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학농민혁명을 상징하는 [만석보터(萬石洑址)]
[연재] 김학규의 ‘이달의 근현대사적지’(12)
‘시민모임 독립’과 ‘지역사’(지도에 역사를 새기는 사람들)는 5월의 근현대사적지로 <만석보터(萬石洑址)>(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658)를 선정하였습니다.
‘시민모임 독립’은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을 맞이하여 1박2일 일정(5월 11일-12일)으로 나주와 정읍, 부안 일대의 동학농민혁명 역사현장을 탐방하였습니다. 이를 소개하는 글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 필자 주
나주 일대의 동학농민혁명 역사 현장
- 서성문, 금성관, 호남초토영 터, 동학농민군희생자사죄비
서성문. 현판은 또 다른 이름인 暎錦門(영금문)으로 걸려 있다. [사진-김학규]
서울에서 출발한 버스가 처음 도착한 곳은 나주였다. 나주 지역 안내는 동학농민군 희생자를 기리는 사죄비건립추진위원회 공동대표로 활동한 나천수 박사(나주목향토문화연구회 회장)가 맡았다. 공무원으로 정년퇴임한 후 뒤늦게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하니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분인데, 나주지역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생생한 경험에 기초한 해설은 듣는 이의 귀를 즐겁게 하기에 충분했다.
탐방의 시작은 나주읍성 서쪽의 서성문(또는 영금문)이다. 동학농민군은 1차 봉기하여 전주성을 점령한 이후 관군과 전주화약을 체결하여 호남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기로 한다. 그런데 남원·운봉과 함께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지역이 나주였다. 이에 1894년 7월 1일 나주를 점령하기 위해 최경선이 이끄는 동학군이 나주대접주 오권선이 이끄는 나주농민군과 함께 서성문을 공략했지만, 네 차례의 공격에도 성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전봉준은 민종렬을 경질시키는 조치마저 지역유림의 반대로 벽에 부딪히자 나주목사 민종렬을 설득하기 위해 나주읍성으로 직접 들어가는데, 이때 전봉준이 출입한 문도 이 서성문이다.
나주관아의 객사 금성관 [사진-김학규]
서성문에 이어 두 번째 탐방지는 나주의 옛지명을 따서 지은 금성관(錦城館)이다. 금성관은 각종 의례를 행하거나 외국 사신이나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이 나주에 머물 때 사용하던 객사이다. 전봉준도 민종렬을 설득하기 위한 금학헌 담판에 실패한 후 이곳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떠났다고 알려져 있다.
나천수 박사가 들려준 진위를 알 수 없는 일화도 재미있다.
민종렬과 그 부장들이 다음날 아침 전봉준이 성 밖으로 나가는 순간 뒤에서 총을 쏘아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봉준이 떠나기 전에 자신들이 입고 온 10여 벌의 옷을 내놓으며 “우리가 영암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들를 터이니 그때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세탁을 부탁한다.”고 말했다는 거고, 민종렬의 부장들은 ‘준비가 부족한 지금보다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돌아왔을 때 확실히 준비하여 해치우자’고 계획을 수정하는 바람에 전봉준이 무사히 나주읍성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주목사 민종렬이 동학농민군을 '토벌'한 이후 세운 금성토평비 [사진-김학규]
금성관에서 망월루를 바라볼 때 그 오른편에는 금성토평비(錦城討平碑)가 있다. 나주목사 민종렬이 나주읍성의 수성군을 지휘하여 동학농민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나주성을 지킨 것을 기념하여 1895년에 세운 비이다. 원래 위치는 나주목의 아문인 정수루 앞이었으나, 1930년 금성관 앞으로 옮겼다가, 1976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호남초토영이 있던 나주초등학교 앞에 세워진 3개의 기념비 [사진-김학규]
세 번째로 간 곳은 호남초토영터이다. 1907년 이래 나주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호남초토영(湖南招討營)은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흩어진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나주목사 민종렬을 초토사로 하여 1894년 10월 28일에 설치되었다.
