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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6일 오늘의 역사
2022년 여자 피겨스케이팅 김예림(단국대)가 국제빙상경기연맹 챌린저 시리즈 우승.
16일(한국시간) 미국 뉴욕주 레이크 플래시드에서 열린 2022 ISU 챌린저 시리즈 US 인터내셔널 클래식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김예림은 기술점수(TES) 70.57점, 예술점수(PCS) 62.75점, 감점 1점으로 합계 132.32점을 받았다.
전날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서 5위를 기록한 김예림은 1등이었던 유영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ISU 주관 국제대회 첫 금메달로, 유영은 120.21점을 받아 합계 183.40점 최종 2위를 기록했다.
2022년 중국 후난성 창사시 지상 42층 높이의 차이나텔레콤 빌딩에서 화재 발생 전소
2020년 최장수 일본 총리 아베 신조 사임
2018년 엘리우드 켑초게(케냐 34세) 제48회 베를린 마라톤대회에서 남자마라톤 세계최고기록(2시간 1분 39초) 세움
2014년 김효주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에비앙 챔피언십 우승
2013년 미국 워싱턴DC 해군복합단지서 총기난사 사망 13명 이상
2011년 중국 쓰촨성 폭우 160년 만에 최대강우량 재산피해 6조원
2009년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신임 총리 취임
2009년 9월 16일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의 일본호(號)가 공식 출범했다. 일본 중의원(衆議院)은 16일 전체회의를 열어 전체 480명의 의원 중 327표를 얻은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민주당 대표를 제93대 총리로 선출했다.
2007년 푸켓에서 여객기가 착륙도중 추락 사고 발생.
2007년 학력 위조 등의 의혹을 받고 있는 신정아 전 동국대학교 교수가 자진 귀국하여 검찰에 연행
2007년 태풍 나리가 한반도를 지나면서 제주도를 비롯한 전라도, 경상도 지역에 많은 피해가 발생
2004년 장쩌민(江澤民) 중국 주석 전격 퇴진, 후진타오가 승계
장쩌민(江澤民)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2004년 9월 19일 폐막한 제16기 제4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4중전회)에서 군사위 주석직을 사임하고 후임 주석직을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가 승계했다. 후진타오 주석은 당권에 이어 군권까지 한손에 장악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중국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했다.
이로써 중국은 제3세대 지도부에서 4세대 지도부로 권력 승계를 완료했다. 이는 중국이 1949년 공산 혁명에 성공한 이후 처음으로 반대파나 지도층에 대한 숙청 없이 이루어진 ‘무혈(無血) 권력승계’였다. 장 전 주석은 임기상 2007년까지 주석직이 보장돼 있었지만 내부의 퇴진 압력이 거세지는 데다 건강상의 이유가 겹쳐 사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중국 공산당 제16기 4중전회는 공산당의 집정능력 강화 방안과 중앙군사위원을 8명에서 11명으로 확대시키는 방안 등을 통과시키는 등 4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이날 폐막했다.
2004년 크리스토퍼 힐, 미국 대사 최초로 5.18 국립묘지 참배
크리스토퍼 힐(52) 주한 미 대사가 광주의 5·18 국립묘지를 참배하였다
힐 대사의 5·18 묘지 방문은 미 대사로서는 처음이다.
힐 대사가 광주에 간 것은 17일 ‘광주 아메리칸 코너 개소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그는 그러나 16일 오후 자신의 수행원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갑자기 부인 패트리샤 와이트로우 힐 여사와 함께 둘이서만 5·18 묘지를 찾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7일 오전 박준영 전남지사와 만난 자리에서 “언론용 이벤트로 만들고 싶지 않아 주위 사람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미 대사관 관계자들이 전했다.
2002년 삼성전자 `나노 메모리` 세계최초로 상용화 발표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 종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2002년 9월 16일로 22개월간의 조사활동을 마쳤다. 인혁당재건위 사건, 서울대 최종길 교수 사건, 장준하 선생 사건 등 현대사에 굵직굵직한 흔적을 남긴 사건부터 노동·학생운동 과정이나 군 복무 도중에 일어난 의문사까지 83건이 유족들의 진정 또는 직권조사 등의 형태로 조사됐다. 의문사위는 이 중 19건을 ‘권위주의 정권 시절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가 직·간접적인 원인이 되어 사망한 의문사’로 인정해 고인의 명예를 회복하고 유가족들의 응어리진 한도 풀어냈다.
