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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
행복은 없다
조미경
천장에서는 나이트클럽에서나 볼 수 있는 화려한 조명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무대 뒤에서는 비트 있는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나는 화려한 의상을 입고 엉덩이를 흔들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시간을 연습해서 꿈속에서도 음악만 나오면 춤을 출 수 있도록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서 동작은 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지만, 객석에서 나를 바라볼 사람들의 눈길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몸을 흔들고 있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원들은 무아지경에 빠져서 얼굴 가득히 웃음을 머금고 손동작 하나까지 마음을 쓰고 있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음악이 끝나자 객석에서는 박수 소리와 함성이 들렸다.
우리는 장충체육관에서 열리는 전국 벨리댄스 경연대회에 참가하는 중이다. 심사 위원석을 향해 인사를 할 때 우리를 축하해 주기 위해 멀리서 찾아온 가족과 아이들이 손에 손에 꽃다발을 안고 우리가 서 있는 객석으로 달려왔다. 경연을 위해 화려한 의상과 분장하고 있어 서로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가족들을 얼싸안고 서로 수고했다는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는 경연이 끝나 무대 뒤로 돌아와 숨을 고르며 긴장했던 순간을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대 뒤에서는 무대에 오르지 못한 동호회 회원들이 우리를 응원하기 위해 간식과 꽃다발을 준비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와 함께 강당에서 춤추고 수다를 떨었던 사람들이 환하게 우리를 반겨준다. “정말 멋져요. 그동안 연습실에서 연습할 때는 몰랐는데 우리 팀이 최고로 잘한 것 같아요.” 안무 선생님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우리를 향해 박수쳤다. “정말요 선생님? 우리 상 받을 수 있을까요?” 은숙 언니가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물었다. “우리 모두 열심히 했으니까 우리 수상 못해도 삐지지 않기에요.” 우리는 선생님 말씀에 호호호 웃었다.
그날 우리 팀은 본상을 받았다. 그동안 연습실에서 흘린 땀방울이 아깝지 않았다. 오전에 가족들이 모두 출근하고 나면 연습하기 위해 매일 스포츠 센터로 출근했다. 그리고 휴대전화로 동작을 영상으로 찍어서 어색한 부분을 되돌려보면서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그렇게 밤낮으로 열심히 하면서 은숙 언니, 정희, 영란과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나이가 비슷하고 만나면 할 이야기가 무척 많아서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쌓은 우정이 자그마치 3년이다. 그래서 그런지 벨리댄스 동호회에서 우리를 사총사로 불렀다.
사총사 중에서 은숙은 제일 나이가 많았다. 그녀는 춤을 출 때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가장 넉넉한 사람이 된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작은 키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늘 주눅이 들었다는 은숙 언니는 우리 중에서도 제일 말수가 적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동네에 들어온 약장수를 보고 첫눈에 반해서 춤추는 무희가 되고 싶었다. 은숙은 고등학교 시절 무용이 하고 싶어서 부모 몰래 무용학원에 등록했다가 종아리에 피가 나게 맞았다. 그 후 공부에 흥미를 잃고 대학 입학도 포기하려고 했다. 계집애가 춤은 배워서 어디다 쓰느냐고 부모님이 노발대발하는 바람에 은숙은 일단 진로를 바꾸어 가정학과에 입학했다. 그런 그녀는 부모의 반대로 자신의 꿈을 잊은 채 살았다,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더 늦기 전에 어린 시절 꾸었던 꿈을 이루기 위해 동호회에서 열심히 춤을 추고 있다.
나는 대학교 졸업 후 취업한 직장에서 30년 넘게 근무했다. 남들은 30년 이상 근속이면 퇴직할 때 퇴직금 두둑하게 받아서 새로운 일을 찾거나, 취미 생활하면서 즐기면 되겠다며 은근히 부러운 눈치다. 그들의 이야기가 질투 섞인 부러움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회사 내에 떠도는 루머는 출근하는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세계적인 불황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회사의 성장 동력을 정지시켰다.
회사 윗선에서 퇴직 압력은 없었지만, 친구나 선배 지인들의 회사는 부도설이 나돌고 있어 다들 일할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그들의 회사는 작은 기류에도 흔들리는 중소기업이었다. 그들을 만나면 한결같이 조기 퇴직에 대해 두려워했다. 대기업으로 갈수록 회사는 젊은 피를 수혈한다는 점을 내세워 정년 전에 조기 퇴직 희망자를 모집한다고 지인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남자들이 대부분인 회사에서 여자로 부장 타이틀이면 어디 가도 꿀리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30년 이상을 한결같이 내 목숨 줄 같은 월급 때문에, 아이들이 아파서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 있는 날에도 연차를 내고 마음 편하게 쉴 수 없어 아픈 애를 집에 두고 출근할 수밖에 없었다. 애들한테 엄마가 정작 필요할 때 옆에 있어 주지 못한 미안함을 금전으로 보상하며 그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이젠 알 것 같다. 내 인생의 소중한 부분을 회사에 던지고 이젠 점점 퇴물이 되어 가는 자신에게 작은 선물을 하고 싶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데 그동안은 계기가 없었다.
