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 남쪽 자락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아차산성이 장대한 세월을 머금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아차산생태공원에서 소나무숲을 지나 10여 분 정도 오르면 그 모습을 드러내며, 덥수룩
하게 자라난 수풀에 거의 묻혀있던 것을 2013년 이후 성곽을 둘러싼 나무와 수풀을 꾸준히 밀
어내면서 북쪽과 남쪽 성벽도 무리 없이 확인할 수 있다.
허나 아무리 꾸준히 이발을 하고 숯을 쳐내도 대자연의 의해 금세 수풀이 자라 성곽을 가리려
드니
역시나 인간의 피조물은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돌이나 모래알에 불과하다.
아차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나 백제 9대 제왕인 책계왕(責稽王)이 위
례성(慰禮城)과 함께 수축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백제 초기(1~2세기 경)에 국도(國都)
인 위례성 주변 수비와 고구려의 남진을 막고자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상당히 늙은
성이다.
처음에는 아단성(阿旦城)이라 불렸는데, 5세기
이후부터 단(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변
해 아차산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 한문은 비슷한 모양으로 인해 금석문(金石文)과 판각인쇄
에서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았으며, 음은 같지만 한자만
달리 하여 '峨嵯山城'이라 쓰는 경우
도 많았으나 문화재청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한자(阿且山城)를 정식 명칭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아차산의 공식 한자 표기인 '峨嵯山'과 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아차산성 외에 장
한성(長漢城), 광장성(廣壯城)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4세기 후반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재위 392~413)이 한강 이북을 말끔히 장악하면서
이곳은 백제의 심장을 겨낭한 고구려의 화살과 같은 기지가 되었다. 위례성으로
여겨지는 서
울 강동/송파
지역이 훤히 바라보이는 잇점을 지닌 아차산을 흔쾌히 활용한 것이다.
그렇게 위례성(한성)을 새가 땅을 바라보듯 감시하며 기회를 엿보던 중 개로왕(蓋鹵王)이 무
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국력을 소모하고 고구려의 최대 라이벌이자 동시에 백제의 라이벌이기
도 했던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같이
고구려를 치자고 요구했다.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은 그 사건을 구실로 3만의 군사를 휘몰아 한성<漢城, 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을 한성이
라 부름>을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화공(火攻)을 이용해 성문과 도성을 불태웠으며, 개로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을
치던 중, 자신의 장수였던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을 만났다. 이들은 개로
왕의 미움을 받아 고구려에 투항했는데, 왕을 잡고자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그들의 투항 사실을 알리 없던 개로왕은 크게 안심을 했으나 그들은 왕에게 절을 하더니 바로
그의 얼굴을 향해 침을 3번 뱉고 온갖 육두문자를 요란하게 내뱉은 다음 포박하여 고구려에게
넘겼다.
그렇게
고구려의 포로가 된 개로왕은 아차산성으로 끌려와 비참하게 살해되었고, 왜열도와 중
원대륙(서토)의 무수한 영토를 거느리며 천하의 바다를 장악했던 백제의 도읍
위례성(한성)은
철저히 파괴되어 이 땅에서 영구히 지워지고 말았다. 바로 장수태왕의 그 만행 때문에 후손들
이 위례성을 찾느라 오랜 세월 진땀을 뺀 것이다. |
한강 유역을 장악한 고구려는 아차산성을 보조하고 한강과 중랑천, 서울 동부 지역, 구리 지
역을 효과적으로 수비하고자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 조그만 보루(堡壘)를 주렁주렁 달아
놓았다.
이곳에 설치된 보루는 발견되지 않은 것까지 고려하여 최대 30개 정도로 여겨지며,
이들 보루는 북쪽으로 봉화산(烽火山)과 수락산(水落山), 사패산(賜牌山),
불곡산,
양주, 연
천 지역까지 이어지는데, 주목할 점은 오직 서울과 경기 북부에서만 발견되는
고구려의 독특
한 요새라는
점이다. 그만큼 이 지역의 중요성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 시절 온달(溫達)이 이곳에서 쳐들어온 신라군과 싸우다
가 전사했다고 전하며, 이후 신라가 접수해 고구려를 막는 요충지로 삼았다. 한때는 북한산성
(北漢山城)이라 불리기도 했고, 7세기 중반까지 고구려가 종종 건드렸으나 결국 점령하지 못
했다.
