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예천군 감천,용궁,풍양면 "한천사 와 정각,서원,석송령"
경북 예천군 감천면
①노천정(蘆川亭)
②화석정(花石亭)
증거리 산234 (감천지 옆)
③한천사(寒天寺)
1.예천한천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醴泉寒天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
2.예천 한천사 삼층석탑
(醴泉 寒天寺 三層石塔)
증거리 185 (한천사길 142)
④도암대(陶巖臺)
진평리 산65
⑤석송령(石松靈)
천향리 894
경북 예천군 용궁면
⑥청원정(淸遠亭)
⑦소천서원(蘇川書院)
무이리 379
경북 예천군 풍양면
⑧삼수정(三樹亭)
청곡리 379
①노천정(蘆川亭)
경북 예천군 감천면 증거리 산234 (감천지 옆)
감천면 증거리 중미(中山) 남쪽에 있는 정자로, 한양인 노천 조협(蘆川趙俠, 1863-?)의 유덕(遺德)을 추모하여 1956년에 후손들이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 목조 와즙 평가건(木造瓦葺平家建)이다. 현내저수지(縣內貯水地)를 눈앞에 두고 좌우에 매암대(梅岩臺), 화석정(花石亭)의 두 암산(岩山)이 있어 경관이 매우 좋다. 조협(趙俠)은 천성이 청렴하고 봉선사효(奉先事孝)에 독실했으므로 옥천집(玉川集)에 찬양사(讚揚辭)가 실려 있다.(醴泉大觀 1982)
②화석정(花石亭)
경북 예천군 감천면 증거리 산234 (감천지 옆)
화석정(花石亭)은 방산 조원봉(放汕 趙遠鳳 1855∼1938)이 친우와 자연 속애서 교유(交遊)하던 곳에 초가로로 세운정자로, 마치 바위 모양이 작은 꽃받침 위의 커다란 꽃 같다고 해서 ‘화석(花石)’이라 했으나 1915년 훼손되고 ‘화석정(花石亭)’이라 새긴 바위만 남아 있던 것을 1984년 옛터에 다시 세웠다.
③한천사(寒天寺)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증거리 184 (한천사길 142)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678년(문무왕 18)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의상이 영주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할 때 기둥이 넘어졌다. 그 이유가 지리적 여건 때문이라고 본 의상은 소백산 남쪽 기슭에 있는 주마산의 말머리를 진압하기 위해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 뒤 조선 중기까지의 역사는 전래되지 않고 있으며, 1803년(순조 3) 근천(謹天)이 법당을 중건하였고, 1808년 불량계(佛糧契)의 도움을 받아 선당(禪堂)을 중건하였다. 1932년 주지 취운(翠雲)이 요사채를 중건하였고, 1934년 주지 덕기(德奇)가 법당을 중수하였다.
이 절은 원래 한대사(寒大寺)라고 불렸던 사찰로 불량계·등촉계(燈燭契)·위선계(爲先契) 등을 통하여 사찰의 발전과 수행을 도모했던 대표적인 곳이며, 지금도 그에 관련된 서문(序文) 등이 남아 있다. 그러나 6·25전쟁 때 전소되고 근년에 세운 요사 2동과 법당인 유리광전(瑠璃光殿:藥師殿)·산신각 등의 당우들만이 있으며, 옛날의 석축도 다 헐리고 터만 남아 있다.
대표적인 문화재로는 보물 제667호로 지정된 한천사철조여래좌상(寒天寺鐵造如來坐像)과 보물 제1141호로 지정된 금동 자물쇠 및 쇠북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있다. 이 중 철불은 높이 1.53m의 약사여래로 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865년(경문왕 5)에 건립된 도피안사(到彼岸寺)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다 그 연대가 더 오래되고, 우아한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또 이 불상과 같은 때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3.56m의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신라 후대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1.예천 한천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醴泉 寒天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
경북 예천군 감천면 증거리 185 (한천사길 142)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한천사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철조 불상. 198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1.53m. 광배와 대좌를 잃어버린 이 철조불상은 9세기 후기에 조성된 일련의 철불인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나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1963년 지정) 등과 같은 양식적 특징을 지니는 불상이다. 즉 9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2.예천 "한천사 삼층석탑" (醴泉 寒天寺 三層石塔)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증거리 184 (한천사길 142)
예천 한천사 삼층석탑(醴泉 寒天寺 三層石塔)은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한천리, 한천사에 있는 통일신라의 삼층석탑이다. 1972년 12월 29일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건립된 전형적인 3층 석탑이다. 서남향으로 세워진 한천사 대적광전(大寂光殿) 정면에 위치하며,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이 남아 있다. 몸돌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돌로 되어 있으며 몸돌 받침은 4단씩이고, 3층 지붕돌 정상부에 찰주공이 파져 있다.
경내에 있는 철불 좌상과 제작연대가 같은 것으로 추정되며,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일탑식 가람의 일례로서 시대 양식의 비교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높이는 3.6m로 소형의 우아한 석탑이다.