아이 둘 대학 졸업하고 나니 남편과 오붓한 시간도 보내고 싶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동안 직장 때문에 친구들과 마음 편하게 여행 한번 못했다.
한번 결심이 서자 당장 실천에 옮기고 싶었다. 남편은 내가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하자, “당신, 집에서 뭐 하게” 한다. “뭐하기는, 나도 다른 주부들처럼 집오리 생활 좀 해 보려고” 이렇게 말하면서도 은근히 아쉬움이 남았다.
“나도 이젠 늦잠도 자고 오후에는 카페에 가서 커피 마시면서 우아한 백조처럼 살고 싶어” 남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 백수가 편할 것 같지. 한 달만 집에 있어 봐. 지겨울 거야.” 남편의 말에 콧방귀를 뀐 나는 사직서를 써서 핸드백에 넣고 출근했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나의 직속 상사인 이사님 방으로 달려갔다. 이사님은 마침 그날 지방에서 외부 미팅이 있어 출근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도 똑같은 일상이 이어졌다. 한번 직장에 염증을 느끼게 되자, 아침에 일어나서 회사에 출근하는 일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싫었다. 보통 부부들이 오래 함께 살다 보면 권태기를 맞이하는데 나의 경우에는 직장이 너무나 지겨운 나머지 매일 사직서 쓸 생각만 했다. 전업주부들처럼 집에서 느긋하게 커피 마시면서 하루를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 같았다. 사직서를 가방에 넣고 다닌 지 5개월이 지났다.
아들은 대학교 졸업 후 밤마다 이력서를 쓰면서 하루를 보냈다. 아들 녀석이 면접 가는 날이면 행여 무슨 실수라도 할까 조심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친구들은 취준생 둔 엄마가 아니라서 그런지 걱정할 것 없다면서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라는 말뿐이었다. 나는 아들 걱정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들은 면접에서 거푸 퇴짜를 맞았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술에 취해 들어오는 아들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가 아들이 k 기업 법무팀에 최종 합격하고 연수에 들어가니 그동안 마음졸인 일들이 모두 해소되어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아들도 최종 합격했으니 마음 편하게 전업주부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사장은 나에게 간곡하게 말했다. “정부장, 일이 힘들어서 그래?” “아닙니다, 사장님. 저도 이제 집에서 쉬고 싶어서 그래요.” 사장은 다른 날과 달리 말이 없다. 부서원들도 갑자기 왜 사직서를 내느냐 물었지만 나는 그냥 웃기만 했다. 어느 영화에서처럼 박수, 칠 때 떠나고 싶었다. 인수인계하고 돌아서는데 왠지 가슴 한편이 서늘했다. 내가 삼십 년을 한결같이 다녔던 사무실이 갑자기 낯설어 보여 한참을 바라보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 돌아와 부엌에 앉았다. 다른 날 같으면 가족들 먹을 저녁을 준비해야 하지만 오늘은 조촐한 기념 파티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집오리가 되었다.
직장을 퇴사한 후 약 한 달간은 마치 숙제를 끝마친 아이처럼 홀가분했다.
혼자 식탁에 앉아 늦은 아침을 먹고 커피 한잔을 들고 발코니에 나가 아파트
주변을 관찰하는 것도 나름 좋았다. 무엇보다 회사에서 늘 은근히 스트레스를 주던 윤 상무를 마주치지 않아도 좋으니 날아갈 것 같았다.
윤 상무는 내가 다녔던 회사 오너 가의 가족으로 직원들을 못살게 굴고 한편으로 자신 뜻에 거슬리면 인사 고과에 불이익을 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다른 임원들도 윤 상무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아첨을 떨었다.
그해 가을은 유난히 힘이 들었다. 매일 바쁘게 30년을 살았는데 직장에서 퇴직하고 나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 장난이 아니었다. 집안일 마치고 마트에 다녀와서 가족들 식사 준비하고 나서는 무기력하게 소파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처음 며칠은 너무나 홀가분해서 좋았다. 그렇지만 직장 생활 외에는 별다른 취미 생활이 없는 나에게 시간을 보내는 일은 무척 힘들었다.
