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세상은 상대성이다. 하늘이 있으면 땅이 있는 것처럼 시를 잘쓰는 사람이 있으면, 시를 못쓰는 사람도 있다. 시를 잘 쓰는 법을 배우기 전에 왜 내가 시를 못 쓰는지부터 아는 것이 중요하다.
손자병법에 지피지기(知彼知己)라는 말이 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다. 시작법에서 왜 손자병법의 지피지기가 필요하냐? 내가 현재 시를 잘 쓰지 못한다면,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나의 적이라 할 수 있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왜 시를 잘쓰는지 알면, 나도 시를 잘 쓸 수 있다는 말이 되겠다. 따라서 시를 잘 쓰는 법을 배우기 전에, 왜 내가 시를 못 쓰는지 이유부터 알고 시작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1.왜 시를 못 쓰는가?
가. 문예창작 교육의 한계
미술이나 음악은 이론보다는 실기 중심의 커리큘럼으로 운영이 된다. 음악에서 악기를 잡는 운지법이라든지, 미술에서 스케치를 하는 방법 등은 실기에 곧 바로 반영이 된다.
문예창작은 눈으로 보이거나 귀로 들을 수 없는 정신세계를 반영한다. 미술이나 음악처럼 곧바로 실기에 적용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따라서 작법서에 나와 있는 내용들은 이론일 뿐이다.
문예창작 교육은 피교육생들이 문예창작에 대하여 어느 정도 수준이 있다는 전재 하에 이루어 지고 있다. 작법 이론들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지 않고 스스로 샘플 작품을 보고 판단 할 수 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있다.
▶해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시나 소설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천부적으로 재질을 안고 태어 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스스로 소질이 없다는 생각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잘못 된 관념이다. 조선시대에 일반 서민들은 글을 읽거나 쓰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지배계층들이 서민들이 글을 알게 되면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할지 모른다는 우려감에 법으로 금지한 것이다. 글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시를 쓴다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을 것이다.
일반 백성들도 글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조선왕조가 끝난 후다. 한글이 보편화 되면서 누구나 글을 배우고 쓸수 있게 되었지만, 일제 강압기에 현대문학을 배우려면 일본으로 유학을 가거나, 서울 있는 학교에 입학을 해야 했다. 우리나라 대학은 선진국에 있는 대학보다 근친이 심하다. 본교 대학 출신만이 본교에서 강의를 할 수가 있다. 즉, 대학간 교류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 제자는 스승으로부터 받은 지식을, 또 다시 제자들에게 전수하는 식으로 교육이 이어져 왔다.
한마디로 시나 소설을 잘 쓸 수 있는 재질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고 볼 수가 있다.
두 번째로 집고 넘어 갈 점은 문예는 미술이나 음악 같은 장르와 달리 실기 교육이 활성화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현재 4년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해도 단편 두세 편, 시 서너 편만 쓰면 졸업이다. 4년 동안 코피나게 써도 제대로 된 작품을 쓸까, 말까 인데 열 편도 안쓰고 졸업하는 것이 오늘 날 문예창작 교육 현실이다.
물론 문예창작이 이론 중심의 교육으로 흘러갈수 밖에 없는 원인은 있다. 미술이나 음악은 기능적인 면이 많아서 실기교육 가능하다. 문예는 기능적인 부분은 없고, 오감을 글로 옮겨 적어야 하는 창조적 예술이라 이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문제점은 있다.
예를 들어서 바이올린의 운지법이라든지,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법은 천 명 앞에서도 효과적으로 강의를 할 수가 있다. 미술에서 구도를 잡는 법, 스케치하는 순서 등도 가능하다. 문예는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것이 아니고, 글로 오각을 자극해야 하는 문제라서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나. 문예창작 기초 교육의 부재
인생 통틀어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창의성이 가장 밝다. 이 시기의 시 창작 교육의 효과는 가장 빠르다. 미국이나 영국은 초등학교부터 글짓기나 시 창작을 정규과목으로 이어가는데 우리는 ‘문예창작’이라는 과목조차 없다.
기본기가 없이 작가나 시인이 되는 꿈을 실현하려고 대학의 문예창작학과에 입학을 해도 성과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도 이 점에 있다.
