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24. 6. 30(주일) 성령강림절 후 여섯째 주일 (2024년 26주)
제목;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성경; 막 5:21-43 (p.60) (시 30:10-11, 287<205>, 471<528>, 621)
(마 9:18-26, 눅 8:40-56)
<예배의 부름> (시 30:10-11)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4년 딱 절반의 마지막 날 6월 30일, 호국보훈의 달 6월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며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 평화가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한 해의 절반을 보내는 마지막 날, 지나간 시간과 다가오는 시간과 환경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있을 것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성공철학자로 칭송받는 미국 나폴레온 힐(Napoleon Hill, 1883-1970)은 성공을 원하는 현대인에게 7가지 불안이나 공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첫째, 가난에 대한 공포, 둘째, 실패에 대한 불안, 셋째, 질병에 대한 공포, 넷째, 사랑을 잃을 것에 대한 공포, 다섯째, 노후에 대한 불안, 여섯째, 자유 상실에 대한 불안, 일곱째, 죽음에 대한 공포등입니다. 항상 성공을 말하는 성공철학자가 불안과 공포를 말하므로 모든 사람들이 더 공감하고 동의했습니다. 사실 보통 사람이라면 이상의 두려움에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워드 워즈라는 사람은 “두려움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어서 당신의 마음을 괴롭힌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눈이 천 개라 공연히 쓸데없는 것까지도 끌어당겨 고민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누구나 이런저런 불안과 공포를 안고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12해 혈루증으로 살아가고 있는 여인, 방금 딸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은 회당장 야이로 등도 역시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불안과 공포는 예수님을 만나므로 사라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기적을 경험합니다. 우리 모든 하존의 가족들도 지금 이 순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구원자 예수님을 만나므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지고 기적을 경험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II.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막 5:21-43)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기적 중에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기적과 열두 해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여인을 치유하시는 두 개의 이야기가 섞인 본문입니다. 독자가 이방인인 마가복음은 마태나 누가복음에 비해 짧지만, 이 복음서들과는 달리 예수의 기적 이야기가 유난히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을 ‘행동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마가복음 이야기의 반환점이 되는 8장 이전, 마가복음의 전반부에 대부분의 기적 이야기가 몰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 전반부인 갈릴리 지역에서의 사역 중에 기적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기적 이야기를 통해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자 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마가복음의 시작과 오늘 본문의 위치가 보여주는 의미 :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통치)가 임함.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1:1)라는 선포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곧장 예수님의 이적 사화가 기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1:9-12),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시고 시험을 받으신 후(1:13), 갈릴리로 돌아오셔서 첫 마디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제 임했다는 것을 선포하시고, 함께 사역할 제자를 부르신(1:16-20) 후 곧바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꾸짖어 쫓아내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1:21-28). 마가복음에 나오는 이 첫 기적 이야기는 매우 의미심장합니다.왜냐하면 첫 번째 기적은 바로 이 땅에서 거짓 주인 행세를 하던 사탄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즉 이 첫 번째 기적은 앞으로 마가복음의 이야기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그 방향성을 암시해주는 중요한 표지가 됩니다. 첫 번째 기적 이후에 계속 이어지는 예수님의 기적 사역은 모두 이 땅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인정되고 구현되는 것, 즉 “하나님의 나라(통치)가 임했다”(1:15)라고 하신 그 선포의 말씀이 사실임을 직접 보여주는 사건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바로 앞에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동편 거라사 지역에서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이야기가 나옵니다(5:1-20).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남성은 귀신 떼에 억눌려 짐승처럼 살던 사람이었습니다(5:3-5).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고쳐주기 위해 2,000마리나 되는 돼지를 희생시키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불쌍한 남성이 다시 정상적인 사람으로 돌아오게 된 것에 기뻐하기보다는 이 모든 상황에 심기가 불편해져서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요구합니다(5:17). 이 사건은 첫 번째 기적처럼 사탄의 세력을 제압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모습(1:1)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분을 통해 임하게 된 하나님의 통치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며 인간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고발합니다(참고. 8:33“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오늘 본문 말씀 뒤에는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간적으로만 생각하고(6:2-4)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고향 사람들 역시 인간적인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꺼이 맞아들이기를 주저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통치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기능을 하는 기적은 별로 일어나지 않으며,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 없음에 놀라십니다(6:5-6).
이렇게 오늘 본문 앞뒤 이야기들을 통해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나라)를 보여주며, 이 하나님 나라 사건에서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교훈을 주십니다.