허나
8세기 이후 아차산의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서서히 버려지기 시작했고, 세월과 자연에
의
해 그
견고하던 산성이 헝클어지면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
산성의 둘레는 약 1,038m(길게 잡으면 1,125m)로 산허리에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테뫼식성이
다.
아차산 남쪽 자락에서 워커힐 뒤쪽까지 이어져 있는데, 동문터와 남문터, 서문터, 수구(
水口)터,
곡성(曲城)터, 장대(將臺)터, 건물터, 온달장군이 마셨다고 전하는 우물 등이 남아
있다.
장대(장대터)는 전시에는 장수들 지휘소로, 평상시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쓰였다고 하
며, 커다란 왕개벚꽃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덩치로 봐서 100~2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진
다.
성벽 높이는 평균 10m, 성 내부 면적은 약 103,375㎡이며, 광나루까지 성을 쌓은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워커힐이 들어서면서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1997년과 1999년 광진구에서 부분 발굴조사를 벌여 고구려와 백제, 신라 토기와 기와파편, 흙
으로 만든 인물상, 철로 만든 솥과 쟁기날 등을 건졌고, 신라의 북한산성이 대략 이곳임이 밝
혀졌다.
그래도 아직 건드리지 못한 숨겨진 부분이 많아 애태우던 중, 2015년 광진구가 문화재청의 예
산을 지원받아 한국고고환경연구소와 함께 아차산성 남벽과 배수구 일대 4,575㎡를
대상으로
발굴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여러 흥미로운 존재들이 햇살을 보았는데, 고구려의 연꽃무늬 기와장식인 '연화문와
당'이 나왔고 (인근 홍련봉 1보루에서 발견된 와당과 비슷한 형태임) 남벽
90m 외벽에서는 신
라 건축의 특징인 외벽 보축(補築) 시설과 물을 내보내는 출수구 3곳, 내벽에서는 입수구 2곳
이 나왔다. 또한 망대터에서는 내외성벽을 비롯한 치성(雉城)과 방대형 시설이 나왔으며, 신
라의 연화문와당 10여 점과 '북한산성'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신라의
북한산성이 이
곳임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었다.
허나 아차산성의 적지 않은 부분이 워커힐 관련 사유지로 묶여 있어 아직까지도 조사하지 못
한
부분이 많다. 산성은 물론 그 주변까지 속시원히 뒤집으면 보다 많은 유물과 숨겨진 이야
기가
쏟아져 나올 것인데 그 점이 몹시 아쉽다.
1999년 이후 헝클어진 산성을 복원 정비하였고, 그들의 건강과 사유지 보호를 위해 산성 주변
에 철책을 둘러놓아 출입을 막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 널린 산성(山城) 유적 중 유일하게
접
근이 통제된 까칠한 성곽이 되었는데<휴전선과 민통선 지역의 성곽 유적은 제외> 2014년 이후
부터 서울시와 광진구, 워커힐이 협의하여 산성을 개방한다는 떡밥이 꾸준히 나오고는 있으나
아직까지도 빗장은 열리지 못했다.
서벽과 북벽 일부, 남벽 일부는 산길에서 휴전선 너머를 바라보듯 만날 수 있으나 그 외는 어
림도 없으며, 워커힐 쪽에서 산성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으나 통제되어 있어 대놓고 들어가
기는 그렇다. 하여 아차산성 내부를 정당하게 둘러보고 싶다면 광진구청에서 운영하는 아차산
역사문화해설(역사문화투어)을 이용해보는 것도 괜찮다.
(문의 광진구청 문화체육과 ☎ 02-450-7593)
내가 아차산을 무수히 오갔으나 아직까지 아차산성의 속살은 들어가지 못했다. 아차산성 내부
가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롭게 둘러볼 때를 기다리고 있으나 그 해방이 참으로 힘들다. 마치
이
땅의 민주화가 힘들게 자리를 잡은 것처럼 말이다.
* 아차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5-11 |
아차산성 서벽을 지나면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직진하면 낙타고개와 아차산 주능선으로 이
어지며, 동쪽은 아차산성 북벽 앞과 우미내계곡, 고구려 대장간마을로 이어진다.
여기서 아차산 동쪽 구역(구리시 아천동)으로 넘어가 우미내계곡과 아차산 큰바위얼굴, 석실
고분(石室古墳), 아차산3층석탑, 범굴사(대성암), 아차산2보루터를 둘러보고 아차산6보루터를
거쳐 서울과 구리의 경계선인 아차산 주능선으로 들어섰다. (아차산 구리 구역은 별도의 글에
서 다루도록 하겠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