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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천주교 111개 성지 순례
서 곡성 군청을 지나 왼쪽 골목길로 들어서면 바로 곡성 성당이
위치한다.
[승용차②] 호남고속국도→곡성IC 나와서 우회전→곡성 군청 표지 확인 후
좌회전→곡성군청 후문 주차장 맞은편 옥터 성지.
▶ 수려한 섬진강과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곡성 성당은 1827년 발생한 정해박해의 진원지이자 교우들이 붙잡혀 와 갇힌 옥터가 있는 곳이다.
1815년경 을해박해를 피해 남으로 숨어들어 온 신자들이 곡성 지방 덕실 마을(승법리)과 미륵골에 정착하면서 이들은 생계유지와 신앙생활을 위해 가마를 열고 옹기를 구워 팔며 생활하게 된다.
1827년 2월 어느 날 가마를 여는 축하연 자리에서 사소한 시비가 발단이 되어 관가에 천주교 신자를 고발하는 사건이 발생, 신자들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고 고문하는 탄압의 손길이 전국으로 확산되니 이 사건이 바로 정해박해의 시발점이 된다.
정해박해는 여느 박해와 달리 그 기간은 짧았지만 탄압의 정도는 매우 심해서 전라도 지역에서는 교우들이 집단 생활을 전폐하고 심산유곡으로 피신해 생명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다.(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 막달레나, 이성지, 이성삼, 이경언 등은 끝까지 신앙을 지켜 옥사 또는 순교하였다.)
광주대교구는 순교의 현장인 이곳에 성당을 설립키로 결정하고 곡성 성당을 세웠다. 곡성 성당에서는 정해박해 때 순교한 선조 신앙인들의 영성을 본받고 이를 널리 알리고자 정해박해 진원지인 이곳 덕실 마을과 옥터를 성역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굿 뉴우스 홈페이지에서]
춘향이 그네 뛰던 남원에서 17번 국도를 따라 20km 남짓한 거리, 파란의 역사를 간직하고 수려한 자태를 보이는 지리산 국립공원 산자락 아래 자리한 곡성은 1827년 정해박해의 발상지이자 교우들이 붙잡혀 와 갇힌 옥 터가 있는 곳이다.
곡성 지방에 복음이 전래된 시기는 1815년경 을해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이 일대에 정착하면서부터이다.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 비교적 대규모의 박해는 없었으나 전국 각지에서 국부적으로 행해지던 박해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1827년 전라남도 곡성 덕실 마을의 한 옹기점에서 일어난 조그만 사건이 그만 교난으로 확대되니 이것이 정해박해이다. 곡성은 정해박해의 발상지로 그 시초는 일부 행실이 좋지 않은 신자들과의 사소한 다툼에서 시작됐지만 그 박해의 끝은 순교의 영광으로 물들었다.
옹기굴의 직공들은 대부분 천주교 신자였는데 순교자 한덕운 토마스(韓德運, 1752-1802년)의 아들인 한백겸은 성질이 아주 광포하고 주사가 심해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가마를 여는 축하연이 벌어지고 거나하게 취한 그는 주막집 주인 부인에게 행패를 부린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남편 전씨가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곡성 현감을 찾아가 그를 포함해 몇 명을 관가에 고발했다. 곡성 현감은 관내에 천주교 신자가 있다는 사실에 대경실색, 닥치는 대로 교우들을 잡아들였다.
곡성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더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었고 피신하는 신자들을 따라 탄압의 손길이 퍼져 나가 급기야는 순창, 용담, 임실, 장성, 전주 등 전라도 전역으로 확대됐다. 전라도의 모든 옥은 이때 잡힌 교우들로 초만원을 이루게 되는데 전주 감영에만도 240여 명이 넘었다고 전해진다.
정해박해는 여느 박해와 달리 그 기간은 짧았지만 탄압의 정도는 매우 심했다. 두 달간 맹렬하게 계속된 박해는 조정의 태도가 완화됨에 따라 누그러졌지만 얼마나 혹독하고 광범위했던지 전라도 지역에서는 교우들이 집단생활을 전폐하고 심산유곡으로 피신해 생명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정해박해 당시 전라 감사 이광문(李光文)이 추위·더위와 굶주림에 약한 인간의 나약성을 매우 교묘하게 이용해 붙잡힌 교우들의 많은 수를 배교하게 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때 약 5백여 명의 신자들이 잡혔는데 그들 대부분이 배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들이 있어 더욱 빛을 내고 있다. 장계 고을 이 바오로의 누이이며 이명의의 어머니인 이 막달레나는 박해 시초에 곡성에서 체포되어 온갖 고초에도 굴하지 않고 황해도 백천으로 귀양 가 4년여의 유배 생활 끝에 1830년 53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고산(高山)에서 포졸에게 온 가족 13명과 함께 잡힌 이성지 세례자 요한은 무려 9년 동안 옥에 갇혀 괴로움을 당하고 8개월을 병마에 신음하다가 1835년 세상을 떠났다. 또 그의 셋째 아우인 이성삼 요한 역시 그 해 3월에 체포돼 고초를 겪다가 반년이 채 못 돼 옥중에서 숨을 거둔다.