특별하게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닌데 가슴에서는 쌩쌩 찬 바람이 불어대고 있었고,
이유 모를 공허감이 물밀듯이 밀려와 무엇 하나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끝까지 직장 생활하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었다는 후회가 살짝 밀려오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혼자 자동차를 몰고 야외를 나갔지만 바람 빠진 풍선처럼 한없이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흐르고 집안에 앉아 무료함을 달래던 나는 집에서 가까운 CGV에서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집중하지 못하고 스르르 잠이 들었는데,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에 눈을 떠 보니, 영화가 이미 끝나고 관객들이 퇴장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 들렀다. 바쁘다는 핑계로 책 한 권 읽지 못하다 요즘은 어떤 작가의 글이 잘 팔리는지 궁금한 마음에 서점 출입구에 붙어 있는 베스트셀러 목록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작가가 없어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해도 늘 나른하고 기운이 없었다.
좋아하던 소설책 한 권을 읽을 수도 없고 친구들이 만나자 해도 끝내 거절하면서 두문불출 집안에 뒹굴면서도 어느 날엔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어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혼돈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집오리 생활이 계속 길어지자 점점 지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친구들과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는 그것도 시들해지면서 남편과 자식들의 저녁 준비 때문에 바쁘다고, 서둘러 집에 가는 친구들 옷자락을 붙잡고 징징거리다 깨달았다.
집에서 살림하면서 남편과 가족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전업주부의 실상을 아는 순간 하루하루가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뭔가를 시작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취미 생활을 하려 해도 그동안 뭘 하고 싶었는지, 뭘 배우고 싶었는지 까마득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릎을 탁, 쳤다. 그길로 집으로 돌아와 전화해서 스포츠 센터의 벨리댄스 동호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렇게 벨리댄스를 하면서 오랜 직장 생활 후 나만의 취미 생활을 하게 되었고, 스트레스와 우울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경연대회 후 오랜만에 벨리댄스 동호회에 나갔더니 다들 반가워하면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 묻는다. 나는 그냥 말없이 웃기만 했다. 사실 속으로는 사는 게 재미없어서 그랬다고 속내를 드러내고 싶었지만, 나이가 드니 이젠 진실도 좋지만 가끔은 안개 속에 머무르고 싶을 때도 있다.
정희는 우리 중에서 평범하지 않은 이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녀는 젊은 시절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추는 댄서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고 싶었던 그녀는 처음에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을 찾다 댄서가 되었다. 처음 정희를 만났을 때가 지금도 기억이 선명한데 그녀는 한여름에도 목에, 얇은 스카프를 매고 춤을 추었다. 나는 그녀가 스카프를 특별히 좋아해서 뜨거운 여름에도 스카프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어느 연말 송년회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 우리 3명은 맥주 한 잔씩을 마시면서 지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불쑥 은숙 언니가 정희에게 뜬금없는 말을 한 게 정희의 과거를 듣는 계기가 되었다.
“정희야, 너는 왜 맨날 더운 여름에도 스카프를 매고 있냐?”
정희는 취해서 얼굴이 불콰한 가운데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렇게 반문했다.
“언니들 궁금해? 내 이야기 듣고 웃지 말기다.” “무슨 비밀이 있기에 미리 선수를 치는 거야 정희씨.‟ 내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랬더니 정희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와 은숙 언니는 정희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만 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정희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정희는 늘 활기차게 우리를 편안하게 해 주었는데 세상에 그런 일이 있어서 그랬구나 하고 그녀를 이해하게 되었다. 속으로는 ′독하다 무섭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 혼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희는 남편과 부부싸움 도중 자신의 과거 댄서 시절을 들먹이며 다그치는 바람에
가스렌지를 켜고 라이터를 켰다고 한다. 정희 남편은 정희와 결혼 후 의처증 증세가 있어, 정희를 늘 끊임없이 의심하고 몰아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죽을 각오로 가스렌지에 불을 붙여 함께 죽으려 했다는 것이다. 정희는 미국에서 피부 이식 수술을 3번이나 했지만, 아직도 흉터가 남아 뜨거운 여름에도 흉터를 가리느라 스카프를 매고 다닌다고 했다.
