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푸는 불교’ 실천…복지와 교육에 큰 자취 / 혜성스님
70년대부터 보육원 등 세워 불교계 복지사업 중심에
청담학원 설립…중앙승가대학 ‘4년제 정규大’초석도
10.27 법난 고문 후유증…거동 힘들어도 보시행 앞장
도선사 회주 혜성스님은 1980년 10.27법난 당시 군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하다. 스님은 ‘참을 인’자를 써주며 “참는 사람이 승리하고 참아야 행복하다”고 말했다.
서울시 금천구 시흥2동 1000년을 넘게 지켜온 은행나무를 지나면 불교 복지타운이 나온다. 사회복지법인 청담 혜명복지원 산하에 혜명불교보육원, 혜명불교양로원, 청담종합사회복지관 등이 나란히 서 있다. 몇 해전만 해도 단독주택가에 밭들이 듬성듬성 보이던 외진 지역이었는데 어느새 아파트단지로 변모했다. 이 불교 복지타운을 이끄는 분이 도선사 회주 혜성스님이다. 스님은 청담종합사회복지관 관장을 맡고 있다. 모체인 혜명복지원은 도선사 주지 스님이 당연직 이사장이다. 지난 13일 만난 혜성스님은 몇 해 전보다 거동이 불편해 보였다. 1980년 10.27 법난 당시 군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후유증이다.
1980년 10월27일 새벽 계엄군은 전국 주요사찰에 난입,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스님을 비롯, 도선사 주지 혜성스님, 부산 대각사 주지 경우스님 등 46명의 스님을 강제 연행하고 사찰재산을 압류하는 훼불을 저질렀다. 신군부는 광주민주항쟁으로 어지러워진 민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이들의 집권이 정당함을 강변하기 위해 가장 힘이 약하고 정권에 고분고분했던 불교계를 희생물로 삼았다. 혜성스님은 “그날 새벽, 아침공양을 하고 있는데, 군인들이 군화를 신은 채 들이닥쳤다. 끌려간 곳은 합동수사단 수사3국, 곧바로 가사장삼이 벗겨지고 죄수용 군복을 입은 채 취조가 시작됐다. 수사관들은 내내 구타와 욕설로 일관했다”고 어렵게 회고했다. 불교신문도 아무런 이유 없이 이들에 의해 강제 폐간되는 아픔을 겪었다. 27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한 스님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다른 스님은 자신의 몸을 자해하면서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정부도 불교계의 오랜 요구를 받아들여 1988년 청문회를 개최해 사건의 대강(大綱)을 밝힌데 이어 군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진상을 규명해야 할 사건으로 채택했다.
혜성스님을 10.27 법난의 피해자로만 기억하는 것은 단편적이다. 스님이 책임지고 있는 시흥의 불교복지타운은 전쟁이 잉태한 고아들 곁을 지킨 불교계의 유일한 자취다. 1946년 한 불제자가 건립해 1958년 현 위치로 이전한 혜명보육원은 전쟁고아들의 보금자리였다. 1976년 도선사로 운영권이 넘어오기 전까지 보육원에 관심을 갖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분이 청담스님과 뒤를 이은 혜성스님이다. 특히 혜성스님의 복지에 대한 원력과 관심을 잘 알고 있던 그 불제자는 건물과 토지를 스님에게 넘기며 뒷일을 당부했다. 당시 시흥은 피난민과 이농민들이 새롭게 일군 빈민가였다. 도선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던 혜성스님은 보육원에 이어 양로원 등을 건립, 불교계 복지의 새 장을 열었다. 1970년대 불교는 아직 복지문제에 눈조차 뜨지 못할 때였다. 1990년대 초 까지만 해도 교계 기자들 사이에서는 ‘혜명복지원과 혜명양로원 말고 다른데 취재할 데 없나’는 한탄 아닌 한탄을 들을 정도로 ‘혜명’은 불교계를 대표하는 복지기관이었다. 그 중심에 혜성스님이 있었던 것이다. 스님은 “피난민들이 내려와 형성된 달동네였던 이곳에서 도선사가 이들을 보살피면서 오늘날과 같은 불교복지타운이 됐다”고 말했다.
스님은 말을 하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듣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스님은 “불교신문을 통해 교계 소식을 알고 있다”고 밝혔다. 새벽 예불 시간에 맞춰 일어나는 스님은 출근 시간이 시작되기전 도선사에서 나와 시흥으로 출근, 일과를 본 뒤 오후 4시께 퇴근한다. 일주일 중 이틀은 평택으로 출근, 학교일을 본다. 그곳에는 청담중학교와 청담정보통신고등학교가 소속된 청담학원이 있다. 스님은 “한국 전쟁 후 민족 정신의 근간이었던 불교가 한낱 미신적 존재로 전락되고 정부의 중심을 잃은 종교정책과 일부 맹목적인 타종교인들에게 불교가 형편없이 매도되는 현실을 타개하고 우리 청소년들에게 정확한 종교교육과 인성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중 경기도 평택 팽성 중학교를 인수하여 학교법인 청담학원을 설립했다”고 밝혔다. 청담중학은 1970년, 고교는 1975년 각각 설립했다. 현재 명예이사장인 스님은 이 학원 설립자인 것이다. 이처럼 스님은 복지와 더불어 교육자로 큰 발자취를 남겼다.
