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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1일 오늘의 역사
2021년 북한 순항미사일 발사
2019년 바하루딘 유숩 하비비 인도네시아 제3대 대통령 사망
2017년 국회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임명동의안 부결 293명중 찬성145, 반대145
2014년 최초의 독립야구단 고양 원더스 전격해체
2012년 크리스토퍼 스티븐스 리비아 주재 미국대사 무장세력 공격으로 사망
2006년 41년 통치 통가 타우파아하우 투푸 4세 국왕 별세
지난 41년간 남태평양의 섬나라 통가왕국을 통치해온 타우파아하우 투푸 4세 국왕이 뉴질랜드 병원에서 88세로 별세했다고 현지 언론들이 9월11일 보도했다. 세계 최장수 국왕 가운데 한 사람인 투푸 국왕은 최근 수개월간 알려지지 않은 병으로 뉴질랜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호주 시드니 대학에서 인문학과 법학사 학위를 딴 그는 통가인 최초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라는 기록도 갖고 있었다. 그런 배경에서 투푸 국왕은 교육문제에 누구보다 많은 관심을 가졌다. 지난 1845년 폴리네시아 군도의 170여개 섬이 통합해 이룩된 통가왕국은 그동안 준봉건적으로 나라를 통치해온 투푸 국왕이 타계함에 따라 민주화가 추진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2005년 법장 조계종 총무원장 입적
2005년 일본 9·11 총선에서 자민당 과반 압승
전후 60주년이 되는 해에 치러진 9·11 총선에서 일본 유권자들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자민당이 단독으로 과반의석 이상을 확보, 압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11일 실시된 총선 최종 집계 결과 자민당은 종전보다 84석 늘어난 296석을 얻어 압승을 거두었다. 연립 여당인 공명당(31석)과 합칠 경우 327석에 달해 개헌 발의선인 3분의2 의석(320석)을 넘어섰다. 반면 민주당은 113석에 그쳐 종전보다 64석이 줄었다.
이날 총선에서는 투표율이 지난 2003년 총선의 투표율을 앞질렀을 뿐만 아니라 20~30대 젊은층의 참여가 활발했다. 외신들은 이날 전국 5만3000여 투표장에서 실시된 투표에서는 20~30대 젊은층이 적극적으로 참가하면서 투표율이 65%대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2004년 김기덕 감독, ‘빈 집’으로 베를린 이어 베니스 감독상 수상
충무로의 이단아’ 김기덕 감독의 영화 ‘빈 집’이 2004년 9월 11일 막을 내린 제61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며 빈 집에 갇혀 있는 여자(이승연)와, 빈 집만 골라 돌아다니며 살다가 그 여자의 마음을 채워주게 되는 남자(재희)의 이야기를 담았다.
같은 해 2월 베를린영화제에서 ‘사마리아’로 감독상을 수상한 바 있는 김기덕 감독은 한 해에 세계 3대 영화제 중 두 곳에서 서로 다른 영화로 감독상을 차지하는 유례 없는 성과를 거뒀다. 같은 해 5월 박찬욱 감독이 ‘올드보이’로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데 이어 김 감독이 거푸 감독상을 수상함으로써 한국은 같은 해에 열린 세계 3대 영화제의 주요 부문 수상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김 감독은 1996년 ‘악어’로 데뷔한 뒤 파격적인 영화 스타일과 초저예산·단기간 영화 제작 방식 등으로 ‘충무로의 이단아’라는 이름을 얻었다. 충무로의 스타시스템과 상업적 제작 형태를 비판해온 김 감독은 이번 수상작인 ‘빈 집’도 10억원의 제작비를 투입, 단 13일 만에 찍었다.