④도암대(陶巖臺)
경북 예천군 감천면 진평리 산65
도암대(陶巖臺)는 정면 2칸 측면 1.5칸 목조와가 팔작지붕으로,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이 조선 명종 3년(1548) 풍기군수로 재임시 고향 예안(禮安) 나들이 길에 쉬어 가던 장구소(杖屨所: 지팡이 놓고 신발을 벗어 머물던 곳)이다.
1921년 감천면 유림에서 선생의 발자취를 기념키 위해 도암대계(陶庵臺契)를 결성한 후, 유림이 주도하고 선생의 후손들이 조력(助力)하여 1934년에 도암대(陶庵臺)를 세웠다. 그 후 1958년과 1989년, 두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陶巖臺(도암대)라는 현판 외에 세 개의 편액이 있다. 먼저 陶巖亭記(도암정기)는 戊戌(무술) 流火節(유화절)에 永嘉(영가) 權相圭(권상규)가 썼다고 했으니 아마도 1958(戊戌)년 음력 7월(流火節) 중건할 때에 안동(永嘉) 권씨 상규가 지은 것이다.
또 하나의 陶巖臺重修記(도암대중수기)는 ‘檀紀七十二戊辰後靑狗濯枝節(단기칠십이무진후청구탁지절) 漢陽(한양) 趙光永(조광영) 謹記(근기)“라 한 것으로 보아, 한양조씨 조광영이 1994(甲戌=靑狗)년 음력 6월(濯枝節)에 쓴 것이다.
⑤예천 천향리 석송령(石松靈)
경북 예천군 감천면 천향리 894
일명 부자나무로 알려진 이 나무는 천년기념물 제 29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석송령(石松靈)이란 이름을 갖고 있다
사람들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약 600년 전 경북 풍기지방에 큰 홍수가 났을 때 이 마을앞을 흐르는 석간천을 따라 떠내려오던 소나무를 지나가던 나그네가 건져서 현재 자리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1930년에 와서 마을주민인 이수목(李秀睦)이란 사람이 이 나무에서 영감을 느끼게 되어 석송령이란 이름을 지어 주고 자신 소유의 토지 6,600m²를 이 나무에 상속시켜 문서 등기를 마치면서, 재산을 가진 나무가 되었고, 세금을 내는 나무가 되었다.
예천군에서는 석송령의 소유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소작료를 금융기관에 저축하고 있으며, 박정희 대통령이 증여한 500만원을 보태어, 해마다 선정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는 나무라고 한다.
아무나 하기 힘든 일을 나무가 하고 있는 것이다.
⑥청원정(淸遠亭)
경북 예천군 용궁면 무이리 379
정식 명칭은 "예천무이리청원정(醴泉武夷里淸遠亭)"이며, 먼저 소개가 되어있는 인근에 있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31호인 무이서당(武夷書堂)과는 깊은 연관이 있는 곳 입니다.
청원정(淸遠亭)은 고려 공민왕 3년(1354)에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 1288~미상)이 환국했을 때, 원나라 원제에 조공을 감면케 한 공로로 축산부원군에 봉군되었고 지금의 왕으로부터 소천강 일대를 하사받아 청원정을 창건 했다고 전하며, 척약재 김구용(1338~1384)이 쓴 "청원정"이라는 글씨가 현 청원정 옆 암벽에 음각되어 있어, 이를 청원정의 창건 근거로 전해 오고 있으며, 임란 때 소실되었다가 1918년에 복원 되었습니다.
청원정(淸遠亭)의 현판으로 원래 척약재 김구용의 글씨가 있었으나 소실되어 이를 다시 복원하려 하였으나 원본을 잃어버려, 암벽에 새겨진 척약재의 글씨을 탁본하여 청원정의 편액으로 달았다고 하며 국파 전원발과 척약재 김구용은 각별한 사이였다고 합니다.
⑦소천서원(蘇川書院)
경북 예천군 용궁면 무이리 379
소천서원(蘇川書院)은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을 제향(祭享) 하고 있는곳으로, 숙종(肅宗)은 그의 공을 기리고 향리(鄕里)의 성화천(省火川)을 되살린다는 뜻에서 재위 22년(1696)에 소천(蘇川)으로 고치게 하였으며, 5년 뒤인 숙종 27년(1701) 2월 19일에 소천서원(蘇川書院)을 세웠습니다.
건립당시 숭덕사(崇德祠)와 전교당(典敎堂)을 세워 후학을 양성해 왔으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폐쇄되었다가 1918년 향의(鄕議)에 따라, 서원의 서편에서 전원발(全元發)이 강의하던 자리에 청원정(淸遠亭)을 재건했고 1966년 서원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⑧삼수정(三樹亭)
경북 예천군 풍양면 청곡리 379
삼수 정귀령이 1425년에 관직을 사임하고이곳 별실(연안) 마을에 입향하여 사저를 신축하고 후원에 정자를 지어 삼수정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삼수공의 옛 집터 뒤에 있는 완담서원에 제향 된 칠현의 사적비로 칠현은 정귀령과 아들 옹과 사, 손자 환과 광필, 칠대손 영후와 영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