이들의 행적 중에 일부는 지금도 기록으로 전해 내려와 후손들에게 박해를 뚫고 믿음을 지킨 용맹한 신앙의 무용담을 들려준다. 1802년 한양에서 순교한 이경도 가롤로(李景陶, 1780-1802년)와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의 막내 동생인 이경언 바오로(李景彦, 1792-1827년)도 책과 상본을 전파하다가 붙잡혀 수 없는 배교의 유혹과 매질 속에서 순교하고 만다.
믿음의 자유를 얻은 후 광주 교구는 1957년 순교의 현장에 본당을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신자수가 10명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박해 당시 감옥 터였던 객사 자리에 대지를 마련하여 1958년 8월 15일 본당 설립에 이어 그해 10월 6일 성당을 준공하였다.
2001년 곡성 성당은 성지 조성을 계획을 발표하고 성역화 사업을 본격화하여 이듬해 7월 정해박해 순교성지 기념 ‘하늘못’ 축복식을 가졌다. 하늘못은 당시 신앙 선조들이 생계와 신앙 유지를 위해 옹기를 구우며 생활해왔던 삶을 상징하는 옹기 형태의 연못이다. 하늘못 옆에는 자연석 제대를 마련하여 순례객들이 야외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어 정해박해의 진원지이자 옥터 위에 세워진 본당 역사에 걸맞게 2006년 낡고 오래된 성당에 대한 개축공사를 실시했다. 성당 내부를 정해박해를 상징하는 옹기 가마터 모형의 돔형으로 예수님의 갈비뼈를 형상화했고, 쇠사슬에 묶인 예수님 성상을 제대 옆에 설치하여 박해로 순교한 신앙 선조들을 기념하고 있다. 또 정해박해와 관련된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하는 옥터 전시실도 개관했다.
2007년 정해박해 180주년을 재조명하는 학술제를 개최하고, 2008년 10월 12일 본당 설립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성당 마당에 옥사(獄舍)를 복원하고 야외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는 등 주변 공원화 사업을 펼쳤으며, 미산 가마터와 성당을 잇는 정해박해 기념성지를 조성하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14일)]
[한국의 성지 홈페이지에서 :
정해박해의 발상지이자 수많은 교우들이 붙잡혀 와 갇힌 옥터]
정해박해 때 이곳 곡성 성당은 객사가 있던 곳이며, 그 앞으로는 남원진관(南原鎭管, 종3품의 첨절제사가 그 관장임)에 속한 종6품의 절제도위(節蹄尉, 곡성 현감이 겸임하였을 가능성이 있음)가 지휘하는 좌·우의 군관청(軍官廳, 일명 將廳)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고개에서 주모 사건(酒母事件)으로 교우들이 수없이 잡혀 와 갖은 옥고를 치렀던 곳이다. 당시 동헌 자리에는 경찰서가, 사창(司倉) 자리에는 군청이 자리 잡고 있다.
정해박해는 1827년 정해년 전라도 곡성을 시작으로 전라도 지역, 경상도 상주, 충청도와 서울의 일부 지역에 일어난 박해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전국적인 규모의 박해는 없었으나 신유박해의 마무리를 위해 반포된 <척사윤음>은 천주교 탄압의 법적 근거가 되어 1815년 을해박해 등 전국 각지에서 소규모의 박해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교우들은 이여진(李如眞, ?~1830, 요한), 신태보(申太甫, ?~1839, 베드로), 정하상(丁夏祥, 1795~1839, 바오로), 유진길(劉進吉, 용심, 1791~1839, 아우구스티노) 등을 중심으로 교회 재건과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곡성에서 시작된 박해는 전라도 전역에 파급되면서 240여 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어 전 주 감영으로 이송되었고 이어 4월 22일(음) 전주 포졸들이 경상도 상주에서 신태보를 체포, 전주로 압송해 가자 이를 계기로 경상도에서도 박해가 시작되어 상주에서 5∼6개소의 교우촌이 습격 당하여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었다.
또한 서울에서는 4월 21일(음) 이경언(李景彦, 1790~1827, 바오로)이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고, 충청도 단양에서는 경상도의 박해를 피해 유성태(劉性泰, 1789/1794~1828, 라우렌시오)의 집으로 피신해 온 교우들이 체포되어 충주로 압송되었다.
이렇게 해서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서울 등지에서 2월부터 5월까지 4개월 동안 500여 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었으나 전라도에서 이경언, 이일언(李日彦, 1767~1839, 욥), 정태봉(鄭太奉, 관명 만보, 1796~1839, 바오로) 등 8명이, 경상도에서 박보록(朴甫祿, 박경화, 관명 도항, 1757~1827, 바오로), 김사건(金思健, 1794~1839, 안드레아), 안군심(1774~1835, 리카르도) 등 6명이, 충청도에서 유성태 등 500여 명 중 15명만이 옥사 또는 처형당해 순교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배교하여 석방되거나 유배되었다.