초등학교 졸업장이 공교육(公敎育) 이력의 전부인 그는 데뷔 후 8년 동안 모두 11편의 영화를 만들어 11편 모두 해외 영화제에 초청받는 진기록을 세웠고, 이번 수상까지 모두 5편이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베니스영화제(‘섬’ ‘수취인불명’ 등)와 베를린영화제(‘나쁜 남자’)에는 단골 진출해왔다. ‘섬’ ‘수취인불명’ ‘나쁜 남자’ 등 그의 작품은 선명한 회화적 이미지와 독특한 전개로 국내외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여성 비하와 잔혹 취미 등으로 격렬한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2001년 한승수 외교통상부장관 유엔총회 의장에 뽑힘
2001년 미국, 9·11테러 발생
2001년 9월 11일 오전,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과 워싱턴의 국방부 청사(펜타곤)가 항공기와 폭탄을 동원한 동시다발적인 테러공격으로 무역센터 건물 2동이 붕괴되고 펜타곤이 화염에 휩싸이는 등 대참사가 발생, 미 전역을 공황상태에 빠뜨렸다.
테러범들이 납치한 여객기로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의 남쪽 동에 처음 충돌한 것은 오전 8시45분이었다.
이어 9시3분 경에는 피랍된 또 다른 여객기가 북쪽 동을 들이받아, 두 빌딩에서는 대형화재가 발생했다.
두 건물은 충돌 후 1시간30분이 지나, 강력한 폭발과 함께 붕괴됐다.
9시43분 경에는 미국 안보의 심장부인 펜타곤에도 납치 여객기가 충돌, 건물 일부가 붕괴되고 화염에 휩싸였다.
곧이어 여객기 한 대가 테러범들에게 납치돼 피츠버그 상공에서 추락하자 미국인들의 테러공포는 극에 달했다.
사망자와 실종자는 2002년 8월 현재 2,819명으로 집계됐다.
이중 신원이 확인된 숫자는 전체의 절반도 안 되는 1379명.
나머지는 시신을 찾지 못해 대부분 유족들이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제적 피해상황도 엄청나 뉴욕시는 테러로 인해 市경제가 2년에 걸쳐 약 1,000억달러의 직․간접 피해를 입었다.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을 범인으로 지목, 그를 보호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에 빈 라덴의 인도를 요청했으나 탈레반 정권의 모하메드 오마르가 빈 라덴의 구체적인 증거를 적시(摘示)하라며 인도를 거부하자 미국은 마침내 테러발생 26일 만인 10월 7일, 대대적인 공습을 시작했다.
2000년 북한 김용순 노동당 비서 서울 방문(~9.14)
1998년 신문삽화 선구자 이우경 화백 별세
신문소설 삽화로 유명한 화가 이우경(76) 화백이 1998년 9월 11일 자택에서 별세했다. 이 화백은 우리나라 신문삽화에 깊은 족적을 남긴 1세대 작가다.
서울 종로구 홍지동에서 태어난 이 화백은 원래 순수 회화를 공부했다. 어렵다는 선전(鮮展)에도 1941년부터 3회나 입상했다. 그는 생전에 “전쟁통에 순수 회화만으론 밥벌이가 힘들어 신문삽화에 손을 댔다”고 말하곤 했다. 세상사를 정감있고 운치있는 해학으로 풀어낸 그의 그림들은 소설가들에게 큰 인기를 모았다. 손창섭, 유호, 홍성유, 이호철씨 등 그의 그림으로 글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 작가는 수없이 많다.
이 화백은 어린이책 일러스트에서도 손꼽히는 작가였다. 1955년 우연히 어린이책과 인연을 맺어 위인전과 전래동화들을 주로 그렸다. 담백하고 익살스런 인물과 동·식물 그림은 우리 고유의 웃음과 해학에 바탕 한 것이었다. 칠순을 넘은 나이에도 직접 작품을 골라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이우경 전래동화’ 4권을 펴내 1997년 한국어린이도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8년 경기도 부천에서 LP가스충전소 연쇄 폭발사고
1998년 9월11일 2시14분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내동 LP가스충전소에서 탱크로리가 폭발하였다. 불길은 연쇄폭발로 1시간여 동안 계속됐으며, 불기둥은 1백여m까지 솟아올랐다. 소방대원 19명과 시민 등 44명이 중화상을 입고 주변 건물 6채와 차량 50여대가 불에 탔다.
