로 반드시 평화통일을 이뤄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샬롬!!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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