2.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열두 해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의 공통점
1) 둘 다 당시 인구 숫자에도 들어가지 못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이적과 열두 해 긴 기간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여인을 치유하신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여인들이었습니다. 여자 분들에게는 섭섭하게 들리시겠지만, 그 당시에는 인구조사를 해도 남자만 인구로 쳤습니다. 군대에 나갈 수 있는 장정만을 세고, 어린아이들과 여인들은 셈에 넣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여인을 천시하는 문화권이었습니다. 한낱 여자의 건강이나, 여자의 생명쯤은 대수롭잖게 여기던 때였습니다.
특별히 12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여인은 초기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에 따르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온 이방 여자였다고 합니다.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습니다마는 유대인들의 그 선민연(選民然)하는 교만은 대단합니다. 이방 사람이라고 하면 사람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교만이 지나친 유대인은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도 이방 사람을 보면 침을 뱉습니다. 더럽다고 상대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멸시받는 이방인의 처지로 예수님을 찾아 만나는 것입니다. 유대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버려진 사람입니다. 우물가에 있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서 물을 달라고 하시자 “유대 사람이 어찌 사마리아사람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하고 거절한 적도 있지 않습니까? 그만큼 이방 사람들은 축복권 밖에 버려진 존재로 인정받던 때입니다. 오늘의 이 여인도 바로 그런 취급을 받던 이방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불쌍합니다.
2)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둘 다 부정하여 사람의 접근을 금하는 존재였습니다.
12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이방 여인, 죽어서 시신이 된 소녀, 둘 다 구약 율법에 의하면 부정하여 사람의 접근을 금하는 존재들입니다. 특별히 “혈루증”은 끊임없이 피를 흘리거나, 하혈처럼 정기적으로 피를 유출함으로써 혈액 부족의 결과를 초래하여 건강을 해치는 만성병이며, 레위기 15:23-30의 율법에 의하면 혈루증은 부정한 질병이므로 병자는 물론 병자가 만진 것은 다 부정하다고 여겨졌으며, 성전에도 못나가고, 공중 모임에도 못나가고, 남편에게 이혼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 역시 사회로부터 격리당하고, 남편으로부터도 이혼당했을 것입니다.
3) 많은 수고와 노력을 하였으나 실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5-26절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라고 말했듯이 12해를 혈루증으로 여인은 많은 의원에게 치료를 받으러 했으나 오히려 돈만 허비했고 병의 증상만 더 심해졌습니다.
그리고 회당장 야이로 딸 역시 마찬 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귀신을 쫓아내고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갔을 때,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22-23)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함께 가는 길에 12해 혈루증 여인을 고쳐주고 가고 있는데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가져옵니다.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35)
우리 주님 예수님은 이렇게 부정하고 실패한 여인들을 찾아와 주셔서 고쳐주시고 부활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관습을 뛰어넘어 이들을 용납하시고 접촉하시며 치유하시며 살려내십니다. 주님의 사랑과 인간에 대한 연민이 율법의 한계를 넘은 것입니다.
3. 열두 해 혈루증 앓던 여인이 치유되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살아나는 믿음은?
1) 회당장과 병든 여인의 율법을 뛰어넘는 파격적이고 실천적인 믿음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은 남에게 이야기하기조차 수치스러운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다가갔다고 하지만 예수님 앞에 갔다 해도 예수님께서 ‘네가 어디 아프냐’하고 물으시면 부끄러워서 대답도 제대로 못할 병입니다. 그런 부인병이었습니다. 여자들끼리도 그렇지만 남자에게야 병명조차 말할 수 없는 병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자랑스러운 고통도 있습니다. 병중에도 자랑스러울 건 없어도 부끄러울 것도 없는 병이 더러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병은 참으로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혈루증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도, 회당에도 들어갈 수 없는 병입니다.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는 길에 싸늘한 시신으로 변한 회당장 야이로의 딸 역시 마찬 가지입니다. 율법에는 시신을 가까이한 자는 부정 탄 사람으로 일정 시간 동안 격리된 후에 가족과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12해를 혈루증을 앓으면서 괴롬을 당하고, 많은 의원에게도 많은 괴로움을 당하고, 재산도 모두 다 허비해 버렸던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많은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고 고통받는 자들에게 해방을 주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제 이 여인은 그 소문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무리들의 행렬 속으로 숨어들었으며, 마침내 예수님 곁에 다가가 그의 옷자락에 손을 대므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게 됩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사람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40) 예수님의 자기 집으로 모셨고, 죽었던 딸이 살아나는 기적을 경험합니다.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 역시 이 모든 율법을 뛰어넘어 무리 가운데로 섞여 들어왔고 옷깃을 만지므로 고침을 받습니다(27).