이곳에는 조선관군 만이 아니라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대대장 미나미 고시로)도 35일간 머물면서 동학농민군을 대상으로 ‘전원살육작전’을 벌였다. 이때 호남 각지에서 체포해온 동학농민군 지도자를 이곳에서 살해하였는데, 한 일본군(쿠스노키 비요키치)이 남긴 2월 24일자 진중일지에 “농민군이 민보군 또는 일본군에 포획되어 고문을 당한 후 중죄인을 죽인 것이 매일 12명 이상으로 103명을 넘었으며, 그리하여 그곳에 시체를 버린 것이 680명에 달하여 그 근방에는 악취가 진동하고 땅은 죽은 사람들의 기름이 백은(白銀)처럼 얼어붙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 호남초토영은 2차 봉기에서 패배한 전봉준이 피노리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기 전 수감되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원래 군마의 검열과 무과 합격자를 발표하던 무학당(武學堂)으로도 불린 세검당(洗劍堂)이 있었다. 무학당은 넓은 군사시설이었던 관계로 동학농민군 지도자가 학살되기 이전에도 천주교 박해 당시 그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많은 신자가 죽임을 당한 천주교 성지이기도 하다.
1895년 단발령이 발표된 직후 동학농민군 ‘토벌’에 기여한 공로로 해남군수에 오른 정석진이 의병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참형을 당한 곳도 이곳이다. 1929년 11월 27일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나주보통학교 학생들과 인근의 나주농업보습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된 곳도 이곳이었다.
동학농민군 희생자를 기리는 사죄의 비 [사진-김학규]
나주의 마지막 탐방지는 ‘동학농민군 희생자를 기리는 사죄의 비’가 있는 나주역역사공원이다.
이 사죄비는 2006년부터 한일동학기행에 참여해온 일본 역사학계 학자와 시민들의 모금운동으로 시작되어 한국 시민들의 모금까지 더해지면서 2023년 10월 30일에 세워졌다. 이를 주도한 사죄비건립추진위에는 동학연구자인 박맹수(전 원광대 총장), 나카쓰카 아키라(일본 나라여자대학 명예교수), 이노우에 가쓰오(홋카이도대학 명예교수) 등 한일동학기행단 참가자들과 나주학회 회원을 비롯한 두 나라의 학자와 시민들이 참여하였다.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동학농민군 학살에 대해 일본의 역사학자와 시민이 사죄하는 것은 물론 의미 있는 일이다. 이번 ‘시민모임 독립’의 동학농민혁명 역사탐방단에 함께한 세 명의 일본인에게도 이 사죄비는 더 남다르게 다가왔을 듯하다.
한일 간 얽혀있는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한 교류와 연대에 앞장서온 여러 참석자들이 느꼈을 감회 역시 그에 못지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동학농민군 학살의 당사자인 일본정부가 사죄하고 사죄비를 세울 때에야 비로소 그 의미가 온전히 실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나주역역사공원에 있는 사죄비는 애석하지만 진정한 사죄비로 볼 수는 없다.
동학농민혁명 130주년기념제가 열린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 울림의 기둥,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군상을 표현한 <불멸-바람길>, 갑오동학혁명기념탑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에 있는 '울림의 기둥' [사진-김학규]
점심을 마친 후 정읍으로 이동한 일행은 동학농민혁명 130주년기념제 준비가 한창이어서 활력이 넘치는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에 들어섰다.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은 2년 전인 2022년 5월 11일에 개설했다고 한다. 정읍에서는 (사)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신함식 이사와 이진우 학술분과위원장이 우리 일행을 안내했다.
첫 탐방은 사발통문광장과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있었던 전국 90개 지역의 활동을 담은 ‘울림의 기둥’을 지나 박물관 안에 있는 전시관을 둘러보면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를 높이는 일이었다. ‘정부와 농민이 함께 세운 자치 기구, 집강소(執綱所)’라는 제목의 전시도 눈에 띄었고, 나주에서 나찬수 박사에게 들었던 한 일본군(쿠스노키 비요키치)이 남긴 진중일지가 소개되고 있는 점도 반갑게 다가왔다.
이어 간 황토현전적(黃土峴戰蹟)에서 만난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군상’을 형상화한 <불멸-바람길>은 말 그대로 압권이다. 임영선 작가의 작품으로 2022년 6월 25일 건립되었는데, 남녀노소가 어울어진 1차봉기 행군상과 2차봉기 행군상이 전봉준 대장을 정점으로 사람인(人)자 모양을 띠고 진군하는 형상이다.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군상을 표현한, 불멸-바람길 [사진-김학규]
원래 이 자리에는 1983년에 세워진 ‘전봉준 선생 동상’과 농민군의 부조가 있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친일 조각가 김경승의 작품인데다 전봉준을 장군이 아닌 선비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점, 농민군의 모습 역시 결연한 모습이 아닌 소풍가는 듯한 모습으로 형상화한 점 등이 잇따라 비판되었고, 마침내 지금의 조형물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불멸-바람길>로 가는 중에 만날 수 있는 “전두환 대통령의 유시로 큰 싸움터였던 이곳을 정화하고 비를 세운” ‘황토현전적지 정화기념비’에 얽힌 이야기도 재미있다. 기념비 뒷면에 새겨져 있는 기념비 설립 취지 글에 全斗煥(전두환)이라는 글자가 몹시 마모되어 있다는 점만 해도 관심을 끄는데, 전두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뒷면이 그동안 여러 차례 파손되었다고 한다.