나와 정희, 은숙 언니는 거의 매일 통화를 하면서 친자매 이상의 결속을 다지면서 시간을 보냈다. 댄스복을 사기 위해 종로 거리를 휘젓고 다니며 가게 단골이 되었다. 단골이 되면 우리는 주기적으로 그 가게에서 댄스복을 사서 입고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 올리는 등의 일상을 공유했다. 그리고 찬거리를 비롯해 시댁 행사에서 어떤 옷을 입을지까지도 서로 의논하며 일상을 공유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일이 묘하게 틀어지면서 우리 사총사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지만 조금씩 묘한 기류가 흐르게 되었다. 사실 특별하지도 않았고 기분 나쁜 일도 없었던 평범한, 그러나 누군가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말 한마디에 우리는 더 이상의 친분을 과시할 동력을 잃고 말았다. 지난해 전국 벨리댄스 경연대회 유튜브를 함께 시청하다 누군가의 입에서 “근데, 은숙 씨 표정은 왜 그렇게 항상 어두워?” 나와 정희는 핸드폰에서 카톡 메시지를 쳐다보느라 은숙 언니에게 비난하는 회원을 얼른 제지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때 은숙 언니의 표정이라니…
평상시에도 무용학원에 다니면서 기본기가 동호회 회원보다 탄탄하다고 자부심이 대단하던 은숙 언니였기에 누군가 지나가면서 슬쩍 한마디 한 것은 비수가 되어 은숙 언니를 괴롭혔다. 언젠가 은숙 언니가 우리에게 슬쩍 던진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그녀가 자신이 좋아하는 무용을 하기 위해 남편 몰래 파출부까지 했다는 이야기 할 때면, 가슴이 서늘하던 때도 있었다. 그리고 갱년기 증상으로 갑자기 불어난 몸 때문에 다이어트를 하다 한 번은 지방 흡입 수술했었는데, 마취가 깨지 않아 하마터면 저승으로 갈 뻔했다는 말에 나는 그만 아연실색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녀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예쁜 무용복을 사기 위해 가족들 몰래, 아르바이트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정말 욕심도 많고 한번 마음먹은 일은 꼭 하고야 마는 성미였다. 그런 은숙 언니였기에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춤을 추는데 말로 입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은 듯했다. 은숙 언니는 그 후부터 우리 모임에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나오지 않았다. 나와 정희는 은숙 언니가 남긴 빈자리가 썰렁해서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하곤 했다.
은숙 언니가 동호회에서 자취를 감춘 후 나와 영란, 정희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서 잡담하는 다른 회원들에게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댄스를 하는 사람들 특유의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모인 동호회는 말이 많고 특히 서로를 질투하면서도, 매일 이어지는 일과처럼 우리는 파도에 밀려서 모래톱에 쌓이는 모래처럼 모였다, 흩어졌다 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날도 우리는 새로운 작품 안무를 익히기 위해서 연습실에 남아 있었다. 넓은 연습실은 사방에 거울이 붙어 있어, 자신의 몸매를 보며 조금 더 젊어 보이고 싶은 욕망에 가득 찬 중년의 여인들이 조금 전에 배운 안무를 연습하면서 웃고 떠들고 있었다. 약 3개월 후 서울 페스티발에 우리 동호회도 참석 할 것이라는 선생님의 이야기에, 그 자리에 모인 회원들은 흥분에 들떠 의상은 뭐가 좋을지, 안무는 어떤 게 나을지, 요란하게 떠들고 있었다.
은숙 언니와 나 정희 영란 4명이 만나서 커피를 마시면서 수다를 떨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웠는데, 은숙 언니가 빠진 사총사는 김빠진 사이다가 되어 아무런 맛이 없었다. 정희는 침묵을 힘들어했다. 그날도 나와 정희는 디저트 카페에 앉아 팥빙수를 한 그릇 시켜 놓고, 오고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디저트 카페에는 우리 외에는 손님이라곤 없어서 종업원은 엎드려 자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정희가 자신 핸드백을 뒤지더니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언니, 나 담배 한 대 피워도 돼요?” “담배를 여기에서.‟ 눈을 크게 뜬 내가 묻자 아니 설마 여기에서 담배를 영란이 웃으면서 “정희씨 눈치 보지 말고 피우고 와 괜찮아.‟ 영란의 말에 나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이렇게 말했다. “정희씨? 담배 피려고?” 하고 물었다. 정희는 “언니 몰랐어요? 나 담배 피우는 거? 담배는 이제 기호 식품 인데.” “언니, 참 촌스럽다.” 직장 생활할 때 젊은 후배들에게 자주 듣던 말이 ‘촌스럽다’였다. 다시 한번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지 못한 우둔한 사람이 됐다는 기분이 들었다. 직장 내 회식할 때면 함께 보조를 맞추어 술도 마실 줄 알아야 했다. 그런데 알코올 분해 능력이 없는 체질 때문에 밥만 우걱거리며 먹다 보니 윗사람들 분위기를 맞추지 못해서 만년 부장으로 퇴직하고 보니, 새삼 나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희를 보면서 새삼 세상에 대해 눈을 뜨는 요즈음이다. 정희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먼나라 이웃나라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나 혼자 멍하게 있을 때도 많다.