누가복음 18:35-43에 보면 주님으로부터 눈을 뜨게 되는 두 소경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성 가까이 오실 때에 이 소경은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무리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고, 그것이 나사렛 예수의 지나가는 소리인 줄 알고 일어나서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치니,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잠잠하라”로 저들을 꾸짖게 됩니다. 그러나 이 소경은 이 꾸짖는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께서는 이 소경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소경은 그의 소원대로 눈를 뜨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2) 체면과 위신, 자존심 등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겸손한 믿음
먼저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고침받는 장면을 보면 겸손하면서도 확고한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감히 예수님의 길을 막고 나설 용기는 없습니다. “내 병을 고쳐주십시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겨우 예수님의 뒷전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게 됩니다. 겸손한 마음입니다. 출애굽기 3:11에 보면 모세가 말합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건져내리이까?”그리고 시편 8편에서는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라고 겸손할 줄 압니다. 언제나 우리는 은혜 앞에 나를 적게 여기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내가 무엇이관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을 것입니까?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이렇게 은혜 앞에 초라한 모습에 대하여 사실을 시인하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마침내 이렇게 겸손한 여인은 기회를 포착합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가까이 오기는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예수님’하고 소리를 질러야 할지 어떻게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습니다. 가까스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게 됩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27)에서“손을 대니”(헵사토, ἣψατο)는‘만지다’, ‘붙잡다’, ‘불을 켜다’는 ‘하프토’(ἃπτω)의 3인칭 단수 부정과거 중간태 직설법으로‘그가 만졌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하프토’라는 말이, 손을 슬며시 대는 단순한 'touch'가 아닙니다. 'seize', 곧 ‘붙잡았다’는 뜻입니다. 스쳐지나간 것이 아니고 옷자락을 잡아당긴 것입니다. 여인의 손이 ‘옷에 닿았다’는 말이 아니라 ‘옷을 붙잡았다’는 말입니다. 일부러 붙잡은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깊은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예수님의 옷자락 한 가닥을 붙들고 잡아당긴 것이지요. 그렇게 붙잡으므로 이 여인은 12해 자신을 괴롭히던 혈루증으로부터 고침받고 해방받았습니다.
그리고 ‘회당장’(아르키쉬나고곤, ἀρχισυναγώγων)은 ‘우두머리’, ‘책임자’란 뜻의 ‘아르콘’(ἄρχων)과 ‘회당’이란 뜻의‘쉬나고게’(συναγώγη)의 합성어로, ‘회당장’이란 문자 그대로 ‘유대인의 신앙 공동체인 회당 모임이나 예배를 주관하는 책임자’를 가리킵니다. 당시 회당에는 열 명의 관리자들이 있었고, 그 중에 세 사람 정도가 회당장의 책임을 맡았습니다(행 13:15). 야이로가 “회당장 중 하나”라는 말은 이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는 뜻입니다. 회당장은 공중 예배를 주관할 책임이 있어서 성경을 읽을 사람을 안식일마다 선정하는 일을 하였고 예배의 질서를 유지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유대인 사회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행 18:8.17).
이와 같이 한 지역의 회당장은 그 지역에서 사회적 위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회당장이, 군중이 보는 앞에서 청년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23)라고 간곡히 호소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어지는 6장 고향 가버나움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배척당하는,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그렇게 인정받는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은 율법을 거역한 자, 안식일을 범한 자라는 좋지 못한 평판이 나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회당장 야이로는 이런 이름도 없는 갈릴리 청년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딸을 고쳐달라고 요청합니다. 자신의 위치와 체면을 다 내려놓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쳐주실 수 있을까 없을까, 그만한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 그것도 더 이상 물어보거나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오로지 죽어가는 12살 난 딸을 고쳐야겠다는 일념에 체면과 위신을 다 내려놓습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나아만’이란 아람 장군이 나옵니다. 이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나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을 때, 자기 집에 잡혀 와서 아내를 수종 들고 있는 이스라엘 하녀 하나가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3)라는 충고를 받아서 원치 않지만 일단 사마리아로 가서 선지자 엘리사를 만납니다. 찾아가서 위엄있게 내가 왔노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엘리사 선지자는 나와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사자를 보내서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10)고 말합니다. 이에 나아만 장군은 몹시 불쾌했습니다. 어디서 이런 대우를 받아 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그대로 노하여 가버립니다. 그때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13)이 종들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14)말합니다.
