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7.17_ 연중 16주일
주인과 손님
1. 일기일회의 손님맞이
여름손님은 범보다 무섭다고 하는데 그래도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성의껏 길손들을 대접하고 있다.
푹푹 찌는 복 더위의 정오, 집 어귀에 세 길손이 나타났다. 주인은 곧바로 달려 나가 나그네들을 붙잡는다. 선한 타자인지 위험한 타자인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은 채. 그저 일기일회一期一回, 내가 이 사람과 만나는 것은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생각에 그리하였으리라. “엉긴 젖과 우유와 송아지 요리를 차려 놓으니” 세 손님은 맘껏 먹기도 마시기도 하며 원기를 돋웠다. 아브라함은 ‘그들’이 ‘그분’이신 줄 꿈에도 몰랐다. “내년 이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하실 때 비로소 깨달았다. 그나저나 하느님도 종종 배가 고프신가 보다.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마태 25,35)는 말씀을 실천한 또 다른 사례. 어떤 여자가 자기 마을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였다. 귀한 손님과 일행을 대접하자니 창세기의 사라처럼 마음이 바빴다. 고운 밀가루로 반죽해서 빵을 굽고, 살이 부드러운 송아지 한 마리 잡을 수 있는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으나 나그네들을 따뜻이 대접하려는 마음은 그대로였으리라. 그런데 손님들이 뜻밖의 선물을 내놓았다. 어떤 집은 대를 이어줄 아들을 얻었고(창세 18,10), 어떤 집은 “좋은 몫”(루카 10,42) 곧 생명을 주는 “그분의 말씀”(루카 10,39)을 얻었다.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정현종, 비스듬히)
‘사람 인’人 자가 보여주듯 사람은 비스듬히 서로 기대며 살아간다.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하나도 쓰러지는 식으로 모든 존재는 상호의존적이다. 주기만 한다거나 받기만 하는 일방적인 관계는 없다. 이런 맥락에서 두고두고 새겨볼 말씀이 2독서에 나왔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다.”(콜로 1,24)고 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조차 주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 채워드려야 하는 분이라니 의미심장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성경의 손님맞이는 서로 돕고 또 돕는 상부상조相扶相助,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반드시 돕는 환난상휼患難相恤이 삶의 기본 원리라는 점을 가르쳐준다.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존재의 실상에 대해 교종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한다. “더 이상 ‘다른 이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또한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모든 형제들 35항)
2. 암행감찰을 권하는 정부
최근 행정안전부는 <정부청사관리본부 공무직원들 청렴자율감찰관> 운영을 예고했다. 정부청사에서 일하는 공무직원의 청렴 및 공직윤리 선도를 위하여 ‘자율감찰관’을 두려는 것이다. 명분은 그럴싸하나 내용을 뜯어보면 몇몇으로 하여금 동료 전체를 감시토록 만들겠다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시설 2명, 승강기 1명, 통신 1명, 미화 3명, 조경 3명, 안내 1명 등 부서별로 자원을 받고 그 가운데서 소수를 선발하여 직무태만이나 근무지 이탈 등 복무 실태를 제보 받을 것이라고 한다. 해당 직원은 정체를 숨기고 암약하면서 남 몰래 감시했다가 고변하는 역할을 맡게 되니 영락없는 사냥꾼이다. 정다운 이웃사촌끼리 이래서는 안 된다.
3. 호스트와 게스트
영어에서는 호스트와 게스트가 따로따로이지만 라틴어 계열에서는 한 단어가 주인과 손님을 동시에 가리킨다(예를 들어 라틴어 hospes, 이탈리아어 ospite). 환대 속에서 주객 구분이 사라지게 만들던 전통의 희미한 흔적일까? 하기는 공수래공수거 인생에서 처음부터 주인이었던 자가 누가 있으랴. 지금 자기 집에서 손님을 대접하고 있는 아브라함이나 마르타도 처음에는 손님에 지나지 않았다. 성경은 낯선 이들을 모른 체 하지 않고 ‘자신의 혈육’(이사 58,7 참조)으로 체험하는 일을 믿음의 행동으로 여긴다.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우리가 문을 열어드리지 않으면 꼼짝없이 밖에서 서성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으신 불쌍한 하느님. 우리 주님 딱하지 않게 한 주간을 살자. 우리는 날 때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소리를 듣던,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이라고 해서 손님 대접을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처럼 중시하던 조선의 후예들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