정희가, 언젠가 맥줏집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마치 영화에서 보았던 여배우가, 멋지게 다리를 꼬고 앉아 피우는 모습이 골초 같아 보였다. 나는 정희의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정희가 자신의 과거를 살짝 얘기했던 일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머쓱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정희는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남편과 결혼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남편 쪽 부모님들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남편은 정희가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는 댄서가 아닌 집안이 가난해서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으로 집에 인사를 시켰다.
다. 정희는 그렇게 해서 과거를 안고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남편은 어렵게 공부해서 동전 한 푼도 함부로 쓰지 않을 만큼 구두쇠였다.
그런 남편과 결혼 생활 동안 하루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는 정희의 과거가 새삼 아프게 다가왔다.
그렇게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어느 날, 나는 뜻밖에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문자를 보고 나는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그 글자는 처음에 내가 확인했던 게 맞았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어쩌다 젊은 나이에.‵ 쯧쯧 다들 한숨만 쉬고 있다.
한참 핸드폰을 손에 쥐고 앉아 있는데 정희가 전화를 걸어왔다.
“문자 봤죠?”
“응, 받았는데 믿어 지지가 않아서.”
나는 한숨을 쉬면서 목이 메어서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정말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게요.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을까요?”
부족함이 없고 오히려 모든 것이 넘치는데 하필 자식을 먼저 보내야 하니 가슴이 아팠다.
“우리 이대로 있으면 안 되잖아, 정희씨가 다른 회원이랑 은숙 언니에게도 연락 하지 그래.” 나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정희씨에게 말했다.
정희는 우리 멤버의 총무 역할을 맡고 있어서 회비나 연락처를 가지고 있었다.
영란의 아들이 수영하다가 심장마비로 숨졌다는 사실은 정말 큰 충격이었다.
그녀는 때때로 아들 자랑을 늘어놓았는데 어릴 때부터 수영, 스케이트, 농구, 스키,
승마까지 못하는 스포츠가 없다고 했다. 그런 아들이 프리토킹 하는 영어 강사와 함께 수영장에서 수영하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틈나는 대로 자식 자랑을 늘어놓았는데 이번에 다른 사람들은 생각하기도 힘들다는 S대학에 턱 하고 붙었다. 그것도 의과 대학에, 영란은 아들을 위해서 고등학교 3년 내내 강남에서 내로라하는 일타강사를 붙여서 아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누구나 부러워하는 다니던 증권사에 사직서를 냈다.
그녀는 아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서 자신의 퇴직금으로 데이 트레이딩을 하면서 아들 학원비를 벌었다. 영란은 새벽에 일어나 아들 건강식을 챙겨서 학교에 보내고 집에 돌아와 집안일을 마치면, 주식시장 동향을 살피다가 아들 학교가 끝나는 시간에 유명 학원이 몰려 있는 대치동 학원가로 아들을 픽업했다. 영란의 집에서 대치동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그녀는 학원이 끝나는 아들을 기다리는 동안 근처 편의점에서 시간제 아르바이트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영란의 남편은 그런 영란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남편과 아들 문제로 다툴 때마다 영란을 극성스럽다고 여기는 남편이 영란은 야속했다. 그렇다 해서 영란의 형편에 대치동으로 이사할 여력은 없어 아들이 고등학교 졸업 3년 동안 매일 아들을 학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기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이 묵묵히 해냈다. 영란은 아들을 대학에 입학시키기 전에는 친구들을 만나서 편하게 수다를 떨며 놀아본 적이 없었다. 오직 아들을 최고 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자신을 태웠다. 그렇게 영란은 아들을 한국 최고의 학부에 입학시켰다. 그런데 그렇게 정성을 다 바친, 이제 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아들이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났으니 신을 원망하고 자신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는 것은 당연할 터였다. 젊은 사람 문상을 간다는 것은 사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내 자식 또래의 젊은이가 하늘로 갔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팠다.
정희와 통화한 후 집안일을 마치고 가족들에게도 저녁에 문상가야 한다고 일러두고, 자동차를 몰아서 을지병원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운전하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영란에게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 할까. 2년 전에는 대학 동기 아들이 백혈병으로 세상을 등졌다. 그때도 나는 대학 동기 아들 장례식장에서 눈물이 나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 다른 동기들은 함께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떠나보낸 동기생을 위로했는데, 어찌 된 노릇인지 나는 그때도 가슴은 아픈데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영란이 우리 동호회에 가입하던 때는 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1월이었고, 스산한 날씨 탓에 회원들의 결석이 많아 연습실은 왠지 썰렁하기만 하던 때였다. 탈의실에서 무용복으로 탈의하고 연습실에 들어섰을 때 키가 크고 서글서글한 인상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여자가 앉아서 스트레칭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와 정희는 그런 그녀를 곁눈질했다. 그리고 선생님이 그녀를 소개했다. 그녀의 이름은 하영란이라 했다. 그날은 첫날이라 다른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영란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헤어졌다. 우리는 연습이 끝난 후 평상시처럼 연습실 근처 카페에 앉아서 잡담을 즐기고 있다가 다들 바쁘다는 이유로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문제는 다음 수업이었다. 다음 수업에 참석하니 연습실에서 누군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춤을 추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영란이었다. 그녀는 딱 하루 수강했는데, 안무를 모두 외워서 혼자 무아지경에 빠져 춤을 추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아침에 미루어 둔 집안일을 하고 있는데 정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언니 바빠요?”