우리 옛말에 ‘체면이 밥 먹여주느냐!’는 말이 있는데, 병을 고치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체면과 위신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자신의 지위와 체면, 자존심을 다 내려놓는 겸손한 믿음이 육신의 질병을 고침받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문제가 해결되는 기적을 가져옵니다.
3) 모든 것에 다 실패한 최악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는 믿음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의 상황을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26)라고 표현합니다. 이 여인은 한 마디로 병도 중하여지고 가진 재산도 다 허비한 그야말로 최악의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이런 최악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28)는. 오로지 예수님을 만나면 고침받을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무리 속으로 들어왔고, 예수님의 옷깃을 만지므로 고침받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상황은 더 최악이고 절망적이었습니다.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38)야이로가 예수님을 찾아올 때에는 그래도 딸이 살아있었는데, 집에 도착하니 이미 딸은 죽었고, 울며 심히 통곡하며 장례 치를 준비를 하고 있는 초상집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이미 상황은 끝났습니다. 주님께서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39)고 말씀하시자 다들 비웃었습니다(40). 그러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몇 제자들을 데리시고 들어가셔서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즉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41)하시자 소녀는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살아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배고픈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43).
우리 옛말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날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아무리 최악의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할지라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부활하셔서 영생을 허락해주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분명히 되살아날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 썬다 씽이 언젠가 밀림 지대에서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안 연대장이 썬다 씽을 잡아다 때리고 욕보이다가 마지막에는 밀림 속에 돼지우리 같은 것을 만들어 발가벗겨서 그 곳에서 지내도록 했습니다. 까닭인즉 밤에 지독한 모기에게 뜯겨서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썬다 씽은 밤새도록 “날 구원하신 예수를 영원히 찬송하겠네”라는 찬송을 기쁘게 불렀습니다. 이것을 본 연대장은 감동하여, 예수가 누군지 모르지만 저런 고통 중에서도 저가 찬송을 부를 수 있다면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사도 바울 일행이 드로아에서 환상을 보고 유럽 첫 성인 빌립보로 건너가서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를 만나 세례를 주고 그 집을 선교 기지로 삼아 빌립보 전도를 합니다. 그리고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의 귀신을 쫓아내주고 해방을 준 것이 문제가 되어 그 여종 주인의 고소로 바울과 실라는 태장 맞고, 깊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결코 실망하지 않고 ‘한밤중에 기도하고 찬송하므로’ 차꼬가 풀어지고 옥문이 열리며 자결하려고 하는 간수가,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30) 하고 물어올 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31)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므로 구원얻는 역사를 이룹니다.
어느 재주 많은 사람이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를 말해 놓았습니다. 그 차이는 약 80가지인데 그 중 한 가지 “프로는 자신의 일에 목숨을 걸지만 아마추어는 자신 일에 변명을 건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아마추어처럼 이러쿵저러쿵 상황 따라 흔들리지 말고 믿음에 목숨 거는 신앙의 프로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신앙의 프로가 되면 12해 혈루증 여인처럼, 회당장 야이로의 딸처럼 고침받고 되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4)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36)는 예수님께만 소망을 둔 확고한 믿음
모든 인간적인 것에 다 실패한 12해 열루증 여인, 예수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회당장 야이로, 이들에게 더 떨어질 나락도 없는 최악의 실패와 절망적인 상황에서 고침받는 것뿐만 아니라 구원을 얻고 부활의 기적을 경험합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34)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36)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41-42)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어느 신문사에서“오늘이 당신의 마지막 날이라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라는 여론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대답이 나왔습니다. 어떤 이는 안구 은행에 가서 눈을 기증하겠다고 했고, 또 어떤 이들은 밀린 일들을 모두 정리해서 일을 마치겠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는 유산을 분배해서 남은 가족들의 장래에 보탬이 되겠다고도 했습니다. 물론 이 밖에도 여행을 하겠다든지, 심지어는 원수를 갚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 중에 가족을 모아놓고 “예수를 잘 믿으라. 주님은 분명히 우리의 구주이시다. 나는 지금 주님 앞에 간다.”라는 유언을 남기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혈루증 여인에 대해 초대 교부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여인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집 앞에다 기념비를 세웠답니다. ‘모월 모일 예수님께서 내 병을 고치시다.’ 이렇게 기념비를 세워놓고 가고 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다고 평생을 간증하다가 주님 앞으로 갔다고 합니다 ‘내가 12년 동안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예수님을 만나서 이렇게 나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 여자는 불행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이 환자가 아니었다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가버나움까지 오지 않았겠지요. 예수님을 찾아갈 마음을 먹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여자는 그런 불행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만났고, 육적, 영적으로 다 구원받은 은혜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 역시 마찬 가지입니다. 12살된 딸이 죽을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모든 체면, 자존심 다 내려놓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다 은혜입니다. 실패도 은혜요, 질병도 은혜요, 마지막에는 죽음도 은혜입니다. 다 감사할 것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구체적 경륜과 사랑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헬라(그리스)의 풍자적인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한번은 해적에게 잡혀서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잡아매어 끌고 가는 사람을 쳐다보면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여보시오, 나를 저 사람한테 팔아주시오. 저 사람은 주인이 필요합니다.”그 사람이 디오게네스를 그 집의 총무와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샀습니다. 그 주인은 늘 “우리 집에 디오게네스가 들어오던 그 날이 내 평생에 가장 좋은 날이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일시적인 체면을 내던짐으로써 일평생의 귀한 분을 모시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십니까? 나의 모든 지위와 체면, 자존심을 내려놓을 수 있기 바랍니다. 어떤 절망적인 최악의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36)는 주님의 말씀을 확신하며 주님께 다 맡깁시다. 그러면 어떤 문제라도 해결되어지고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III.