33건의 진정사건은 기각됐다. 대부분 단순사고사이거나 민주화운동과 관련이 없는 죽음이었다고 의문사위측은 밝혔다. 1987년 군부대 부재자투표 과정에서 부정선거에 저항하다 상관에 의해 타살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던 정영관 사건은 선임병에게 맞아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 1992년 실종된 노동운동가 박태순씨도 경부선 철로를 걷다 열차에 부딪혀 사망한 사고사로 확인됐다.
2002년 9월 10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 1984년 군 복무 중 발생한 허원근 일병 사망사건과 관련, “허원근 일병이 자살했다.”는 당초 군 발표와 달리 타살됐다는 최종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2002년 11월 28일 국방부 특별조사단이 “사건당일 내무반에서 총기오발은 없었다.”는 요지를 발표, “의문사위가 자살을 타살로 날조·조작해 허 일병 동료 부대원들의 인권을 말살했다”하고 비판했다. 동일 사안에 대해 두 국가기관이 상반된 입장을 취함으로써 국민들의 혼란이 더해졌다.
2001년 아시아 최고령 연극배우로 기네스북 오른 고설봉(89세) 세상 떠남
1998년 주한미군사령관에 페트로스키 중장을 임명
1998년 청록파 시인 박두진 별세
청록파 시인이자 예술원 회원인 혜산(兮山) 박두진씨가 1998년 9월16일 오후 2시 20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2세였다.
1939년 ‘문장’지에 ‘황현’과 ‘묘지송’으로 문단에 데뷔한 박씨는 1946년 조지훈, 박목월과 함께 첫 시집 ‘청록집’을 낸 이후 이들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불렸다. 박씨는 해방 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및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을 지내는 등 한국문학 발전에 크게 공헌했으며 연세대, 우석대, 이화여대, 단국대, 추계예술대 교수 등도 역임해 후진양성에도 남다른 정열을 보였다.
저서로는 시집 ‘오도’를 비롯해 ‘빙벽을 깬다’ 등 다수로 이밖에 수필집 ‘시인의 고향’ ‘산문전집’ ‘햇살, 햇볕, 햇빛’ 등도 남겼다. 박씨는 지난 1995년 신앙시집 ‘폭양에 무릎 꿇고’을 내는 등 노환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문학적 열정을 보였다.
박목월, 조지훈이 떠난 자리를 혼자 지키다 타계한 박두진은 격동의 한국사 속에서 60여 년 간 자연과 사회와 인간을 노래한 우리 시단의 거목이었다.
1993년 북한. 사정2천km 미사일 신형 `노동2호` 개발
1992년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이동복 대변인 훈령조작
1986년 남아프리카공화국 킨로스 금광에 큰 불 사망 177명
1983년 서울지하철 2호선 을지로구간 개통
서울지하철 2호선 을지로구간이 1983년 9월 16일 오전 10시 개통, 운행에 들어갔다. 이날 개통된 을지로구간은 을지로입구~을지로~왕십리~성수동을 잇는 8km로 1980년 2월 착공, 3년7개월 만에 완공됐다. 이 구간이 완공됨으로써 지하철 2호선은 총 48.8km가운데 동쪽 27.8km가 개통됐다.
을지로구간에는 을지로입구, 을지로3가, 을지로4가, 동대문운동장, 신당, 상왕십리, 한양대, 뚝섬역 등 9개역이 새로 들어섰다. 을지로구간 개통과 함께 시청앞~동대문운동장간 3.3km의 지하보도겸 지하상가도 동시 개통됐다. 지하보도에는 냉-난방시설과 환기시설이 완비됐으며, 수세식화장실도 갖춰졌다. 을지로구간의 도시가스 및 상-하수도관은 모두 지하에 매설됐다. 을지로구간은 모두 10개 공구로 나뉘어 10개 건설회사가 참여, 총공사비는 1천8백50억원이 들었다.