“아냐, 안 바빠.”
“솥뚜껑 운전사가 바쁜 거 봤어?”
나는 너스레를 떨며 정희가 무슨 말을 할지 사뭇 궁금해했다.
그녀는 대뜸 이렇게 대꾸했다.
“언니도 봤지.” 누구 말하는 거야? “있잖아요, 오늘 새로 들어온 신입… 아, 신입 회원 멋지던데.” 내가 말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희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아까 새로 온 신입 회원, 근데 아무래도 우리와 물이 다른 것 같아요.”
정희는 한참 수다를 떨더니 입을 다물어 버린다. 뭐가 다르다는 것인지 영문을 모르겠다. 나는 정희에게 되물었다.
“정희씨가 보기에 아까 신입 회원이 뭔가 특이점이 있는 것으로 보여?”
그랬더니 정희가 하는 말은 그게 아니고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의상이 유난히 고급스러워서 깜짝 놀랐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속으로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유난스럽게 떠든다 생각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알아가면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날 이후 영란은 우리 동호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한 달 후에는 삼총사 멤버인 은숙, 정희 나와 합류하게 되어 다른 회원들이 사총사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는 마치 친자매처럼 우리는 함께 어울리며 시간을 보냈다.
자식을 앞세운 어미의 심정 앞에 무어라 위로의 말을 건넬까.
지병이 없이 건강한 아들이 하루아침에 어미의 가슴에 비수를 들이댔으니. 충격이 얼마나 컷 을지 상상을 할 수조차 없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나보낸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지 가슴이 먹먹하고 두려워 생각하기도 싫다.
잠시 신호 대기 중에 룸미러로 내 얼굴을 살폈다.
엷은 화장을 하고 액세서리도 검소하게, 검은 상복을 차려입은 나는 나 자신이 상주가 된 듯이 초췌하게 보였다.
자동차를 주차하고 먼저 정희에게 전화했다.
정희도 병원에 도착했다는 답이 왔다.
혼자 들어가기가 민망해서 나는 장례식장 입구 의자에 앉아 있었다.
조금 있으니 정희가 도착하고 곧이어 동호회 회원들이 차례로 들어와서
‘어쩌면 좋아’를 연발했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눈물이 글썽글썽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영란은 우리 얼굴을 보자 눈물부터 훔친다. “어떻게 왔어요? 안 와도 되는데…”
영란은 말끝을 흐리며 영정 사진 속 아들을 바라보는데, 우리는 눈이 벌겋게 되어 서로 울고 말았다. 나는 영란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다. 무슨 말로 위로를 건네도 크나큰 슬픔을 겪은 그녀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영란의 남편이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 하면서도 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어찌나 안타까운지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날은 우리 동호회에 가장 쇼킹 한 일이 생긴 날이었다.
우리 동호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 선생님께서 자신이 운영하는 유튜브에 우리 벨리댄스 무용단의 수업하는 장면을 찍어서 올린다고 지난주에 말했었다.
우리는 다들 유튜브에서 다른 동호회에서 올린 영상을 보면서 감탄도 하고 때로는 질투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었는데, 우리가 유튜브 방송에 출연한다는 단 한 가지 사실로 인해 흥분되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평상시에 수업하는 것처럼 긴장하지 말고 음악에 몸을 맡기라고 말했지만, 앞에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얼굴이 경직되었다.
그랬다. 그날 수업에는 평상시에 입던 의상이 아닌 벨리댄스 페스티벌에 입고 나가는 의상을 입고, 짙은 화장을 한 회원들이 무대 정면을 노려보면서 서로 자신 얼굴이 가장 예쁘게 나오기를 바라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렇게 한 작품이 끝났다.