▶해설
우리나라 문예 교육의 현실을 더듬어 보면, 시를 못쓰고 소설을 못쓰는 것은 당연지사(當然之事)다.
나무는 뿌리가 땅에 깊숙이 박힐수록 잘 자란다. 뿌리가 튼튼하지 못한 나무는 약한 바람에도 뽑혀 나갈 수가 있다. 모든 교육에서 기초교육은 나무의 뿌리와 같다.
연극무대에서 10년 이상 활동을 한 배우와 얼굴이 잘생겨서 특체 된 배우와 연기력은 감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 텔레비전이나 영화판에서 오랫동안 버티고 나이가 들어서도 왕성하게 활동을 하는 배우들은 거의 연극배우 출신이기도 하다.
글을 잘 쓰려면 글쓰기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좋은 시를 쓰려면 어휘력이 풍부해야 하고, 좋은 소설을 쓰려면 필력이 중요하다. 현재 우리나라의 문예 교육에서 기초 교육은 거의 없다. 문장력 기초도 없는 사람이 소설을 쓰겠다고 덤비고, 어휘력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시를 쓰겠다가 시 작법책을 찾고 대학의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작문’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선생님이 수박 겉핥기 식으로 진행되는 작문 교육의 효과가 있을리 없다. 그러던 중 대학입학에 논술이 등장하면서 작문 교육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았다.
논술은 글쓰기의 장르이기는 하지만 창조적은 면에서 문예와 같은 배를 탈 수는 없다. 우리나라에서 논술을 도입한 배경이 학생들에게 논리적인 사고를 향상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논술과목이 정규과목에 포함되어야 한다. 하지만 논술은 사교육 시장의 돈벌이에 불과하다.
논술을 도입한 배경은 최상위권 학생들이 대학입시에서 점수에 변별력을 주기 위해서이다. 학생들에게 시험 점수를 주기 위해 논술을 도입했다는 것은 비극이다. 무엇보다 초등학교 때부터 배운 논술이 대학입학 하는 순간 사라져 버린다는 것은 “교육은 백년지계”라는 측면에서 볼 때 땅을 치고 하늘을 볼 일이다.
외국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시기부터 대학을 졸업하는 시기까지 에세이를 써야 한다. 모든 학문의 중심에 인문학이 있고, 인문학의 중심에 문예가 있다는 교육체계로 볼 때 당연한 커리큘럼이지만 우리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 일뿐이다.
다. 고정 관념의 속박
우리 사회에는 시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천부적으로 시적 재능을 타고 난 사람만 쓸 수 있다는 고정관념이 뿌리 박혀 있다. 초중고 교육 현장에서는 체계적인 시쓰기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영향도 이 점에 있다.
교육 현장에서의 시 창작 교육은 어떻게 시를 쓰느냐? 가 아니고, 일방적으로 제시해 준 시제(詩題)에 대한 결과의 평가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해설
아인슈타인은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는 명언을 남겼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천재도 노력을 하지 않으면 일반인과 같다는 것이다. 시를 쓰는데 있어서 노력을 하기는커녕, 시는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라는 강박관념에 젖어 시 쓰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 배경에는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담임선생님의 영향이 크다. 글짓기 대회에 작품을 내려면 학급 전체 구성원이 작품을 내서 잘 된 작품을 뽑아서 응모해야 한다. 그러나 글쓰기에 소질이 있는 몇몇 학생들을 선택해서 그들에게만 글을 써 오라고 지시한다. 다른 학생들에게는 글 쓸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학생들은 굳이 질문하지 않아도 선생님의 뜻을 헤아리고 있다. 또, 어렵게 글짓기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반문을 제시할 생각조차 앉는다. 그런 교육환경이 글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닐는 강박관념을 낳게 만들었다.
본인의 얼굴에 묻은 검정은 거울을 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시를 잘 짓고 못 짓는 것도 본인이 판단할 수가 없다. 당사자의 머릿속에서 나온 시는 그냥 시 일뿐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볼 때만 우열을 가릴 수가 있다. 그런데도 강박관념에 젖어 있다 보니 시를 잘 지을 수 있는 실력이 있는데도 평생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태반(太半)이다,
라. 현실과 이상의 괴리
아마추어들이 시를 못 쓰는 이유 중에 시를 쓸 때 사용하는 시어는 따로 있다는 모호한 관념이다. 이를테면 아스라한 가로등, 쓸쓸히 서 있는 억새, 고고히 흐르는 달빛, 이슬 머금은 장미꽃 등일 것이다. 이 외에도 시는 무조건 특별한 언어로 쓰여지는 것이라고 믿는 초심자들이 많다.