전라 감사 이광문(李光文, 1778~1838)이 추위와 더위, 굶주림에 약한 인간의 나약성을 매우 교묘하게 이용해, 붙잡힌 교우들의 대부분을 배교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으로 정해박해는 종식되었으나 피해가 가장 큰 전라도 지방의 교회는 거의 폐허되었다.
▒ 갇혀서 여는 (곡성성당 감옥터에서) <김영수> ▒
피 걸고 사랑하는 일보다 / 더 진하고 아득한 향기 있을까요
한 점 순간을 태워 / 영원의 불꽃 밝히며
눈물 깊은 사랑으로 달리던 이들 / 여기 감옥터 빈 곳으로 돌아와
꽃들로 흐드러져 있습니다 / 햇살들 부서지며 장엄히 일어서고
바람들 소망의 가슴 찧어 / 선연히 피 흘리고 있습니다
나는 눈을 씻으며 / 갇혀서 얻는 자유
갇혀서 여는 하늘 바라봅니다 / 내 이제는 하늘 닿는 꿈에 갇혀
사랑의 초원 아득히 달려볼까요 / 영원의 언덕 황홀히 날아볼까요
■ 찾아가는 길
사진으로 떠나는 성지순례 까페에서
옥터(곡성 성당)
전남 곡성군 곡성읍 읍내리 425
T : 061) 362-1004 F : 363-1004 미사 : 주일 : 오전 6시, 10시 30분, 화,목 : 오후 7시 30분, 수,금 : 오전 10시
http://ch.catholic.or.kr/oktersj
수려한 섬진강과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곡성 성당은 1827년 발생한 정해박해의 진원지이자 교우들이 붙잡혀 와 갇힌 옥터가 있는 곳이다.
1815년경 을해박해를 피해 남으로 숨어들어 온 신자들이 곡성 지방 덕실 마을(승법리)과 미륵골에 정착하면서 이들은 생계유지와 신앙생활을 위해 가마를 열고 옹기를 구워 팔며 생활하게 된다.
1827년 2월 어느 날 가마를 여는 축하연 자리에서 사소한 시비가 발단이 되어 관가에 천주교 신자를 고발하는 사건이 발생, 신자들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고 고문하는 탄압의 손길이 전국으로 확산되니 이 사건이 바로 정해박해의 시발점이 된다.
정해박해는 여느 박해와 달리 그 기간은 짧았지만 탄압의 정도는 매우 심해서 전라도 지역에서는 교우들이 집단 생활을 전폐하고 심산유곡으로 피신해 생명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다.(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 막달레나, 이성지,이성삼,이경언 등은 끝까지 신앙을 지켜 옥사 또는 순교하였다.)
광주대교구는 순교의 현장인 이곳에 성당을 설립키로 결정하고 곡성 성당을 세웠다. 곡성 성당에서는 정해박해 때 순교한 선조 신앙인들의 영성을 본받고 이를 널리 알리고자 정해박해 진원지인 이곳 덕실 마을과 옥터를 성역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출처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한국천주교주교회의著)
옥터(곡성 성당) 전경
사제관
'교구 성년'과 '신앙의 해' 순례성당 안내판
성당 내부..성당 벽체가 둥근 것은 예수님의 갈비뼈를 연상해서 만들었답니다.
제대옆에 있는 쇠사슬에 묶인 예수상
제대의 십자가에 새겨진 어린 양... 이곳이 수난터임을 알려주고 있죠.
스테인드글라스
성당 뒷편의 타일벽화
옥터 전시실 및 옥터 학당
전시실 내부
순교자와 옹기 그릇
곡성 성당 연혁
옥터에서 나온 유물들
정해박해란?
십자가 위의 닭을 보면서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한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는 성서 말씀이 생각납니다.
가는 길에 이정표가 재미있어서 한 컷
※ 열차로 곡성하는 방법
① 부전역 → 순천역 : 06:10 → 09:57, 08:18 → 11:59, 10:35 → 14:15
② 순천역 → 곡성역 : 10:40 → 11:09, 11:23 → 11:50, 12:25 → 12:54
③ 곡성역 → 순천역 : 14:39 → 15:06. 15:29 → 15:58, 16:56 → 17:26
④ 순천역 → 부전역 : 17:20 → 20:57, 19:10 → 22:46
※ 요금은(편도요금) 부전역에서 순천역까지 13,100원, 순천역에서 곡성역까지 3,000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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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가 사랑이 있으면
봄에 존재해 있음이요
사랑이 없으면 봄이어도
겨울에 존재하는것
사랑이 가득한 봄의 존재
요즘 꽃들이 참 예쁩니다
고운 빛에 향기까지 더하니
잠시 봄꽃의 향연에 빠지는
오늘도 좋은하루 되세요~~
http://cafe.daum.net/1664URMS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