선생님은 손뼉을 탁탁 치면서 지금까지는 카메라가 ON 상태가 아니었다면서 다시 한번 열정적으로 춤을 추기를 주문했다. 전면 거울이 붙어 있는 넓은 강당은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지난 연말에 있었던 댄스 경연대회 못지않은 열기에 그만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약 10분간의 휴식이 끝나고 이번에는 템포가 빠른 김연자의 ‘아모르파티’ 음원이 울려 퍼지자, 어디서 그런 열기가 나오는지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자연스레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회원들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진다.
이렇게 흥분되는 날 은숙 언니가 함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카메라가 자신을 따라오자, 사람들은 자연히 얼굴에 생기가 돌아서 모처럼 교실이 활기로 가득 찼다.
젊은 카메라맨이 쉬러 갔고 샤워를 마친 우리는 근처 카페에 둘러앉았다.
오늘은 선생님을 모시고 시원한 차라도 한잔 마시고 헤어지자고 해서
선생님과 오늘 유튜브 방송에 관한 영상을 놓고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우리를 가르치는 안무 선생님은 30대 초반으로 자신의 유튜브 방송을 운영하는데,
화려한 댄스 실력도 대단하지만,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해서 그런지 결혼한 우리가 보기에 선생님 몸매가 너무 예뻐서 칭찬하고 있는 참이었다.
벨리댄스 선생님은 자신이 운영하는 유튜브 구독자가 나날이 늘어서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낸다고 했다.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는 벨리댄스 선생님이 가고 나서 우리는 그날 있었던 작품에 대해서 품평회를 열었다. 작품은 한 달에 한 번씩 바뀌는데, 안무를 짜고 음악을 선별하는 것도 무척 힘든 일이지만 한 작품을 내 것으로 소화해서 무대에 선다는 것은 늘 어려움이 따랐다.
예전에 은숙 언니가 동호회에 나올 때는 근처 공원에 가서 그날 배운 안무를 연습하곤 했는데 은숙 언니가 빠지고 나니 새로 배운 안무를 연습할 기분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난 후 거짓말처럼 은숙 언니가 나타났다.
우리는 너무나 반가워서 서로 얼싸안고 난리를 쳤다. 은숙 언니는 나오자마자 첫마디가, “나 없으니 심심했지.” “응, 언니. 사실 언니가 빠지니까 앙꼬없는 찐빵처럼 아무 맛이 없었어.” 그랬다. 은숙 언니는 늘 가벼운 음담패설도 재미있게 잘했고 분위기를 띄울 줄도 알았기에 우리는 심심할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사실 정희 이야기는 너무 슬프고 마음이 짠해서, 만나고 집에 들어가면 유쾌했던 기분이 한순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래서 한참 갱년기에 시달릴 때는 기분이 자주 다운되기도 했다.
갱년기 우울증으로 기분이 다운이 되고 짜증이 증폭되고 사는 게 시들해진다는
말을 들었지만 실제로 겪어 보니 ‘마음의 감기’라는 말처럼 힘든 것이었다.
아침에 출근하고 늦은 저녁에 들어오는 남편 밥상 차리는 일도 어느 땐 귀차니즘이 발동해서 주부를 벗어던지고 뛰쳐나가고 싶을 때도 있었다.
자식들은 모두 나의 품을 떠나서 자립해서 살고 있는데
남편과 아이들이 떠난 빈집은 적막강산인 날이 많았다.
어느 땐 빈 둥지 증후군으로 힘들어서 어디 가서 하소연하고 싶어도,
하릴없이 집에서 시간이나 죽치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든다는 식으로 매도를 하는 바람에 하루를 그럭저럭 보내고 있을 때였다.
“애들아, 다시 만나니 너무 좋다.”
은숙 언니는 예의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은숙 언니는 사실 성격이 까탈스러운 편이어서 우리 멤버가 되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영란이 아들을 하늘로 떠나보내고, 두문불출하며 동호회에 나오지 않은 시간이 한참 지났다. 그 후 나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평소에 깔끔한 성격의 영란은 저녁이나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하는 주부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목소리가 혀가 꼬여 발음이 불분명했다.
“언니 나 죽을 것 같아서 전화했어요. 이해해요. 새끼를 보낸 어미의 마음을.”
내가 무어라 위로를 건넬 틈도 없이 휴대전화는 끊겼다. 얼마나 힘들면 저녁 12시가 지난 시간에 전화했을까. 마음이 짠했다. 영란은 아들을 의대에 보내기 위해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학원과 집을 오가면서 뒷바라지했다. 모자란 잠을 보충하기 위해 차량 운전할 때면 행여 아들이 깰까 브레이크도 잘 밟지 않은 영란이었다. 오로지 아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포기한 영란은 아들이 학교에 가 있는 동안에는 아들 교과서를 펼치고 미리 예습하고 그것을 요점 정리해서 아들에게 가르쳤다. 대학입시 설명회에는 단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참석해서 모든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했다. 그녀의 정보력은 입시 컨설턴트가 놀랄 정도였다니 아들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었는지 알 수 있다. 영란은 아들을 대학에 입학시키면서 자신을 가꾸기 위해 우리 동호회에 가입한 것이었다. 영란은 수시로 나에게 전화했다.