전두환은 1980년 5월 11일 정읍농고 운동장에서 개최된 ‘동학제’에 김대중이 참석하여 수많은 이들을 환호케 했다는 이유로 행사 개최자들을 잡아들였고, 그 직후에는 광주에서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한 인물인데, ‘정화’ 운운하며 동학농민혁명 정신마저 왜곡하고 있는 현실을 눈뜨고 볼 수 없었던 이들의 의로운 행동 앞에 ‘수난을 당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황토현 정상에 세워진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사진-김학규]
동학농민군 위패를 모신 구민사(求民祠)를 참배한 후 오른 황토현 정상에는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있다.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은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최초의 탑으로 1963년 10월 3일에 건립되었다. 이곳 황토현에 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최초의 기념탑이 세워진 것은 1894년 5월 11일(양력) 벌어진 황토현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관군(전라감영군)을 상대로 크게 무찌른 곳이기 때문이다.
황토현 전투는 동학농민군들의 사기를 고무시키고 관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려 이후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5월 11일이 동학농민혁명기념일로 지정된 사실에서도 이 황토현 전투의 승리가 갖는 의미는 대단했다. 하지만 기둥의 중심에 씌어 있는 ‘제폭구민 보국안민(除暴救民 保國安民)’의 보국이 보국(輔國)이 아니라 보국(保國)으로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은 다소 충격적이다. 박정희가 정식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세워진 탓에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뜻을 받들어 (세웠다.)”와 같은 상투적인 표현은 새겨져 있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 판이다.
일행은 기념공원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이날의 일정을 마쳤는데, 마침 기념식에서 ‘시민모임 독립’의 이사장이기도 한 이만열 선생(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동학농민혁명 대상을 수상하였다. 탐방단은 수상의 기쁨을 함께 누렸고, 새벽부터 시작된 이날의 강행군으로 쌓인 피로는 말끔히 사라졌다.
동학농민군 일어나다!
-동학혁명 백산창의비, 동학농민혁명모의탑과 무명동학농민군위령비
동학혁명 백산창의비 [사진-김학규]
둘째 날의 시작은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백산대회가 열린 백산성지(白山城址) 탐방이다. 해발 50m 남짓한 백산 정상에는 이를 기념하여 세운 동학혁명 백산창의비(東學革命白山倡義碑)가 기다리고 있었다.
백산은 낮은 산이지만 평야지대 한복판에 있어 사방의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오고 고부·부안·정읍·태인·김제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인 탓에 동학농민군도 이곳에 집결했을 것이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수탈에 맞서 사발통문 거사계획을 세운 후 고부관아를 습격하고 만석보를 파괴했지만,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가 고부농민봉기의 원인을 왜곡하여 농민들을 잡아들이고 죽이는가 하면 집을 불태우기까지 하자 인근 무장현으로 피신했던 전봉준이 손화중과 함께 기포(무장기포)하여 고부관아를 점령한 후 백산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흰옷에 죽창을 들고 모인 약 8천여 농민군이 보여준 질서정연한 모습에서 ‘앉으면 죽산(竹山), 서면 백산(白山)’이라는 상징적인 말이 등장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동학농민군은 뜻을 모아 대장에 전봉준, 총관령에 손화중과 김개남, 총참모에 김덕명과 오시영, 영솔장에 최경선, 비서에 송희옥과 정백현을 추대하여 전열을 정비했고,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한 후 전주로 향하게 된다.
동학혁명모의탑 [사진-김학규]
백산에 이어 일행이 도착한 곳은 동학농민혁명모의탑과 무명동학농민군위령비가 있는 대뫼마을이다.