또 사고 직전 충전소 지하저장고에 가스를 주입하던 탱크로리 2대는 30여m 떨어진 8차선 도로 건너편 근린공원과 10여m 떨어진 충전소 옆 3층짜리 세차장 건물 앞까지 날아가 있었다. 불은 인근 세차장과 냉동창고 등 6개동을 포함해 충전소 주변 2천여평 일대를 모두 태웠다.
1996년 국경없는 의사회, 제3회 서울평화상 수상
국제의료단체 `국경없는 의사회`가 제3회 서울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국경없는 의사회`는 지난 1968년 국제적십자사 요청으로 나이지리아 내전에 파견됐던 프랑스 의사들이 그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고 귀국한 후 조직적인 구호활동의 필요성을 호소하면서 태동하기 시작, 1971년 12월에 설립된 세계최대 규모의 민간 구호단체다.
중립 공평 자원의 3대원칙에 따라 정치, 종교, 경제적 권력으로부터 구속받지 않은 채 전쟁, 자연재해, 질병, 기아 등으로부터 고통받는 지구촌 가족에게 차별없는 구호를 실시, 국제사회서 적십자사와 더불어 인도주의의 대명사로 통하고 있다. 파리에 본부를 두고, 전세계 13개국에 대표 사무국을 운영하고 있으며 아시아지역에는 일본과 홍콩에 사무국이 설치돼 있다.
세계 45개국에서 모인 2천9백여명의 자원 봉사자들로 구성돼 있으며 전세계 2백60만명에 달하는 독지가들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독자적인 재정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1995년 10월부터 12월까지 비정부체제로서는 유일하게 북한 수해현장에 직접 투입돼 전염병 예방활동을 벌이고 의약품과 의료장비를 지원하기도 했으며 현대사를 피로 물들인 걸프전, 보스니아내전, 르완다내전 등에 빠짐없이 구호의 손길을 뻗쳤다.
1996년 한국-브라질 첫 정상회담. 상호투자 확대 관광-복수 사증 협정 체결
1994년 인천 북구청 세금횡령사건
1992년 인도북부 캐슈미르 주에 폭우 600여명 사망, 이재민 수만 명
1991년 이스라엘 아랍 인질 51명 석방
1990년 김일성 북한 주석, 중국 방문(~9.13)
1989년 노태우 대통령,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 발표
1986년 호남고속도로 4차선 개통
1982년 공주사대, 공산성서 길이21m, 너비15m, 깊이2.7m 크기의 백제시대 연못발굴
1980년 경주 안압지와 임해전 복원공사 준공
1980년 새마을지도자중앙협의회 창립
1978년 한국, 기능올림픽서 2연패
1975년 고창 침투공비 사살사건
전경대 해안초소 경계병이 순찰중 괴한 2명으로부터 사격을 받고 교전, 1명 사살, 1명 도주 피해(전사 3명, 부상 2명)
1973년 아옌데 칠레 대통령 피살
아옌데 칠레 대통령이 군부 쿠데타에 의해 1973년 9월 11일 피살되고 쿠데타를 주도한 피노체트가 집권했다. 좌파인 아옌데를 축출하기 위해 피노체트 배후에 미 CIA가 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2000년 9월에 공개된 문서에 의해 밝혀지기도 했다.
1908년 칠레의 발파라이소에서 출생한 아옌데 대통령은 칠레대학 의학부 재학시절부터 사회-정치운동에 참여해 1933년 칠레사회당 창당에 관여했고, 1942년에는 서기장이 됐다. 1937~45년 하원의원, 1939~42년 후생장관, 1945~70년 상원의원을 역임한 그는 1970년 대통령선거에서 좌익통일연합 후보로 입후보, 당선됐다.