1982년 북한 김일성 중국 방문
1982년 레바논 팔랑헤당 기독민병대가 팔레스타인인 2,750여명 이상 살해(사브라.샤틸라 학살)
1982년 마르코스 필리핀대통령 미국방문
1981년 이집트, 소련기술자 1천5백명 추방
1980년 금성사, 국내처음으로 태국과 TV생산기술 수출계약 체결
1980년 `한국미술5000년전` 미국 보스턴에서 개막
1978년 이란전역 진도 7.7 강진 사망 2만5천여 명 100여 마을 폐허화
1978년 요한 바오로 2세 새 교황 뽑힘
1977년 서울 시내 52개 국교생 7,800명 급식 먹고 집단식중독
1977년 마리아 칼라스 사망
‘오페라의 여왕’으로 군림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마리아 칼라스. 그가 1977년 9월16일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54세로 쓸쓸하게 숨졌다.
후두부분에 생긴 피부근염이 사인(死因)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를 떠올렸다. 오나시스가 9년간에 걸친 칼라스와의 사랑을 접고 고(故) 케네디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과 결혼(1968년)한 뒤부터 칼라스의 목소리에 이상이 생긴데다, 한때는 오나시스를 증오했지만 막상 그가 죽자(1975년) 은둔과 실의의 나날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가난한 그리스계 이민자의 딸로 미국에서 태어난 칼라스가 세계적인 프리마 돈나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1947년, 당시 이탈리아 라 스칼라의 제왕이었던 툴리오 세라핀의 눈에 들면서였다. 오페라광이면서 부호였던 30년 연상의 남편을 만난것도 행운이었다.
미성도 아니고 어딘지 쉰듯한 목소리를 가진 칼라스가 ‘세기의 목소리’라는 찬사를 받기까지에는 뛰어난 가창력과 연기력도 크게 작용했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집념과 노력이 뒷받침됐다. 칼라스는 무대를 위해서라면 몸무게를 30kg 이상 줄이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였고 준비가 미흡하면 욕을 먹으면서까지 무대를 포기했던 완벽주의자였다. 한 연출가는 ‘칼라스 이전(Before Callas)’은 오페라 역사에서 기원전(BC)이었다는 말로 그의 위대함을 표현했다.
1975년 파푸아뉴기니, 호주로부터 독립
1974년 북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가입
1974년 검찰, 밀수보석 거래 상류층 부인 35명 기소
1973년 34세 미국여인 6쌍동이 제왕절개 후 분만
1970년 양산군서 버스추락. 12명 사망, 44명 중경상
1964년 7·29 태풍으로 조난됐던 어부 219명 북한서 송환
1963년 말레이지아연방 발족
1961년 美 `네바다`서 두번째 지하핵실험 실시
1958년 미국잠수함서 유도탄 발사에 성공
1955년 아르헨티나 육-해군 무장폭동
1950년 국군ㆍ유엔군 낙동강전선 총반격
6ㆍ25 발발과 함께 후퇴를 거듭해온 유엔군과 국군이 낙동강전선에 배수의 진을 친 것은 8월5일이었다.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보루였다. 경상도 지역을 제외한 남한 전역을 장악한 북한군은 부산까지 점령할 태세로 8월8일부터 총공세를 시작했다. 미군은 왜관∼창녕∼마산선을 담당했고 한국군은 왜관∼낙정리(의성군)∼영덕선을 지켰다.
다부동과 포항에서의 치열한 전투에 이어 9월4일부터는 영천에서 밀고 당기는 대혈전이 시작됐다. 영천은 대구ㆍ포항ㆍ경주ㆍ안동을 이어주는 교통의 중심지로 낙동강 공방전의 최후 결전장이었다. 영천이 뚫릴 경우 미군이 한국군 2개사단과 민간인 10만명을 괌이나 하와이로 철수할 계획을 극비리에 세워놓을 만큼 영천전투는 건곤일척의 승부처였다.