• 시는 고상하게 써야 한다.
• 시는 무조건 감명 깊게 써야 한다.
• 시는 추상적으로 써야 한다.
• 시를 쓸 때 사용하는 언어는 따로 있다.
▶해설
▷시는 고상하게 써야 한다
좋은 시는 마음을 움직인다. 마음을 움직였다가는 시인의 의도하는 시세계에 빠져 들었다는 말이 된다. 시인의 시 시계는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와 다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시인의 시세계가 같은 시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라서 감동 받을 수가 없다. 잘 쓴 시를 보고 감동 받은 결과는 모든 시는 고상하게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다.
과연 그럴까?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
이 시어가 고상한가? 그냥 우리가 흔히 쓸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도 이 시어가 고상하게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보통 느끼는 짐승을 새로운 언어로 창조를 했다는 점이다. 이 시어에서 짐승은 산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짐승이 아니다. 시인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고 짐승에 비유를 한 것이다.
▷시는 무조건 감명 깊게 써야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감동을 주는 시를 쓰겠다는 의도는 스스로 시를 포기하게 만들겠다는 작전이나 다름없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시를 쓴 시인은 아마추어가 아니다. 프로 시인으로 오랜 창작 활동에서 빗어진 작품으로 감동을 준 것이다.
▷시는 추상적으로 써야 한다.
시는 추상적으로 써야 한다는 말을 하기 전에 추상이라는 개념 정리부터 필요하다. 추상(抽象)적인 것은 사람이 만지거나 볼 수도 없는 것이지만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들이다. 시간, 꿈, 잠은 만지거나 볼 수가 없다. 하지만 잠을 잔다는 의미는 알 수가 있다.
시를 추상적으로 쓴다는 것은 시인이 새롭게 창조해 낸 언어를 여러 과정을 거쳐서 잠이나 꿈처럼 있는 것처럼 쓰는 것이다.
처음 시를 쓰는 사람들이 혼돈을 하는 것은 추상적 관념을 애매모호(曖昧模糊)한 개념으로 받아 들인다는 점이다. 추상적 관념은 시인의 상상력 산물이지만, 애매모호는 작품을 창작한 시인조차 그때그때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등 즉흥적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서 이형기의 ‘낙화’라는 시를 보자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형기/낙화 마지막 연)
위 시 ‘낙화’ 마지막 연은 얼핏 모호해 보이지만 시인의 의도가 정확하게 드러나 있는 시어들이다. 나의 사랑, 나의 이별은 보편적인 정서지만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이 아름다운 느낌을 주고 있다.
다시 예를 들어 보자
늦가을 창문 밖에서
쓸쓸한 바람이 불면
찻잔에 외로움이 밀려 온다
위시는 얼핏 시상이 정리되어 있는 시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쓸쓸한 바람이 불면/ 이란 행이 모호하다. 어떤 바람이 쓸쓸한가? 구체적으로 암시해 주고 있지 않다. 시니까 대충 축약을 해도 되지 않는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구체적인 것을 축약해야 독자로부터 공감대를 얻어 낼 수가 있다.
▷시를 쓸 때 사용하는 언어가 따로 있다.
이 말을 역설적으로 해석하면 일상적인 언어는 시어가 될 수 없고, 시어는 따로 있다는 잘못 된 관념이다. 시어는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말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아니다. 일상적인 언어에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라는 뜻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일상적인 언어 : 너는 내가 보고 싶지 않니?
시적인 언어 : 아름다운 무지개를 보면
너는 내가 보고 싶지 않니?
일상적인 언어가 아름다운 무지개라는 시적 대상을 접목해서 새롭게 읽혀진다. 시어는 이처럼 일상적인 언어를 시어로 창조하는 것이지, 시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시창작법#알기 쉬운 시창작#시작법#시인#시쓰기#시창작하는 법#시쓰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