호국보훈의 달 6월 마지막 날인데, 영상과 사진 보며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 미국 해군 대위 “윌리엄 해밀턴 쇼” 영상 및 서울 녹번동 은평평화공원 동상 사진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한 벽안의 이방인의 대한민국 사랑에 정말 감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제강점기의 한국 선교사 “윌리엄 얼 쇼”의 외아들로 1922년 6월 5일 평양에서 태어났던 “윌리엄 해밀턴 쇼”, 평양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국 웨슬리언대를 졸업하고 2차 세계대전 중 해군 소위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했고, 1947년 한국으로 돌아와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며 한국해안경비대 창설에 기여했습니다. 제대 후 하버드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중 6·25전쟁이 터지자 젊은 부인과 두 아들을 처가에 맡기고 재입대했습니다. 이때 그는 부모님과 주변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조국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히 공부만 하고 있겠는가?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공부를 해도 늦지 않다.”유창한 한국어로 맥아더 장군을 보좌하며 인천상륙 작전에 성공한 뒤 그는 해병대로 보직을 바꿔서울 탈환에 나섰다가 인민군 매복조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습니다.
그의 숭고한 사랑에 감명받은 미국 감리교인들은 아버지 윌리엄 얼 쇼가 공동 창립한대전감리교신학교(현 목원대학교)에 ‘윌리엄 해밀턴 쇼 기념교회’를 건립했습니다.
그의 부인은 남편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하버드대 박사 과정을 마치고 서울로 와서 이화여대 교수와 세브란스 병원 자원봉사자로 평생을 바쳤습니다. 아들과 며느리도 하버드대에서 한국사로 박사학위를 받고 내한해 장학사업과 한·미 학술교류에 힘썼습니다. 은평평화공원 그의 동상 옆에는 기념비가 있습니다. 연세대 총장을 지낸 백낙준 전 문교부 장관 등 60여 명이 ‘키가 크고 평양 말씨를 쓰던 벽안의 친구’를 위해 1956년 녹번 삼거리에 세웠다가 이곳으로 옮겨온 비석입니다. 비석 받침대에는 제자이자 친구인 해군사관학교 2기생들의 헌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와 한국 친구들의 특별했던 우정은 국가간 우방과 동맹의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한국을 위해 목숨보다 더 큰 사랑을 바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매년 9월 22일 이곳을 찾는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호국보훈의 달 6월 마지막 날이자, 성령강림절 후 여섯째 주일입니다. 비록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셨지만,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셨고, 그 성령님이 우리와 늘 함께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도우시고 힘을 주십니다. 회당장 야이로와 열두 해 혈루증 앓던 여인의 믿음의 승리를 우리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 앞 거라사 지역 주민이나 본문 뒤 나사렛 지역 주민은 그렇지 못한 부정적 사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모두에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삶에는 늘 불안과 공포, 유혹과 어려움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을 극복했을 때 하나님의 나라(통치)는 비로소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어떤 어려움과 환난이 있다고 할지라도, 12해 혈루증 여인과 회당장 야이로가 모든 지위와 체면, 자존심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나아가므로 마음의 위로와 평안(샬롬)을 얻고, 모든 병을 고침받고, 죽어있던 열정과 아픔을 회복하고 되살려서. 2024년 남은 절반을 후회없이 열심히 살아가므로, 승리의 복된 인생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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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30일(주일) 주일 2부예배 facebook 실시간 송출한 동영상 url 주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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