그러나 9월13일 우리 군이 마침내 영천을 점령함으로써 계획은 취소됐고 대역전극의 발판이 마련됐다. 절체절명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날, 7만5000명의 유엔군도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부산항을 떠났다. 9월15일 인천으로부터 낭보가 전해지자 유엔군과 우린 군은 총반격을 시작했다. 9월16일이었다.
1950년 북대서양이사회에서 프랑스-독일의 재군비를 반대
1947년 인도네시아 독립선언
1945년 소련정치국 38선이북 군정 공표
1945년 한국민주당 창당
1944년 소련-몽고 휴전협정 조인
1940년 미국, 선발징병법 성립
1939년 일본-소련 정전협정
1936년 소설가 심훈 사망
소설가 심훈이 그의 영원한 대표작인 된 `상록수`의 출판관계로 상경했다가 1936년 9월 16일 불의의 장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01년 서울 노량진 흑석동에서 태어나 3·1운동에 가담하면서 민족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였다. 심훈의 문학적 활동은 3·1운동에서 시작된다. 당시 경성제일고보 4학년에 재학중이던 그는 3·1운동에 가담해 투옥됐다. 출옥후 중국으로 유학 길을 떠난다. 처음에는 일본으로 가고자 했으나 배일 사상에 충만된 집안의 반대로 좌절되고 말았다. 만주 지강대학에서 수학하던 그는 훗날 발표될 `동방의 애인` `불사조`등 당시의 생활을 소재로 한 작품을 집필했다. 또한 카프(KARF)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가 그 이듬해에 이탈하기도 했다.
그러던 1925년, 영화 `장한몽`에 이수일 역의 후반부를 대역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어 이후 이듬해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 소설인 `탈춤`을 연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영화 공부를 한다. 귀국 후 자신이 원작·각색·감독한 영화 `먼동이 틀 때`가 단성사에서 개봉되는 등 영화에 대한 열정을 쏟아냈다.
1932년 고향 충남 당진으로의 낙향과 더불어 소설 집필에 전념한 결과 `영원의 미소` `직녀성`(1934) 그리고 `상록수`(1935)등 세 장편을 내놓았다. 특히 이 기간 동안 그는 실제 농촌에 살면서 농민의 삶을 접하고 또한 당시 그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공동경작회` 회원들과 교류하면서 우리 근대문학의 대표적인 농민소설로 손꼽히는 `영원의 미소`와 `상록수`를 썼다.
1935년 동아일보 장편 현상 모집 당선작인`상록수`는, 브나로드 운동의 시범작으로 발표된 이광수의 `흙`의 시혜적 태도를 뛰어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작가 자신이 당시의 현실을 비관하고 통속소설이 만연하는 풍조에 편승할 수도 있었지만 심훈은 결코 그렇지 못했다. 그는 저속한 통속소설로만 낙착되지 않는 경건한 항일정신과 민족의식의 작품화를 기도했다. 국가보훈처는 심훈 선생을 2001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927년 중국 국민당 대동단결 성립
1915년 동화작가 강소천 태어남
1908년 제너럴 모터스사 설립
1887년 현대음악의 어머니라 불리는 나디아 불랑제 파리에서 태어남
1882년 박영효 수신사, 일본서 최초의 태극기 게양
박영효가 일본 기선 메이지마루 호를 타고 수신사로 일본으로 건너가던 와중에 정식으로 사용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고종이 태극 팔괘도 대신 태극기의 원안을 고수하라고 박영효에게 명령을 내렸고, 배 내부에서 서양인들과 논의하여 신뢰성을 강화한 것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한편 박영효는 사화기략에서 이때 메이지마루호 선장인 영국 사람 제임스 역시 8괘는 너무 많고 복잡하다는 이유로 대각선의 4괘만 남기라고 건의하였고 박영효도 받아들였다고 주장했다. 아무튼 그렇게 하여 박영효 일행은 1882년 9월 25일 일본 숙소에서 태극기를 게양한다. 이때의 4괘 태극기 역시 일본 신문에 실린 그림과 박영효가 귀국한 뒤 고종에게 올린 서한의 내용이 다른 등 태극기의 정확한 도안은 확정되지 못하다가 일단 1883년 1월에 공포된다. 그러나 최초 태극기를 제작한 이응준 태극기가 알려지기 전에는 1882년 일본에 3차 수신사 파견시 박영효가 처음 만들었다는 오해가 있었다.
