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이다.
644년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되었으나 조선 전기까지 의 연혁은 알려지지 않는다. 1624년 임진왜란 때 소실된 대웅전만 중건하였다 . 창건 당시 봉황사(鳳凰寺)로 불리었으나, 중건되면서 황산사(黃山寺)로 불리게 되었고, 2006년 보수공사를 마치면서 다시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현재 대웅전은 ( 보물 제2068호)로 지정되어 있다. 1974년 기와와 단청을 하였다.
봉황이 단청을 그리던 사찰, 봉황사
봉황사로 들어서면 겹벚꽃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4월 말에서 5월 중순까지 피어 있어 절을 찾는 이들의 눈을 더욱 즐겁게 한다. 봉황사(鳳凰寺)가 자리한 산이 아기산(鵝岐山)이다. 산세가 거위 모양을 하고 있어 거위 ‘鵝’자에 산 이름 ‘岐’자를 써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태백산의 한 갈래인 일월산(日山) 지맥이 남으로 뻗어내려 해발 591m인 아기산을 이루고 있다. 그 주봉이 우뚝 솟아 무실마을의 진산(鎭山)이 되고, 봉황사를 끌어안고 있는 황산곡(黃山谷)을 만들었다. 황산골은 북쪽을 향하여 널찍한 터를 갖고 있으며, 아기산의 기(氣)가 모여 뻗어 내려온 곳에 봉황사가 자리하고 있다. 봉황사라는 원이름을 찾은 지 얼마 되지않았다.
황산사(黃山寺)로 알고 있었던 봉황사는 1980년 당시 사찰 옆 개울에서 발견된 사적비를 통해 원이름이 봉황사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신라시대인 644년(선덕여왕 13년) 봉황사로 창건되어, 임진왜란(1592년)때 모두 불에 타 전소되었다. 그 이후 1624년 숙종 때 중창이 되면서 황산사로 불리게 되었는데, 왜 봉황사에서 황산사로 이름을 바꾸었는지는 알 수 없다.
번성기 때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극락전, 관음전, 만월대, 범종각, 만세루, 천왕문 등 여러 전각들이 있었고 부속암자도 있을 만큼 안동지역에서 대단한 규모를 자랑하는 큰 사찰이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경내에네는 대웅전과 요사, 산신각만 존재한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산곡간에 위치한 법당치고는 비교적 규모가 크다. 내부에 3칸에 걸쳐 고주를 두고 후불벽을 설치하였다. 기둥의 모양은 전면과 배면의 모양이 서로 다른데 특히 전면에 열립한 평주의 강한 배흘림에 주목된다.
봉황사와 아기산에 얽힌 전설
봉황(鳳凰)이 대웅전의 단청을 칠하였다는 전설에 따르면 어느 화공이 단청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공사가 끝날 때까지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대웅전의 앞면을 끝내고 뒷면을 칠하려 할 때 사람들이 그만 들여다보고 말았다. 그러자 화공은 봉황으로 변하여 날아갔다. 그 이후에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아서 결국 오늘날까지 뒷면에는 단청을 하지 못하였다고 전하여진다. 이러한 연유로 봉황사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짐작된다. 봉황사가 있는 아기산에는 예부터 아들을 낳기 위한 풍속인 기자속(祈子俗)이 은밀하게 전해지기도 한다. 아들을 잉태하기 위하여 치성을 드리던 기자바위가 사찰로 올라가는 길가에 아직도 남아있는데, 아빠바위와 엄마바위로 불리고 있다. 아들을 낳지 못한 부인이 정성껏 치성을 드리고 아빠바위에 아무도 몰래 올라타고 몸을 밀착시키면 아들을 잉태할 수 있다고 한다. 또 아빠바위에 올라서서 엄마바위를 향하여 돈을 던져 움푹 패인 구멍에 동전이 들어가면 아들을 잉태한다고 한다.
대웅전의 건립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대웅전의 내력을 추론해 볼 수 있는 사찰 내 각종 편액과 불상 대좌의 묵서, 그 밖에 근래 발견된 사적비와 중수기 등을 종합해 보면 17세기 후반 무렵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존불을 봉안한 정면 5칸의 대형불전이며, 팔작지붕을 하고 있어 조선후기의 3칸 불전에 맞배집이 유행하던 것에 비하여 돋보이는 형식이다. 또한, 전면의 배흘림이 강한 기둥은 조선후기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양식이다.
임란후의 피폐해진 상황에서의 재건으로 자재 확보의 어려움을 겪는 당시의 시대상황이 반영되었다. 지붕의 처마를 정면과 양측면이 겹처마이지만 배면은 부연을 사용하지 않은 홑처마이며,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지만 정면에만 길게 뻗어나온 장식성의 촛가지를 사용 하였 고, 건물내부에도 전면에만 운공초각을 사용한 점 등에 서 확인이 가능하다. 지붕위의 세부 공포와 장식에 19 세기의 시대 특성이 나타나는데 이는 조선말과 일제 강 점기에 여러차례 수리의 흔적으로 보인다.
외부 단청은 근래에 개채되었지만, 내부 단청은 17~18세기의 재건 당시의 상태를 온전하게 잘 보존하고 있다. 특히 내부 우물반자에 그려진 용, 금박으로 정교하고 도드라지게 그려진 연화당초문, 보상화당초문 등은 17~18세기 단청의 전형을 보이는 것이다. 특히 전면의 빗반자에 그려진 봉황은 연꽃을 입에 물고 구름 사이를 노니는 모습으로 봉황사라는 사찰의 유래와도 관련된 독특한 것으로 평가된다.
17세기말에 건립된 이후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정면 5칸의 당당한 격식을 간직한 조선후기의 불전이다. 공포부를 비롯한 세부는 19세기 말에 이루어진 수리의 흔적을 담고 있으며, 전면과 측면, 후면 공포가 서로 달리하고 있는 것은 조선말의 어려웠던 안동지역 불교계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천장의 우물반자에 그려진 오래된 단청과 빗반자의 봉황 그림 등 뛰어난 실내장엄 등이 높게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