스님의 교육경력에서 또 하나 빠트릴 수 없는 것이 중앙승가대학이 오늘날 4년제 정규대학으로 발전하는데 초석을 다진 공로다. 10.27법난이 잘못됐음을 정부로부터 공식 사과를 받고 명예를 회복한 혜성스님은 1988년 중앙승가대 학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스님은 새 건물을 짓고 교사를 확충, 학업 분위기를 쇄신하는 한편 4년제 정규대학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 우선 무인가였던 학교를 4년제 각종학교로 인가받았으며 현재 캠퍼스가 있는 김포 풍무동에 새 부지를 마련하는 공을 세웠다. 무엇보다 불교계 유일의 보육교사 교육원을 개원, 불자 보육교사를 양성토록 한 것은 가장 큰 치적으로 꼽힌다. 어린이 보육의 중요성이 날로 높아져가는 현재 중앙승가대 보육교육원을 졸업한 교사들은 어린이 포교의 소중한 자산으로 남아있다. 스님에 대해 한 제자는 “ 평소 시주물을 아껴야 한다는 은사이신 청담 노스님의 뜻을 이어 스승님께서도 평생을 고무신을 신고 다니셨다”며 “근검 절약하며 모은 돈으로 학교를 세우고 복지관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스님은 “받는 불교가 아닌 주는 불교를 만들고 싶었다”며 “딱한 사람들이 많은데 불교계가 앞으로도 많이 도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지금은 1970~1980년대에 비하면 비약적으로 성장해 흐뭇하다”며 “하지만 승려로서 위신을 갖고 사회사업도 해야지 결코 수행자의 본분사를 잊으면 안된다”고 경책했다.
힘들게 말을 이어가던 스님은 기자의 수첩과 펜을 가져가더니 글을 두점 썼다. ‘미인구설(迷人口說), 지자심행(智者心行)’.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만 말하고 지혜있는 사람은 마음으로 행하느니라’는 이 말은 〈육조단경〉 ‘반야품’의 한 구절로 스님이 후학들에 당부하는 뜻이 담겨있다.
‘일인장욕(一忍長樂) 인자위덕(忍者爲德), 한번 참으면 오랫동안 즐겁고 참는 사람이 덕을 만든다’는 후자의 글은 신도들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스님은 “참는 사람이 승리하고 참는 사람이 행복하다”며 힘주어 참을 인(忍)을 써주셨다.
몸이 불편한데도 스님은 한 시간 넘게 인터뷰에 응했다. 역으로 향하는 길가에 핀 벚꽃이 하나 둘 지고 있었다. 시흥시와 금천구 시흥동을 늘 혼동케하는 어지럽고 비대한 서울의 봄이다.
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사진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혜성스님은
57년 청담스님 은사로 출가
‘불교 세계화’에 일찍 눈떠
스리랑카와 수교에도 기여
1937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혜성스님은 1957년 청담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혜성스님의 속가 부친인 우현선생은 청담스님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치던 독립지사며 모친인 수월화 보살은 스님의 출가를 후원하고 청담학원 설립에도 공헌한 독실한 신자였다.
선친과 은사의 인연에 따라 불연을 맺게 된 혜성스님은 철저히 은사스님의 뒤를 따르며 이를 뒷받침하는데 평생을 보냈다. 젊을 적에는 청담스님 성철스님 등을 모시고 도선사 선원에서 화두 정진했으며 도제 양성 원력에 따라 동국대 불교학과에 들어가 경학을 연마하기도 했다. 청담스님이 청정 비구승단을 세우고 이를 이끌때는 재무 소임을 맡아 실타래처럼 얽힌 돈 문제를 풀어냈다.
35세에는 은사스님의 뜻에 따라 세계평화 촉진 종교지도자 대회에 참가해 불교의 세계화에 일찍부터 눈을 떴다. 40세에 도선사 주지를 맡아 청담스님 사리탑을 준공하고 사회복지 혜명보육원을 인수, 불교복지사업을 펼쳤으며 북한과 외교동맹을 경쟁할 때 세계불교도대회 한국대표로 참가, 스리랑카와 수교하는데 기여했다.
이후 중앙승가대 학장, 불교방송.불교텔레비전 이사 중앙종회의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도선사 회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