1882(조선 고종 19) 척화비를 전국에서 철거
1846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순교
한국 최초의 신부이자 천주교 103인 성인 가운데 한사람인 김대건 신부가 1846년 9월 16일 순교했다.
김 신부는 1822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도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으며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 서소문밖에서 순교했다. 15세인 1831년 모방(Maubant)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로 가 그곳에서 중등과정과 철학, 신학과정을 이수한 그는 1845년 1월 귀국해 천주교회를 재수습하고, 상해로 건너가 만당신학교 교회에서 주교 페레올의 집전하에 신품성사를 받고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됐다.
1846년 5월 서양성직자 잠입해로를 개척하다가 순위도에서 체포되어 군문효수형을 선고받고 새남터에서 처형됐다. 그의 시체는 교인들에 의해 비밀리에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에 안장되었다. 1925년 로마교황 비오11세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고, 1984년 성인으로 선포됐다.
1810년 멕시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1736년 독일 물리학자 가브리엘 파렌하이트 사망
1620년 영국 청교도를 태운 메이플라워호 영국 출발
1597년 명량대첩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9월 16일 이순신(李舜臣)이 명량(울돌목: 전라남도 진도와 육지 사이의 해협)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한 해전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원균(元均)이 거느린 조선 수군은 대부분 패하였다. 이에 유성룡(柳成龍) 등의 간곡한 건의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된 이순신은 휘하 군사들의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일본수군이 133척의 배를 이끌고 조선에 침입할 때, 이순신 장군이 명량의 거센 조류를 이용하여 격퇴한 전투. 당시 조선의 전력은 원균의 패전으로 12척의 병선밖에 남지 않았으나, 이순신은 뛰어난 전술로 적에 대항했고, 일본군 장수 구루시마의 목을 베어 사기를 꺾으면서 일본 병선 31척을 격파했다. 이 전쟁은 모함을 받아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가 되어 승리를 이끈 해전이며, 정유재란의 흐름을 바꾸게 되었다.
1418년 조선, 월식 발생
1413년 조선시대 신분 증명서인 호패제도 실시
1413년 태종은 전국에 호패법을 실시했다. 나라의 인구를 정확히 파악하고, 신분을 증명하는 것은 물론 군사를 모으거나 나라의 큰 공사를 할 때 일할 장정들을 쉽고 빠르게 모으기 위해서였다. 호패법에 따라 왕실과 조정의 관리에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16세이상의 모든 남자는 호패를 차고 다녀야 했다.
오늘날의 주민등록증은 다 똑같이 생겼지만, 조선 시대의 호패는 신분에 따라 달랐다. 양반은 상아나 뿔로 만든 호패를, 상민은 나무로 만든 호패를 찼다. 또 호패에는 이름과 태어난 년도, 관직, 신분 등이 새겨져 있었는데, 노비의 경우에는 얼굴 빛깔,키, 수염의 있고 없음까지 자세히 기록해야 했다
1179(고려 명종 9) 경대승 도방 설치
도방을 처음 조직한 사람은 1179년 정중부 일파를 제거하고 집권한 경대승이었다. 그는 정권탈취 과정에서 대부분의 무인들을 적으로 돌려야 했기 때문에 신변보호를 위하여 결사대 백수십 명을 불러모아 사제에 머물게 하고, 이를 도방이라 불렀다. 도방의 임무는 무인집정의 신변을 호위하고 그 집권체제를 무력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도방은 1183년 경대승이 죽자 곧 폐지되었는데 최충헌에 의해 그전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규모로 재건되었으며, 이후 최씨정권을 지탱하는 중요한 무력기반이 되었다. 도방과 같은 사병의 확충은 국가의 공적인 병제가 무너지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도방은 무인집정의 사병집단이었기 때문에 무인정권의 몰락과 더불어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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