선거를 통해 대통령직에 오른 최초의 공산주의자인 그는 11월에 정식취임해 은행-광산 등 주요기업을 국유화하는 좌익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합법적인 방법으로 사회주의 제도를 정착시켜 나간다는 아옌데 노선은 좌우에서 협공을 받아 곧 난관에 봉착했다. 그런 와중에 칠레의 육-해-공 3군사령관은 정국혼란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라는 최후통첩을 아옌데 대통령에게 보냈고 아옌데가 퇴진을 거부하자 이날 칠레군부는 전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정권접수를 발표했다.
아옌데는 대통령궁을 포위한 군부대의 공격에 저항하다 피살됐다. 세계의 사회주의 운동에 새로운 길을 열 것으로 좌익지식인들 사이에 기대를 모았던 사회주의도 그의 죽음과 함께 종말을 고했다.
1971년 흐루시초프 전 소련 수상 사망
1953-1964년 소련 국가원수·공산당 서기장 1958년부터 총리·국가평의회 의장, 스탈린주의 비판, 미국 등 서방국가와 평화공존 모색, 집단지도체제 무시한 정책결정 농업정책실패 쿠바 위기에서 미국에게 밀린 것 등으로 1964.10.13 실각
1970년 한국-통가 국교 수립
1967년 인도-중국 국경충돌
1965년 전국뇌염발생 누계 550명. 사망 158명
1964년 월남파송의 제1이동외과병원(130명)과 태권도교관단(10명) 부산 출발(22일 사이공 도착)
1964년 국회, 4년 만에 국정감사 실시
1962년 한국-코스타리카, 국교 수립
1953년 유엔군사령관에 헐 대장 임명
1951년 미국의 프로렌스 차드윅 여성최초로 영국해협 도영(渡泳)
1948년 한미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고협정 조인
1945년 미군정 장관에 아놀드소장 취임
1945년 일본군 무장해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27일이 지난 1945년 오늘 !
닷새전(9월 7일) 우리나라에 진주한 뒤 남한에 군정을 선포한 미군 !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 제24군단 소속 미군들은 가장 먼저 일본군의 무장해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미군의 감독아래 이루어진 일본군의 철수 !
미군은 철수하는 일본군을 검색해 밀반출되는 무기들을 모두 압수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체결된 제물포조약에 의해 우리나라에 처음 주둔하기 시작한 일본군 !
한반도 주둔 63년만에 일본군은 본국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1945년 경의선 운행 남북분단으로 중단
1945년 미국-영국-프랑스-중국-소련 5개국 외상 런던회의 개막
1944년 2차 대전 중 연합군 베를린에 입성
1942년 아일랜드, 반(反)미-반(反)영 소요. 미군철수 요구
1937년 미국 최초의 우주왕복선을 조종한 크리픈 출생
1932년 이탈리아-소련 불가침조약 조인
1931년 정미시장 규칙 공포(1932.1.1-시행)
1919년 상해임시정부 헌법 제정,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1917년 필리핀 대통령 마르코스 출생
1915년 전신전화소 설치
1905년 최초의 부·관(釜·關)연락선 ‘일기환(壹岐丸)’ 취항
1905년 9월 11일, 현해탄에 연한 일본 본토의 남부 도시 시모노세키(下關),는 축제분위기였다. ‘나는 새도 건너기 힘들다’는 현해탄, 1680t급 일본 최초의 대형 연락선 ‘일기환(壹岐丸)’이 첫 취항하는 날이었다.
여객 정원 317명, 항해시간 11시간 30분. 일본의 산요선과 한국의 경부선 철도를 잇는 부관연락선 개통으로 동경-서울간을 60시간에 주파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1등 선실(운임 12원)이 있는 맨 위층에는 담화실, 레스토랑 등이 있어 일류호텔을 방불케했다. 2등실은 그 밑층의 다다미 깔린 큰방이었다. 그러나 3등실(3원50전)은 맨 아래층, 돗자리 깔린 선반이 층층이 달려있는 형태여서 ‘누에 치는 곳’이라고 할 정도로 열악한 조건이었다.