그녀는 취한 듯 몽롱한 목소리로 자신 말만 쏟아 놓고 전화를 끊었다. 몇 달째 운동을 나오지 않아 궁금하던 차에 우리 삼총사를 대표해서 내가 영란에게 전화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그리고 잠시 후 영란의 친정엄마가 전화를 대신 받더니 지금은 영란이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하면서 영란이 수면제를 과다 투여해서 위 세척 했는데 자꾸만 죽고 싶다고 난동을 부린다는 이야기였다. 그제야 나는 왜 영란이 나에게 전화해서 울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들을 보낸 슬픔 때문에, 영란은 몸도 마음도 너무나 지쳐 있었다. 다음날 친한 회원들과 영란이 입원 중인 병원을 찾았다. 우리는 과일과 음료를 사서 영란이 입원해 있는 병실을 찾았다. 환자복을 입은 환자들이 병실에 줄지어 앉아 있다가 우리가 병실에 들어서자 모두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영란을 마주하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영란은 몇 달 사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두 눈은 초점이 흐려져 있고 입술은 하얗게 변해서 흡사 죽음을 앞둔 환자 같다. 그녀는 초점 없는 눈으로 침대에 누워서 천정을 쳐다보고 있었다. 평상시 생기가 넘치던 얼굴은 사라지고, 입술은 파리하게 변해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영란 씨, 나 알아보겠어? 영란은 한참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통통했던 얼굴은 볼살이 쏙 빠져서 마치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다 맛본 여자처럼 보였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너무나 심했다는 것을 느낀 순간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왜 이렇게 변한 거야, 정말 많이 아픈 거야?” 영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영란의 손은 마치 아이처럼 부드러웠다. 영란의 손이 내 손에 잡히자 따스함이 전해졌다. 영란을 간호하던 친정엄마로부터 영란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영란은 아들을 보낸 후 자다가도 갑자기 한밤중에 밖으로 뛰쳐나가는 일이 생겼고, 지금은 우울증 때문에 수면제가 없으면 잠을 잘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영란을 보고 있으니 내 머릿속에서는 저절로 우리들의 지난 일들이 오버랩되면서 진한 눈물이 앞을 가린다( 200X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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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미경 방장님
행복은 없다
소설
잘 보았습니다
이달의 마지막 날입니다
마무리 잘하시고
즐겁고 행복한 오늘 되세요
집안일 끝내고 다시 들어와 차분하게 읽으니
너무 감동적인 글이네요
처음에는 방장님이 소설가이시니 소설인줄 알았는데
방장님의 실제 글인 것 같아서 지루한줄 모르고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충격적인 내용은 영란씨 아들의 심장마비 사망
사망 소식을 듣는 순간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요
자식을 먼저 보낸 엄마의 마음을 제 친구에게서 보았습니다
그 친구는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요
유학 잘다녀온 아들이 늦은 밤 친구들 부름에 나갔다가
교통사고로 숨진 사건이지요
결국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6개월후 아들 뒤를 따라 갔습니다
조미경님의 글을 읽으니
갑자기 친구가 떠오르네요 ㅡ
가슴이 아프네요
한참을 머물다가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소설을 쓰게 되면서 주위 사람들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의 글은 모두 슬픈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결혼과 이혼 다시 재혼 등으로 행복을 영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저의 소설속 화자랍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행복은 없나
생각을 하면서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과정이 행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괴롭게 살지요
희망을 찾아가는 행복이
삶을 이어줍니다
늘 건행하세요
이 소설은 몇년전에 쓴 작품인데 단편으로 스토리를
잘라 내고 인물을 축소 하였습니다
그리고 스토리를 다시 입혔습니다
행복은 영원하지 않은 것 같아요
행복은없다
흥미있게 잘보고 갑니다
자식 죽음앞에 무너지는 부모 마음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위에 황아라님의 댓글에 자식잃고
어머니가 스스로 모숨을 끊었다는 내용 또한 가슴이 아픕니다
힘내시라고 응원합니다
추천입니다
바다빛님 안녕하세요
저의 주위에는 자식을 앞세운 친구가 두명 있는데
마음이 참 아팠답니다
한 친구는 국내에서 살지 못하고 멀리 필리핀에서 선교 활동 하며 살고
한친구는 아들이 남긴 유복자를 데리고 기도 하면서 살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