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C에서 II (2013-2014)
주유소를 정리하고 약 이 년을 쉬니 몸이 근질거렸다.
2013년인가 프로즌요구르트가 유행을 했는데 Red Mango, Pinkberry 등 잘 되는 프랜차이즈가 여기저기 생길 때였다.
계산을 해보니 약 25만불을 투자해서 한 달에 만 불 정도를 남기고 매상을 올리면 수 년 후에 40만불 정도에 팔 수 있을듯 보였다. 인수를 하자마자 레지스터에서 지난 달 매상을 뽑아보니 들었던 것과 상당한 차이가 났다. 당장 설명을 요구하고 가게 매매를 취소해달라고했다.
P는 아칸소에 있는 가게가 곧 팔리는데 그 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렇게 차일피일일 년이 지났다. 겨울이 되면 나는 새벽에 아내를 데리고 삼십 분을 운전해서 나가 기계들을 분해청소하고 매장을 걸레질 한다. 아내는 각종 과일 등을 깎고 잘라 진열을 한다. 그러고나면 그냥 하루종일을 손님을 기다린다.
그 당시에 인연을 맺은 것이 역이민카페이다.
부엌의 한 구석에 놓인 컴퓨터 화면에 이민자들의 애환, 모국여행기, 은퇴생활 등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이 펼쳐졌다. 특히 듀크님과 아톰님의 제주생활 이야기는 함께 둘례길을 걸으며 우의를 나누는 모습이 참 낭만적이게 상상이 되었다
결국 가게를 정리하기로 했다.
쓰던 요구르트 기계를 설치했던 곳에 연락을 하니 만오천 불씩 산 기계를 약 오천 불씩을 쳐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 달만 기다리면 새로 생기는 가게에 넘기겠다고 했다. 한 달 후에 찾아가자 이번에는 삼천 불씩 쳐주고 또 한 달을 기다린다. 그러기를 거듭하자 결국 기계는 아주 헐값으로 떨어졌다. 사람의 인상이 너무 선해서내가 그를 믿은 것이 실수였다.
나는 eBay 를 이용해서 캘리포니아에 있는 사람에게 결국 대당 이천 불 정도에 팔았다.
다행히 리스는 아직 원주인 명의여서 별 문제가 없었다.
내가 배운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자신을 과신하지 말것, 둘째는 장사는 가능하면 피할것, 셋째는 착한 인상에 판단을 그르치지 말 것 등이었다.
그 때부터 나는 또 하나의 탈출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나가 살아보면 어떨까. 어머니의 기억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는데 혹시 요양보험을 받으실 수 있지 않을까. 한국에나가면 할 일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요구르트샵을 닫고 나서 나는 본격적으로 이사와 모국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낳고 키우고 사람들과 정을 쌓고 살던 것이 교회의 분란으로 많은 부분이 깨졌다. 원래 그도시에 일찍 정착한 사람들은 충청도 출신들이 많았고 대부분이 겸손하고 점잖은 편이었다.
교회가 분열되는 이유는 교인들간의 세력 다툼이었는데 표면적인 것은 목회자의 자질과동성애자들에 대한 정죄 여부 등이 있었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새로운 멤버가 유입이 되지않고 그 소속해 있는 단체가 끊임없이 스스로를 비판하고 변하지 않으면 그 모임은 깨어지기 쉽다는 것이다.
집을 수리하고 우리는 드디어 한국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나갔다.
어머니가 거주하던 아파트가 수지에 있었고 언니가 가까운 수원에 살고 있었다. 한국에서 지낸 일곱달 반은 정말재미있고 맛있었다. 단지 여름날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걷다 보면 온 몸이 끈적거렸다. 그봄에는 메르스가 유행을 했는데 제주에 생전 처음 가보니 온 섬이 텅 빈 느낌이었다.
듀크님이 자신의 차로 우리를 안내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비자림과 일츨봉이었다. 한국에서 주로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해 이동했는데 사람들은 허름한 나를 아에 쳐다보지도않았다. 아 이 사람들은 내가 알던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다.
동창녀석 하나는 술만 들어가면 짐승이 된다.
무슨 연유인지 자신만 아는 친구들을 함께 만난 자리에서 나를 자꾸 하대하며 욕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지말라고 몇 번을 경고했는데그칠줄을 몰랐다. 녀석은 키가 187정도의 거구였는데 내가 녀석의 머리를 한 대 때렸다. 밖으로 나와 헤어지기 직전 내가 미안하다고 하며 나를 한 대 치라고 얼굴을 내밀었다. 갑자기 정신을 잃을 정도의 가격이 들어왔다. 그 순간 나는 이성을 잃고 녀석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고 허리를 구부리는 녀석을 발길질 하려다가 멈추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때 내 오른손 중지가 부러졌다.
그리고 그 친구와는 다시 만나지를 못했다. 아마 내 생전에 누구를 그렇게 때려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미국에 돌아오며 여름옷들을 모두 한국에 놓고 왔다. 아틀란타로 이사를 하고 집을 렌트주고 다시 한국으로 나올 생각이었다.
첫댓글 별별일이 다 있었군요 지나고 보면 그것도 추억이지요
네 돌아보면 그 어떤 과정도 다 배움이 있었고 나름의 의미가 있었음을 느낍니다.
기억나네요
처음 두분 뵈었을때 요구르트샵 하신다고 들었는데
저희는 평생 월급쟁이로 살아서 사업 하시는 분들은 저절로 알아서 잘되는줄만 알았어요 아마도 그쪽으로 관심이 없어서…
ㅠㅠ
한국가서 동창회를 나가면 꼭 말을 비비꽈서 신경을 거스리게 하는 친구가 있더라고요
은근히
미국거지가 한국에 혜택이나 받으러 온것 같은…질투와 비교를 하는것 같아요
저는 모임에 안나가는게 속편하더라고요
나라도 마을도 집들도 친구도 형제들도 내가 알고 있는 옛사람들도 아니고 너무 많이 변했어요
물론 나자신도 많이 변했고요
오랜만에 만나도 옛정을 기억하고 정말 좋은 시간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 친척들도 있었습니다. 여행자님 처음 뵈었을 때가 그 때쯤이었군요.
열심히 부부가 합심해
사신 흔적이 글에서
늘 느껴져요.!!!
다음이 애틀랜타로
이주이신것같아요^^
한국에서 지냈던 시간을 다시 써볼까 궁리 중입니다
요구르트 사업이 한참 잘 되던 시절이 있어
너도 나도 뛰어들었는데 데이비드님도 참여를 하셨네요.
그런데 그 호황기가 짧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창시절 어려운 시간을 보내셨네요.
요구르트 샵을 안하고 바로 아틀란타로 왔으면 훨씬 좋았겠다는 생각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