이곳이 바로 ‘사발통문 거사계획’을 세운 곳인데, ‘모의탑’이나 ‘모의장소’라는 표현은 왠지 부정적인 어감으로 다가온다. 무명동학농민군위령비 앞에서는 마침 위령제가 거행되고 있었다. 무명동학농민군위령비는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인 1994년에 정읍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의 주도로 시민모금을 진행하여 세웠다고 한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전야에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던 이한열(당시 연세대생)을 부축하고 있는 모습을 결합하여 농민군의 울부짖음으로 표현했다. 제폭구민(除暴救民)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대의에 동의하고 동학농민군으로 참전하여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스러져간 민초들이 그 얼마이겠는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진다. 일행은 ‘말뫼마을 동학농민혁명 홍보관’을 둘러본 후 위령제에 함께했다.
무명동학농민군위령비 앞에서 거행되고 있는 위령제 [사진-김학규]
고부초등학교 안에 세워져 있는 고부관아터 지도 [사진-김학규]
위령제를 마치고 이동하여 들른 곳은 고부관아터이다. 1907년 이래 고부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는 곳이다. 학교 왼편에는 고부향교도 있다. 고부관아는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1894년 1월 10일의 고부농민봉기 때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이 점령하여 탐관오리를 몰아냈던 역사의 현장이다. 고부 관아는 이때를 포함하여 동학농민군에게 세 번 점령당한다.
두 번째는 신임 군수 박원명의 회유를 받아들여 잠시 해산했던 농민군이 안핵사 이용태의 폭정에 맞서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이 다시 일어나 점령한 1894년 3월 22일이다. 5년 후인 1899년에 일어난 기해농민봉기 때도 고부관아는 벌왜(伐倭)·벌양(伐洋)·보국안민(輔國安民)을 내세운 동학농민군의 잔여세력에게 한 번 더 점령당한다.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된 만석보
전봉준 장군 단소 [사진-김학규]
전봉준 고택 [사진-김학규]
탐방단은 전봉준 장군의 허묘가 조성되어 있는 전봉준 장군 단소(壇所)를 들러 참배한 후, 아버지 전창혁의 묘와 전봉준 고택도 둘러보았다. 이어 1894년 1월 10일 밤 고부봉기군이 예동마을에 집결하여 고부관아로 진격할 때 둘로 갈라져 행군한 말목장터를 들른 다음, 마지막 탐방지인 만석보터로 향했다.
만석보는 정읍천이 동진강에 합류하는 곳 아래에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만석보터 표석은 만석보유지비(萬石洑遺址碑)라는 이름으로 정읍천이 동진강과 만나는 지점에 있는데, 그 아래 만석보가 실제로 있던 자리에는 이전에 세워놓은 만석보지(萬石洑址) 바위 표석이 그대로 남아있다. 만석보 표석 앞에 있는 양성우 시인의 시 <만석보> 시비도 볼 만하니 빠뜨려서는 안 된다.
만석보지 바위 표석 [사진-김학규]
고부군수 조병갑이 쌓아올린 만석보(萬石洑)는 봉건지배계급의 억압과 착취, 부정과 부패를 상징한다. 터져버린 만석보는 봉건지배계급의 부정과 부패를 혁파하고 억압과 착취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동학농민군의 결연한 의지를 상징한다.
일행 중에 “만석보가 필요하긴 했는데, 수세를 가혹하게 거둔 게 문제였다는 이야기도 있다.”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는 만석보에서 가까운 예동마을에 있는 만석보혁파비가 주목된다.
만석보유지비 [사진-김학규]
1894년의 농민봉기 당시 농민들은 전봉준 장군을 필두로 하여 만석보를 부쉈는데, 이때 만석보는 일부만 부서진 상태였다고 한다. 만석보가 완전히 해체된 것은 새로 부임한 군수 안길수가 혁파를 추진한 1898년이었다. 이에 농민들이 군수 안길수의 만석보 혁파를 칭송하는 ‘선정비’를 세웠다.
정읍천 위에 이미 보(예동보)가 있었음에도 만석보가 더 필요했다면 농민들이 봉기하여 만석보를 부술 이유도 없었을 것이고, 1898년에 군수 안길수가 만석보를 완전히 혁파하는 조치를 단행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고, 이를 칭송하는 ‘선정비’ 역시 세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서울 동작구에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을 맡아 지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서울현충원 역사탐방을 비롯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중심으로 한 근현대 역사탐방을 이끌고 있다.
저서로 『현충원 역사산책』(2022),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등이 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