관부연락선 취항은 그 직전에 있었던 경부선 개통에 따른 당연한 결과였다. 제국주의는 항상 식민통치의 전제조건으로써 이민과 자원 약탈, 노동력 공출을 원활히 하기 위한 교통망을 필요로 해왔다. 현해탄에 떠있는 섬(이키마루·壹岐) 이름을 빌었던 첫 호를 제외하고, 관부연락선 이름들은 경복환, 창경환, 금강환, 덕수환, 흥안환, 곤륜환 등 모두 한국이나 중국의 고궁-명산에서 차명, 일본인들에게 이국에의 선망을 부채질했다.
1903년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 출생
1899년 한국-청국 통상조약 체결
1895년 (조선 고종 32) 정부, 한성사범학교 및 부속소학교 규칙 공포
1891(조선 고종 28) 독립운동가 김도태 태어남,
1885년 영국 작가 D.H. 로렌스 출생
1885년 (조선 고종 22) 아펜젤러 정동에 배재학당 설립(개교기념일)
1862년 미국 소설가 오 헨리(본명 윌리엄 시드니 포터) 출생
1841 존 타일러 미국대통령의 은행법에 대한 거부권에 대항해 국 무장관을 제외한 모든 각료 사임
1777년 조지 워싱턴장군이 지휘하는 미국독립군, 영국군에 패배
1689년 서포 김만중 남해로 유배
1636년 12월 병자호란으로 강화도가 함락되기 직전 한 부인이 다섯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섬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복중(腹中)에 아이를 또 품은 몸이었다.
부인은 곧 남편이 청나라 군대와 맞서 싸우다 강화도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는 소식을 듣는다.
전란이 수습된 후 부인이 친정에서 아이를 낳으니 그가 서포(西浦) 김만중(1637∼1692)이다.
그는 한글을 사랑한 조선의 선비였다.
우리 문학의 전형을 한문 문학이 아닌 국문 시가(詩歌)에서 찾는,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문학관을 가졌다.
“자기 말로 마디와 가락을 갖추어야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까지 감동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대제학(정2품)과 대사헌(종2품) 등을 지낸 고위 관료였지만 나무를 하는 아이들이나 우물가의 여인들이 주고받는 상스러운 말에서 진심과 감동을 읽을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평가했다.
특히 한자어가 적은 ‘속미인곡’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고대 국문소설의 백미로 꼽히는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집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 윤 씨에게서 아버지 김익겸의 죽음을 들으며 애국자로 자랄 것을 당부 받았다.
또 당시 조선사회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갔다
돌아온 부녀자들의 순절 문제로 시끄러웠는데, 청나라의 침탈로 인한 이런 사회 문제는 그의 애국심과 국어 사랑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가난했지만 관청의 서고에서 책을 베껴 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어머니의 뒷바라지 덕분에 그는 29세의 나이에 정시 문과에 급제한다.
그러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성품 때문에 한 번의 삭탈관직과 두 번의 귀양살이를 겪게 된다.
희빈 장 씨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려는 남인(南人)들과의 정쟁에 휩쓸려 결국 1689년 남해의 노도(櫓島)로 떠난 귀양살이가 결국 ‘마지막’이 된다.
하지만 그는 가시 울타리 속에서 생활해야 하는 위리안치(圍籬安置)의 혹독한 귀양살이를 국문학사에 빛나는 한글 소설을 쓰는 시간으로 승화시켰다.
한글을 사랑한 그가 자신의 문집 서포만필(西浦漫筆)에 남긴 글은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고유한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말로 글을 지으니, 설령 뜻과 느낌이 비슷하다 해도 그것은 앵무새가 사람 말을 흉내 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1524년 프랑스 시인 피에르 드 롱사르 출생
668년 고구려 멸망
연개소문이 죽은 뒤 그의 세 아들이 서로 다투는 중에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와 고구려는 28대 668년만에 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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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